영과 진리 로 예배 | 김기석목사 요한복음 13강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최근 답변 10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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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목사 요한복음 13강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한복음 4:16 – 26
성경읽기는 지루하다? 성경공부는 어렵다? No!\r
\r
좋은 선생님과 좋은 학생들이 함께 하는 즐거운 성경공부시간!\r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CBSBible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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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은(요 4:23~24)? – 기독일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그래서 십자가에 실현된 대속구원의 은혜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신자가 그 구원에 감사하고 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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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8/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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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하다 < 일반칼럼 < 칼럼 < 기사본문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영과 진리란 두 가지를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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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scoramdeo.com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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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 < 신앙의 기초 ... - 크리스찬저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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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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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린 예배자 (1) :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

먼저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in spirit, 영적인 예배를 뜻한다. 헬라어로 프뉴마. 프뉴마는 영, 영혼, 성령을 뜻하는 단어다. 그래서 영으로 드리는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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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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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Faithlife Sermons

우리가 기존에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다’라고 말할 때는 주로, 예배의 태도과 관련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신령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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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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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 개혁정론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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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실제” – 에큐메니안

우선 영으로 드리는 예배, 영은 단순히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영은 아무 영이나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영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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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비교 – 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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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 당당뉴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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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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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8 / 요 4:23-24 /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1) – 새벽공과

너희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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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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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목사 요한복음 13강 \
김기석목사 요한복음 13강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성경공부는 CBS성서학당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영과 진리 로 예배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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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5.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z5pCEriZi8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뜻은(요 4:23~24)?

[질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한 신학자는 ‘영 따로 진리 따로“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신학자는 영과 진리는 히브리 원어로 뗄 수 없어서 ”진리 안의 영“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뭐가 정답인지 몰라 여쭙니다.

[답변]

질문은 두 가지로 나눠지네요. 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부차적으로 영과 진리가 각기 다른 뜻인지 연결된 뜻이지 궁금해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의 뜻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지금도 또 다른 남자랑 사는 한 불쌍한 여인을 만나서 천국복음으로 전도했습니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에게 메시아가 오셨다고 전파함으로써 주님께 받은 은혜에 반응했습니다. 상기말씀은 그런 전도과정 중에 참된 예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이 내린 결론입니다.

여인이 자기 과거는 물론 현재의 형편까지 꿰뚫어 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평소에 궁금해 하던 예배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만 한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드리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21절)고 대답했습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했으니 지금껏 사마리아나 유대에서 드려졌던 예배는 둘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열납하는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율법이 규정하는 최소한의 의무사항만 채우는 형식적 가식적 예배였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 예수님이 마치 유대의 예배는 옳은 것처럼 이어서 말씀하셨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북왕국은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따로 오경을 저작했으며 그리심 산에도 별도의 성전을 세웠기에 구약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 성전 한곳에 모여서 예배드리라고 명령했고, 또 메시아가 유대 다윗 가문을 통해 나온다고 약속했습니다. 남왕국은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설명한 것뿐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며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고 했으니 현재 남왕국의 예배도 참된 예배가 아닌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마리아든 유다든 그때까지 드려진 예배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한마디로 동물 제물로 죄 사함을 받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는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용서로 죄 지을 때마다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럼 새롭게 드려야 할 예배는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장소, 인종, 나라, 문화, 종교 등의 구별 없이 모든 열방으로 베풀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대속구원이 완성된 후에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참 자녀가 된 자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고 또 그런 예배만 열납하실 것입니다.(21-24절)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1-14)

영과 진리란?

영과 진리의 의미에 대해선 질문하신 대로 원어의 문법적 구조부터 살펴봅시다. 우선 ‘영’과 ‘진리’는 등위접속사로 연결되었기에 각기 다른 뜻입니다. 영어성경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in spirit and in truth” 혹은 “in spirit and truth”로 번역되었지 “in spirit of truth”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확대해서 “진리 안에서 영”이라고 해석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예배를 드릴 자는 당연히 십자가 복음의 참 진리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으로 예배드려야 하니까 말입니다.

따라서 “영과 진리로”라는 문구도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 본문대로 “영과 진리로”는 그 둘이 예배의 수단 내지 통로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영과 진리 안에서”로 번역해도 되는데 예배드리게 된 근거와 범주라는 의미가 됩니다. 어쨌든 본문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할 주체를 사람이라고 밝혀 놓았으니까 둘 다 예배자가 예배드리는 마음의 자세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일차적인 뜻은 사실은 단순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유일한 청중인 그 여인은 아직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있고 설명해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그녀가 질문한 의도와 영적수준에 맞춰 대답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 때’는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령의 권능으로 공사역을 수행하고 있는 당시이지 십자가에 죽으신 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율법의 진리를, 성전예배를 어떻게 드려야하는지도 포함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제정한 정신과 목적에 비추어서 정확하게 가르쳐주었습니다.(마5:23,24 7:21,22 막7:11 등) 실제로 당신께서 온전히 준행하는 본도 보여주었습니다.(성전정화 사건)

따라서 당시의 형식적 외식적 예배를 당장 중지하고 지금이라도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영으로 즉, 진실한 마음의 중심(원어로도 성령이라고 보기 어렵고 단순히 이런 뜻임)을 다 바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로 즉, 율법 특별히 제사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아는 차원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의 신약 신자에겐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순전한 관계를 맺고서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와 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그래서 십자가에 실현된 대속구원의 은혜로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신자가 그 구원에 감사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기로 헌신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예수로 인해서 새로워진 영으로만 교제는 물론 예배가 가능합니다. 십자가 구원 진리를 모르고 그 은혜로 영이 변화되지 않은 자가 드리는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고 당연히 하나님에게 열납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모든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렇듯이 종말론적으로 확대 적용해도 됩니다. 예수님 오신 이후의 모든 예배에는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한 대로(앞에 인용한 말씀)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천국의 영원한 성소가 예표 상징 구현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드리는 예배는 물론 모든 신앙 행위에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으로 실제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요컨대 예수와 연합한 신자가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living sacrifice)로 바치면서 음란한 이 세대와는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2021/9/17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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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호

영과 진리로 예배하다

▲ 정현구 목사 /서울영동교회

성경은 우리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합니다. 이 구절이 이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 내용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령’(종교적 분위기)과 ‘진정’(우리의 정성)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주님이 예배에서 강조하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바로 알고 예배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예배하는지를 잘 모르고 열심히 예배하는 것이나, 참 하나님을 그릇되게 예배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의 대상이 아버지이시며 또한 영이시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시요, 특정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어떻게 예배하는 것이 ‘참되게’ 예배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3-24)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영과 진리란 두 가지를 가지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로 이끄시는 영 안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로 이끄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는 예배라면, 우리는 참된 회개를 드리게 됩니다.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예배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이끄시는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왕에 대한 경배가 진정한 경배가 되려면 순종의 태도가 필수입니다. 이것이 없는 경배는 경배가 아니라 왕에 대한 모욕일 뿐입니다.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회개하는 예배, 순종하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예배의 기준

요한복음 4:23-24은 신약시대의 참다운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유일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위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는 말씀을 교회 주보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영과 진리” 대신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되어 있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배할 때 정성을 다하고 엄숙하게 드리는 것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께서 된장찌개를 좋아하신다고 생각해 주일마다 정성스레 된장찌개를 끓여 드렸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김치찌개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아무리 정성과 노력을 다해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라야만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즉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이기에, 여기에 맞추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요한복음 4:24의 “예배할지니라”는 “예배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어로 “must”로 표현되어 있을 만큼, 반드시 그렇게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영과 진리에 대한 예배를 정확히 알고 이해해야만 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예배할 때”를 언급하시며, 참된 예배는 어떤 장소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사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대속 제물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필요치 않고 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빌 3:3)고 하며, 당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향해 성도의 참다운 특징들을 말했다. 참다운 성도는 첫째,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는 자이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자이며,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이다. 바울이 언급한 “성령으로 봉사하며”는 헬라어 원어성경에선 라트레우오(latreuō, 하나님께 봉사하다, 즉 종교적인 경의를 표하다, 섬기다, 예배하다)로 “성령으로 예배하며”를 뜻한다. KJV 영어성경에는 “worship God in the spirit,” ESV에는 “worship by the Spirit of God”로 번역되어 있다. 즉 참다운 성도는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를 뜻한다.

칼빈의 예배 핵심 역시 성령의 임재였다. 그는 언제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과 성경을 낭독하기 전, 그리고 성찬을 집례하기 전에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예배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시편을 통한 예배를 드리고 강조했다. 시편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다. 즉, 성령께서 주신 것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다.

부흥과 예배에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책 『부흥』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반면 신앙이 회복될수록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예배에 형식이 필요하지만, 예배 형태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 된다면, 성령의 역사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예배는 형식적이 되고 영적 침체기에 빠져들지만, 부흥이 일어나면 성령께 속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쇠퇴하는 20세기 영국교회들을 향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예배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참고로, 2005년 England Church Censu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라고 밝힌 사람이 전체 인구의 71%였지만, 실제로 주일마다 교회 나간 사람은 1979년에는 12%, 1989년에는 10%, 2005년에는 6.3%로 계속 감소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 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라고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을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 합니다. (…) 더 나아가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해 모든 일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지 모두 짜여져 있습니다. (…)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순서지에 적힌 대로 하라고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한 다음 12시에 축도를 합니다. (…)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이는 당시 영국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형식적이지 않았다. 성령에 의해 예배가 드려졌기 때문에 즉흥성이 있었고,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배가 형식적이 되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게 된다. 형식적인 예배는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멀다.

존 파이퍼 목사도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예배의 의식적인 부분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배는 절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암송하고, 설교하고, 먹고, 정결하게 하는 의식들”이라며, 파이퍼 목사는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 될 수 있다.”라고 우려한다.

성령에 의한 예배는 저절로 드려지지 않는다. 그런 것이라면, 칼빈이 예배 중에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를 세 번이나 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배의 형식과 의식이 성령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성경은 예배의 순서대로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우병훈 교수

(고신대, 신학과)

(요 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나 대화를 하신다. 그 여인은 벌써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사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닌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잘못으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아니면 남성위주 사회의 희생으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여인은 분명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었고(6-7절. 대낮에 물을 길으러 감), 또한 내적인 갈급함이 있는 사람이었다(15절.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이 여인과 대화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어떤 이는 전도, 어떤 이는 대화의 기술, 어떤 이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이 대화를 주목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 중에 하나는 바로 예배에 대한 것이다. 대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참된 예배에 대해 주제가 좁혀진다. 사실 예수님은 예배라는 주제가 나올 때까지 대화를 계속 이어가다가 그 주제가 나오자 일종의 강설을 베푸신다(21-24절).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참된 예배자와 참된 예배, 바로 그것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가능해졌다. 이것이 이 본문의 참주제이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23-24절이고, 그 중에서도 “영과 진리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말씀이 핵심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된 것을 보더라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래의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의 의미를 알기 위해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1)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한다(요 4:24). “영”이라는 말은 “빛”(요일 1:5)이나 “사랑”(요일 4:8, 16)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영”이라는 말은 설명하기 힘든 용어이다. 그것이 “인간의 영”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성령”과 동일시 할 수도 없다. 분명히 성령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성령이다.”라고 성경은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영”을 부정신학의 방법으로, 즉 “무엇무엇이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곤 했다. “영”은 물질이 아니며, 복합물이 아니며, 보이지 않으며, 육체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은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영”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지닌다. “영”은 인간과 대비되며(요 3:6), 생명을 주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분이시다(요 1:18). “영”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으나 소리는 들리며 그 효과는 확실하다(요 3:8). “영”의 가장 중요한 작용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며, 새 생명의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하는 사역이다(요 3:5, 7:38-39).

따라서 “하나님이 영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분명히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2)

둘째로,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도 역시 설명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진리 안에서”라는 말이 “영 안에서”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3)

참된 예배는 성령의 은사로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진리를 알 때에 가능하다. 그렇기에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은 종종 “진리의 성령”이라는 표현을 쓴다(요 14:17; 15:26; 16:13; 그리고, 요일 4:6; 5:6; 살후 2:13 참조).4)

참된 예배는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예배 장소나 예배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참된 예배의 본질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중심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이다.5)

셋째로, 이러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다.

참된 예배는 삼위일체적이다. 참된 예배란 그 대상이 영이신 하나님이시며, 그 시작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에 있고, 그 성격은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것으로 특징 지워지는 예배이다.6)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게 되며 새 생명의 활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사모하며, 그 진리를 들을 때에 기뻐한다. 그들은 성령의 활동적인 역사를 그 영혼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 4:23-24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삼위일체적인 예배이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가능해졌다(요 4:25-26).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예배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복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러한 특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공예배에서 가정예배에서 개인예배에서 그런 특권을 감사히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런 성도들을 간절히 찾고 계신다(요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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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실제”

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한복음 4:19~24/새번역)

수없이 들었고 외울 만큼 익숙한 말씀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떻게 드린다는 뜻입니까? 너무 익숙한 말이지만, 익숙한 만큼 뜻이 명확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대략, 진심을 다해 드리는 예배 정도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맥락 안에서 영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뜻을 깨닫고 몸으로 익힐 때, 참 예배는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 영으로 드리는 예배, 영은 단순히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영은 아무 영이나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영은 특별히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악한 영, 미련한 영, 세속의 영을 따라 마음을 다해서야 어찌 예배이겠습니까. 두려움의 영, 집착와 욕망의 영에 붙들려 최선을 다한다면 어찌 참된 예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순간, 자신의 영이 어떤 상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야 합니다. 옷을 살피고 머리스타일을 살피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과 영을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실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주신 성령께 오롯이 맡기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 단해감리교회 앞에 뜬 쌍무지개 ⓒ하태혁

하나님 주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진리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철학이 이 단어의 의미를 어렵고 부담스럽게 만든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있는 그대로를 진실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흰색을 하얗게, 검은 색을 검게 보면 그 역시 진리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마음에 찾아오면,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진실을 바라보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를 해도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와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오늘 본문 말씀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때는 언제라고 하셨습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고 있는 “지금”,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성전에 찾아가는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닙니다. 지금 이 만남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주일의 하루, 주일날 예배시간만일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칠 일, 365일의 모든 지금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마주한 바로 지금, 주님께서는 성령의 가득하십니다.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이방민족과 피가 섞인 그들을 천시했습니다. 게다가 랍비가 여자와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여인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가득하신 주님의 눈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상종 못할 부정한 사람, 여자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한 영혼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눈이 열린 신앙인의 보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지금 그 자리에 함께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유대인들의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정한 사람, 부정한 사람을 나눠 차별하지 않습니다. 죄의 많고 적음을 저울질 해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 그대로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보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바로 이 모습이 아닐까요? 언제든 바로 지금, 앞에 있는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 그대로 사랑하는 예배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구별하여 드리는 예배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그리심산과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를 다 폐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구별된 하루, 특별한 공간의 예배를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일상이 모든 공간, 모든 시간으로 확장시키신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라면, 일주일의 하루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월~토요일 모든 날로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렇게 일상이 곧 예배가 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찾으시는 예배자입니다. 그렇게 예배드리는 신앙이라면, 교회에 나와서 특별한 날에 드리는 예배 형식에 갇힐 리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이 보여주시는 진리를 따라 자유롭게 드릴 것입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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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개역개정 하나님은 영이시 니 예배하는 자 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 원문보기

개역한글 하나님은 영이시 니 예배하는 자 가 신령과 진정으 로 예배 할찌니라 원문보기

공동번역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 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 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 드려야 한다.” 원문보기

새번역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 은 영과 진리로 예배 를 드려야 한다.” 원문보기

현대인의성경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예배하는 사람은 영적인 진실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원문보기

新共同譯 神は 靈である. だから, 神を 禮拜する 者は, 靈と 眞理をもって 禮拜しなければならない. 」 원문보기

NIV God is spirit, and his worshipers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원문보기

KJV God is a Spirit: and they that worship him must worship him in spirit and in truth. 원문보기

NASB “God is spirit, and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원문보기

新改譯 神は 靈ですから, 神を 禮拜する 者は, 靈とまことによって 禮拜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 」 원문보기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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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홈 > 영성 > 김기석 설교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당당뉴스 | [email protected] 입력 : 2020년 05월 10일 (일) 13:17:01 [조회수 : 2174]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요4:19-26

(2020/05/10, 부활절 제5주)

음성으로 듣기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나님이 일하신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길고 긴 격절의 시간을 건너 우리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얼싸안고 정을 나누진 못하지만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신경림 선생은 ‘파장罷場‘이라는 시에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으키면/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지금부터 50년 전의 풍경이긴 합니다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0주 동안 영상예배를 인도하면서 제 마음에 늘 떠올리던 광경이 있었습니다.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던 다니엘입니다. 그는 왕 이외의 신들에게 간구하는 자들을 사자굴에 던지겠다는 왕의 지엄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가정에서 화면을 열어 드리는 예배를 다니엘의 기도와 연결시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비감스러웠습니다.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시137:1)고 고백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의 처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왜? 서둘러 교회 오지 않아도 되고, 편안하게 집에서 예배드리니 좋기만 하더구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어느 해외 신문 만평은 격리생활에 익숙해진 아무개 여사가 모처럼 예배당에 참석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푹신한 슬리퍼를 신은 그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머리에는 그립을 말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서다가 ‘아차’ 싶은지 당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그런 분이 안 보여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예배드리는 마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독일말로 예배를 뜻하는 단어는 Gottesdienst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뜻의 ‘Gott’와 ‘섬기다’라는 뜻의 ‘dienen‘이 결합된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예배라는 말일 겁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님은 이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루터가 이해하는 고테스딘스트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Gott)이 일하신다(dienen)는 뜻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적 예배란 은총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출발하여, 인간이 그 은총에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하는 상호 소통의 과정”(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 있는 사람, 2017년, p.89에 나오는 역자 주35)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자 선물입니다. 물론 온전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쿵’ 하는 장단에 우리가 ‘더쿵’ 하고 반응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장소가 아니라 때의 문제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의 한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마을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살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마주침과 대화,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열린 사마리아 선교의 가능성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햇볕 때문에 아무도 우물을 찾지 않는 정오 무렵 여인은 홀로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늘 우연처럼 찾아옵니다. 존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극적이지는 않아도 우리 삶도 그런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을 통해 변전을 거듭합니다.

