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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LA올림픽, 여자 농구에서 대이변이 벌어졌습니다. 약체로 평가받던 대한민국이 최초로 은메달을 따낸 것이죠.
김영희 씨는 전설이 된 이 경기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태극전사들 중 한명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피지컬로 타국 선수들의 기를 죽이며 든든하게 버텨준 팀의 대들보.
하지만 우월한 신체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1987년 쓰러진 뒤 거인병 진단을 받고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인데요. 한국의 위상을 높였던 여전사가 한 때 ‘괴물’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영희 씨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매달 연금 70만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보다 힘든 사람들을 돕고 동네에 온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의 따뜻한 근황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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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나이 농구선수 결혼 남편 투병 가족 고향 근황 프로필
농구선수 김영희 프로필. 김영희 나이 학력 키 고향 가족관계. 출생. 1963년 5월 17일 (58세). 울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신체. 205cm. 포지션.
Source: youwin0427.tistory.com
Date Published: 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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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 선수 김영희 결혼
농구 선수 김영희 결혼 groupeimpactmedia.fr. 복수 야동. 786. [서양야동] PublicAgent Sara는 카메라를 자위하고 복수하여 복수합니다.
Source: groupeimpactmedia.fr
Date Published: 5/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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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병 투병 농구선수 김영희 올해 나이 가족은
거인병 투병 농구선수 김영희 올해 나이 가족은 … 김영희의 올해 나이는 1963년에 태어나 만58세 입니다 결혼은 하지 않았으며 미혼인데 보통사람들 …
Source: sosohani.tistory.com
Date Published: 4/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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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농구) – 나무위키
대한민국의 여자 농구 선수로 역대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이기도 하다. … 거인증을 앓고 있는 김영희 선수와 달리 이 여성은 질병이 없이 키가 큰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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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농구 선수 김영희 결혼
- Author: 근황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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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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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선수 김영희 프로필 나이 키 결혼 남편 근황 엄마 부모님 가족 남자친구
김영희 농구코치 겸 농구선수는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나와 인생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또 학창 시절에 농구부 활동을 한 동창을 만난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늘은 농구선수 김영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농구선수 출신으로 농구코치 활동도 했습니다. 한국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로 과거 뛰어난 농구 실력을 자랑했다고 하네요. 김영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키가 커서 배구 선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초등학교 6학년 때 농구로 종목 바꿨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한국화장품 여자농구단에 입단하여 농구선수 활동을 했다고 하네요. 1984년에는 ‘1984 LA 올림픽’에서 은메달 획득에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농구선수로 활약을 하다가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농구선수 은퇴를 하게 되었고 2002년에는 말단 비대증 판정을 받았다고 하네요.
프로필 본명 김영희, 1963년 5월 17일생으로 만으로 나이 58살이네요. 고향은 울산광역시이며 키 205cm이라고 합니다. 가족은 부모님 아빠, 엄마, 남동생 1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력은 동주여자중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이며 한국 여자농구연맹 경기 기술위원, LA올림픽 여자 농구 국가대표, 한국화장품 농구팀 선수 등 경력 사항이 있다고 하네요. 여자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여자농구대잔치 인기상, 여자농구대잔치 자유투상, 여자농구대잔치 리바운드상, 여자농구대잔치 득점상 등 수상 정보가 있습니다.
농구선수 은퇴 후 30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놀림과 우울증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생활은 매달 나오는 체육 연금 70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고 했습니다. ‘서장훈’은 김영희 계좌에 거액의 돈을 송금했고 ‘허재’는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하네요. 2021년 12월에는 특별 보조금 1000만 원을 받았고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결혼 안 한 미혼으로 혼자 살고 있다고 합니다. 1998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2000년 아버지가 암수술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하네요.
