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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씨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를 비유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내게 확신이 넘치는 뜨거운 믿음을 주시지 않고 겨자씨 만한 믿음을 주신 것은 구원을 받고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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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함에 답하다 Ep.65]이 영상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한 베이직교회의 [아름다운 동행] 예배 중에서 설교 후 진행되는 Q\u0026A를 모은 것입니다. [2018년 1월 21일 예배]진행: 조정민 목사(베이직교회), 안신기 목사(베이직교회)* 이 영상물의 저작권은 ‘베이직교회’ 에 있습니다.
http://www.basicchurch.or.kr
#신앙생활 #설교 #조정민목사 #베이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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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성경 Holy-Bible
겨자씨만한 믿음은, 매우 작고 보잘것없게 보이지만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미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생명력 있는 …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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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비유(25)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으로 마21:18-22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인데요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 여러분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없으시나요? 겨자씨의 크기는, 노안이 벌써 와 있는 저 같은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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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는가? … 만약 주님께서 바윗돌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9/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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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Matthew) 17:14-27(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
‘작은 믿음’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지 못한 반쪽 믿음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그 …
Source: 4miryu.tistory.com
Date Published: 10/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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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겨자씨만한 믿음을 간구합니다 – 아이굿뉴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믿는 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할 때 30배 60배 100 …
Source: www.igoodnews.net
Date Published: 6/16/2022
View: 4752
[오늘의 설교] 겨자씨만한 믿음 – 국민일보
[오늘의 설교] 겨자씨만한 믿음 기사의 사진. 마태복음 17장 14~20절 본문 말씀에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찾아와 …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10/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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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성경읽기(37)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 크리스찬 투데이
그 가운데 대표적인 본문이 겨자씨만한 믿음 관련 구절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작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떠올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
Source: www.christiantoday.us
Date Published: 9/7/2022
View: 3952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일예배 20170312)
성경본문: 누가복음 17: 1~6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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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겨자씨 만한 믿음
- Author: 더메시지랩The Message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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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2.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5Y3QrJVvCk
[박진영 간증문 ‘겨자씨만한 믿음’ 전문]“내 안 겨자씨가 큰 겨자나무 되도록…”
사진=동아닷컴DB
가수 박진영이 ‘구원파 집회’ 의혹 보도에 대해 “제가 돈 내고 제가 장소를 빌려 제가 가르친 성경공부 집회”라고 반박했다.박진영은 2일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100명이 제 강의를 듣기 위해 모였고 그중에 속칭 ‘구원파’ 몇 분이 제 강의를 들어보고 싶다고 와서 앉아있었는데 그게 구원파 모임이라고?”라며 이 같이 말했다.이어 “이왕 이렇게 된 것, 제 간증문을 올릴 테니 꼼꼼히 한 번 봐달라. 그 내용 중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당신들의 취재는 합당한 것이겠지만 만약 없다면 저희에게 입히신 모든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시게 될 것”이라며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제목의 간증문을 게재했다.▼다음은 박진영이 올린 간증문 ‘겨자씨만한 믿음’ 전문▼2017/ 4/ 27 밤10시 히브리서 10장 10절을 읽다가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수십 번 읽었던 구절인데 ‘우리’라는 말 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니 그 전에도 논리적으로는 알았지만 마음에서 처음으로 사실로 느껴졌다. 이게 왜 나에게 신기한 일인지 지금부터 써내려가 보겠다.2008년 미국시장에서 성공해보겠다는 꿈을 품고 한창 뛰어다니고 있을 때 나는 불현듯 ‘운이라는 게 뭘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라는 게 사람들 인생에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냥 말 그대로 운일 뿐일까 아니면 운이라는 걸 주관하는 신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마음에 품은 채로 계속 살아가다가 2010년 난 더 이상 이 걸 무시하고 살아가는 건 멍청하고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이 있는 지 확인해보기로 결심했다.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반드시 우주와 인간을 만든 창조자여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든 사람 말고는 그 만든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인간들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경전 중에 창조자가 나오는 책들만 찾아봤다.원래는 여러 책을 비교해보려했지만 너무나 신기하게도 이 우주와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자가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고 왜 만들었는지 자세하게 써놓은 책은 성경 한 권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교해보며 공부해보려고 한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할 수 없이 성경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보는 방향으로 내 공부는 바뀌었다.성경의 논리는 간단했다.1. 