늘 헛헛함에 시달렸던 그 여인은 예수를 만나 가슴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여인은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범상한 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메시야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탐색의 과정 가운데 여인이 주님께 여쭙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4:20)

여기서 말하는 ‘이 산’은 요단강 서안 나블루스 지역에 있는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해발 800미터 쯤 되는 산으로 에발산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이 두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이 지역은 또 야곱에 대한 기억이 새겨진 장소인 베델과 세겜에서 가까웠습니다. 베델은 야곱이 형을 피해 달아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세겜은 근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정착생활을 했던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차별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그 성전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문화적·종교적 관습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길들여진 것입니다.

바른 예배 장소를 묻는 질문에 예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배드리기에 합당한 ‘장소’를 묻는 질문에 주님은 ‘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4:21) 예배를 예배되게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때’입니다. 때를 나타내는 헬라어 호라hora는 자연법에 따른 특정한 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결정적 시간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혹은 마음과 만나는 그 결정적 시간이야말로 예배의 순간입니다. ‘예배하다‘는 뜻의 프로스키네오proskyneo는 ‘누구의 손에 입을 맞추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거룩함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털썩 무릎 꿇다

나찌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가 종전과 더불어 석방된 오스트리아 의사 빅터 프랭클이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 지옥과도 같은 수용소에서 석방된 후에 벌어진 일을 들려줍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종달새가 푸드득하니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주위 몇 마일 안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갑자기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마찬가지였지만 ─ 있다면 내 마음 속에 울려나오는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저에게 응답을 하셨나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두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또 그와 같은 한 마디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이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옮김, 청아출판사, 2001년, p.149-150)

정경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그는 호젓한 들판을 홀로 걸었습니다. 몇 년 동안은 꿈에도 생각해볼 수 없었던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두려움의 먹장구름이 걷히자 세상이 온통 아름답고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인간은 그리도 슬프고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자연은 무심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득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무릎을 털썩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비좁은 수용소에서 바쳤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 것만 같았던 하나님이 그를 감싸 안고 계셨고, 그의 든든한 설 땅이 되어 주셨음을 자각하는 순간, 뭔가 신령하고 압도적인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체험 이후 그는 고단한 현실을 딛고 일어설 힘을 얻었습니다.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던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털어내며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에 오를 힘 말입니다. 예배의 ‘때’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인위적으로 노력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조장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어느 순간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이것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체험이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은 여인에게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4:23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 번역은 이것을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예배를 드리는 이가 가져야 할 진실하고 애틋한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이 본문에 대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영’은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셨던 생수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과 접속시켜줍니다. 그 마음에 감득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입니다.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어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느끼고 그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참된 이치’를 뜻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기 욕망을 내려놓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뜻이 아닐까요? 예배를 잘 기획하고, 각본에 따라 정밀하게 수행하는 것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물론 예배는 잘 준비되어야 하지만 본과 말을 뒤집으면 안 됩니다. 모처럼 현장에서 속개되는 이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끼리 즐겁고 반가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그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는 예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귀를 알아들었을까요? 아직도 미심쩍은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인은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인은 아직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눈이 없습니다. 메시아의 현실은 저 먼데 어디 있는 것이지 자기 눈앞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즉각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메시아는 사람들을 속박에서 풀어주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입니다.

예배당에서의 예배는 구체적 삶의 자리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성화하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등불 하나가 천년의 어둠을 밝힌다(一燈可破千年暗)는 말이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늘빛을 가져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이러스는 소리 없이 퍼져나가 우리 삶을 제약하지만, 우리의 선한 뜻과 의지가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퍼져나가 세상 구석구석을 채울 때 삶이 아름다워질 겁니다. 주님이 앞서 가시니 우리가 뒤따라야 합니다. 한 주간 동안의 우리 삶이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저작권자 © 당당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당당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118 의견나누기 ( 1 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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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웅석 (175.223.14.123) 2020-05-15 18:41:22 한국교회가 이렇게 썩었어요?

놀랬습니다.

살아 남으시길 기도하고 원합니다.!!! 리플달기 ▼ 0 0 신문사소개ㆍ기사제보ㆍ광고문의ㆍ불편신고ㆍ개인정보취급방침ㆍ청소년보호정책ㆍ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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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8 / 요 4:23-24 /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1)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1)

요 4:24-26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요 4:24-26 /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 25) 여자가 말하였다.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모든 일을 우리에게 다 알려 주실 것입니다’ 26)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영과 진리는 분리가 불가능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24a)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표현은 단순한 문장이지만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영’은 헬라어로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는 바람, 호흡, 생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람은 실체가 없고, 잡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은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은 형제가 없는 무형적 존재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영역 너머에 계십니다. 신학자 판넨베르크의 표현처럼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과 만물을 끌어가는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라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b) 예배는 영적 행위이기에 영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하면 충분할 텐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아’는 은폐된 것을 들춰내는 힘, 또는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자연과학은 진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은폐된 것을 밝혀내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참된 것입니다. 진리를 얻으려면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영을 비이성적인 현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건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영은 무조건 믿는 것으로 경험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경험됩니다. 영과 진리는 서로 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신 것은 무아지경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예배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라(25-26) 사마리아 여자는 메시야가 오면 모든 의문점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는 아직 눈앞에 계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 ‘내가 그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표현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빛이다. 나는 생명의 양식이다.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포도나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그라’는 말은 마치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온 존재를 기우려 너의 음성을 듣고 있다. 나는 너를 단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너의 아픔을 먼저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적용: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치지 않고,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자기계시 앞에서 진실한 신뢰와 의존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평소 좋아하던 만화가에게 사인이 담긴 그림을 선물로 받은 아이가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1분 만에 그리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그러자 만화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때까지 30년이 걸렸단다.” 길바닥의 야생화도 한 송이의 꽃을 위해 비바람을 견디며 필사적으로 뿌리와 줄기를 내뻗습니다. 하물며 사람이 꽃피운 노력의 결과는 단순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일에는 반드시 자신을 바치는 헌신과 피나는 노력이 서려 있기 마련입니다.

< 설 교 >

에배드리는 태도는 삶의 태도입니다

김남준 목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모든 죄인들의 마음속에는 공통된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에 자연스러운 발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자하는 열망이 없다면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마리아 우물가에 유명한 여자가 나옵니다. 그는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자기의 남편이 아닌 내연의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그때 이 여자의 관심은 더 이상 우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질문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했는데, 당신 유대인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믿어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지금이다. 너희가 진정으로 예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참으로 경배하고자 할 때, 그것은 예배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예배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두 가지 예배를 말하는데, 하나는 넓은 의미의 예배이고, 또 하나는 좁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는 우리 삶 전체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삶 전체를 포괄하는 모든 영역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인 우리의 모든 생활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생각과 정신의 작용들까지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넓은 의미의 예배와 함께 좁은 의미의 예배도 말합니다.

좁은 의미의 예배는 형식을 갖추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이 예배는 사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로 나뉩니다. 사적인 예배는 가정예배나 또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찬송하는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은 모두 훌륭한 사적인 예배입니다. 공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함께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식적인 예배입니다. 성경은 이 모든 사적인 예배보다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을 훨씬 더 강조합니다. 공적인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한 곳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림으로서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공간과 시간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성은 함께 예배를 드리며, 함께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약 공동체 안에 있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터넷과 미디어가 발전해도 절대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이 중요성은 파괴될 수 없는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말세가 될 때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어떤 습관같이 하지 말고 오직 그날이 가까워 옴을 볼수록 더욱 더 격려하고 모이도록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한 곳에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신자로서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삶으로서 넓은 의미의 예배와 공적인 예배의 관계는, 저수지와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논밭의 관계와 같습니다. 즉, 저수지의 물이 마르면 아래에 있는 모든 산하의 논밭들이 결국은 가물게 되듯, 좁은 의미의 공적인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으면 넓은 의미의 삶의 예배 또한 하나님 앞에 올바로 드려질 수가 없습니다. 넓은 의미의 삶의 모든 예배는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훌륭한 제사입니다. 그런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일주일동안 분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다가 승리한 사람들은, 모든 승리의 원천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리고 감사함으로 예배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드리게 된 후에 비로소 그가 드리는 정성스러운 좁은 의미의 주일 예배는 하나님 앞에 훌륭한 신앙의 표현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 하늘 문을 열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다시 한주일 동안 삶의 예배를 승리하며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될 때, 하나님 앞에 훌륭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영적인 예배의 훌륭한 모형이었습니다. 이 제사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밖으로는 제사에 관한 모든 법도를 준수하는 것이었고 안으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정성스러운 제물이어야 하며 제물을 바치는 헌제자의 마음과 제물의 정성스러움이 일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심은 제사를 드리는 제사자도 함께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삶의 모든 방면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면,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사람이 되어 예배당을 나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넓은 의미의 예배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처럼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는 떼어 놓을 수 없이 밀접한 관계에 있고 어디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순환하고 있는 관계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두 예배가 서로 교통하고 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하나를 먼저 택할 것이 아니라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개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제사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예배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배로 꽉 차지 못하고 마음은 거짓과 하나님께 대한 싫증으로 가득 차있는데, 예배만 아주 아름답고 예쁘게 드리기 위해 신경을 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 정도는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다보면 피할 수 없이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사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들은 주일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 위해서 순교를 불사하며 주일을 지킨 것을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주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지 모른 다는 불안감이나 마음이 찜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우상에게 드리는 제사 방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예배는 의무입니다. 즉, 마음이 바쳐지지 않아도 준수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인 것입니다. 이 의무를 내팽겨 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막 대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맡았는데 마음이 그 사명을 못 따라가면 회개하고 분발해서 마음이 그 사명에 합치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이 사명을 못 따르기 때문에 사명을 버려야지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막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결코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한번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서 천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위험한 곳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그 마음이 따라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는 보이는 예배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이 지루하고 싫증나면 여러분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지겨워하는 것입니다. 예배 나오기 싫어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뵈옵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을 향해 권고하시는 진리에 대해 반항하는 마음이 들고 있다면 하나님께 반항하는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태도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몸은 여기 나와 있지만 졸고 있는 사람, 영혼은 집의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어쩌다 한번 조는 것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습관적으로 계속 조는 것은 영혼이 심각한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돌이켜 서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결국 예배에 있어서 실패는 반드시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사라지고 식어지기 시작하면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기 시작합니다. 농사지어도 열매 맺지 못하고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고 몸부림쳐도 전대는 뚫려 벌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지출이 생깁니다. 결국은 여러분들의 영혼에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를 승리하고 온 사람들만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지치고 실패하고 죄 지은 사람들은 잘 살 때까지는 하나님 못 만나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 속에서 실패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좁은 의미의 예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삶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공적인 예배도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했는데도 하나님 앞에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잘 살았으면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잘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통회의 제사, 감사의 제사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주께 드린다고 해도 모두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을 드린 사람은 모든 것을 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은 예배의 목표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데, 목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태도와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예배드리는 태도와 마음이 올바를수록 예배를 거듭 드리면 드릴수록 마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는 말씀은, 뒤집으면 이렇게 예배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이 찾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배에 대한 올바른 태도, 방식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생활 전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깊이 회개하고 방종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어디 가서 주님을 섬기든지 간에 예배자가 아닌 사람의 모든 섬김은 자기만족입니다. 선교의 위대한 비전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자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도 믿지 않는 그들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싫증 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람을 교회에 불러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까? 깊이 돌이키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으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깨닫고,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받기 위한 예배자 십계명

김상수 목사

1.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

요한복음4장 23-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배자를 찾으시고, 또 우리들은 어떤 자세로 예배에 나와야할지를 말씀하셨다.

“〔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여기서 신령이란 원어적으로 보면, 영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의 의미가 있다. 예배는 십자가를 통하여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영이 만나는 것이다. 또 진정이란 진리 안에서 즉 말씀 안에서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정하신대로 하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부터시작해서, 예배의 방법도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으로 하고, 성도의 삶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사는 것이다 예배다. 본문에는 명확하게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흐름을 볼 때, 하나님이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이유는 1) 교제하고 싶어서 2) 하나님의 일을 맡기려고 3) 은혜와 축복을 주시려고 찾으신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어떻게 성도들이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를 다 받을 수 있는지 성경적인 근거들에 대해서 함께 나눈다. 바로 이런 부분들이 모두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모습에 해당 될 수 있다. 은혜받기 위한 예배자 십계명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실제는 더 세밀한 부분들로 나눌 수도 있다.

2. 은혜받기 위한 예배자 십계명(이렇게 하면 예배시간에 은혜 받는다)

1계명 :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라.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영적전쟁이다. 이것을 성도들이 알면서도 자주 망각한다. 사단은 어찌하든지 성도들이 은혜받는 자리에는 못가게 하고, 죄짓는 자리에는 가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사단의 1차 목표는 교회에 못가게 하는 것이고(금, 토요일부터 이미 집에서 신경전), 2차 목표는 교회에 왔어도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주차장에서부터 시비, 신경질 자극, 다른 사람의 복장에 더 신경, 설교시간에 상습적으로 졸게 만듬), 3차 목표는 말씀을 들었어도 즉시 거라지를 뿌리며 거두어 가고, 마지막 목표는 설령 말씀을 간직하고 예배를 잘마쳤다 할지라도, 그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뒤로 미루는 전략, 망각).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 사단의 궤계를 인식하고, 영적으로 깨어서 “신령” 즉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충만한 예배의 전과정이 되도록 준비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기도는 우리의 심령에 마치 영적인 고속도로을 뚫고, 철도를 놓는 것과도 같다. 에베소서6장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던 것처럼, 마귀 사단은 우리들이 피해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대적하여 격파할 존재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성령충만이다.

2계명 : 감사, 찬송, 믿음으로 나아가라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에는 감사, 찬송,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을 믿고 찬송하는가 하면, 히 11:6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예배시간에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응답)주신다는 믿음이다. 집에서 교회에 오는 동안에도 찬송을 부르거나(특히 감사찬송), 기도하면서 오는게 좋다. 예배당에 들어와서도 먼저 감사기도를 하라. 지금까지 인도해주셔서 감사, 오늘 은혜주실 것을 믿고 감사, 앞으로 더 좋은 길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라. 감사의 고백이 어둠의 영의 방해를 끊는다.

3계명 :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바로 이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서 역사했다(살전2:13).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목사님의 말씀선포를 ‘하나님이 목사님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때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역사한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백부장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10:33)

고넬료는 인간 베드로가 앞에 있지만,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했다. 이런 자세 때문에 설교시간에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충만이 임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 섰을 때는 ‘아멘’으로 받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아멘이 많은 성도가 복된 성도이다.

4계명 : 말씀의 적용은 자신에게 먼저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적용은 늘 자신에게 먼저 해야 한다. 히4:12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살아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똑같은 칼이라도 도둑이 들면 흉기가 되지만, 주부가 들면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예배시간에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듣고, 적용을 자신에게 하면, 그 말씀은 나를 치료하고 살리는 수술도구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그 말씀은 다른 사람을 상처주고 정죄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공격의 칼이 되고 만다. 말씀의 적용을 늘 자신에게 할 때 은혜가 넘친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어떤 형태의 말씀이든(설교, 성경공부, 통독, 묵상 등)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는 습관을 갖기 바란다.

5계명 : 무슨 말씀이든지 순종할 마음으로 들으라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요 2:5)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말씀을 들을 때 말씀대로 순종할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종종 자신이 듣고 싶은 달콤한 이야기만 듣고, 쓴소리에는 귀를 막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배에 나올 때에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순종할 마음을 갖고 나오는 것이 마땅하다. 무엇을 말씀하든지 그대로 해보자.

6계명 : 필기구를 준비하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주시는 것이 있다면, 그때 그때 기록할 수 있도록 필기구를 준비하라.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어서 듣고도 잊어버리기 쉽다. 또한 기록하는 도중에 또다른 깨달음을 주실 때가 많다. 설교노트를 만들어서 순서대로 적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할 때, 집중도 더 잘되고 졸음도 달아난다.

