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과 다윗 | Cbs 성서학당 사무엘서 18강 \”사울과 다윗의 차이 I\” (송태근 목사) 54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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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사무엘서 18강 \”사울과 다윗의 차이 I\” (송태근 목사)
본문말씀 : 사무엘상 17:47
1. 다윗의 왕으로서의 업무
2. 다윗의 준비된 영성
3. 다윗과 사울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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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사울의 차이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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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성서학당 사무엘서 18강 \”사울과 다윗의 차이 I\” (송태근 목사)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사울 과 다윗

  • Author: CBS성서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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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5. 2.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2qGV5Yq4O9I

다윗과 사울의 차이

제목: 다윗과 사울의 차이

본문: 대상10:7-11:3

06. 11. 12 향기나무성서침례교회 오후예배

서병안 담임목사

중심명제: 믿음의 삶은 정해진 결과보다 순종과 불순종의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1. 우리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성공한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따랐어!”

실패한 사람에게는 “저 사람은 참 운이 없는 사람이야, 아마 운명이 그런가봐!”

2. 만약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의 사울 왕은 참으로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왕이 되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비참한 운명이 아닙니까? 이런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

까? 아닙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3.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우연으로 보였는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결코 우연

이나 운명은 없습니다. 한 개인의 성공이나 실패에도, 한 민족의 흥망성쇠에도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이 아닌, 자기의 판단하고 선택한 것에 따라 일어난 결과입니다.

한 개인이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헌신하였는가? 거기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결정됩니다.

4. 오늘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과 두 번째 왕인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사울 왕과 다윗의 삶을 비교하며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게 된 이

유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사울의 어떤 점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울을 포기하게 만들었

고, 다윗의 어떤 점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윗을 선택하게 했는지 찾아본다면 우리들의

삶에 대한 태도도 분명히 달라지리라고 믿습니다.

Ⅰ. 사울과 다윗은 처음에는 비슷한 환경이었습니다.

A. (삼상9:21)사울은 이렇게 자신을 표현합니다.

1)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고 나의 가족은 베냐민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다”

2) 다윗도 비슷한 환경입니다. 다윗은 시골에서 양을 치며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 이새

의 여덟 형제 중 막내입니다.

1. 사울 왕과 다윗, 두 사람 다 효자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① 사울은 아비의 명령을 따라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갑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늦어지자 부친이 걱정할까 염려했던 효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② 다윗도 아버지의 명령에 불평함 없이 위험한 전쟁터로 형들을 위해 심부름을 가기

도 했었고, 자기에게 주어진 양치는 일을 묵묵히 행하던 성실한 사람입니다.

③ 두 사람 모두 외모도 좋았습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잘생긴(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더라)사람

이었고 다윗도 혈색이 좋고 눈빛이 빼어난 준수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같은 시대,

비슷한 환경 가운데 살았고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➃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어떤 차이점이 전혀 다른 삶의 결과를 낳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이렇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까?

(자 이제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Ⅱ. 사울은 사람을 의지했고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A. 사울은 사람들을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1. (삼상14:52)“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보면 그들을 불러 모았더라”

사울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수시로 힘 있고 용맹 있는 자들을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았습니다.

① 그런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지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해합니다.

왜 입니까? 결국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시62:9)

② 마찬가지로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주위에 힘 있고 용맹 있는

자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안해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

두고 안절부절 하지 못합니다.

③ 왜냐하면 자신의 주위에 있는 군사보다 블레셋의 군사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인 블레셋 사람들의 규모가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이고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의 군사들을 모두 합쳐도

수적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모두 합해도 삼십 삼만 정도입니다)

➃ 백성들이 겁을 먹고 흩어지기 시작하자 사울 왕은 몹시 어찌할 줄 모릅니다

사실 백성들이 모두 흩어져도 하나님만 계시면 승리는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는 실패하

고 맙니다. 사람은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하게 되면 실수를 하게 됩니다. 흩어지는

백성들의 마음을 붙들어 놓기 위해 제사장이 드려야 할 번제를 사울 자신이 직접

드립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고 말합니다.

2. 반대로 다윗은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①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울 때 이렇게 외칩니다.(삼상17:45-47)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

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

고 //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하나님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②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칼이나 창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쟁에 나갔을 때 그는 승리했습니다.

B. 다윗은 말씀에 순종하기를 즐겼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했던 사울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됩니다.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보다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바라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

종하기가 점점 어렵게 됩니다.

① 사울 왕은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변명을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단호

하게 책망하십니다.

(삼상13:13-14)”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

였도다 그리 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

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

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②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울 왕이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음을

보고 사무엘이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15:26)“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

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라”

사울 왕의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께 버림받음입니다.

2. 반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을 파하고 평안히 거하게 해주시자 하나님의 전

을 건축하려고 생각합니다.

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피묻은 손이 아닌 그의 자식의 손

으로 짓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②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이 직접 짓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

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자기 아들인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

하게 합니다.(대상22:6-8)

③ 이 순종의 결과로 다윗과 그의 나라는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

습니다.(삼하7:16)

C. 여러분에게 질문 한 가지 드립니다.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람의 죄와 어느 죄가

더 큰 죄가 되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1. 자 이제 한 번 따져 봅니다.

① 다윗의 지은 죄는 간음죄, 살인죄 = 자신의 충성된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밧세바가 임신을 하자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우리아를 죽게

만듭니다.

② 사울의 지은 죄는 불순종의 죄= 그는 간음, 살인을 하지 않았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은 남겨 두고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했습니다.

③ 외형적으로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윗은 간

음과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이유로 왕위를 빼앗깁니다.

2. (삼상15:22-23)“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

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

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

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우상과 마귀적인 힘을 숭배하는 점술)의 죄

와 같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완고한 것(하나님의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

까지 버티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②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죄도 악하지만 보다 더 큰 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 두 번째는)

Ⅲ. 사울은 후회가 있었지만 다윗에게는 회개가 있었습니다.

A. 다윗은 범죄 한 후 하나님의 지적이 있을 때 그는 바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습니다.

1.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책망을 합니다.

(삼하12:9-10)읽을 것.

①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시51:1-14)

(삼하12:13)“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이에 나단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요, 하지만 당신의 낳은

아이는 죽을 것이다”

B. 반면에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를 지적해도 회개는 커녕 오히려

두 번씩이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핑계를 댑니다.(삼상15:3-27)

1. 사울은 모든 것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각 왕을 사로잡고 좋은 것을

남기고 낮고 가치 없는 것만 죽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

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v.14)”사무엘이 가로되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① 사울은 다시 핑계를 댑니다.“백성들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

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하나님에게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

고 듣는 것을 숫양의 기름보다 좋아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왕을 버려 왕이 되

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② 이때서야 비로소 사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이 때는 이미 사울은 회개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③ 자신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그는 돌아가려는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았

습니다.

(삼상15:27)“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

진지라”

➃ 차라리 그럴 것 같았으면 미리 회개했어야지, 뒤늦게 후회하는 사울의 모습이 얼마

나 비참합니까? 이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

라를 당신에게 떼어서 당신보다 나은 당신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 오늘 본문 대상13-14절에 보면 사울의 죽은 이유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 여호와께 묻지 아니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① 사울왕의 범죄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일과 하나님께 묻지 않은 일로 인하

여 하나님께서 저를 죽이셨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사울에게 회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에게 회개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회개하기를 외면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다윗에게 돌린 것입니다.

