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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풀어야 할 숙제. 가정, 부부, 형제, 자매, 식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동원 목사 명설교 다시보기 ‘에베소에 전해진 가정복음’
CBSTV 다시 보는 명설교 더울림 The Impressiv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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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01) 설교(12편) – 네이버블로그
우리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바르게 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들어오셔서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9/2021
View: 395
가정의달 설교6편 – 다음블로그
요셉의 효행을 본받읍시다 (창 50:1-9)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아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16/2022
View: 9810
가정의 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 한국성결신문
가정의 달 설교는 삼사대가 한가족을 이루는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갓난 아기를 두고 있는 신혼부부 가정, 자녀를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노부부 가족 …
Source: www.kehcnews.co.kr
Date Published: 6/13/2021
View: 7456
5월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 뉴욕어린양교회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가정에 대한 …
Source: nylfc.org
Date Published: 5/9/2022
View: 3430
월별 설교 – mission –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오늘은 원래 ‘성결교회 주일’이지만, 저는 특별히 ‘가정 주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정의 달 5월을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등으로 잘게 나누다 …
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3/8/2021
View: 5246
2013년 5월 11일 새벽설교: 가정의 달 (화목) 잠언 – 17:1-22
가정의 달 (화목). 잠언 17:1-2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왜 5월이 가정이 달이냐면 5월에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Source: lastingforever.tistory.com
Date Published: 11/18/2022
View: 6749
[이 주일의 설교] 행복한 가정(시 128:1~6) – 기독신문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안식과 평안,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달력을 보게 되면 가족과 연관된 날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8/2/2021
View: 2015
[가정의달 설교, 창2:20]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_ 유경재 목사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 세 기 2:20-25, 골로새서 3:18-25 설교 : 유경재 목사 가정의 달인 5월 마지막 주일에 다시 한 번 성경 특히 창세기에 나타난 …
Source: koinedata.tistory.com
Date Published: 5/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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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가정 의 달 설교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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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3.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dV1Np2XU9Q
가정의 달(01) 설교(12편)
절기설교 가정의 달(01) 설교(12편) 성경환목사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01)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이성희 목사) (02) 행복이 넘치는 가정 (김형준목사) (03) 행복을 회복한 가정 (조봉희목사) (04) 신앙의 명문가 (홍문수 목사) (05) 가장 소중한 유산 (06) 신앙의 가정으로 만들어 가라 (07) 부부의 행복 (08) 그리스도인의 부부생활 (09) 부족함을 채워 주세요. (10) 신앙의 명문가정 (11)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정 (12) 행복한 가정 (01)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이성희 목사 대상 17:22-24, 눅 19:1-10 음악가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은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이셨지만 태어나면서 곱사등을 가지고 태어나셨답니다. 자랄 때는 많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롬체라는 딸을 가진 함부르크의 사업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롬체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은 프롬체는 깜짝 놀랐습니다. 곱사등을 가진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청년의 청혼에 혐오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습니다. 모세는 당당한 태도로 프롬체에게 접근하였습니다. “부부는 하늘에서 점지해준다는 것을 당신은 믿으시오?”라고 모세는 프롬체에게 물었습니다. “네 물론 믿지요.” 신앙심이 깊은 프롬체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사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어떤 여인이 장차 아내가 될 것인지를 이미 점지해 주었다오. 하나님은 그 사내아이의 신부감이 될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소. 네 아내는 특별히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는 하지만 곱사등을 갖고 태어날 것이다. 그 때 ‘오! 안돼요!’ 사내아이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오. “너무 가혹하십니다. 차라리 그녀를 아름답게 해 주시고 저에게 곱사등을 주십시오”라고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혼하여 평생을 행복한 부부로 살았답니다. 좋은 가정은 외형적으로 조금의 결함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적인 자세,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가정의 목적을 헤아리는 가정입니다. 모세 멘델스존의 신앙과 해학이 곁들인 당당함이 결국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자신감과 인간적 해학이 필요한 곳이 가정입니다. 요즘의 보고에 의하면 어른들이 하루 130명씩 가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들이 아니라 어른 가출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른들도 철이 없어 아이 같은 어른이 많이 있습니다. 빈곤과 가정불화 등으로 지난해에만 4만 7,254명의 어른이 가출하였습니다. 이 수는 IMF 때의 2배에 해당합니다. 오히려 청소년 가출은 다소 줄어 작년 한 해 동안 청소년 가출은 1만 3,374명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이 점점 소홀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비 샌더스가 쓴 ‘돌고래에게 배운다’란 책을 보았습니다. 돌고래는 무리의 위협을 받을 때마다 맨 바깥에 수컷들이 열을 짜고, 그 안쪽에 암컷들이 열을 짜고, 그리고 한 가운데 어린 돌고래가 열을 짠다고 합니다. 돌고래는 가족의식과 동료의식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돌고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위협이 있고 빈곤이 있다고 하여 어른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는 것은 돌고래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우리 사회에 가족 간의 대화가 날로 줄고 있습니다. 가장의 20%이상은 전혀 가족과의 대화가 없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은 산모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습니다. 이혼률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저런 이유로 혼자 사는 ‘나홀로 가구’가 250만 가구나 됩니다. 가정에 대한 의미와, 책임과, 목적이 상실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가정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서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고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창조하시므로 천지창조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성경의 맨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므로 마무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였습니다. 성경은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 하나님의 기관인가 하는 것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가정은 교회의 원형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에 예루살렘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눔바의 집이었습니다. 빌리보교회는 루디아의 집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모든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인 곳이 교회와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이 그리스도가 주인이고 교회와 같은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가정을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가정 없이 사람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원래 ‘살암’이었다고 합니다. 살이란 살덩어리를 말입니다. 그리고 암이란 여자 즉 어머니를 뜻한답니다. 그래서 사람이란 원래 뜻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말입니다. 참 가정적인 표현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가정적이어야 합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겨야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여리고 사람인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보고 싶은 마음에 나왔지만 키가 작고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몰려나와 있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갔고 예수님은 그를 보시고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머무시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부정한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남의 것을 억지로 탈취한 것이 있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도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삭개오는 늦게 나왔기 때문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좀 일찍 나오지”라고 그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가 늦게 나왔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기에 예수님도 그를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삭개의 집이 예수님을 모신 집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하신 복된 가정이 된 이유를 살펴보고 우리의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가정입니다. 3절과 4절에는 말합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삭개오는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라고 표현합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열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5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로 삭개오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삭개오는 예수님을 내려보고 있고 예수님이 우러러 보게 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꺼이 삭개오를 우러러 보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무신 동기는 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고, 열심이 있는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어느 가정이든지 열심히 살고, 열심히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성경쓰기에 참여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하는 가정은 평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보기를 원하는 열정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가시덤불이 불꽃에 타지 않는 신비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리라”고 하면서 험한 산을 올라갔습니다. 호렙산은 올라가기가 그리 쉬운 산이 아닙니다. 힘들게 올라갔을 것입니다. 보려고 하는 열망과 호기심이 없이는 올라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산에 올라갔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모세는 나이 40세 때에는 문제를 보았으나 80세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기이히 여겨”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외로운 들을 지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런 보기를 원하는 호기심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모시는 마음이 되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 28:1)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를 원하는 열망을 가진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가정에 머물게 하시려면 예수님을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교회에 나오시면 예수님을 봅니다.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봅니다. 기도를 하면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도 계시는데 보지 못하는 분 안 계십니까? 키가 작아서도 아니고 눈이 나빠서도 아닙니다. 간정한 마음이 있으면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삭개오의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다른 식구 들은 삭개오 한 사람 덕분에 예수님을 모시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가정의 주인 되게 하고 예수님이 그 집에 머무시게 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의 간절한 열망이 예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갈까요? 현대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마태복음 5:8에는 말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시편 11:7에는 말합니다. “정직한 자가 그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이 청결한 자, 마음이 정직한 자가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일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일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할 테니 말입니다.” 어떤 이는 청결은 성결의 사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성결한 자입니다. 이런 자의 가정에 예수님은 머무십니다. 둘째,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가정입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때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6절은 그의 신속하고 간절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의 마음의 자세는 이미 예수님이 머무실만한 집이었습니다. 삭개오의 태도를 보세요. 첫째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즐거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꺼이 맞았습니다. 셋째는 영접하였습니다. 환영하며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이미 하나님이 머무시는 마음이었고 천국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 이런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고 머무시는 그 기쁨 외에 어떤 것도 그에게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손님을 맞는 자세를 보면 기꺼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태도에 따라 상대방의 느낌은 천지차이입니다. 노천명시인의 ‘임이 오시던 날’이란 시가 있습니다. “임이 오시던 날/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그도 저도 아니오이다/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속절없는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주님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마음이 이만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고 기꺼이 영접하는 가정에 들어가시기를 원하시고 그 집에 머무시기를 좋아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은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사람, 모시는 사람은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모시면 머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수넴여인은 엘리사에게 작은 방을 마련하였습니다. 작은 침상과 촛불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런 모시는 정성이 결과적으로 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살게 하는 은혜를 입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베다니의 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 곳에 지나실 때마다 모신 흔적이 있습니다. 이런 알뜰하고 정성스런 대접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이 슬퍼하시며 죽은 지 나흘 되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왔습니다. 이런 극진한 마음이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영접하는 첫 번째 이방인 개종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소자를 대접하고 모시면 그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에게 예수님을 대하듯 대접하세요. 집에 모셔 들이세요. 이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영접하면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영접하면 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영접하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이 됩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가정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가정의 주인 되게 하여야 합니다. 루디아는 바울을 자신의 집에 들어와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억지로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고 사도행전 16:15은 말합니다. 바울이 들어와도 복을 받고 그 집에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을 모신 가정이 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기 싫은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보세요. 로마서 1:28에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좋아하면 머무십니다. 그러나 싫어하면 떠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난 결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등입니다. 세상에 못된 것은 죄다 하나님이 마음에서 떠난 결과입니다. 우리가 바르게살기 위해서라도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바르게 서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면 들어오셔서 주인이 되시고 머무십니다. “주 네 맘에 들어가시려 하네. 왜 모시지 않느냐. 이 세상의 그 누가 막으리요. 너의 대답 무엇이냐. 언제나 주님은 기다리셨고 또 지금도 기다리셔. 주님께선 문 열기 원하시며 지금 기다리시네.” 주님을 기다리게 마시고 모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주인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께 회개하는 가정입니다. 8절에는 삭개오의 용감한 자기 회개가 나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삭개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예수님의 강요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회개합니다. 회개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하나가 되어야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죄를 알고, 잘못을 느끼고, 새로운 삶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삭개오는 아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닙니다. 느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줄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나의 사랑하는 책’에서 “회개는 내적 가책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외적 행동이 없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닙니다. 완전하게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구원에 이르는 가정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가정은 회개로 완성된 가정입니다.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은 회개한 가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합니다. 삭개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 그 온 집에 이르렀습니다. 삭개오 한 사람 덕에 온 가정이 구원받는 놀라운 은총을 입습니다. 