7계명 : 예배예절을 지키라(기본기)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받기 원하면, 예배의 기본기를 지켜야 한다. 가장 먼저는 은혜의 자리에 빠지면 안된다. 예배시간에 빠지는 것을 반복하면 습관화되고 만다. 그리고 마귀 사단은 그 기회를 치고 들어오려고 시도한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말씀하시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다.

특히 주일예배 시간은 하나님과 선약된 시간이다. 선약하고 다른 약속을 또 잡으면 앞서 선약한 분에 대한 예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럴진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은 어떻겠는가?

예배시간에 습관적으로 늦는 것도 안된다. 물론 간혹 어쩔 수 없이 늦게라도 달려오는 분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예외지만, 습관적으로 늦는 것은 작은 일에 충성된 모습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늦는지, 어쩔 수 없어서 늦었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성경 찬송을 아예 들고 오지도 않는 사람도 상당 수 있고, 예배시간에 별 이유없이 들락날락하기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또 끊임없이 뭔가를 만지며 바스락거리는 사람, 자리는 항상 목사님 눈에 잘 안띠는 곳을 골라 앉는 사람, 설교는 안듣고 주보에 낙서만 하는 사람, 축도가 끝나기 전에 총알처럼 나가버리는 사람, 핸드폰 받는다고 중간에 나가는 사람 등…이런 모습들은 모두가 예배에 집중하고 있지 않는 고쳐야할 모습들이다. 이런 모습들은 은혜받는데 장애가 되는 모습들이다. 특히 핸드폰은 나가서 받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끄는 것이 예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지, 왜 핸드폰에 들려오는 사람의 음성을 듣는가?

8계명 : 영적분위기를 타라

달리는 기차에는 올라타면 함께 목적지로 가게 되고, 바람부는 방향으로 돋을 올리면 보다 쉽게 항해할 수 있다. 은혜도 유사하다. 영적분위기를 타야 한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돋을 올려야지, 혼자 반대방향으로 노 저어 가려고 해쓰지 말라. 다같이 합심기도를 하거나 박수치며 춤추며 찬양할 때에는 그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라. 그래야 은혜받는다. 가끔 체면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뛰어 놀라고 까지 했다.

9계명 : 사회적인 체면과 계급장을 내려 놓으라

앞에서 언급한 백부장 고넬료의 고백처럼, 우리는 예배 때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계급, 체면은 필요치 않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뛰놀았다.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의 말씀대로 계급장, 체면 다 내려놓고 옷을 벗고, 요단강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몸을 담궛을 때 기적을 체험했다. 병든 사람이 창피하다고 의사 앞에서 환부를 숨길 수 있겠는가?

10계명 : 믿음의 예물을 준비하라.

믿음의 예물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다는 우리들의 믿음의 표증이다. 또 예배 전에 미리 예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할 때부터 이미 주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3. 오늘 주신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갈 때 이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래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남김없이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예배하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강성찬 목사

어느 찬양 모임에서 어느 자매가 너무도 기뻐하며 손뼉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슴을 보는 사람마다 “저 자매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그 자매를 바라보았습니다. 얼마 후에 늦게 들어온 한 중년여자 성도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더니 마침 그 자매 옆에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공손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저. 들어가게 조금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때 손을 들고 기쁜 모습으로 찬양을 하던 그 자매는 방해받는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어휴”하고선 아주머니를 못 본채 하고선 계속 찬양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찾아 갔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받으시는 예배와 찬양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분명 우리의 삶속에서도 동일하게 드려지는 그런 삶의 고백으로서의 찬양과 예배를 원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여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주전 772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이 패망한 후 팔레스틴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입니다. 요즘 같으면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으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큰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과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여행을 할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게 될 때에라도 그 지역으로 지나가지 아니하고 일부러 시간이 오래 소요되더라도 타 지역으로 돌아갈 정도로 그들을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땀을 흘리시며 애쓰면서 사마리아 수가에 이르렀을 때 행로에 피곤하셔서 야곱의 우물 곁에 앉아 쉬셨습니다. 그때는 한낮의 불볕더위가 쏟아지는 제육 시였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지치셨던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물을 좀 달라’는 말씀으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으셨는데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갈증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보다도 이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시려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예수님께 대하여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나이까’하고 되묻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한 유대인으로서, 초라하고 피곤에 지친 여행자로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인이 외모 이상의 더 중요한 것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물질의 물, 향락의 물을 마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게 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 곧 성령을 통해 새 생명을 공급받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을 마시는 자는 육신의 해갈도 면치 못하나 생수를 공급받는 인생은 영혼의 목마름 같이 해결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 7:38)하십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영생을 선물하실 것을 제안하시는데 여인은 생수로 비유하신 주님의 영생의 제안을 깨닫지 못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영생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인생들의 한계 상황과 그와 같은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빅토리아 여왕 당대에 수상을 지낸 ‘팔머스톤’이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너는 도중 우유 단지를 떨어뜨린 소녀를 보았습니다. 단지는 깨졌고 소녀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팔머스톤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마침 지갑이 없어서 소녀를 달래며 약속을 했습니다. ‘네가 내일 아침 이 시간에 이리 나오거라. 그러면 내가 우유와 병 값을 치러 주마!’ 다음날 그는 의회를 진행하다 말고 어제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당혹해 하는 각료들을 뒤로한 채 어린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로 가서는 소녀의 손에 25펜스를 쥐어 주고 급히 돌아왔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약속을 주셨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쩌면 죄악 세상의 옛 우물가에서 삶의 의미와 희망에 대해 끝없이 목말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가운데 지금도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14절) 마시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여인은 생수를 주실 수 있다는 주님의 제의에 대해 ‘물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11절) 구해 주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에서 니고데모와 같이 영적 진리에 대한 인간들의 한계적 사고와 상황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유다인의 관원이 밤중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을 중심한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유다교에서 추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개인적으로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예수를 직접 만나 교훈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예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표적 행함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그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음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니고데모가 예수께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비록 바리새인이고 유다인의 관원인 지식층이었지만 예수의 말씀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날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인은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요 4:11)라고 합니다. 팔레스틴의 우물은 대개 3m 이상의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영생의 선물에 대한 주님의 무조건적인 제안에 우선 수단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이 강조하는 인생들의 폐단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행복과 희망을 바라되 그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고 오직 수단만을 생각하고 그것도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행복의 시여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삶의 방법론만을 귀히 여기는 것이 타락한 인생들의 전반적 사고입니다.

(롬 1:22-23)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여인은 또한 우물이 깊은 것을 강조하며, 이 깊은 우물을 판 옛 조상 야곱의 지혜를 자랑했습니다(11, 12절).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수가 솟아나는 우물은 좀처럼 만나 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우물도 땅에 스며든 물을 저장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그와 같은 저장용 우물도 파기가 힘들어 야곱 같은 지혜로운 이도 겨우 찾았는데, 당신은 어디서 솟아나는 생수를 구해 준다는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요 4:12)라는 질문을 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조상 야곱보다 그 지혜나 덕에 있어서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여인에게 그 옛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4:13)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율법의 지혜’를 생수로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적 제의’로는 양심의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히 10:1-4).

또 세상의 희망과 행복을 사람들은 ‘삶의 샘터’로 여깁니다. 그러나 세상 행복은 바닷물과 같아 마실수록 갈증을 더해 줍니다. 오직 우리 삶의 참된 음료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모든 철학의 해답입니다.

(롬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진리와 생명의 성령께로부터 끝없이 사랑을 공급받는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 14:17-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러자 여자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합니다.

‘그런 물’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0, 14절)을 가리키고 있고, 여인이 길러 온 ‘우물물’은 조금 있으면 ‘다시 목마를'(13절) 그런 물입니다.

‘우물물’은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의 한계를 상징하고 있고, 그것으로는 인간을 결코 충족시킬 수가 없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물’은 ‘시장’과 같이 인간의 욕구를 잠정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일 뿐 결코 항구적이며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우물’과 ‘시장’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이 굴레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만이 인간을 항구적으로 만족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생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은혜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이 은혜 사역의 주관자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생수’는 ‘성령’이시고 그분은 ‘믿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하자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4:16-17)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은 그녀의 과거의 잘못된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촉구였습니다. 그녀는 과거에 다섯 남자를 남편으로 했던 부정한 여인이었고 지금도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8절).

영혼의 생수이신 성령은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회개하지 아니한 영혼 속에는 찾아오실 수가 없으십니다. 잘못된 삶을 청산하는 일이야말로 ‘생수’를 얻게 되는 첩경이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삶을 청산한다는 것이 생수를 얻을 수 있는 전제 조건입니다.

하나 생수의 원천은 아닙니다. 이 원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갖게 되는 믿음으로 얻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잘못된 삶을 회개(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에게 생수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은 자의 영혼 속에 성령께서 임재해 계심으로써 얻는 신적 기쁨과 평안이며 다함이 없는 감사와 감격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하시자 여자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8-19)고 합니다

자기의 과거를 바로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녀는 완전히 새로운 영적 각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각성은 그녀가 자기의 현재의 삶을 정직하게 고백한 데서부터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것은 곧 그녀의 영혼을 눈뜨게 하는 은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녀는 비로소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 남자가 ‘선지자’인 것을 발견하고 좀더 깊은 구원(예배)의 단계로 인도되었습니다(20-26절).

이는 니고데모와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니고데모는 이름 있는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반면 여인은 이름 없는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룩한 바리새인인 반면 여인은 부도덕한 창녀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먼저 알고 예수를 찾은 반면 여인은 예수께서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여자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앞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쪽의 대화를 비교 분석해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도 발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예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예수를 선지자로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께 근본적인 것을 알기 위해 예배에 관해 질문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녀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29절).

객관적으로 평가해서 니고데모와 비교도 안 되는 여인이 이처럼 놀라운 영적 탄력성을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처럼 뛰어난 영적 감각을 지니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녀의 솔직성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을 때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뻔뻔함을 드러내는 대답이 아니라 솔직함을 드러내는 대답입니다. 여인에게는 솔직하게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직성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솔직함은 영적 감지력을 높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예수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고서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못한 반면 여인은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딸을 데리고 강당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 참석했던 부인이 그만 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강단에 딸을 찾는 쪽지를 올려 보냈습니다. ‘회중 가운데 메리 무어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으면 손을 들어 주세요.’ 그러나 손을 드는 사람이 없어 경찰에 미아 신고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찾지 못하자 그녀는 다시 강당 문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디에 있었니?’ ‘제일 앞좌석에요.’ ‘그러면 방송 소리를 듣지 못했니?’ ‘들었지만 그게 나를 말하는 것인 줄 몰랐어요. 왜냐하면 나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잖아요.‘

이처럼 대개의 사람들도 이처럼 ‘나는 죄인이 아니고 길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인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예배 장소에 관해 묻는 여인에게 장소의 중요성에 관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라고 하십니다.

이는 유대인의 정통성을 인정하심과 동시에 사마리아의 혼합주의 신앙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유대인들은 예배에 있어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수된 율법을 통해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의 혼합 정책에 의해 유대의 정통과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호와께 예배는 드렸지만 정확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막연한 예배였습니다. 대상이 막연했고 방법이 막연했습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햄릿 비쳐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설교가로 ‘펄핏티어'(Pulpiteer)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설교를 너무도 잘하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그 목사님의 설교만 들어도 예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루는, 비쳐 목사님이 여행을 가시고 다른 목사님이 초청되어 오셨습니다. 초청된 목사님이 오셔서 재미가 없다고 웅성웅성하더니 사람들이 일어서서 나갑니다. 그 목사님은 강단에 서자마자 “여러분 중에 오늘 비쳐 목사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신 분들은 전부 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은 분만 앉아 계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목사를 만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가대 때문에 오고, 어떤 분은 목사 때문에 오고, 어떤 분은 친구 때문에 오고, 어떤 분은 할 수 없이 부인에게 끌려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예배이든 교회에 올 때에는 꼭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와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값을 지불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대상을 정확히 안다고 해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외형상 방법, 즉 격식이 제대로 갖춰졌다고 해서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내적인 요소가 갖춰져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입니다.

(요 4:23상)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어느 교회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 회장이 아주 노래를 잘하시는 분이어서 총무가 사회를 보고 회장이 특송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나오셔서 평소에도 늘 잘하시니까 은혜스럽게 한 소절을 잘 부르셨는데 둘째 소절부터 이상해져버렸답니다. 박자도 안 맞고 생각이 다른데 가있고 횡설수설 가사도 틀리면서 어물어물 참 이상하리 만치 그런 현상이 벌어져서 ‘저분이 왜 저럴까?’하는데 설교를 시작하려는데 그분이 쏜살같이 나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 이튿날! 무슨 일이 벌어졌나 궁금하여 “권사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휴∼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별안간 특송 부르는 시간에 비가 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우두둑 우두둑” 떨어졌어요. 장독대를 열어놓고 온 생각이 난 거예요. 그러니 찬송이 되겠습니까? 그래가지고 비가 쏟아지니까 그거 덮으러 가야 될 것 아니에요?”하더랍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 웃고 말았답니다.(박조준 목사 설교)

예배는 한시간 신령한 만남이 이루어져서 이 시간만은 내가 이 세상 속에서 더러워진 내 영이 깨끗하게 치료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서 영적으로 무장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런 일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평생 드리는 이 예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드리는 방법도 정확히 알았지만 이처럼 더 중요한 내적 요소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도 사마리아인들과 같이 예수의 질책의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도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예배는 여호와 하나님께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 마음과 정성을 함께 드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하)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소원을 소개하십니다. 소원은 아버지에 대하여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아버지께서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소원 하시는 예배자는 어떤 자일까요?

손이 깨끗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시 24:3-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손이 깨끗한 자의 예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손이 깨끗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더럽고 추한 세상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를 또한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도 하였는데, 이런 자가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분이시기에 더러운 손과 마음으로 오는 자를 하나님은 반기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시작 전에 최소한 일찍 와서 지난 날 세상에서 살았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고백하고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옳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13-24)고 합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한 사람 이웃과 화목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질 뿐만아니라 복음증거로 불쌍한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해 그 이방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시는 제물이 되게 하는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라는 말씀인 것이다.

정성과 희생이 있는 예배입니다.