② 만약 사울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돌이킴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

권을 사울의 가문에게 영영히 주었을 것입니다.(삼상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

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

라” 이런 이유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③ 사울 왕이 자기 인생의 결과를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살 수 있었을까요?

이런 결과는 사울 자신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원치 않았겠지만

사울이 행하고 선택한 결과가 그런 삶을 만들어 간 것입니다.

➃ 사울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했을 때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한 것처럼, 우리

들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했을 때 우리들도 말씀에 불순종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됩니다.

사울이 회개치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왕위를 옮긴 것처럼 우리들도 회개치 않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두신 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Ⅳ. 순종과 불순종,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1. 나의 선택에 따라 나의 삶이 사울 왕처럼 비참한 삶이 될 수도 있고, 다윗의 삶처럼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요구를 하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제26일, 삼상 16-31 장, 사울과 다윗

3) 16-26장, 사울과 다윗

(1) 16-17장, 좋았던 시절

16장, 사울이 다윗을 만나게 된 것은 사울의 통치 42년 중에 15년이 지났을 때쯤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의 다윗은 이새의 막내아들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위대한 사람의 기준이 사람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을 알려 주며, 하나님께 선택되어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세워지게 됩니다(16:1-13).

반면에 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났고 악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어(16:14)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유대 땅 언덕에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의 노래를 작곡하고 수금을 연주했던 목동 소년 다윗을 통하여 사울의 고통을 치료하게 하십니다(16:14-22).

17장, 블레셋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전투가 엘라 골짜기에서 벌어진, 두 군대를 대표하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물매를 사용한 다윗이 이기므로(17:24-49) 블레셋은 물러가고, 사울에게 다시 알려진 다윗은 사울의 수행원이 되어 기브아로 가게 되었고(17:55-58), 사울의 상속자이며 아들인 요나단과 아름다운 우정을 쌓게 됩니다.

* 싹난 지팡이, 다윗의 모형적인 성격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기름부음 받음’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명칭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리스도를 미리 예고하여 준 이스라엘 최초의 왕입니다(사울도 기름부음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울은 다윗과 심각한 대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론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사가 선지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다윗이 세 번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첫번째는 베들레헴에서 사무엘로부터이며(삼상 16:13), 두 번째는 유다 사람에 의하여 헤브론에서 받았습니다(삼하 2:4). 그리고 세 번째는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에 의해 헤브론에서 받았습니다(삼하 5:3). 이는 다윗이 메시아의 조상으로서 세 가지 직책에 모두 합당한 것을 설명하며, 그리하여 메시아가 가진 선지자, 제사장, 임금의 세 가지 직분의 성격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시기 이전에 이미 수 세기 전부터 다윗을 통하여 충분하게 모형화되어 나타났던 것입니다. .

(2) 18-26장, 좋지 못했던 시절(시편 59, 56, 34편)

(가)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 이후에 전쟁 영웅이 되었고, 열정적으로 그의 공적을 찬양하는 여인들의 찬사로 말미암아 사울은 화가 나서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사울은 골리앗을 물리치는 사람에게 자기의 사위로 삼겠다(첫째 딸 메랍)는 약속을 하지만 지키지 않았고, 다윗을 죽이고자 블레셋 사람 100명을 죽인 증거를 가져오면 자기의 둘째 딸 미갈을 주겠다고 하여, 다윗은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미갈과 결혼하였으며(18:26-29), 다윗은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명성을 얻습니다.

(나)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왕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과 동맹을 맺었고(19:1-7). 미갈의 도움으로 도망하게 됩니다(19:8-17).

(다) 기브아를 떠난 다윗은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나, 다시 라마의 사무엘에게로 피신합니다. 이에 다윗을 발견한 사울이 그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부하들을 혼란시키셨으므로 꼼짝할 수 없게 됩니다(19:18-24).

(라) 요나단과 다윗은 전략을 짜고, 요나단의 도움을 받은 다윗은 서로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서약한 다음 슬픈 작별을 합니다(20:1-42).

(마) 무기와 식량이 필요한 다윗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골리앗의 검을 갖게 되었지만 아히멜렉에게는 거룩한 떡만 있었으므로 다윗은 그들이 성결하다는 사실을 제사장에게 확인시켜 준 후에 떡을 소년들과 함께 먹습니다(21:5-6).

(바) 그 와중에 사울의 용병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도엑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준 일을 사울에게 알렸고, 다윗은 골리앗의 고향 블레셋의 가드로 피신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다윗은 미친 행세를 하여 가드의 왕 아기스를 속이고 위험에서 벗어납니다(21:7-15, 참고, 시 34:1-22).

(사) 예루살렘과 라기스 사이의 아둘람 굴에 은신하던 다윗은 약 400명의 지지자를 가지게 되었고, 부모의 안전을 우려하여 그들을 증조모 룻의 고향(모압)으로 피신시킵니다.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아둘람을 떠나 헤렛 숲으로 갈 것을 지시했고(22:3-5), 도엑을 통해 다윗을 도와준 아히멜렉의 이야기를 들은 사울은 제사장과 놉의 모든 거주민과 짐승들을 학살합니다(22:6-19, 시편 52:1-7). 이에 다윗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에게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맹세했고(22:20-23), 다윗이 왕위에 오른 후에 맹세대로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됩니다.

(아) 그일라의 유대인을 공격한 블레셋을 다윗이 아비아달의 에봇(우림과 둠밈)의 판결에 따라 공격하게 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그일라로 오는데,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다윗은 그일라를 떠납니다(23:1-13). 그리고 요나단은 마지막으로 다윗을 만나 그가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줍니다(23:14-18).

* 싹난 지팡이, 아비아달의 에봇(우림과 둠밈)이라 함은 아비아달의 제사장 역할을 말합니다(삼상 14:3).

(자) 십 광야 그리고 엔게디의 동굴 피신처

십 광야에서 유다 지파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 피신한 다윗은 엔게디의 동굴에서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만나게 되지만 사울을 살려 줍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손으로만 처벌된다는 것을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24:1-22, 시편 57, 142편).

(차) 황무지에서의 피난살이(나발과 아비가일)

사무엘의 죽음을 간단하게 요약한 후에(25:1) 황무지의 피난살이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므로, 다윗은 주위 사람들과 동료 지파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주었으며 그들의 것을 강제로 탈취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많은 가축을 가진 나발은 다윗의 덕을 많이 보았으나 다윗의 요청을 퉁명스럽게 거절합니다. 이에 화가 난 다윗이 공격을 결정하는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찾아와서 용서를 빌고 음식물을 전하므로(25:18) 그녀는 나발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전말을 들은 나발은 심장이 멎어 죽고 맙니다(25:32-38). 이에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아들이지만(25:39-42), 다윗이라 할지라도 여러 명의 아내(사울의 딸 미갈,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들을 취하는 일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일은 아니었습니다(구약 탐험, 251쪽).

(카) 네게브 광야

이미 다윗을 배반했던(23:19-23), 다윗과 같은 지파의 사람들이 또 다시 사울에게 밀고하여 사울은 네게브 광야의 깊은 곳까지 다윗을 추격하지만, 오히려 다윗은 조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가서 죽일 수 있었던 사울을 살려 주고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26:6-12). 그리고 다윗의 추궁으로 인하여(26:17-20)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뉘우치며 결국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고백합니다(26:21-25). (참고, 광야에서, 시 63:1-11, 시 57:1-11, 시 142:1-7, 시 54:1-7)

타) 사울의 맹세를 그리 낙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다윗은 다시 블레셋의 가드 땅으로 피신합니다(27:1-4). 이번에는 지난 번에 미친 척한 것과는 달리 블레셋 사람들과 동맹하여 사울 왕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에게 시글락을 봉토로 제공합니다(27:5-7).

