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 장 | 로마서 14장 15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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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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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3 먹는 자는 먹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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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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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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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 KLB – 서로 비난하지 말 것 – 믿음이

서로 비난하지 말 것 – 믿음이 약한 사람을 따뜻이 맞아 주고 그의 의견을 함부로 비판하지 마 십시오. 어떤 사람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가졌지만 믿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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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성경 로마서 14장 – HANGL NOCR

음식은 다 깨끗한 것이지만, 어떤 음식을 먹은 것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먹는 것은 그 사람에게 좋지 못한 것입니다. 14:21 고기를 먹는다거나, 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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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7(목) “로마서 14:1-12” / 작성: 김광욱

로마서 12장과 13장이 성도의 자세에 대한 원론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 두 가지 문제로 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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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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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핵심 원리 본문 / 로마서 14장 13~23절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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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4절: “남의 하인”을 비판하지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잣대로 가지고 남의 하인을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남의 하인은 그 주인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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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4장 강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 (로마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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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 다고 본다(Chrysostom). …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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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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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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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ㄱ)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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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쉬운성경 로마서 14장

14:1 <형제를 비판하지 마라>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논란이 있는 문제에 단언을 내리지 마십시오.

14:2 자기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따라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약하여 채소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14:3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은 채소만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채소만 먹는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14:4 여러분이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판단하십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자기 주인이 관여할 문제입니다. 종이 서 있게 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그를 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5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사람마다 자기 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14:6 어떤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고, 어떤 음식이나 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 먹는 것입니다. 그는 음식을 먹을 때,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습니다. 음식을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 그리하며, 그 사람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집니다.

14:7 우리 중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14:8 우리가 산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죽는다면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14: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4:10 그런데 여러분은 왜 여러분의 형제를 비판합니까? 왜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14:11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아 있나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할 것이다.”

14:12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14:13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마라> 그런즉 다른 사람에 대해 심판하지 맙시다. 우리가 더욱 힘쓸 것은 형제의 길에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나 장애물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입니다.

14:14 내가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확신하기로는, 그 자체로 부정한 음식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음식이 부정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음식이 부정한 것입니다.

14:15 음식 문제로 여러분의 형제가 상처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사랑으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서 죽으신 그 형제를 음식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14: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이나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14:18 이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14:19 그러므로 우리 모두 화평함을 이루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씁시다.

14:20 음식 문제로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합시다. 음식은 다 깨끗한 것이지만, 어떤 음식을 먹은 것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한다면 그것을 먹는 것은 그 사람에게 좋지 못한 것입니다.

14:21 고기를 먹는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그 밖에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14:22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의 일로만 간직해 두십시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을 할 때,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14:23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다 죄입니다.

2020/12/17(목) “로마서 14:1-12” / 작성: 김광욱

[본문] 로마서 14:1-12

[찬송가] 219장 ‘주 하나님의 사랑은’