이 책의 저자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이며 우주 (시간, 공간, 인간)를 창조했다.2.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선택한 인간들의 영혼을 움직여 이 책을 기록, 편집, 번역, 유지했다.3. 하나님은 원래 우주와 그 속의 모든 걸 영원하도록, 썩지 않도록 창조했고 그 창조의 목적은 인간과 함께 사랑하며 살기 위한 것이었다.4.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의지가 있어야하므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고 또한 그 자유의지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두 개의 선택을 주셨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과 사탄이 가라는 길.5.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버리고 사탄이 가라는 길 즉, 하나님이 가면 죽는다고 말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시간과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6. 인간이 느끼는 허전함, 허무함, 두려움 등은 시간의 노예이기에 생기는 것이며 이 시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다시 말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한다.7. 따라서 구원은 시간 안에 있는 존재가 절대로 해줄 수 없으며 시간 밖에 있는 존재만이 해줄 수 있다.8.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몇 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책에 인간의 과거와 미래 특히 유대인의 미래를 다 미리 예언해놓으심으로써 자신이 시간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9.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구원할 방법을 처음부터 만들어놓으셨고 그게 예수이다.따라서 성경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해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성경책에 씌여있는 수많은 예언들 중에 한 개라도 틀린 것이 있는 지 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유대인의 대한 예언들과 실제 유대인의 역사를 비교해보기 시작헀다. 각종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결국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상과 단절한 채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성경을 파헤치며 살았다. 집을 떠난 지 2달 후, 2012년 10월 나는 틀린 예언을 찾는 걸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틀린 걸 찾기는 커녕 오히려 성경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미래를 완벽히 맞추는 건 신이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 때부터 난 성경에 맞춰 내 삶을 바꿔나갔다. 성실하다는 점 하나 빼면 난 참 나쁜 사람이었다. 따뜻한 척 하지만 사실은 차갑고, 나밖에 모르고, 방탕하게 놀고, 목적을 위해선 거짓말도 하는… 그랬던 내가 주변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달라진 생활 때문에 주변 사람들 자체가 바뀌었다.그러나 나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성경과 그 속의 주인공인 예수, 그 예수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더이상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어서 인정하게 됐지만 마음에서 사실로 믿어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믿으려고 애를 써봐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성경은 결국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씌여진 책인데 난 과연 구원을 얻은 것일까? 만약 아니라면 구원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걸까?내가 헷갈렸던 것은 구원의 정의와 그것을 얻는 방법에 대해 교파마다 모두 조금씩 다른 설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천주교 기독교 구분 없이 100명이 넘는 성직자분들의 설교를 책을 통해, 영상을 통해, 혹은 직접 만나 듣게 되었다.대부분의 말씀은 구원이 뭔지,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또 자신이 구원을 얻었는지 안 얻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 지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약간 두리뭉실하게 설명을 하고 있었고 또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눈 분들은 모두 나 정도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에 맞게 삶이 바뀌었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거라고 말씀해주셨다.물론 난 이미 왠만한 신학대 졸업생 못지 않게 성경을 잘 알고 있었고 성경과 그 속의 예수님을 내 구원자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결심과 나의 의지였지 내 마음 속에서 믿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꾸 나에게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다, 성령이 임했다, 거듭났다라고 하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내 마음은 점점 괴로와져갔다. 그 와중에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있다보니 나에게 성경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는 성경을 가르칠 때마나 ‘나는 아직 성경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가르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가르치는 사람들 중에 완전히 성경이 믿어졌고 2천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죄, 과거의 지은 죄와 미래에 지을 죄까지 모두 대신 짊어지고 가셨다는 게 믿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에게 ‘근데 당신은 왜 이게 안 믿어지세요?’라고 물어볼 때도 난 너무나도 초라해졌고 괴로웠다.내가 아직 성경을 덜 공부해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에 구약, 신약을 왔다갔다하며 죽어라 공부를 해도 성경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경을 가르칠 때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다 해결해놓으셨다’는 말을 하면서도 난 그 ‘여러분’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주변에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기도를 더 열심히 해보라는 얘기에 기도를 해보는데 이상하게도 ‘절 구원해주세요’라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구원을 받고 그 감사함에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한편, 실망스러운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죄가 모두 해결되어 있기에 지옥은 가지 않지만 하나님 자녀로서 상과 벌(살아있는 동안), 칭찬과 부끄러움(죽고나서)이 있다고 아무리 가르쳐도 잘 듣지 않았다.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너무 편해져 세상 속에 다시 빠져 사는 사람, 세상 일에 흥미가 떨어졌다며 게을러지는 사람,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못한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난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구원 후 내 자신이 행여 안좋은 쪽으로 변할까 두려워 결국 모든 기도의 끝은 ‘구원해주세요’란 말 대신 ‘제 인생을 책임져주세요’라는 말로 끝마치게 되었다.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한지 5년이되도 마음속에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난 구원을 거의 포기하게 되었다. ‘60살이 넘어서 죽기 직전에나 믿음을 주시려나…설마 이렇게 그냥 죽이시지는 않겠지’란 생각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을 공부한지 7년이란 세월이 흐른 2017년 4월 27일 밤 10시 히브리서 10장 10절을 읽는데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라는 구절의 ‘우리’라는 말 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전에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전에 알았다는 말과 지금 알았다는 말은 다른 뜻이었다. 