다윗의 유랑기, 기브아(사울) – 라마(사무엘) -놉(아히멜렉) -가드(아기스) -아둘람 굴(불평분자) – 마사다 – 모압(다윗의 양친) -그알라(블레셋과의 싸움) – 십 광야 – 엔게디 – 마사다 – 갈멜 – 십 광야 – 가드 – 시글락 – 헤브론(왕으로 즉위)

다윗은 이곳에서 아말렉 족속을 공격하면서 아기스에게는 동족 유다를 공격한 것처럼 위장하였고(27:8-12) 전리품은 훗날을 내다보고 유다 사람들에게 나눠 줍니다.

4) 28-31장, 사울의 죽음

28장, 엔돌로 간 사울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아기스와 맺은 협정으로 인하여 다윗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28:1-2), 한편 블레셋 군을 맞아 싸움을 벌이게 된 사울은 사무엘이 세상을 떠났고 모든 박수와 무당을 쫓아냈기 때문에 아무 조언 없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엔돌에 하나 살아남은 신접한 여인에게 점을 치러가서 사무엘의 영을 불러달라고 하는데, 나타난 사무엘로 보이는 영에 의하여 사울 자신과 그의 아들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28:15-19). 이 소식에 절망한 사울은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29-30 장, 시글락으로 돌아온 다윗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을 전쟁에 참여시킬 수 없다 하여 천만다행으로 어려운 자리를 모면하고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29:6-11) 그런데 그 동안에 아말렉 족속들이 쳐들어와서 자신의 아내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잡아간 것을 알게 됩니다(30:1-6).

이에 다윗은(아비아달의 에봇으로) 하나님께 물어 보고 대답을 받아 아말렉 족속을 추격하여, 브솔 시내에 이르러 군대를 둘로 나누어 극도로 지친 200명은 남겨놓고 400명으로 하여금 전투를 치르게 하여(30:7-10), 아말렉 족속을 거의 전멸시키고 빼앗긴 사람들과 물자를 되찾은 것은 물론(30:16-20) 전리품을 챙겨 모두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헤브론이 소개되는데 이곳은 후에 다윗이 왕이 되어 첫 번째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30:26-31, 삼하 2:1-4, 시 18:1-50).

31장, 길보아 전투(참고, 대상 10:1-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보아 산에서 패하였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입니다. 사울이 부상을 입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31:1-6).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겨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 진군하여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가지고 야베스에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11장, 사울에게 은혜를 입은 길르앗 족속의 보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과 인근의 중요한 지명

기브아. 기브온, 길갈, 길르앗 야베스, 단(라이스), 디르샤, 라마, 벧엘, 베들레헴, 브엘세바, 사마리아, 세겜,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예루살렘, 헤브론, 가사, 아스돗, 아스겔론, 에그론, 가드(블레셋의 다섯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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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시대의 중요한 지명

기브아. 사사시대의 중요한 도시로 하나님의 성막이 있던 곳(삼상 10:5, 하나님의 산)이며 하나님의 기브아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습니다, 사울 왕의 고향이었으며(삼상 10:26, 삼하 21:6), 종교적 암흑기요 영적 혼란기였던 사사시대의 윤리적인 타락상을 보여주는 곳(베냐민의 기브아, 호 10:9)이기도 합니다(삿 19-20 장).

기브온. 가나안의 중부 지방에 있는 가나안 부족(히위 족속, 수 9:3 /아모리 족속, 삼하 21:2)으로 여호수아를 술책으로 속이고 화친을 얻어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종)들이 되었습니다(수 9장).

(1) 여호수아가 아모리 족속과 싸울 때 이 성 위에서 해를 머물게 하고 이겼습니다(수 10:12-14).

(2) 사울이 이 성의 사람들을 많이 죽인 까닭에 3년간 기근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이 다윗 왕의 허락을 받아 사울의 자손 7명을 죽입니다(삼하 21:1-6).

(3) 다윗이 제사장 사독으로 이곳 성막에서 매일 번제를 드리게 합니다(대상 16:39).

(4) 솔로몬이 이곳에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지혜, 부귀, 장수를 주신 곳입니다(왕상 3:4-10). 여리고와 기브온 사이 순서대로 길갈, 기브아, 라마, 기브온

길갈(삼상 11:14-15). 이스라엘 민족이 요르단 강을 건넌 뒤 나라 안에 들어갈 때에 처음으로 장막(帳幕)을 치고 강에서 구한 돌 12개를 두었고,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 할례를 주었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 첫 유월절(逾越節)을 지킨 곳으로‘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다’는 의미입니다. 또 사울 왕이 이곳에서 즉위한 것을 포고하였으며, 다윗 왕이 유대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곳이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요단강 동편에 거하는 가나안 원주민(아모리 사람들)의 땅이었으나 갓 지파, 므낫세 지파(수 13:24-31)가 차지하면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살게 된 요단 강 동쪽의 중요한 성읍입니다. 사사시대에 그 부족만이 종교적, 민족적 의무를 게을리한 탓으로 엄한 징벌을 받았습니다(삿 21:8-12).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은 암몬 왕 나하스에게 포위당하였을 때, 사울에게 도움을 구하여 구조되었으며(삼상 11:1) 후에 죽은 사울과 요나단에게 보은합니다(삼상 31:7-13).

단(라이스). 여로보암이 북방 왕국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세워 경배하게 하였습니다(왕상 12:26~33). 단은 고대 이스라엘에게는 북방 한계선이었습니다.

디르샤. 즐거운 이라는 의미의 가나안 사람의 성읍인데, 여호수아가 점령하였고,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에서 오므리에 이르기까지 약 40년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의 도성이 되었습니다. 후일 므나헴의 혁명 근거지가 되었으며(왕하 15:16), 이 성읍 경관의 아름다움은 아가서에 인용되고 있습니다(아가 6:4). 사마리아의 동쪽, 세겜의 동북쪽에 있습니다.

라마(삼상 15:34).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입니다.

벧엘(창 12:8, 26:18-19).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단을 쌓았으며 야곱이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입니다, 이곳은 믿음의 조상들의 신앙의 출발지입니다. 여로보암 1세 때에 벧엘과 단에 산당을 세우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으며, 후에 우상숭배의 근거지로 변화되었습니다(왕상 12:25).

베들레헴. 라헬이 이 근처에 장사되었습니다(창 35:19). 룻과 보아스가 이곳에 살았습니다(룻 1:1~2; 2:1, 4).

브엘세바(창 21:22-34). 7개의 우물이라는 명칭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유다의 최남단의 국경도시이며, 보통 이스라엘의 영토를 나타낼 때‘단(북쪽 끝, 삿 18:29)에서 브엘세바’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이‘세멜’로부터 이 지역을 은화 두 달란트에 사들여 사마리아라는 도시를 세우고 디르샤에 이어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기원전 884년경).