지난 5월 7일 신문에는 아름답고 훈훈한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70대 할머니가 37년 전에 기차 무임승차한 것을 갚기 위하여 30만원과 사과 편지를 서울역에 두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워 그렇게 했는데 이제 갚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를 믿는 분이라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회개는 실제로 자신의 것으로 갚는 것입니다. 의지가 없는 회개는 속임수입니다. 회개는 가장 온전한 제사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있어야 완전히 예수님이 머무시고 떠나지 않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9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회개가 없는 불의하고 죄악이 있고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수 없습니다. 이런 더러운 곳은 예수님이 머무실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어떤 죄 많은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트리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300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진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300데나리온이면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1500만원은 되는 향유입니다. 이 여인은 이 비싼 향유를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습니다. 이 여인의 많은 죄가 다 사해졌다고 예수님은 사죄를 선포하십니다. 이 여인의 고 비싼 대가가 없이는 참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참 회개가 가능합니다. 어느 회사에 있는 값비싼 컴퓨터가 고장이 났습니다. 컴퓨터 기술자는 하루 종일 거대한 컴퓨터를 상대로 고장 난 부분을 찾기 위해 씨름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고장 난 곳을 발견하여 한군데에 분필로 하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 부분의 부품을 교체하여 완전히 기능을 회복하였습니다. 이 기술자는 수리비로 5만 달러를 청구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수리비가 너무 비싸다고 하여 자세한 명세 계산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기술자는 “분필로 동그라미 치는데 1달러, 동그라미 칠 부분을 찾는데 49,999달러”라고 계산서를 적어 왔다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고치고 돌이키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상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결론 어느 책에 보니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Women pack, but they never carry”(여자들은 짐은 싸지만 운반하진 않는다)라고 조크를 하였습니다. 제가 어느 목사님께 그 책을 보여주었더니 “맞네. 맞어”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은 “짐 싸는 게 짐 드는 것보다 힘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목사님이시죠? 어느 것이 더 힘들고, 더 중요하다기 보다 둘 다 중요하지요. 그런데 역시 짐은 여자가 싸는 게 좋고, 짐을 드는 건 남자가 좋아요. 남편과 아내의 차이를 인정하십시오. 좋은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을 덜어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일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감사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감사할 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가정이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입니다. 왠지 아십니까? 이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인 가정은 누구도 주인 행세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존귀하고 주인 되시는 분이십니다. 가정의 왕이나 더구나 폭군이 되지 마십시오. 집안의 왕은 주님이십니다. 집안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의 족장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제사장 되어야 합니다. 역대상 17:24에는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서 견고히 서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가정이 주 앞에서 견고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동의 가정들이 예수님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고,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외적 행동으로 회개함으로 예수님이 머무시는 가정,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02) 행복이 넘치는 가정 김형준목사 룻기 1:6-18 정작 자신은 한번도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했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분이 “home sweet home”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 쾌락과 궁전 가운데로 내가 돌아다닐지라도 나를 언제나 겸손케 하는 것은 내 집 같은 곳이 다시없음이로다. 가정은 하늘로부터 아름다움이 있는 곳 그리고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는 곳 온 세상을 온통 다 찾아보아도 이런 아름다움을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네.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나의 가정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정다운 아버지의 미소 짓는 무릎 아래에 앉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달래시는 어머님의 어루만지심이 얼마나 다정한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배회할지라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다만 가정의 즐거움만을 다오. 가정!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많은 근심의 짐을 지고 나는 돌아오리라.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운 위로와 따스함이 거기서 나를 향해 미소하리라. 나는 다시는 그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으리. 그처럼 포근한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으리. 가정! 가정! 감미로운 내 가정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의 어떤 것이 푸근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은은한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쉴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었던 넉넉한 어머니의 가슴, 한없이 울어버릴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버리고 나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그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아버지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 얼굴을 맞대며 싸우고 울던 형제, 자매들, 형제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어 닥친 흉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 가정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찢어놓고 갈라놓았던 일들은 없습니까? 가족간에 이해와 사랑의 흉년이 들어 미움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흉년 때문에 삶의 자리를 옳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새롭게 살겠다고 시작했던 삶 속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나서 회복할 수 없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사사시대 가운데서도, 깨어지고 부서져서 실패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구원 사역을 준비해나가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서진 가정을 통해서 조차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존귀하고 아름답게 이뤄 가심을 보여줌으로 인해, 가정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아픈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던 세 명의 과부만이 남은 이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가정이 되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가정의 풍요로움, 그 풍요로움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나오미와 룻이라는 한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고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자기와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21절을 보면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 룻기 1장에 보면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오미가 말할 때마다 “돌아가야 된다, 돌아가야 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불어 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떠난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하나님 백성이 당신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선택했던 자신의 삶과 자기 가정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또한 자기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후손들로 기르는 것보다는 모압의 이방인들과 결혼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 정도로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보다는 내 편안함과 편익을 쫓아서 선택했던 나의 태도가 오늘 내 삶 속에 이러한 불행과 어려움을 불렀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금 돌아가고자 믿음을 선택하여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홀로서기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여인들은 더 합니다. 여인들은 평생 세 남자를 의지하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편, 나이 들어서는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나오미의 이런 모습을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라는 분은 풀핏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며,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곳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재기할 힘도 나이도 돈도 가족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두 사람,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연약하기에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령이지만 홀로 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남편 의지하고, 내 돈 의지하고, 내 자식 의지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삶의 결단이 며느리들도 돌려보내며 홀로 하나님 앞에 돌아서겠다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원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뒤돌아 볼 때 후회하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섬세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내 삶에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아야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자리와 나에게 살라고 명하신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즉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하시는 메시지를 져버리고 편리한 대로, 유익한 대로, 육신의 보이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왔던 내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러해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회복과 쓰임의 첫 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오늘 내 삶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시고 내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며 새롭게 정립하는 나오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의지하셨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의지하셨습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울고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물질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평안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그 결단, 그것은 오늘 나의 삶 때로는 희망 없어 보이는 내 가정에 새로운 생명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서지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던 이 가정이 회복되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이유는 남아 있는 세 식구 속에 남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세 과부는 각자 인생 속에 다가온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더 심각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놀라운 사랑이 남아있는 세 식구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함께” 라는 단어가 무려 5번 정도 나옵니다. 고통과 환난이 닥치면 가족들 간에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들들을 잃어버리고 자손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생애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우리 집안 망쳤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두 며느리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렸다면, 부모의 죄 값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부모를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남편이 아팠을 그 때 부모가 조금만 더 다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면 남편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이미 멍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합니다. 섭섭합니다. 상처가 됩니다. 동시에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신문과 TV에 한 여인이 나와서 울면서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 자녀를 찾아달라고, 내 자녀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는데, 아이를 죽인 범인은 바로 그 어머니였습니다. 아이를 죽인 이유는 새로 사귄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남자가 아이가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아이를 자동차 속에 두고 호수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을 출발할 때 거추장스러운 것은 자녀라도 떨쳐버리려고 하는 시대의 풍조 그것이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 이혼하는 가정 가운데에서 자녀를 서로 양육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는 모습 속에서도 곧잘 발견하게 됩니다. 버려져서 고아원으로 가는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를 특별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세 과부가 함께 일어납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두 며느리는 이야기합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리고 풍속도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익숙한 것과는 결별하는 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는 두 며느리를 보게 됩니다. 신명기 23장 3-4까지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가도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니면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위로할까’ 헤아리며 따라가는 며느리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을 보십시오. 동시에 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실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말씀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 의 원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헷세드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희들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들을 변함없이 진실로 사랑해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런 사랑을 베풀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되었다. 나도 내 삶에 너희들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너희들의 삶을 살아서 나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붙들고 우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가정이 망하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좋은 가정도 이 사랑이 없으면 부서집니다. 가정생활 하면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어머님들이 아닙니까?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시판에 적힌 어느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순덕님이 지으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쳐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엄마의 사랑.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엄마의 인생 그 뒤안길에 한 여인이 느끼는 슬픔과 눈물, 한숨과 탄식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형편과 내 상황에 따라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내 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가정입니까? 이런 가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전에 27살에 혼자가 되어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둘만 살았기 때문에 며느리를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다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구들은 식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 내 아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6개월 정도만 같이 살다가 따로 살게 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인가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역정을 내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라고 이야기 하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1주일 뒤부터 눈치가 이상해졌습니다. 자신은 며느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일도 없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배회하고 놀다가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며느리 오기 전에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 내외는 4개월 만에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제 혼자구나 라는 생각,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뚝 부러지는 듯한 허탈감과 서러움 때문에 이사하기 전 날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하는 날 아침 따뜻한 밥을 준비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하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들 부부는 이사 가는 집 이야기를 하며 들떠서는 마음으로 울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전화 한 통 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 30년 동안 돌아오던 아들이 이제 나보다 더 편안하고 좋아하는 곳으로 갈 곳이 있구나. 생각 하니 혼자 남은 외로움이 그 뼈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비가 오면 정신 잃은 사람처럼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가서 아들을 맞이하러 갈 때도 많았고, 혹 아들이 저녁을 먹으러 올까 밥을 많이 해 놓고 기다렸다가 밥 늦게 식은 밥을 몇 숟가락 먹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어머니 마음을, 한 여인의 마음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편리와 우리의 이익과 유익을 찾아서 판단하며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이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복할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아픔의 소리를 듣습니까? 