전쟁의 총상으로 죽어가는 청년에게 군목이 물었습니다. ‘어머니께 드릴 말이 있으면 남기게나.’ ‘예, 행복하게 죽었다고 전해 줘요.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께 편지를 써주세요.’ ‘뭐라고 쓸까?’ ‘예, 난 크리스천으로 죽었다고요. 난 그녀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었다고 해 주세요.’ 두어 주가 지난 뒤 군목은 주일학교 선생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지난 주 주일학교를 떠났습니다. 그것은 내 일의 무가치함을 느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당신의 편지를 받고 다시 학생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는 다시 주의 이름으로 가르칠 것이고, 이 일을 끝까지 감당하겠습니다.’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던 제사는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다 열납 하시고 복을 내려 주셨음을 구약 성경을 토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교회되는 데는 남이 모르는 희생이 있기 때문이요, 그와 같은 성도들의 희생이 들어 있는 예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이삭이라도 아낌없이 드렸던 아브라함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영적인 삶에 여호와 이레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예배자라는 주제로 여름어린이 성경 학교가 시작 됩니다. 우리도 예배하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정필도 목사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하는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입니까?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이 시간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시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위한 시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는 오직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만 두어야 합니다. 찬송과 기도도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 그리고 목숨까지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시간입니다. 마음과 몸과 물질, 목숨까지 드리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한없이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0절을 보면 사마리아의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말합니다. 이 사마리아 산에서 드리는 예배도 잘못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도 잘못되었으니 그렇게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의 헬라 원어는 ‘프뉴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흔히 ‘성령’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올바른 예배는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 가운데 드리는 예배, 성령의 감동이 있는 예배, 이런 예배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배 가운데 항상 은혜가 넘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를 드릴 때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을 깨닫고 충성하는 일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령이 함께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우리의 성품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타락한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고, 성품이 악하던 사람이 착해지고, 불의하던 사람이 의로워지고, 거짓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뤄 드리는 일에 쓰임 받는 귀한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 보면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봉사자가 되려면 봉사를 해도 성령의 은혜 가운데 봉사해야 합니다.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은혜 받으면서 봉사를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교사로 봉사하든, 전도하든, 사랑방 목자로 봉사하든, 선교하든, 어떤 봉사를 하든지 성령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과 함께, 성령의 은혜 가운데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성령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찾으시는 올바른 예배는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똑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올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똑바로 알고, 똑바로 믿고,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려면 말씀의 은혜가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넘치는 예배는 우리의 믿음을 쑥쑥 자라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지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되고, 세상과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고, 예배가 죽으면 교회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배가 살아나게 하려면 우선,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백 퍼센트,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은 교회를 말하고,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렇게 모인 곳에 주님이 그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미국 보스턴 지역에서 골든 목사라고 하면 유명한 설교가이며, 능력 있는 말씀의 사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였기 때문에 설교하는 데에만도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설교 준비를 하다가 피곤하여 의자에 앉은 채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주일에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30세 정도의 낯선 사람에게 왠지 모르게 시선이 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배가 끝난 후 그 사람을 만나보고자 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님과 인사를 나누고 교회 밖으로 나갔는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내위원들에게 물어보니 그분은 예수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이후로 골든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앉아계신다고 믿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교인들도 예배 때마다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로 부흥했고, 선교 사업을 많이 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므로 예배 시간이야말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예배 시간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 46절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날마다 새벽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새벽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새벽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축복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거리가 많아집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 승리의 삶을 사는 경건한 성도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도 결심하시고 날마다 성전에 나아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도 분명히 은혜와 축복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규장 문화사의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님은 서울대 재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출판사에서 일을 했는데, 성실성을 인정받아 부사장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책과 씨름하며 살아온 지 20년 만에 과로로 인한 허리 디스크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허리가 끊어지고 다리가 터지는 것 같은 아픔에 시달리면서 육신의 고통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중년의 고비에 찾아온 병마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온갖 병원을 찾아다녀도 차도가 없자, 아내 배 권사님이 건네준 잠언서를 읽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때 장로님에게 잠언은 진리와 생명으로 새롭게 다가왔고, 45세에 새로 거듭났습니다. 새벽기도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허리디스크가 나았고, 기적을 체험한 그는 불신자 전도에 나서기 시작해서 기독교 전문 출판업체인 규장 문화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슬비 전도학교를 창립해 기독교 문서 선교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섯 자녀를 목사, 의사, 박사, 사장으로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그 비결은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두 흩어져 살지만,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함께 모여 가정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합니다. 날마다 성전에 나아가 새벽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항상 하나님 앞에 열심히 나아와 예배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어디서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예배는 성전(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 위해서 성전에 모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열심히 모이다 보면 교회가 부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모이는 교회는 대교회가 됩니다. 우리 교회는 새벽 예배를 매일 3부로 드리고, 새벽예배에 못 나온 분들을 위해서 밤 9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주일에는 새벽과 저녁 예배 외에도 낮 예배를 5번이나 드려서, 될 수 있으면 한 사람이라도 빠짐없이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수요일에는 새벽예배 3번과 오전과 오후 수요예배, 밤 9시 예배로 6번이나 예배를 드립니다. 금요일에는 철야예배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여러 번 있지만 그때마다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듭니다. 이것이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전에 성도들이 모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교회가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없어지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마다 자리를 지키는 것, 열심히 모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같이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당신이 어느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려면, 특정한 장소인 성전에서, 특정한 시간인 주일에 예배하는 사람이 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이 한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가서 제대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성전에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급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고 했고, 「남자의 수가 약 5천(행 4:4)」이라 했고,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행 6:7)」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계속 성장하고 부흥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비결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모두 다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교회로 부흥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 나라가 복음화될 줄 믿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 끝날은 분명히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더 열심히 모이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에 목숨을 거시기를 바랍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치하에 있을 때입니다. 요셉 케이보라는 목사님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일이면 3시간을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가서 2시간 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3시간 걸려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가 주일마다 그렇게 힘들게 먼 길을 가시는 것을 보고, 요셉 케이보 목사님이 어머니께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명료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곳에 가야만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란다.”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가야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일 아침에 3시간이 걸리는 길을 즐겁게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환경이 어려워도, 목숨을 걸고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끝까지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문기태 목사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내려다보시며 사람을 찾으십니다. 어떤 사람을 애써 찾으십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그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려고.

예수님은 23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보통 예배자가 아닌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 찾으십니까? 능력을 베푸시려고. 여러분 모두 오늘 하나님의 눈에 확 들어올만큼 참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야 내가 그토록 찾고 찾았던 예배자를 오늘 창원침례교회에서 찾았다. 내가 아무개를 위하여 치유의 능력을 베풀리라. 아무개를 위하여 행복의 능력을 베풀리라. 아무개를 위하여 기쁨의 능력을 베풀리라. 아무개를 위하여 기도의 능력을 베풀리라.라는 음성이 오늘 들려지기를 축복합니다.

1.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입니다(21).

사마리아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이라는 산에 있는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들의 예배 장소가 옳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는 회막에 오랫동안 모셔둔 법궤를 성전에 모셨습니다. 거창하게 성전헌당식을 합니다. 그리고 수십년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둘로 갈라져 남쪽에는 유대, 북쪽에는 이스라엘로 나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난 후 은근히 불안해졌습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맘이 변하여 유대와 통합하자면 어떻게하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그리고는 국경에 있는 그리심 산에 산당을 짓고는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은 이 곳에 있다. 예루살렘에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라.” 그렇게 그들의 전통에 따라 그리심산의 산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수 백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면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만날 때마다 다투었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에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 옳으냐?고 묻는 사마리아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예수님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상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이것이 우리에게 복을 줄 수 있을거야..’ 하면서 그 신과 인격적인 만남도 없이 절하고 섬기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들이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고 예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얼마나 크신 분인지, 깊이 알 뿐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어 주신 하나님,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오늘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늘 은혜를 내려 주시는 이 하나님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신을 섬겼습니다. 세상에 많은 신이 있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이 온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온 가정과 기업과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천군 천사를 보내 주셔서 잘 되게도 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예배를 통해 신령한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중국고사에 보면 어떤 왕이 왕비를 몹시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왕비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왕은 몹시 슬퍼하며 왕비를 궁궐 근처에 경관이 빼어난 야산에 장사지내고 묘만 홀로 있는 것이 애처로와 근처에 큰 정원을 만들어 좋은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꽃을 많이 심게 했습니다. 연못을 파고 아름다운 물고기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왕비가 묻힌 산소를 찾았습니다. 신하들에게 멋진 루각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종종 신하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시를 짓고 하며 쉬며 옛날 사랑하던 왕비와 함께 나누던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잘 가꾼 왕비의 산소곁의 루각을 찾은 왕이 어느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여봐라 이렇게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에 산소가 있으니 보기가 흉하구나! 저 산소를 없애버려라.”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를 아름답게 드리고자 많은 것을 갖추었습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습니다. 내부를 멋지게 꾸미고 좋은 시설을 갖춥니다. 찬양대와 오케스트라 세련된 안내위원 등이 있고 리허설을 하며 준비를 철저하게 합니다. 부족함이 없이 갖추어진 예배처럼 보이나 다른 것에 마음을 쓰다가 정작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은 잊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예배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집중하면 아무리 멋진 예배도 그 예배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소련의 유명한 작가 가운데 솔제니친이라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습니다. 솔제니친의 작품중에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라는 책이 있습니다. 솔제니친이 스탈린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공산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강제 수용소에서 잡혀가 매일 열 두 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많은 고문을 받고 탄압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얼마 안 있어서 진단을 받아보니 몸도 암으로 진단이 내려서 더 이상 살길도 없고 소망도 없어서 낙심하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제 인생을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아서 있는데 하루는 자기 옆에 누군가 이상한 느낌이 왔어요 옆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상해서 머리를 들고 보니 흰 옷 입은 어떤 노인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있는 그 앞에 십자가를 그어주었어요. 솔제니친은 그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신비한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 어둡던 마음에 창문을 통하여 아침 태양이 들어오는 걸 느끼게 되고 절망과 자기를 누르고 있던 이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이 머리에서부터 다 사라지게 되고 자기 마음에 꽃봉오리가 맺히는 거예요.

어디에서 힘이 나는지, 어디에서 기쁨이 나는지 그 십자가가 주는 신비한 기쁨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경험이었어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암도 나았고 소망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일 년 만에 그 수용소에서도 나오게 되고 자유세계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어요. 솔제니친은 작품을 통하여 그 때 받은 그 십자가의 신비함과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2.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영으로 예배하는 자입니다(23).

하나님 앞에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영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어디서’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영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 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그 아버지를 섬기고 영화롭게 할 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모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예배를 받으신다는 말슴입니다. 육체만 예배드리러 교회당에 나왔다고 “너는 오늘 나에게 참 예배드렸다.”라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육체가 예배당에 나왔어도 영으로 예배하지 않으면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몸은 예배당에 나와 있는데 마음에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으로 찬송을 따라 부르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는데 그의 영은 잠자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뻐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품고 있지도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로 거하시지 않으시고 영이십니다. 영이시기에 우리의 영과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찬양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기도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영과 혼을 실어 예배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마태복음15장 8절을 통해 예수님은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입술로는 그럴듯하게 하나님을 높이고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식어버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겉으로는 멋드러지게 갖추어진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진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영적인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위선을 벗어버리고 형식에 매인 자세를 훌훌 털어버리고 영이 깨어나 하나님앞에 진실된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좀 초라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다듬어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갈급해있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충만하다면 그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그 예배에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리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성령님께 사로잡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역사를 하실 때 민감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예배중에 눈물이 솟아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예배중에 마음을 뜨겁게 감동하십니다. 성령님이 예배중에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위로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상처받은 심령을 치유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고 온전히 여러분을 성령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속에 영적인 예배를 드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며 참된 예배를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참되게 예배하는 자는 진리로 예배하는 자입니다(23).

하나님은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진리로 예배드리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어요. 나오는 길을 열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예배는 성부 하나님이 이 가운데 오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듣게 하시고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깨끗한 마음을 주셔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 개신교에서 예배의 크라이 막스는 설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데 왜 설교를 강조합니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슴을 접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그냥 정성을 다하여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열심히 빌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절을 몇 번 했느냐? 얼마나 거창하게 차렸느냐?가 관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보다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느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슴하시기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슴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가 되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더욱 진리인 말씀듣기를 힘써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성도의 임종을 지키러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가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두려워 하더랍니다. 그리고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렇게 고백하더랍니다. “목사님, 저는 수 십 년간 교회를 다녔지만 한 번도 설교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작심을 하고 잠을 자거나 수첩을 꺼내 사업 설계를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니까 당장에 떠오르는 말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런 교인이 우리 교회에는 없을까요? 설교만 시작되면 잠을 자는 사람, 설교를 안 듣고 괜히 돌아다니는 사람, 주보를 읽고 다른 생각을 하고 설교가 끝날 때쯤 정확하게 정신이 돌아오는 사람은 없습니까?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고린도후서 4장4절에 보면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악한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고 있습니다. 방해하고 있습니다. 말슴을 못듣게 만듭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솟아나면 큰 일이니까, 말씀을 듣고 그 안에 능력이 생기면 큰 일이니까 기가 막히게 알고 미리 방해합니다. 참된 예배는 진리를 듣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진리로 예배하는 자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 마음에 진리로 충만해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진리로 충만해져 참 예배자로 하나님의 눈에 확 띄게 되기 바랍니다.

주일학교 교사가 주일 아침에 교회를 가다가 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고 “얘들아! 교회가자 교회가면 정말 재미있단다.”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네명의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교회에 오게 되었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잘 자랐습니다. 세월이 흘러 선생님이 나이가 많아 생일날 교사직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네통의 편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선생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란 소년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하나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후버대통령의 편지였고 또 하나는 대통령 비서실장, 또 하나는 중국의 선교사님,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은 미국 연방은행 총재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을 통해 배운 하나님 말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진리인지라 가난한 빈민촌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못다니는 소년들을 인류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인물로 변화시켰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셔서 복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찾으십니다. 능력을 베푸실 사람을 찾으십니다. 존귀하게 하고 영원한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눈에 띄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발견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존귀한 삶을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령한 예배

김삼환 목사

주일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날이요. 하나님이 정하신 날 입니다. 주일의 기원 즉 안식일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느냐?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범신론적인, 어디에나 있는 그런 신이 아니고 우리가 만든 다신론적인 그런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에서 먹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 백성을 사십년 동안 살려주신 하나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주셔서 말씀하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어 주신 하나님,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오늘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늘 은혜를 내려 주시는 이 하나님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신을 섬겼습니다. 이집트에도 태양신이 있고 바벨론 에도 앗수르에도 헬라에도 어느 나라든지 신이 있었습니다. 몰록이란 신도 있고 바알과 아스다롯이란 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들은 한번도 자기의 국경을 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다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세계를 향해 지배하는 신은 인류역사에 한번도 없습니다. 그렇게도 많고 많은 신들이 다 소멸하고 또 신이 나오고 새로운 신들에 의해서 역사는 오늘날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은 온 세계를 지금도 다스리시고 국경을 초월하여 저 아프리카에서부터, 남극에서 북극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지금도 온 세계 인류의 최고의 민족과 최고의 국가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은 지금의 하나님만 아니라 아브라함 시대 때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로 통하여 끊임없이 영광을 받으시고 한 이름을 높이며 한 하나님을 섬기고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망하지 않고 다윗이 말한 대로 “그 나라는 영원히 흥하며” 우리 인간과 세계와 인류의 흥망과 축복을 좌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느냐? 오늘 말씀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디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가’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어떠한 예배냐? 헬라어로 ‘푸뉴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으로, 성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 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성령의 감동으로 그 아버지를 섬기고 영화롭게 할 때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모릅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는 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우리말로 하면 진정이다, 진리다, 진심으로 드린다 라는 뜻도 있고 이 말의 또 깊은 뜻은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진정이라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예배를 드려야 된다 라고 말합니다. 이제 조금 이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어요. 나오는 길을 열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예요. 그래서 예배는 성부 하나님이 이 가운데 오셔서 임재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듣게 하시고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주셔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배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그런 준비가 아닌 영적인 준비가 필요하고 신령한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거룩하고 신령하고 신비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축복의 초청인 것입니다. 신약에 보면 잔치를 베풀어 놓고 임금이 만찬을 베풀어 놓고 우리를 부르시는 초청이 바로 이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제일 영광되는 일이며 우리 인간에게도 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이 예배에 나오는 것이 우리에게도 제일 영광스러운 일이요 제일 큰 목적을, 인간에 가장 우선하는 목적을,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간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 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예배시간을 통해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의 백성과 그의 자녀 된 의무를 다 함으로 주어지는 큰 기쁨이 있고,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좋은 만남을 가짐으로 우리의 성품과 생활이 그를 닮아가고, 그가 주신 은혜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두고 온 집과 기업과 내 모든 주변을, 나와 내 자녀와 내 모든 삶을 천군 천사를 보내 주셔서 지켜 주기도 하시고, 잘 되게도 하시고, 보호하기도 하셔서 예배를 통해 나온 나에게는 하나님이 신령한 은혜를 주시고 두고 온 내 모든 주변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같이 하셔서 형통하게 하시고 평탄하게 하심을 경험하면서 참 좋으신 하나님을 세세토록 예배 속에서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바로 이 귀한 예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너희 남자들은 매년 누구든지 다 내게로 나와서 가까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쉽게 절기를 지키지 말고 내가 거하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거예요. 성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가정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내게로 나오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유대인들이 저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한 달 정도 걸려야 되는데 옛날 같으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되는데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오려면, 남자들이 다 올라오면 성이 다 텅 비게 되는 거예요. 주변에 부족들이 많이 있고 유목민들이 많이 있는데 남자들이 없으면 당장 습격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가 이 모든 걱정하지 말고 내게 나아와 예배를 드리므로 내가 성을 지켜서 보호하는 것을 너희는 돌아와서 아,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지켜주시는 좋으신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경험하면서 저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절기 속에서 나가서 은혜 받고 또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이곳이 나와 앉아 있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천군 천사를 통하여 여러분들의 주변과 두고 온 가정과 모든 기업을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 우리의 삶의 큰 은혜는 예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이 하늘 문을 통해 열어주시는 영적인 이 은혜가 우리 인간의 삶을 항상 건강하게 하고 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군에는 많은 군부대마다 특성이 있고 임무가 다 다르지만 그 중에도 요사이 공수부대라고 있습니다. 특수 요원이라고도 하고 특수 부대지요. 옛날 6.25사변 때는 해병대가 그런 큰 일을 했는데 지금도 우리가 나라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군인이 든든해야 나라를 잘 지키니까요. 군인 가운데도 특전사 군인들은 대단한 실력이 있습니다. 국군의 날이 다가옵니다만 국군의 날이 되면 항상 특전사 용사들 그 묘기를 우리가 보지요. 우리 주변에 미사리에 가면 항상 그들이 훈련하는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특전사 용사들은 임무가 정말 특별합니다. 그래서 훈련도 어렵지요. 그들은 적지에 들어가서 요인들을 납치한다든지 도로를 파괴한다든지 통신망을 파괴한다든지 적 진지를 파괴한다든지 아주 특수 임무를 띠고 갑니다. 그 몇 사람이 안 가서 큰 부대를 대상해서, 나라를 대상해서 싸우니까 보통 군인은 가면 안되겠지요. 가는데 물론 임무를 잘 해야 됩니다. 우리 교회 교인도 특전사 단장이라든지 장군 출신이, 그 특전사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분들이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임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본부와의 연락입니다. 보낸 이곳과의 연락을 잘 취해야 합니다. 임무만 다 하다가 연락을 안 하면 이 본부에서는 그 사람을 제외시켜 버리는 거예요. 연락이 안 된 특전사는 특전사가 아니에요. 후방과 연락이 교신이 끊어진 군인은 군인이 아니에요. 항상 내 위치를 알려 주어야 해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라는 걸 보고해 주어야 해요. ‘본부 나오라 본부 나오라’ ‘여기는 아산만, 여기는 해주, 여기는 평양’ 이러면서 위치를 늘 알려 주어야 해요. 그리고 또 다음 지시를, 또 다음의 임무를 다시 받기도 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 모든 일은 본부에서 연락이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모든 임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고 성공하고 돈 벌고 출세하는 것도 중요하고 모든 일이 중요하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늘 교신이 되어 있어야 해요. ‘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기 있습니다’ 칠 일 만에 한 번씩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이 전에서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으로 교신하는 이 자리가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임무를 감당해도 하나님 앞에는 그 생명이 끊어진다는 거예요. 카운트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리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의 지시를 기다려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웜스 국회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 나는 많은 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의 있는 자리에 오셔서 하나님은 다니엘처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언제나 하나님은 같이 하셨습니다. “한 두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지금도 같이 한다” 라고 말씀하셨고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예배, 그래서 예배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예배, 영적인 예배 그래서 예배가 귀한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예배이어야 하는가? 그렇습니다.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구약성경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의 예배를 알면 우리 예배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예배이어야 하느냐? 이스라엘의 예배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매일 드리는 제사입니다. 어느 날도 빠짐없이 너는 내게 제사를 지내라는 거예요. 그 제사 이름을 ‘상번제’라 그럽니다.