세겜(왕상 12:25),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처음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창 12:7).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으며 잘못된 제사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실로(수 18:1, 렘 7:12). 회막을 세운 곳입니다. 사사시대 마지막 시기의 중요한 도시로서 엘리 제사장의 근거지이며 사무엘이 교육받은 곳입니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들 두 산 위에 나누었습니다-율법의 축복은 그리심 산에서 선포하는 한편 저주는 에발 산에서 하였습니다(수 8:33). 후에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 신전을 세웠습니다(왕하 17:32~33).

예루살렘(삼하 5:1-12). 다윗 왕 이래의 유다의 수도입니다. 모리아(창 22:2), 여부스(수 18:28)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습니다.

헤브론(삼상 30:26-31), 갈렙의 분깃(수 14장, 기럇 아르바)입니다. 다윗 왕의 이스라엘 통일 전에 있었던 수도입니다. 아브라함(창 13:18), 이삭, 야곱(창 35:27), 다윗(삼하 2:1~4)과 압살롬(삼하 15:10)이 이곳에 살았습니다. 이곳은 다윗 왕 치세 하에 유다의 첫 수도였습니다(삼하 2:11).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가 이곳 막벨라 굴에 장사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창 23:17~20; 49:31, 33).

길보아 산.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은 곳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참고, 싹난 지팡이 구약, 192쪽 , 이스르엘)이 있습니다. 놉, 예루살렘 근처, 제사장 이히멜렉의 근거지였고 다윗이 도망 중에 골리앗의 무기를 얻은 곳입니다.

가사, 아스돗, 아스겔론, 에그론, 가드(블레셋의 다섯 도시) 이곳 성읍들로부터 블레셋인들이 자주 이스라엘에 전쟁을 걸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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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의 공통점과 차이점

사울과 다윗의 공통점과 차이점

-사무엘 상 9-17장-

어느덧 창세기부터 시작한 성경 묵상이 사무엘서 까지 왔다.

오늘 묵상하고자 하는 부분은 며칠에 걸쳐서 묵상한 부분이다.

매일 묵상을 해도 하루에 성경4장 이상을 묵상하기가 어렵다.

나의 생각이 짧음이라 생각된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들인 사울과 다윗에 관한 것이다.

흔히들 사울과 다윗을 많이 비교한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사울의 심정을 이해하기 쉬운 부분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사울을 나쁜 왕으로 매도해 버린다.

반면에 다윗과 사울의 공통점은 잘 다루지를 않는다.

9장에서 17장에 나타나는 다윗과 사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나의 삶에 어떻게 적용을 시킬지를 묵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사울과 다윗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그들은 외모에서 닮은 점이 있다.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준수했다.(그만큼 잘생겼다는 말일 것이다.)(9:2)

다윗 또한 잘 생겼다.(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16:12)

다음으로 닮은 점은 그들의 효심(부모님께 순종)이다.

사울은 아버지의 명으로 암나귀를 찾아서 이스라엘 산지를 두루 다닌다.

그리고 암나귀를 찾지못하자 걱정하실 부모를 생각하여 돌아가고자 한다.(9:4-5)

다윗또한 아버지인 이새의 말을 듣고 양을 지키다가 왕의 간택자리에 오지도 못할뻔 하였다.(16:11)

그리고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낼때에도 착실히 순종한다.(16:12-22)

셋째로는 그들은 특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막내이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로써 이스라엘의 가장 작은 막내 지파의 사람이고(9:1)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족속의 자손이었다.(9:21)

다윗은 이새의 집의 8형제 중에서 막내이다. (16:14)

그러기에 이들은 다른 지파나 형들에게 교만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다음으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사울은 그의 초심이 바뀌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변하여서 교만이 된다.

사무엘이 그를 왕으로 택했을때 사울의 반응을 보면 상당히 겸손하다.(9:21)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왕으로 추대할 때에도 행구(行具)사이에 숨어서

자신이 왕이 될 인물이 아님을 나타내는 겸손함의 모습을 보였다.(10:22)

또한 그의 왕됨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도 잠잠하였다.(10:27)

하지만 사울의 이러한 겸손함은 오래 가지 못하고 그의 왕된 자리를 지키기위해

교만해진다. 그 첫 사례가 사울이 제사장직을 침해한 사건인데(13:8-12)

여기서는 사울의 핑계가 참 딱할 지경이다. 그리고 자신의 짧은 생각으로

이스라엘 온 군대와 자신의 아들의 생명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였다.(14:24-42)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 두었고,

또한 모든것을 진멸하라고 하였는데 순종치않고 좋은 짐승들은 잡아오고

그렇지 않은 짐승들만 죽였다.(15:6-9)

여기서도 사무엘에게 변명하는 사울이 딱하게만 여겨진다. 결국 이 일로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여 그로하여금 번뇌케하는 일이 생긴다.(16:14)

끝으로 사울은 올바른 판단력(하나님을 의지하면 적들은 별것 아님을 아는 지혜)을 상실한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으로 인해 눈앞의 상황에만 집착하여 고민한다.(17장 전반부)

다윗을 살펴 보면 체험신앙의 사람임을 알 수가 있다.

즉 그의 삶의 신앙고백을 알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체험적으로 알아 사시는 하나님을 고백한 것이나,(16:26)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그 만의 하나님을 고백한다.(16:34-37)

이러한 그의 체험적 고백의 절정은 16장 47절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윗의 특징에서 사울과 또 차이가 나는 것은 담대함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하여서 신중하게 행동을 하지 않았다.

먼저 어디를 칠 것이지.. 어디에 숨었다가 갈 것인지… 어떻게 그의 단창과 칼을 피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가 없이 그냥 전력을 다하여 나아갔다.(16:48-49 빨리 달리며)

예전 요단강을 건너기전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담대함을 여기서 보는 듯하다.(수1:6-7)

지금까지 두 인물 사울과 다윗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 보았다.

공통점은 그들이 인간적으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차이점은 크게 살펴보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의 유무를 들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낄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참된 체험적인 신앙고백이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다윗처럼 흔들리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두 인물을 통하여서 알 수 있듯이 비록 외모적인것 말고도

인간사회의 보편 가치를 닮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겸손함과 부모님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기뻐하시지 않을까 생각한다.

곰곰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고백은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나의 삶에서 겸손한지와 부모(가족과 이웃)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다윗의 삶과 사울의 삶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앙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아주 어렵고 힘들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난 그림을 잘 그려. 난 노래를 잘 불러. 난 피아노 연주를 잘해’라고 말하며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신앙에 자신 있어. 신앙을 잘해’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꽃게는 앞으로 가는 것보다 옆으로 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꽃게에게 앞으로 가라면 정말 고생스러울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쉬운 반면, 옆으로 걸어가라면 어렵습니다. 마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생각이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중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대하다 보면 ‘하나님과 내 생각이 다르구나. 내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할 수 없겠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뱀의 말을 들은 그때부터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다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난 사람일지라도 그의 지혜와 방법이 있는 한 하나님이 그에게 일하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듯이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게 아들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7~18)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출애굽기 1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바로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려 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0~11)라고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망할 것 같고 자기 생각과 방법으로 하면 잘될 것 같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성경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여러분, 우리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내 생각으로 한 결과가 이렇구나’ 하며 결국 우리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했지만 로마서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18~19)라며 자기 생각이 틀린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백세나 되어 늙었지만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며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다가 마침내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로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라”(출 10:3~4)며 담대히 외쳤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삶

사무엘상 성경을 읽으면 자기 생각과 방법으로 사는 사울과 자기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다윗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창을 든 사울과 수금을 타는 다윗」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사울은 누군가 자기를 죽일 것 같은 불안함 때문에 늘 창을 들고 벽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벽 뒤로 다른 사람이 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이 늘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도 수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발버둥친 사울은 죽고,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은 왕이 돼서 힘 있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에도

오늘 읽은 사무엘상 26장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쫓는 사울을 피해 황무지에 있었습니다.