얼마 전 나온 책 중에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부모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던 자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증오감 때문에 부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이의 절규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없고 서로의 아픈 마음을 알아 줄 수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이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세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정에는 하나님을 믿는 나오미와 룻의 공동 기도 고백과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같은 신앙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치감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러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라는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일본 영사관 창살을 붙들고 자기 딸은 창살 안에서 보고 있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 창살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결합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시편 63장 8절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런 고백이 16절,17절에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머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이 룻의 신앙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어디에서 그 신앙을 본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호와 혹은 전능자라는 단어를 1장 속에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대화의 주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7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을 때에도, 자신의 큰아들이 죽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했던 그 나오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을 그 순간에 절망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 삶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운명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축복이 하나님께 있노라.’ 고백하며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님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절망스러운 일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삶은 하나님께 있노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노라고 고백하며 툴툴 털고 기도의 자리에 서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자녀들에게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신앙이 전달될 때,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으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각각 가정에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낼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도우시는 주님을 최악의 상태에서도 신실하게 믿고 오히려, 다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라면 말로만 물질로만 그리고, 인간적인 교양으로만 전달하는 삶의 영향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이혼율이 3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통과 다툼 그리고 무너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려집니다. 로마제국 멸망사를 기록했던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역사가는 로마제곡의 멸망이 바로 가정의 타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속한 이혼율의 증가와 또 한 가지는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절대성을 상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쾌락과 상황이라는 것에 도전을 받을 때, 튼튼했던 철의 나라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시고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등대지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님을 두고 삼 남매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과 다툼을 그린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기로 했던 삼 남매의 결정 그러나, 어머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막내아들이었던 재우라는 형제는 자기가 있던 외딴 섬 등대에 어머니를 보시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남다르게 느껴보지 못했던 이 아들에게 어머니는 짐에 불과했습니다. 날마다 밥을 내놓으라고 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 자신의 삶의 리듬을 깨뜨리는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여러 번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갑니다. 등대에 올라가서 끊어진 퓨즈를 갈아 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것 같고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있을 때,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치매를 앓고 있던 자기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어머니가 또 이야기를 합니다.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러면서 동시에 “너 힘드니, 내가 너를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동시에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속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었던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잊혀져서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불행과 갈등 다툼과 고독을 다루고 있지만,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이 무엇인지 아니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03) 행복을 회복한 가정 조봉희목사 룻기 4:13-17 과거 프랑스에는 모두 69명의 군주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백성들로부터 진정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군주는 겨우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생 루이, 루이 7세, 그리고 앙리 4세, 세 사람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작가는 그들에겐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고 상처를 싸매 줄 줄 아는 매력이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군주들과 달리 그들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감쌀 줄 아는 특별한 인간미를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와의 정 깊은 대화였습니다. 다른 군주들은 어머니와 떨어져 유모의 손에 의해 키워졌지만, 유독 그 세 군주만은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품이 이렇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들어가는 학교는 어머니라고 하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따라서, 어머니는 최초의 스승이며 최고의 스승입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우리들의 교과서였고, 어머니의 무릎은 우리들의 교실이었으며, 어머니의 말씀은 비타민이고, 어머니의 손길은 우리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가슴은 모든 인간의 고향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이 세상 어떤 어느 것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넓고 깊고 높습니다. 예컨대, 새들은 힘써 만든 둥지일지라도 1년 뒤엔 철수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기한이 없습니다. 새들은 불구가 된 새끼는 둥지에서 떨어뜨리지만, 어머니는 부족한 아이일수록 더 사랑합니다. 어미 새가 하는 일은 먹고 지키는 두 가지 뿐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요리사가 되고, 재봉사가 되고 운전 기사가 되고 상담자가 되고 청소부가 되고 때 미는 자가 되고 동무가 되어주십니다. 이밖에도 어머니의 역할은 수없이 많습니다. 새들의 어미는 시한부로 새끼를 돌보고 책임을 벗으나,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세상에는 진통제가 많지만 어머니의 입맞춤만큼 효력이 있는 진통제는 없습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 쓰는 어머니의 편지는 세상의 어떤 거친 바람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영문학자요 시인 피천득 선생님이 이런 고백을 들려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30대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의 인상과 아름다운 추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에, 그는 이런 소원을 노래합니다. “내 인생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너는 알고 있는가, 네가 기뻐할 때 어머니도 기쁘고, 네가 슬플 때 어머니도 슬프고, 너의 성공이 곧 어머니의 성공이며, 너의 부끄러움이 어머니의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반면에 어머니는 겉으로 울고, 아버지는 속으로 키운다고 합니다. 또, 어머니의 과잉 사랑을 견제하는 역할을 아버지가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배의 돛이라면 아버지의 사랑은 키와 같습니다. 키는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으나, 배의 방향을 인도하는 막중한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아이를 위한 장래의 걱정이 있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위한 희생적 준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아이에게 훌륭한 모범이 못 되고 있다는 가책이 있고, 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좀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결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란 ‘내가 훌륭한 아버지 구실을 하고 있나?’ 라고 날마다 자책하는 분이십니다. 아버지란 결혼식 같은 때에 눈물을 별로 안보이지만, 목구멍 속으로 우는 분이십니다. 아들딸이 늦게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고,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내다봅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일터로 나가지만 그 머릿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속으로 사랑하고 겉으로 책망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가졌으나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아버지는 최후의 존재하는 아이의 고향이며, 배신하지 않는 아이의 친구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착잡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들딸이 ‘나를 닮아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두려움과 자비, 위엄과 사랑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날을 상징하는 꽃은 사랑과 존경의 뜻을 품고 있는 카네이션이지만, 아버지날을 상징하는 꽃은 민들레입니다. 민들레는 짓밟힐수록 다시 일어나 더 힘차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뭉개 없앨 만한 힘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풍파와 역경도 감수하는 순교자적 사랑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부모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 더 높은 것 같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Jack Dominian). 『지지, 치유, 그리고 성장』입니다. 아마 이런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에 가장 리얼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원래 룻의 가정 배경은 참 불행합니다. 완전히 패가망신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메시지는 행복의 회복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복을 회복한 가정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세 사람의 장례식으로 시작하나, 마지막은 결혼식의 기쁨과 탄생의 축제로 회복합니다. 즉 1장에서는 엘리멜렉과 말룐과 기룐이라는 세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하나, 4장에서는 오벳과 이새와 다윗이라는 세 사람의 역사적 출생으로 회복됩니다. 눈물로 시작한 내용이 축가로 전환됩니다. 사별의 통곡으로 시작했으나 탄생의 기쁨이 연속됩니다. 가난하게 출발했는데 풍요가 찾아옵니다. 고독하게 등장했는데 희열에 찬 모습으로 부각됩니다. 모든 것을 잃었던 불행에서 이전 것보다 더 풍족하게 회복하고 누리는 행복이 강조됩니다. 이방 땅의 죽은 우상으로부터 약속의 땅의 살아 계신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고생이 영원한 영광으로 바뀝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가정이 어떤 환경에서 출발했던지, 새로운 회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지나온 세월 동안 어떤 쓰라린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있었던지, 더 풍족한 회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룻기 4장 15, 16절에서는 가정의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회복자(Restorer), 봉양자(Nourisher), 양육자(Care)』입니다. 모든 불행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된 가정의 진면목을 부각시켜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황홀한 회복의 은총이 있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이 돌보시는 가정입니다 룻의 가정이 행복을 회복할 수 있었던 근저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총』입니다. 본문 13절에서는 “주님께서 룻을 보살펴주시므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상기시켜줍니다. 『돌보심의 은총.』이것이 룻기의 중심주제이기도 합니다. 같은 시대에 쓰여진 구약성경의 사사기는 “한 나라(이스라엘)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주지시켜준다면, 룻기는 “한 개인, 한 가정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부각시켜줍니다. 그래서 룻기는 네 장 밖에 안되는 짧은 책이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을 18번이나 반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나라와 한 민족, 한 가정, 한 개인을 자상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래 행복(beatus)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를 받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뜻합니다. 시편 128편에서는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가정은 그 손이 수고하는 대로 먹을 것이요, 복되고 형통할 것이며, 아내와 자식과 함께 온 가정이 행복과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사무엘의 가정도 원래는 불행한 환경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어머니 한나를 돌보아주시므로 행복이 회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Dale Carnegie 역시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나, 어머니의 애절한 기도를 힘입어 하나님이 돌보아주신 은총으로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불쌍하게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 Dale을 위해 늘 이렇게 기도해주셨잖아요. 「대일아, 하나님이 너를 돌보아주실거야」(Dale, God will take care of you)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이 특별한 은총으로 돌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남편의 직장과 사업, 아내의 건강, 자녀들의 진로와 결혼, 부모 형제, 온 가족을 돌보시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너 근심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라는 찬송가는 Martin 목사 부부가 작사 작곡한 것입니다. 마틴 목사는 어느 날 이웃 교회로부터 설교 초청을 받았는데,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의 병간호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어린 아들이, “아빠, 아빠가 오늘밤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아빠가 안 계실 동안에도 하나님이 엄마를 돌보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안 드세요?” 어린 아들의 말에 큰 감동을 받은 엄마 Civiela가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총을 믿고 작시한 것입니다. God will take care of you! 4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네가 어떤 시험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너를 돌보아주실 것이다. 그러니 구주의 품에 거하기만 하거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돌보아주실 것이다.” (No matter what may be the test, God will take care of you. Lean, weary one, upon His breast, XZ) 오늘도 여전히 한 개인, 한 가정을 자상하고 섬세하게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서로 상부상조하는 가정입니다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계는 『생명의 회복자, 노년의 봉양자, 손자의 양육자』이었습니다. 너무나 이상적입니다. 룻기의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상부상조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최대한 서로 상부상조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이웃집 여인들까지도 서로 상부상조하는 행복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유명한 여성 가정학자 버지니아 사타이아는 행복한 가정의 네 가지 중요한 특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첫째로,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가정 둘째로, 서로 간의 뜻이 통하는 가정 셋째로,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는 가정 넷째로, 이웃과 잘 융화하고 사이가 좋은 가정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로 사이가 좋고 융화가 잘되는 가정은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단어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룻은 부유한 남편 보아스를 만나 유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를 잊지 않고, 나무나 대견스런 봉양자가 됩니다(15절). 여기 봉양자라는 말은 「잘 받들어서 보살펴드린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자기 아버지 야곱을 이집트로 이민 초청하여 잘 받들어 보살펴드릴 때 썼던 단어입니다(창 45:11). 오늘 우리도 노 부모님들을 잘 받들어 보살펴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회학자가 이런 정의를 합니다. 19세기는 여성을 발견한 세기요,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면, 21세기는 노인을 발견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최근 통계자료에 의하면 노인들아 자녀들로부터 바라는 것 중의 1순위는 현찰로 용돈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자식된 도리로서 노 부모님을 최대한 봉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부모는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봉양하는 것입니다. 부양이란 경제력이 없는 사람을 도와드리는 단어요, 봉양이란 잘 받들어서 보살펴드린다는 뜻입니다. 잘 모시는 정신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시어머니 나오미는 손자를 잘 양육해주는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줍니다(16절). 어린 손주가 할머니 가슴에 안겨 건강하게 성장하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꼭 업어주세요! 디모데가 훌륭한 인물이 되었던 것은 할머니 로이스가 신앙으로 양육해주셨기 때문입니다(딤후 1: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든 가정마다 부모자식 간에, 특히 고부간에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하모니가 있기를 원합니다. 3. 신앙이 일치하는 가정입니다 룻기의 중심인물들인 나오미, 룻, 보아스 세 사람은 모두가 신앙적으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적 주파수가 맞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 사람을 각각 뜯어놓으면 신분과 배경이 서로 다릅니다. 나오미는 자식 농사의 실패자요, 룻은 이방 여자요, 보아스는 전형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육 수준이 높다고 가정이 행복한 것이 아니요, 경제적으로 풍요하다고 안식을 누리는 가정이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교감이 이루어져야 하고, 영성이 같아야 합니다. 침대가 고급이 아니더라도, 영적 교감이 이루어지는 곳에 행복이 감돕니다. Karl Barth라는 신학자는 “부부관계로써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숭고한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과 헌신으로 하나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 지구촌교회는 모든 가정이 온전한 구원의 은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믿으세요. 주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지금 반쪽 신앙이라고 기죽지 마세요.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행복한 가정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자의 신앙이 탁월할수록 반드시 행복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의 가정이 그 대표적입니다. 그들의 영성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가정은 남편 롯이 믿음이 없는 만큼 불행했습니다. 신앙적 영성지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됩니다. 한 때는 아브라함도 신앙심이 약해져서 이집트로 내려갔더니 가정불화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이 제사장적 축복권을 바로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행복의 창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딤전 2:8). 