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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 감사절 (설교 10편 모음)| 절기별 설교 (교회력) – 다음블로그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맥추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4/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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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자의 축복 (출 23:14-17)
맥추감사절은 금년의 전반기의 수확, 곧 금년의 처음 익은 곡식을 거두어 감사하는 절기이며, 추수감사절은 후반기 수확 곧 가을철에 거둔 수확을 인하여 감사하고 한해 …
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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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 감사절 설교 500편 – 네이버블로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감사를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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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절을 지키자(맥추감사주일)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1) 발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은 자발적으로 행하였습니다. … 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 그것을 발로 드리는 감사라 말하고 싶습니다. (2) 입으로 감사하시기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10/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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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의 현대적 의미 (신 16:9-12) – 기멀전
맥추감사절을 맞는 우리는 우리의 감사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예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억지로나 인색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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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설교] 감사할 줄 아는 인생 – chojien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신바 은혜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Source: chojien.tistory.com
Date Published: 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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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추감사주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한국성결신문
이와같이, 성경적으로 맥추절과 오순절은 같은 날이지만, 한국교회의 경우, 맥추절인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맥추감사절은 시기와 상관없이, …
Source: www.kehcnews.co.kr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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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다른 이름 : 성장과 조화 [맥추감사절 설교] – 광주칠석교회
7월 첫 주일인 오늘,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초여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기 예배로 말입니다. 보리 수확과 관련된 절기인 맥추절은 …
Source: sevenstones.tistory.com
Date Published: 12/26/2021
View: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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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맥추 감사절 설교
- Author: SamilChurch삼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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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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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구촌 교회
맥추감사절의 교훈 출23:16-19
이스라엘 민족이 430년 동안의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동안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양식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으나 매일 하루 분량만 주시기 때문에
내일 먹을 것이 없으니 불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농사하며 내일 먹을 것을 저장하여 놓고 안정된 가운데 편안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에는 참된 안식이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가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시기가 되어 보리와 밀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자기들을 구원하여 안식을 누리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맥추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Ⅰ. 맥추절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였으나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생활과 광야생활중의 어려움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어려운 과정을 헤쳐 나왔어도 현재의 생활이 풍족하면 지난 일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착에 만족하지 말고 과거의 어려움을 거울 삼아
더욱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16장 12절을 보게 되면 “맥추절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아울러 애굽 땅에서 노예생활하던 때를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우리가 어떠한 생활을 했다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과거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바르게 의롭게 겸손하게 살아가는 삶, 이것이 맥추절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Ⅱ. 과거에 받은 은혜, 현재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게 되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잘 살게 되고 여유 있게 됐다고 자부하게 될 때에 바로 그때에 자칫 잘못하면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교만해지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사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내가 똑똑해서 살아온 것 아닙니다.
지난날 돌이켜 보면 수 없는 환란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건져주시고 지켜주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이와 같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인도해 주셨다고 하면
우리의 장례도 나는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Ⅲ. 맥추감사절의 영적인 교훈입니다.
맥추절을 다른 말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구약의 맥추절인 오순절에 가나안에서 첫 양식을 먹게 되었던 것처럼
신약에 맥추절인 오순절에는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 속에 계시게 된 축복의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 맥추절에는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약의 맥추절에는 지금까지 모든 사람에게 내리지 아니하던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나 쏟아져 내리게 됩니다. 여기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보잘 것 없고 적은 것 같아도
그것을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에 인간을 영원히 주리지 않게 하시려고 오신 성령님도 그날에 오셔서 계속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지속적인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것에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중생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사탄의 공격에 싸워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맞이해서 맥추절의 세 가지 의미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1.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날의 어려운 때를 기억할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인생을 의미 있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감사를 부르고, 불평은 불평을 부릅니다.
누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들이 감사생활을 통해서 날마다 겸손해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감사생활은 우리에게 겸손을 가져오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져오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감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게 될 때에 우리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주님을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의 영적인 의미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교우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으십시다.
멀어진 감사를 다시 가까이 합시다. 그리고 우리 생활 속에서 원망과 불평을 내버리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험난한 인생 길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 본문 신16:9-12 오늘은 7월 첫 주일입니다. 6개월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로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무더운 계절에 들어서도 영적으로 무장하는 달이 되게 하시고 오늘 맥추감사절에 몸과
마음을 바쳐 감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에 감사합시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맥추감사절이라 할 때 이것은 구약의 3대절기인 ‘유월절(뮤교절)’, ‘맥추절(칠칠절)’, ‘초막절’에 속합니다.
신명기 16:16절에서는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절기가 4월에 부활절, 7월에 맥추감사절, 11월에 추수감사절, 1
2월에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맥추감사절의 의의를 알아야 합니다. 一. 맥추절의 의의를 알자. (신명기 16:9-10절, 12절)
맥추절은 무교절(유월절)이 지난 다음 일곱 번째 주일 다음날을 하나님께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맥추절의 의의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에 종살이를 하면서 마지막에 먹을 것도 못먹고 입을 것도 못입고 아들나면 죽고,
이와같은 죽음에 공포에 싸여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로 양의 피로 문설주에 발라 하나님의 기적으로 그들을 출애굽하게 하셨고,
광야로 와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왔는데, 이 맥추절은 애굽에서 종되었던 것을 생각하고 구속하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12절에서는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리시고 구속하신 것을 생각하여 감사하는 절기, 그것이 바로 맥추절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쁘고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8.15기념일을 앞두고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만난다는 사실에 기쁘고 가슴 부풉니다.
그러나 애굽 땅에서 구속하여 주셔서 살아난 것을 생각할 때 더욱 감사한 것처럼,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서 구속되어 택정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것으로 맥추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을 감사합시다. 우리 찬송합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찬송하게 하소서.
아버지 아버지 나를 구하신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아 주옵소서” 맥추절의 의의는 참으로 귀합니다. 二.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자. (신명기 16:9-10절, 출애굽기 23:16절)
맥추절은 첫 열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0절에서는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 지내는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와 생수를 먹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자기 손으로 농사해서 첫 열매를 거두는 것이 맥추절입니다.
우리 나라 곡식의 첫 열매는 보리이고 과일의 첫 열매는
살구이듯이 가나안 땅에서 첫 소출인 보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출애굽기 23:16절에는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는 맥추절은 곡식중에 첫 소산을 자기 힘대로, 믿음대로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三. 맥추절의 영적인 뜻을 알자 (사도행전 2:1절)
맥추절의 영적인 뜻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이요, 성령강림주일이요, 교회의 시작임을 말합니다.
맥추절의 영적 뜻의 첫째가 오순절인 것은 유월절 이후에 주일을 일곱 번 지난 후 즉,
7×7=49일 다음날(50일)이기에 오순(50)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오순절이 사도행전2:1절에서 말씀하듯이 성령이 오신 날이기에 성령강림주일로 따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성령강림주일은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성령오시고 나서 교회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심에 의해서 전도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맥추절은 막혀있던 전도와 기도, 중심으로 하는 감사도 다시금 시작되는 오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애굽같은 세상에서 구원해주셔서 가나안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오순절 성령 충만하여 전도하고
전심으로 주께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구원해주신 것 감사드리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자원함으로 힘대로 하는 감사되게 하옵소서! ==========================================================
▒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1-6 온 지구를 뜨겁게 하던 월드컵이 끝났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대한민국을 새롭게 인식하고
우리스스로는 높아진 국가 위상에 기뻐하며 나름대로 성공한 월드컵을 자축하기도합니다.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큰 역할을 월
드컵이 해냈습니다. 그 가운데 긍정적인 하나의 변화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축구의 4강 신화
를 이룬 장본인인 <거스 히딩크(Guus Hidink)>감독의 조국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과 국
가적 관계입니다. 그래서 꼭 가보고 싶은 외국 여행 희망지 중에 단연 네덜란드를 손꼽는다
고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해서 양국 간에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네덜란드에 가 본적이 없습니다 마는 옛날부터 네덜란드하면 가장 대표적
으로 떠오르는 유명한 풍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풍차(風車 :
windmill)]입니다. 풍차가 무엇인지는 다 아실 것입니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바람의 힘
을 이용해서 동력을 얻는 기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날개들이 돌아가며 힘을 만들어
내고 그 힘이 물을 뿜어 올리기도 하고 방아도 찧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거대한 풍차를
돌리는 것이 바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람이 불어 주지 않으면 이 풍차는 무용지물(無用之
物)입니다. 만약 사람의 힘으로 그 풍차를 돌린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절대
로 안될 것입니다.
믿음의 삶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날마다 잘 해 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쉽게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을 굳게 먹어 보기도 합니다. 의지를 다져 보기도 합
니다. 결심을 새롭게 해봅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또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도 쉽게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우리의 날개가 쉼 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을 돌릴 바람이 있
어야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돌려 나갈 수 없는 믿음이라는 풍차를 돌릴 수 있는 그
바람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
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9-31)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힘입니다. 그런데 아
무리 바람이 불어도 풍차가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언제이겠습니까? 풍차의 방향
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풍차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바람을 향해서 서있어야 합니다. 방향
만 바람 쪽으로 향해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풍차는 힘차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하나님을 향해서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
님이 주시는 힘으로 산다면 우리의 삶은 강한 힘을 받아서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만의 평가에 의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평가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런데 가
만히 살펴보면 대부분이 세 단계의 평가 기준을 거칩니다.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의해
자기를 평가합니다.
먼저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과거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과거를 참 중요하게 여깁
니다. 묻어 두었던 옛이야기 보따리를 꺼내어 하나씩 풀어놓기를 좋아하는 습성들이 이 때
문입니다. 그 과거가 절망이었든지, 아픔이었든지, 실패였든지, 그래서 때로는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소중히 여깁니다. 그 내면에는 오늘의 내가 있기에 그 과거는 소중한 것입니
다. 그래서 그 옛날을 돌아보며 나를 평가합니다.
또 하나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현재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인 현
재란 각기 다릅니다. 어떤 이는 가정이 있어 즐겁습니다. 가족이 있어 인생의 참 의미를 느
낍니다. 자식이 있어 소망이 있습니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합니다. 반면에 불행하다 생각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겐 모든 것이 늘 부족합니다.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보다 좀 더 나은 미래가 있기를 조
급하게 기다립니다. 얼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이렇듯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삶의
평가에 행, 불행의 기준을 둡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한층 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어선 또 다른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따라옵니다. 과거보다는 말할 나위 없이 나은 미래여야하고 현재보다도 더더욱 나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는 만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피곤합니다. 성취하는 길만
이 내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라 여기기에 그 미래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
니다. 때로는 인격이 무너지고,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윤리와 도덕이 무시되는 <총체적 인간 성 상실>을 가져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나를 인정 받고자합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다
좋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여 인정 받고자 하는 열성은 대단한 것
이라 합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진정으로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으니 이게 문
제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평
과 원망은 잘하지만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불평과 감사는 할수록 커집니다.