머리로,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과 마음에서 사실로 믿어진 것의 차이였다. 다시 말해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 믿어져버린 것의 차이였다.그렇게 믿으려고 애를 쓸 때는 안 믿어지던 것이 그냥 한 순간에 믿어져버렸다. 반대로 안 믿어보려고, 의심해보려고 해도 잘 되질 않았다. 그 때서야 알았다. 성경에 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로 표현되어 있는지.믿음이 온 후로 (After faith has come) 갈3:25하나님이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Eyes of understanding being enlightened) 앱1:18예수께서 저희 마음을 열어 (He opened their understanding) 눅24:45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The Lord opened her heart) 행16:14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 Through faith which is in Jesus Christ) 딤후3:15마지막 디모데후서 말씀에 ‘내 안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씌여져있는 이유도 뭔지 알았다. 새로 생긴 믿음은 내가 그 전에 갖고 있던 믿음과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2천년 전에 셋째하늘에서 날 위해 내가 평생 지을 모든 죄를 위한 제사가 드려졌고 그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 피로 드려진 제사였기에 내 모든 죄는 영원히, 완전히 처리되었다는 게 사실로 믿어진다는 것이 정말 정상적인 일일까? 이것은 절대 인간의 믿음으로는 믿어질 수 없다. 너무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고 믿어진 것이다.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건 그동안 내가 애써 그 ‘우리’란 말 속에서 나를 빼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마음 속 중심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영악하고 악한 내 마음을 알고 계셨기에 나를 구원해주실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는 사람들의 특징에 난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것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던 것 같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 가난한 마음, 상한 마음, 절박한 마음…난 어느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화목한 가정에서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함 없이 컸고 이루고 싶은 목표는 다 이루며 살았고 하나님을 찾게 된 이유도 힘들어서가 아니라 궁금해서였기에 난 스스로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리 착한 사람이나 아무리 악한 사람이나 그저 죄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일 뿐인 것이고 그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기에 그 모든 사람들의 죄를 전부 다 책임져주신 것이다. 그 속에서 ‘난 아니야…난 해당이 안 될거야…’하고 있었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그 제사는 이미 2천년 전에 드려진 제사이기에 이제와 내가 그 ‘우리’ 속에서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그런데 한 가지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지난 5년간 나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대부분 감격해서 울거나, 너무 좋아 웃거나,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하거나, 이제 죽음이 무섭지 않다며 확신에 찬 모습을 보였는데 난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그냥 ‘히10:10의 ‘우리’란 말 속에 내가 들어있네, 2천년 전에 내가 거룩해져버렸네’라는 깨달음 외에는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없었다. 눅24:32처럼 가슴이 뜨겁지도, 사12:1처럼 기쁨이 넘치지도, 행8:36처럼 확신에 차지도 않았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거하는지 시험하고 스스로 확증하라는 말씀때문에 난 일주일동안 아무에게도 나의 구원을 말하지 못하고 끝없이 스스로를 상담해봤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여부에 대한 상담을 많이 했기에 다행히 내가 나 스스로를 상담할 수 있었다.Q: 아직도 의심이 남아있는가?A: 이제 이게 사실이 아니면 그건 하나님 책임이다증거: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사43:11Q: 만약 죽었는데 내가 죄가 남아있다며 지옥에 가면 어떡하지?A: 히10:10에 내가 거룩하게 되었다고 약속했다.증거: 주는 영원히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리라 딤2:13Q: 믿어지긴 했는데 왜 이렇게 간단하지?A: 모든 일은 하나님이 2천년 전에 미리 다 해놓으신것이기에증거: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4:10Q; 히10:10 한 구절 믿어졌다고 구원을 받아?A: 육체가 태어날 때 정자 하나만 난자에 들어가면 되 듯이 영혼이 태어날 때도 말씀 하나만 들어오면 된다.증거: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그리고 깨달았다. 이 성경의 내용이 다른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 사이의 얘기란 것을.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사탄)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앱2:1~9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5년동안 내가 구원 받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크리스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장님이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9:41지난 5년간 내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생활이 올바르게 바뀌었어도 장님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에 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완벽한 죄사함이 믿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다시말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아마도 본인이 구원을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큰 죄이다.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대충 살짝)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사탄)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6:14~15난 이제 백보좌 심판(계20:12)에 가지 않기에 지옥에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가 없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하지만 난 아직 두렵고 떨린다. 나에겐 구원 받은 사람들이 받는 심판,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5:9~10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잘못 살 때 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아들이 아니니라. 히12:7~8빌 2:1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받은 구원을 잘 키워나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엔 Work out your own salvation으로 표현되어있고 그 번역본인 흠정역에는 ‘너희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라고 되어있다.히브리서,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요한일서, 요한계시록 등은 우리 이방인 주수신자로 위해 쓴 글이 아니라 7년대환란에 복음을 전할 유대인 144,000들을 주수신자로 해서 쓴 글임을 명심해야한다. 이 편지들도 우리가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하지만 여기에 구원을 우리의 노력으로 얻거나 우리의 잘못으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은 예수님의 아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쓴 글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유대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와 달라서 구원에 관한 한 우리는 사도바울의 편지를 참고해야한다.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하려 함이라 갈2:8~9할례자(유대인)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이방인)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고전7:18난 지금 두렵다. 다른 거듭난 사람들에 비해 내 믿음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씨들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를 비유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6하나님께서 내게 확신이 넘치는 뜨거운 믿음을 주시지 않고 겨자씨 만한 믿음을 주신 것은 구원을 받고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지 않게 해주시라고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 생각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바울의 말씀처럼 내 안의 겨자씨가 큰 겨자나무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 아래 교제속에서 잘 커나가고 싶다.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email protected]