세계적인 가정 사역자인 James Dobson은 행복한 가정의 조건 4가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첫째, 부부간의 원만한 사랑입니다. 둘째, 부부의 신앙과 헌신입니다. 셋째, 안정된 가정입니다. 그리고 넷째, 건실한 교회에의 참여입니다. 건실한 교회는 지구촌교회입니다. 그리고 여러 부서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에서 함께 헌신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룻기의 중심주제처럼 가난에서 풍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눈물이 변하여 기쁨으로, 고독한 삶에서 축제적인 인생으로, 마라의 쓴 물에서 엘림의 생수로 회복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은 행복의 보금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은총을 구하십시다. 아무 때나 어디서 주 너를 지켜주시리. 주 안에서 화목하며 상부상조하는 가정, 이 시간 나의 부모님을 축복하십시다. 숙부 숙모도 축복하십시다. 이제는 부부가 함께 예수 믿고 신앙으로 일치하고, 함께 헌신하므로 모든 에덴 동산의 행복이 회복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04) 신앙의 명문가 [잠17장 06절 ] 홍문수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 특별히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기간입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기에 사실은 1년 열 두 달이 가정의 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하도 바쁘고 분주하다 보니까 가정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기간을 정해놓고 챙기자는 겁니다. 우리도 이 5월에 가정에 관한 성경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가정을 위해 많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좋은 일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에 정신이 팔려 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거는 겁니다. 세계적인 리더십 이론가인 스타분 코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등의 저서로 인생 성공법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의 저서 가운데 놓치기 쉬운 중요한 책이 있습니다. 「성공하는 가족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입니다. 그는 그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일생에서 이 책을 집필하는 것만큼 정열을 쏟았던 일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 누구보다도 내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어서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회의 다른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가족을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가라앉고 있는 타이타닉호의 갑판 의자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맞는 말이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가정을 가꾸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요 영예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구절을 다시 보십시오. 잠17:6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나아가 들수록 자손들이 잘 되야 영광스런 인생이라는 겁니다. 우리 자손들이 부모인 우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성공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자손들은 부모들 때문에 자랑스럽고, 부모들은 자손들 때문에 자랑스럽고 …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가정, 이런 가문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이런 가정, 이런 가문을 이름하여 ‘명문가’(일명 ‘뼈대가 있는 가문’)라고 부르죠? 어느 분의 가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분이 세상이 떠난 후 150년이 지났을 때 그 가문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후손이 1,400여명이나 됐는데 … 그 중에학교 교장 13명, 대학교수 65명, 목사 100명, 공무원 80명, 군인 75명, 저술가 60명, 언론인 18명, 부통령, 시장, 주지사, 의원, … 등이 배출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기도 힘들죠. 흔히 말하는 대로 보면 명문가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입니다. 그들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름하여 신앙의 명문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명문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문 안에 세상에서 출세하고 화려한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명문가이되 ‘신앙의 명문가’가 되야 합니다. 신앙의 뼈대있는 가문 말입니다. 아무쪼록 저 와 여러분의 가정이 다 이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신앙의 대(代)를 이어갑시다.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우리 자신의 역할입니다. 신앙의 가교(架橋) 역할입니다. 신앙의 선조가 있다면 그 신앙의 유산을 잘 물려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것은 마치 축복의 저수지에 물을 잔뜩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 4대로 내려가면서 마치 굴러가듯이 복을 받습니다. 이 축복을 자손들에게 잘 물려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혹 신앙의 선조가 없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대(代)에서 신앙의 선조가 되면 되잖아요. 우리가 흔히 아브라함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 부릅니다만, 그 가문이 본래 하나님을 믿는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숭배하는 가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순종하다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든 못 받았든 우리 자손들에게 확실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신앙의 명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나 자신의 신앙이 흔들리면 신앙의 대는 여지없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부터 신앙 생활 잘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자손들에게 신앙을 확실하게 물려줘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적잖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자손들의 신앙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 부모들은 그렇다 치지만, 알만한 분들이 그럴 땐 정말 갑갑합니다. 최근 한국교회 통계를 보면 젊은 층(어린이, 청소년, 청년층)이 교회에서 많이 이탈되고 있습니다. 젊은층 인구가 줄고 있는 탓도 일부 있다지만, 이런 현상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출세시키는 데는 무한정 관심과 투자를 하면서도 신앙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크게 잘못하는 겁니다. 삿2:10 기록대로 신앙의 대가 끊기면 암흑 시대가 옵니다. 목사로서 이따금 장례를 집례하면서 희비가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손들이 신앙을 잘 이어받아 걱정이 안됩니다.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자손들이 깜깜합니다. 신앙의 대가 끊기는 거죠. 이런 경우는 설사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할 뿐더러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 헤밍웨이 – 문인으로 그만큼 출세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진 유명인사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불행한 인생을 마쳤습니다. 인생의 허무와 고독감을 못 이겨 권총 자살 … 이해가 아나는 것은 플로리다 남단의 키 웨스트의 너무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자살햇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가 막힌 것은 어린 시절 그는 신앙의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의 조부는 D. L. 무디와 절친한 친구였고, 부친도 크리스천 의사였고 모친도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 신앙은 유지했는지 몰라도 자손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신앙이 좋다는 것은 가정이 온전히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겁니다. 물론 혼자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의 애로 사항 압니다. 저도 처음 예수 믿을 당시에는 그런 어려움을 경험해 봤기에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가정 복음화와 자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일은 힘들다고 포기할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신앙 생활 잘 하고 더 나아가 신앙의 대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대를 이어 신앙의 명문가를 만들어 봅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자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몇 가지를 제시해 드립니다. ① 내가 먼저 성숙한 신앙의 본(本)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거울입니다. 자손들은 부모의 삶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모방하고 따라가게 됩니다. 나쁜 것조차 따라갑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리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가꾸듯이 우리 자녀들은 부모라는 거울을 보고 자기 모습을 만들어 갑니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선배들의 신앙 생활 하는 모습을 보고 후배들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 ”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자손들 앞에 부끄러움 없는 신앙 생활 할 수 있도록 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경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② 자손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 자식이라도 마음대로 안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경우는 부모가 좋은 본을 보여도 잘 따르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은 그렇게 훌륭한데 그 아들들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누리가 노력은 하지만 결국 자식이 제대로 되는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자손을 하나님께 맡기고 눈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가 비록 부족한 부모라도 기도는 강합니다. 기도의 힘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 요게벳 – 모세의 어머니 – 세상적으로 보면 기구한 여인 … 시대를 잘못 만나서 아들 낳고 제 손으로 죽여야 되는 상황 … 그러나 눈물로 기도 … 모세를 갈 상자에 넣어 나일 강에 띄우는 기지 발휘 … 바로왕의 공주 양자로 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모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어미라고 내색은 못했지만 눈물의 기도로 모세를 길렀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겁니다. 그리고 아론은 초대 대제사장, 마리암은 여선지자 …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겁니다. 예> C 목사님 – 일찍이 상처(喪妻) … 세 딸을 두고 사모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기가 막힌 일 … 목회하면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웁니까? 주변에서 돌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 … 고민하다가 학비가 저렴한 인도의 선교사 자녀 학교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세 명을 다 보냈습니다. 초등학생 연령인 그 어린 것들을 …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기도하셨을까요? 그로부터 십 수년이 흐른 지금 … 그들은 반듯한 신앙으로 자랐습니다. 하나는 미국 명문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두 딸은 국내 대학에 진학해서 미래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떤 인물로 키우실지 기대가 됩니다. 우리 자손들은 부모의 사랑과 기도를 먹고 자랍니다. 저와 여러분도 자녀들에 게 육신적으로 잘 해 주는 것 이상으로 새벽마다 밤마다 눈물의 기도를 먹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③ 자손들에게 좋은 신앙의 습관을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습관을 만든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습관이 나를 만든다,”(존 드라이든) 그러므로 우리 자손들이 어떤 사람이 되면 좋을까 소원만 갖지 말고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줄 좋은 습관을 형성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를 위해 훈계도 필요하고 징계도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손들이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자라기를 소원합니까?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면 좋은 습관을 길러주십시오,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만 열거하면 이렇습니다. * 끊임없이 자기를 개발하는 습관 – 큰 인물이 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되니까 … 이건 알아서 잘 하실 겁니다. * 건강을 관리하는 습관 –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건강 잃으면 허사니까 … 이것도 알아서 잘 챙기실 겁니다. * 경건 생활의 습관(스스로 말씀 묵상하고 기도하는 습관) –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 주라는 겁니다. 경건의 훈련이 되면 어디에다 떨어뜨려 놓아도 잘 살아갑니다. 딤전4:7~8 “ …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의 훈련을 잘 시키면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우심을 받는 비결을 전수해주는 겁니다. 그것 하나만 가져도 인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시간과 물질을 잘 관리하는 습관(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는 생활 습관) –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재화는 시간과 물질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다룰 줄 알면 인생을 풍성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짧은 생각으로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시간과 물질을 다루는 사람은 공부 많이 시켜도 소시민밖에 되지 못합니다. 혹시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자기 이익만 챙기다 오히려 낭패를 보게 됩니다. 시간과 물질을 잘 다루는 법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시간과 물질도 하나님의 지혜로 잘 다룹니다. 이런 사람이 인생에 승리합니다. 요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나와서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경제 개념을 가르쳐야 된다고 하는데 좋죠. 그러나 ‘진짜 부자 아빠’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의 기본은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입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습관을 길러주면 평생 하나님의 풍요를 소유하고 선용하게 됩니다. 물질 많아서 자손들에게 물려주면 좋지만 이런 신앙 습관 물려주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거꾸로 물려줄 것 없어도 이런 신앙 습관 물려주면 신앙 안에서 성공하는 인물이 됩니다. 예> ‘강철왕’ 데일 카네기(그는 인생 전기에서는 부를 축적하고, 후기에서는 부를 하나님의 영광과 아웃 사랑을 위해 투자한 인물이었음)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지만 실한 기독교 가정 – 후일 어느 기독교 대학의 교회에서 간증 … “저의 부모님은 금전이나 재정적 유산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신앙의 축복이라는 더 귀중한 가치를 물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 목표가 무엇입니까? 좋은 신앙의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도 행복하고 자손들도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귀한 인물들이 배출될 수 있습니다.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부디 이런 사실을 명심하셔서 우리의 가정들을 신앙의 명문가로 가꾸어가기를 바랍니다! (05) 가장 소중한 유산 (신06:04~09) 5월이 시작됐습니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안에 우리들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정을 소중하게 지켜가자는 바램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좋은 가정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입니까? 그러면 앞으로 우리 가정은 어떨까요? 내 뒤를 이어 우리 자녀들의 가정은 어떨까요? 여전히 좋은 가정일까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으로 서 가고 있을 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이 오늘 좋은 가정이어야 하겠습니다. 뿐 만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가정이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자식 대 또 그 뒤를 이어 계속 좋은 가정이어야 하겠습니다. 미국 사회에 널리 알려진 가문 비교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의 가문과 그의 친구 사업가 막스 뮬츠 가문의 비교입니다. 이 둘은 어릴 때 같은 주일학교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후손을 추적 조사해 본 자료가 공개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후손은 873명인데 그중에 100명이 목사였고, 12명이 대학 총장이었고, 65명이 대학 교수였고, 60명이 의사였고, 판사가 30명, 군 장성이 75명, 국회의원이 3명이었고, 1명이 부통령 등등 한 마디로 믿음 안에서 주를 위해 헌신하고 나라를 위해 크게 봉사한 믿음의 가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뮬츠의 후손은 1290명이었는데, 그중 309명은 유아 때 죽었고, 310명은 직업적 거지가 되었고, 440명은 중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었고, 70명이 살인자요, 50명의 매춘부까지 정상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은 고작 51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이 저 조나단 에드워드와 같은 가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꿈꾸고, 위해서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가정을 믿음 안에 올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믿음의 가문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은 설교 말씀입니다. 모세는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제 여호수아를 앞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면서 한 가지 염려가 앞을 가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서 대대로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해서 믿음의 사람들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로 소위 “쉐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한 마디로 줄여보면 7절에 나오는 대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을 전수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라는 말입니다. 어려서 방학 때면 농사지으시던 시골 이모님 댁에 놀러 가곤했습니다. 그런데 겨울 방학에 가면 처마 밑에 옥수수를 걸어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저것들은 먹지 않고 왜 저렇게 매 달아놓았을까?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년에 심으려고 종자 옥수수를 저렇게 매달아 놓은 것입니다. 저것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지 않습니다. 아니 먹으면 안 됩니다. 내년에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꼭 저것은 남겨서 내년으로 넘겨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음대로 남겨서 넘겨주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전수해 주지 않으면 다음 대에 대가 끊길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지난 1984년 기독교 선교 100주년이 되던 해에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서 우리 사회에 신선한 파문을 던진 일이 있습니다.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입니다. 고 한경직 목사님과 당시 서울대 손봉호 교수가 주창한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재산의 1/3만 후손에게 남기고, 1/3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리고 나머지 1/3은 사회 복지시설 등 불특정 다수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서약을 하게 됩니다. 현재 기독 실업인들을 중심으로 약 1000명 가까운 회원이 가입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분들은 세 가지 실천 강령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늘 유서를 써놓고 집에 두거나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둘은 후손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이며 산다. 셋은 이 운동이 소리 없이 번져가도록 가까운 사람들에게 권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기 전 재산을 자녀들에게만 유산으로 남기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하겠습니다. 