로마서 12장과 13장이 성도의 자세에 대한 원론적인 가르침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에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성도들 사이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음식 문제와 절기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1-5절)]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교회 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이해해 주고 그들을 포용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 즉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 내 믿음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로마 교회 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채소만을 먹었던 이유는 당시 유통되고 있는 고기가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였으며 그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고기를 먹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고 할지라도 우상은 우상일 뿐이고, 고기가 변질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으면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해서 큰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고전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할지라도 이 고기 먹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그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은 그 고기를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3절 하반절에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누구를 받으셨겠습니까? 고기를 먹는 사람과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둘 다입니다. 교회 내에 있는 성도는 모두 다 하나님께서 받으셨기에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상대의 의견을 비판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과연 모든 문제에 대해서 상대를 비판하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문제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국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초반부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누가 율법 준수가 구원과 직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율법의 준수나 사람의 공로나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누가 도둑질은 상황에 따라 해도 무방하다고 말한다든지, 십계명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상황에 따라 거짓말해도 된다든지, 이처럼 성경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그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말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충고를 수용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펼친다면 그 사람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펼친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 사람이 비판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을 삼가야 하는 이유를 사도 바울이 다음 구절에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사도 바울은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주인과 그 주인의 하인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 하인의 언행에 대해서 비판을 한다면 그 비판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오늘날 어떤 사람이 본인과 무관한 회사 직원의 행태를 보고 그 직원을 비판하며 간섭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그 회사 경영자가 그 비판하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든지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지 모두가 주님의 종이며 주님께 속한 사람이므로 우리는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관해 의견을 제시하는, 주님의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은 절기 준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유대인들의 전통을 따라 특정한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절기만을 특별하게 지킬 것이 아니라 모든 날을 동일하게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당시 일부 교인들이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특별한 날로 정해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추수감사절, 성탄절, 사순절 등이 있습니다. 반면에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한 날만 감사해야 하는 날이 아니며, 특별한 날만 주님의 성탄을 기리는 날이 아니며, 특별한 날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특별한 날을 지키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든, 주님을 기리고 감사하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논쟁하거나 자기주장만이 옳다고 말하며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교회의 분열을 일으키므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음식 섭취 여부와 절기 준수 여부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와 무관한 비본질적인 것이므로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6-9절)]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상에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든 그것을 먹지 아니하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든 하나님께 감사하면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특별한 날과 절기를 중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든 모든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것이든 하나님께 감사하면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누구든지 진리의 문제나 선악의 문제가 아닌 사안에 대해서 자기주장이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이 옳지 않다며 비판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이유를 다음 구절에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고기 음식을 먹는 사람이든 먹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니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을 사람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고기 섭취 여부와 절기 준수 여부와 상관없이 주님의 사람은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기에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이루고 서로 이해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지 않아야 하며, 상대 의견을 존중하는 사람이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인 이유를 다음 구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구절의 원문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가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해 교회 내 성도는 주님의 것이다’는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이, ‘믿는 자’를 주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소유된 사람은 주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주권자는 주님이시므로 누구든지 주권자에 반하는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자기주장을 펼치며 상대를 비판하는 일이 없어야 함을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점층적으로 비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상대 비판을 금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미래에 있을 일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심판대 앞에 서리라(10-12절)]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가 비본질적인 문제로 인해 형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미래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셈하는 결산의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므나를 가지고 얼마나 남겼는지 심판대 앞에서 결산해야 합니다. 그 결산의 날에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 모두 한 사람씩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출 수 없고 자신의 했던 행동과 말 중에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기억나 스스로 자기 일을 직고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머리카락 한 개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음식 문제나 절기 준수 문제 등과 같은 사안에서 자기주장이 성경적이며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전부 다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 명시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면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유지하지 못하게 거짓을 퍼트리는 일이 아니라면 그리고 비본질적인 사안이라면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며 비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럴 때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미래에 하나님께서 셈하시는 날에 심판대에 서서 직고하게 될 것임을 잊지 않으며 오늘 하루 주님의 소유된 자로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의 주님이 되시려고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 되시기에 저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의 모든 일을 직고할 것임을 기억하여, 교회 내 진리의 문제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면 자신과 반대 생각을 하는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며 비판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2.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섭취하는 문제와 절기나 특정한 날 준수하는 문제에 대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본문을 묵상 후 그 견해에 대한 변화가 있습니까?

3. 사순절에 금식하거나 육식을 절제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4. 교회 내 진리와 선악의 문제가 아닌 비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지 못했던 적이 있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5.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로마서 14장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인상 깊었던 내용 및 개인적으로 반추한 것들을 기록한 노트입니다.

1절: 개역개정에는 “비판”하지 말라고 번역한 “διακρίσεις διαλογισμῶν”는 둘 다 복수형으로서 “논쟁”하지 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논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사도가 뒤에 가서 더 설명하지만, 지금 문장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논쟁으로 인해 오히려 믿음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Notwithstanding the authority vested by Christ in his Apostles, and their infallibility in delivering his doctrine to mankind, differences of opinion prevailed even among real Christians; nor did St. Paul, by an express decision and command, attempt to put a final termination to them. A proposition indeed may be certain and important truth; yet a man cannot receive it without due preparation of mind and heart; — so that a compelled assent to any doctrine, or conformity to any outward observances, without conviction, would in general be hypocrisy, and entirely unavailing. So essential are the rights and existence of private judgment, in all possible cases, to the exercise of true religion! and so useless an encumbrance would an infallible judge be, for deciding controversies, and producing unanimity among Christians!

— Scott (on Romans 14:1)

(로마서14장 강해)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로마서14장 강해) “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

(로마14:22)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있도다 ”

(서론) 크리스챤의 전형적인 문제(13:14)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하였지만 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다. 1장부터 8장까지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리가 기록되었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의 소망 가운데 있는 의의 섭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2장부터 16장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의로운 삶의 원리가 기록되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로마서 14장은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의 원리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예배와 진정한 사랑(12장),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13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자유(14장)에 대해 기록되었다.

바울은 13장 마지막 절에서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14)고 권고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할 전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누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롬8:14) 증거한 것이다.

또한 바울은 아직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데 너희는 유혹의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 (엡4:20-24) 책망하였다. 이처럼 육신의 습관들은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는 족쇄와도 같다.