김영희는 5살 어린 시절에는 보통 아이들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키가 계속 자랐다고 하네요.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농구를 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유능한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큰 키는 축복이자 저주였다고 하네요. 가족들의 키를 살펴보니 친동생 키 173cm, 아빠 키 165cm, 엄마 키 163cm이라고 합니다. 그럼 오늘은 김영희 농구선수의 거인병 직업 집안 남편 등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언제나 즐거운 정보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농구코치 김영희 프로필 과거얼굴 결혼 근황
김영희 프로필 과거얼굴 결혼 근황
김영희 농구선수의 최근 근황 소식으로는 ‘스타다큐 마이웨이’에 출연한다고 합니다. 집 공개와 일상 공개를 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학창 시절 함께 농구부 활동을 한 동창을 만나 인생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농구선수 겸 농구코치 김영희의 과거얼굴 결혼 등 다양한 정보와 과거 젊은 시절 사진이 궁금해져서 살펴봤습니다. 그럼 밑에서 사랑스러운 과거 어린 시절 사진과 농구 선수 시절 사진을 보실까요? 두근두근두근!
먼저 농구선수 김영희 프로필 정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명 김영희, 국적 한국, 1963년 5월 17일생으로 만으로 나이 58살이네요. 고향 지역은 울산광역시이며 키 205cm이라고 합니다. 가족 관계는 부모님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1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력 사항은 동주여자 중학교, 숭의여자 고등학교이며 경력 사항은 한국 여자농구연맹 경기 기술위원, LA올림픽 여자 농구 국가대표, 한국화장품 농구팀 선수가 있다고 하네요. 수상 내역은 1983년 여자농구대잔치 최우수선수상, 여자농구대잔치 인기상, 여자농구대잔치 자유투상, 여자농구대잔치 리바운드상, 여자농구대잔치 득점상이 있습니다. 그밖에 몸무게, 혈액형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영희 직업 농구코치 겸 전 농구선수로 대한민국 역대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라고 합니다. 과거 어린 시절부터 키가 커서 초등학교 시절에 배구 선수 활동을 했고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는 농구로 종목 전향을 했다고 하네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한국화장품 여자농구단에 입단하여 농구 선수 활동을 했습니다. 이후 ‘1984 LA 올림픽’에 참가하여 은메달 획득 등 활약을 했고 점보시리즈 농구대잔치 한 경기에서는 여자 농구 한 경기 역대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갑자기 쓰러져면서 뇌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은퇴식도 없이 은퇴를 하게 되었고 2002년에는 말단 비대증(거인병)을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영희 농구선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3~4년 정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불안증, 우울증이 심해졌다고 하네요. 유튜브 채널 ‘근황올림픽’에서 근황 소식을 말하기를 매달 나오는 체육 연금 70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고 했습니다. 후배 농구 선수 ‘서장훈’은 말도 없이 김영희 계좌에 거액의 돈을 송금했고 농구 감독 ‘허재’도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2021년 12월에는 특별 보조금 1000만 원을 받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결혼 안 한 미혼으로 결혼에 대해서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키와 체격이 컸기 때문에 자신을 좋아할 남자도 자신과 어울릴 만한 남자도 없다고 미뤄 짐작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자신도 보통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려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고 합니다.
김영희 농구선수는 과거 태어났을 때는 너무 작고 연약했다고 합니다. 5살까지 보통 아이들에 비해 작은 편에 속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후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키가 크다는 이유로 중학교 2학년 시절에 농구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큰 키는 자신에게 축복이자 저주였다고 하네요. 친동생 키 173cm, 아빠 키 165cm, 엄마 키 163cm으로 가족 중 유독 자신이 컸고 유능한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춘기 때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앞으로도 광고 모델, 화보, 예능 프로그램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오늘은 농구코치 겸 농구선수 김영희의 과거얼굴 결혼 집안 남편 등 다양한 정보와 과거 리즈 시절 사진을 살펴봤습니다. 유익한 정보가 되셨기를 바라며 이상 오늘의 정보였습니다.