예수님의비유(25)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으로 마21:18-22
마태복음 21:18-22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산을 옮겨 보셨나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산 하나 옮기고 왔습니다. (농담입니다.) 예수님은 의심하지 않는 믿음만 있으면 산을 바다에 던지는 일도 일어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믿음을 크기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는데요. 겨자씨 한 알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으로도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인데요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러분은 겨자씨 만한 믿음이 없으시나요? 겨자씨의 크기는, 노안이 벌써 와 있는 저 같은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 입니다. 제가 그래도 명색이 전도사인데, 그 정도 믿음도 없겠습니까? 그런데 산은 고사하고, 우리 집 앞에 세워진 불법 차량도 옮길 수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인구의 17%가 기독교인인데요. 이 성경의 구절을 알고 계신 분들이 산을 옮기는 기도를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전 국토의 약 70%에 달하는 산이 전부 바다로 옮겨 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 우리나라가 아니라 전세계,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산이 그 산이 아니지 않을까요? 산을 움직이는 믿음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다른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의 본문에는 비유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산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산을 움직이는 기도 여러분들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앞으로도 하지 마셔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믿음 하면 항상 떠오는 분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입니다. 제 아버지가 예수님을 언제 믿게 되었나 하고 제가 어제 밤에 계산해 보았습니다. 얼추 계산해 보니깐, 지금의 제 나이쯤 되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일주일에 6일 정도 드셨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그 모습을 보아서 싫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일 싫어 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딱 두 종류입니다. 술 먹고 주정하는 사람, 그리고 목소리 큰 사람입니다. 주정하는 사람을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는 짐작을 하시겠죠? 목소리 큰 사람을 또 싫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소심하기 그지 없다가도 술만 드시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싫습니다. 교회를 다니시고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한 달에 몇 번 또는 몇 달에 한 두 번 정도로 줄었습니다. 기적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고 나서 분가를 했는데, 집에서 전화가 오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주정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셨으면서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하신 아버지, 술을 드시고 계속 실수를 하신 제 아버지의 믿음으로 과연 천국에 가셨을까요? 정말 천국에 가신 건가요? (제가 이렇게 질문해서 당황스러우시죠? )
(1) 예수님의 비유,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나?
우리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의문이 생깁니다. 황당한 질문이 쏟아져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의 말씀도 그 중에 하나 인데요. 제가 다시 본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이 부분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에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적은 참 이상합니다. 보통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은 병든 자를 치료하시거나, 귀신들린 자를 회복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는 이적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 많은 이적 가운데 단 하나, 여기에서만 저주하는 이적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이 이적이 마태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이적입니다.
왜 마지막 이적이 저주하여 무화과 나무가 마르는 것으로 하셨을까? 그리고 이 이적을 마지막으로 행하시고, 왜? 더 이상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의문이 있어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믿음을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이적과 이어지는 비유가 아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여기에서 믿음은 어떤 정도의 믿음입니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의심하지 아니하면’에서 말하는 의심하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완벽하게 의심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해서, ‘나는 의심하지 않아’ 하고 생각하는 나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 정도의 의심을 말합니다. 원어에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정말 관대하지 않습니까?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는 이적은 사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상히 여겨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무화과 나무가 어떻게 이처럼 당장 말라 버렸을까요?”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의 믿음으로,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산 앞에 ou-toj 이 라는 지시대명사가 있습니다. 영어로 This Mountain 디스 마운튼 인데요. 지시대명사는 보통 어느 특정한 것을 가리키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 어떤 특정한 산을 가리킨 것입니다. 우리는 21절 한 절의 비유를 해석하기 위해서 3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첫째, 무화과 나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예수님이 가리키신 산은 어떤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셋째, 바다는 어디를 말하는 가 입니다. 이 3가지의 의미를 알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할 때 항상 구약의 언어를 사용하였습니다.