1절에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3절에는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광야 앞 하길라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라며 다윗은 사울이 황무지로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줄 알고”라는 기록을 보면 다윗은 탐정을 보내서 사울이 황무지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성령의 지혜로 사울이 황무지로 들어온 사실을 먼저 ‘깨닫고’, 사울이 이른 줄 ‘알고’, 그리고 5절에서 “일어나 사울의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와 같이 사울이 진 가운데 있는 것을 ‘본즉’ 하며 그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마음의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제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셨습니다. 처녀 시절 처음으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처녀가 혼자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외동딸이니까 외할머니는 남편 몰래 딸이 교회에 가도록 하셨답니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교회 가는 것을 못 본 척하셨습니다. 출가 후 시댁의 시부모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라서 교회를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지 못하시고 집안일을 하며 혼자 찬송을 부르시곤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곁에서 찬송을 부르던 때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어릴 때부터 교회로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열아홉 살까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당시 한국은 가난해 배고픈 시절이었습니다. 남의 집 밀밭에 들어가 밀을 꺾어다 구워 먹곤 했는데 지금도 밀이 익을 무렵엔 그 밀을 한번 꺾어 구워 먹고 싶어집니다. 저는 친구들과 매일 밀밭에 들어가 밀을 잘라 가슴에 품고 나와서 산꼭대기로 올라가 불을 피워 구웠습니다. 구운 밀을 비벼서 후후 불면 껍질이 날아가는데 구운 밀알이 그렇게 맛있었습니다. 그 맛에 유혹을 받아서 도둑질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면서 “도둑질 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알고 난 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죄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제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은 전혀 없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려면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서 죄 사함을 받는 시점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 속에 빠집니다. 그래서 늘 죄 때문에 “나는 죄가 많아서 지옥 갈지 몰라. 나는 믿음이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죄 사함 받는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듣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바뀌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를 두고도 우리가 보는 시각과 예수님이 보는 시각이 전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을 가지려면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저는 1962년 10월 7일 구원받기 전까지 제 생각 속에서 더럽고 추하며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자신을 사랑하겠지만 그 당시 저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진절머리가 나고 싫어서 ‘이 더러운 놈, 야비한 놈, 악한 놈아!’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녁마다 친구들과 모였고 밤이 깊어지면 남의 집 과수원에 가서 사과 서리, 참외 서리를 하고 새벽에 다시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합니다. ‘어제 지은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오늘 그 친구 집에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거기 가면 또 도둑질해요.’ 제가 저녁마다 친구 집에 안 가려고 했지만 어느 틈에 벌써 그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2년 10월 7일 저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빌려주시고, 당신의 마음을 빌려주시고, 당신의 생각을 넣어 주셔서 그 눈으로 저를 보니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신앙의 원리

저는 죄를 짓고 도둑질하고 악을 행했지만 제가 짓는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고 죄를 씻는 훨씬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을 보니까 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죄를 씻는 예수님의 능력이 죄를 짓는 우리 능력보다 크면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진 것입니다. 반대로 죄를 짓는 우리 능력이 죄를 씻는 예수님의 능력보다 더 크면 우리가 죄인으로 남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이 짓는 죄가 아무리 커도 죄를 씻는 예수님의 능력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우리가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내 다리가 말라서 비틀어지고 가늘어 빠져 아무 힘이 없는데 이 다리를 가지고 어떻게 걸어가?’라고 생각하니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걸어갈 수 있어. 일어나 걸어가 봐. 내가 너에게 능력을 주었어. 걸어가 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에서 중요한 사실은 ‘내가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가 아니라 ‘내 생각을 믿느냐 예수의 말씀을 믿느냐’입니다.

그날 후에 세울 언약은

오늘날 한국의 참 많은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 때 십계명을 봉독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싫어하십니다. 실제 인간을 법이 아닌 사랑으로 만나시려고 십계명을 법궤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법궤의 뚜껑을 열지 못하게 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법궤의 뚜껑을 열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봤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모세를 통해 십계명이 내려온 날부터 사람들은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살인치 말라.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인 율법을 지키려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날 후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렘 31:33)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보면, ‘도둑질하지 말라’ 하는데 도둑질하고, ‘거짓말하지 말라’ 하는데 거짓말하여 법을 어긴 죄가 크지만, 우리 죄를 씻는 예수님의 능력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짓는 죄를 다 합한 것보다 큽니다. 그래서 우리가 짓는 죄와 죄를 씻는 예수님의 능력이 서로 싸울 때 예수님의 능력이 커서 결국 이기니까 우리가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

예레미야 31장 34절에는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죄가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그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서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 죄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간음을 하고, 도둑질 하고, 거짓말을 해서 그 죄가 우리 마음에 가득 차 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 죄를 모두 사했기 때문에 죄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분인데, 만일 우리의 능력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능력보다 크다면 죄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가 없습니다. 우리보다 예수님이 작아 보일 때 우리는 죄인으로 남게 되고, 우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더 크게 보일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요구르트와 커피가 만나서

한번은 요구르트 제조하는 형제님을 만나서 “요구르트에 커피를 넣은 상품을 만들어 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커피는 맛이 강한데 우유는 맛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유제품인 요구르트 속에 커피가 들어가면 그제야 커피는 제맛을 냅니다. 나중에 그 형제님을 만났는데 커피를 넣은 요구르트 상품이 히트를 쳤다고 했습니다. 마치 같은 팀끼리 축구 경기를 하면 재미없고 상대팀인 적군과 싸워야 재미있듯이, 음식 맛도 서로 다른맛이 만나 제맛을 내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세계에도 적군과 아군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아군의 마음은 사단이 주는 생각인데 항상 하나님과 반대입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은 적군에 해당됩니다. 내 마음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 신앙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섞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내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할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히 알면 저절로 신앙을 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알고 나면

여러분, 저는 하나님이 저를 복음의 일을 하도록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1962년 구원받기 직전에 제가 했던 모든 것이 실패하여 ‘나’라는 존재를 세우려는 마음이 다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철저히 알면,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교만하고 악하며 거짓되고 음란하며 방탕한지 정확히 보이면서 나에 대한 회의가 옵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까지 죄 속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거짓말과 도둑질, 그리고 많은 죄에 얽매여서 꼼짝할 수 없도록 짓눌려 있을 때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게 있던 지혜와 전혀 다른 예수님의 지혜, 성령,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 눈으로 볼 땐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더러운 죄를 짓는 똑같은 ‘나’였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까 제가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로워져 있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웠지만 말씀을 보면 저는 의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오늘 다윗과 사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사무엘상을 보면 사울은 왕이었고 그를 지켜주는 근위병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창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늘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이 있었지만 수금을 타며 사울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사울은 왕이지만 하나님이 다윗을 장차 왕으로 기름 부은 걸 알고 그가 왕이 되지 못하도록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고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절대 사울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믿고 담대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아주 단순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산다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시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더럽고 추한 인간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닌 죄 사함을 받았을 때 왔던 죄가 씻어졌다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 그 거룩한 믿음에 이끌린다면 우리는 너무나 놀랍고 귀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줄 확실히 믿습니다.