내 과거의 삶을 돌아 보건대 정말 감사한 일 뿐입니다. 그 과거에 매여 있었다면 아무짝에
도 쓸모 없을 나 같은 못난 인간이 이렇게 까지 왔다는 사실이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삶이란 더욱 눈물로 감사할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을 만날 줄 누가 알았겠
습니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리라고 꿈속에서나 상상해 보았습니까? 여러분, 미워하
지 마십시오.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밉다해도 가만 생각해보면 이 보다 좋은 사람
들이 없습니다. 특히 이 세상에는 내 남편보다 좋은 남자는 없습니다. 내 아내보다 좋은 여
자는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사람끼리 짝지어 놓으셨기 때문입
니다. 비단 인간관계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불만이 너무 많습니다. 요구가 너무 많아요. 원망
이 지나칩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Denver)>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자동차 안
에서 졸도해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자동차 가스인 일산화탄소가 차 속으로 스며드는 것
을 모르고 문을 잠그고 잠든 채 있다가 두 사람이 함께 졸도한 것입니다. 달려온 구조대는
잠겨진 차안에서 두 사람을 구해내기 위하여 결국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리고 사람을 꺼내
어 인공호흡을 시키고 응급조치를 하였습니다. 구조대의 재빠른 조치로 두 사람은 죽음을
간신히 면하고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기가 막힌 일이 발생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청년이 경찰서에 들어오더니 청구서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그 청구서는 다름이 아
니라 구조대가 그들이 목숨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동차의 유리창을 깨뜨린 것을 수리하고 가
지고 온 청구서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나님은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용서함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
습니다. 그런데 그 값진 구원을 거저 받은 우리들이 또 다른 요구들로 하나님을 괴롭힙니다.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제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이 불만입니까? 복중의 복인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의 복을 주었으면 감사할 것
이지 그렇지 못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입술에는 깨알같이 적힌 <불만목록서>와 <청 구서>가 들려져 있습니다. 무슨 불만을 터뜨릴까를 잠들기 전까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눈
만 뜨면 자동판매기처럼 쏟아냅니다. 하나님께 청구하려고 하는 것과 불만이 정말 가한 것
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교회가 너무 적어서 기분 나빠 못 다니겠습니다. 큰 교회에
가서 좀 폼 나게 예수 믿어 볼랍니다”.”하나님, 사람들이 이 위대한 나를 알아주지 않아서
불만입니다.”.”하나님, 대박 한번 터져서 벼락부자나 만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예수 한
번 진하게 믿어 보겠습니다.”혹여 이 정도의 유치한 불만과 어리석은 청구가 아닌지 모르겠
습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들에게 한 마디로 정신차리게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살
전 5:16-18)
여러분 언제나 감사가 먼저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
달음만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는 고맙게 여기는 마음 곧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있습니
다. 사람이 어떠한 여건에 있든지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영국의 설교가요 성서학자인 <메튜헨리(Matthew Henry)>는 어느 날 평소에 자기가 지나
는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매를 맞아 많은 피를 흘리며 겨우 집
에 도착을 했습니다. 놀란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10여 년 동안 똑같은 골목길을 지나면서 아무 사고가 없었던 사실에 대한 감
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사히 집에 돌아온다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겼기에 감사가 없었
습니다. 주님, 저의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부터는 그 골목길을 지나 무사히 집으로 들
어올 때마다 감사하는 여생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함을 느
낄 정도의 자신의 평범한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요, 기적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범죄 심리학자인 <소퍼(Soper)>박사는 교도소에 있는 복역수와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의 차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하루 종일 불평과 요구만을 말한다. 그러나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는 하루 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울타리에 갇
힌 사람들이지만 어떤 사람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불평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감사란 <깨달음>과 <겸손>에서 오는 것이고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흔히 감사의 차원을 셋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감사>입니다. 다른 말
로는 <조건적인 감사>혹은<반사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
고 건강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일반적인 감사입니다. 둘째 감사는 <철학적 감사>가 있습니
다. 이것은 가난하다가 부해져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이 깊어진 것
입니다. 전에는 은혜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까 은혜요, 전에는 복인 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복이란 말입니다. 전에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제
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있고 셋째는 <신학적 감사>입니다. 이 감사는 예수께
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를 속량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이 은혜요, 기쁨이요, 복
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감사가 있다면 바로 이
세 번째 감사일 것입니다. 이 감사를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읽었던 시23편은 너무나 유명한 다윗의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시에서 다윗은 총체
적인 감사를 보여줍니다. 그의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현재의 삶
에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노래며, 장래 자신에게 베푸실 놀라운 하나
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보다 마땅히 감사할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형들의 시기와 질투 속에 목동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블레셋]의 전사
인 <골리앗>을 죽이고 그 포상으로 <사울>의 딸을 얻은 후 <사울>의 시기 대상이 되어
이곳 저곳으로 도망 다녀야 하는 어려운 시절을 겪게 됩니다. 더군다나 잠시 흐트러졌던 그
의 생활이 <밧세바>를 범하게 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죄에 이르
게 합니다.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그의 삶에 무엇이 감사 할만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은 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잊지 아니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 신앙은 그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감사의 극치가 오늘 그의
노래에 담겨져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은 다윗의 감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주시는 총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이 보다 더 어
떻게 표현하겠습니까?
인간은 누구나 이런 빈 잔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 속에 깃들
여 있는 이 빈 잔은 영원한 가치가 아니면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이
세상의 어떤 것들로도 채워 질 수 없는 잔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의 잔을 무엇으로 채우려합
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감사 할 수 있습니까? 이 [맥추 감사주
일]에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이 여전히 비어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 없는 잡
동사니들로 가득 차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보다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의 빈 잔에 가득 찬 시기와 질투와 허영심,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 하나님께 나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불 신앙적인 자기 자신의 벽들을 허물
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마땅히 채워야 할 영원한 가치들을 채우지 못하여 허기진 영
혼의 빈 잔을 감사의 조건들로 가득 채워서 오늘 다윗 같은 찬양을 끊임없이 드릴 수 있기
를 바랍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 ▒ 감사치 않은 자의 변명 (맥추절) 눅17:11-19 [17,1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
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이 예수님
의 말씀 속에는 10명이 모두 돌아와 감사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주님
은 한 명만 감사하러 온 것에 대하여 실망하셨고 놀라셨습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감
사하지 않으면 주님은 실망하십니다. 주님께서 실망하신 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모두
가 감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감사의 기대가 있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니 1명처
럼 돌아와 감사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지자 놀라고 실망하십니다. 그것도
당연히 감사할 줄 알았던 유대인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감사할 줄 알았던 이들
은 안하고, 감사치 않을 줄 알았던 사마리아인은 와 감사하니 놀라실 수밖에요. 오늘날도 직
분에 걸맞지 않고, 믿음에 걸맞지 않은 감사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 저는 성도들의 감사생활을 보며 기대치 않은 사람에게 놀라고, 기대한 사람에게 놀랍
니다. 10여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집사님이 아주 큰 돈을 벌었습니다. 한 달 후 추수
감사절을 저는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분보다 많은 추수감사헌금을 할 줄 알았습니
다. 그러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액수 5만원이 그의
추수감사헌금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감사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걸 잊지 마
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는 같은 본문을 통하여 감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나눴습
니다. 감사는 어려운 것이어서 그 스코어가 9대1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9대1이란 감사치 않
은 사람과 감사한 사람의 비율입니다. 오늘 9라는 스코어를 가지고 있는 다수, 감사치 않은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듯, 감사치 않은 9명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것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이렇게 변명했을 것
입니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한 명은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이기보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게 우선
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소외되
고 천대받던 문둥병에서 놓임 받은 것을 자랑하고 떳떳한 시민이 되었음을 이웃에게 알리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선순위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아홉은 “너무 그러
지 마십시오. 나중에 감사하려고 했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우선순위를 잘못 설정함으로 실패하기 쉽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신앙은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실패한 이유를 아십니까? [삼상2:29]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
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어
야 합니다. 그러나 엘리와 그 두 아들은 자신들의 배 채우는 것에 가장 좋은 것을 사용하였
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중히 여긴 것이요, 우선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불신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 이 말씀
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모자식간에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말씀하심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사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다윗은 다윗성에 언약궤를 무사히 옮기고 나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감사드립니다. [대상16:7,8]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세워
위선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 먼저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아홉이 실패한 것은 감사를 나중으로 미뤘기 때문입니
다. 여러분, 감사를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아홉은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이야 왜 없겠습니까? 제 가슴에는 주님
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하답니다.” 10명 모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지 않다면
인간이 아니죠. 그런데 문제는 감사를 마음으로만 담고 있는 사람과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
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에서 나지만 행동화할 때 인정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10 사람 모두 감사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 그
마음을 행동화하였습니다. [15,16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
마리아인의 감사의 행동화는 “큰 소리”와 “돌아와”, “엎드려”라는 세 단어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두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한 것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아홉과 이 한 사람이
다르다면 감사한 마음이 다른 게 아니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했느냐 성공했느냐의 차이입
니다. 믿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주
님은 행동하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말씀도 그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성경에
서 여실히 증명됩니다. [19절]의 선언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
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정말 감사를 행동화하였을 때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본문의 아홉과 하나는 그 믿음이 다릅니다. 아홉은 병 고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는
구원 받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보고 환상을 보는 종교적 엑스타시에 만
족하는 성도들이기 보다, 하늘나라 시민이 되길 바랍니다. [벧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
의 구원을 받음이라” 감사의 행동화에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다 나와 같은데요 아마 아홉은 다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간 사람은 오직 한 사람입니다. 자신
의 옆을 봐도 앞을 봐도 다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친구에게
로 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다 집으로 가네요.” 그들이 외쳤을 법한 말입니다. 잘못
된 비교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홉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율법을 너무도 잘 알고 지키고 있는 유대인
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감사를 방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서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따
라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야 종교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니까요. 여러분, 오늘
날에도 이런 사태는 너무 잘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이제 시작하는 사람
보다 낫겠지 뭐.’, ‘권사님이니까 따라해야지.’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 없고 인색
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따라하지 마세요. 실은 신앙도 일종의 배움입니다. 감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따라하려면 제대로 된 사
람을 따라해야 합니다. 제 아들은 늘 자신은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반에서 2등하고
학년에서 15-20등정도 합니다. 그는 늘 말합니다. “이만하면 잘하잖아요!” 그런데 제 엄마
는 늘 못한답니다. “그렇게 해선 안 돼. 내신 등급 1등급은 받아야 돼.” 왜 이 말을 할까
요? 아들은 자신 보다 못하는 아이들과 비교하고 엄마는 잘하는 아이와 비교하기 때문입니
다. 어디다 비교하느냐는 중요합니다. 아홉 명은 서로에 비교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모두가 병
은 고쳤지만, 구원하고는 거리가 먼 걸 어찌합니까? [마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바로 이
런 내용입니다. 오후 1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먼저 온 사람들이 많이 받을 줄
알았다가 한 데나리온을 주자 불평합니다. 자신에게 약속된 게 한 데나리온이면 비교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잘못된 비교는 불평을 낳고 감사를 잃게 만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
들의 불평도 비교에 기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에 실패하고 변명해도 소용없습니다. 감사에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감사를 먼저 하십시오. 마음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감사를 행
동화하십시오. 잘못된 비교는 금물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옥 간다고 우리가 지옥 갈 수는 없
습니다. 감사하지 않은 자는 변명이 있겠지만, 그 변명은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 ▒ 맥추 감사제사를 드리자 민28:26-31 할렐루야 !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1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감사절기제사를 드리
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 감사절입니다.
오늘은 이 맥추감사절의 의미를 제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은혜를 나눌려고 하는 것
입니다.
맥추 감사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모여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제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감사절은 축제인데…
과연 많은 것을 얻어서인가? 해마다 드리라는 것으로 보면 흉년에도 드리라는 것
이다. 결국 이 감사축제의 의미는 신앙적인 것에 의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처럼…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을 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리로다… 의 고백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1. 모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맥추 감사절은 첫 번째는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
니다. 신앙이 타락하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모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은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긴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
람들은 교회에 모이는 일을 힘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귀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신앙 생활은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 그랬던 것입니다.
여러분! 월드컵 때 응원 생각나시지 않습니까? 집에서 텔레비전보고 할수도 있지만 경기장
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함께 모여서 응원을 합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700만 명이 경기장에서, 전국의 길거리에서 모여서 함께 응원을 할
때 세계를 감동시키고 우리 자신도 감동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한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할까? 생각만 해도 감동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
까 하나님이 블레셋군대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승리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기를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는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
니다. 그런데 요즘에 모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도 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맥추 감사절을 맞
이해서 성회로 모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26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아멘
성회로 모이는 데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일하는 것 때문에 모이는
것을 안 해도 괜찮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유 없습니다.
일하지 말고 모여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남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관계확인이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우리도 명절에 가족
끼리, 친척끼리 모입니다.
이 명절에는 친구와 사업상의 관계자도 중요하지만 가족끼리 모입니다. 그러면 양해가 됩니
다. 모여서 가족간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회로 모여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는 것에 순종하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또 그러냐 하는 것을 나눌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모일때 모이지 않으면, 참석하
지 않으면 그 사람 진짜 우리 가족 맞아? 그런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모일 때 모
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 맞아? 이렇게 이야기해도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일을 성수한다고 하는 근본적 의미는 무엇보다도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인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모이는 곳에 은혜가 있고
모이는 만큼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일 오전뿐 아니라
오후에도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도 금요일 저녁에도 새벽에도 모이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
다. 모이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모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모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모인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실줄로 믿습니다. 2. 맥추절의 제사는 2가지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사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
분 27절부터 29절까지 있는 말씀을 읽겠습니다.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숫양 하
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 어린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의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 아
멘.
복잡한 내용이 써 있습니다마는 제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번제고 하나는 소제입니다.
첫째, 번제를 드린다.
번제는 생명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소, 양, 비둘기, 뭐 이런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경에 보게 되면 수송아지, 수양.. 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생명을 바치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제사입니다. 이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번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지시하셨던 제사입니
다.
창22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이유는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시험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사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번제를 드린 것으로 봐서 생명
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외아
들 이삭을 바치면서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1:17-19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
기 때문에 그는 외아들 이삭을 바칠 수가 있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의 생명에 대한 주권에 대한 인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칠 때에 외아들만을 바치는 게 아닙니다. 외아들이 죽으면 자기의 대도 끊
어지는 거 아닙니까? 자기의 생명도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겁
니다. 그는 이 생명 바치는 일에, 또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일에, 그는 하나님
앞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순종해서 하나님이 그를 인정했고 하나님이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고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것입
니다.
이런 믿음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던 믿음입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신하들에게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 아들을 살려달라고 그렇게 울며 불며 기
도했던 다윗 그 기도 안 들어줬으니까, 다윗이 앞으로 어떻게 할까 염려가 됐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것을 눈치로 알았습니다. 왜 그러냐? “죄송합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이 다윗은 아무 소리하지 않습니다. 일어난 자리에서 그는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그
리고 몸을 단장하고 집무실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아들이 죽었는데, 그렇습니까? 그때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
니다. 내가 아들이 아직 살았을 때에는, 병들어 있을 때에는 그래도 살려 주실까 해서 기도
했지만, 이제 죽었는데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때 다윗의 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느냐.