제사는 다섯 가지가 있어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다섯 가지 제사가 있는데 그 중에도 매일 드리는 제사, 항상 드린다고 해서 상번제라고 합니다. 이 제사는 흠 없는 일 년 된 수양, 나이가 많아도 안돼요. 일 년 된 수양을 두 마리를 준비해서 한 마리는 오전에 잡고 한 마리는 오후에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는 거예요. 아침에 잡는 제사는, 번제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번제는 먼저 양을 잡아 가지고 피를 빼요. 피를 다 빼서 피를 뿌려요. 성막 앞에다가, 번제 단에다가 그 앞에다가 피를 뿌려요. 그리고 두 번째는 양을 잡아서 각을 다 떼어 가지고 기름과 함께 몽땅 장작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앞에 태워서 드리는 거예요. 이 제사를 유대인들은 수 천 년을 해 온 거예요. 어느 날도 빠지면 안돼요. 항상 아침저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해요.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시고 그 민족과 함께 하시고 그 민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거예요.

이 제사의 특징은 다른 제사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제사의 중요한 특징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피 뿌리는 거예요. 왜 피를 뿌려요? 너희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죄를 씻어야 돼요. 죄를 어떻게 씻어요? 피가 아니면 씻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양의 피를 흘려서 뿌리면서 제사장도 죄인이기 때문에 못 들어가요. 피뿌리고 들어가는 거예요. 기도도 피 뿌리기 전에는 기도가 안돼요. 피 뿌리기 전에는 봉사도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날이든지 다른 제사도 많이 있지만 종일 개인이 와서 드리는 제사도 있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 너희 백성이, 온 나라가 양을 잡아서 피를 흘려야만 그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거예요.

이 제사는 오늘 우리의 예배와 똑같이 유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까지 나올 자격이 없어요.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 구약에는 양을 잡았지만 신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양이 되셔서,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어요. 구약에는 짐승의 피를 흘렸지만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려서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게 해 주신 거예요. 여러분이 피가 없이는 성전 문을 잡을 수가 없어요. 피 때문에 여기까지 나온 거예요. 피가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아요.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 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죄 씻기 원하네 저 도적 같은 이 몸도 죄 씻기 원하네♬

어떤 죄인일지라도 주의 보혈로 씻음 받아야 하나님 앞에 예배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그 고기가 빨리 안 타지요. 장작불에 기름까지 다 태우니까 온 종일 연기가 올라가고 또 끝 날 만하면 저녁에 또 태워서 밤새도록 연기가 올라가면서 제사가 끊임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끝나지 않는, 항상 제사, 예배 속에 사는 민족이 유대인이에요.

그 민족이 세계를 향해 큰 일을 하고 우상 숭배하는 이집트, 바벨론, 앗수르, 모압, 에돔, 암몬은 다 간 곳 없지만 제사 드린 유대 민족이 오늘 세계에 가장 힘있고 능력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민족이 세계를 움직이고 성경에 말씀해 주신대로 다스리고 갈고 보존하고 땅에 충만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위대한 백성이요 축복 받은 성도들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일날이라고 하는 이 거룩한 날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에요. 우상 숭배는 정한 날이 없어요. 자기가 드리고 싶은 대로 제 마음대로 하면 돼요.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정한 날 와서 하나님이 정한 장소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자격이 뭐냐하면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놀고는 안돼요. 빈둥빈둥 놀고 교회에 놀려고 나오면 안돼요.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이 날을 지키라고 십계명 가운데 말씀하고 있어요.

이 날은 거룩한 날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이 세상의 일을 다 끝내고 거룩한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날이 이 날이에요. 이 날은 육의 일을 하면 안돼요. 육의 걱정도 하면 안돼요. 세상에 있는 모든 걱정과 염려를 다 잊어버리고 주님 앞에 나와서 신령한 은혜를 받는 날이 바로 이 날이에요. 이 날은 다른 날과 달라요. 엿새와 달라요. 엿새동안은 일 하는 날이지만 이 날은 쉬는 날이고, 엿새동안은 복이 없는 날이지만 이 날은 복이 있는 날이에요. 이 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날이에요. 이 날을 지킴으로 다른 날도 유효하여 귀한 날이 되는 거예요. 이 날이 없으면 다른 날도 가치가 없어요. 이 날을 잘 지킴으로 다른 날도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복을 내려 주시는 날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십계명에 계명을 다 지켜도 아무 복이 없는 계명이 많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는 계명은 세 계명밖에 없고 일곱 계명은 안 지키면 혼나지만 벌을 받지만 지킨다고 해서 상 받는 것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 ‘간음하지 말라’ 말씀하셨는데 간음 안 했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것 아니에요. 복 받는 게 아니에요. ‘살인하지 말라’ 살인 안 했다고 해서 무슨 복이 있어요?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그러고 끝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복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세 계명은 복이 있는 계명이에요. 약속 있는 계명이 세 계명이에요. 두 번째 계명,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물고기의 형상이나 동물의 형상이나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는 거예요. 기독교는 하나님 이외는 만들어서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신 영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신령한 예배를 드려야지 어디 가서 무엇을 만들어 절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천대에 복을 받는다 그랬어요. 천대까지. 그래서 하나님 잘 섬기면 길이길이 복 받는 거예요. 우상 숭배하면 살기는 사는가 봐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삼, 사대에 가서 끝난다는 거예요. 망한다 그랬어요.

그 다음 두 번째는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안식일을 잘 지키면 하나님이 이 날을 복을 주어서, 복을 받는 거예요. 다른 날과 달라요 이 날을 지키지 않으면 복을 못 받아요. 하나님 앞에 축복 받는 날이에요. 또 하나 더 말씀 드리면 5계명, 부모에게 효도하면 내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세 계명을 잘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계명도 물론 지켜야 돼요. 그러나 이 세 계명을 지키면 아주 귀하다는 거예요. 이 날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은혜를 하늘 문을 여셔서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는 주일의 비밀을 짧은 시간 다 말씀 드릴 수가 없지만 우리 일어서서 찬송가 56장을 부르시면 상당한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지난 이레 동안에 예수 인도했으니 주의 전에 모여서 크신 축복 빕니다 가장 복된 이날 은 하늘 안식 표로다 가장 복된 이날은 하늘 안식 표로다. 주의 공로 힘입어 은혜 주심 빌 때에 화목하게 하시고 죄를 벗겨 주소서 세상 걱정 면하고 오늘 쉬게 하소서 세상 걱정 면하고 오늘 쉬게 하소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러 왔으니 모임 중에 계시고 영 광 나타내소서 기쁜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서 기쁜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 서. 주의 기쁜 복음을 죄인 듣게 하시고 모든 믿는 사람을 위로하여 주소서 주님 오실 때까지 이날 지키리로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날 지키리로다 ♬

인간의 힘과 능력과 인간의 축복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심과 신령하심과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줄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신비합니다. 예배는 거룩합니다. 신령합니다. 예배는 참으로 인간의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이 발달함으로 우리 인간이 영원히 신비하게 가져야할 모든 것들을 다 파괴하고 무의미하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달 하나도 보면 어려서 얼마나 신비하게 보았는데 과학자들이 달도 별 게 아니야 아무 것도 없어, 그럽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옥도끼로 찍어내고 금도끼로 다듬어서 천년 만년 살고 지고 억년 만년 살고 지고♬ 참 아름다운 달 그 신비로운 달도 별 게 아니고 인간의 생명도 별 게 아니고 복제인간 만들어서 이제 등사기 인쇄하듯이 사람이 이제 저 사람이 어디에 인쇄되어 나왔는지 모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혼의 신비함도 없고요. 얼마나 결혼 기다리고 가슴 두근거리고 서로 신비한 삶을 서로 만나는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이 다 없어졌어요. 그래서 현대인들은 너무 허전하고 공허해서 방황하고 있는 거예요. 예배는 신비해야 합니다. 평생을 드려도 신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하고 있잖아요.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서. 신령한 잔치예요. 잔치는 우리가 잘 먹는 것인데, 오늘 예배시간은 신령한 하나님의 음식을 먹는 거룩한 시간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세포도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피도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영양분도 매일 새로 섭취하고 칼로리도 매일 섭취하고 새로운 건강을 가지고 살아가듯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림도 주일 날 거룩하게 지키는 이 하루에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새로운 세포 새로운 피 새로운 우리의 은혜가 우리를 한 주일 동안 건강하게 하시고 심히 복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에 내 마음의 옷을 갈아 입혀 주셔서 깨끗한 우리의 심령의 옷을 갈아 입혀 주시고 더러운 모든 내 몸과 마음의 생각을 주의 보혈로 씻어 주는 신비한 시간이 예배 시간입니다.

소련의 유명한 작가 가운데 솔제니친이라는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있습니다. 이 분이 지은 책이 여러 가지 있는데 암 병동,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이런 작품은 세계적인 문학 작품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 분이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또 이런 책을 자꾸 쓰니까 스탈린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공산 정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강제 노동 소에서 오랜 기간동안 매일 열 두 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많은 고문을 받고 탄압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가족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얼마 안 있어서 진단을 받아보니 몸도 암으로 진단이 내려서 더 이상 살길도 없고 소망도 없어서 낙심하고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제 인생을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아서 있는데 하루는 자기 옆에 누군가 이상한 느낌이 왔어요 옆에 누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상해서 머리를 들고 보니 흰 옷 입은 어떤 노인이 옆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심하고 있는 앞에 십자가를 그어주었어요. 솔제니친은 그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신비한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 어둡던 마음에 창문을 통하여 아침 태양이 들어오는 걸 느끼게 되고 절망과 자기를 누르고 있던 이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이 머리에서부터 다 사라지게 되고 자기 마음에 꽃봉오리가 맺히는 거예요.

어디에서 힘이 나는지, 어디에서 기쁨이 나는지 그 십자가가 주는 신비한 기쁨은 자기가 지금 작가로서 어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는 그 곳에서 암도 나음을 얻고 소망을 가지고 그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그는 일 년 만에 그 수용소에서도 나오게 되고 나중에 프랑스로 가서 또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게 되었어요. 지금 이 분 작품을 읽어보면 소련을 향해 지금도 공격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런 방법으로는 안 된다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너희 정권을 바꾸고 경제 모든 구조를 바꿔야 소련이 살지, 계속하여 이렇게 증거 하는 것은 그 때 받은 그 십자가의 신비함과 능력인 것입니다.

주의 보혈,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죄인이 살고, 멸망 받을 자도, 어떤 몹쓸 인간도 예수 십자가 받아들이고 믿으면,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자녀 되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고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주시고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생각이 바뀌어져서 능력 있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인간을 과학적으로 풀면 안됩니다. 지식적으로 풀면 안됩니다. 물질이 있다고 다 인간이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교신이 없는 군인은 아무리 특수부대원이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는 임무 가운데도 가장 큰 의무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집에 부자 주인 어른 회갑 잔치를 열게 되었는데 그 집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회의를 했어요. 이번 잔치에 누가 순교를 해야 되냐, 제일 처음 개를 보고 말했어요. 야, 이 여름에 주인이 이렇게 잔치를 베푸는데 네가 보신탕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냐, 그러니까 개가 말했어요. 나는 나가는 건 참 좋은데 내가 가면 이 부잣집 이 재산을 누가 지키냐 이 집은 누가 지키냐, 해서 보니까 개는 안되겠어요. 그 다음에 닭을 불렀어요. 닭아, 이 여름에 삼계탕이 제일 나은 것 같다 주인을 위해서 네가 순교해라 그러니까 닭이 그러는 거예요. 나는 안 된다, 내가 없으면 주인이 일어날 시간을 누가 알려 주냐, 주인에게 누가 매일매일 영양분을 보충해 주냐 내가 알을 낳아야지. 그러고 보니 이것도 안되겠어요. 세 번째 소한테 그랬어요. 야, 네가 아무래도 갈비로 대접하는 게 제일 낫겠다, 그래도 잔치에 소고기보다 좋은 게 어디 있냐, 그러니까 소가 그러는 거예요. 나는 안 된다, 왜? 내가 없으면 주인 집의 많고 많은 농사 누가 짓느냐는 거예요. 마지막 돼지에게 야, 돼지야 너는 뭐 일이 별로 없지 않냐, 삼겹살로 대접해라. 그러니까 다 변명하고 다 사명이 있고 다 할 일이 있는데, 그냥 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먹는 게 아니에요. 돼지는 할 말이 없어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사명이 없어요 너는 너를 위해서 살찐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돼지가 그러더래요. “그럼 물 끓이소”

오늘 현대인들이 먹고 그저 살만 찌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적어도 누구를 위해서 시간을 알려 주든지 무엇을 위해서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위대한, 거룩한 이 잔치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이 되면 우리는 이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줄로 믿습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이