(2) 구약을 인용하신 예수님.
그러므로 구약에서 무화과, 산, 바다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무화과가 구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찾아 보았습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습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지니, 자기들이 벗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그들이 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화과 나무 잎이었습니다.
열왕기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면 산은 어떤 의미 일까요? 성경에서 산의 의미는 보편적으로 ‘성전’이나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 과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20절에서 모세는 율법을 시내산에서 받았습니다. 미가서 4:2을 읽어보면, 많은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시온 산으로 인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어느 산에 있습니까? 시온 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지막 종말의 날에 이방 나라들이 시온산을 향하여 모여 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사야2장2절
마지막 때에,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 가운데서 으뜸가는 산이 될 것이며, 모든 언덕보다 높이 솟을 것이니, 모든 민족이 물밀듯 그리로 모여들 것이다.
시온 산이 765미터인데요. 그 산이 히말라야 산처럼 높아진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권세가 높이 솟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어집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산의 의미는 권세나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1장 21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시온산,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즉 옮기어지는 산은 하나님이 임재 하는 산이기도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지위이기도 하고요, 이스라엘의 권위의 이름 이기도 합니다.
그 산이 바다로 옮겨집니다. 이사야 23:11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사 열방을 흔드시며 여호와께서 가나안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그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손을 펴시고 흔드는 것이 열방 입니다. 즉 성경에서 바다는 열방, 이방을 의미합니다.
(3) 비유의 해석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해석 해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 산, 바다에 대한 의미를 찾아 보았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주님, 무화과 나무가 어떻게 이처럼 당장 말라 버렸을까요?”
예수님이 비유로 답변하십니다. ‘너희들이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왜 그러냐 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전부 도망가거나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고 기준을 엄청 낮추어 주셨습니다.
“너희들에게 겨자씨처럼 이게 ‘씨’일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도 믿음이 있다면,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은 것’ 같은 일을 볼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 그 모든 권위가 이방인에게 옮겨지는 그 일도, 너희들이 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한번 반복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너희들에게 겨자씨처럼 이게 ‘씨’일까 하고 생각할 정도라도 믿음이 있다면,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은 것’ 같은 일을 볼 것이다. 그것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 그 모든 권위가 이방인에게 옮겨지는 그 일도, 너희들이 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22절의 의미도 해석 할 수 있습니다. 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하느냐? 그것은 “이방으로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님을 옮기는 그 사역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데로 다 행할 수 있는 능력과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그 일을 했을까요? 행하였습니다. 그 증거를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과 제가, 그 제자들이 믿고 구했던 결과입니다.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21장22절은 선교단체들이 사용하면 참 좋은 구절인데, 왜 사용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렵고 난해한 구절이지만 이 비유에는 숨겨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믿음 약한 우리에 대한 위로 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데, 왜 나는 그런 믿음조차 없는 걸까 하는 믿음에 대한 오해에서 풀려나셔야 합니다.
앞부분에 제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 드렸습니다. 황당하게 교회 다니시면서도 가끔 술을 드시고 실수하시는 모습도 숨김없이 말씀 드렸습니다. 교회 다니시고 나서 아버지가 변하신 것이 있었는데, 전에는 자기가 술 먹고 한 일에 대하여 기억도 못한다고 하였고 부인 하셨는데요.
교회에 다니시고 나서는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 교회 다니시면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운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죄책감을 가지지 마시고요. 드시더라도 주정을 하실 만큼은 마시지 마셔요’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잘 지켜지셨을까요? (네, 안 지켜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아버지가 천국에서 하나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기신 성경에 쓰여 있었던 아버지의 고백을 통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맡은 자에 대한 기준이 높습니다. 부자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아주 가혹한 기준으로 평가하십니다. 인간들 모두는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행한 행동과 그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아주 평범하기 그지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서, 하늘에서 어떻게 이루어질까에 있어야 합니다. 나의 소원을 위해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이 하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이제까지 모르고 했다면, 이제부터는 알고 계시니깐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을 다 받는 것은 나의 소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 할 지라도, 사랑으로 하셔야 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 보다 못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2) 우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성경의 비밀을 알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열심히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석하여 우리가 범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 믿음이 욕심이 되어 우리를 병들게 했습니다. 위대한 신앙을 가진 영웅들 만 산을 옮기는 사역을 행할 수 있다고 잘 못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습니다. 그 같이 행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은 완전한 믿음을 요구한다고 잘 못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매일 조금씩 성장하도록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우리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1. 브루스B바톤, 마크팩클러, 린다K테일러, 데이브R비어만, 『LAB 마태복음』 (서울:성서유니온 2009) pp631-35
2. 목회와신학,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3) pp340-49
3. 마이클윌킨스, 『NIV적용주석 마태복음』 (서울: 도서출판솔로몬 2009) pp779-81
4. DA카슨. RT프란스, 『 IVP성경주석:신약 』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5) pp128-31
5. 크레이그 키너, 『IVP성경배경주석:신약』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 pp115-20
6. 스튜어트K.웨버, 『Main Idea로 푸는 마태복음』 (서울: 도서출판 디모데 2005) pp475-78
7. 더글라스헤어, 『현대성서주석, 마태복음』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pp329-37
8. 제자원 편집, 『옥스퍼드 원어성경대전 마태복음』 (서울: 제자원 2005) pp62-74
9. 마이클윌킨스, 『마태복음(하)』 (서울: 도서출판솔로몬 2008) pp946-51
10. G.K 빌, D..A 카슨 편집, 『신약의 구약사용 주석 마태.마가복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pp207-9
11. 윤석준, 『101가지 성경이야기』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3) pp241-52
마태복음(Matthew) 17:14-27(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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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보산에서 내려오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신 후,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리고 한 톨의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저기로 옮겨라’고 하면 옮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 세대를 ‘믿음이 없고 타락한 세대’로 질책하십니다.