농구선수 김영희 최근 근황은? 나이 가족 결혼 연금 생활 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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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농구선수 김영희는 최근 유튜브 방송인 ‘근황올림픽’을 통해 근황을 공개했습니다. 김영희는 현재 체육 연금으로 받는 70만 원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최근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김영희는 병원비가 많이 들었는데 서장훈과 허재 감독이 치료비를 보내줬다고 말하며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사진= 유튜브 ‘근황올림픽’ 화면
김영희 프로필
출생: 1963년
키: 205cm
결혼: 미혼
김영희는 80년대에 활동한 농구선수로 84년도 LA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는데 기여한 선수로 뛰어난 실력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김영희 선수는 88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쓰러지게 되고 결국 선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뇌수술을 받을 정도로 심각했으며 이후 거인병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은퇴식도 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접게 된 김영희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거인이라고 수군대는 말에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김영희 선수는 이후 장애인 봉사활동을 시작하며 아이들을 만나여 위로를 받게 되었고 다른 농구 선수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네티즌들은 “인터뷰를 들으면서 마음이 찡해졌다”, “좋은 일만 가득하셨으면 좋겠다”라며 김영희 선수를 응원했습니다.
김영희 과거 사진
서장훈, 허재 감독 등 최근 방송에서 활약하는 왕년의 스포츠스타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김영희 선수도 방송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힘든 시기를 겪었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아프네요. 그리고 ‘저것도 인간이냐’라고 말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정말 화가 나네요. 김영희 선수가 나온 영상을 봤는데 참 밝고 따뜻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행복한 일만 일어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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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너무 커서 힘겨운 삶 사는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
■ 기획·최미선 기자([email protected]) ■ 글·김순희(여성동아 리포터)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2.12.18 12:34:00
‘너무 커서도 안되고 너무 작아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전 국가대표 농구선수 김영희씨는 큰 키 때문에 80년대 농구코트를 주름잡았고,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의 은메달 획득에 핵심적 역할을 하며 스타로 부상했지만 농구코트를 떠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였다.
김영희씨는 동료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하며 결혼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한다.
여성동아 2002년 12월 468호
“거인 아줌마. 거인 아줌마.”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인근 놀이터에 김영희씨(40)가 나타나자 그곳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거인 아줌마’하고 불러대며 그를 에워쌌다. 들고 있던 식빵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던 그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아직 ‘처녀’인 그를 두고 아이들이 ‘거인 아줌마’라고 불러도 그는 전혀 섭섭하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을 외계인 취급하지 않고 달려와 안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하기 때문이다.“처음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제가 지나가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경계를 하곤 했어요. 그 시선들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늘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어요. 언젠가는 ‘거인 아줌마’가 왔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아이가 있어서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을 다 불러모아서 물어봤어요. ‘너희들은 키 작은 사람이 좋니? 키 큰 사람이 좋니?’라고 물었더니 ‘키 큰 사람이 좋다’고 하더라고요.”그는 며칠 후 동네 꼬마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거인 아줌마가 옛날에는 아주 유명한 농구선수였다”고 설명했다. 스무명쯤 되는 아이들은 “그게 사실이냐”고 되물으면서 경계의 눈빛을 멈추었다. 그날부터 그는 동네 아이들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키 205cm. 우리나라에서 여자로서는 가장 큰 키로 알려진 김영희씨는 80년대 한국 여자농구계를 주름잡았다. 