생명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시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또 죽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다.
그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번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나면서 소위
감사예물을 드리면서 이것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고백이 이 속에 있느냐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살아 있는 것에 진짜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시간까지
살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내가 오늘 어디서 무슨 사고로 죽은 사람
보다 더 잘나서 이 시간 살아 있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를 살게 하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것 이
것이 번제를 드리는 성도의 자세라 그런 말입니다. 두 번째, 소제를 드린다.
소제는 하나님의 삶의 주관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은 철저하게
내 일이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안 될 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 주관자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누가
가서 그 먹이를 주지도 않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은무엇 이냐. 하나님
이 인도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
입니다.
이처럼 소제는 생명을 바치는 번제와는 달리 땀흘려 농사하여 지은 곡식을 추수한 것을 드
리는 제사인데 생명을 나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듯이
농사짓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그런다고 농사가 잘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철
저히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이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 이 말입니다.
어제 일을 생각해 보십시요. 태풍이 부니까 그 동안 잘 지어놓은 농사가 어떻게 되었는가?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제 속에는 잘되고 못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의 노력의 결과가 있
을 수가 없다는 신앙의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 우리는 이 사
실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 감사 추수의 날에 이러한 생명의 주권- 살고 죽는 것은 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의 고백을 하는 번제와 우리가 잘 되고 못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
려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소제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 사실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
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요.
한 부자가 추수 때가 되어 추수를 하는 가운데 과거와는 달리 풍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
다. 그래서 그는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짓고 천년만년 이것으로 잘 살자며…. 기뻐합니
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 그러나 기억하라 만약에 오늘 밤에
하나님이 너의 생명을 가져 가신다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십니다. 무슨 뜻
입니까?
돈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믿어서는 안된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는 겁니다. 생명의 주인 되시고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번제와 소제를 통해서 우리의 생사화복…사람이 살고 죽고 잘 되고 못되
고는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고백을 듣기를 원하시
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와 신앙의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히1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
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했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정체는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찾는 자는 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는 두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제물을 드려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리는 것은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값이
요 나의 삶을 인도하시고 도와 주셔서 여기까지 왔다는 –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것에 대한 값의 제물인 것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나를 살게 하신 생명의 값 그리고 삶을 인도하신 은혜의 값은 어느 정도여
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값을 이 시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조크입니다. ( 빵 냄새 값 100만원 )
어느 동네에 욕심 많은 사람이 빵집을 했습니다.
이 빵집 주인이 아주 잘 익은 빵을 가마에서 막 꺼내는데 이웃집 사람이 그 빵의 고소한 냄
새를 맡으면서 하는 말이 “야! 빵 냄새 너무 좋다! 이 빵 냄새 맡으면 기운이 나고 너무 너
무 좋다” 그랬습니다.
빵집 주인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왜 내가 여태껏 이 생각을 못했지?`
저 사람 기분 좋게 한 것은 내 빵인데, 나는 빵 만드느라 열심히 고생하고 빵을 만들어 냈
는데 냄새는 저 사람이 맡으니까, 이제는 빵 먹는 값뿐만 아니라 빵 냄새 맡는 값도 받아야
되겠다. 특히 이웃집 사람이 가장 많이 맡았으니까, 이 사람부터 받아야겠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사람에게 `그 동안 이웃에 살면서 매일 상당한 양의 빵 냄
새를 맡았으니 냄새 값 주시오` 그랬으니 그 사람이 주겠습니까? 안 주겠습니까?
여러분같으면 줍니까? 안 줍니까? 난 절대 안 주겠다는 겁니다…그러니까,
빵집 주인은 정식으로 법원에 빵 냄새 대금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들은 재판장에 다 몰려 왔습니다.
`야! 판사가 어떻게 재판할까?`
빵집 주인의 열띤 주장을 다 들은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리 있다고 판결을 내리는
데 “이웃집 사람은 빵냄새를 맡아서 기분이 좋았으니, 냄새값 100만원을 지금 지불하시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을 하라니, 어떻합니까?이웃집 사람은 뭐 씹은 얼굴로 100만원을 주
머니에서 꺼내어 주었습니다.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가슴에 끌어 안고 얼굴에 함박 웃음을
띠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판결이 안 끝났습니다.”
“이제 다시 빵집 주인은 100만원을 이웃 사람에게 돌려주시오.”
“이웃 사람은 빵 냄새만 맡았을 뿐 빵을 가져오지는 않았으니, 빵집 주인도 돈을 만지면서
기쁨을 누렸으면 이제 다시 돈을 돌려주시오.”
순간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을 부린 빵
집주인은 망신을 톡톡히 당했습니다.
이 욕심 많은 빵집 주인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복은 두 가지입니
다.
첫째는 받는 복이 있습니다. 소유의 복입니다. 둘째는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빵집 주인은 받는 복은 받았으나 내 것으로 만드는 누리는 복은 받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자기는 받은 복은 많은데, 누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인생이 헛되다 그랬습니다. 누
리는 복을 받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느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누리는 복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 많
이 받기는 받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누
리는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심을 때 하나님
은 심는 대로 거두는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심을 줄 알아야 합니
다. 그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리는 복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제사는 추수의 결과에 상관없이 많이 거두었든지 못 거두었든지 드려야 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부정적인 현실에도 믿음과
감사로 극복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떠난 한 여자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악성 위궤양을 앓고 있었지
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때가 되어 떠났습니다.
그런데 선교지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는 데도, 본부에서 선교 지원금 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 동안 선교사님은 아무 활동도 못하고 매일 보리죽만 먹으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그렇게 고생을 하며 지내고, 그리고 한 달 뒤, 선교 지원금이 도착하여
육 개월 동안 활발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면서, 한 달 동안 선교비가 오지 않아 보리죽만 먹었던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건강을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선교 보고가 끝나자 한 의사가 그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은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 그렇지요!” 그런데 이분의 이야기는 그런 뜻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보리죽만 드셨기 때문에 살아나신 겁니다.”
“선교사님의 악성 위궤양은 본국에 있으면 절대 못 고칩니다. 왜냐 하면 먹을게 많아서, 그
런데 그 곳에 가서 한달 동안 굶다시피 보리죽만 먹고 살았는데, 악성위궤양은 안 먹으면
낫는 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병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집의 개들도 보면 아프면 안 먹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됩니다. 그
때에 이 선교사가 깨달았습니다. 사실 선교비가 오지 않은 한 달동안 얼마나 원망했겠습니
까?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해서 이곳에 보냈습니까? 그랬을 것입
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
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는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통해서 건강을 되
찾기도 하고,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서 깨어지고 회
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더 큰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하나님께서 “NO”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오만을 없애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오만은 당신께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산물이며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은 은총을 주실 뿐이지 행복은 나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성장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고 당신은 내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쳐주실
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내 고통을 덜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으로 인해 내가 당신께 더 가까워 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YES”라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내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는 것만큼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게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 드디어 네가 바른 생각을 했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인이고 삶의 주권자 되심을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 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분명히 믿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다가
와도 그것을 잘 참고 견디면 하나님은 그 이상의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절대로 나를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때도 나
를 사랑하시고 나를 도와주심을 믿는 그런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3. 맥추절 제사, 번제와 속제는 기본이고 그 외에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30절31절을 보자.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숫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
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
아멘. 맥추절 제사는 기본적으로 번제와 소제이고, 그런데 하나님은 속죄제도 드려라 그랬습
니다. 이 속죄제는 매일같이 드리는 제사도 드리라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맥추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상번제인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이것도 드려야 된다는 것입
니다. 여기 상번제라고 하는 것을 봐서 우리는 속죄제는 매일같이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무엇인가 하면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우
리의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에 주관자가 되시는데도 불
구하고 하나님이 없이도 살 것처럼 살았던 것에 대한 불신이고 두 번째는 잘 될 때는 내가
잘나서 잘사는 것처럼 교만하다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던 죄입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맥추감사의 제사와 함께 매일같이 드리는 상번제, 속죄제를 드릴수 있
기를 바랍니다. 미국에 바바라 존슨이라고 하는 주부가 있습니다.
(「모자에 제라늄 꽃을 꽂고 행복하게 살아라』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 저자.」)
바바라 존슨은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는 아주 어려운 일을 겪고 난 후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바라 존슨은 남편과 네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에게 문제가 불어
닥쳤습니다. 집에 돌아오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그만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첫째 아들
은 음주 트럭 운전자에 의해 치어 죽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호모섹스에 빠져 집을 가출해
버렸습니다. 셋째 아들은 베트남전에 18세에 자원입대해서 어린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습니
다.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그는 연속되는 불행으로 ‘하나님, 어찌해서 내게는 불행만 다가옵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
망하고 세상과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
견하고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부정적으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해!`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내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의 삶에 주관자가 되심을 고백하고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 남은 생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감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
니다. 시간만 나면 교회에 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식물인간이었던 남편이 기적적으로 생기를 되찾고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
다. 그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었고, ‘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나도 뭔가
좋은 일을 해야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지.`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난을 당해 실의에 빠진 부모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베트남 전쟁으
로 전사한 젊은이들이 5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아들이 전사했을 때 그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국가를 위해서 큰 일을 한 겁니다.`
또한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해서 위로했습니다. 그들을
모아 함께 기도도 하고 그들을 위한 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이들을 도와주
는 그룹을 만들고 선교회도 조직했습니다.
그는 남을 돕는 일로 아주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희망과 능력을
주셔서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출판계의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강사로 초청을 받게 되
었습니다. 여성계의 지도자가 되어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엄
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호모섹스로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은 베스
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남은 생애를 보람 있게 사는 축복을 감사를 통해서 받았습니다.
만약 절망하고 낙심했더라면 더 비참하게 살았을 텐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생명의 주인 되시고 삶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또 감
사했을 때 그의 인생은 새로워졌습니다. 진로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성공했습니다.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존경받는 여성계의 지도자가 되었습니
다.
여러분은 어떻게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원망하며 사시겠습니까? 불평하며 사시겠습니까?
남의 약점만 끄집어내고 욕하며 사시겠습니까?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삶을 사시겠습니까?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부터 감사하고 교회에 나와서도 감사하고, 가정에서
도 감사하고, 직장에서도 감사하고, 국가와 민족, 사회에도 감사하고 감사의 씨를 뿌릴 때
감사의 열매, 축복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감사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주인되시고 우리의 삶의 주
관자 되시는 우리는 주어지는 삶의 현실을 감사해야 합니다.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일을 보면 은혜는 환경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 은혜 입니다!
* 깨달으면 감사, 못 깨달으면 원망입니다. 깨닫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동안 감사치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깨달음의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땅에 살아도
깨달으면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아도 못 깨달으면 땅의 사람입니다.
두 렙돈으로 가난하게 살아도 깨닫는 은혜 받으면 천국의 삶이지만, 재벌 되어 부자로 살아
도 못 깨달으면 그 사람은 진정 거렁뱅이입니다.
움막에 살아도 깨달으면 천국일지라도, 100평 빌라에 산다해도 못 깨달으면 움막만도 못한
것입니다. 죽 끓여 놓고도 깨닫는 은혜 받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지만 고기반찬을 놓고도
못 깨달으면 세상에 종 되어 삽니다.
감옥에 앉았어도 깨달으면 그곳이 천국이지만
궁궐에 앉아 살아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감옥입니다.
힘겨운 직장 속에서도 깨달아지면 그곳은 선교지 되지만
좋은 직장 속에서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수용소 되고 맙니다.
방 한칸에 온 식구 살아도 깨달으면 대궐이지만,
각자의 방 넓다 해도 못 깨달으면 쪽방의 삶 입니다.
시원치 않은 남편(아내) 앞에 두고 깨달으면 주님 섬기듯 하지만
못 깨달으면 그 남편(아내)은 남남 되고 맙니다.
못 고칠 질병 끓어 안고도 깨달아지면 그것도 감사의 이유이지만
건강하여도 못 깨달아지면 그 건강은 아픔만도 못합니다.
깨닫는 것이 그렇게 큰 은혜일수 없습니다.
은혜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은혜 입니다.
기막힌 은혜란, `아 그래서 그렇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섭리를 잘 헤아릴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실려고- 그래셨구나!`라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꾸어 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지만 변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속에서 주님의 섭리가 깨달아진다면 더 큰 은혜 입니다. 즉시로 응답을 주심도 귀한 은
혜이지만 침묵과 더딘 응답 속에서도 깨닫는 은혜 받았다면 그것은 더 없는 축복 입니다.
가시를 뽑아 주심도 은혜이지만 박힌 가시 속에서 말씀하심으로 깨닫게 하신다면 그 가시는
오히려 갑절의 은혜가 됩니다.