14. When they came to the crowd, a man approached Jesus and knelt before him.
15. “Lord, have mercy on my son,” he said. “He has seizures and is suffering greatly. He often falls into the fire or into the water.
16. I brought him to your disciples, but they could not heal him.”
17. “O unbelieving and perverse generation,” Jesus replied, “how long shall I stay with you? How long shall I put up with you? Bring the boy here to me.”
18. Jesus rebuked the demon, and it came out of the boy, and he was healed from that moment.
14. 그들이 사람들에게 오자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습니다.
15. “주여,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몸을 던지고 물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16. 그래서 이 아이를 주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고 타락한 세대여!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데려오너라.”
18.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은 아이에게서 나갔고 바로 그 순간 아이가 나았습니다.
14-18절 타보산에서 변화하시고 자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후,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으면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제자들도 그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믿음이 적고 비뚤어진(perverse) 세대’라고 질타하시고 그 소년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나무라시자 귀신은 소년에게서 나갔고 그 순간 아이는 치유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적고 순종하지 않은 이유로 이 세대를 ‘믿음이 적고 타락한 세대’라고 부르십니다.
늘 이 세상에서 나의 고통만 나의 힘든 것만 생각하고 있는 제가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주위를 보면 나보다 더 힘들고 아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고통만 붙잡고 있는 내가 가여운 생각보다는 늘 창피하고 싫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이 상황을 이해는 하고 있지만 깨달음이 아직 적은 탓이겠지요. 믿음이 크다면 내 안에 있는 귀신도 하나님이 ‘나가라’고 하면 치유될 것입니다.
타보산에 유명한 타보교회가 있는데 그 내부에 있는 벽화가 인상적입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인근에 사적지도 많은 것 같은데, 언덕의 정상 남동쪽에 대형 바실리카가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이 있습니다. 그 사진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biblewalks.com)
19. Then the disciples came to Jesus in private and asked, “Why couldn’t we drive it out?”
20. He replied, “Because you have so little faith. I tell you the truth, if you have faith as small as a mustard seed, you can say to this mountain, `Move from here to there’ and it will move. Nothing will be impossible for you.”
21. But this kind does not go out except by prayer and fasting.
22. When they came together in Galilee, he said to them, “The Son of Man is going to be betrayed into the hands of men.
23. They will kill him, and on the third day he will be raised to life.” And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grief.
19.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 다가와 따로 물었습니다. “어째서 저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20.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거라’ 하면 옮겨 갈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21. (없음)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언하심
22. 그들이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인자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19-23절 귀신을 왜 쫓아내지 못했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너의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라’ 하면 옮겨 갈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매일성경은 말합니다.
‘작은 믿음’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여전히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지 못한 반쪽 믿음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그 크기는 작지만, 그 자체로 생명을 품은 온전한 씨입니다. 앎과 믿음은 비례하지 않습니다. 적은 앎으로도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앎’과 ‘믿음’은 지난 주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신 ‘이해’와 ‘깨달음’의 다른 표현인 것 같습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고 계속 현재의 삶에 더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이 너무 나약한 것 때문입니다. 이번 주 교회에서 예배 전에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꾸려고 찾는데 핸드폰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모든 신용카드가 있는 암호도 걸려있지 않은 핸드폰을 잠시 약수물을 뜨면서 돌 위에 올렸는데 혹시 가지고 오지 않았나 걱정이 되 목사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핸드폰에 있는데 예배 후 식사도 못하고 바로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다행히 집에서 찾았는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 땅에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늘 현실에 있음을 인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다시 인자가 위선자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다시 예언하심니다. 이제 제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예언에 항의하지 않고 슬픔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24. After Jesus and his disciples arrived in Capernaum, the collectors of the two-drachma tax came to Peter and asked, “Doesn’t your teacher pay the temple tax?”