계속하여 바울은 “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 (골3:8-17) 이는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이성적인 문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극복해야 하는 문제는 내적으로는 육신에 속한 정욕의 문제요 둘째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자기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3장 끝에서 바울이 말한 바 ‘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에서 도모라는 단어는 헬라어 ‘ pronoian ’ 으로 앞서서 생각하는 것, 또는 미리 계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육신의 일은 정욕의 욕심을 따라 달려 가는 속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에 사도 요한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은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되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 (요일2:15-17)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봉사하며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베드로는 “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 (벧전4: 11) 권하였다.

I. 영적교만의 문제(14:1-12)

“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12)

A. 믿음에 관하여

바울은 서두에서 “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1)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믿음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있다 없다, 믿음이 크다 작다로 구분한다. 이는 믿음의 속성에 속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믿음을 가질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극복할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함을 전제한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속성에 대하여는 복음서에 중심이 되고 있다. 마가복음 9장 19절에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요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 책망하셨으며,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주의 말씀을 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는 ‘ 내가 믿겠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막9:24)간청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어린 자의 실족시키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경계하시며 그런 상황이라도 네 형제가 범죄하면 경계하고 회개하면 하루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말씀하실 때 주의 요구에 믿음의 한계를 느낀 제자들은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눅17:5) 청하였다. 이는 모두 믿음의 존재가치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2)하였다. 이는 믿음이 강한 우리도 연약한 믿음으로부터 출발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넘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 (고전3:2) 하였다.

3절에서 바울은 “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았음이니라 ” (3) 기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이러한 글을 쓴 동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물론 여기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한 상황이다.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교로 전향한 히브리 성도들을 향하여는 “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도리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먹을 자가 되었도다 ” (히5:12) 책망하였다. 이는 그들이 히브리 민족으로 태어남으로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전통을 가졌고 또 복음의 은혜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었음에도 그들의 믿음이 율법에 매여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 힐문하셨다. 이처럼 오늘날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성경의 학문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계시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경륜을 따라 성취되는 믿음에 속한 비밀이다. 이에 바울은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 (롬10:17) 증거하였으며,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엡4:13)라고 기록하였다.

B. 비판에 대하여 – (비판:exoutheneito)

바울은 ‘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1a)하였다. 비판에 관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팔복에 속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 (마7:1-3) 하셨다. 이는 판단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이다.

바울은 4절에서 “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하였다. 이는 성도의 믿음의 주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가 잘났던 못났던 성도의 믿음에 관하여는 우리가 서로 판단할 대상이 아니라 그 모든 주권이 그를 부르신 주 예수께 있다는 말이다.

야고보 기자는 이를 말하여 “ 형제들아 파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시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 (약4:11-12)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의 성도의 믿음의 행실을 판단한다면 스스로가 교만하여져 재판자의 위치에 선 것이 되는 것이다.

C. 비판의 동기가 무엇인가?

5절에는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이는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하였고 다시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6) 기록하였다.

이 부분은 다른 사람의 신념에 관한 말씀이다. 설혹 우리 중에 누가 우리가 깨달은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하드라도 그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 또한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그들과 같이 믿음의 초보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울은 깨달은 우리를 향하여는 “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 (갈4:10-11) 하였으며 다시 “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골2:16-17) 기록하였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터득한 자들이 주변의 상황에 이끌려 다시 돌아 눕는 경향을 경계한 것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 (골2:23)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에 선 자들을 위한 경계의 말씀이지 아직 연약하여 우리와 같은 지혜를 얻지 못한 자들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도 절기에 대한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어느 교회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과 같은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나 어떤 교회는 그러한 날들은 교회 역사 속에 가만히 들어 온 잘못된 관행으로 여겨 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러한 판단을 해야 하는 동기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교만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 (고전4:3,4) 하였고 “ 때가 이르기 전에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고전4:5) 권고하였다.

D. 성도의 주권(7-12)

바울은 계속하여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 (7,8) 기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은혜와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하나가 되어 소망의 날에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이에 바울은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 (9) 하였다.

죽은 자와 산자의 주가 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오묘하다. 대부분의 우리는 주는 오직 산 자의 주가 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말씀하실 때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 속에 역사하고 계심을 언급한 것으로 이미 죽은 자는 그 생이 다하여 주의 판단에 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 또한 주께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심을 뜻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요5:27-29) 하셨다. 이는 선한 일을 한 자나 악한 일을 한 자나 모두 주의 주권 속에서 주의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고후5:10) 증거하였다. 이 말씀은 믿는 자들도 불신자가 받아야 하는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행한 믿음의 결과에 따른 주의 판단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죽은자의 심판에 대하여는 계시록에서 보게 된다. 계시록 기자는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계20:12)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판단에 관하여 세가지 지침을 전하고 있는데 이는 성도된 우리에게 허락된 판단의 권리에 대한 지침이다. 먼저 주님은 “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 (요7:24) 하셨으며, 두번째로 성도들의 범죄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는 “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 (고전5:12-13) 기록하였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 난 범죄를 꾸짖어 그 죄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이다.