이름보다는 ‘코끼리 센터’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그에게 ‘큰 키’는 신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농구선수’일 때뿐이었다.“그때는 키 때문에 고민할 겨를이 없었어요. 오히려 큰 키 때문에 농구를 할 수 있었고, 농구선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로 고민하지 않았죠. 선수생활을 그만두면 어떻게 살까 하는 고민을 막연하게 하긴 했지만 피부에 와닿을 만큼 절실하지는 않았거든요.”부산 동주여중 1학년 때 183cm였던 그는 ‘키’ 때문에 농구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태어났을 당시 너무 작고 여려서 할머니가 건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릴 만큼 연약했던 그는 다섯살 때까지는 보통 아이들에 비해 작은 편에 속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쯤 컸던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는 물만 주면 쑥쑥 자라는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했다.“키가 크다는 이유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실업팀인 한국화장품과 인연을 맺었어요. 아마 중학생이 실업팀에서 뛴 것은 농구계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일 겁니다. 역시 큰 키 때문에 숭의여고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행운을 얻었어요. 그때는 내 인생의 전부가 농구라 여겼기 때문에 키가 크다는 사실이 고마웠어요.”79∼87년 한국화장품(97년 팀 해체) 소속 선수로 뛰었던 그는 84년 LA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농구가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그해 점보시리즈에서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고인 60득점을 하면서 개인타이틀 5관왕에 올랐다.“농구선수로서의 그만한 영광을 누려보기도 쉽지 않은 일일 겁니다. 당시에 저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었고 큰 키에 대한 콤플렉스보다는 자신감에 차 있던 때였어요. 그러나 저에게 영광을 안겨줬던 큰 키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이기도 했습니다.”그의 남동생(35)은 한국인 남자 평균 신장에 해당하는 173cm, 그의 아버지는 165cm, 엄마는 163cm로 ‘보통 사람’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의 몸과 키가 계속 커져 가는 것은 ‘거인병’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어려서부터 주변사람들이 ‘식구들 중에 유독 너만 왜 그리 크냐’고 물으면 ‘내가 우리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다 뺏어 먹어서 이렇게 크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했어요. 내가 거인병인지조차도 몰랐고 키가 2m를 넘으면 유능한 농구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춘기 때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그는 현역 시절에는 202cm였지만 지금은 205cm. 아직도 키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끊이지 않고 샘솟는 성장호르몬 때문에 뇌종양이 생겨 87년 코트에서 쓰러져 수술을 받았다.“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다시 코트에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런데 병원에 있는 동안 당뇨병과 위궤양 등 합병증이 찾아와서 절 괴롭혔죠. 그때부터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고 내 삶의 전부라 여겼던 농구코트를 떠나게 되었어요. 아파서 힘들었던 것도 있지만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요. 내가 세상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은 유일하게 농구뿐이었거든요.”그는 은퇴를 해도 딱히 할 일이 없었고 동료 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하며 결혼소식을 알려 올 때마다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결혼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살았다. 보통 사람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체격이 컸던 터라 자신과 어울릴 만한 남자도, 자신을 좋아할 남자도 없다고 미뤄 짐작했기 때문이다.“저를 데리고 살려면 우선 집도 커야 하고, 차도 커야 하고 모든 것들이 다 커야 하는데…. 유지비가 좀 많이 들겠어요?(웃음) 저를 데리고 살 남자가 없다고 단정지은 지 오래됐어요. 나도 여잔데 그렇게 마음먹기까지 어찌 제 속이 편하기만 했겠어요. 보통 사람들처럼 가정을 꾸리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싶은 기본적인 욕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결혼에 대한 꿈은 오래전에 접은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았지만 엄마는 선수시절부터 딸이 여자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어요.”“시집도 못 가는 딸이 되어 엄마에게 고통을 안겨줬다”는 그는 5년 전에 뇌의 종양이 다시 커져서 두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머릿속에 큰 혹 하나는 제거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결핵까지 걸려 이가 하나 둘씩 빠지기 시작하더니 앞니가 네개나 빠지고 말았다.“지금 결핵은 나았지만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무릎이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거든요. 