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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김광섭 – 다음블로그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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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저녁에” – 브런치
김광섭, “저녁에”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밤이 깊을수록 · 별은 밝음 …
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7/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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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저녁에 해설 – 네이버 블로그
어디서 다시 만나는 것을 꿈꿉니다. 나와 별의 정다운 만남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입니다.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9/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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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김광섭, 해석 / 해설 / 분석 / 정리 – 시와 소설 수능국어
별은 밝음 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
Source: barlo.tistory.com
Date Published: 6/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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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시 <저녁에>와 김환기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인 김광섭 & 화가 김환기 김환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미술화가이다. … 김광섭 시 <저녁에>와 김환기 그림.
Source: bookhappy.tistory.com
Date Published: 5/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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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해설/ 김광섭 – 국어문학창고
저녁에 / 김광섭 요점 정리 지은이 : 김광섭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어조 : 간절한 소망이 담겨 …
Source: seelotus.tistory.com
Date Published: 4/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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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_김광섭(작품해설) – O늘의 오답노트
‘저녁’은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 즉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면서 ‘밝음’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저녁’은 ‘별’과 ‘나’가 밝음과 …
Source: without-an-answer.tistory.com
Date Published: 5/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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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저녁에 해설 해석 분석
문학을 분석하는 선생, 문분선 김광섭, 저녁에 해설 해석 분석 오늘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해설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Source: munbunseon.tistory.com
Date Published: 8/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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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해설]저녁에 – 김광섭 – – 꿈꾸는 욜빠
저녁에 – 김광섭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 표현. * 불교적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만남과 …
Source: rains2005.tistory.com
Date Published: 12/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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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7.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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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하늘 통신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시집 『겨울날』 (창작과비평사, 1975)
………………………………………………….
지난 주말 주산지에서의 예기치 않은 별 세례는 실로 장엄하고 화려한 우주적 체험이었다. 해는 지고 삭의 절정기에 든 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산속에 폭삭 들어앉은 주산지는 오로지 별밖에 볼 일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들어붓기 시작한 별은 이윽고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 올려다 본 나뭇가지 사이마다 별들이 걸리고 맺혀 거대한 연작 트리를 보는 듯했다. 모처럼 만난 풍경의 장관이었다. 오래 들여다볼 여가는 없었지만 별 하나에 집중했다. 그 순간 그 별을 쳐다본 사람은 내가 유일했겠으므로 상념은 깊어갔다.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저녁에’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떠오른 상념을 노래한 이 시가 처음 발표된 건 <월간 중앙> 1969년 11월호였다. 시인은 이 별을 통해 사람의 인연을 생각하고 정답고 소중한 존재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모두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저 별들 하나하나에 머물며 반짝인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서는 저 별들 속에 섞일 것이다. 별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모래알의 개수만큼이나 어질어질하게 많다고 한다. 저렇게 명멸하는 무리 가운데서 우리는 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이 말에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안타까움을 예견하는 동시에 다시 만나고 싶다는 짙은 소망의 의미가 함께 녹아있다.