세번째로 성경은 스스로에 대하여 엄격해질 것을 권고하여 “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 (고전11:31)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준을 두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성도를 판단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케 되게하려하심이다.

계속하여 바울은 “ 내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엎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 (10,11) 증거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너무 자고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도 아직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세우신 다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기 일수다. 만약 우리가 아직 남을 판단한다면 그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가 될 것이다.

II. 자유의 책임(13-23) –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을 두지 말라

“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18)

A. 사랑을 떠난 또 다른 행동들(13-21) – 확실지 않은 일에 대한 논쟁

바울은 두번째 단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의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책임이기도 하다. 먼저 그는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13) 증거하였다.

이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횡포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시험하는 교만한 마음이기도 하다. 나는 신학교 때 어떤 목사로부터 ‘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 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솔직히 말해 그 당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형제들을 찾아가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하는데는 믿는 자들의 지식이 참으로 열악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이나 구원파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고 있다. 당신의 이름이 과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당신의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는 증거를 성경으로 설명해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그 날이 언제인지를 말하라고도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들이 아닐 수 없다. 내 영혼의 구원이 그 사람들에게 의해 판단을 받는다는 것 그 자체가 몹시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바울은 여기서 이런 일들의 예를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14절에서 “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느니라 ” 기록하였다. 여기서 속되다는 것은 레위기에 언급된 정결규례에 정한 부정한 식물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개종한 근본적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성도간의 마찰을 염두에 두고 있다.

계속하여 바울은 “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15) 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먹는 음식물에 대하여 강력한 의지를 밝히는 것은 이러한 문제가 그 시대에 커다란 이슈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개종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들어 왔고 그들 중에는 바리새인과 제사장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태어남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자들로서 아직 신약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아직 구약의 가르침에 치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복음의 은혜에 동참한 사람들이라 해도 태어남으로부터 터득하고 있었던 음식에 대한 규례를 쉽게 떨쳐 버릴 수 없었고 또 그에대한 성경적 규례도 지나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분명한 신학적인 규정을 해 놓지 않으면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큰 문제가 야기 될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이방인 고넬료 백부장의 전도 사건을 알고 있다. 그는 자기의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제에 힘쓰는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 그에게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라고 명하셨다. 그때 베드로도 기도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한 그릇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각색 네발 달린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 는 소리가 있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습니다 ” (행10:14) 답하였다. 그의 말에 하늘로부터 “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 는 소리가 있었고 이런 일이 세번이나 거듭하여 일어 난후 그릇이 하늘로 올라갔다. 베드로는 이 환상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의 하인들이 문 앞에 와서 베드로를 청한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주께서 유대인된 자신의 고정관념을 깨우치시고 이방인에게 나아가기를 알리신 것으로 깨달아 그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자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베드로가 말하여 ‘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행10장 참조). 이 일은 후일 안디옥교회에서 발생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리적 분쟁에 증거되어 많은 논쟁 끝에 각 이방교회에 “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 는 공문을 통하여 문제를 봉합하였다(행15장참조).

사실 사도 바울도 다른 사도들과 같은 유대인으로서 엄한 바리새인의 율법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며 그 또한 율법의 엄한 규례를 따라 생활하던 사람이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사상과 이념과 종교적 생활 습관들을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원래 순복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십여년간 순복음이 지향하는 믿음의 신조를 신봉하던 열열한 순복음맨으로 오순절 계통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순복음식 오중복음과 성령운동에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내가 갈보리채플로 전향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갈보리채플로 전향한 후에도 내게는 순복음식 신앙의식이 몸에 배어 있어 그 습관들을 털어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서울에 돌아와 갈보리채플을 개척했을 때 나를 따라 갈보리채플에 출석하게 된 나의 누님은 한 동안 순복음식 신앙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새벽이면 여의도 교회까지 달려가고 순복음 구역장들과 어울려 구역예배에 참석하며 기도원을 찾았다. 몸과 마음은 갈보리채플에 와 있으면서도 행동은 순복음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당시 그러한 이중적 신앙생활을 제지하던 내게 누님은 눈물을 흘리며 십여년간 순복음식 신앙관에 사로잡힌 것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벗어버릴 수가 있느냐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누님은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말씀을 듣고 지키며 장래의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가르침에 흔들릴 수 없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최근 갈보리채플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여러 교파의 성도들과 교제를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목사도 있으며 장로와 집사도 있고 또 아직 교회를 다니지 않는 초신자도 있다. 예전같으면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 공방도 하고 또 갈보리채플의 신학적 노선에 대하여 강요를 할 것이지만 나는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그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교파적 교리를 전달할 필요도 없고 또 그들의 교리에 대하여 비방할 권리도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주께 받은 바 성령의 지혜를 따라 성경의 말씀을 전달할 바이다. 그들이 어떤 믿음을 가질 것인지는 결국 그들을 인도하시는 주께 있으며 그들도 온전한 지식에 이르는 날이면 나와 같이 자유함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자유