준비 안 된 사람들에게 재산만을 남긴다면 그 재산은 그들에게 너무도 큰 짐이요 때론 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은 좋은 운동이요 우리도 참여해볼 만한 운동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면 안 됩니다. 재산이라는 유산은 남기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재산 말고 다른 것은 적극적으로 남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려주지 않으면 안 될 유산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정말 가장 소중한 유산은 무엇입니까? 물려줄 것을 물려주자 우리가 자손들에게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있습니다. 1.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6-7을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제 힘겨운 여정을 떠나는 자손들에게 할 말도 많고 줄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장 소중한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왜 말씀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까요? 119:10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말씀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둔 밤길을 갈 때 등불을 켜서 들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등불을 켜면 내 발 앞에 길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앞 길에 빛이 비춰 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 이런 우리 인생의 등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몇 년 됐습니다.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저녁 예배 때 보고의 밤 행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어린이가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변화된 자기 모습을 일기 형식으로 진솔하게 발표했습니다. 그 중에 한 토막이 생각이 납니다. 그 이야기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반 친구하고 심하게 다투게 되었답니다. 그 아이가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자기 것을 빼앗으려고 했답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그 아이와 싸우는 도중이었답니다. 갑자기 여름성경학교에서 배웠던 말씀이 마음속에 떠오르더랍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했던 것도 떠오르더랍니다. 그래서 양보하고 그래서 화해했답니다. 저는 그 어린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릎을 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게 말씀의 능력이다.” 그렇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 가운데 첫째는 바로 말씀입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심령에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길을 헤매고 에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나침반을 가진 항해사처럼, 지도를 가진 운전자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나침반을 그 지도를 자녀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유산 중에 첫째는 바로 말씀입니다. 2. 기도입니다. 저는 야곱을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첫째는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대로 야곱은 아들이 열둘입니다. 그런데 그 열둘이 모두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대를 이어서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야곱의 자손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과 그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열 두 아들 중 그 누구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제외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이스마엘과 다른 아들들은 이 반열에 들지 못했습니다.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서가 이 반열에 들지 못했습니다. 다른 거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야곱만은 그 아들들 모두가 믿음의 반열에 들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야곱은 자식들을 이렇게 잘 키웠을까요? 그 답을 창 49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세상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식들을 축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열 두 아들 하나하나를 자세하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 축복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 기도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자식들이 아버지 기도를 기억했습니다. 그 기도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믿음의 길을 완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자식들을 위한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받고 자란 아이들은 기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녀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요? 소중한 유산으로 남을 수 있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비유컨대 농부가 모를 한 포기 한 포기 정성을 다해서 심는 것과 같은 기도입니다. 먼저 아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가야 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모습 하나 하나를 모를 모판에서 옮겨 논에 심듯 정성껏 기도합니다. 너무도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입니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저에게 주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허락하옵소서 원 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자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에 직면하여 인내하고 분투할 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고 고상한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땀 흘려 일하는 부지런한 자녀를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대하여 제 자녀에게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유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이웃과 더불어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를 위한 기도 이것이 가장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유산을 남겨주십시오. 3. 비전입니다. 딤후 2:1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바울이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군사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디모데를 행동(to do)이 아닌 존재(to be)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잘하고 또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느냐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장차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사람이라는 그의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 안에 담긴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비전을 확인시켜주고 그 비전을 이루어 가도록 격려하고 지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지금 드러난 행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맘에 들지 않는 부분들만 보고 판단하고 실망하고 속상해 하고 그래서 잔소리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그 아이를 위해 꾸었던 꿈을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는 날 얼마나 기뻤고 그 존재가 얼마나 우리 가정에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아이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꿈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아이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비전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며 많은 아이들이 자기들의 존재를 모르고,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청소년들과 심지어 어린이들의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공부도 잘하고 장래성이 있는 아이들이 자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의 존재에 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비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이것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들의 미래의 비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저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남겨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의 달을 시작하며 우리 가정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 가정의 미래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진정 남겨야 할 소중한 유산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기도, 그리고 비전 (06) 신앙의 가정으로 만들어 가라 (출 20:1-17) 1.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 가정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 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창 6:8-12). 2. 믿음으로 인정받은 아브라함 가정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 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 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1-4). 3. 자녀들을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한 아므람 가정 “아므람의 처의 이름은 요게벳이니 레위의 딸이요 애굽에서 레위에게서 난 자라 그가 아므람에게서 아론과 모세와 그의 누이 미리암을 낳았고”(민 26:59).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 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3:1-3).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출 15:20).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출 28:1) 4.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는 살몬의 가정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5-6a). 5. 외가의 믿음을 이어 받은 디모데 가정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 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 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2-5). (07) 부부의 행복 에베소서 5편 22절 – 33절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던 어느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목사님께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믿음이지요. 슬픔은 뒤를 돌아보게 하고, 걱정은 주위를 둘러보게 하지만, 믿음은 위를 바라보게 하지요. 믿음은 모든 절망을 이기게 하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정복하는 영원한 생명이기에 믿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화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막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랑 신부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지요. 사랑은 가난도 부요하게 하며, 눈물도 달콤하게 만들고, 적은 것도 많게 만들지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지요.” 화가는 전쟁을 마치고 지쳐 돌아오는 한 병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병사는 화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평화이지요. 평화는 전쟁을 멈추게 하고, 참된 안식과 기쁨을 가져다주니까요. 평화야말로 우리 모두의 참 소망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는 다 다른 대답에 갑자기 고민이 됐습니다. “과연 믿음, 사랑, 평화를 어떻게 표현해 낸담.” 그렇게 고민하며 집으로 들어서던 화가는 ‘아빠’를 부르며 가슴에 안기는 자녀들에게서 믿음을 보았고, 그리고 아이들과 자신을 쳐다보며 말없이 웃고 있던 아내의 눈망울 속에서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화가의 마음속에 밀려드는 말할 수 없는 평화가 넘쳐 났습니다. 화가는 지체하지 않고, 붓을 들어 자신이 그리고자 했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제목은 ‘가정’이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넷째주일 부부주일입니다. 5월 21일이 부부의 날이었거든요. ‘가정의 달 5월에 둘(2)이 하나(1) 되자’는 뜻으로, 5월 21일이 부부의 날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부의 날에는 남편은 아내에게 빨간 장미를, 아내는 남편에게 핑크장미를 주는 날입니다. 물론 홀로 되신 분들을 위해서는 자녀가 대신 아빠에게, 엄마에게 장미꽃을 전해 주는 날입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미혼남녀는 아직 피지 않는 장미, 일명‘못다 핀 꽃 한 송이’를 선물합니다. 가정의 회복이야말로 허물어져 가는 문명을 세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문명에 대한 최종 평가는 그 문명이 어떤 유형의 남편과 아내, 부모를 만들어 냈느냐에 좌우된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자녀가 아니고 부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가보다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창조하셨고, 부모보다 자녀보다 부부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부부를 창조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가정의 중심축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결혼이고, 그로인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의 중심축인 부부의 관계가, 안타깝게도 지금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여,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성경 창세기 1장 27절, 28절 말씀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가정 축복자임을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모든 부부들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시 한 번 결혼주례사를 듣는다 생각하시고,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부부는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등산을 하던 중, 힘이 든 아내가 남편에게 콧소리를 내며 업어달라고 했습니다. 차마 남자 체면에 안 된다고도 말 못하고, 남편은 아내를 업고 가는데 등에 업힌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나 무겁지?”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럼, 머리는 돌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뎅이는 부었지.”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남편이 아내를 내려놓더니, 이번엔 자신을 업어달라고 합니다. 아내가 끙끙거리며 남편을 업었는데, 미안했던지 등에 업힌 남편이 물었습니다. “여보, 난 가볍지?” 그러자 아직 화가 안 풀린 아내가 낑낑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 들었지, 싸가지 없지, 쓸개 빠졌지. 얼마나 가벼운데?” 이런 부부는 하나가 아닙니다. 분명히 둘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런 부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부부는 결혼을 통해, 부모를 떠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합하여 한 육체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즉 부부가 된다는 것은 모든 일에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쪽인 남녀가 하나로 완전해 집니다. 결혼을 통해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고,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고,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부부는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인 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이렇게 둘이 합하여 한 육체로 살아간다는 것은 , 희노애락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픔이 둘의 아픔이 되고, 한 사람의 기쁨이 둘의 기쁨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부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살아가기에 신령한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부생활을 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부생활은 어떻습니까?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고, 주님이 함께 하시므로 셋이 하나 되는 신령한 연합을 이루셨습니까? 주님과 함께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생활로, 가정과 부부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24절 말씀을 우리 여자 분들만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봉독한 말씀은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따르고, 주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위해, 성경의 가르침대로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아내는, 결코 하나님께 복종하는 성도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격언집인 탈무드에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남자를 늙게 하는 네 가지가 있는데, 불안, 노여움, 자식, 악처이고 그 중에 첫째는 악처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누구인가? 그는 순종하는 아내를 얻은 남자이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 공처가 – 아내에게 매여 사는 안타까운 남편을 말합니다. 경처가 – 아내를 보면 깜짝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며 사는 불쌍한 남편을 말합니다. 기처가 – 아내를 보는 순간 기절하는, 기절초풍하는 남편을 말합니다. 사처가 – 아내를 보는 순간, 기절을 넘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남편을 말합니다. 이 유머 가운데 뼈가 있습니다. 이 시대 남편들은 똑똑한 아내보다 순종하는 아내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사소한 일로 남편인 엘버트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왕의 남편인 엘버트 경은 너무너무 화가 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꽝 닫은 후 잠가버렸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에게 사과할 겸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누구요?” “나 영국 여왕이요.” 그러나 남편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여왕이 다시 부드럽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예요. 문 좀 열어주시지 않겠어요.” 남편은 문을 열고 아내를 맞아주었답니다. 지금 이 시대의 남편들은 아내들의 따스함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순종이 꼭 필요합니다. 유명한 음악가 바하는 35세 때 첫 부인을 잃고, 두 번째 아내인 안나 막달레나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순종하는 아내였습니다. 남편의 모든 일에 한 번도 ‘아니요’라고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바하는 아내에게 늘 악보를 기록하는 것을 부탁했습니다. 13명의 자녀를 돌보느라 늘 힘들었지만 순종했습니다. 바하의 칸타타 300곡 중, 190곡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바로 아내의 순종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 아내로서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의 삶을 통하여 남편들의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감명 깊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한겨울, 당신의 퇴근 무렵, 따뜻한 붕어빵 한 봉지 사들고, 주차장에 서 있겠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당신의 피로한 어깨를 그냥 느끼겠습니다. 당신이 들어오는 당신의 집을, 향내 나는 그런 집으로 만들겠습니다. 때로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로, 때로는 보리차 끓이는 냄새로, 때로는 진한 Chanel의 향기로, 말을 하지 않아도 피곤에 지친 당신을 위해, 나는 슬며시 레몬 넣은 홍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미모와 외모로서 당신 곁에 잠시 머무르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서, 있어도 없는 듯, 없으면 서운한 그런 맘 편한 얘기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불꺼놓은 보금자리에서 대화하다가 동이 트는, 풍성해진 우리 맘을 발견하겠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나를 빌어 태어나는 아이가 장성해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당신으로 꼽는다면, 나는 영광스럽게도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여도, 행복해 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늘 사랑해서 미칠 것 같은, 꼭 내 것으로만 여겨지는 그런 아내가 아니라, 아주 필요한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공기 같은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행여 내가 세상에 당신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일이 있어도, 가슴 한구석에 많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그런 현명한 아내가 되겠습니다. 