인간이 가끔 성찰할 수 있는 것은 하늘에 달과 별이 있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하다’란 뜻의 영어 ‘consider’가 있다. con은 함께 라는 뜻이며 sider는 star가 변한 말이다. 즉 consider는 별을 보면서 함께 숙고한다, 별을 바라다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형용사 considerate는 ‘지각 있는’ ‘분별 있는’이란 뜻이다. ‘선탠’이나 ‘문텐’처럼 인간에겐 ‘별탠’도 필요한 까닭이다. ‘별탠’은 반드시 ‘저녁에’ 어둠으로 덥혔을 때라야 볼 수 있다. 그날 밤 나와 마주보기 했던 별도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다. 아니 영원히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다. 이런 스침의 우연, 하지만 절대적인 운명의 연결망이 바로 인생의 판도가 아니랴.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만남은 곧 헤어짐을 의미하는 ‘회자정리’ 아프지만 빛과 어둠이 교차되는 한 진실이다. 이 시는 흥겨운 창법이 어울린다고 생각진 않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유심초의 노래가 있고(개인적으로는 이소라 김현철이 부른 ‘그대 안의 블루’의 멜로디가 훨씬 정서적 분위기에 닿아있다고 생각함) 같은 제목을 붙인 수화 김환기의 유명한 그림도 있다. 그는 문인들과의 교류가 깊어 문학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1970년 작품으로 친구 김광섭이 뉴욕에 있는 그에게 부쳐준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목포 앞바다의 섬 안좌도가 고향인 김환기는 화폭에다 애절하고 그리운 고향 모습을 이미지화하여 담았다는 설도 있다.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저녁에’를 읽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고향을 떠올렸던 것이다. 고향 바다 말고도 눈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들을 그려 넣었다. 화가의 아내는 재혼으로 얻은 김향안이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다녔던 그녀는 이상의 아내였다. 20세 때 26세인 이상과 결혼했으나 이상은 4개월 만에 요절하고 만다. 딸 셋을 둔 김환기와 결혼하면서 변동림이란 본명도 버렸다. 시인과 화가는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남편들이다. 변동림의 남편 이상과 김향안의 남편 김환기는 빼도 박도 못하는 동서지간이었다.
미술평론가들은 이 그림의 수많은 사각형의 점들은 이 지구, 더 나아가 우주에 있는 숱한 존재들을 의미하며 그 점들의 모양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존재들이 각각의 개성을 지닌 존재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점들 사이에 간극이 있고 떨어져 있는 것은 지금 현재는 만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에는 현대의 거대한 네트워크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단절감과 고립감도 엿보인다. 결국 수화의 이 그림은 물질문명에 밀려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린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 것이다. 또한 얽히고설킨 수많은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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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저녁에 해설
작품 읽기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 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김광섭, 「저녁에」
감상하기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천상적 존재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존재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지상적 존재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나와 별의 특별한 관계 형성
1,2행과 3,4행 대구
지상의 나와 천상의 별의 만남(인연)
밤이 깊을 수록
저녁, 함축적 의미 파악 중요
별이 나타나는 시간, 인간의 황혼의 시간, 내면적 성찰의 시간
이별 단절의 시간, 숙명적 고독의 시간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별은 아침이면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나는 어둠이면 사라지는 존재
대구를 통해 별과 나의 관계의 소멸을 말함
(죽음을 앞둔 노년)
별과 나의 이별
이렇게 정다운
별과 나의 다정한 관계, 내가 원하는 참된 관계
너 하나 나 하나는
별과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만날 수 없다가 아니라 만날 수 있다는
소망 강조(설의법)
이별한 별과 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은
불교의 윤회설(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돌고도는 것, 인연설(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과 관련
1,2연에서 별의 모습을 3연에서 소망을 담은 선경 후정의 구조
별과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
정리하기
갈래
자유로운 형식의 자유시
개인의 마음을 담은 서정시
성격
서정적, 관조적, 명상적, 성찰적
주제
친밀한 관계에 대한 소망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내면 성찰
특징
이 시는 별을 소재로 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면서
현대인이 느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의 관계를 대구와 대조를 통해 의미 강조
별-나, 밝음-어둠, 천상-지상의 대응 구조
1,2연에서 별의 모습을 3연에서 소망을 담은 선경 후정의 구조
활동하기
활동> 이 시의 영감을 받아 그린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림을 보고 문학과 다른 인접 분야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저녁에 – 김광섭, 해석 / 해설 / 분석 / 정리
1연에서는 별과 나와의 특별한 만남을 이야기 합니다. 많은 중에 별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별을 쳐다 보는 것이죠. 이렇듯 별과 나는 특별한 만남을 가집니다.
2연에서 시간이 흐르고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며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으로 이별하게 됩니다.