강문호 목사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도일까요? 물론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기도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일까요? 물론 헌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봉사일까요? 사랑일까요?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예배입니다. 왜 예배가 가장 중요할 가요? 예배의 뜻은 <하나님을 섬긴다> 그런 뜻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으로 자기 옆에 사람을 부르는 것은 자기를 도우라고 부른 것입니다. 대통령을 도우라고 부름받은 장관이 대통령을 돕지 못 하면 파면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못 하면 버림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이라는 동네를 지나실 때였습니다. 목이 마르셨습니다. 우물이 깊었습니다. 드레박이 없이는 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물을 길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얼마 전에 미국 워싱턴에 들어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린턴 대통령 시절이 미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부흥하였던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추잡한 소문을 낸 대통령이 크린턴 대통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음란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크린턴 대통령을 축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크린턴 대통령은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이였기에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에 워싱턴에 눈이 3 m가 내렸습니다. 웬만한 집은 눈속에 파묻혔습니다. TV에서 방송이 되었습니다. 모두 움직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눈속에 묻히면 찾을 수가 없기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TV로 예배를 드리라는 보도였습니다. 모두가 예배를 안방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 때 크린턴 대통령은 이 교회 저 교회로 전화를 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그 때 워싱턴에 조그만 감리교회는 목사 주택과 교회와 붙어 있기에 목사님이 전화를 받고 “우리 교회는 나 혼자라도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드리러 나가 보니 그 많은 눈을 헤치고 크린턴 대통령이 예배드리러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중요시여기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크린턴 대통령을 축복하셨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오스트리아에 갔더니 기독교가 조상부터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장사하거나 일하는 이는 400만원 가량의 벌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수 천명 들어가는 교회에 30명 가량 앉아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배가 살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이 점점 타락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지는 곳에는 하나님도 떠나십니다. 지금 온 세계는 중국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잠자는 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중국은 예배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전 병욱 목사님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가 중국에 갔더니 어떤 찬송가는 99절이었습니다. 이 찬송을 다 불렀습니다. 한참 걸렸습니다. 다 부르고 나 더니 은혜 스러우니 다시 한번 부르자고 말하는 데 하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나게 찬송을 부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예배를 잘 드리는 교회를, 예배를 잘 드리는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를 알기 위하여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가 아닌가부터 알아 보아야 합니다. 1. 예배 출석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 시간에 예배드리는 현장에 앉아 있었으면 예배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출석자이지 예배자가 아닙니다. 어느 장로님 아들이 교회 출석을 싫어 하였습니다. 장로님은 억지로 손을 잡고 끌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장로님이 외국으로 출장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너 아버지가 없더라도 주일에는 꼭 교회에 가야 한다” “알았어요” “아빠가 전화로 확인한다” “알았어요” 월요일 아버지가 국제 전화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제 예배드렸니?” “네” “누가 기도했어?” “늦게 가서 몰라요” “목사님은 무슨 설교하셨니?” “졸아서 몰라요” “헌금 기도는 누가했어?” “먼저 나와서 몰라요” 이것이 예배입니까? 장로님 아들은 예배에 출석한 것이지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40대 아들과 60대 어머니의 대화를 들어 보십시오. “어머니! 나는 예배드리기 싫은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일 아침은 늦잠 자고 싶어요. 둘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어요. 셋째 성가대의 불협화음이 싫어요” 어머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둘째 예배는 사람과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다. 셋째 너는 담임 목사이까 결석하면 안 된다”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동생 아벨을 살인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살인은 예배 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배 출석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2. 사람 중심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나타나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사람은 모두 숨어야 합니다.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회갑 축하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고 회갑을 맞은 사람이 주인공이 되면 예배가 아닙니다. 박사학위 축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예배라는 말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인공이어야 하는 데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면 이미 예배가 아닙니다. 차라리 <박사 학위 축하식>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기념예배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은 예배 도중에 이상한 행동이 눈에 띄면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개 목사가 예배 때 실수하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는데 여 집사님 한 분이 일어났다 앉았다하며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사방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눈에 거슬렸지만 교인들이 얼마나 왔나 수를 세어 보는 구나 하며 참았습니다. 예배 후에 여 집사님에게 왜그랬느냐고 물었더니 0집사 0집사가 그저께 곗돈 줄 날인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오늘 왔나 보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곗돈 받으러 온 것이요, 예배 드리러 온 것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겸해서지요 뭐” 예배는 다른 것과 겸해져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주일에 빠지는 일이 없는 권사님이 웬일인지 주일 예배에 나타나지 않았다. 목사님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불러서 물었습니다. “이웃 교회에 가서 예배드렸습니다.” “이웃교회요” “네, 그곳에 볼일이 있어서요” “무슨 볼 일?” “목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 막내 아들 며느리감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소개하기를 소프라노 하는 두 번째 아가씨가 참하다고 해서 볼겸 그 교회에 갔었지요”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아니라 예배와 선을 보러 그러니까 구경하러 가셨었군요?”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일까요? 한 마디로 말씀드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보러 간다는 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어느 자매님의 상담입니다. “목사님! 저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데 예배를 보고 있습니다. 목사님을 보고, 성가대를 보고, 꽃꽂이 한 것을 보고, 장로님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를 보지 않고 드릴 수가 있을 가요?” 어떻게 하면 예배를 보지 않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수가 있을 가요? 이 질문에 대하여 킬케콜이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킬케콜은 관객과 배우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자는 구별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에서 우리 모두는 배우처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관객은 꼭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배를 드리야 하고 하나님 한 분만이 예배를 보시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는 드리는 자요, 하나님은 보시는 분이십니다. 배우는 드리는 이요, 관객은 보는 이입니다. 그러면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를 드릴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배우가 늦는 연극은 없습니다. 배우가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늦으면 이미 예배를 드리는 것이아닙니다.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나는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보는 자다”라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2. 배우는 일찍 가지 않습니다. 배우가 일찍 가버리면 연극이 될 수가 없습니다. 배우가 가버린 연극이 어디 있습니까? 배우는 연극을 다 끝낸 후에 숙소로 돌아 갑니다. 이것이 연극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먼저 가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3.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관객은 졸아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배우가 졸면 연극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배우가 졸면서 연극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이입니다. 세례 요한이 소속되어 있던 쿰란 공동체는 예배 시간에 조는 이에게는 한 달 간 예배시간에 출석하지 못 하는 규정을 두었습니다. 조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4. 배우는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합니다. 배우는 대사를 암기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연극의 흐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대사 몇 개 쯤 못 들어도 괜찮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설교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집에 돌아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 한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을 하였는 지 모르는 사람은 예배를 드린 사람이 아니라 예배를 본 사람입니다. 그 날 예배 내용을 모두 정성을 다 하여 파악하여야 예배를 드린 사람입니다. 5. 배우는 감정을 줍니다. 감정을 주는 이가 배우요, 감정을 받는 이가 관객입니다. 배우는 울리고 관객은 웁니다. 배우는 웃기고 관객은 웃습니다. 배우는 슬프게 하고 관객은 슬퍼합니다. 감정을 줄 줄 아는 이가 배우입니다. 예배시간에 감정을 줄 줄 알아야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에 흥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벅찬 감격에 소리를 지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좋아서 박수를 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손을 들고 찬송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행동합니다. 관객은 구경만 합니다. 나는 LA에 있는 포도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룩한 무질서를 달라는 기도를 하고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보통 4시간입니다. 목사님은 정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티셔스를 입고 올라가 같이 찬양을 합니다. 온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즐겁게 찬양을 합니다. 완전 찬양의 도가니입니다. 그러다가 통성 기도를 합니다. 정말 거룩한 무질서의 도가니입니다. 딩굴며 기도하는 사람,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일어서서 기도하는 사람, 앉아서 기도하는 사람, 엎드려서 기도하는 사람,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사람, 각양 각색입니다. 거룩한 무질서의 예배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축구를 구경하던 수만명이 공을 골에 넣고 나면 야단 법석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어서서 모자를 던지고, 손수건을 흔들고 야단들입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을 줄 줄 아는 이가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6. 배우는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않습니다. 배우는 배우의 옷이 있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옷을 입습니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고 예배를 보는 사람입니다. 좋은 옷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입어야 합니다.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옷에 한번 정도 신경을 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옷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배우는 옷에 신경을 씁니다. 7. 배우는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배우의 존재 목적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있습니다. 관객을 실망시키는 배우는 배우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배우의 생명이 길지 못 합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인기가 있으면 배우의 생명은 길게 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를 통하여 만족을 얻고 싶어합니다. 나는 몇 달 전에 <난타> 뮤지컬을 관람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난타입니다. 식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이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주방 도구를 가지고 막 두드리는 뮤지컬입니다. 칼을 가진 요리사는 칼로 배추 무를 막 잘라 버리는 장면입니다. 그릇을 가진 사람을 그릇으로 막 부서져라 두드립니다. 물병으로 난타하는 이도 있습니다. 관객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를 모두 시원스럽게 풀고 가게 합니다. 나오면서 모두 웃으며 통쾌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난타를 공연할 때마다 만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 하여야 합니다. 드리는 예배는 드리는 데 즐거워야 합니다. 나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미국에 크렌샤 크리스챤 교회(Crenw Christian church)가 있답니다. 헌금시간이 길기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예배 순서중에 헌금 시간이 되면 모두 헌금 봉투를 꺼내 들고 옆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십일조 얼마를 하게 된 동기, 감사 헌금을 드리는 명목을 이야기하면 옆 사람이 그런 이유로 감사헌금을 드리느냐고 감탄하면서 같이 축하하여 줍니다. 때로는 기도제목을 적은 헌금 봉투 들고 기도제목을 이야기하면 옆 사람이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기도 합니다. 10분 가량이 이런 시간을 가진 후 헌금 위원이 헌금함을 가지고 다가 오면 헌금위원에게도 이 헌금을 드리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면 헌금 위원들이 헌금을 받으면서도 또 기도하여 줍니다. 사로 격려하고 기도하며 헌금을 드립니다. 헌금시간이 감격과 흥분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이기에 드리는 시간을 즐겁게 여깁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오면서부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은혜를 받아야지”라고 마음 가짐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러 온다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배의 관객이시고, 예배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온통 정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나는 얼마전 우리 연회에서 생긴 일을 기억합니다. 연회를 보통 2일간 합니다. 그 중에 여러 안건이 처리됩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에 돌아 가신 목사님들의 유가족을 모시고 합동 추도 예배를 연회원들과 함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미리 순서가 나갑니다. 그 시간이 되면 유가족들이 몰려 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회의 안건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서 격론을 벌리면서 서로 삿대질까지 하면서 싸우던 중에 유가족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 때 감독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회원 여러분! 추도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유가족들이 다 오셨습니다. 회의를 잠시 중단하고 유가족들과 함께 추도예배를 드리고 회의를 속개하겠습니다” 모두가 회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회의석을 치우고 강대상을 옮겨 놓고 예배위원들이 등단하고 예배를 정중하게 드렸습니다. 싸우던 분위기가 엄숙한 추도예배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유가족들의 울음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숙연하게 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이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회의가 속개되었습니다. 서서히 잠시 추도예배 전 분위기가 살아 났습니다. 다시 싸움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일까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면 하나님의 성품이 임재하여야 하는 것이 아닐 가요? 예배 전에 싸우던 마음을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하고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않을 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되는 데 온 마음이 집중되어야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배우같은 예배는 드리는 예배이고 관객같은 예배는 보는 예배입니다. 배우는 어떤 마음을 가집니까? 1.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늦지 않습니다. 2.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일찍 가지 않습니다. 3.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졸지 않습니다. 4.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연극의 내용을 분명히 파악합니다. 5.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감정을 줍니다. 6.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아무렇게나 옷을 입지 않습니다. 7. 드리는 예배는 배우같이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예배의 열정을 회복하자

김근중 목사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목적’이라 생각합니다. 그 다음을 중요한 것이 ‘열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그 목적대로 살고자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열정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면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거나 포기해버리고 맙니다. 열정을 다시 회복할 때 의욕이 일어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으로도 열정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향력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계2:4-5, 3:15-16). 예배에 대한 열정과 감격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성의 들어가 우물 가에 앉았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남편이 다섯명이나 되었고 당시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에 만족이 없었고 더욱이 영혼의 갈급증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해 답답해 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그에게 물을 달라고 하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발견하고 예수님이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믿고 예배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영적인 갈급함을 느낀 사람은 예배를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요4:1-26).

1.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사마리아)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유대인)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시적인 장소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한정적인 장소가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을 찾아야 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신령으로'(神靈, εν πνευμα, in spirit)는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성령으로’ 혹은 ‘성령 안에서’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성령의 감동이 있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성령의 감동이 있게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이스라엘왕과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 선지자 엘리야가 제단을 쌓고 기도한 얘기가 나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 아합왕을 모시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을 불러 놓고 대결을 했습니다. 돌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을 놓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각기 자기 신에게 기도하여 불이 내려와 제물을 사르는 신을 참 신으로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신에게 불로 응답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아무 응답도 없었고 뛰기도 하고 서로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부르짖었으나 저녁이 다 되어가도록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단 주변에 도랑을 파게 하고 물 네 통을 제물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 물이 제물과 나무와 제단을 적시고 도랑까지 넘쳤습니다. 그런 다음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되 백성들로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불이 내려와 제물과 나무와 제단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듯이 태웠습니다. 백성들이 엎드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알고 돌이켜 엘리야의 명을 따라 850인의 우상 섬기는 선지자들을 처단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변화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상 섬기던 자들이 돌아오고 하나님과 세상 중간에서 갈등하던 자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돌이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렸고 홍해를 갈랐고 요단강을 갈랐고 옥문을 열었고 병을 치유했고 여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에 귀신이 떠나가고 옛 성품이 죽어지고 심령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평안과 감사와 기쁨이 생깁니다. 삶의 여러 문제가 해결되고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즐거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구속을 찬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진정으로'(眞情, εν αληθεια, in truth)는 직역하면 ‘진리로’ 혹은 ‘진리 안에서’의 의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염두에 두고 사용되어진 단어입니다 (요14:6).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주체는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인신과 그가 이루신 구속사역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나타내는 최절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예배의 핵심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천상 예배의 내용도 온전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계5:9-12, 14:3).

창세기 4장에 보면 형제인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둘 다 하나님께 정성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까? 그것은 드리는 제물의 문제였습니다. 가인은 곡물로 드렸고 아벨은 생축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할 때는 생축으로 드려야 할 것을 암시해 주었고, 아담은 그것을 자녀들에게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은 죄값은 죽음이었습니다 (창2:17, 롬6:23). 하나님은 범죄하여 죽게 된 아담과 하와를 살리기 위해 짐승을 죽이고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창3:21). 그리고 아담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기 위해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을 잡아 드리게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가 죽어야 하나 짐승이 대신 죽으므로 하나님 앞에 삶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시대에는 좀더 구제적인 제사를 드리게 했는데 그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율법대로 죄값으로 죽어야 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아 살기 위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를 지으면 짐승을 끌고 회막으로 나가 짐승에게 죄를 고백하여 안수로 전가시킨 다음 그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범죄한 사람이 죽어야 하나 짐승이 대신 죽으므로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레위기 2장에 나오는 소제를 생각하여 곡식으로도 제사를 드렸다고 하지만 소제는 반드시 짐승으로 드리는 번제와 함께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사에 기초가 되는 제물은 짐승(생축)이어야 했습니다. 이 짐승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어 그가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 죽음을 죽으므로 우리의 죄가 영원히 사해지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예표적 상징이었습니다 (히8:5,12).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그 짐승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의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천상예배에서도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계5:9-14).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구속의 은혜를 근거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실 떼 성령으로 임재하여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예배에 생명력이 없는 것은 인본주의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역동성이 없이 화석화 되는 것은 사람의 선호에 따라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 드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높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있어야 할 자리에 물질, 명예, 학식, 의식,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외적인 거룩한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다는 사실을 근거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함이 되어야 합니다. 찬양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높이십시오. 빈야드 처치의 찬양사역자인 ‘신디’가 말한 것처럼 ‘예배는 우리를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우리의 희생이 뒤따라야 합니다.

로마서12:1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영적 예배가 산 제사가 아니라 산 제사가 영적예배라는 말입니다.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제사이고 그것이 영적예배라는 말입니다. ‘영적예배’에서 ‘영적’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영적인 것을 말하는 ‘프뉴마티켄'(πνευματικεν)가 아니라, 합당한 것을 말하는 ‘로기코스'(λογικοs)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 있는 예배이며 하나님께 가장 합당한 예배라는 말입니다. ‘너희 몸’은 우리 신체를 지칭한다고 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yourselves)을 말합니다. 우리 인격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를 말하며 인격이 삶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까지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전인과 전생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는 우리의 생애를 드리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하나님을 목적할 때 우리의 생애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 집에 들어갔습니다. 나사로는 말씀을 듣는 사람 들 가운데 있었고 마르다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근을 가지고와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 향유를 부음으로 인해 집안에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그 향유는 300데나리온 정도의 가치입니다. 장정이 300일 동안 일해서 얻을 수 있는 돈입니다. 가룟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고 허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기의 죽음을 예비한 것이니 가만 두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을 최고로 높이기 위해 비싼 향유 한 옥합을 드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많은 금액의 돈을 투자한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 진정으로 인정받는 일을 하려면 물질적이든 인격적이든 영적이든 희생을 들여야 합니다.

예배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옥합을 깨트려야 합니다. 학생들은 예배 안 드리고 학교나 학원 가는 일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시험이 가까우면 더더욱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할 일 다하고 시간이 나면 예배를 드립니다. 성경책도 안가지고 다닙니다. 끝나고 금방 가고 싶은 데 가려고… 예배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면 얼굴색이 붉게 면합니다. 그러다 기도시간에 나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설교 시간이 너무 길어서 못 가겠다고 말하고 다닙니다. 더 지나친 사람들은 설교 내용을 자기 관점에서 분석하고 비평합니다. 그리고는 직접 말할 용기가 없으니까 대표성이 있는 직분자에게 가서 총대 메고 목사님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설교에 이러 이러한 말은 하지 말고 이러 이러한 설교를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영적 시각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전합니다. 전하면서 또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않는데 아무개가 그러더라고 말합니다. 예배는 희생입니다. 물질과 시간과 육체와 마음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주를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합니다.

영국의 찬양사역자 ‘매트 레드맨’이 사용한 말 ‘하나님 앞에 선 예배자’ 라는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영혼이 소성하고 마음이 평안을 얻습니다. 치유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에 생명을 겁시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김명혁 목사

요 4:23-24, 행 2:46-47, 롬 12:1

강변교회는 새해의 실천목표 다섯 가지를 정했습니다. 저를 따라서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 둘째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교회, 셋째 연합운동을 펴 나가는 교회, 넷째 북한동포를 돕고 선교하는 교회, 다섯째 청소년을 육성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 예, 이렇게 다섯 가지를 우리의 실천 목표로 정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첫째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배가 생동하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첫째 목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 하나님께서 생동하는 예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니라”(롬12:1). 여기 제사라는 말과 예배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산 제사(living sacrifice)를 드리라.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를 드리라.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생동하는 예배 살아 있는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믿음의 제사를 받으시고 너무나 기뻐하셨고, 솔로몬의 일천 번제의 제사를 받으시고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시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출10:3). “Let my people go, that they may serve me.” 여기 섬긴다는 말은 제사 드린다는 말이나 예배 드린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모세는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너자 마자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름 없는 한 여인의 향유 제사를 받으시고 너무나 기뻐하셨고,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 제사를 받으시고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한 소년으로부터 오병이어의 헌물을 받으시고도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의 회개의 제사를 받으시고도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하나님께서 영적인 예배와 진실한 예배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6). 하나님은 우리들의 예배와 제사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강변교회는 생동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첫째 목표로 정했습니다.

2. 생동하는 예배를 드려야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리는 사람은 건강해집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리는 사람은 치유의 은혜를 받습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이 치유됩니다. 불면증에 걸렸던 사람이 잠을 잘 자게 되고 소화가 안되던 사람이 소화가 잘 되고 신경질을 부리던 사람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꾸어집니다. 암에 걸렸던 사람이 암을 이길 수도 있게 됩니다. 불안과 공포에 쌓였던 사람이 평안과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예배 드리는 데서 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인데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이와 같은 변화가 나타납니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치유되고 깨끗해집니다. 얼굴도 환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쁨과 순전함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 한 사람은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깨끗함과 자유함을 얻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 쉼을 얻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예배 드리는 일에 정성을 기울일 때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정성껏 예배 드리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과 얼굴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우리 강변교회는 생동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제일 먼저 힘쓰기로 했습니다.