25. “Yes, he does,” he replied. When Peter came into the house, Jesus was the first to speak. “What do you think, Simon?” he asked. “From whom do the kings of the earth collect duty and taxes — from their own sons or from others?”
26. “From others,” Peter answered. “Then the sons are exempt,” Jesus said to him.
27. “But so that we may not offend them, go to the lake and throw out your line. Take the first fish you catch; open its mouth and you will find a four-drachma coin. Take it and give it to them for my tax and yours.”
24. 그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2드라크마의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2드라크마를 안 내십니까?”
25.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내십니다.” 베드로가 집으로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의 왕들은 누구로부터 관세와 주민세를 거두느냐? 자기 아들들이냐, 다른 사람들이냐?”
26.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둡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들은 세금이 면제된다.
27.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 처음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벌려 보면 1세겔짜리 동전 한 닢이 있을 것이다. 그 동전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24-27절 예수와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한 후 2드라크마를 징수하는 세리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묻습니다 (드리크마는 그리스의 은화 화폐의 단위로 1드라크마는 4.3g이며 신약시대에는 로마의 데나리온의 무게와 같았다고 합니다). 매일성경에 의하면,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성전세를낼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정체를 묻고 있는 세리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전세를 내기로 결정하십니다.
예수의 ‘이 세상의 왕들이 자신의 아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느냐’는 베드로에게 대한 질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거둔다는 대답에 ‘그 왕들의 아들들은 세금이 면제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이 세상의 메시아(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세금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세금을 바다에서 낚시를 해서 처음으로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면 4 드라크마, 즉 1세겔(금이나 은의 무게로 약 11.4g 또는 13g으로 추정)의 세금을 주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세금을 내실 이유가 없지만 어떠한 오해의 계기가 되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세상의 이치에 따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20절로 선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거라’ 하면 옮겨 갈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일 목사님 설명대로 겨자씨 한 알은 이미 우리 안에 뿌려졌는데 좋은 밭에 뿌려졌는지 아니면 딱딱한 포장도로, 가시덤불 아니면 돌밭에 뿌려졌는지 관리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타보산은 해발이 575m로 트레일 코스가 있네요. 기회가 되면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여행을 하루는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진들을 보니 올리브나무도 지천에 있더군요. 달리기식 성지순례를 하는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코스인 것 같습니다. 제 사진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 검색해서 배경으로 사용합니다. (이미지 출처: Mt. Tabor Serpentine Road – Photo from 1980 postcard: wanderello.it ( http://www.israelandyo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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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겨자씨만한 믿음을 간구합니다
권오석 목사/오사카희망교회 담임
| 마태복음 17:14~21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문 말씀은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변화산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자기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의 제자들은 고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잡고 꾸짖을 때 그 아이로부터 귀신이 나가고 그 후부터 정상인이 되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나 신념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겨자씨 한 알의 살아있는 믿음을 간구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겨자씨는 살아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씨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겨자씨만한 믿음은 생명의 믿음을 말합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그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과 직결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자라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지 않고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겨자씨는 가만히 있는 정체가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의 씨입니다.
2. 겨자씨는 성장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성장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도 아니합니다. 씨가 싹이 나고 잎이 줄기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고 결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장이 없는 신앙생활은 자신이 피곤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들을 힘들게 합니다. 성장이 없고 생명을 줄 수 없는 교회를 주님은 결단코 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3. 겨자씨는 희생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는 것을 희생이라고 합니다. 이 희생은 자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이것을 겸손이라고 말하고 희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기부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작은 희생 같이 보이나 온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자기희생이요 생명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4. 겨자씨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믿음입니다.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은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nothing shall be impossible to you)는 말입니다. 이 말은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능력은 오로지 그 효력이 자신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이 실현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큰 믿음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믿는 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할 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현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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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일예배 20170312)
성경본문 : 누가복음 17: 1~6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설교 :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구약에 보면 바사라고 알려진 대제국, 페르시아가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유럽을 정복하기 위해 일전을 벌이기 직전 일입니다. 다리우스 황제가 유럽의 맹주인 알렉산더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사신을 통해 선물을 보냈습니다. 알렉산더가 선물 보따리를 풀어보니 참깨가 잔뜩 들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궁리를 하는 중에 한 신하가 그 뜻을 풀어줍니다. “폐하! 다리우스의 군대가 깨와 같이 많으니 까불지 말고 항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알렉산더 대왕은 작은 봉투에다 겨자씨 한 톨을 넣어 다리우스 왕에게 보내게 됩니다. 다리우스 역시 그 겨자씨 한 톨을 보고 신하들에게 무슨 뜻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폐하, 알렉산더의 군대가 작아도 무섭고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후에 전쟁이 일어났고 결과는 겨자씨 한 톨을 보낸 알렉산더의 승리가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십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살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라고 말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 17:6) 오늘 이 말씀을 받들 때에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안에 가득 넘치기를 바랍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정말 겸손한 사람은 대개 자신이 겸손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랑하는 마음을 깨뜨리시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겸손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 믿음 없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참 ~ 저 사람은 이렇게 잘 못되었네, 저렇게 잘못되었네~’라고 판단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부로 사람에게 비판합니다. 꾸짖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으로 덮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다가 그 사람의 믿음을 약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연자맷돌이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무섭게 경고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함부로 판단하고 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식으로 인해 꽤 자만해 있었답니다.