3연에서 화자는 너와 나와의 관계를 정답다고 말하며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을 드러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르는 표현은 불교의 윤회설, 인연설과 연관되어 지금 헤어졌어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화자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별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 친밀한 관계 회복의 소망을 드러내는 이 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깨달음을 다룬 시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떄는 ‘밤’은 ‘만남과 이별의 시간’을 ‘별’은 나에게 특별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죠.
이런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화자는
1. 대구와 대조를 사용하여 시적 상황을 드러냅니다.
대구법은 서로 유사한 구절을 병치하여 짝을 이루어 강조하는 기법으로 이 시에서는 1연과 2연에서 별과 나에 대해 대구법을 이용해 표현함으로써 화자가 나타내려는 바를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2. 유사한 문장구조와 동일한 단어의 반복으로 의미를 강조하고 운율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전문해석을 통해 학습을 마무리해보도록 합시다.
김광섭 시 <저녁에>와 김환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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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62, 캔버스에 유채
시인 김광섭 & 화가 김환기
김환기는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미술화가이다.
그가 미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시인 김광섭이 멀리 있어 만나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를 적어 보내주었고,
그 시를 바탕으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그렸다고 한다.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집 『겨울날』에서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저녁에>에서
이 시는 1969년에 발표되었다. 밤하늘 뭇별들 가운데 단 하나의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지상의 군중 속의 단 하나의 존재인 나는 그 별을 올려다본다. 그러나 빛에 둘러싸이면 별은 사라지고, 나는 어둠이 깊어지면 사라진다. 그리고 별과 나와의 만남을 미래에 기약할 수도 없다. 이 시는 높은 고독과 애틋한 그리움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짧은 만남과 아득하게 긴 이별을 생각하게 한다.
김환기는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따서 작품의 제목으로 삼고, 외롭고 푸르고 작은 점들을 캔버스에 총총히 무수하게 많이 별들처럼 찍어 거대한 우주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알려진 대로 유심초는 이 시를 가요로 불러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불교신문
유심초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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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 해설/ 김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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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 정리
지은이 : 김광섭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어조 :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사색적 어조
제재 : 별
구성 : 선경후정의 방식(1,2연에서 별의 모습을, 3연에서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
1연 : 별과 나와의 친밀한 교감
2연 : 친밀한 관계의 소멸과 인간의 고독
3연 :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
주제 :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성찰,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소망, 생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생의 의미의 새로운 발견
표현 : 대응 구조(별 하나 – 나, 밝음 – 어둠, 천상 – 지상)
출전 : ‘겨울날'(창작과비평사刊·1975년)
내용 연구
저녁에[‘저녁’은 ‘나’와 ‘별’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해 주는 조건과 상황을 만들어 주고, 내면적 성찰의 시간이며, 생의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며, 안식과 편안함, 단독자로서의 고독감을 느끼는 시간임]
저렇게 많은 중에서[‘저렇게’라는 원칭을 써서 ‘별’과 ‘나’가 떨어져 있는 거리감을 말함]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별 하나와 ‘나’의 관계는 선택적임]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별’과 ‘나’의 특별한 관계로 서로 의미 있는 존재로 변함] – 별과 화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 대구법 – 별과 나의 교감[1연에서는 고단하고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의 하늘에서 빛나는 ‘별’과 인간인 ‘내’가 서로 만나 교감하는 모습이 제시된다. 수많은 별들 중의 어느 한 사람인 화자가 서로를 응시하는 존재로 대응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는, 자신들에게 소중한 존재를 서로 위로하고 이끌어 주면서 삶을 계속해서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인간사의 진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밤[평화와 외로움]이 깊을수록 (인식과 외로움의 이중적 의미)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새벽에 별이 흐려지는 상황으로 친밀한 관계의 소멸]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늙고 죽는 인간의 운명을 암시) 새벽이 다가오면서 별빛이 흐려지고 둘 사이의 관계가 끝을 맺는 상황으로 인간의 숙명적 비극성을 표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밤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존재인 별은 날이 밝으면 사라지고, 인간은 ‘어둠 속’이라는 시어가 보여 주듯이 삶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 늙고 죽는 숙명적인 고독을 지니고 살다가 사라진다는 의미임. 대구, 대조법] – 친밀한 관계의 단절 – 숙명적 고독 속에 살아가는 존재[2연에서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다가 새벽이 다가오면 사라지는 별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헤치며 살다가 늙고 병들어 홀로 쓸쓸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암시되고 있다. 