치과 치료도 받아야 하고 아픈 곳도 치료받아야 되는데 치료비가 적잖이 들어가서 그게 쉽지 않네요.”인터뷰 당일 그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국가대표시절 태릉선수촌에서 한때 같은 방을 썼던 전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소속 농구선수 김순애씨(38)였다. 김씨가 “언니, 살이 참 많이 빠졌네요. 몸이 많이 아프다면서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배시시 웃던 그는 “괜찮아. 정말 오래간만이다. 잘 지냈어” 라고 대답하고는 이내 후배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에게 눈길을 돌렸다.그는 “얘가 네 아들이야? 좋겠다. 넌, 엄마도 되고…” 라고 말끝을 흐리면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후배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묻어났다.“국가대표 선수 중에 영희언니가 가장 컸고 제가 가장 작았어요. 그땐 키 큰 언니가 참 부러웠었는데…. 두 사람이 신발을 빨아서 나란히 창가에 세워두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한번씩 쳐다보곤 했어요. 언니 신발이 군함만큼 컸거든요. 그때 330mm를 신었던 것 같아요. 언니 키에 맞는 침대가 없어서 침대 끝에 소파를 덧붙여 놓았는데도 다리를 오므리고 자던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그는 후배와 함께 선수시절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그 시절엔 키 작은 네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는데….” 여전히 말끝을 흐린 그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은퇴하고 나서 한국화장품에서 대리점을 개설해줬어요. 몸이 좀 나아지면서 90년부터 한 3년 동안 그 일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5년 전쯤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어요. 엄마는 여전히 완치되지 않은 제 병수발하랴, 아버지 돌보랴 참 힘드셨을 거예요. 저 몰래 눈물 흘리면서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나’라고 걱정하던 엄마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어요. 운동을 그만둔 이후 친한 친구도 없이 살아온 저에게 엄마는 엄마이기 이전에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였거든요.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어요.”98년 뜻하지 않게 쉰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엄마를 따라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식음을 전폐했다. 때문에 127kg였던 그의 체중이 90kg 밑으로 떨어졌다. “엄마 없이는 살고 싶은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한 그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1년여 동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힘들게 살았어요. 아니, 죽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아픈 아버지와 저를 남겨놓고 어찌 엄마가 눈을 감았을까 싶어요. 엄마는 제 병수발을 하다가 지쳐서 돌아가셨거든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엄마를) 따라 죽겠다고 몸부림치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올케와 함께 저를 붙잡고 대성통곡을 하더라고요. 제발 죽지 말라고 밤낮으로 애원을 하대요.”남동생 때문에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먹을 것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몸을 추스리면서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병수발을 도왔다. 그가 선수시절 번 돈과 한국화장품 대리점을 넘기면서 받은 권리금 등은 자신과 부모님의 치료비로 다 써버렸다. 지금은 경기도 부천의 여덟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양말 수선과 전자부품을 조립하던 부업도 한달여 전에 그만뒀다. 손놀림이 빨라야 하는 일인데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고 다리 관절염도 심해져 몸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는 “선수시절에 잦은 무릎 부상으로 인해 고생을 했는데 그때의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면서 씁쓸해했다.“2년전 이맘때 하늘도 무심하게 아버지도 제 곁을 떠났어요. 저보다 남동생 내외가 고생이 많았어요. 누구보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올케가 참 고마워요. 제가 아플 때, 아버지가 아플 때 친형제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살갑게 보살펴줬거든요.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남동생은 나를, 나는 남동생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그가 코트를 떠나자 아쉬운 것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당장 몸에 맞는 옷이 없어 문제였고 발에 맞는 신발이 없어 선수시절에 신던 운동화를 아껴 신어야만 했다. 코트를 떠난 그에게 남겨진 것은 예전의 화려한 명성 대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낯선 눈빛뿐이었다.“운동을 그만둔지 몇년이 지나다보니 아껴 신던 운동화도 다 떨어져 신을 신발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신발 만드는 회사 몇 군데를 돌아다녔어요. 