3. 어떻게 하여야 생동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만남이 있을 때 눈물도 있고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습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는 감동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생동하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솔직하게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마음을 열고 회개할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에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느끼면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대화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도 기도도 설교도 의식적이 되면 안되고 고백적이어야 합니다. 설교도 신학적인 강해나 윤리적인 교훈에 그쳐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고백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2. 생동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 위주의 예배 보다는 찬양과 기도와 말씀이 조화를 이루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씀도 중요하지만 찬양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100:2)라고 했고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시22:3)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강변교회의 예배가 찬양이 더 뜨거워지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생동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목사 위주의 예배 보다는 목사와 신자들이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적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동체적 예배였습니다. “서로 교제하며 기도하기를 힘쓰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양했다”(행2:42,47)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처럼 성가대 이외의 다른 부서에서도 가끔 특별 찬양을 할 수도 있고 두 세 명이 감사의 간증을 짤막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 생동하는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관심과 촛점을 예배자 자신에게 두는 대신 하나님 자신에게 두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예배 드리러 오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의 목적과 촛점을 하나님 자신에게 둡니다.

5. 생동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책임을 다짐하는 윤리 실천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예배는 공허한 예배, 추상적인 예배가 되고 맙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기로 다짐하는 예배가 생동하는 예배입니다. 선을 행하며 나눠 주기를 다짐하는 예배가 생동하는 예배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로 결심하는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됩니다.

6. 주일 하루를 거룩하게 지키기로 다짐하는 예배가 생동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인데 시간도 드려야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이 생긴 목적은 예배를 온전하게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예배를 위해서 제정한 날입니다. 주일 성수가 없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닙니다.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7. 생동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과 임재가 충만한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임재가 없이 생동하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도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라고 권면하면서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분부했습니다. 기도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와 평양의 장대현교회가 생동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비결은 성령의 감동과 임재가 충만한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감동과 임재를 사모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강변교회의 5대 실천목표 중 그 첫째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지음을 받은 목적과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강변교회가 여기 존재하는 첫째 목적도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므로 우리가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이제 우리가 다 같이 생동하는 예배를 드리도록 힘을 쓰십시다. 생동하는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여러분들에게는 축복이 되기를 바립니다. 금년 새해에 예배의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예배 시간과 모든 기도회 시간에 열심히 참석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영이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

박덕기 목사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지식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요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인간의 영생 여부와 관계되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되 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 중에서도 가끔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혹은 ‘하늘이 비를 주셔야 살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수있는데, 그렇게 막연한 하나님, 정체 불명의 하나님이 아닌 참 하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초상집에 가서 밤새도록 곡을 하고 나서 이튿날 ‘그런데 누가 죽었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사람이겠습니까? 소위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른다면, 절대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지 않고, 인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내가 어떤 인간임을 알 수있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아야,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화-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을 잘 아신다)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권속들도 하나님을 잘 아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있습니까? 불가지론 자들은 말하기를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파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알려 주신 것만큼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고, 또한 알려 주신 그 지식을 참된 지식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가 먼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시겠습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표현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영이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일종의 영'(a spirit)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관사 없이 ‘그는 영이시니라'(He is Spirit)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하는 단언에 포함된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영의 의미

1) 영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

하나님은 영이라는 말씀을 깊이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혼동하기 쉬운 일반인들의 영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적 존재’에 대한 사상들을 살펴보면

첫째-영에 대한 원시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물체 안에 정령들이 있다는 사상으로, 아직도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골 교회에서는 뒤뜰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에도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신자도 있다고 합니다.

둘째-미신적인 관점에서 본 영이 있습니다. 이는 귀신을 죽은 사람의 영이라 생각하는 것이라던지, 죽은 사람의 유혼을 영이라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인간의 영혼은 불멸하기 때문에, 그 영혼을 영으로 여기는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은 아닙니다.

넷째-물질적 세계는 악하고 불안한 세계요, 오직 보이지 않는 사상의 세계가 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2) 성경의 의미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함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요정이나 유령, 인간의 영혼, 이상적인 세계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신적 특성이라 함은 인간이나 인간 세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독특한 성격을 말합니다.

2. 영이신 하나님의 특성

1) 무형적 존재이심

영이신 하나님은 무형적 존재이십니다. 결코 인간들의 육체적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요 1:17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했고, 딤전 6:16에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피조물인 태양도 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절대로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기록들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그러한 말씀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실체를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상징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신 것을 뜻합니다.

2) 비물질적 존재이심

영이라는 말은 철저히 비물질적임을 의미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늘, 땅,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물질적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손, 발, 얼굴, 등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을 의인화하여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한 것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명의 근원자이심

에스겔 1장에는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신 곧 하나님의 영에 의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하는 큰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의 근원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3.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

1)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야 합니다.

육적 존재인 인생은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본분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만나 볼 수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배하고 신앙하는 자들만이 그 존재를 인식할 수있습니다.

2) 신령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물질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결코 물질적인 것으로 그 분을 형상화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릴 헌물이 있다면 성령의 감화 아래 드리는 인간의 사랑, 마음, 충성 등이며 이러한 섬김이 진정한 헌신이요 영적 예배라 할 수있습니다.

3) 진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이시기에 물질적인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수단 방법으로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만 섬겨야 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2. 인격적이신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 행동하시는 인격적이신 신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바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우상들과는 달리, 인간들의 뜻을 뛰어 넘어 자신의 거룩하신 뜻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이루어 나가십니다.

1.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성경의 증언

우리는 인격의 요소를 지성과 감정과 의지로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격의 삼요소를 갖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예민한 감성을 갖고 계시며, 그 감성중에 가장 뛰어난 특징을 사랑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또 완전한 지성을 갖고 계시며, 거룩하신 의지를 소유하고 계십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격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한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격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 곧 감정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불의한 인생들에 대한 예수님의 거룩한 의분, 또 불쌍한 인생들에 대한 한량없으신 긍휼하심은, 바로 인생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감정을 보여 줍니다. 그 모든 감정은 사랑에서 기인된 것임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까지 보내 주셨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우신 아기 안수 안에서, 그리고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정을 느낄 수있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산상 보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지성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스쳐 가는 생각까지 즉각적으로 아시던 주님의 통찰력은 모든 인간들의 지혜를 초월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지성을 보여 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인격적 존재라는 의미는 한 마디로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의지, 그 자체이십니다. 인생 구원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주 최대의 결단을 내리신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또한 모든 악의 세력들의 도전과 훼방을 물리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결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의지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2)인격적이신 하나님의 활동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격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인생들과 만물들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시고 계시는지 알아보시겠습니다.

첫째-인생들과 대화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 즉 인격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인생들과 인격적인 대화로 사귐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를 거절하고 거부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적인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을 해 오시고,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 곧 영생얻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인생들의 행위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들이 자신의 행동과 삶을 책임져야 할 까닭은, 바로 인격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생사 모두를 보고, 듣고, 판단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인생의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특히 인생들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 대신에, 인간과 물질과 세상의 허영들을 우상화하여 섬기는 것에는 맹렬한 진노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넷째-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한없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들

그렇다면 우리 인생들이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값으로 내주시기까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 인생들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전인격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고, 그 언약을 끝까지 의뢰하며, 그 언약에 합당한 존재가 되기를 힘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격을 존중해 드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중요합니까? 참 하나님을 알아야 영생을 얻게 되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바로 섬길 수 있고,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그것은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본질 중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물질적인 것으로 형상화하여 섬겨서는 아니되고, 오직 신령과 진리로 섬겨야 합니다. 곧 성령으로 거듭난 심령으로,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을 따라 섬기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는 대로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사랑과, 완전한 지성과, 거룩한 의지를 갖고 계시는데, 이렇게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와 대화하시기를 원하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므로 인생들의 모든 언행 심사를 다 감찰하시며, 불의에 대해서는 진노하시고,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교제가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주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인격을 걸고 언약하신 구원의 약속을 믿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며 존중해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배와 상징

김영대 목사

신앙 생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또한 핵심적인 것은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어떠한 것인지 그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또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의 심적, 외적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흔히 기독교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예배는 곧 설교를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물론 개신교 예배의 중심은 말씀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설교는 예배의 중요한 한 부분이지 예배의 전체는 아닌 것입니다.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보를 보더라도 거의 스무 가지의 순서와 절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매 예배의 순서와 절차에는 많은 상징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배 순서와 절차에 담겨진 상징성을 잘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에게 조금은 낯 설은 설교가 될지 모르지만, 예배 속에 담긴 상징에 대하여 여러분들과 나눔으로 좀더 의미 있고 뜻 있는 예배자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의 상징성에 관한 설교를 위해 뉴욕에서 함께 동역 했고, 지금은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인 이경재 박사의 책 “神바람 新바람 신바람”을 참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적인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상이라 해서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하여 예배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의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비치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비둘기, 촛불, 물고기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십자가는 그 크기나 재질에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달리신 고난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본래 죄수를 죽이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고 구원을 이루신 이후부터 십자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사형 틀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을 뜻하는 상징,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향하여 설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바라 볼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상징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좀더 예배와 관련된 구체적인 상징에 대하여 순서대로 말씀드림으로 예배자로서의 마음과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알아보겠습니다.

① 성전으로 들어오는 마음가짐과 자세: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 소위 편재(偏在: Omnipresent∼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하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지마는, 교회는 특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구별된 거룩한 곳입니다.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밖에 있는 특수한 곳, 그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들어 설 때는 세상과는 구별된 곳으로 들어온다는 마음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세상살이에 찌들은 모든 먼지를 벗어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의 구조는 신을 벗고 들어오도록 되어있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신발을 벗느냐 안 벗느냐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신발을 벗는 일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에 나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모든 때와 먼지와, 걱정과 근심, 세상의 생각들을 벗어놓고 들어 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신발을 벗지 않고 성전에 들어온 사람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놀라운 교통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얽매인 사정과 형편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의 마음을 잠시 비우고 세상과는 구별된 곳에 내가 들어온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급적 말을 삼가고, 옷매무새도 다시 한번 점검하고, 모자도 벗고, 껌도 뱉고, ‘하나님 내가 주께 나왔나이다’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는 성전에 나와 앉아 있으나 마음은 세상에 가 있다면 그는 헛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② 묵상과 안식: 예배드리려 성전에 들어온 사람은 자리를 정한 후 일단 묵상으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묵상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보통의 기도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말로서 드리는 것이라면, 묵상 기도는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로 나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말없는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실상 묵상기도는 가장 힘든 기도입니다. 묵상은 단순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이란 나의 생각을 어둡게 하는 것, 나의 생각을 잠재우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살이의 복잡 다단한 생각을 잠재우고 세상의 먼지를 가라앉혀 내 마음에 성령이 임재 하시도록 청소하는 작업이 곧 묵상입니다. 또한 묵상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내 마음의 조율 작업입니다. 즉, 묵상은 나의 영을 영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영과 교통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마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게 되면 우리는 심령의 평안함 즉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安息)의 문자적 의미는 편안히 숨쉬는 것을 말합니다. 편안히 숨을 쉬는 것은 편안한 마음에서만 가능합니다. 거친 마음에서는 거친 숨결이 나오고, 분한 마음에서는 분한 숨결이 나오고, 바쁜 마음에서는 바쁜 숨결이 나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숨결은 아마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속에서 잠들어 새근거릴 때의 숨결일 것입니다. 그것은 엄마의 따스한 사랑의 품속이 편안해서 그렇고, 또한 그 품속에서 아무런 걱정 근심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편안한 숨을 쉬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이 온통 전쟁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해서 할딱할딱 얕은 숨을 쉬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숨을 쉬고, 미움과 분노로 숨을 거꾸로 쉬는 일이 많으니 편안한 숨을 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일상 삶입니다. 그러나 주일, 즉 하나님의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데, 이 말은 하나님 안에서 숨쉬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바쁘고 힘들고 거친 세상적인 호흡을 멈추고 이 날 만큼은 편안히 숨을 쉬는 날, 또 편안히 숨을 쉬어야만 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와 하나님이 모두 편하게 숨쉬는 날입니다. 편하게 숨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하고, 우리의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은 상황적인 편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과 허물이 많아도 주께로 돌아오는 자는 넓으신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욕심 때문에 편안치 못했던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겸손함으로 누리는 편안함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편히 안식하기 위하여 나의 탐욕을 죽이고, 미움과 질투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더러운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즉, 세상적인 거친 호흡을 멈추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갖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과 호흡은 상호 깊은 연관을 갖고 있어서 편안한 마음이 되면 편안한 호흡을 하게 되지만,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편안한 호흡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편안한 깊은 호흡을 몇 번 하게되면 마음도 편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에 들어와 조용히 머리를 숙여도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십자가를 향하여 편안한 자세로 앉아 나의 편치 못한 생각을 내어 비운다는 생각으로 크게 숨을 내쉬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들인다는 마음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일을 몇 번 반복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온유하심과 평안하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안한 호흡과 나의 호흡이 하나가 되어 참다운 안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겁지겁 예배에 늦게 들어와 마음을 정돈할 여유도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벌써 반은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하여 적어도 10분전에는 교회에 도착하여 숨도 고르고 마음도 골라야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입례송과 촛불점화: 예배 의식이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는 입례송과 함께 예배가 시작됩니다. 입례의 입이라는 말은 설 입(立)자인 동시에 들어올 입(入)자인 것입니다. 즉, 입례송이란 서서 부르는 예식의 노래요, 들어오는 예식의 노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들어오길래 우리는 서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까? 우리교회에선 따로 제단에 불을 붙히는 점화자가 없이 예배인도자가 직접 촛불에 점화를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점화자가 제단을 밝힐 촛불에 점화할 불을 들고 맨 앞장서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불은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례는 성령님을 맞아들이는 상징적 예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님을 신령한 찬송으로 맞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정함으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아테네에서 채취된 불이 성화대에 점화됨으로 올림픽이 시작됨과 같이, 맞아들인 불이 제단에 점화됨으로 예배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제단의 촛불이 꺼지고 점화자가 퇴장함으로 예배가 끝이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 집례자의 퇴장 전에 교회를 떠나는 것은 예배를 끝까지 드리지 않은 것이 됩니다. 제단에 타고 있는 촛불은 예배에 임재 하시는 성령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어찌 촛불 속에 계시겠습니까마는 신령한 눈으로 제단의 불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마음속에, 그리고 예배 중에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④ 머리를 숙이는 것: 우리는 기도할 때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게 됩니다. 머리를 숙이는 것에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끼리 만나 인사를 할 때도 머리를 숙입니다. 키는 사람마다 정해진 것이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는 남보다 낮은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세 가지 구부러지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목이고, 둘째는 허리이고, 셋째는 무릎입니다. 목과 허리와 무릎이 다 구부러지는 것을 우리는 가장 낮아지는 모습의 ‘절’이라 하고, 목과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을 ‘인사’라 합니다. 절은 의자에 앉는 입식(立式)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지만, 좌식(座式) 문화의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이 바닥에 앉아있음으로 나를 가장 낮추는 모습으로 몽땅 구부러지는 것입니다.

의자와 침대 문화권인 서양에서는 절이라는 것이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살짝 굽힌다든지, 허리를 약간 굽힌다든지, 또는 머리를 숙인다든지, 아니면 이 세 가지를 다 섞어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인사를 합니다. 의자에 앉는 것 자체가, 바닥에 앉는 것과는 달리 완전한 구부러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 구부러짐이요 다시 펴지려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의자 문화권의 인사는 구부리는 인사보다는 뻗치는 인사가 발달하였습니다. 손을 뻗쳐 악수를 하고, 입술을 뻗쳐 키스를 하고, 온몸을 뻗쳐 포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식 문화권인 동양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반 구부러짐으로 ‘인사’를 하고, 군사부(君師父)에 대하여는 최대의 경의의 상징인 몽땅 구부러짐의 ‘절’을 하는 것이 바른 예(禮)인 것입니다. 불교 신도들이 부처에게 절을 한다든지, 이슬람교도들이 알라를 향하여 머리를 바닥에 조아린다든지 하는 것도 나를 가장 낮춤으로 상대를 가장 높이는 앉는 문화권의 상징적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예배의식은 바로 입식 문화인 서양에서 발달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낮추는 상징성으로 절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니라 고개를 깊이 숙이는 형식으로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무의식 적으로 그저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는 그 상징적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면 그 고개를 숙이는 그 행위만으로도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머리는 우리 몸의 제일 높은 부분이다. 그러므로, 고개를 숙인 다는 것은 곧 나를 낮춤으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높이는 상징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만한 사람을 가리켜 목이 뻣뻣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부드러운 목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머리를 숙이되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을 향하여 내 머리를 숙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머리를 숙이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머리를 당신께 숙이오니 내 뻣뻣한 목을 부드럽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한다면 그는 주님께 뿐만 아니라, 또한 이웃에게도 진심으로 사랑의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⑤ 두 손을 모으는 것: 머리를 숙이고 기도할 때 우리는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엄마의 배속으로부터 나올 때 두 손을 불끈 쥐고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죽을 때에 우리는 두 손을 펴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는 매우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세상에 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잡아야 합니다. 잡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의식주를 위하여 먹을 것을 잡아야 하고, 입을 것을 잡아야 하고, 거처할 곳을 잡아야 합니다. 의식주가 해결되면 더 나아가 우리는 명예를 잡기 위하여 분주하게 되고,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잡기 위하여 사방으로 뛰어다니게 됩니다. 인생은 온통 우리 손에 무엇인가를 잡기 위하여 헤 메이는 숨막히는 숨바꼭질과도 같습니다.