화자는 현대 사회에서 한 인간이 인간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만 하는 ‘군중 속에서의 고독’, 즉 인간 관계의 단절과 고립적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현대의 도시와 관료화된 조직 속에서 서로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대상과 인연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불교의 윤회설에 바탕을 둔 표현으로 미래에 대한 화자의 기대와 희망이 잘 나타나 있고 따뜻한 인간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화자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의 소망 – 유한적 인생으로서의 존재론적 생의 인식[3연에서 화자는 친밀한 관계가 소멸한 존재들 사이에서 ‘정다움’이라는 또 다른 평범한 진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런 ‘정다움’이 존재하는 한 대비적 존재인 인간(‘나’)과 자연(‘별’)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이해와 감상
현대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인간 관계의 단절과 고립적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하늘에 무수한 별이 있지만 단 하나의 별과 정다운 관계를 맺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저녁이라는 풍경으로부터 현대인의 고독을 느낀 화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을 간결한 문체로 표현한 작품이다. 소외와 단절 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도 하지만 물질 문명에의 힘이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삶으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1
이산(怡山) 김광섭(金光燮)은 오염되어 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별을 바라다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로 시작되는 그 詩題가「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저녁에」의 시를 이끌어 가는 언술은「별」(천상)도「나」(지상)도 아니다.「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나」가 아니라「별」이다. 나는「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저녁에」의 경우도「별」이「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이」,「그」,「저」의 지시 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저렇게(별)」보다「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저렇게 많은 별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이렇게 정다운 별 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異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 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 하나 나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였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 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있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暮)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 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해도 우리는「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정다운 너 하나 나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몇 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 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령 교수의 글에서)
심화 자료
시간적 배경의 상징적 의미
‘밤’은 고단한 일상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안식과 평안함을 주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로움과 고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밤’을 대표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별과 이와 대조되는 인간의 현실적 고독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은 서로 바라보면서 위안을 삼고, 그 위안 속에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 나가는 인간사의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저녁에’에 나타난 ‘저녁’의 이미지
저녁이라는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 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二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김환기 화백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에서 얻은 모티브를 바탕으로 1970년에 제작한 점화로, 그 해 한국 일보에서 주최한 제 1회 한국 미술 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붙인 그의 작품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오묘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향과 친구를 생각하는 매우 동양적인 사고와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국내 미술인들의 놀라움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이 시처럼 별을 제재로 한 다름 작품을 찾아보고, 시인의 ‘별’을 노래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김광섭의 ‘저녁에’처럼 윤동주의 ‘별 헤는 밤’도 ‘별’을 통하여 아름다운 이미지들을 환기하고 있는 시이다. ‘저녁에’의 화자는 ‘별’과의 교감을 통해 고독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길 기원하고 있다. 한편 ‘별을 헤는 밤’의 화자는 ‘별’ 하나 하나에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새겨 넣으면서 자신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는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어린 시절처럼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순수한 이상 세계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외롭고 괴로운 세계로 변해 버린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언덕 위에 쓴 이름자를 흙으로 덮어 버린다.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
— (전략)
김광섭의 이 시엔 별과 내가 교통하는 시적 공간이 있다.
그 시적 공간은 한없이 밝으면서 또 한없이 어두운 그런 공간이다.