지혜로와, 슬기로와, 당신의 앞길에 아주 밝은 헤드라이트 같은 불빛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호롱불처럼, 아니 반딧불처럼, 당신 가는 길에 빛을 비출 수 있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가 흰서리 내린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었소.’ ‘당신을 만나 행복했었소.’라는 말을 듣는 그런 아내가 되겠습니다. 세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우리 남자 분들만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이 아내에게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얼마큼 사랑해야 하는가? 마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주심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의 사랑은 ‘아가페’를 의미합니다. 곧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즉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셨던 것처럼,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아내들은 남편들의 무관심, 남편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폭언, 인격적 모독도 당하고, 심지어는 폭행도 당하고 사는 아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남편을 생각하면 87%가 스트레스가 일어나고, 우울증 증세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코놀리’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남편의 인격의 참 지표는 아내의 건강’이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가에 대한 평가는 아내의 건강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생활 10년 된 부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아내보다 남편들이 요구한 것이 2배나 더 많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자기 아내들이 조용하고, 말 잘 듣고, 항상 웃고, 온순하고, 겸손하고, 순결하고, 인내하고, 친절하고, 손님대접 잘 하고,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싹싹하고, 소박하고, 검소하고, 무슨 일이든지 “아니요” 하지 않고, 남편의 말에 절대 순종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갖춘 아내는,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 된 성도 여러분! 남편의 가장 큰 본분은 그 아내를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인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부인 교회를 위해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회와 성도를 사랑하신 희생적인 사랑으로 아내 사랑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헨리 스미드라는 분은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그의 가슴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가슴에 있는 갈비대로 아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국 콜롬비아 바이블 컬러지에 로버트슨 맥퀼퀸이라는 학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 무리엘이 치매에 걸리자, 그 동안 맡아온 학장직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 무리엘은 지난 8년 동안 건강이 점점 약해져왔다. 나의 아내 무리엘이 내가 함께 있어주는 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내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학장직을 사임하고, 아내의 곁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내가 42년 전 결혼서약을 하면서,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내 무리엘을 돌볼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아내가 나를 40년이 넘도록 돌보아 왔지만,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돌보는 것이다. 물론 의무감이 아니라, 아내에 대한 사랑과 기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고백입니까? 성경은 아내 사랑의 표준을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러므로 이 시대의 아담인 남편 된 여러분에게 아담의 사랑고백을 아내들에게 하라고 부탁할께요. “아담이 이르되 나의 사랑하는 아내 하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사랑고백은 “당신은 내게 있어서 최고로 소중한 존재요. 내 생명과도 같은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아담의 아내 하와를 향한 이 사랑의 고백은 언제였습니까? 아담이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입니다. 아담이 처음 본 하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담이 하와와 첫선을 보는 자리에서 그토록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배필로 짝 지워 주셨다!”는 이 믿음이 아담에게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아담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즉석 미팅에서, 그같이 멋진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담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더라면, 아담은 즉석에서 그 같은 사랑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부된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런 아담과 같은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내게 가장 좋은 아내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남편들만 아니라 아내들도 “오, 하나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내게 가장 좋은 남편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정의 행복은 바로 이런 부부의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멘입니까? 어떤 두 젊은이가 아주 뜨겁게 연애를 하다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일년도 채 안되어서 이혼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이별가만 부릅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한 많은 미아리고개” 등, 이런 이별가만 자꾸 부르니까 결국은 이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한 남편의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 이렇게 고백한 시가 있습니다. 근사한 카페에서 젊은 연인들이 마시는 커피보다, 당신이 자판기에서 뽑아 준 커피가 더 향기롭습니다. 회식자리에서 건네는 비싼 양주보다, 식사 후에 당신이 건네는 냉수 한 잔이 더 맛있습니다. 모피코트를 입은 사모님보다, 무릎이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은 당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갈비찜을 잘 만드는 일류 요리사보다, 라면을 푸짐하게 끓이는 당신이 더 위대한 요리사입니다. 허리가 으스러지도록 껴안는 젊은 연인보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라며 흔드는 당신의 손이 더 뜨겁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값싸게 내뱉는 사랑보다, 늘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짓는 당신이 더 영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나와 함께 늙어가는 당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시고,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돌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가장 좋은 배필을 주셨다는 이 믿음을 가질 때, 우리도 아담처럼 사랑고백을 하고, 이별가가 아닌 사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 애정을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또 그렇게 노력할 때 함께 행복해 질 수 있게 됩니다. 네 번째 부부의 행복과 축복원리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3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큰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 시작.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한 부부가 차를 타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두꺼비 한 마리가 도로 가운데서 어슬렁거리면서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급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다행히 두꺼비는 죽지 않았지만, 옆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가 자동차 앞 유리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습니다. 아내는 “그까짓 두꺼비가 뭐가 중요하다고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람을 다치게 하느냐?”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온 부부는 그 두꺼비가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꺼비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구해 주신 답례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런 행운에 너무 기뻤지만, 서로 바라는 게 달라서 부부는 세 가지 소원을 쉽게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예배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세 가지 소원을 상의해 보십시오. 절대로 싸우지 마시고요. 차를 길옆에 세워 놓고 모의에 들어간 부부는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의견일치를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티격태격 말다툼을 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소원은 같은 소원인 돈으로 하고, 나머지 두 개의 소원은 각자 한 가지씩 이야기하자.” 그래서 3가지 소원을 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부부의 공통된 소원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돈을 달라.’ 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는 그들에게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궐 같은 저택에,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손 하나만 까딱 해도 온갖 시중을 들어주는 하인들을 거느리는, 그야말로 호의호식하며 살게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부부가 각자 하나씩 소원을 말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먼저 부인이 두꺼비의 귀에 대고 조용한 말로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요. 젊은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돼지처럼 먹고 노는 저 남편이 죽고 근사한 남자를 만나 재혼하는 것입니다.” 남편도 두꺼비 귀에 대고 가만히 이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두꺼비님, 제 소원은요. 매일 앙알거리며, 잔소리만 하는 저 마누라가 죽어버리고, 멋진 여자와 재혼하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여러분! 이 두 부부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둘 다 재혼도 하기 전에, 죽는 소원이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부부가 싸움을 하고, 남편이 집을 나가 방황하다가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댑니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찬송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귀 기울여 들어보았습니다. / “돌아 와 돌아 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 와 돌아와 어서 와 돌아오라.” 남편은 아내가 부르는 찬송소리를 듣고는, 남편인 자기를 생각하고 부르는 줄 알고 감동이 되어 문을 열고, 들어가서 화답합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부부는 오래 만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서로 끌어 안고 이런 찬송을 불렀답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부의 행복은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각자가 서로 줄 때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가정의 달 5월에 다시 한번 우리들의 가정, 특히 가정의 기본을 이루는 부부의 사랑을 점검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은 육체적으로 한 몸, 정신적으로 한 마음, 신앙적으로 한 믿음이 되어 있는 부부입니까? 아내 된 성도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순종하는 아내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남편 된 성도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시고, 믿음의 반석도 든든한 여러분의 즐거운 동산, 오직 예수님만 섬기는 부부가 있는 복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08) 그리스도인의 부부생활 마가복음 10장 6-9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셔서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중매를 서신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사람들은 가정생활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계 각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는 미국의 유명한 호텔 ‘홀리데이 인’의 회장인 ‘윌리엄 월터'(William B. Walter)라는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네 가지 사랑을 말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둘째 가정을 사랑해야 하며, 셋째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넷째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에 성공하려고 하기 전 먼저 가정생활, 부부생활에 행복하고 즐거운 승리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메데루샤인은 왜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는가를? ① 하나님은 여자가 교만해질까봐 남자의 머리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② 너무 정욕적이 될까봐 남자의 눈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③ 호기심이 지나칠까봐 남자의 귀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④ 말이 많을까봐 남자의 입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⑤ 시기 질투가 많을까봐 남자의 심장으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⑥ 너무 돌아만 다닐까봐 남자의 발로 만들지 아니하시고 ⑦ 여자는 여자이니 정숙하고 존경하여 아끼라고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에도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가정은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하는 가정입니다. 2. 사랑을 발전시켜 즐거움을 더하는 부부입니다. 사랑은 결혼과 동시에 완성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의 범절도, 이제부터 시작이지 완성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고부터 더욱 깊고 즐거운 사랑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서로가 배우자의 민감한 부분을 찾아 환심을 사도록 노력하면서, 남편은 구태의연한 체면에서 탈피하며 부인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하고 화사한 옷으로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을 맞이하고, 부부간에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아내의 할 일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지 개심 시키는 것이 아니다”고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아내 ‘루스 그래함’은 말했습니다. 잠언 5장 18절에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했으며, 히브리서 13장 4절에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고 하셨으니, 부부의 침실은 최초의 에덴동산이니 육체로 부부간에 즐기는 것은 사랑의 즐거움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부부간에 육체의 사랑은 “서로의 충족관계요, 자신의 몸을 아끼는 행위요, 사랑의 표현이라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3. 없는 중에도 절제하여 서로 감사의 조건을 찾는 부부입니다. 절제가 없고 감사가 없는 가정 치고 즐거운 가정이 없으며, 감사하는 가정이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 때 남자를 지배케 하려고 했다면 아담의 머리로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다. 만일 여자로 남자의 노예가 되게 하려고 했다면 아담의 발로부터 여자를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었으니 이것은 남녀의 인권이 동등함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서로 절제하며, 감사하며 살아야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벧전 3:1-8, 엡 5:21-22, 딛 2:5). 4. 긍정적으로 살면서 서로 일하는 부부가 승리적인 삶을 사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평생을 함께 살면서 부부간에 대화나 생활이 시종일관 부정적인 삶을 사는 이가 있고, 그 반대의 삶을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평생 일하지 않고 사는 이가 있고,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시간까지 일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승리의 삶을 사는 부부는 열심히 일하며 긍정적인 삶을 사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입니다. 5. 예수님을 내 집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부부가 승리적인 즐거움의 삶을 삽니다. 제일 행복한 가정은 여호와를 모신 가정이라고 시편 128편에 말씀했고, 여호와가 허락하지 않은 집은 내 것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국가가 아니면 존립할 수 없다고 시편 127편에 말씀했습니다.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예수님을 버리면 다 잃게 되고, 세상 것을 다 잃어도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세주로 모시면 다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마 7:24). 우리 모두 예수님을 내 집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살아 비가 오고 바람이 몰아쳐 홍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는 가정, 무너지지 않는 부부가 되어, 부부생활의 승리하는 즐거운 가정, 행복한 부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고 승리하는 부부의 생활은 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아끼며, 서로 이해하는 부부 ② 사랑을 발전시켜 즐거움을 더하는 부부 ③ 없는 중에도 절제하며, 서로 감사의 조건을 찾는 부부 ④ 긍정적으로 살면서 서로 일하는 부부 ⑤ 예수님을 내 집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사는 부부 라고 했습니다.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가정과 부부의 생활속에 충만하사, 승리하는 행복한 부부생활, 가정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9) 부족함을 채워 주세요. (창세기 2장 18-25절) 결혼한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이 됩시다.> 앞으로 결혼할 사람은 따라 합시다. <돕는 배필을 꼭 찾으세요.> 결혼하신 분들은 다 경험하는 것이지만 성장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부부에 대해서 이런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부부란 10대에는 서로가 꿈속에서 살고, 20대에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산다. 30대에는 서로가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고 산다. 50대에는 서로가 가엾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니까 산다. 그리고 70대에는 서로가 고마워서 산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깨어지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은 사단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은 서로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1. 부부는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영국 리버풀 대 연구진이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부부 사진 160쌍, 그러니까 320명 얼굴 사진을 섞어 놓고 부부를 짝맞추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의 다 맞추었습니다. 부부는 얼굴도 닮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감정을 나누기에 얼굴에 감정선이 같아 지기에 모습이 비슷하여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부는 감정 표현도 같아 진다는 사실입니다. 식성도 같아 집니다. 취미도 같아 집니다. 부부는 병도 같아 집니다. 식성과 운동량이 비슷하기에 병도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성격, 가치관 그리고 생각까지 같아 진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부부는 결혼하면 3주 서로 연구하고 3개월 사랑하고 3년 싸우다가 30년을 참고 견디게 됩니다. 다름으로 만나 같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부입니다. 같이 살다보면 모든 것이 같아집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부부는 돕는 배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혼자 사는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돕는 배필을 주셨습니다. 부부는 서로의 인생을 책임져 줘야 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을 격려하고 칭찬해야 합니다. 