– 2018. 9. 1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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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신 나의 하나님 (2) : “사울과 다윗의 차이”

❚ 루저들의 이야기

지난 2009년 ‘루저 논쟁’이라는 아주 이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KBS 방송 ‘미수다’(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한 여대생이 한 발언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인데 이 예쁘장한 여대생은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oser=패배자)다. 남자는 키가 180cm는 돼야 한다.”고 말해서(사진1) 아주 난리가 났어요. 뭐 이 기준으로 보면 저도 루저고, 목사님들 중에 김태훈 목사님 빼고는 다 루저에요. 여기 계신 남자 분 중 대부분도 루저고요. 이 방송이 나가자 도대체 이런 말을 한 여자가 누구냐 하고 이른바 ‘신상 털기’에 들어가서 인터넷에 실명이 공개되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 사진까지 공개되며 “이렇게 못생긴 애인데 성형수술 받은 거다.” 엄청난 비난을 받고, 미수다 프로그램 폐지요구가 빗발치고, 급기야 “이 발언 때문에 엄청난 심리적 피해를 입었다.”며 천만 원 손해배상을 청구한 남성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루저 논쟁’입니다.

2009년에 일어난 일이니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이 말을 한 아가씨는 시집을 갔을까요? 그때 받은 비난 때문에 이 아가씨 상처를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요? 그런데 저는요, 이 사건을 보면서 상처 안 받았습니다. 제 키가 180cm보다 아주 조금 모자라든요? 그런데 키가 작은 걸 어떻게 해요.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합니까?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는 키 큰 사람, 잘 난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앞에서 별로 열등감 안 느낍니다. 왜냐?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니까요. 왜 우리는 괜히 끊임없이 나를 남과 비교하며 “난 못났어, 나는 불행해.” 하며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키도 작고, 못나고, 돈도 없고, 공부도 남들보다 못했다, 그래서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일 뿐입니다. 저 사람과 비교해서 괜히 열등감 느끼고 인생을 힘들게 만들 필요가 전혀 없어요.

지금도 세상은 하나도 안 변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10년 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안 변했어요. 끊임없이 세상은 우리의 조건을 따집니다. 우리의 외모와 조건과 학력 재력 따지면서 사람을 ‘성공한 사람’과 ‘루저’(실패자) 딱 둘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스펙, 스펙’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세상 속에 살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갈 겁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일까요?

여러분! 성경은 루저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루저’들입니다. 실패자요 패배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조건이나 능력이나 스펙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볼품없는 마른 작대기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터키에 성지순례 갔을 때 이스탄불에 있는 토카프 궁전이라는 곳에 갔습니다(사진2). 원래 오스만 제국 황제인 술탄이 쓰던 궁전인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박물관에 가면 정말 신기한 유물들이 많아요. 다윗의 칼, 아브라함이 쓰던 밥그릇, 모세의 지팡이 등등 엄청납니다. 오스만 제국이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을 지배할 때 모아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게 진품인지는 믿거나 말거나에요. 사실 역사학자들이나 성서학자들은 진짜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신기했던 것은 모세의 지팡이라고 하는 지팡이가 너무 작은 거에요. 영화 같은 데 보면 모세의 지팡이가 무슨 산신령 지팡이처럼 길고 멋있게 생겼잖아요? 그런데 이 박물관에 가보니 (사진3) 이 사진처럼 생각보다 너무 작고 평범한 나무 지팡이입니다. 물론 이 지팡이가 진짜 모세가 쓰던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지만 거기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우리가 모세의 지팡이를 너무 거창하고 멋있는 지팡이로 오해했구나.” 실제로 학자들도 모세의 지팡이가 이 그림(사진4)처럼 작고 뭉툭하고 낡은 지팡이였다고 봅니다. 당연하지요. 미디안 광야의 가난하고 천한 목동이 양 몰 때 쓰던 지팡이가 어찌 거창하고 멋있는 지팡이였겠으며, 40년 동안이나 쓰던 그 지팡이는 또 얼마나 낡아빠졌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겁먹고 피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출애굽기 4:2 말씀입니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은 그 볼품없고 낡은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서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들어 올린 지팡이도 바로 이 볼품없는 지팡이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낸 지팡이도 이 지팡이였어요. 중요한 것은 그 낡은 지팡이가 누구 손에 들렸느냐 하는 겁니다. 지팡이나 멋지고 잘나서 쓰임 받는 게 아니라, 못나고 낡은 지팡이라 할지라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 손에 들리면 위대하게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낡고 메마른 지팡이 같은 인생들, 못나고 부족한 루저들, 실패자 패배자들이 하나님 손에 들림 받아 쓰였기 때문에 귀하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바울 등 성경의 모든 위대한 인물은 한 결 같이 다 이런 약점 많은 사람들, 루저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 나도 약점 하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점이 열등감이 되면 그 약점은 나에게 착 들러붙어 항상 나를 괴롭히고 늘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귀신, ‘물귀신’이 되어버립니다. 반면 그 약점을 잘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내놓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이유가 되고 놀라운 축복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약하고 부족하지만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하나님 손에 들려 귀히 쓰임 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 사울과 바울의 차이

오늘 이렇게 루저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설교제목 <사울과 다윗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과 두 번째 왕 다윗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루저 이야기를 길게 한 겁니다.

지난주일 말씀 나눈 것처럼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왕이 계셨지요. 홀로 영원하신 왕,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신 왕, 바로 왕이신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나라들과의 전쟁을 거듭 겪으면서 “우리에게도 이방나라들처럼, 특히 블레셋 민족처럼 왕을 달라.”고 떼를 쓰게 되지요. 하나님과 사무엘 선지자는 끝까지 말렸지만 워낙 완고하게 왕을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할 수 없이 왕정제도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그가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참 훌륭한 임금감이었습니다. 용모와 조건이 뛰어나고 모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좋은 조건, 최고의 스펙을 갖춘 사람인지는 사무엘상 9장과 10장에 잘 나와 있는데 너무 많지만 몇 가지만 봅시다.

첫째, 그는 좋은 가문 태생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1을 읽습니다.

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사울의 아버지는 베냐민 지파 출신 기스라는 ‘유력한 사람’(원어에는 ‘부유한, 저명한’이라는 뜻)으로 그는 꽤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꽤나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사울이 명문집안 출신이었다는 거지요.

둘째, 사울은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잘 생겼다구요. 사무엘상 9:2은 사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정말 모두가 인정할만한 잘 생긴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키가 훤칠하니 적어도 180cm는 넘었다는 거니까 루저는 아니라는 거지요.

셋째, 사울은 효자였고 성실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보면 아버지 기스가 암나귀들을 잃고 아들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시키자 그는 두말 않고 찾아 나서 사환을 데리고 천지사방을 다 다닙니다. 아버지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효자요 성실한데다 맡은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마는 책임감과 집념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넷째로, 사울은 누구보다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서 사울은 선지자에게 암나귀의 행방을 물으러 갈 때 드릴 예물이 없자 사환의 손에 마지막 남은 여비인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잘 섬기려는 좋은 자세를 가진 사람입니다. 게다가 사울은 영적으로도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0장에 보면 사울은 선지자의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성령)이 임하여 예언을 합니다. 영성(靈性)과 영력(靈力)까지 갖춘 사람입니다.