모든 인공적인 문명은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진, 그러나 깊디깊은,
맑은 샘물이 출렁이는 그런 원초적 공간이다.
우리는 순간 상상력이 된다. 온몸이 귀가 되어 소리들을 듣는다.
아니 온몸이 눈이 되어 형상들을 본다. 별의 눈썹들과 교통하는
상상력이 된다. 모은 공간이 상상력이 된 당신들은 풍선처럼 떠오른다.
둥실 떠오른 당신들은 만난다.
잘디잘게 짓뭉개진 정신에 스스로 정신이 깨끗해지는 ‘시치료’를 하면서 말이다.
시적 공간은 시적 인식을 하게 하는 순간의 공간이다.
시적 인식의 순간, 공간은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특별하게 보게 하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특별하게 보게 한다.
시적 인식의 순간, 공간은 당신에게 집히며 순간, 시간과 시간 사이의
하늘에 둥그러니 걸린다.
그순간 우리는 특별한 자신의 모습과 특별한 너의 모습과 특별한 추억의 모습,
그리고 특별한 자기 미래의 모습도 본다.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산다. 그 순간 때문에 산다.
모든, 먹이를 먹는 다른 동물들과 우리를 다르게 하는 바로
그 어떤 것 – 인식의 순간의 공간이다.
시적 인식의 순간의 공간,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가득 별로 차는 것을 본다.
당신은 결코 사라지는 별이 아니다.
다시 뜨는 저 구름 뒤에 있는 별이다.
부재하므로 존재하는 얼굴들.
시에는 분명 ‘그런 것’이 있다.
그런 상상의 내밀한 커튼이.
그 커튼이 있으므로 우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략)
[출처 :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72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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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시구 풀이
1. 저렇게 많은 ~ 하나를 쳐다본다.
수많은 별 중 하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나’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으로, 별과의 소중한 인연, 별과 나누는 교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 ‘내려다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2. 밤이 깊을수록~ 어둠 속에 사라진다.
시적 화자와 별은 필연적으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별은 날이 밝으면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서 작아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영원의 긴 흐름 속에서 ‘사라지는’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3. 이렇게 정다운~ 다시 만나랴.
시적 화자는 정다운 ‘별’과 ‘나’의 인연이 이어져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대, 소망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에 영원한 거리가 개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분명 존재의 고절함을 환기시키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별 하나’와 그 별 하나를 쳐다보는 ‘나’의 지향에 의해 둘은 하나로 묵입니다. 그리하여 밝음과 어둠의 양극단이 따뜻한 화해와 결속감으로 유지되어, ‘정다운 우리’로 강조되고 마침내 죽음 저 너머 세계에까지 만남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불교 인연설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 작품 해설
밤은 고단한 일상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과 평안함을 주는 시.공간이면서 한편으로 외로움을 주기도 하는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밤을 대표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입니다.
이처럼 이 시에는 어둠 속에서 비로소 빛나는 별의 빛남과 이와 대조되는 인간 현실의 고독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위안을 삼고, 그 위안 속에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 가는 인간사의 진리를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아울러 시적 화자인 ‘나’는 이런 진리를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발견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이에 의존하며 살았던 인간들은 현대의 물질 문명이 지배하는 속에서는 점점 그 거리가 멀어져만 갑니다.
하나는 밝음 속으로, 하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이런 현대인의 생활 속에서 또 다른 평범한 진리를 찾아내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습니다.
즉, 사라지는 존재 사이에서 정다움을 찾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다운 이별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표현되었습니다.
이런 재회의 기대는 불교적 윤회관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 물신화해 가는 인간사에서 그래도 살 가치가 있다는 활력소를 시인을 포함한 현대인 모두에서 불어넣고 있습니다.