한번은 뱃나루에서 사공에게
“그대는 철학을 아느뇨? 철학을 알아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화가 난 사공은 얼마간 배를 저어 가다가 배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소크라테스를 보고
“그대는 수영을 할 줄 알아? 수영을 할 줄 알아야 사람이지.”라고 사공은 말했습니다.
그 일에 크게 깨달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를 남겼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모른다 하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알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죄로 인해 영원히 지옥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죄없다고 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숨 버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몇 번이나 십자가에 못박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깊어질수록 우리 자신에게 더 철저해하야 합니다. 교만해지려하면 나 자신을 더 쳐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내가 입은 은혜를 떠올리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거듭 용서하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5~6절입니다.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5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그 내용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의 거룩한 요구에 예수님께서 6절에 대답하십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구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고 합니다.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겨진다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는 ‘절망’입니다.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내 믿음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절망감과 좌절감입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주시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해도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데 내게 믿음이라는 것만 있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여겨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하는 도구요 방법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은 만병통치가 되며 믿음은 만사형통을 만드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대한 오해는 본문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더하여 주소서’라는 말은 증가하게 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increase’ 나 ‘add’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믿음에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그들이 믿음을 양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믿음이 양적으로 증가하고 더 많아지게 하여 주소서라는 요구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더라면’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이 의미는 믿음은 양이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며 믿음에 대한 너희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진정성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즉 참 믿음이냐 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크기로 그 능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참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겨자씨’를 가지고 예수님은 설명하셨을까요?
겨자씨는 작지만 견고하고 작지만 생명력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주님이 겨자씨는 작지만 반응하는 씨앗임을 말씀합니다. 겨자씨를 땅에 심어보세요. 땅 속에서 꿈틀거리며 싹이 나옵니다.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겁니다. 성장하는 겁니다. 여기에 겨자씨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죽은 씨앗은 달라요. 반응하지 않습니다. 죽어있는 화초나 나무에 물을 줘 보세요. 살아나질 않습니다. 죽어 있는 것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에는 하나님의 응답도 없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헤쳐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가 들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이 들려도 믿음이 죽어있으면 반응이 없습니다. 조금만 반응을 보여도 구원을 얻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체험할 수 있는데 죽은 나무처럼 전혀 반응이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겨자씨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믿음이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단 말을 듣자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가슴이 뛰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요동쳤습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어요. 주님의 옷을 와락 붙잡았습니다. 그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로부터 능력이 나타나 그녀의 혈루의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에 예수님이 반응하셨던 겁니다.
바디메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씀을 듣자 주님을 만나면 자신의 눈이 떠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슴이 요동쳤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나가시자 멀리서부터 소릴 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살아있는 믿음이에요. 반응하는 믿음입니다. 그 소릴 듣고 주님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고 그에게 다가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떠졌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이렇게 꿈틀거리며 반응합니다. 작은지, 크던지 상관없습니다. 살아있어야 이러한 믿음에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고 어려운 일도 해결하는 축복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이 바로 우리를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겨자씨 믿음은 참 작은 믿음입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 심겨지면 새들이 더위를 피하고 둥우리를 틀 정도로 큰 그늘을 만듭니다. 이처럼 작지만 많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담고 있는 것이 겨자씨의 생명력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씨 믿음은 작지만 매우 꽉찬 진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거창한 믿음이 아닙니다.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허풍스런 믿음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자랑할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시련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굳건히 싹을 틔우고 자라는 믿음, 자라서 주위의 생명을 움트게 하는 믿음이 겨자씨 믿음입니다. 겨자씨 믿음은 작습니다. 그러나 작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보물을 숨겨두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겨자씨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이 사순절 기간동안 지내시면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주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우리의 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가 속여서 사단의 올무에 넘어지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늘 주님만 바라보겠습니다. 이것을 늘 잊지 말고 살아가도록 주님 함께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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