아내들의 격려와 칭찬은 사회생활에 피곤한 남편들에게 훌륭한 보약이 됩니다. 남편들은 아내의 격려를 갈망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격려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매일 한마디씩의 보약을 처방합시다. “당신 정말 멋져요”,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예요”, “당신은 참 훌륭해요” 하고 말입니다. 제가 경주로 임원대회를 하고 집에 돌아 왔는데 아내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내가 없으니 잘 지낸 것 같습니다. 하루 3끼 식사 준비 안해도 좋아서 인지 얼굴이 밝았습니다. 제가 <얼굴이 빛난다>고 하니까 <남편의 얼굴이 보니 좋아서 그런다>고 하니까 내마음이 좋았습니다. 제가 교회 없는동안 교회에 가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얼굴이 환하다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남편이 사회생활을 잘하고 직장생활을 잘하고 가정생활을 잘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내가 남편이 하는 일을 인정해 주고 감사하면 신이 나서 남편은 일을 더 잘 합니다. 남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노고를 아내가 알아주고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을 할 때 더 잘합니다. 남자는 경쟁적이고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냅니다. 여자가 이것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아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를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남편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남편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오해합니다.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말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 아내가 하는 말이 <당신은 내말을 안들어요><내가 이런 말을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에 문무백관에 모아 놓고 왕이 말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듣는 남자는 빨간 기 쪽에 서시오- 49명 아내의 말을 안 듣는 남자는- 노란 기 쪽에 서시오- 1명, 왕- 어떻게 그대는 아내의 말을 안 듣느냐고 묻자 – <오늘 아침 아내가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해서 이곳에 섰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왕이 껄껄 웃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남편와 아내는 돕는 배필입니다. 부부로서의 짝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보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당신은 내뼈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 당신 때문에 살아><나, 당신이 있어 행복해>라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저 요즘 이런 소리를 듣고 살아 갑니다. 2)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부모자식 관계는 세워주어야 합니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9살 난 철수에게 “철수야 이다음 장가가면 엄마랑 같이 살자”고 말했습니다. 철수는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철수는 어두운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아무래도 그건 안되겠어요.” 엄마가 “왜 안되니?”라고 묻자 철수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옆집 영희가 안된데요”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공경은 인간이 인간의 첫도리입니다.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세워 드리세요. 부모가 자식을 세워주는 것, 자식이 부모를 세워주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누어있던 아이를, 아무것도 못하는 아이를 먹기고 재우고 씻겨서 서서 다니게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부모의 도리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스스로 서서 사회생활하고 자기 짝 찾아서 결혼해서 살 때 쯤 되면 부모는 점점 더 약해져서 쓰러지기 시작합니다. 일터에서는 젊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 줘야하고 육체적으로 노화 현상이 일어나서 힘이 없어집니다. 이때 자식들은 부모를 세워줘야 합니다. 이것이 효도하는 것입니다.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세워줘야 합니다. 이처럼 부모 자식관계는 서로 세워주는 관계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이것이 옳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서도 그것을 떠니자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이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신체장애를 극복한 자랑스러운 영국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인 “프랑크상”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바를로라는 여성은 런던 심포니 오케 스트라의 비올라연주자이다. 그녀는 열여섯살때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위대한 음악가의 꿈을 키워가던 바를로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꿈과 희망을 모두 잃고 깊은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향한 희망의 빛을 놓지 않았다. “네가 비록 청력은 잃었지만 아직 시력은 남아 있단다. 사람들의 입술을 보고 말의 뜻을 파악하는 독순술을 익히도록 해라. 그러면 계속 음악을 할 수 있단다.” 어머니의 격려에 힘을 얻은 바를로는 독순술을 배워 사람들과의 대화는 물론 비올라연주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고의 비올라연주자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말 한마디가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우리 부모가 자녀에게 할수 있는 것은 사랑하며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축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최고가 되개 하실 것이다>고 축복할 때 자녀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인물이 될것이다> 부모를 세워주고 자녀를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를 두고 자녀을 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3) 하나님이 만드신 형제관계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형제관계는 아름다움과 미의 문제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가 연합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관계는 성령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함께 해주는 겁니다.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할 때는 주십니다. 구할 때 얻은 것이 형제입니다. 형제는 피를 나눴습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인의 피를 나눈 형제들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서로 나누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아름답고, 선하고, 향기로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요일 저녁에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내마음에는 마음의 그릇이 좁으니까 근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을 고백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를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큰일이고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큰 일들이지만 성령님이 함께 해 주시고 도와 주신다는 것을 체험하면 어려운 문제가 해결받을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번주 한주간 살면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게 하고 직장생활에서는 직장에 성령의 기름부음을 신앙생활에는 신앙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도록 성령과 동행하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부부는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행복합니다. 부모자식은 부족함을 세워 주어야 행복합니다. 형제자매는 부족함을 함께 해주야 행복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말씀과 사랑이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칭찬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고백합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돕는 배필로 인하여 <이는 내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하나님이 연합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 신앙의 명문가정 룻1:6-18 이제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 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입니다. 사실 가정하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도 아니고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에 부모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그분들의 고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철없이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부모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형제끼리 싸우고 그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려는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이 가정은 2절에 ‘베들레헴 에브랏’에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에브랏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에 남편이 엘리멜렉이란 사람인데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풍요가 있었고, 미래가 있었던 이 아름다운 가정에 어느 날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흉년은 그들의 삶의 터를 순식간에 무너뜨릴 기세였습니다. 결국 이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이민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서 온 그들은 10년 만에 가진 것 마져 다 잃어버렸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잃었습니다.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도대체 이 실패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들이 흉년을 피해 찾았던 모압은 어떤 곳입니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좋은 곳입니다. 수자원이 풍부해서 농사도 목축도 잘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악한 곳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의 사술이 있고, 죄악이 관영합니다. 따라서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이나 장소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가정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에게 고난 자체가, 시련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해결을 부탁하면 그것은 이미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끌어안고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까 정말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린 시절 라디오 조립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도 호기심이 발동해서 재료를 사다 납땜질을 하며 조립을 했는데, 그 조잡한 라디오에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큰 라디오가 고장났습니다. 왠지 고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뜯었는데, 어디가 고장났는지도 모르겠고, 다시 맞추지도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실컷 야단맞고 전파사가 갖다 준 적이 있습니다. 진작 전파사에 갖다 주었더라면 야단도 안 맞고 망신도 당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괜히 문제를 부둥켜안고 해보다가 일만 그르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면 건드릴수록 꼬입니다. 인간의 손 떼가 묻을수록 골치 아파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여진 이 가정은 다시 일어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음세대를 이끌어갈 신앙의 명가를 만들었습니다. 이 가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나왔고, 그리고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 역시 이 가문의 혈통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아침에, 이 가정이 어떤 모습이었기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잿더미 위에서 이 엄청난 명가를 만들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이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20-21절을 보면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여기서 우리는 나오미의 자기 반성을 보게 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말을 보면, 그때야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남편 있겠다, 두 아들이 있겠다, 무슨 걱정이 있었겠습니까? 사실 모압 땅으로 간 것은 흉년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 풍족한 삶을 꿈꾸면서,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잃었어요. 자기를 나오미라 하지말고 마라라고 부르라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은 기쁨의 삶이 아니라 슬픔의 삶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시 127:3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됩니다.” 파수꾼은 ‘watchman’ 입니다. 말 그대로 지키는 사람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경계망을 뚫고 적군이 들어와서 초토화를 시킨 것입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지킨 것이 모두 허사가 되었습니다. 룻기 1장에 보면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오미가 말할 때마다 “돌아가야 된다, 돌아가야 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오미는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선택했던 자신의 삶을 깨달았기에 이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던 이 가정이 명문가로 쓰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남아 있는 세 식구 속에 남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세 과부는 각자 인생 속에 다가온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더 심각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놀라운 사랑이 남아있는 세 식구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함께’ 라는 단어가 무려 5번 정도 나옵니다. 고통과 환난이 닥치면 가족들 간에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우리 집안 망쳤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두 며느리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렸다면, 부모의 죄 값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부모를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남편이 아팠을 그 때 부모가 조금만 더 다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면 남편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이미 멍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합니다. 섭섭합니다. 상처가 됩니다. 동시에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소록도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이 쓰신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70세가 훌쩍 넘은 한 노인이 목사님을 찾아왔답니다. 그러면서 소록도에서 살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하더랍니다. 사연인즉슨 이렇습니다. 40년 전 자식들 중에 한 아들이 나병이 걸렸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있고, 도저히 키우지 못하겠더랍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 어느 날 그 아들을 데리고 산 속에 갔습니다. 슬쩍 뒤로 가서 큰 바위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빗맞고 맙니다. 또 하루는 그 아들을 데리고 물 속에 같이 빠져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울면서 자기는 죽어도 괜찮지만 다른 형제들 생각해서 아버지는 절대 죽으면 안 된다고 만류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아들이 소록도로 가게 됩니다. 그 후 태어난 자식들까지 9남매를 잘 키웠답니다. 공부 다 시키고, 나눠 줄 것 다 나누 주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나이가 들면서 자식들 눈치가 보여서 이 집 저 집 전전하는 신세가 됐습니다. 인생이 뭐 이런가 한탄하다가 문득 그 아들이 생각났습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소록도에 찾아갔다 만났습니다. 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기쁩니다. 40년 동안 하루도 아버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나 같이 나쁜 애비를 왜 기억했냐? 잊어버리지 … ” 아들이 말합니다. “아뇨.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됐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꼭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아버지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달라고.” 아버지는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생애는 그 아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행히 그 아들이 나병에서 치유되어 음성나환자촌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이렇게 간청한 겁니다. “목사님! 제발 여기서 살게 해 주세요. 그 아이에게 지난 40년을 보상해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바쳐 기른 아홉 놈(!)은 그 아버지를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버린 한 아들이 그 아버지를 거두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겁니까? 단 한 가지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세 과부가 함께 일어납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두 며느리는 이야기합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리고 풍속도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익숙한 것과는 결별하고 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는 두 며느리를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실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말씀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의 원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헷세드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희들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들을 변함없이 진실로 사랑해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런 사랑을 베풀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되었다. 나도 내 삶에 너희들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너희들의 삶을 살아서 나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붙들고 우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눈물은 그냥 신세 타령이나 하는 그런 눈물이 아닙니다. 고난 한 복판에서 이들에게 잃은 것도 많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서로 상처를 감싸안고 흘리는 사랑의 눈물입니다.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가정이 망하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좋은 가정도 이 사랑이 없으면 부서집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이 가정이 명문가로 쓰임 받았던 세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정에는 하나님을 향한 같은 ‘신앙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치감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러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룻이 ‘붙좇았더라’라는 단어는 창세기 2:24절에서 아담과 하와와 결혼할 때 ‘결합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어진 단어입니다. 이런 고백이 16절,17절에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머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보세요. 이 룻의 신앙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포기하지도 멀리하지도 안는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온 룻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습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다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도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 시대에는 여자가 어디 취직할 데도 없었습니다.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밭에서 추수할 때 이삭을 남겨두는데 룻도 보리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옵니다. 