● ‘저녁’의 의미
‘저녁’은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 즉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면서 ‘밝음’이 끝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저녁’은 ‘별’과 ‘나’가 밝음과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별과 헤어짐이라는 운명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듯한 관계를 소망하는 시적 화자에게는 현대인의 숙명적인 고독과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 ‘인연’에 대한 시인의 생각
시인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그 별과 ‘나’가 인연이라는 끈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이란 고독한 존재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서든 그 누군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cf 작품해설을 정리하다 보니,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송혜교와 박보검이 함께 다리 밑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을 보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나왔던 것 같았거든요. 찾아 보니, 역시 그 그림으로도 표현된 작품이더군요.
김광섭, 저녁에 해설 해석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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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분석하는 선생, 문분선
김광섭, 저녁에 해설 해석 분석
오늘은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를
해설 해석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불교 교리 중에 제가 인상 깊게 느낀 부분이
‘회자 정리 거자 필반’입니다.
회자 정리,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거자 필반, 이별이 있으면 반드시 만남이
있다는 의미지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설을 잘 말해주고
있는 말이지요.
이걸 사람들이 연애사에 인용해서 많이들
말을 하는데요. 사실 원래 의미는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존재와 만남과
이별을 하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는 소중하며 그래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지요.
뭐 이별 후에 새로운 사랑이 반드시
찾아온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으로 여러분들도
짐작을 하셨겠지만, 김광섭의 ‘저녁에’는
존재와 존재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저녁에 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무수한 별들 중의 한 별과
지상의 무수한 생명체 중에 한 명인 화자가
만난 것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을 느끼며
그 관계에 대한 친밀함을 느끼고 있지요.
그러나 그 관계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밤이 깊어지고 아침이 오면 별은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 모든 생명체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요.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이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존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요.
그러니 우리 모두,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소중할 수밖에 없으며,
또 나란 존재 자체도 소중하지요.
정리하면 이 작품은 관계에 대한 놀라움과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해설에
잘 나와있습니다.
편집과 수정이 가능한 문서 파일 형태의
2022년 EBS 수능특강 해설 자료가 필요
하시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munbunseon.tistory.com/124
핵심 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성격: 관조적, 사색적
운율: 내재율
주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철(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소망)
특징:
시각적 심상이 중심이 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 전개 → 추보식 구성
선경 후정의 구조
별과 ‘나’의 상황을 대비시켜 시상을 전개
비슷한 문장 구조의 반복(대구)으로 운율 형성
상세 설명
해설 이미지를 마우스로 클릭하시면
잘 보입니다.
김광섭, 저녁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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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해설]저녁에
휴리스틱31
저녁에
– 김광섭 –
해 설
[개관 정리]◆ 성격 : 서정적, 관조적, 사색적, 미래지향적, 명상적
◆ 표현
* 불교적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인식을 노래함.
*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사색적 어조
*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 선경후정의 구성 방식(별의 모습 – 안타까운 심정)
* 대응 구조(별 하나 – 나, 밝음 – 어둠, 천상 – 지상)
* 마지막 행에서 의문형으로 끝냄으로써 시적 여운을 남기고 간절한 소망을 드러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저렇게 → 별과 화자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 별과 나의 관계는 선택적인 관계임.
*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 별과 화자의 관계를 특별한 관계, 친밀한 관계, 의미있는 관계로 만듦.(대구법)
* 밤이 깊을수록 → 평화로움과 외로움을 동시에 깊이 인식함.(밤은 이별의 시간을 의미함.)