바울은 “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16) 하였다. 이는 그들과 논쟁 속에서 우리에게 있는 선한 하나님의 뜻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얼마전 화요성경공부에서 나를 따르는 한 청년이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과 논쟁이 일어났다. 그들의 논쟁을 들어 볼 때 나를 따르는 청년의 말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에 돌아와 눈물이 쏙 빠지도록 그 청년을 책망하였다. 그들과의 논쟁 속에서 우리가 아는 주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게 되며 아직 온전한 지식을 듣지 못하여 터득치 못한 그들에게 그 청년의 언행은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은 격어야 할 일들이다.

이에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 (17,18) 증거하였다. 여기서 의는 온전함을 뜻하며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화평을 뜻하며 희락은 주로 말미암는 기쁨을 말한다. 이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아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때 주어지는 지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쓰나니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약 식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느니라 ’ (19,20) 증거하였다.

주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아직도 먹는 것에 대하여 율법적 지식을 그대로 따른다. 수년전 나는 갈보리채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유대계 목사를 한국에 초대하였다. 그는 먼저 한국음식을 대할 때 먼저 그 음식에 대한 재료를 나에게 물었다. 그는 한국의 명산 김치를 맛보고자 하였지만 김치에 젓갈이 들어 갔음을 알고 일체 먹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앙적 습관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의 식탁문화도 그들에게 신앙의 한 부분이요, 또한 그들의 율법적 규례와 관계없이 오직 믿음 안에서 음식을 대하는 우리의 믿음 또한 그리스도의 자유함에 거한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21)하였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가진 자라도 음식으로하여 형제의 믿음에 의심을 갖게 해서는 않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 만일 식물로 내 형제로 실족하게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 (고전8:13)하였으며 제자 디모데에게도 일러 “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 (딤전4:3-5)고 가르쳤다.

C. 분별의 지혜(22-23)

끝으로 바울은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22)하였다. 이 말씀은 참으로 어려운 말씀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준에 대하여 자기를 책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온전한 지식에 이른 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는 자 안에 있는 선한 양심에 대한 확고한 책임을 뜻한 것이다.

바울은 23절에서 “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기록하였다. 우리가 믿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확고한 지혜를 뜻한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우리 안에 있어 성령의 지혜로 우리 양심이 선한 것을 따르면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얻을 것이다. 후일 바울은 “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악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 (고전8:12) 요한도 “ 죄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 (요일3:4) 증거하였다.

로마서 14장 주석

로마서 제 14장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데'(* ,

‘한편’)는 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

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19의 ‘믿음이 약하

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의

‘연역한 자'(* , 아스데눈타)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

(* , 아스데네사스)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

(* )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19의

‘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7, 9, 10;9:22의 ‘아스데네스'(*

, ‘약한’)나 고전 8:11, 12의 ‘아스데네오'(* , ‘약하다’)를 통

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

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

(Sanday and Headlam).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

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

한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

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

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

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너희가 받되(* , 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

(* )의 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

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즉,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

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

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

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과 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

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

(welcome;RSV, LB).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

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

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

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

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

는 ‘디아크리세이스'(* )는 ‘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

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

)은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는 ‘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

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

(Cranfield). 즉,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

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

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레 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

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

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 피

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즉,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딤전

4:3, 4).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

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 )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즉,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

다(창 9:3;잠 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

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레 11장),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

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

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

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

이기 때문이다(12:3).

=====14:3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 ,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

어는 ‘여수데네오'(* )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

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

(* , 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 , 카타크리시스)

라는 표현보다 ‘판단'(* , 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

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

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

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

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Calvin).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하인

과 주인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반문의 형식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엄히 질책(質責)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을 제쳐두고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하인이 있다면 그 같은 행동은 주인의 영역을 월권(越權)하는 행

동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주인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Harrison). 하인들의

행위는 오직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인들의 행위는 주인이 책임져

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둘로스'(*

, ‘노예’)가 아니라 ‘오이케텐'(* , ‘가사를 돌보는 머슴’)이다

(Bruce).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종의 행위에 대한 전적

인 책임은 그를 세운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 ,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집 주인이다

(Godet). 그는 그의 집 하인들을 다스릴 ‘권능’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

테이'(* )는 바울의 서신서에서만 발견되는 동사(고후 9:8;13:3)로 하인

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왕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Dunn). 이 처럼 믿음이 강한 자

나 약한 자에게 있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

능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

고 있다.