깨달음의 깊이가 감사의 깊이이며 감사의 깊이가 영성의 깊이일 것입니다.
깨달으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입니다. 못 깨달으면 그 어디나 지옥입니다.
“주님! 깨닫지 못한 우매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날마다 기막힌 깨달음
으로 충만케 하사 놀라운 인생으로 살게 하옵소서”.
아멘. 여러분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은 깨닫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습관적이고 위선적이 되기 쉽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없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남보다 먼 저 인정받기를 원했고 남을 판단하는 일에 앞장서
고 분노 실망으로 억울해 한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이 잠 자고 있던 내 영혼을 깨
우심을 받으라. 그러면 복음의 빛으로 내게 들어오신다 .
나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그의 의로우심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신다.
나는 믿는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어둠의 자식이 아니고 빛 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제 나는
내 안에 계신 성령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라.
부족한 나의 것으로 드리지 아니하고 온전하신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 찬송을 한 장 부르자.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에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
나 하늘나라.
지난 서해바다에서 일어난 소위 서해교전으로 인해 우리 아군이 많이 죽었다.
생각할수록 속이 상한다. 희생자들의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죽
은 이들의 죽음과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죽음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잘 들어야 한다.
국방의 측면에서 보면 안보를 튼튼히 하라는 것
정치의 측면에서는 햇빛정책을 계속할거냐 아니면 강경책을 쓸 거냐이고, 사회적인 측면에
서 보면 분단의 아픔이다. 그렇다면 신앙적 의미에서 볼 것은 무엇인가?
1. 월드컵이 신앙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
2. 월드컵의 열기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일에의 열심히 그 10%만이 라도 되라는 책망이
기도 하다. 맥추절은 추수했다는 소득에 대한 단순 감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그
래서 맥추 감사제사는 두 종류이다.
1.자원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제사 이다. 생명과 삶의 주관자 되심이다.
2. 의무제이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아온 것 그 죄를 회개하
고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하는 것이다.
창세기 34장의 복을 받자.(22-24)
1)승리
2)번영
3)보호.안전
살전 5:16-18의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산다. 믿어라. 최고의 감사로 하나님 믿음을 보이라. =================================================================================== ▒ 맥추절을 지키라 출 23: 14-17 서론> 술을 좋아하던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맥추감사절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맥추감사절을 잘못 알아듣고는 이번에 “맥주감사절이 있다면서요.
그 날은 교회에서 맥주 파티라도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면 술을 먹지 않는다고 했는데
웬 맥주감사절입니까?” 그때 어느 성도가 답변을 해 주었습니다.
“맥주 감사절이 아니라 맥추감사절입니다.” 이 성도님이 맥추감사절을 맥주감사절로 오해한 것도 큰 무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맥주는 보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추수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맥추감사절이고,
다른 하나는 추수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말 그대로 보리를 수확하고 거두어들이는 시기인 7월 첫주에 드리고,
추수감사절은 11월 셋째 주에 드립니다. 맥추감사절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밀추수가 끝난 직후 풍성한 수확을 기념하는 맥추절에 새로 추수한 곡물을 고운 가루로 빻아서
떡 두덩이로 만들어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왔습니다. 제사장은 가져온 떡을 요제, 곧 흔들어 드리는 제사로 드렸습니다.
또한 떡 두덩이와 함께 어린 숫양 두 마리도 함께 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맥추감사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3:15-17절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를 사는 오늘 우리가 이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지 지키면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곧 순종을 해야 함을 말합니다. 만약 이를 거부할 때는, 거기에 따른 무서운 형벌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순종하는 자에겐 복이,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따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반문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
들었던 명령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3:14을 보십시오. 거기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습니까?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모세의 말을 듣고 있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도 아닌데
구지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또한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모세가 이 맥추절에 대해 말씀할 때, 이 규례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 백성된 우리에게도 적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답은 신 16:12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왔음을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말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상실증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었지 않습니까?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하는 자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린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합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하면 언제 모세를 통해 홍해흫 건너게 하였습니까? 라고 반문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물이 없을 때,
광야에서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시고, 먹을 것이 없다고 할 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기억이 안 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야, 쉽게 하나님을 배반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종되었을 때를 잊지 말라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고
살지 말라고 이와 같은 절기를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잊지는 않습니까? 지금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혹 원망하고 불평하는 마음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여 주셨는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이 죄문제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피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은 죽음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 재앙이 애굽에 내릴 때,
그들의 자식들과 생축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은 둘째 사망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영원히 지옥형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데,
예수께서 살리셨습니다.
예화)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차려 일어 나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강도가 안 되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이 맥추절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맥추감사절을 어떻게 지켰을까요?
첫째로, 그들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 첫 것이라는 단어와, 수고하여 라는 단어입니다. 아무리 첫 것이라도, 그것이 부당한 방법으로 취한 것,
하나님은 받질 않으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땅에서 수고한 것 중에서 제일 첫 것을 드려야 합니다. 첫 것을 드린다는 것은 유월절 예식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 중 장자 재앙은 초태생에게 내린 벌입니다. 초태생이면,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다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처음 것을 드린다는 의미는 초태생 장자 죽음에 대한 대속을 뜻합니다. 장자로서 죽어야 하는데,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여 예물로써 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4:18-26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 예물로서 대속의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예물을 말씀하실 대, 빈손
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그들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대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은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그것이 억지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이면 하나님은 받질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헌물을 받을 만큼 가난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인색함으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헤아려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을 때, 아직 가나안에 정착하지 않은 때이므로,
앞으로 주실 복에 대해 믿음으로 감사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에 걸친 심한 가뭄과 엄청난 수의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 공황에 빠졌다.
1877년 4월 27일, 미네소타 주 주지사 필스버리(Pillsbury) 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 기도의 날’을 선포하였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 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 기도는 하늘을 덮었다. 그러자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었다.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감사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감사가 기적을 만들어 낸다고 할 때, 그 기적은 믿음이 동반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복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하고, 문제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해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1년 중 전반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배푸신 복에 대해 감사하고,
앞으로 나머지 반년도 복 주실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분도, 복주실 것으로 인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게서 여러분에게도 기적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모든 식구들과 함께 맥추절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구약 시대에는 성막과 성전이었고,
신약시대에는 교회입니다.
성막과 성전에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이 가져온 예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흔들어 요제를 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날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열납하시도록 축복하게 하십니다. 제사장들이 흔들어 요제를 삼은 것은, 곧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교회에서 나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나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심지어는 우거하는 객이라도, 나그네라도, 외국인이라도 함께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가족 모두가 다 나와서, 맥추절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맥추절에 대한 규례는 영원한 규례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히 대대로 지킬 언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은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새에도 유효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맥추절에 대한 규례를 영원한 규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처음 익은열매가
곧 부활의 첫 열매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대문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장이 첫 곡식을 요제로 흔든다음에야 비로소,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드릴 수 있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열매가 있은 후라야 우리 모두 부활할 수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무말랭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는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루 게릭병(근육 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 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랄까. 죽음이 선고가 있은 지 무려 4반세기 이상을 살고 있긴 하지만 1
985년에는 또 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가지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표현해야 할까?
당사자인 호킹(Howking)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하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 하에 기술하고 있다. 그의 글이 또한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다.
호킹은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간사가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정신적인 자세가 아니라면 그가 어찌 그렇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나라까지 와서
강연을 하겠다는 엄두인들 내겠는가? 호킹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원인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해 본다.
흔히 그는 현대의 살아 숨쉬는 전설적인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리고 ‘사공의 마술사’인 아인슈타인에 버금가는 이론 물리학자라는 평가도 받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그는 나이 겨우 32세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학문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영국왕립협회의 회원이 되는 영광을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영국 케임 브리지 대학의 루카스(Lucasian) 수학교수로서 뉴턴의 영예를 계승하고 있다.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운 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뚤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은 천당에 옮겨다 놓아도
거기에서도 불평거리를 찾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도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 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 날 죄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지옥형벌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다.
또한 죽은후에 다시 부활할 것에 감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 ▒ 맥추감사 지키는 방법 민28:26-31 서론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맥추감사절을 지킬 때는 이렇게 지키라는 방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1년에 세 번 하나님 앞에 감사절기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맥추 감사절입니다. 1. 많이 모여야 예배해야 합니다 본문 26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하였습니다.
이 절기(칠칠절)는 밀의 첫 소출을 하나님께 바치는 맥추절(출 23:16) 또는 맥추의 초실절(출 34:22)로서,
보리 수확의 첫 열매를 바치는 초실절(레 23:9-14)로 부터 50일만에 맞이하는 날입니다.
실제로 이 날은 보리의 첫 수확하는 날로부터 밀 수확을 시작하는 날까지의
약 7주간과 연관을 가진 절기로써 곧 그 동안의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 날 즉 그 절기 일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모이는 것이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이기를 힘쓰고 찬송하기를 힘쓰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모이기를 권고하면서 하는 말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하였습니다(히 10:25).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 외에도 다른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경우 특별한 그리스도인 모임을 폐하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유대인 관습에 빠져 그리스도인로서의 신앙과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기에 저자가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를 폐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앞두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더욱 열심을 내어
다가오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서로 격려와 위로를 통해 담대해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위하여 기쁨으로 주 앞에 모여서 찬송과 기도로 진정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향기로운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본문 27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하였습니다.
이 부분에는 칠칠절(七七節)에 드리게 될 번제와 소제의 예물에 대해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칠칠절 제사가 예표하는 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무교절 기간 중 안식일(성회) 후 첫날에
곡물의 첫 소산을 헌상한 것은 안식일 후 첫 날, 곧 신약의 주일(主日)에 이뤄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 20:17 고전 15:20). 그리고 무교절 기간에 첫 소산을 드린 날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새 소제를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모든 성도들의 중생과 부활을 예표한 것입니다(고전 15:22-26). 또한 이때 드려지는 번제는 성도의 온전한 충성과 헌신을,
속죄제는 그리스도와 교제하고자 하는 자에게 필수적인 회개와 그리스도의 죄 사유하심을 각각 예표한 것입니다.
문제는 주께서 향기롭게 받으시는 제물입니다. 주께서 믿음이 담겨지지 아니한 에물은 받지 아니하심은
이미 창세기 가인의 제사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아벨을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믿음을 빼놓고 드린 것이 문제입니다(히 11:4)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고 인색함이나 억지로 드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고후 9:7).
여기서는 연보의 액수가 많은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충동적이거나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
내적인 결심에 의해 즐거운 마음으로 연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누가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또는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많이 바쳤다면 그것은 참다운 연보가 아닐 것입니다. 헌금하기 싫어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연보하거나,
대의 명분이나 외부적 압력에 의해 연보를 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심이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였으니(엡 5:2)
우리도 주와 목회자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빌 4:16-20).
믿음으로 드리는 물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드리는 물질이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는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본문 30-31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수염소 하나를 드리되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이는 칠칠절에 번제 및 소제와 더불어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리는 바로 죄란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본장 15절과 22절)은 즉
죄 사유함을 얻은 인간에게 비로서 진정한 감사와 은혜에 대한 찬양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 13:15-16).
구약시대에 속죄제는 인간들의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둘도 아닌 독생자를 보내주셔서 원수되었던
관계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담기지 아니한 물질은 흠이 있는 것이고 감사가 담긴 물질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감사가 없는 것이 왜 흠인가? 믿음으로 행치 아니함이 죄라면(롬 14:23)감사가 없는 물질은 믿음이 없는 물질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감사의 표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달음 때문입니다. 은혜 중에 최고의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땅에 살아도 깨달으면 하늘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살아도 못 깨달으면 땅의 사람입니다.
움막에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그 곳이 천국일지라도 100평 빌라에 산다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주의 은혜를 깨닫고 움막에 사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감옥에 앉았어도 깨달으면 그곳이 천국이지만 궁궐에 앉아 살아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감옥입니다.
힘겨운 직장 속에서도 깨달아지면 그곳은 선교지 되지만 좋은 직장 속에서도 못 깨달으면 그곳은 수용소 되고 맙니다.
찬송가 작가는 주를 찬양하기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했는데 은혜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은혜입니다.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자의 축복 (출 23:14-17)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자의 축복 (출 23:14-17)
할렐루야!!