*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 새벽에 별이 흐려지는 것으로, 친밀한 관계가 서서히 소멸하는 상황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늙어서 죽어야 하는 인간의 비극적 숙명의 상황 의미
* 별은 밝음 속에 ~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새벽이 다가오면서 별빛이 흐려지고 둘 사이의 관계가 끝을 맺는 상황으로 인간의 숙명적 비극성을 표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밤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존재인 별은 날이 밝으면 사라지고, 인간은 ‘어둠 속’이라는 시어가 보여 주듯이 삶의 역경과 시련 속에서 늙고 죽는 숙명적인 고독을 지니고 살다가 사라진다는 의미임.(대조와 대구법)
* 3연 → 대상과의 인연은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불교의 윤회설에 바탕을 둔 표현으로 미래에 대한 화자의 기대와 희망이 잘 나타나 있고 따뜻한 인간 관계를 회복하길 바라는 화자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친밀한 관계가 소멸한 존재들 사이에서 ‘정다움’이라는 또 다른 평범한 진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런 ‘정다움’이 존재하는 한 대비적 존재인 인간(‘나’)과 자연(‘별’)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 제재 : 저녁의 별
◆ 주제 : 친밀한 인간 관계에 대한 소망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성찰
[시상의 흐름(짜임)]◆ 1연 : 별과 나와의 친밀한 교감
◆ 2연 : 친밀한 관계의 소멸과 인간의 고독
◆ 3연 : 다시 만나고 싶은 소망과 기대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현대 산업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립감을 미국의 사회학작 데이비드 리스먼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인간 관계의 단절과 고립적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하늘에 무수한 별이 있지만 단 하나의 별과 정다운 관계를 맺고 있는 화자의 모습은 ‘어린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저녁이라는 풍경으로부터 현대인의 고독을 느낀 화자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간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을 간결한 문체로 표현한 작품이다. 소외와 단절 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기도 하지만 물질 문명에의 힘이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삶으로 인해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별’에 투영된 현대인의 모습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의 어느 한 별이 지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화자와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 중에 유독 어느 한 별만을 지켜보고 있는 화자와, 지상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화자만을 지켜보고 있는 그 별은 일대일의 친밀한 대면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는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현대의 거대 조직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단절감, 고립감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다가 밝음이 다가오면 사라지는 별의 모습은 온갖 어둠을 헤치며 살아가다가 홀로 죽어 가는 인간의 숙명적인 고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결국 이 시는 물질 문명에 밀려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외로운 자화상을 그려 준 것이라 볼 수 있다.
◆ <저녁에>에 나타난 ‘저녁’의 이미지
저녁이라는 어둠의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 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二次元)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 감상을 위한 더 읽을거리
이산 김광섭은 오염되어 가는 지상의 문명을 고발한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이면서도 동시에, 천상의 별을 노래한 <저녁에>의 시인이기도 하다. 지상과 천상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시의 세계에서는 한 울타리 속에 있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까닭이다.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것을 영어로 컨시더(consider)라고 하지만 원래의 뜻은 ‘별을 바라다 본다’라는 말이다.
옛날 사람들은 실제의 바다든 삶의 바다이든 별을 보고 건너갔다. 점성술과 항해술은 근본적으로 하나였던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천문학)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밤 하늘의 별이요, 마음 속의 시(도덕률)’라는 칸트의 경이(驚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러니까 어둠이 와야 비로소 그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를 나를 내려다 본다.’로 시작되는 그 시제(詩題)가 <저녁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시의 의미를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알 수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저녁에>의 시를 이끌어가는 언술은 ‘별(천상)’도 ‘나(지상)’도 아니다.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라는 언술의 주체는 ‘나’가 아니라 ‘별’이다. 나는 ‘보다’의 목적어로 별의 피사체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의 다음 시구에서는 지상의 사람이, 그리고 ‘나’가 언술의 주체로 바뀌어 있다. 시점이 하나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복합되어 있기 때문에 하늘과 땅, 별과 사람, 그리고 ‘내려다 보다’와 ‘쳐다보다’가 완벽한 대구를 이루며 동시적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과는 달리 언어로 표현할 때는 불가피하게 말을 순차적으로 배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그 순위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저녁에>의 경우도 ‘별’이 ‘나’보다 먼저 나와 있다. 즉 별이 먼저 나를 내려다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시선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이다. 첫 행의 경우 시점과 발신자가 별쪽으로 기울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점의 거리를 결정하는 ‘이’, ‘그’, ‘저’의 지시대명사를 보면 별의 경우에는 ‘저렇게 많은 것’이라고 되어 있고, 사람의 경우는 ‘이렇게 많은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시점 거리가 ‘저렇게(별)’보다 ‘이렇게(사람)’가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르트르처럼 본다는 것은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보고 남이 나를 본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격렬한 싸움인 것이며, 인간의 삶과 존재란 결국 이러한 눈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명제 ‘타자(他子)는 지옥’이란 말이 태어나게 된다.