다섯째,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찾아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자 사울은 슬며시 짐 보따리 사이에 숨습니다. 이 부끄러움은 겸손에서 온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그는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을 때 동네 불량배(양아치)들이 “어떻게 저런 놈이 우리를 구원하겠냐?”고 멸시하고 모욕해도 사울이 잠잠히 참는 모습이 나옵니다. 절제와 인내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사울은 왕이 되기 전 이렇게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로나 신앙으로나, 인격 성품 어느 면에서 봐도 정말 완벽한 사람이요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후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완벽한 사울이 임금이 된 후 점점 교만해지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번제를 드리려는데 사무엘을 기다리다가 제 손으로 직접 번제를 드리는 죄를 범하기도 했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말렉 백성과 소유와 가축까지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빼앗은 가축 중에 좋은 것을 남겨둡니다. 목숨 걸고 싸워 빼앗은 가축인데 아깝게 왜 다 죽이냐 이겁니다.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에게 요구한 첫 번째 조건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가문도 재력도 키도 외모도 그 어떤 조건도 아닌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조건 다 갖춘 사울은 왕이 된 후 자기 생각과 기준과 판단에 따라 순종이 아닌 불순종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바로 이 때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의 불순종을 책망하며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사무엘상 15:22~23 말씀입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제사 아무리 잘 드리는 것보다, 그 어떤 종교적 행위를 잘 하는 것보다, 그리고 그 어떤 자격이나 스펙보다 하나님은 순종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 불순종의 길로만 달려간 사울은 나중에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장군이자 자신의 사위가 된 다윗을 몹시 질투하여 죽이려고까지 듭니다. 막나가도 너무 막 나간 거지요. 그래서 사무엘상 16:14은 말씀합니다.

14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대신 그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이미 사울은 끝난 거지요. 여전히 아직 왕이고 좋은 조건 유지하고 있지만 하나님 보실 때는 끝난 겁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고 아들 요나단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울 왕과 비교해 아주 대조적인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저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작은 마을 출신 촌뜨기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막내로 태어나 들에서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형들은 집안에 앉아 편안하게 밥 먹고 있을 때 이 막내는 들에 나가 양을 치고 있었지요.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도시락 배달하는 일도 이 천덕꾸러기 막내 몫이었습니다(저는 4형제 막내로 태어나 온갖 잔심부름은 제 몫이었기에 이 사람 심정 잘 이해합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윗의 조건은 사울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루저라니까요? 들에서 양이나 쳐봤지 무슨 무기 들고 싸우는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군대 경험도 없고 집에서 허드렛일이나 하고 심부름이나 도맡아 하던 촌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화려한 사울 대신 이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촌놈 양치기에게 왕위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무 것도 없는 루저, 이 못난 인간 다윗, 하지만 다윗보다 위대한 인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위대했던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위대하셨던 겁니다. 다윗은 키나 외모나 방패나 칼과 창이 아닌, 화려한 스펙이나 조건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하나만 의지해 물맷돌을 들고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웁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은 나의 목자십니다. 내가 양을 쳐보니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양에 불과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건 다 없어도, 은과 금도 없고 그 어떤 조건도 스펙도 없지만 그 믿음 하나만으로 역사상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걸작의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것 하나만 보시고 다윗이라는 사람을 그토록 위대하게 들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금수저 흙수저 따지고 계십니까? 아직도 태어난 환경이나 집안이나 부모를 탓하며 살고 계십니까? 아직도 세상에서 우러러보고 인정해주는 스펙이나 자격 갖추려고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물론 우리가 세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실력도 못 갖추고 능력도 없으면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외치지는 맙시다. 절대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 받겠다는 생각은 틀린 겁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은 버리시고 다윗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쓰고 수고하고 무슨 자격을 갖추려 해도 절대 그것으로 쓰임 받는 게 아닙니다. 먼저 나는 마른 작대기 같은 자라고, 낡고 볼품없는 지팡이 같은 자라고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이 못난 내가 하나님 손에 들림 받아 귀하게 쓰이길 원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잘난 자들보다 나를 먼저 들어 써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열등감이나 비교의식 속에 사로잡혀 살지 마시고 당당하게 사십시오! “그래! 나는 너무 못 났지만 우리 하나님은 너무 잘난 분이고 위대한 분이야!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써주실 거야!” 이렇게 고백하며 나를 온전히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맡기십시오. 바로 그때부터 나를 통해 위대한 일들이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효자교회 창립 7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946년 해방 이듬해 천막을 치고 9명의 성도가 기도처로 시작한 우리 교회가 73년 만에 위대한 역사를 이룬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이 미약한 교회가 창대한 교회가 되기까지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 믿음의 선배들이 정말 수고하고 희생했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교회창립 기념주일에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앞으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만 의지하여 이 땅에서 앞으로 더욱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과 사울” (I) (David and Saul)

“다윗과 사울” (I) (David and Saul)

“다윗과 사울” (I)

(David and Saul) (I)

1-31-21

본문말씀: 사무엘상 (1 Samuel) 18:7~9

7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9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설교 요약]

저는 성도 여러분과 ‘성경인물 연구’시리즈의 하나로 ‘다윗과 사울’이라는 제목으로 이번주와 다음 주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주는 ‘사울 왕은 어떤 사람이고, 그의 불행한 말로의 원인은 무엇인지?’하는 것을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먼저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마지막 사사라고 일컬어지는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주위 이방민족 국가들처럼 그들 위에 왕을 두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그는 키가 장대하고 용모가 출중하며 겸손했던 자였습니다 (삼상. 9:21).

그는 왕이 되어 블레셋과 여러 주변국가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안정된 왕권을 이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몰락의 징조는 그가 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 과연 무엇이 사울 왕의 본질적인 문제일까요? ” (What were the essential problems of king Saul?)

첫째, “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었기 때문 ” 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을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기 마음데로 어기고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제사장만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어기고 자기 스스로 드렸고 (삼상. 13장), 또한 ‘아말렉’과 전투에서 승리하고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살찐 짐승을 살려 두었습니다 (삼상. 15장).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을 자기 마음데로 상대화 시키는 사울의 이런 불순종은 그의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둘째, “ 비교의식 때문 ”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인들이 뛰놀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 라고 노래했을 때, 사울은 심히 불쾌해 하며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v.8)라고 하며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다윗과의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과 질투심이 사울의 삶을 더욱 파괴시켰던 것입니다.

셋째, “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기 때문 ” 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다고 선언했을 때 그가 취한 행동은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을 세워주고 높여 줄 것을 사무엘에게 요구했습니다 (삼상. 15:30). 사람의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더 중요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사울 왕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인간적 비교와 평가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믿음으로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복된 그의 자녀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성경인물 연구’시리즈의 하나로 ‘다윗과 사울’이라는 제목으로 이번주와 다음 주에 살펴보고자 합니다. 앞으로 시간이 주어지는 데로 한번씩 성경의 주요 인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다윗과 사울>의 삶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왜냐하면, 두사람은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과 동시에 매우 대조적인 삶의 결과를 거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첫 시간에는 먼저 ‘사울 왕은 어떤 사람이고, 성경의 기록과 같이 그의 불행한 말로의 원인은 무엇인지?’하는 것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그를 이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불리어졌던 다윗,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시편의 절반 가량을 지었던 다윗, 그리고 그의 씨를 통해서 장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날것을 약속 받았던 다윗의 삶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 삶의 결말이 극적으로 대조되었던 두 인물을 통해 우리 각자의 믿음에 귀감과 교훈을 삼는 소중한 시간되기를 기대합니다.