오늘 맥추 감사절을 맞이하여 이 귀한 절기에 함께 예배하며 주께 영광돌리는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맥추 감사절입니다. 우리는 매년 맥추 감사절을 지키면서 어떤 느낌과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지키고 있습니까? 저는 늘 안타까운 것이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은 많이들 기억하고 있는데 맥추 감사절에 대해서는 기억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계절적으로 우기에다 뜨거운 여름철이 겹쳐서 그런것일까?도 생각해보지만 그런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굳이 우리가 맥추 감사절을 지켜야 하느냐? 우리가 농사도 짖지 않는데 가을 추수감사절 한번만 지키면 되는 것이지 두 번씩이나 …….. 드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 하면서 심지어 맥추 감사절 절기를 기피하고 교회에 불출석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목회자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성도들을 양산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렇게 까다롭고 힘든 “맥추 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맥추감사절의 진정한 성서적 의미와 또 우리가 이 절기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살펴보며 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자가 받는 축복에 대하여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맥추감사절의 의미
맥추감사절은 금년의 전반기의 수확, 곧 금년의 처음 익은 곡식을 거두어 감사하는 절기이며, 추수감사절은 후반기 수확 곧 가을철에 거둔 수확을 인하여 감사하고 한해 동안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그 기원은 출애굽기 34장에 나와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과 율법 중에서 ‘절기에 대한 법(의식법)’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종교적인 의무로써, 일년에 3번,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을 절기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4∼17절에도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맥추절은 봄에 농사를 지어서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로서 유월절 다음날로부터 계산하여 50일째 되는 날로 지킵니다. 그러므로 이 맥추 감사절에는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십계명의 말씀을 주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여 50일째 되는 날 시내산에 도착을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 것에 대한 계명을 주셨는데 바로 이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이 맥추감사절은『하나님이 십계명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축복의 날』입니다.
둘째: 신약의 핵심인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한 날입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이날은 성령강림절인 오순절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와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분부 하신대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충만히 받은 날입니다. 아울러 오순절 성령강림은 초대교회가 탄생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맥추감사절은 바로『교회의 탄생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진리도 모르고 오늘날 도시 교회에서는 `농사도 짓지 않는데 무슨 맥추감사절이냐?` 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 교회나 농촌 교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 맥추절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참 도를 지킴으로 복을 받게 하신 날이요,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탄생하여 이렇게 우리가 늘찬양교회의 공동체가 되어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토록 복주신 은혜의 날입니다. 이런 귀한 의미를 생각할 때 어찌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켜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울러 이번에는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키므로 얻어지는 여러 가지 영적축복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니다.
1. 맥추감사절은 신앙생활의 성숙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간 광야생활을 해 왔습니다. 광야생활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추라기와 만나를 받아먹고, 사는 은혜의 생활이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일은 하지않고 받아먹고만 사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나 어른들이 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은혜를 알지못하고 감사하지 않는것처럼 마치 오늘의 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고,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살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고, 봉사나 헌신 충성도 할 줄 모르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100% 하나님의 공급으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하늘로부터 주어졌던 만나와 메추라기가 끊어졌습니다. 아무리 애걸하며 소원하여도 끊어진 만나와 메추라기는 두 번다시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수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며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가축을 기르고, 땀흘려 일하며 수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첫 열매를 거둘수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수확의 기쁨을 하나님께 돌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맥추감사절의 첫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는 하나님께 받아만 먹고 그러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덜 익은 신앙이었으나 맥추절을 통하여 자신들이 노력해서 거둔 수확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신앙으로 성숙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생활을 통하여 신앙은 새롭게 성숙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 멘>
2. 맥추감사절은 신앙의 자급자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것이나 갖은 것이나 모든 것 중에서 「내것」 또는「우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 받지 아니한 것이 어디 있으며 내가 드리는 것 가운데 `내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듯이 직접 주시는 것과 내가 땀흘려 수고하고 얻은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맥추감사절은 우리가 땀흘려 수고하여 얻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아주 소중한 사건으로써 우리들의 믿음의 자급자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950년대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6.25동란으로 민족적으로 고통을 당한 후였기에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부터 구제품이나 받아먹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60년대 이후 우리 기독교에서는 새바람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월정 헌금이 십일조로 바뀌었고, 눈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었던 감사헌금이 제단에 바쳐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로 교회마다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고 이 나라 국민이 잘사는 축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하며 또 세계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나라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숙된 믿음이고 자급자족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던 생활이 자급자족의 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조르기만 하던 믿음에서 이제는 드리며 감사하는 믿음으로 바꿔
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남의 것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려서 쓸 수가 없습니다. 빌려 온 도끼로는 나무를 자를 수가 없습니다. 도끼 날이 빠져나가 물에 빠집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얻어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믿음 가지고 자기가 구원받고, 자기의 신앙 가지고 자기가 축복 받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자급자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해야 마지못해서 움직이는 사람은 아직도 신앙이 자라지 못하여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는 믿음이고 성숙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 그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감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평생 얻어만 먹고 사는 존재가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듣고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신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그러므로 맥추절을 지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신 하나님의 시금석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성장하면 하나님께서 시험하십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지만 신앙이 크면 클수록 시험이 따르고 시련과 모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 시험을 이기면 더 큰 믿음이 오며 신앙과 인격이 놀랄 만큼 성장을 하게 됩니다. 모쪼록 시험에 통과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4.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위한 권고입니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성도에게 주시는 축복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창고가 가득히 찬다” 고 하셨습니다. 무슨 창고가 가득히 찹니까? 육의 창고가 가득히 차고, 심령의 창고가 가득히 차고, 영의 창고가 가득히 찹니다. 하늘나라의 창고가 가득히 차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하나님은 드리는 자의 하나님이시며 드리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제단에 제물이 빈약하면 축복의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열왕기상 18장30절 이하의 말씀에는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자들 850명과 기도의 대결을 할 때에 송아지를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3년반 동안의 계속된 가뭄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물을 열 두통이나 풍성하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늘에서 불의 응답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3년반 동안이나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이슬조차도 내리지 않던 하늘이 열리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할렐루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받기만 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드리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시고 더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주시기 위한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우리 인간들에게 드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한 것은 우리들을 축복하시기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Ⅱ. 맥추절은 하나님의 명령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시기를 “맥추절을 지키라” 고 하셨습니다. 명령은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하달하는 지휘 계통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명령은 반드시 시행하여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그 명령이 내게 부당하고 또 이치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어도 반드시 실행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상관이 돌격 앞으로! 명령을 내리면 총탄이 비오듯 퍼붓는 곳이라도 가야 합니다. 거역하면 명령 불복종 죄로 즉결처분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신 신학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급진주의자들과 또한 대도시의 교회에서는 맥추 감사절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늘찬양교회의 성도들은 이 맥추 감사절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절을 지켜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강과 축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사람마다 가정마다 그리고 세계의 각 나라마다 경축일과 기념일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절기를 주시고 그 중에 특별히 3 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3대 절기는
① 애굽에서 430년동안 종살이하는 중에 해방됨을 기념하는 유월절이요,
②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초실절이라고도 하는 맥추절이고,
③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초막절이라고도 하는 수장절 즉 추수감사절입니다.
맥추절은 유월절을 지내고 7주 곧 49일을 지낸 다음날로 출34:20절 말씀에는 칠칠절이라고도 하였으며 특별히 당년의 처음 익은 곡식과 열매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로서 초실절이라고도 하는데 통상 맥추절로 부르는 것은 여름철의 대표적인 곡식이 보리와 밀이기 때문입니다.
Ⅲ. 맥추절을 지키는 방법
1.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는 절기로 지켜야 합니다.
(출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 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그러므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물이나 시간과 삶 전체도 처음 것,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보리농사나 밀농사를 짓지 않기 때문에 맥추감사절에 대하여 무감각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꼭 농사를 짓는 사람들만 이 맥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고 직장 생활하는 사람도 첫 열매 첫 소득을 드리는 마음으로 이 절기를 지켜야 합니다.
2.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 중에 감사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 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 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없이 형식과 외식에 끌려서 억지로 드릴 때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께 거액의 헌금을 하고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2장41절의 말씀에는 한 가난한 과부가 가장 적은 액수의 헌금을 하고서도 예수님으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뜨거운 사랑의 마음, 자원하여 드리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맥추감사절은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감사함으로 지켰다면, 오늘의 우리들은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또 본문 15절 말씀에는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성이 깃들은 귀한 예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3. 감사에는 항상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은 부자들이 많이 드린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엽전 두 잎 드리는 것을 칭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그것 드리고 나면 지금부터 굶어야 할 처지입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한 것은 액수로는 가장 적은 것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큰 헌금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돈으로 헌금을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중심으로, 희생으로, 한 것입니다.
많은 것 중에서 절반을 드리는 것보다 적은 것 중에서 전부를 드리는 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의 사렙다 과부도 물 한 컵, 밀가루 조금, 기름 몇 방울 남은 것을 모두다 엘리야를 위하여 희생하였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과부의 엽전 두 닢의 헌금을 악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고 자기를 스스로 합리화하여 적게 하려고 하는 잘못된 교인들이 있습니다.
4. 그리고 감사에는 믿음과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험을 동반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망서려 질 때 모험을 하여야 합니다. 큰 믿음이 있을 때에 그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큰 믿음은 모험에서 시작이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모험을 하였습니다.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그리고 신약의 바울도, 베드로도, 모두 모험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든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이 바로 엄청난 모험입니다.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겠다고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입니까? 그러나 그와 같은 모험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와 그의 가정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네 사람들의 믿음이 얼마나 모험적입니까? 예수님도 감복하셔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도 모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모험적인 믿음을 가지고 결단하여 나갈 때에 하나님은 믿음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5. 하나님은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감사함으로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 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육의 모든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출34:24)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잠3: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바로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절기는 감사의 교훈을 새롭게 받고 잃어버린 감사의 생활을 새롭게 하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들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다시 한 번 헤아려 보고 감사하는 자가 되고 감사가 넘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우리들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축복을 주시고, 영원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베풀어주심을 생각할 때에 범사에 감사해야 하며 특별히 역경의 때, 환난의 때, 고난의 때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방법이요, 축복의 길인 것을 오늘 우리 성도들은 믿으시고, 그 뜻대로 준행 하여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과, 신상의 건강의 복을 자손 천대까지 받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맥추절을 지키자(맥추감사주일) > 설교자료실
본 문 : 출 23 : 16 (구118)제 목 : 맥추절을 지키자(맥추감사주일)정기복 목사서론 :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혈의 사랑을베푸신 여호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여야 합니다. 다음주일은 맥추 감사 주일입니다. 오늘은맥추감사절의 의의를 생각해보며 우리는 어떻게 지켜야 할지를 생각해보며 은혜받고져 합니다.1. 맥추 감사절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맥추감사절이라 말하면 대부분 보리나 밀농사를 지어 추수하는 농부를 생각하게 되는데 결코 그런 것은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큰 은혜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경작한 처음 곡식과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하는 절기이다.이 맥추절을 예수님께서나 누가나 바울은 오순절로 강조하여 사용하셨는데 이는 맥추절에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강림이 이루워 지셨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구약시대의 맥추절은 밀농사를 잘하여 추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라면 신약시대의 맥추절은 오순절날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고 성도가 이루워져구원의 역사가 이루워짐에 대한 감사라 할 수 있다.2.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맥추절을 지킬까요 ?1) 지나 온 기간을 생각하고 감사를 준비하여 지키자.이런 말이 있습니다.[생각하라 그리고 감사하라] 오늘날 우리 모두가 가슴에 지녀야 할말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 지나온 기간을 한번 뒤 돌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생각 나십니까 ? 슬픈 날들이 먼저 생각 나십니까 ? 그러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벌어진평범한 일이나 기쁜일들은 쉽게 잊어버려도 힘겹고 슬픈 일들은 수십년이 지나도 가슴속에 묻어두기에 잊지를 못하고 어떤 순간이 오면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아마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슬픈일들이 먼저 떠올라 감사보다는 불평의 소리가 나올지도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 감사하시기 바랍니다.우리의 사랑에 예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분명 당신의 삶이 초생달로내려가면 그것으로 끝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초생달에서 반달로 반달에서 보름달로 변화시켜주십니다.그런데 이런 역사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낙심치 않고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만 이루워 진다는 사실입니다.*. 애벌레가 변하여 아름다운 나비가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애벌레에게 아름다운 나비로변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세상에 나온 모두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은 아닙니다.애벌레 생활이 힘들다고 생을 포기하고 높은 나뭇잎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힘들수록 감사하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 오순절인 맥추절에 성령님을 선물로 주어 선이 이루워지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지나온 기간에 기쁜 날들이 생각나십니까 ? 그러시다면 더욱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하나님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즐겁게 자원하여 감사하는 자를 더욱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가인과 아벨의 감사의 제사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예물의 차이는 어떤 예물을 드렸는가에 있다기보다는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린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 드린 것인지라 할 수있습니다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예물은 아무리 많이 드린다 해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인색”이란 원어상으로 고통과 슬픔을 말하며 “억지”란 의무감과 강제를 말합니다. 