제 신발은 특수하게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다들 돈을 줘도 만들어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풀이 죽은 채로 마지막으로 (서울의) 명동에 있는 ‘랜드로바’ 매장에 찾아갔는데 생각지도 않게 죽을 때까지 무료로 신발을 만들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웠죠. 신발 한 켤레 만드는 비용이 1백20만원이 드는데 6년 전부터 여름용 샌들과 단화를 만들어주고 있어요.”그에게 무관심하기는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운동경기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인 공로는 그에게 쥐어진 ‘훈장’ 몇개가 전부였다. 함께 코트를 누볐던 선후배들도 제각각 살기에 바빠 그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이제와서 누구를 탓하지는 않아요.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살아야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아요. 제가 타고 난 운명인 걸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접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이더라고요. 동네사람들을 보면 제가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요. 예전에는 제가 얼마나 무뚝뚝했는지 몰라요. 이곳에 이사온 지 4년쯤 됐는데 지금은 이 동네에서 저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물’이 되었어요(웃음).”자신의 정원을 아이들에게 내준 동화 속 ‘거인아저씨’처럼 동네 아이들의 좋은 친구로 살고 싶다는 ‘거인아줌마’는 “앞으로 할 수만 있다면 후배들을 가르치는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동네 꼬마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주고 싶다”면서 밝은 미소로 소박한 꿈을 내비쳤다. 그가 건강을 되찾아 소박한 그의 꿈이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영희 나이 농구선수 결혼 남편 투병 가족 고향 근황 프로필
김영희 국가대표 여자 농구 선수이다.김영희 키 205cm로 현재 공인된 대한민국 최장신 여성이다.국내 거주 여성으로서는 공동 1위인데, 키 205cm의 몽골인 유학생 여성이 있기 때문. 거인증을 앓고 있는 김영희 선수와 달리 이 여성은 질병이 없이 키가 큰 것이다. 또한 북한의 농구선수 박진아가 205cm라고 하는데 박진아는 2018년 기준 15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더 자랄 것을 감안하면 한민족 최장신 여성 타이틀은 내줄 것으로 보인다.김영희 포지션은 센터이다.
김영희 어린시절 학창시절
김영희 과거 경남 울산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키가 컸던 김영희는 부산광역시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배구 선수로 운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농구로 종목을 바꾸었고, 동주여자중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장신의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다.치열한 스카우트 경쟁 끝에 농구 명문 학교인 서울의 숭의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영희 데뷔
숭의여고를 졸업한 뒤에는 실업팀 한국화장품에 입단했다.숭의여고 2학년 때 대한민국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었으며, 은퇴할 때까지 대표 선수로 활동했다.
김영희 국가대표 올림픽
구기 종목 최초의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도 출전하여 김영희 은메달리스트가 되었다.
프로농구 선수에서 거인병 판정받은 후 외롭게 투병중인 김영희
“집에만 갇혀 지낸 20년 동안 친구는 엄마와 하늘의 구름이 전부였어요”거인병 판정을 받고 치료중인 전 농구선수 김영희가 후배들이 건네는 성금을 받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받기만 한다”며 코트 위에 눈물을 흘렸다. 지난 20년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외롭게 홀로 참아내야 한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여자 프로농구 플레이오프전이 치러지는 장충체육관에서 거인병(말단비대증) 판정을 받은 전 여자 프로농구 선수 김영희(42)를 만났다. 거동이 불편해 WKBL(한국여자농구연맹)에서 지원하는 택시를 타고 온 그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몸집이 컸다. 그동안 웬만한 문은 전부 고개를 숙이고 드나들어야 한 모양이다. 농구선수들이 지나다니는 장충체육관 입구에서도 김영희는 습관적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이날 후배 농구선수들은 병마와 싸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김영희 선수에게 성금을 전달했다. 후배들이 건네는 따뜻한 사랑을 전해 받은 김영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후배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너무 부끄럽고 감사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네요.”김영희는 3년 전 거인병 판정을 받고 현재까지 치료중이다. 8평짜리 단칸방에서 혼자 생활하는 그녀의 한 달 생활비는 연금으로 받는 20만원이 전부. 각종 사회단체 성금과 짬짬이 부업을 해서 얻는 수입이 있다고 해도 한 번 치료받는 데 1백40만원이 넘게 드는 병원비를 부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있다며,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저보다 고통받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감사할 뿐이에요. 그동안 각종 사회단체에서 모금해주신 성금을 쪼개서 매달 병원비로 쓰고 있어요. 병원에서도 제 사정을 알고 치료비 일부를 지원해주시구요. 