그런데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그 시선이 그러한 눈싸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정다운 것이 되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저렇게 많은 별 중에’라고 불렸던 별이 나중에 오면 ‘이렇게 정다운 별 하나’로 바뀌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저렇게’에서 ‘이렇게’로 변화하게 만든 그 시점은 누구의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것이 <저녁에>라는 시 읽기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다.
답안을 퀴즈 문제처럼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직설적으로 펼쳐보면 그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시의 제목처럼 ‘저녁’이라는 그 시간이다. 별이 나를 내려다본 것이나 내가 별을 쳐다본 것이나 그 이전에 저녁이 먼저 있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둠이라는 그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내려다보는 것도 쳐다보는 것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저녁이란 어둠이 시작이 운명처럼 나와 별을 함께 맺어주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저녁이라는 한 순간의 시간 속에서 우연처럼 별 하나와 나 하나가 만난다. 이러한 우연, 그러나 절대적인 운명과도 같은 이 마주보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차원과 그 절대 거리를 소멸시키는 저녁인 것이다. 저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인간의 삶 그것처럼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래서 저녁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를 탄생시키는 시간이지만 동시에 그것들의 사라짐을 예고하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저녁은 밤이 되고 새벽이 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라는 둘째 연의 시구이다. 만남은 곧 헤어짐이라는 회자 정리(會者定離)의 그 진부한 주제가 여전히 이 시에서 시효를 상실하지 않고 우리 가슴을 치는 것은 그것이 시적 패러독스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빛과 어둠의 정반대 되는 것이 그 사라짐의 명제 속에 교차되어 있다. 그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이면서도 사라지는 시간과 장소는 빛과 어둠이라는 합칠 수 없는 모순 속에 존재한다. 저녁의 시간이 빛과 어둠으로 다시 분리될 때 나와 별은 사라진다. 이것이 슬프고 아름다운 별의 패러독스이다.
그러나 김광섭은 한국의 시인인 것이다. 사람들은 멀고 먼 하늘에 자신의 별을 하나씩 가지고 살아오고 있다고 믿는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천문학의 별을 배우기 전에 멍석 위에서 별 하나 나 하나를 외우던 한국의 어린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별의 패러독스는 ‘타자(他子)는 지옥이다.’가 아니라 ‘타자(他子)는 정(情)이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한국인은 윤회의 길고 긴 시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나는 또 하나의 저녁을 기다린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그렇게도 오래오래 남아 있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마지막 그 시구이다. 그 시구가 화가와 만나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극작가와 만나면 한편의 드라마가, 그리고 춤추는 무희와 만나면 노래와 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만나서는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만남이 된다. 저렇게 많은 별 중의 하나와 마주보듯이 박모(薄募)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지상의 별 하나와 만난다.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도 모르는 운명의 만남을 …….
그리고 그렇게나 먼 빛과 어둠의 두 세계로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시구를 잊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만나랴’라는 의문형으로 끝나 있지만 그러한 시적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의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몇 광년의 먼 거리를 소멸시키고 영원히 마주보는 시선을 어떤 시간도 멸하지 못한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고 내가 별을 쳐다보는 수직적 공간,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는 저녁의 시간……. 그 순간의 만남을 영원한 순환의 시선으로 바꿔주는 것이야말로 시가 맡은 소중한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어령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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