=====14:5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

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인류 사회가 길일

(吉日)과 흉일(凶日)을 구분하여 날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졌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분명히 있고, 비록 복음이 전해진 사회에서도 성도의 자유

문제와 연관지어서(갈 4:9ff.;골 2:16) 안식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혹은…혹은…'(* …

…,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

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

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

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날’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

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갈 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

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

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흠정역(KJV)에는 ‘날을 중히 여

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지 않으며'(and he that regardeth not the day,

to the Lord he doth not regard it)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문맥에 어울리도록 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바울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추

정해 보면, (1) 문맥상 생략해도 뜻이 통하는 것으로 여기고 구차하게 언급하지 않았

거나, (2)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생

략했거나, (3) 독자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여 날이 중요한 것

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 ‘주를 위하여’

(* , 퀴리오;’주에게’)와 ‘하나님께 감사한다'(*

, 유카리스 테이 토 데오)라는 문구가 반복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약한

자’가 됐든지, ‘강한 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

다(Harrison). 사도 바울은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것을 가르치면서(딤전 4:3ff.),

이러한 문제로 교회가 나누어지거나, 헛된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

다. 이로써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음식과 날에 대한 로마 성도들의 태도를 일단 정리한

다.

=====14:7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

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절).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

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

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

인 생활 원리 중 첫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몬 헤아우토 제'(*

)로 여기서 ‘헤아우토'(* ,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

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갈

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번

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

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 )

로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

을 나타낸다(Olshausen).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

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

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0, 21)

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

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

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14:8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生)과 사(死)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

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

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

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

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

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

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

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절에 대한 확

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서두에 ‘이를 위하여'(*

, 에이스 투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主)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고전

15:3, 4;고후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한편 ‘다시 살으셨으니’로 번

역된 헬라어 ‘카이 에제센'(* )은 ‘그가 소생하셨다’란 뜻으로 죽

음에서 일어나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의 신성(神性)과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예수님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입증하는

것이다(Harrison).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업신여기느뇨 – 바울은 앞서 3절에서의 책

망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첫번째는 연약한 형제에 대한 언급이다. 즉, 채소만

먹는 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하느뇨’에 해당하

는 헬라어는 ‘크리네이스'(* )로 의문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책망에

대한 좀더 강한 어조이다. 연약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한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권리와 근거로 그들

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며 연약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행위를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 대한 언급

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즉, 음식을 먹는데 있어

서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 자들이 채소만 먹는 자들을 업신여겼다. ‘업신여기느뇨’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수데네이스'(* )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

는 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고 있다. 양자간에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쪽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모

습이다. 왜냐하면 모두 온당치 못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믿음이 강한 자

나 연약한 자 모두가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래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

다. 여기서 ‘심판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마티'(* )는 운동 경기에서 심

판이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소에 있는 심판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

기는 사람을 보면 즉시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며 승리

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고전 9:24-27). 따라서 각자는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직

고하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 주의하

여야 할 것이다(11, 12절).

=====14:11

기록되었으되(* ,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과 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

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절)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

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 조 에

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민 14:28;사

49:18;렘 22:24, 46;겔 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

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요 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

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

(LXX) 사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 ‘자백하리라’)와 ‘파사 글롯사'(* ,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

(사 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즉, 한 분이신 지고

(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

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사 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절)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

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 여소몰로게오)라

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마 11:25;눅 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

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즉,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

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

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

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

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

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

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

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

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12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앞에 나온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끌

어낸 권고적인 결론으로서 이것은 10절의 사상을 되풀이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각 단어

가 매우 강조적인 것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Denney, Cranfield). ‘각

인'(* , 헤카스토스)은 어느 쪽도 배제(排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즉 판단하는 자나 판단받는 자 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자기 일을’

(* , 페리 헤아우투)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직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 토

데오)는 자기 파당이나 혹은 자기와 친밀한 동료에게가 아님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아시되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히 4:12, 13). ‘직고하리라'(* , 로곤

도세이)는 장부에 적힌 대로 세밀히 ‘보고하다’, ‘회계하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

판의 철저성을 나타낸다(요 3:17). 신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마 12:36;눅 16:12;행

19:40;히 13:17;벧전 4:5 등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최후 계산(셈)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6-16;고전 3:12-15;고후 5:1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

도인은 아무도 예외없이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

산해야 한다는 진리를 각 단어마다(‘각인’,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강조하여 선언한 것이다.