먼저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가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된 개기가 무엇인지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 일컬어지는 사무엘 선지자시대에 백성들은 주위의 이방민족들과 같은 왕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가 무거운 마음으로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어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삼상. 8:7,9)라고. 사무엘은 왕이 그들을 다스리게 될 때 따르는 여러가지 폐단에 대해 경고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로 왕을 요구합니다.

이런 경과를 거치고 나서 하나님은 베냐민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을 것을 사무엘에게 명하십니다. 그가 처음으로 사무엘을 만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들었을 때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 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삼상. 9:21). 그가 처음에 이스라엘왕으로 하나님께서 삼으셨을 때 그는 겸손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사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고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을 위시한 주위 이방국가들을 하나씩 강력한 리더쉽으로 무찌르며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써 안정된 왕국을 이루어갑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울의 몰락은 그의 성공적인 통치기간 가운데 서서히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과 함께 과연 무엇이 사울의 삶을 몰락시킨 것인지, 그리고 왜 그는 초대 이스라엘 왕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 과연 무엇이 사울 왕의 본질적인 문제일까요? ” (What were the essential problems of king Saul?)

첫째, “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었기 때문 ” 입니다: 그 어떤 것 보다도 사울 왕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명령)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있는가 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말씀이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언제든지 상대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을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자기 마음데로 어기고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성경에 두가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과의 전투> (삼상. 13장) 에서 사울 왕은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것을 어기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곳에 도착한 사무엘 선지자가 왜 이런 망령된 행동을 했는지 묻었을 때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삼상. 13:11~12) 라고 그는 말합니다. 상황이 어려워 부득이하여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 변명’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또 한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한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삼상. 15장) 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말렉 족속 뿐 아니라 그에 속한 모든 짐승들까지도 멸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아말렉에게 대승을 거두었는데 사무엘이 갔을 때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었고, 사울은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삼상. 15:15)라고 대답합니다. 살찌고 좋은 짐승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진멸하지 않고 잡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가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라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순종이요, 살찐 짐승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이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 사울의 불행한 삶의 원인인 것입니다.

둘째, “ 비교의식 때문 ” 입니다: 사실 사울 왕의 불행과 비참한 종말의 원인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불신앙에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불신앙이 그 시작이자 종착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울의 삶을 계속해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도 매우 유사한 문제점들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에서 비롯된 밖으로 드러난 사울의 대표적인 삶의 문제점은 ‘비교의식’입니다. 비교의식은 양쪽으로 난 날카로운 칼날 같아서 모두를 다치게 합니다. 이 비교의식을 통해 내가 상대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으로 우쭐대다가도, 만약 상대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통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우월의식’과 ‘열등의식’ 모두는 양쪽으로 선 칼날처럼 어느 경우에서 건 그 사람을 파괴시킨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사울의 이 비교의식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나게 됩니다. 블레셋의 거인장군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소년 다윗은 사울 왕의 휘하의 군대에 전격 발탁되고, 이스라엘 군대의 용맹한 장수가 되어 적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성과를 거듭니다. 사울 왕은 이런 다윗을 신임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용맹함과 우수한 전투능력이 두사람의 관계를 파괴시킨 아이러니컬한 결과를 가져 오리라고는 두 사람 모두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어느 날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 군대와 다윗을 향해 여인들이 뛰놀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라고 기쁘게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옆에서 듣고 있던 사울 왕은 함께 기뻐한 것이 아니라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급기야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젊은 다윗에 대한 질투심이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심하게 화를 내며 혼자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v.8)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제 성경에는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v.9)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목하였다’는 말에 대한 은 “kept a jealous eye” 라고 번역되어 있고, 이것을 <현대인의 성경>은 “계속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확신하기 보다,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발견하려 할 때 이와 같이 사울은 다윗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되고 심한 심투심으로 인하여 자신을 파괴시키는 비극적인 삶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셋째, “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기 때문 ” 입니다: 사울 왕에게 있어서 비교의식 뿐 아니라, 그의 삶을 뒤틀리게 했던 또 한가지는 ‘사람들의 평가에 좌우’되는 그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가치관은 평상시에는 그리 눈에 잘 안 띄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는 아말렉 백성은 쳤으나 왕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사울의 거역/자기기만성) 이런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을 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삼상. 15:23)라고.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 이니이다” (삼상. 15:24)라고 고백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평가가 더 두렵고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무엘이 떠나고자 할 때 사울은 그를 붙잡고 자신과 함께 여호와께 경배하고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높여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 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30)라고.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버리시고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이 엄중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가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이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분께 나아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죄 용서를 구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업신 여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사람들 앞에서 자기 위신을 살려주고 아무일 없는 양 협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이 없는 사울의 필연적인 삶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몰락해 가는 사울을 생각하며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던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 날 눈물 흘리며 슬퍼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겸손하고 복되게 시작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평가에 사로잡힘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 왕의 시작과 끝을 통하여 이해하고 교훈 삼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성도의 삶과는 반대로 ‘그 시작은 대단했지만 그 끝은 비극적이었던’ 사울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울에게서 부족했던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요, 말씀에 대한 순종 아닐까요? 그리고 이런 믿음이 내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기준이 내가 ‘사람과의 비교의식과 그들의 평가’에 좌우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선하신 눈’ 아래에서 나를 발견하고 있는지 각자 돌아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해 동안 신앙생활 했음에도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는 육신과 세상에 속한 모든 헛된 가치관을 물리치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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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정시대에 초대왕이었던 사울과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전성기 시절로 만들었던 다윗는 공통적으로 닮은 부분도 있지만 극명하게 대조가 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었습니다. 둘 다 효심이 남다르고 용모가 준수한 사람이었으며 매우 겸손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왕이 된후 겸손한 마음이 사라지고 왕된 자리를 지키기위해 교만해지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데 불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일을 처리하는 일들이 많아지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첫 사례가 사울이 제사장직을 침해한 사건이고 또 두번째로 불순종한 사건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 두었고 또한 모든것을 진멸하라고 하였는데 순종치않고 좋은 짐승들은 잡아오고 그렇지 않은 짐승들만 죽였던 경우입니다. 결국 이 일로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여 그로하여금 번뇌케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사울은 올바른 판단력(하나님을 의지하면 적들은 별것 아님을 아는 지혜)을 상실하여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골리앗으로 인해 눈앞의 상황에만 집착하여 고민하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골리앗에 대한 어떤 조치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대신 그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아직 왕이고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돌보심이 없는 종말이 예고된 상태인 것이지요.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 받고 아들 요나단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다르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골리앗으로 인해 전쟁에서 곤란을 겪으며 속수무책으로 조롱을 당할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한 마음으로 골리앗과 싸움에 나가 단번에 승리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되어 사울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일이 생깁니다. 사울으로부터 다윗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우심이 넘어간 갓을 알고 언제나 살해의 위험에 처해 있을때에도 본인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며 목숨을 유지한 것를 보면 그는 100%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있을때 엄청난 밤죄를 짓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을 때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던 것도 사울과 대비되는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변명을 하거나 핑개를 되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고 회개하는 모습은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만 합니다. 밧세바의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의 죽음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금식하며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이의 죽음이라는 응답에 겸손하게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사울처럼 자신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다윗과 같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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