감사함으로 드려야 할 예물이 아까와서 고통스러워 한다든지 교회에 직분이 있으니 어쩔수 없이 드린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이런 예물은 받으시지 않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이번 맥추절에는 즐거운 지난날을 앞으로 남은 기간에도 이루워주실 것을 믿고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는 절기가 되시길 바랍니다.2) 자원하여 힘에 지나도록 감사하자.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맥추절은 모든 것을 자원하여 힘에 지나도록 드리는 감사절이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열정적인 감사를 한 사람들은 바울사도가 칭찬한 마게도냐 교인들이라 볼 수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환난이 많은 시련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감사를 했다고 하였습니다.우리 모두 고후 8:2-3절 말씀을 얻어 보겠습니다.”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그렇습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감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리는 심리대로 거두는 원리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뿐만 아니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이 행한대로 보응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교우처럼 우리도 자원하여 힘에 지나도록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힘에 지나도록 감사할까요 ?(1) 발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발로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맥추절인 오순절이되면 자신의 하던일을 멈추고 자원하여 제물을 가지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이번월드컵 시합중 우리나라 시합이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장도 쉬어가며 응원하기위해 모였습니다. 그 누가 하란 말도하지 않고 그렇게 한다고 뭐가 생기는 것도 없지만 그들은 자발적으로 행하였습니다.신앙인인 우리는 그 모습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번 맥추절에는 원근 각처에있는 모든성도들이 참여 하도록 우리모두 독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에 나오는 것만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전 그것을 발로 드리는 감사라 말하고 싶습니다.(2) 입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발로 감사를 드린 성도들은 입으로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입으로의 감사는 찬양입니다.시편 기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우리 나라에 뇌성마비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지 못한 송명희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라 온 몸이 비비 꼬이는 고통을 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에수를 믿고 시인이되었는데 정상인보다 감사를 더 하였습니다. 그가 쓴 여러편의 시중에 ‘나’라는 시가 있는데 오늘날 찬양으로도 많이 알려졌습니다.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이 사람은 전신 장애자이면서도 무엇을 이리도 감사하고 있습니까 ? 이 사람은 오직 예수님한분만으로 감사하고 감격해하고 있습니다.(3) 손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손은 정성입니다. 여러분이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예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물은액수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큼의 자신의 마음이 실려있는가에 있습니다.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공수를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도 맥추절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 나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인가둘러볼 때 가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허무해 보일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손뼉치며 힘있게여호와를 찬양하시길 바랍니다.3. 이렇게 열정을 다하여 감사하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은 ?1)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빌 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하나님께 아뢰라”지나 온 기간이 슬픔과 걱정이었다면 아무 염려 마시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과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바울사도와 같이 묶인 손발이 풀리고 자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 전하다 잡혀 모진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자 하나님께 찬양을드렸습니다. 그러자 손발이 풀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오늘날 우리도 감사하면 막힌 문제들이 모두 풀리는 축복의 은혜를 얻게됩니다.2) 번성케되는 축복을 받게됩니다.(렘 30:19)”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 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감사하는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케 해주십니다. 무엇을 번성케 하십니까 ?여러분 가정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가정은 자녀의 축복을,물질이 없는 자에게는 물질의 축복을, 사업이 약한 기업에는 사업의 번성함을 허락해 주신다는 것입니다.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온 삶을 뒤돌아 보셨습니까 ? 감사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무장한 몸으로 주에성전에 달려와 헌신함으로 축복을 더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의 현대적 의미 (신 16:9-12)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오늘은 한국교회가 맥추 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절기는 구약성경의 맥추절에서 왔는데, 맥추절은 오순절 또는 칠칠절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이 지난 7주 후 첫날이기 때문입니다(신 16:9). 오순절을 헬라어로 ‘펜테코스테’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50일 째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맥추절이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것은 맥추절의 의미가 그만큼 크고 깊다는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서 이 절기를 제정하셨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오순절에 보리를 거둘 것을 아시고 미리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과 맥추절은 동시의 절기입니다(레23:15-16).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나와서 광야 40년간의 고난의 생활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첫 농사지어 처음으로 열매를 거둘 때에 엄청난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감사의 맥추절을 맞이할 때마다 지난날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먹고살게 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난날 광야 길에서 원수들을 물리치시고 강한 팔로 자기 백성들을 지켜 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미로 맥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더욱이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이날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 이 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축복의 법을 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은 신약의 교회에 성령을 보내시어 세계적인 교회를 세워 주셨음으로 교회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맥추절 뿐 아니라 성경의 7대 절기는 모두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절기를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생애와 연관시켜 말합니다.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무교절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 초실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오순절은 성령의 임무교대입니다. 나팔절은 그리스도의 강림입니다. 속죄절은 그리스도의 속죄입니다.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미 절기를 제정하시고 가나안에 정착하면 절기를 따라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구원 스케줄과 연관되어있는 것을 친히 생활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을 생활로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맥추절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맥추절에 주시는 명령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성도들이 더욱 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힘껏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 (= 감사생활에 힘씀)
10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이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대로 우리의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려야 하는 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감사생활에 더욱 힘써야 함을 의미합니다.
여기 ‘네 힘을 헤아려’ 는 ‘네 힘이 닿는 대로’ 라는 뜻입니다. 즉 능력의 범위 아래서 최대한으로 힘껏 예물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풍성한 추수의 축복을 주신 것에 대한 합당한 보답입니다. 주님께서 넉넉히 베푸셨는데 사람이 자기 것만 먼저 계산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백성의 올바른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바로 맥추절에 예물을 드리는 이와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최대한 힘껏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맥추감사절을 맞는 우리는 우리의 감사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예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억지로나 인색한 마음으로 드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예물이든지 봉사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일체의 것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자원하는 심령을 기뻐하십니다(시 51:2).
9절에서 “일곱 주를 셀지니” 라고 한 것은 칠칠절의 날을 계수하는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절기가 언제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며 사는 것은 주님이 때를 따라 내리는 축복을 기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성도는 자원하여 감사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칠칠절의 ‘절(하그)’ 은 ‘하가그’ 동사에서 파생했는데, 이 단어가 사용된 절기는 무교절과 초막절(레 23:34)과 칠칠절(출 34:22)입니다. 이 동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순례의 길을 떠나다’ 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택하신 중앙 성소에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는 ‘춤을 추다’ 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명사 ‘하그’ 는 춤을 추는 축제로 번역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칠칠절을 포함하여 무교절과 초막절 등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는 축제의 성격이 강하게 배어 있는 명절임을 암시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라고 했고, 서신서 기자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라고 권면합니다.
감사는 성도의 신앙의 길이와 넓이를 재는 척도와 같고 무게를 다는 저울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한다”(롬 1:21) 고 했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불신자는 물고기를 잡고 그물에다가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는 수준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성도 여러분! 감사는 은혜 받을 예표입니다. 은혜 받은 자는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맥추절 축제에 주님의 은혜를 더욱 기뻐하며 감사 생활에 힘쓰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라” (= 소외된 이웃 돌봄)
11절=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맥추절을 맞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또다른 명령은 직접 추수의 소득을 얻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즐거움에 동참해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본절에 나타난 이웃에는 ‘레위인, 객, 고아, 그리고 과부’ 가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힘없는 연약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그 신분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다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하나님의 일에 참예할 권리를 동등하게 갖는다는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 신분이나 형편에 관계없이 동등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무슨 일에서든지 약한 자들을 소외시켜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온 성도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유기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몸은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지체가 약하다고 하여 괄시하거나 무시하거나 떼어낸다면 몸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교회가 약한 성도들을 소외시키고 유력한 사람들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그것은 교회 스스로가 자신을 영적 불구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12절) 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이 400년 동안이나 애굽에서 ‘종의 신분으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상태에 있었다’ 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있었을 때에는 아무리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그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었고, 맥추절과 같은 감사의 축제는 더더욱 벌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가나안 땅에서는 수고한 대로 정당한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며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과거에는 죄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감격과 풍성한 축복의 기쁨을 누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소외된 이웃을 돌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있습니까? 이 시대 인류가 겪고 있는 수많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청소년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맥추절에 ‘자녀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생명을 귀히 여기는 풍조를 만들고 자녀들을 주의 교양으로 잘 양육하라는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부모님들만 교회에 나와 복받지 마시고, 자녀들과 같이 나와 함께 복 받고 은혜 받고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이 교회 나오는 것을 금하지 말고, 아이들이 같이 나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법을 바로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다 한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참가 의식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맥추절은 어린아이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되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가운데서 함께 은혜를 나누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노비들과도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3,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서 놀랍게도 인권 존중 사상을 발견합니다. 그 옛날 노비는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헬라인들은 노비들을 가리켜 ‘말하는 도구’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맥추절에 노비와 함께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1948년 12월 U.N 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을 할 때에 ‘모든 사람은 날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맥추절 규례에는 하나님께서 인종과 계급의 차별을 철폐하도록 우리에게 명하신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맥추절에는 과부들도 함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약자를 도우라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여성 차별 철폐를 시사하신 교훈입니다. 여성은 아무런 차별 없이 남성과 동등한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맥추절이야말로 어린이들이 권리를 되찾는 절기요, 노비와 여성이 권리를 찾아 상하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을 가지는 절기입니다. 이것이 인류 평화와 복지에 기여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절기입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라.” 물량주의와 개교회 주의에 물들어 비틀거리는 한국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위를 잘 살펴서 소외된 이웃이 없는 세상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즐거워하라” (=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1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맥추절에 주시는 주님의 또다른 명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즐거워하라’ 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유월절 규례에서도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말씀입니다(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아무 곳에서나 드려서는 안되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전으로 나아가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교회에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구별된 거룩한 장소입니다. 맥추절 규례에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것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절에 다시한번 교회 중심의 믿음을 견고하게 다지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굳이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더래도 산이나 들에 나가서 예배드리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의 궤변일 뿐입니다.
히 10: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공적 예배는 교회로 모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물론 가정 예배나 그밖의 다른 형태의 예배가 의미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곳에서 항상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 중에 드리는 예배가 교회의 공적 예배를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개인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모델입니다. 행 2:46절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했습니다. 즉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기를 힘썼습니다. 주일은 물론이고 평일에도 모여 예배하고 말씀 배우며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와 얼마나 다른 모습입니까? 날마다 모이지는 못하더라도 교회에서 정한 공적 예배는 반드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일찍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한결같이 이 은혜의 생활을 즐거워했습니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이 시대의 교회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궁전이요 하늘에 속한 은혜를 내려주시는 시은소(施恩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항상 주님의 교회를 중심한 생활을 통하여 천국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08장 2, 3절>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서 눈돈자 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시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
주님의 교회에 나와 감사와 찬송으로 예배하다가 예수님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문제 해결되는 경험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208장 4절>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위로와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기뻐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독일의 정치가 마티 바덴(Marty Baden)은 자유주의적 사상 때문에 보수파에서 밀려나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정치가입니다. 한번은 어느 지방에 여행을 갔다가 돈이 없어 값싼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 구두가 없어졌습니다. 밤새 도적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화가 잔뜩 나서 ‘어느 놈이 내 신발을 훔쳐 갔느냐’고 욕을 하면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가게 하시다니’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친구가 헌 신발을 빌려 주면서 그날이 마침 주일이라 교회에 가자고 했습니다. 마티는 마지못해 교회에 끌려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사람 가운데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애인은 기도 드릴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젊은 정치가 마티 바덴은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기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고 두 다리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발을 신을 수 없구나. 나는 신발만 잃어버렸으니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지만 이렇게 남을 저주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했으니…” 하고 후회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마티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이었고, 항상 감사할 것을 찾아 나서는 삶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국민의 존경을 받는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에 크게 봉사하는 정치가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교단 중 “그리스도 연합교회”가 있는데, 이 교단에서는 하루에 열두 번 감사할 것을 강조합니다.