이같이 잡는 데만 익숙한 우리들은 영이신 하나님도 우리의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손을 깍지껴 굳세게 하나님을 잡으려는 모양으로 기도를 합니다. 물론 이것은 기도자의 간절함을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바람을 잡았다고 생각할 때에 바람은 이미 우리의 손 사이를 빠져나가고 맙니다. 역설적으로, 바람을 잡기 위하여 우리는 손을 펴야 합니다. 손을 펼 때에 바람은 우리의 빈손을 지나가고 우리의 빈손은 바람 속에 놓여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신 하나님을 깨닫기 위하여 우리는 손을 펴야 합니다. 우리의 손에 쥐어진 나(ego)라고 하는 아집과 주장과 생각을 펼쳐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세계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빈손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빈손의 모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하는 모습의 상징입니다.

⑥ 기도와 찬송: 묵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생활화되지 않은 사람은 눈을 감아도 잡생각이요, 눈을 떠도 잡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사람은 묵상으로 기도하기보다는 소리내어 통성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통성 기도는 산란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는데 매우 효과적인 기도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내 입으로 말하고 내 기도를 내 귀로 들음으로써 내 마음의 주파수를 하나님을 향하여 맞출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묵상기도도 통성기도도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그저 주님의 이름만을 진심으로 부르면 됩니다.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한 마음의 소원과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정돈되고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신령과 진정으로 부르는 사람에게 주의 성령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찬송은 노래는 노래 되 보통 노래가 아닌 영적인 노래, 하나님과의 교통에 필요한 주파수가 맞추어져 있는 노래입니다. 그러기에 찬송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노래로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찬송을 부르다 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되 신령과 진정으로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어느새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싹트게 되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평화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⑦ 교독문과 신앙고백: 교독문이란 문자적인 뜻은 예배인도자와 회중이 교차하며 읽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Responsive Reading이라고 하여 서로 응답하여 읽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의 말씀을 교차하며 읽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배가 사회자나 설교자의 단독 무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느 한 두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교독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없으면 참여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즉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하여 같은 신앙을 고백하므로,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은 우리 믿음의 고백인 동시에, 그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의 한 식구 즉, 한 형제요 자매임을 나타내는 공동체적인 상징,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아무 뜻 없이 그저 앵무새처럼 외워서도 안되고 다른 사람과 속도를 달리해서도 안 됩니다. 한 목소리로, 한 마음으로, 한 속도로 사도신경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공동체성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배의식과 절차에 담긴 상징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시고 좀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자의 마음과 자세를 갖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질문과 묵상)

1. 나에게 예배는 참 마음의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짐스러운 것입니까?

만일 짐스럽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바리새인의 기도는 받지 않으시고 세리의 기도는 받으신 까닭은 무엇에 있습니까?

3. 나의 예배에 임하는 마음과 자세는 신령과 진정의 자세입니까?

4. 오늘 설교를 통하여 새롭게 깨달은 것이나 결심한바가 있다면 그것을 나누십시다.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

조상호 목사

한국의 예은교회에서 시무하시는 김학현목사님의 글에 실린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고 느낀 것이 있어서, 먼저 그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명절이 네 번이 지났으나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아이가 2000년 4월4일 망우동 집 근처에서 나가 지금까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준원이는 매우 영리하고 귀여운 아이입니다. 아이를 찾기 위해 생업도 포기하고 전국을 찾아 헤매었으나 지금까지 못 찾았습니다. 우리 준원이가 가족과 헤어진지도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얼마 전 준원이 생일에는 주인공이 없어 저의가족은 식탁 앞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일이 세 번이나 지나갔습니다. 금년엔 평소에 그렇게도 보채며 보내달라던 초등학교에도 가야 되는데… 취학 통지서도 준원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괴롭고 힘이 드는군요. 사회가 원망스러워 세상을 포기하고픈 심정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나,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하면 목이 메어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준원이를 잃은 후 모든 시간이 멈췄습니다. 준원이를 하루빨리 찾지 못한다면 우리 가정은 미래도 없고, 결국 지쳐 결딴나고 말 것입니다. 도움을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가족의 꿈과 희망을 찾아주세요. 저의 가족의 전부인 준원이를 찾아주세요.”

준원이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찾는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준원이를 잃고 나서 3년 동안 이 아빠의 생각은 오직 아들 준원이 찾는 데에게만 맞춰져 있습니다. 준원이 하나 찾으려고 생업도 포기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그 아빠는 3년 동안 길거리에서, 놀이동산에서, 초등학교에서 수백 명,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준원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빠는 준원이가 아닌 다른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아빠는 수만 명의 다른 어린이가 아닌, 오직 준원이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교회 안에 엄청난 돈을 가진 부자도 있고, 많이 배워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혼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예배자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누구를 찾으신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유독 예배자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수만 명의 어린 아이를 보고도 여전히 준원이를 찾아 헤매는 준원이 아빠처럼, 하나님께서는 이곳에 수백 명이 모여 있다 할지라도, 이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원어로 ‘제테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원한다’는 강렬한 소망이 담겨져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누가복음 15장에서 유사하게 사용되었습니다. 100마리의 양을 키우던 사람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맬 때, 10개의 드라크마를 소유하고 있던 여인이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켠 채 온 집안을 쓸면서 찾아 헤맬 때, 아버지가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강렬하게 원할 때 이 단어가 유사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의 심정으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수가 모였느냐하며 수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수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적게 모였든지 많이 모였는지에 관심이 있지 않고, 오직 예배자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적은 수가 모였다 할지라도 그 안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자입니까?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 헤매는 아버지처럼, 지금도 찾으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예배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우리들 멋대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생각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제 멋대로 드려서는 안 된다.

성경을 보면 제 멋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 중에 레위기 10장에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등장합니다. 레위기 10장 1절과 2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 두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사람입니다. 레위기 10장 9절에서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나답과 아비후는 술을 마시고 성막에 들어가 제 멋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당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각대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또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사울왕은 자기 멋대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무엘 선지자가 그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망령되이 행함으로 그의 왕위가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저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배를 우리 생각대로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온전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온전하게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십니다. 사무엘상 7장 9절을 보면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응답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무엘이 온전한 번제, 다시 말하면 그가 온전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온전한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보다는, 구경꾼이 되어 예배를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예배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어느 글에 이러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한 부부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김 집사댁 자동차가 3000cc 로 바뀐 것 보았어요?”라고 묻자, 남편은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가 “그러면 박 장로님 사모가 밍크 코트 입은 것 보았어요?”라고 묻자, 남편은 “몰랐어.”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아내가 “그러면 오늘 설교할 때 목사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 진 것 보았어요?”라고 질문하자, 남편은 “설교 듣느라고 정신없었어.”라고 대답합니다. 아내가 열을 받아 남편에게 “그러면 오늘 특별 찬양한 이 집사 입술이 너무 너무 진하게 칠하여 진 것 보았어요?”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역시 “그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예배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하나도 못 보았어요? 예배 시간에 잠만 잤어요?”라고 따져 묻자, 남편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 십자가가 눈을 가리워서 눈물만 났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예배를 어떻게 했습니까?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입니까?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예배 보러 가자. 예배 보고 왔어요. 오늘 주일예배 봤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분, 누가 예배를 보실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예배를 보십니다. 만약 ‘예배를 본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보이고,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 인도자가 보이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 스타일도 보이고, 목사의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도 보이고, 졸고 있는 앞 사람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는 예배에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보이는 것’보다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최상의 존재에게 최상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히브리서 11장 4절에 그 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두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라는 단어와 ‘드림’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아벨이 제사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벨과 가인의 차이점입니다. 가인과 달리,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배를 보려고 하지 말고, 아벨처럼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환경이나 분위기나 옆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까에 관심을 쏟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비결이 또 한가지 있습니다. 24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어떻게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배하는 자는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라.

이 말씀에 의하면 성공적인 예배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신령으로 드려야 합니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깨끗한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드리는 예배를 신령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으로 예배드리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으로는 ‘in spirit’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령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령으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예배드리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로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여기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말에서 ‘진정’이라는 원어는 ‘에바르세이아’, 영어로 ‘truth’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의 원뜻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된 예배가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은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에는 성령과 말씀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예배자는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예배에 몸만 참석하는 분이 있습니다. 몸은 이곳에 참석하고 있지만, 머리 속에는 회사가, 공장이, 낚시터가, 골프장이 왔다 갔다 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아내나 친구들에 의해 끌려오다보니, 예배 시간에 자꾸 시계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예배시간 내내 주보만 들여다보며, 철자 틀린 것 찾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비싼 돈 주고 노래방에 가야 하는데, 돈도 들이지 않고 음악 좋고, 반주 좋으니까 따라서 흥얼거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겠다고 생각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배 후에 있을 회의를 준비하기 위해서 예배 시간에 앉아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이러한 경우에 자주 빠집니다. 또 예배 후 썸너 비치에 가서 함께 커피 마시자고 했던 친구가 나왔는지 안나왔는지 자꾸 시선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업을 생각하면서 주보에 열심히 계산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의 모습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주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록펠러(Rockefeller)씨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믿음이 좋은 어머니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들 록펠러에게 ‘십일조를 꼭 드려라’, ‘목사님 말씀에 항상 순종하라’, 등의 10가지 유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10가지 중에서 가장 첫 번째는 예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 록펠러에게 “너는 예배 30분전에 도착하여 언제나 맨 앞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가장 정성껏 예배를 드려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록펠러는 평생동안 그 유언을 지켰다고 합니다. 항상 예배 시간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엄청난 복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하는 예배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려고 전날부터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숨 걸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에게 은혜와 축복을 부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배에 인생의 승부를 걸 수 있기 바랍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에게 축복하신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의 인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예배자‘ 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 조카 롯이 요단 동편 물이 넉넉한 곳을 선택하여 떠난 후에 그는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이사하는 곳마다, 가장 우선적으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이 모습을 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형 에서를 피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벧엘에서 돌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십 년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후, 벧엘에 가서 또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곱이 비록 형을 속이는 사기꾼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자기 한 목숨 살겠다고 처자식들 다 먼저 얍복강을 건너가게 하는 비열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예배자였습니다. 그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대결을 하면서 뜬금없는 행동을 합니다. 일단 싸움을 하려면 무기를 준비한다든지 밥을 많이 먹고 원기를 회복한다든지, 운동을 해서 근육을 키운다든지 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무너진 돌단을 다시 쌓아놓고 그 위에 제물로 송아지를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셨고, 결국에는 홀홀 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미국의 시애틀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 사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 명 모두가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지 못해 고졸 졸업장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최고의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빌 게이츠’입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서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중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재산이 많은지 오늘 인류역사에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 재산이 1천억 불, 환화로 계산하면 120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몇 년 만 지나가면 그의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져서 전 영국국민의 재산을 다 모아야 빌게이츠 한사람의 재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보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항공기를 만드는 보잉 항공사를 세워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 생산 회사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비행기는 크게 두 종류로, 엔진이 뒤꽁무니에 달린 비행기와 엔진이 날개에 달려 있는 비행기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에서 많이 쓰고 있는 보잉 747 항공기는 다 엔진이 날개에 있다고 합니다. 그는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대형 항공기 시장을 보잉사가 거의 지배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맥 콜드’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핸드폰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은 맥 콜드가 발명한 것입니다. 또 한사람은 ‘코스트’라고 하는 회사를 설립한 사람입니다. 보잉과 함께 합자한 회사로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애틀 출신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된 이 네 사람을 조사해보니, ‘라이크 우드’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성경말씀을 배우고 훈련받았다고 합니다. 그 주일학교 선생님은 세상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가장 복된 삶을 사는 비결임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주일학교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네 사람이 현재에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맨 먼저 무엇을 한 줄 아십니까? 교회 짓고 예배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학교를 지었고, 맨 나중에 자기 집을 지었습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 비결은 조상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성공은 곧 인생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지혜의 왕 솔로몬을 기억하십니까? 그가 받은 지혜와 축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일천 번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림으로 솔로몬은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엄청난 지혜를 받은 것입니다. 다윗이 특별하게 쓰임 받았던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에 다윗은 자기의 몸이 드러날 정도로 여호와 앞에서 뛰고 춤추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아내 미갈이 비웃었지만 다윗은 개의치 않고 여호와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여호와를 찬양했기에 하나님이 다윗을 귀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은혜를 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하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것은 다 실패해도 예배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우리의 심령에 생수의 강이 넘칩니다. 생수의 강이 넘치면 인생이 풍성하게 되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인생이 늘 푸르고 많은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해 예배하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 교회는 말씀을 회복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모든 성도를 제자로 세우기 위해 말씀으로 열심히 훈련했고 또 다음 주부터 8기 제자훈련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또 평신도 사역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3년 동안 벌버둥을 쳤고 이제 4기 사역훈련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는 기도훈련도 받았습니다. 비록 적은 숫자이지만, 네 차례에 걸쳐 선교의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우리는 드리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형식적인 예배를 드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1장 8절에서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흠집 난 선물을 받아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어떠한 느낌이 들던가요? 곰팡이가 잔뜩 핀 미숫가루, 썩어서 냄새가 풀풀 나는 생선, 시커멓게 변질되어 버린 고추장 등을 선물로 받았다면 어떠한 느낌이 들까요? 선물을 준 사람에게 감사를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사람을 욕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주려면 좋은 것을 주시고, 좋지 않은 선물은 아예 주지 마십시오. 괜히 상한 것, 섞은 것, 변질된 것 주었다가 욕먹기 십상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의 봉사와 우리의 사역이 힘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우리들의 영혼이 살찌게 될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예배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예배를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예배시간에 늦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은 11시가 아니라, 10시30분입니다. 이것은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여러분, 주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배 시간부터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도응답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해야 인생에 성공합니다. 예배는 하늘의 축복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예배가 회복될 때, 무너진 가정이 회복됩니다. 예배가 회복될 때, 우리의 일터에서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성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세 주셨던 지혜를 주셔서 우리의 학업이 크게 진보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부흥이 있을 때, 교회의 부흥도 일어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우리 교회에서 예배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예배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행위

김홍도 목사

예배는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가치 있고 가장 복된 행위입니다. 또 예배 시간은 인간이 가지는 모든 회합이나 모임 중의 가장 고귀하고 보람 있는 시간이며 모임입니다. 대통령들이나 수상들의 모임이나 회담보다도 고귀하고 보람 있는 모임입니다. 예배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모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목적도 인간으로부터 찬송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또 인간을 율법대로 심판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버려두시지 않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셔서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게 하심도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도 없고 경배할 것도 없습니다. 구원받는데 인간의 행위가 10%가 포함되었다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10% 빼앗기게 됩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11절에 “내 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독생자를 대속 제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신 목적도, 우리를 통하여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삶의 목적은 돈 버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시집 가고 장가 가고 자식 낳는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업이요, 다른 것은 다 부업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에 가다가 멈출 때마다 진 중앙에 성막을 제일 먼저 세우고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치고 생활한 것도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교회 중심 즉 예배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것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신약 시대의 예배이기 때문에 예배를 이와 같이 귀중히 여겨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 하시면서 자자손손 큰 복을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정성을 다하여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꿈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줄꼬” 하시며 지혜뿐 아니라 재물의 복도, 장수의 복도, 강한 군사력의 복도 다 주셨습니다. 이것도 한마디로 예배를 잘 드려서 받은 축복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 때문에 축복받아 부자가 된 롯은 재물에 탐심이 있어서 기름진 땅 요단들을 선택하였고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까지 들어가 살면서 부자가 되고 벼슬까지(성문에 앉음) 했지만 전혀 제사드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결국 집과 재산이 다 불타고 롯의 처는 소금기둥이 되어 죽었고 딸 둘은 성민의 원수,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패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든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배생활에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크리스천이 예배생활에 승리하면 모든 일에 승리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배를 등한히 하고 교회와 멀어지기 시작하면 일시적으로는 별 탈 없이 돈도 잘 벌고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아도 결국 영육 간에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 조상 퓨리턴들이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 미 대륙으로 건너가 상륙하자마자 자기들의 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학교를 지은 것도 아니고 예배드리기 위해 제일 먼저 예배당을 지었던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부강한 나라가 되고 보니까 성도들이 예배는 안 드리고 들로, 바다로, 놀러다니느라고 교회마다 텅텅 비어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미국인이 “우리의 증조부들은 주일을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했는데 조부들은 그냥 안식일이라고 부르더니 부모님 때 와서 일요일이라고 하고 오늘날엔 주말(weekend)이라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영적 타락 상태를 보여주는 말이라고 봅니다.

몇 년 전, 제주도 행 페리호가 침몰하여 수많은 사람이 사망했는데 그 날이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그 사망자 가운데는 장로님도 있었는데 장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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