=====14: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

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

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마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

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

능성이 존재한다(Dunn).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

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

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

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

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

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

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절). 이제 본

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콤마'(* )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 )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

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마 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

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

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

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

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

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

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

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 , 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

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빌 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 , 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 , that)절

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

에서는 ‘페이도'(* )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

)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 , ‘내가 알다’)가 앞

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

(‘엔 퀴리오’, ‘주 안에서’) 다음에 ‘예수'(* )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 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

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막 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

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

투'(* )는 ‘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

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

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

)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 , ‘속된 것’)이

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견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막 7:2, 5;행 10:14;히 10:29;계 21:27)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

체는 속(俗)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

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

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막 7:15-2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Harrison).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

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창조 기사의 말씀과 그 원

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

을 생각할 때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히 9:12).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

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여 옛 시대의 그 의식법(儀式

法)에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빛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그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그 의식에 순종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Calvin, Kasemann, Cranfield).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

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

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

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

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즉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

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그 자체

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

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

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레 11장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과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

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준 것이다.

=====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

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절)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즉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13절) 왜냐하

면(* , 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절).’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

을 명백히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

(* )는 ‘뤼페오'(* )의 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

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

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마 14:9;17:23;막 10:22;요 16:20;Meyer, Godet,

Hendriksen).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

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

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

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

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

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벧전 4:8;요일 3:16;4:8).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

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

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

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

(Luthe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

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

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고전 8:11). 바울이 여기서 ‘그

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

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

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

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

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

이다. 모울(Moule)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

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

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이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 메 아폴뤼에)는 말은 대

체적으로 네 가지로 해석된다. (1) 한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Tholuck).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Murray).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Kasemann). 여기서 우리는 (1), (2)의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자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

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촉구한 것(13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데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

한 것이다.

=====14: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이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 문

제를 제기한다. (1) 이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 (2) ‘휘몬 토 아가돈'(* ,

‘너희의 선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1)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 , 휘몬)는 (까)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Murray). (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를 가리킨다(Dunn, Sanday and Headlam). (까)의 견해가 더욱 자연

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

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까)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

이다. 즉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Dunn, Michel, Nababan, Cranfield, Schlier). (다)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Murray, Calvin, Harrison, Kasemann, Godet, Sanday and Headlam). (따) 하나

님의 왕국(Meyer). (마) 믿음(Do Wette). (바) 복음(Philip). (빠) 그리스도 안에 있

는 신앙 전부와 복음(Lenski). 위의 견해 중 (다)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문제에서 이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

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

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까)이나 (바)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

이 훨씬 더 심각한 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

으로써 이 자유보다 훨씬 더 존귀한 ‘아가돈'(* , ‘선’)에 대해 해(害)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가돈'(* )은 강한 자들의 ‘아가

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아가돈’

은 복음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관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

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

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

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까)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둔 사

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Sanday and Headlam, Liddon). (다)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즉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Godet, Meyer, Hendriksen). 여기서

(다)의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

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것’이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까)

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이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이 ‘강한

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다)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절)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

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

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

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

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

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

다. ‘하나님의 나라'(* ,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

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

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즉,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

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

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의’

(* ,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즉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

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의’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

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

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 ,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

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

미한다(Calvin, 5:1;빌 4:7).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 , 카라)은 ‘의’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

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

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

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

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의’와 ‘평

강’과 ‘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

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 , 알라)이란 접속사가 ‘…만’,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

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의, 평강, 기

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갈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

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

아포라’ 참조).

=====14:18

본절은 19절과 함께 1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삽입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

지만(Michel) 그보다는 17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확인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

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Kasemann).

이로써(* , 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

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Hodge,

Origen).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Meyer, Murray, Sanday and

Headlam, Cranfield).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는 ‘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

(Barrett, Robertson).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Michel). (5) 바울은 오직 교

회 안에 평화를 진작(振作)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Gaugler).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과 (3)은 문

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the variant reading)에 ‘이로써’가 단수가 아

닌 복수(*

, 엔 투토이스, ‘이것들로써’)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

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즉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

과 희락'(*

,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

오)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Cranfield).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

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Sanday and Headlam, Murray).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

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 )

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

(Hendriksen).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

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 , 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

야 옳다(Cranfield). 즉,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

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

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

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

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Calvin).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

=====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 , ‘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

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

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

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

)은 ‘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는 ‘디오코’

(* )의 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

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

, 타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교회의 화합(和合)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딤후 2:22;히 12:14;벧

전 3:11).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Dunn).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 , ‘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

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덕(德)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

)는 ‘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

)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렘 12:16;31:4;33:7;42:10;45:4).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

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고전 3:9, 10;고후 10:8;12:19;13:10).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

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엡 2:19, 20;벧전 2:5). (3) 이 비유법

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즉, 구

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Dunn). 예

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고전 14:5, 12, 26,

Harrison).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

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15:2;고전

8:1;10:23).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

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전 14:3-5).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

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

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고전 9:19-22,

Calvin).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14:20

성도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덕을 세우는 일을 방

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함으로써 그의 논점을 강화한다(Harrison).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 , 카

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 , ‘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마 5:17;24:2;26:61;27:40;고후

5:1;갈 2:18).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

님의 사업(일)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 , 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

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

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절) 나

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

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만물이 다 정하되(* ,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막 7:19;행 10:15;고전

8:4-8)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

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즉,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

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

로 먹는'(* ,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

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

(Kasemann).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

다고 본다(Chrysostom).