<1>아침, 새로운 시간을 주심에 <2>아침 식사에는 음식을 보며 <3>일터에 가면서 움직이는 기쁨에 <4>일하는 보람에 <5>일하면서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심에 <6>칭찬을 받을 때는 만족함에 <7>점심에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에 <8>일과 후 작은 성취에 <9>귀가 후 가족을 보며 <10>신문, TV를 보면서 여가를 주심에 <11>잠을 주신 은혜에 <12>꿈 속에서는 생명을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맥추감사주일입니다.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합시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원하는 예물을 힘껏 드리며 감사생활에 힘쓰라너희는 소외된 이웃을 찾아 함께 예배하며 즐거워하라
너희는 교회로 모여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며 즐거워하라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chojien :: [맥추감사주일설교] 감사할 줄 아는 인생
[맥추감사주일설교] 감사할 줄 아는 인생제목 : 감사할 줄 아는 인생
말씀 : 시103: 1-5
어느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차를 운전하다가 그만 언덕 아래로 떨어지면서 몇바퀴를 굴렀습니다. 차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찌그러졌고,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다 찌그러진 차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가갔을때 정말 뜻밖에도 그 다 찌그러진 차안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 걸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을 입기는 했지만 우려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물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정말 믿기 어려운 기적이라고 웅성거렸습니다. 목사님 아들 또한 정말 기적이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건져주셨다고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외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병원으로 갔을 때 아버지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정말 오늘 저는 큰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며 다시 한번 능력의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여기까지 오면서 너보다 더 큰 기적을 체험했단다.」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들은 깜짝 놀라서 말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얼마나 더 큰 사고를 당하셨길래요? 저보다 더 큰 사고를 당하셨는데 이렇게 멀쩡하시다니 정말 기적중에 기적이네요.」라고. 그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나는 아무런 사고도 당하지 않았단다. 그러니 이렇게 아무런 사고없이 조그마한 타박상조차 없이 잘 왔으니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느냐, 이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별로 심감을 못 느끼시는 것 같네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의 일상 생활 전체가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가운데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정말 큰 기적이고, 정말 감사하고 영광돌려야 할 일은요 다른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며, 먹고 입고 잠자고 일하고 오늘 여기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기적이요,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적,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전쟁이 난 후에야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평화시에는 평화의 소중함과 은혜를 잘 느끼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다리가 부러져 봐야 다리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비로소 확실히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져봐야 식량의 소중함을 압니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쌓여 있을때는 양식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병이 난후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눈이 어두워져 봐야 눈을 소중함과 감사함을 실감하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님이 안계셔 봐야 부모님의 소중함과 은혜를 아는 거예요. 아내가 며칠 자리를 비워봐야 아내의 소중함을 압니다. 이웃이 없어져봐야 이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인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어져봐야 교회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곳인지를 비로소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많은 핍박과 환난과 압제를 당해봐야 비로소 우리가 이렇게 마음껏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요, 은혜인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러기 전에 먼저 알아야 돼요. 없어지고, 약해지고, 마음대로 하지 못할 때 그때 비로소 전에 것의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참 억울한 일이예요. 있을 때 누릴 때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런즉 우리는 오늘 이 시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먹고 입고 잠자고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적이요, 감사요, 은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더욱 은혜롭게 누리며 더욱 더욱 감사하며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주일은 이른 곡식을 수확하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기쁨과 은혜를 나누는 절기입니다. 요즈음에는 보리나 밀 농사를 많이 짓지 않아서 아직은 수확한 곡식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면서 오늘까지 때를 따라 돕는 은총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왜 굳이 우리에게 이러한 절기들을 지킬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왜, 맥추절, 오순절, 수장절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규례를 주셨을까요? 그저 헌금이나 얼마 드리고, 감사에 대한 설교나 한편 듣게 하기 위해서 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 이유는 조금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속에 젖어서 너무나 은혜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고 살다보니까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니까 기쁨도 만족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속에서 정말 너무나 많은 은혜와 기적속에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일상화되다 보니까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잊고 살다보니까 감사와 영광은커녕 도리어 원망과 불평을 하기도 하고, 실망과 좌절속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미워하고 다투며 살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주어져 있는 복도 누리지 못하며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메마르고 왜곡된 우리의 심령을 일깨워서 감사와 은혜의 삶을 살게 하려고 일부러 절기를 정해놓고 그것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정말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때로는 별다른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고, 좀더 극단적으로는 별로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k일상들이 정말 큰 기적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람은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큰 은혜는 말할것도 없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주신 은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은혜, 이 아름답고 축복된 삶의 터전을 허락하신 은혜,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변함없이 공급해 주신 은혜, 생각할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신 은혜 등등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혜들을 주셨고, 오늘도 변함없이 공급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의 은혜, 이웃의 은혜, 스승의 은혜, 국가의 은혜, 회사의 은혜, 종업원의 은혜, 농업인의 은혜, 상업인의 은혜, 공장의 은혜, 공무원의 은혜, 서비스인의 은혜, 고객의 은혜 등등 우리는 정말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은혜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부족하고 아쉬운 것은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분이신지를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를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고맙게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쓰러트리고 배격하고 이겨야하고 심지어는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산다고 하는 엄청난 과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잘못된 인간관계 때문에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 인생은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까? 필연적으로 서로간에 은혜를 주고받는 관계속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닙니까? 나는 너의 은혜를 필요로하고, 너는 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정말 행복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걸 잊어버리고 서로의 소중함을 모르고 비난하고 헐뜯고 속이고 싸우고 아프게 하고 넘어뜨리고 상처를 주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필요로하는 존재들입니다. 서로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이웃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정부 조직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무질서와 혼란의 극치를 이룰 것입니다. 경찰조직이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기업가가 없으면 어떻겠습니까? 상인이 없다면, 농업인이 없다면, 과학자가 없다면, 노동자가 없다면, 공장이 없다면, 교회가 없다면, 병원이 없다면, 우체부 아저씨가 없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만약 나 혼자 살면서 빵 한 조각을 먹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수고가 있어야 할까요? 먼저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추수를 해야 겠지요. 그러자면 거기에 필요한 연장들을 만들어야 할테고, 그리고 나서 방아를 찧고, 또 거기에 필요한 도구도 있어야 하고, 그것을 가루로 만들고, 부풀게하는 약이나 설탕도 구해야 하고, 불을 지필 나무나 기타 연료를 장만 해야 하고 대략 20여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각각의 단계마다 많은 도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빵 한조각을 먹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당장 나가서 빵을 사먹을 수 있다는 것 정말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약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좋은 옷들을 입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까요? 비행기를 타려면 어떨까요? 이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병들고 외롭고 슬플때는 어떨까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그저 별 생각없이 먹고 입고 잠자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그 모든 과정과 그 모든 일상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은혜를 받고 있는지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림과 동시에 언제나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오늘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감사와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절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보십시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니다. 그래서 모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영원한 승리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병이라함은 비단 육체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병이란 우리의 영혼의 병, 우리의 정신적인 병, 우리의 육체적인 병 등 인간의 전 영역에 걸쳐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질병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우리 인간에게 찾아온 모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치유해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5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날마다 좋은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소망하는 기쁨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수리가 힘있게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이 우리가 기쁨과 은혜와 감사가운데 더욱 힘있게 저 높은 것올 향하여 달려가는 그러한 승리자로서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주신 은혜를 말씀하심과 동시에 앞으로 주실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이미 그런 은혜를 주셨으므로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어여삐 여겨 주시사 더욱 더 큰 은혜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더욱 큰 은혜와 능력과 기쁨속에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말 너무나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로 채워 주셨습니다. 삶의 터전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과 자유와 평화와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주셨습니다. 가정을 주시고 이웃을 주시고 나라를 주시고 태양과 비와 공기와 …… 정말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영광과 찬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주신바 은혜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누리고 있는 것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감사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농촌경제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고달프기도 합니다. 때로는 별다른 고통이나 어려움없이 사치와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은근히 시기심이 생겨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몇 달을 수고하고 나서 몇억씩 벌어들이는 사람들, 한편의 광고를 찍고 무슨 십억을 받느니 하는 것을 보면 좀 속이 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촌에서 이렇게 고생해봐야 별로 남는 것도 없는데 우리 같은 처지에 무슨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으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일부 부유층이나 지도층이나 권력층이나 유명인사들이게나 어울리는 일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감사는 어떤 특별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감사는 어떤 특권층에나 어울리는 사치품이 아닌 것입니다.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또 누구에게나 감사해야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매튜헨리라는 사람은 도적을 맞고 나서 이렇게 감사하였습니다. ①지금까지는 도적을 맞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②내 생명은 도적 맞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③아직은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남겨주셨으니 감사합니다. ④그 무엇보다도 내가 도적이 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17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사상가였던 John Milton(1608~1674)은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문학을 대표하는 2대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이었으며 청교도 혁명에도 기여한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44세 때에 완전히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1652).
그러나 신실한 청교도적 신앙인이었던 밀턴은 이 불행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더 신령한 눈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시선을 어둡게 하신 것은 오직 주님만 볼 수 있도록 내 심령의 눈을 더욱 크게 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그리하여 결국 그는 1667년 「실락원」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대서사시를 완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조건에서나 감사의 조건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감사할줄 아는 자만이 진정 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감사할줄 아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 성도여러분께서는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보내면서 정말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주신 은혜들을 다시한번 헤아려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을 늘 기억하면서 정말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리며 거기에 보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도 동시에 언제나 우리들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많은 도움과 은혜를 주고 있는 우리의 모든 가깝고 먼 이웃들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또한 감사하며 보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말 우리 모두가 함께 서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운데 더욱 큰 은혜를 주고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맥추감사주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맥추절은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이다.
맥추절은 성경에서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맥추절은 농사지은 밀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인 까닭에 ‘초실절’(출 34:22)이라고 한다.
맥추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인 까닭에 ‘오순절’이라고도 하며,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씩, 7주간 지난 후에 있는 절기인 까닭에 ‘칠칠절’(레 16:9~12; 민 28:26~31)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맥추절은 밀의 추수를 넘어 중요한 역사적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구약시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때가 맥추절이며, 신약시대, 주님의 부활 후 성령께서 강림하신 성령강림절 또한 이때다.
이와같이, 성경적으로 맥추절과 오순절은 같은 날이지만, 한국교회의 경우, 맥추절인 오순절은 성령강림절로 지키고, 맥추감사절은 시기와 상관없이, 7월 첫 번째 주일로 구별해서 지키고 있다.
맥추절은 한국에서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전반기 농산물에 대한 감사의 절기로 시작되었다. 선교 초기 대부분의 한국민들은 이모작을 하던 농경사회에 살았는데, 봄철의 주된 농산물인 보리를 6월 초, 중순에 수확했다.
그런 까닭에 보리 수확과 관련하여, 한 해의 절반이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는 7월 첫째 주일을 맥추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는데, ‘맥추감사절’은 맥추절에 감사라는 단어를 붙여, 가을의 ‘추수감사절’과 함께 감사절의 의미를 강조하게 되었다.
변화하는 시대, 변하지 않는 진리
어떤 분들은 현대의 많은 사람이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데, 맥추감사절을 굳이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인들이 더 이상 농경 문화 속에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맥추감사절은 구시대의 유물로 사라져야 할 절기인가? 영국의 존 스토트(J. Stott)는 하나님의 계시 본질(가르침, 약속, 명령)과 그 계시가 주어진 당시의 문화적 옷을 구분할 필요를 인정하면서, 문화적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본질적인 메시지는 영원하며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는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고대의 문화적 옷을 입고 있는 계시를 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토트에 의하면, 이에 관해 세 가지 선택권이 있다. 첫째는 전적인 거부(total rejection)로, 그 문화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여기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선택권은 기계적이며 딱딱한 문자주의(wooden literalism)로, 계시와 문화에 동등한 권위를 부여하고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기와 목욕물을 같이 보관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트는 이러한 접근을 거부하고 더욱 현명한 방법으로 문화적 조옮김(cultural transposition)을 권한다. 문화적 조옮김은 성경의 본질적인 계시를 인식하고 그 계시를 주신 문화적 형태로부터 분리하여, 계시의 진리는 동일하지만 문화적 표현을 달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적 조옮김은 아기는 놓아두고 목욕물만 바꾸는 것이다. 이는 인도의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가 복음의 ‘귀화’(naturalization)라고 부른 그것으로, 복음을 토착적인 문화 형태로 조옮김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의 맥추절을 한국 상황에 토착화한 형태인 맥추감사절은, 농경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도 계시의 문화적 조옮김의 형태로 보존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절기가 담고 있는 계시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 속에 보존되고 계승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맥추절 속에 담겨있는 계시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의 핵심은 ‘감사’이다. 그것은 우리의 소출과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로만 비롯됨을 인정하는 감사이다.
따라서 우리는 농경사회든, 도시 사회든 그 문화적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신 이 절기가 기억하기를 원하는 ‘감사’라는 본질적인 메시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감사는 맥추절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와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 차원의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소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지하다시피, 성경의 맥추절은 농사지은 밀의 첫 열매를 바치는 절기이다.
맥추절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받아먹고 살던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농사를 짓고 수확한 첫 곡식을 드린 절기이다.
애굽을 떠나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그 땅의 소산을 먹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비록 그들이 수고했을지라도 그 소산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돌보심과 일하심 때문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은 잘 알 것이다. 땀 흘려 씨 뿌려도 때를 따라 단비와 알맞은 햇살을 주시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을 말이다.
이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예외가 아니다. 비록 우리의 생존과 생명의 보존을 위해 애쓴다할지라도 우리의 생명과 그것의 보존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 127:1~2)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는 성도들이라 해도 맥추절의 본질적 의미를 묵상할 때, 생명의 식탁을 대할 때, 그 음식과 과일이 오기까지 하나님의 온 우주가 참여해 마련한 것임을 상고하며 감사할 수 있다.
또한 맥추절의 감사는 여전히 산적한 현재의 문제들, 곧 국내외 경제적 악재들, 금리와 물가의 상승, 취업과 진학을 비롯한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신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혜로우심에 관한 감사로 치환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맥추절을 풍요로운 물질 사회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감사를 잊는 영적 교만을 경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하게 될 영적 위험들에 관해 이렇게 엄중히 경고하셨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이런 의미에서 한 해의 절반, 한 가운데 위치한 맥추감사절은 여전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의 먹고 마시는 생존과 보존의 문제가 종국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으며, 당신의 백성을 먹이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떡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라
서두에 언급한 바처럼, 맥추절은 곡식을 추수한 절기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절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시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육적 양식을 위해 밀과 보리를 주셨으며, 당신의 백성의 영적 양식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절기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셨다. (마 4:4)
또한 당신은 우리를 위해 친히 생명의 떡이 되시고, 영적 양식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을 참된 양식으로, 자신의 피를 참된 음료’(요 6:55)로 제공하신 주님이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이 시기, 당신의 교회와 백성의 생명과 생기를 위하여 성령을 장대비같이 내려 주셨다. (이와 관련해서는 ‘성령강림 주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참고하라)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맥추감사절을 통해 밀과 보리를 통해 육체적인 생명을 지속하게 하신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을 위해 친히 생명의 떡이 되신 성자 예수님과 생명과 생기의 영으로 우리를 일으키시는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반환점을 지나며
맥추절은 공교롭게도 한 해 중 정확히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주일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고, 여기까지 순례의 여정을 이끄신 주님의 은혜를 회고할 수 있는 최상의 주일이다.