그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죽는 날까지 즐겁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지난 1987년 김영희는 뇌수술을 받고 은퇴식도 없이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농구선수가 아닌 여자 김영희를 두고 사람들은 ‘저게 인간이냐’, ‘남자야, 여자야?’라며 수군거렸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그녀에게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로 다가왔다. 집 밖에만 나가면 신기한 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김영희는 온종일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운동할 때는 사람들이 처다봐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런데 은퇴하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죠. 집 밖에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더라구요. 사람들이 모두 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저를 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고, 저를 이렇게 만든 운명을 탓하기도 했어요. 집에만 있던 20년 동안 제 친구는 엄마와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이 전부였죠.”구름과 함께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이던 그녀의 어머니는 지난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호하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없이 집까지 팔아가며 아버지를 간호했지만 결국 아버지도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 곁을 떠났다. 아버지 병원비를 대느라 월세방마저 구하기 힘들었던 김영희는 한때 죽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물조차 입에 대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린 것.“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5년 동안은 지옥 같았어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죽기 위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어요. 당시 몸무게가 70kg까지 빠져서 너무나 흉하게 뼈만 남았죠. 며칠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정신을 잃었는데, 불현듯 매일 밤 저를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어머니는 저에게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네가 먼저 고개 숙이고 다가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또 ‘항상 너보다 어려운 사람을 먼저 생각하라’고 충고하셨어요. 살아 계실 때는 그 말씀이 너무나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그 이야기가 살아가는 힘이 돼요.”현재 그녀는 한국여자프로농구 명예기술위원 직을 맡고 있다. 김영희는 “명예기술위원이라고 해도 제가 하는 일은 없어요”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에게 명예기술위원 직을 맡긴 WKBL 측의 생각은 다르다. 과거 올림픽 출전 경험이 있는 김영희가 역경을 이기고 경기장에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비단 WKBL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여자 프로농구 여름리그 MVP를 수상한 우리은행 김영옥 선수는 자신이 받은 상금 전액을 김영희에게 전달하며 “경기장에 오셔서 저희 경기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죠. 하지만 경기장에 오실 때마다 얕은 오르막도 힘겹게 오르시는 선배님을 보면 가슴이 아팠어요. 당연히 저와 같은 후배들이 도와야죠”라고 말했다.현재 김영희는 키에 비해 관절과 뼈가 약해 평지를 걷는 것도 쉽지 않다. 다행히 통증은 사라졌지만 정상인보다 스무 배가 넘는 성장호르몬 분비로 인해 심장이 계속 커지고 있다. 수술 시기를 놓쳐 계속 약물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성장호르몬이 너무 많이 분비돼 온몸이 부풀어 있었죠.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났어요. 몇백만원이나 되는 수술비도 없었구요. 결국 수술 시기를 놓치고 지금은 약물 치료를 받는데, 치료를 받는 날은 이틀 동안 설사를 하고 머리가 빠져서 힘들지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을 주신 많은 분께 감사해요.”요즘 김영희는 치료받는 틈틈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담은 자서전을 출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책의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원고를 50% 정도 집필한 상태라고.“많은 사람이 저에 대해 궁금해하세요. 제가 소 한 마리를 잡아먹어서 이렇게 크다는 소문도 들리더라구요.(웃음) 책으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죠. 그 돈으로 그동안 받은 은혜도 갚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보다는 책을 통해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저도 체격이 남들보다 클 뿐이지 똑같은 사람이거든요.”추석을 맞아 먼저 떠난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는 김영희. 그럴 때면 동내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식사 대접을 한다는 그녀가 희귀병을 털고 멋진 희망의 슛을 던질 날을 기다려본다.글 / 김성욱 기자 사진 / 유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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