=====14: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

게 계속되는 교훈이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

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

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

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

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 …, ‘…하는 것이 아

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

이 평가하고 있다(고전 7:1, 8, 26;히 13:9). ‘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

)은 ‘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

스'(* )의 목적격이다. 그러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들의 지극히 훌

륭한 일 즉, ‘칼론 토'(* )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 메 파게인 크레아). 이것은 본장 2,

3, 6, 17절에서 말한 ‘먹는 것'(* , 브로시스)과 15, 20절에서 말한 ‘식물’

(* , 브로마토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

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

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

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

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

기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아니함이 영구하고 강력한 금욕(禁慾)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먹다’를 가리키는 ‘에스디오'(* )의 동사가 20절에

서 현재형인 ‘에스디온티'(* , ‘먹는’)로 사용된 후 바로 이어 본절에

서 부정과거 ‘파게인'(* , ‘먹었다’)으로 사용된데서 확인된다(Dunn). 그러므

로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규례에 매여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잠시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음은 구약성경에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를 못 먹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까)

적절한 방법으로 피를 빼지 않은 고기(창 9:4;신 12:15, 16). 다시 말해 고기를 그 피

와 함께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레 19:26;신 12:23-25;15:23)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아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창 9:4)에 의해서도 금지되었다. (다) 부정한 동물의 고

기(레 11:8;신 14:8). (따) 우상 제물의 고기(고전 8:13). 물론 고기를 먹는 그 자체

를 율법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고(출 12:8;민 11:18) 다만 위의 금기 사항과 관련된

고기를 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규례를 아직도 준수하는 연약한 자들

이 실족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신앙의 자유의 행사를 절제(節制)하는 것이야말로 칭

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동임을 밝히고 있다(Harrison). 즉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

고 형제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2) 포도주도 마

시지 아니하고(* , 메데 피에인 오이논). 이는 ‘칼론

토’ 구문의 두번째 용어로서 17절의 관용구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

,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중에 ‘포시스'(* )가 구

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밝혀준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

지 않았기 때문에(신 7:13;11:14;막 14:23-25;요 2:1-11;딤전 5:23) 바울이 여기서 언

급한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는 하나의 가상적인 실례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모든 고기를 피하는(삼가는) 조심

스러운 행위는 포도주까지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Dunn). 왜냐하면 고기도 먹지 아니

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은 약한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 관습

이었기 때문이다(레 10:9, 10;겔 44:21;단 1:3-16;10:3). 그러므로 이것 역시 약한 자

들 편에서의 금주(禁酒)가 아닌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의 금주

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야말로 참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3)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 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콰테이). 이는

‘칼론 토'(* )는 구문의 세번째 용어로서 연약한 자를 위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거리끼는 결과를 초

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하는 것이 좋음을 시사한다(Godet). ‘거리끼게 하

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콰테이'(* )는 ‘다리를 걸어서 넘어

뜨리다’ 혹은 9:32, 33에서처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

(Dunn).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

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

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

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

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

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

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확신과 내적 자유의 외적인 표현은 기꺼이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를 안하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에서 더 나아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17, 19절) 힘

쓰는 것은 적극적 자세이다(Cranfield).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

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

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

20, 21절).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 쉬 피

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 , ‘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헨'(* ,

which)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

서 ‘믿음'(*

, 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쉬'(* , ‘너’, ‘당신’, 여기서

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

라'(* ,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

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 ,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

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

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

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

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

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

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즉,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

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절)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

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

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절)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절) 참으

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 , 마카리

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

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

을 책(責)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

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 )로 자신을 ‘시험하

다’, ‘검토하다’, ‘분석하다'(* , 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

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 역 시 ‘정죄하다’, ‘심

판하다'(* , 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

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

(Calvin, Godet).

=====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

서 앞절(22절)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

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 )

는 ‘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 )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

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

(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 , 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 )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

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

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

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갈

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

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

, 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

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절)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과 (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

, 하마르티아 에스틴)는 말에서 ‘죄’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 )는 통

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하마르티아'(* )가 본

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

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

(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

(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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