지난날 베푸신 그 분의 은혜를 생각할 때,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될 순례의 여정을 준비하며, 감사와 용기의 줄로 신발을 동여맬 수 있다.
맥추감사절은 우리를 향해 말한다. 삶은 온통 신비라는 것, 삶은 온통 은총이라는 것. 우리의 불충과 부덕을 생각할 때, 감사와 감탄 외에 드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감사의 다른 이름 : 성장과 조화 [맥추감사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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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다른 이름: 성장&조화 [신16:9-12]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고 7월의 첫 주를 맞이했습니다. 뭔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달려온 것 같은데 벌써 7월입니다. 7월 첫 주일인 오늘,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초여름에 지키는 추수감사절기 예배로 말입니다.
보리 수확과 관련된 절기인 맥추절은 칠칠절(feast of Weeks, feast of harvest) 혹은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유월절 둘째 날부터 일곱 주간을 헤아린다고 하여, 칠칠절이라 하고, 유월절로부터 헤아리면 50일 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이라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유월절 둘째 날 보리의 첫 열매를 거두어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초실절을 지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맥추절이 되면 보리 한 오멜(한묶음)을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물론 보리가 얼마나 잘 영글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맥추절이 ‘수확의 절기’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때는 밀과 보리만이 아니라 각종 실과들도 무르익기 시작하는 때이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난 귀한 열매들을 즐겨 바쳤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맥추절(오순절)이 되면 자기 집과 회당을 다양한 식물과 꽃들로 장식하고, 그 땅에서 나는 다양한 곡물과 과일들을 바구니에 담아 행렬 이루어 성전으로 가져간다고 합니다. <변순복과 함께 하는 성경 속의 절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p.185-204 참조>
앞서 말씀 드린대로 맥추절은 수확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맥추절의 또 다른 이름이 오순절인 것을 볼 때에 ‘[토라:율법or말씀]의 절기’라고도 부릅니다. 오순절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토라를 기념하는 시간(히: 하그 마탄 토라테이누)’이란 뜻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에 정착한 히브리인들은 농사를 지으며 하나님이 주신 은총과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지나온 역사 속에서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며 ‘노예는 영혼이 없는 존재’였기에 짐승보다 못한 취급당하며 살아온 그들이었습니다. 인권은 고사하고 굶어 죽지만 않으면 감사하며 살던 짐승중의 괴수였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다가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위해 강한 손과 팔을 내어주시어 애굽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 너희는 내 백성이요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 .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계명이 여기 있다 ’ 하시며, 하나님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해서, 회당 예배의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매년 오순절 첫날에는 십계명이 포함된 출애굽기 19-20장을 읽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오순절 규례에 관한 부분인 신명기15:19-16:17절과, 민수기 28:26-31과 룻기서를 통독했습니다.
중세기 이후부터 시작된 관습 가운중 하나는 오순절에 5세 이상의 유대인 아이들은 히브리어 학교에 입학 시키는 날로 정했습니다. 입학식을 마친 다음 유대인 어린아이들은 처음으로 히브리어 알파벳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 때에 학생들에게 맛있는 과자와 꿀과 사탕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토라(율법)가 그처럼 달콤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 한거지요.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관습으로 19세기 이후에는 오순절에 13세가 되는 소년 소녀들의 성인식이 있었습니다. 소년들의 성인식은 바르 미츠바(Bar Mitzvah)라 하고 소녀들의 성인식은 바트 미츠바(Bat Mitzvah)라고 하는데, 굳이 오순절에 하는 까닭은 스스로 토라를 해석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렀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책임적인 주체가 되라는 뜻입니다. 성인식에 참여할 아이들은 토라의 말씀 가운데 제비뽑기를 통해 자기가 해석해야 할 성경 말씀을 받습니다. 아이는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또 연구하여 정해진 날 회당에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른들 앞에서 그 말씀의 의미를 풀어 설명합니다. 어른들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답해야 합니다. 답변을 잘 하고 나면 어른들은 그 아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넵니다. 이제는 토라를 논하고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공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이 오순절과 관련해서 우리는 신약에 와서도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120명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말씀 붙들고 기도할 때에,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어, 여러 박해와 핍박에 억눌려 있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약속된 주의 말씀‘을 다시 깨닫게 하시며, 움츠려 있던 120명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성령께서 인도하신 가운데 세상에 나가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첫 열매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영혼 없는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신분으로 거듭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진 우리 자신의 신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맥추감사주일이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첫 열매만 기억할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아울러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고, 오순절 성령사건을 통해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듯, 이 땅 위에 세워진 교회로서, 우리의 사명을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나가다 보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10 절과 11 절 사이에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 이것은 우리가 ‘주 하나님의 백성’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요. 또 맥추절, 그러니까 오순절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주로 사용하는 표현중 하나가 바로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아무 생각 없이 ‘아픈 다리와 허리 달래가며 자리에 앉아서 “아이고 주여~” 고백’하였겠지요. 또 어떤 때 우리는 집안일이나 어떤 일들 하면서, 넘어지거나 무언가 떨어져 깜짝 놀라 ‘아이고 주여~’ 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님, 주여, 주’ 라는 말을 그 어떤 깊은 묵상과 고백도 아닌 버릇처럼 무슨 주문 외우듯, 쉽게 말하곤 합니다.
우르과이 한 작은 성당에 이런 주기도문이 적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하지 마라, 아들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지마라, 물질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를 용서하소서’ 하지 마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의 이름이 조금 더 다르게 고백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린 후 50일이 지나서 다시 초실절을 지켰을까요? 이 맥추절(오순절)을 지키며 왜 그들은 토라의 말씀을 암송하였겠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주님’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애굽에서 건지셨기에 마땅히 숭배해야 할 어떤 신적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온 공동체가 함께 성경말씀을 암송하며 ‘하나님만이 그들의 주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어떤 절기와 형식을 위하여 고백하는 암송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영적자존감’이 담긴 자랑스런 고백이었습니다. 하여, 그들은 이 맥추절(오순절)이 다가오면 13세의 자녀들 스스로가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는 축제를 즐겼던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견신례인거지요. 과거에는 부모의 신앙으로 고백하였던 하나님이었으나, 이 맥추절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고백 하는거지요. 이 소년·소녀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에, 온 이스라엘이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다음세대들 각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고백하는 모습들을 축하하며, 온 이스라엘이 함께 많은 감동 받게 되었겠지요. 그 감동에 따라 웃고 울고 찬양함을 볼 때에, 이스라엘의 맥추절은 성장의 절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 시대의 맥추절(오순절)의 모습은 또 어떻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어도, 로마의 칼과 창이 두려워 떨던 120명의 처음교회 사람들이, 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성장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자랑스럽게 고백하였습니다. 120명의 공동체가 이 고백을 즐기는 것을 넘어 오히려 핍박하던 세상으로까지 나가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자랑하며 전했습니다. 젖먹이 어린아이 같았던 성도들의 신앙이, 핍박과 죽음을 불사하며 주님을 자랑 할 만큼 성장했던거지요.
구약과 신약에서 증거 하는, 이 맥추절(오순절)의 모습을 볼 때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 감사는, 단지 한 해동안의 결실들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한번 드리고 마는 물질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정한 감사는 성장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고, 교회 직분자로서 형식적으로 고백했던 ‘주님’이 아니라, 진정 ‘ 주님 ’ 없이 살 수 없는 우리의 존재됨을 고백 하도록 ,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 !!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의 예물이고 고백입니다. 120명의 처음교회 사람들일 세상에 나가 자랑스럽게 주님을 전하였듯, 세상에 나가면 작아졌던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겁니다. 직장과 사업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믿는 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식당에 가서도 자랑스럽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맛 집이나 바겐세일에 대한 것보다 우리 주님을 더 크게 자랑하는 등,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는 이 예배가 내 ·외적으로 어떤 성장 없이 단순히 감사예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형식적인 행사’가 아니길 소망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스라엘 공동체는 맥추절을 지키며 온 무리가 함께 성경말씀을 암송했습니다. 함께 서로의 신앙적인 성숙을 기도하고 격려하고 축하 해주었습니다. 혈연과 지연을 넘어 다음세대들이 스스로 신앙고백 할 때에는, 자기 자식 대하듯 함께 기도하며 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이는 이 축제에는 그 어느 누구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1절 보시면 아시겠지만, 종이나 고아 과부나 나그네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 한 몸 이루는’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분이나 계급, 부와 지식의 차별의 벽들은 모두 파쇄하고,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 곳에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 힘을 모으며 사람 위에 군림코자 하는 목소리가 없었습니다. ‘어린 것이 뭘 안다고’ 가 아니라, 하나님을 고백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온 무리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는 이 공동체에 어떻게 사람이 만든 “불협화음”이란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천국의 주인인 어린아이가 존중 받아 조화를 이루었으니, 그 곳이 바로 하나님나라이지 않았겠습니까?
오순절 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신앙적인 성장을 이룬 신약의 교회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곳에도 역시 언어, 문화, 인종 및 여러 사상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바대인 , 메대인 , 엘람인 , 메소보타미아 , 유대와 갑바도기아 , 본도와 아시아 , 애굽과 구레네 등 에서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하나가 되어졌습니다. 이 방언과 관련해서 말도 많습니다만, 적어도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바울이 증거 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과 다른 것입니다. 이 방언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혼잡했던 언어가 다시 하나로 모여져, 각 사람들에게 서로 소통 되어진 방언입니다. 사람들이 각 자가 자기 나라 언어로 기도하였어도, 어떤 민족이고 출신이든 차별 없이 모두가 다 알아듣는, 하늘의 신비가 가득 찬 사건입니다. 사람이 만든 장벽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성령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졌으니, 이 역시 하나님나라이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첫 열매를 상징하는 맥추절(오순절)을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주님을 기념하며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지니, 이보다 더 큰 축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인 ‘개교회주의를 넘어’ 하늘소리가족과 칠석가족이 또 다시 이렇게, 하나 이루는 축제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니, 하나님 보실 때에 이보다 더 큰 감사예배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께는 영광 되는 즐거운 잔치로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감사의 또 다른 이름을 ‘성장’과 ‘조화’로 증거하고 싶습니다.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목사는 우리 수익의 첫 열매인 십일조에 대해 이렇게 증거 했습니다. ‘십일조 생활은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훈련이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할 수 있으면 그 밖의 다른 욕심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오만해지기 쉬운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 삶의 주 되심을 잊지 않으며 살 수 있습니다. 자연스레 신앙적인 성장 또한 함께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 신앙의 성장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다시 찾는 법을 배울 때에 감사가 나오겠지요?!
당연하게 생각했던 하루가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배웁니다. 매일같이 하나님께 생기와 호흡을 선물 받는 법도 배웁니다. 일 할 수 있는 건강과 힘을, 매일 만나는 가족, 함께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까지,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선물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2019년 하반기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물임을 보게 됩니다. 이 귀한 선물들을 공짜로 받고 있다는 사실 하나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지금 영적성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나아가 이 좋은 선물을 함께 누리며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한 몸 이루며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하나님께 이보다 더 큰 예물과 감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하늘소리&칠석가족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이렇게 매 절기 때마다 특별하게 드리는 우리의 물질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는 더욱 특별한 감사이고 예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귀한 삶에 ,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나를 만나는 모든 이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 !! 역시 우리가 삶으로 고백해야 할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사는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지지 않는 삶!! 신앙과 삶, 예배와 삶이 하나 되는 삶!!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 거룩한 삶을 통해 – 우리 가는 곳마다 웃음이, 위로가, 사랑이 가득 깃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몸소 보여 주셨듯, 우리도 주어진 여러 삶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첫 열매가 되어져야 하겠습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해의 첫 열매 , 차별이 있는 곳에서는 평등의 첫 열매 , 소외가 있는 곳에는 찾음의 첫 열매 , 상처가 있는 곳에서는 위로와 사랑의 첫 열매 , 죽음이 있는 곳에서는 생명의 첫 열매 ,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첫 열매 되는 삶 살기 위해 힘쓰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이고 예물인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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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2021년07월04일/맥추감사주일/신명기16:9-12/’절기를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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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07월04일/맥추감사주일/신명기16:9-12/’절기를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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