일꾼들 잔심부름을 해주면서 주어오는 보리로 어머니를 봉양합니다. 어떻게 보면 회개한 자에게 구원의 회복은 있을지 모르나 더 이상 이 땅에서 일어 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축복의 현장인 베들레헴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은 그의 가정을 만져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이삭을 줍던 그 밭의 주인은 나오미의 친족인 보아스입니다. 여기서 룻은 자신의 남편이 되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가 누구입니까? 마1:5-6절에 보면 메시야 족보를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누가 나옵니까? 보세요.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세상에 오실 때 이 보아스의 가문을 통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족보에는 여자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메시야 족보에는 몇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여인들이요 하나님 앞에 큰 영광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 중에 룻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룻은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다음세대에게 신앙의 명가의 기초를 닦을 의무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더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신앙의 유산을 꼭 물려주시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만이 다음 세대를 끌고 갈 수 있는 비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적으로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그가 세상 적으로 성공했거나 평범하게 사는 것과 상관없이 신앙의 영향력을 행사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록펠러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석유재벌 록펠러는 백만 평 대지에 12개의 대학을 세워 미국사회에 헌납했는데 그중 하나가 시카고 대학입니다. 시카고 대학은 한동안 동양학생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버드나 예일, 스탠포드 같은 대학에 비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명문 중에 명문입니다. 설립한지 100여년 남짓한 기간에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역시 노벨상을 수상한 교수가 29명이나 재직하는 학교가 바로 시카고 대학입니다. 록펠러는 시카고 대학을 비롯해서 12개의 종합대학과 4,928개의 교회를 지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 모든 일을 십일조만으로 이루었다고 하니 그가 소유했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한번은 시카고 트리뷴지의 경제부 기자가 물었습니다. “록펠러씨 당신은 지금까지 26년 동안 세계 제일의 부를 누리고 계시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첫째는 온전한 십일조생활을 철저히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한번도 십일조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온전한 순종의 생활을 유전으로 받았습니다. 셋째는 예배시간에 맨 앞자리에 앉아 은혜를 받았습니다. 92세까지 한번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설교를 할 때 영적 파장이 앞자리에 중간에 뒷자리에 순서대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록펠러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유형의 재산보다 더 풍부한 무형의 재산을 물려줌으로써 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5월 가정의 달을 돌아보며 우리 역시 가장 관심을 가져야할 일이 있다면 우리 다음 세대에 믿음의 명가를 세워나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좋은 토양에서 잘 자라 주도록 항상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 역시도 다음세대로 자라나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주고 끊임없이 믿음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꿈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와 가정을 통해 이 민족과 열방에 소망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우리 역시 믿음의 명가를 세워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1) 하나님의 사랑받는 가정 요14:22-26 서론: 본문은 유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구체적인 부가 설명이다. 22.”가룟이 아닌 유다” 눅6:16에”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그러니 가룟유다와 구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예수님 말씀하시니 명성을 떨치겠다는 말씀으로 오해 — 22에서 “세상에는 왜 안나타냅니까?라고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이적 행하시 고 소문 내지마라고 하셨으니까 유다가 그렇게 말한만도 한다. 1.예수님은 나타내는 것 뿐만아니라 함께 거주를 하시겠다고 하셧다. 1)어떤 사람과 함께 거주하시는가?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 순종하는 사람이다. (1)말씀 순종보다 사랑하는 것이 먼저다. 말씀 때문에 사랑하면 어렵다. (2)할머니가 손자를 업고 무거운 줄 모른다. 그러나 손 자만한 무개의 돌을 업고 있어라 하 면 십분도 어렵다. (4)교회 오는 것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하기 때문에 오면 힘든다.사랑하기 때문에— (5)그래서 요21:베드로에게 3번사랑 다짐하고 18-19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말씀–베드로 는 로마에 가서 순교했다. 2.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사랑이 가능하다. 1)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효도 할 수 있다. (1)부모님의 사랑을 아는 자식이 돈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늙은 어머니를 버리겠습니까? (2)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 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3)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많다. 2)여러분 우리는 나를 사랑해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까지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까? (1)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실화 6.25 때 미군 부대에 타이피스트 여자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빨치산 대장 노릇을–여인은 미군 부대의 정보를 빼주고 하다가 발각되었다. *전시에는 사형이다–상관에게 아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켜서 당신이 책임지고 공부를 잘 시켜주겠다고 약속해 달라–그러면 남편과 접선 할 때 당신이 우리를 잡아라 그러면 당 신이 승진할 수 있다 그대호 되었다.기자가 여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 었더니 여인의 대답인즉 “어머니에게는 사상은 없고 오직 사랑만 있을 뿐이다”하면서 울었 다.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있은 것이다. 3.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거처를 함께하신다. 1)나타낸다고 하신 주님은 유다의 질문으로 더 구체화했다.같이 살겠다는 것이다. (1)Make our abode With him(우리의 주민등록을 그의 집에 옮기겠다)는 것다. (2)그래서 하나님 함께하는 성도의 가정 주소는 다음과 같이 바뀐다. (3)사랑시 화평구 진실동 27가 39번지. (4)우리의 주소를 옮기겠다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것이다. 2)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가정은 분위기가 다르다. (1)여러분 가정에 하나님과 예수 님이 성령으로 밤이나 낮이나 항상 계십니까?! (2)계신다면 가정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3)솜털처럼 포근하고 안정이 있고 행복합니다.말씀이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있다. (4)반대로 마귀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3)여러분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시간에만 하나님 만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2)여러분 가정에서도 항상 하나님을 뵙고 살아야 된다. (3)에클레시아–건물이 교회가 아니다.우리 자신이 교회다. 4)주님 사랑하고 말씀대로 순종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 가정에 계시면 축복이다. (1)시112:1-2“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2)그래서 교회는 가정 안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3)산업화가 되면서 가족제도가 붕괴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가족이 함께 모여 가정예배 (4)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교회에서만 잘한다고 잘 믿는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잘해야 된다. (1)교회에서만 정직한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정직해야 된다. (2)교회에서만 거룩하면 되는 것 아니고 집에서도 (3)감리교 어떤 집사는 교회 오면 할렐루야 집사 가정에서는 고래집사 (4)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결론: 오늘은 우리 가정에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의 사랑 받고 사는 행복한 가정이 되자고 말씀드렸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가능합니 다 (12) 행복한 가정 (골 3:18-19) 오월 가정의 달을 맞아서 오늘은 가정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부의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 사랑은행(Love Bank)이야기 TV 프로그램 중에「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공부하고 돈벌기 위해 대도시로 가고난 후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은 시골마을에 찾아가 영상편지도 띄우고 퀴즈도 맞추어 성적이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방송국으로 초청해서 결선을 벌려 상품을 푸짐하게 드리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최종 결선에서 스피드 퀴즈를 하게 되었는데 단어를 기록한 종이를 할아버지가 설명하면 반대편에 할머니가 단어를 알아 맞추는 게임이었습니다. 그 문제에「천생연분」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당신과 나 사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참 생각하던 할머니가 “웬수”라고 외쳤습니다. 할아버지는 다른 대답이 나오니 마음이 답답하여 “두 글자가 아니고 네 글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평생 웬수!”하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짝지어 주실 때에는 천생연분으로 살라고 부부되게 하셨는데 천생연분이 아니고 평생원수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작년 일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이혼율 54.6%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것은 가정이 무너지고 해체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해지고, 사회가 건강해지며, 국가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사랑은행(Love Bank)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행에는 사람마다 계좌가 있고 입출금이 자유롭게 진행됩니다. K군이 L양에게 평소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다가가서 꽃을 선물을 한다면 L양의 사랑은행에 K군의 계좌에 2만이 입금이 되어 잔고가 2만이 되는 것입니다. 또 생일날 책을 한권 선물을 준다면 3만이 입금되어 잔고가 5만으로 올라갑니다. 또 비가 오는 날 우산을 가지고 집까지 데려다 주면 3만이 입금이 되어 자꾸 잔고가 쌓여갑니다. 또 K군의 마음에도, L양이 넥타이를 생일선물로 주면 4만이 입금이 되고, 그후에 책을 선물을 받을 때 2만의 입금이 되어 두 사람의 사랑은행에는 잔고가 자꾸 올라갑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마음에 사랑은행에 잔고가 쌓여 20만정도가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에 들어가서 함께 살다보니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이 된장찌개가 맛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때 사랑은행의 잔고에서 1만이 출금이 되어 잔고는 줄어듭니다. 아내도 이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당신이 된장찌개를 끓여요”하고 화를 벌컥 내자 남편의 마음속의 사랑은행에 2만이 출금되어 잔고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불평하다가 두 사람의 통장에 제로(0)가 되고 마이너스 통장이 되면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은행에는 잔고가 자꾸 쌓여가도록 부부가 서로 협력하며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2. 통제하지 말고 돕는 배필로 살라 하나님이 최초로 만드신 아담의 가정은 돕는 배필로 살라고 부부를 짝 지어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단어는 영어성경(NIV)을 보면「suitable helper」라는 단어로서 꼭 알맞은 적합한 도움을 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 주셨으니 얼마나 잘 맞추어서 부부되게 하셨을까요? 여러분에게는 그 남편이 꼭 적합하며 알맞은 배우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행복한 가정생활의 첫 번째 원리는 서로 도우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돕는 방법들을 연구하고 도우면서 살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생활에 들어가면 돕는 것이 아니라 통제(Control)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긴 머리를 좋아하니까 머리를 자르지 마! 화장은 적당히 하고 너무 진해서 어디 나가는 여자같이 하지 마! 스커트가 너무 짧은데 좀 길게 입어! 하고 남편이 아내를 통제하려고 듭니다. 또 아내들은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나만 바라봐! 내가 당신 한 사람을 보고 결혼했으니 나만 사랑해! 하고 통제가 시작됩니다. 부부가 서로 행복하게 살려면 통제하지 말고 돕는 배필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남편을 위하여 무엇을 도와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사는 부부가 행복한 부부입니다. 행복한 부부는 좋은 내조자 좋은 외조자로 살아가는 부부입니다. 3. 남녀 차이를 인정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남녀가 서로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넓은 들판에 나비와 들소가 있습니다. 나비는 미풍에도 예민하게 반응을 합니다. 꽃들의 아름다움을 감지하며 꽃에 앉아서 꿀을 땁니다. 작은 상처에는 치명을 입으며 날지 못합니다. 같은 들판에 들소가 있습니다. 들소는 미풍은 커녕, 강풍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비가 좋아하는 꽃을 꺾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들소는 잘 부리면 넓은 들판을 거뜬히 갈아 냅니다. 남편이 들소라면 아내는 나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에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죤 그레이의「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나 윌라드 할리의「그 남자의 욕구, 그 여자의 갈망」이라는 책이나 앨런 바바라 피즈부부가 쓴「거짓말하는 남자 눈물 흘리는 여자」「지도 못 보는 여자 말 안 듣는 남자」라는 책에는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시각적으로 만드셨는데 비하여 여자는 청각적으로 만드셨습니다. 남자는 시각적이기에 예쁜 여자가 지나가면 쳐다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쳐다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 마음속에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으면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여자들은 청각적으로 만드셔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을 때에 행복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향하여 하루에 3번씩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남자는 성공과 일에 관심이 있다면 여자는 관계 지향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남자는 좌뇌가 발달되어 능동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석적이고 통합적이어서 추리를 잘하고 논리적입니다. 따라서 멀리 새로운 낮선 곳을 찾아갈 때에 남자들은 지도를 보고 추리하여 분석하며 잘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내들은 우뇌가 발달되어 직관적, 감성적, 수동적, 언어적이며 지도를 못 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디를 찾아가다가 아내보고 지도를 보라고 하지 마십시오. 또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차를 세워놓고 물어보고 가라고 하면 남편들은 자존심 때문에 절대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남자는 강인함과 용기와 추진력과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면 여자들은 부드러움과 표현성과 양육 돌봄에 뛰어 납니다. 남자는 일에 만족하며 아내로부터 존경 받고 싶어 합니다. 여자들은 관계에 만족하며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대화의 목적도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마디를 하는데 사실과 정보를 얻고 결론을 내리려고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하루에 5만 마디를 하며 지지와 공감을 얻고 친밀감과 동등감을 중심으로 대화합니다. 결혼하는 목적도 남자는 사랑(성)을 원해서 결혼한다면 여자들은 로맨스를 원하는 것입니다. 4. 남편이 원하는 것 & 아내가 원하는 것 남편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내로부터 존경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을 때에 가장 행복합니다. 여기에 아내의 역할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① 남편의 ‘머리 됨’에 순종하는 것(엡 5:22) ② 남편을 존경(Respect)하는 것(엡 5:33) ③ 남편을 사랑(Love)하는 것 (딛 2:4) ④ 집안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잠 31:27)입니다. 반면에 아내가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내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고, 보호 받고 싶어 합니다. 본문 19절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아내를 위해 남편의 역할이 3가지가 있습니다. ① 머리 됨(Leader)의 역할(엡 5:23-30) ② 사랑하는(Loving)것 (엡 5:25-27) ③ 돌보는(Caring)것(엡 5:28-30)입니다. ‘최고의 돌봄’은 나의 삶을 아내와 함께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성경에 아내를 괴롭게 말라고 했는데 지금도 매 맞는 아내들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혹시 남편들이 아내를 때리면 소리를 지르며 다시는 때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친정이나 시댁에 알려야 합니다.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에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건강한 가정 행복한 부부가 되도록 노력하며, 기도하며, 서로 사랑하고 감싸주는 부부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쇄
군산 지구촌 교회
요셉의 효행을 본받읍시다
( 창 50:1-9 )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아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 창 50:5 )
부모를 잘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은 어떤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을 넘어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십계명 중에 제 5계명에서 제 10계명에 이르는 인륜 계명의 제일로 효를 말씀하신 이유는 이 효가 바로 모든 인간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근본이 되고 시작이 되기 때문이며, 가정과 사회질서의 기본이 되고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도둑질이나 살인죄를 범할 수가 없고 좋은 시민, 좋은 회사원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딤후 3:1-3 에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라고 했듯이 부모를 거역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런 세상입니다.
고로 오늘날 부모를 거역하는 세대 속에서 사는 우리 성도들은 더욱 힘써 효를 행해야 합니다. 효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모범적인 효자 한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으니,그가 바로 창세기에 나타난 야곱의 아들 요셉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어버이 날을 맞아 이 요셉의 효행을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요셉은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렸습니다
야곱은 12 아들 중에 요셉을 제일 예뻐하고 사랑해서 채색옷을 특별히 지어 입혔습니다. 요셉이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은 그만큼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고 마음에 들게 행동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뭐니뭐니해도 부모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첫째 효도이지, 비단 옷에 육선이 상에 가득하게 해 드려도 마음이 즐겁게 못해 드리면 효도가 되지 못합니다.
중앙청 뒤에 효자동이 있는데, 그 동네가 ‘효자동’ 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집에서 시아버지가 주무시던 이불 밑에서 두고 나간 어린 아이가 깔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며느리가 일 나갔다가 들어와 보니 아이는 막 숨이 넘어갔는데, 이를 본 아이 엄마가 얼른 아이를 업고 남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시아버지가 아시면 걱정하실까봐 얼른 몰래 업고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죽은 아들을 보고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케 한 불효자식이라고 뺨을 냅다 한 대 쳤답니다. 그랬더니 글세, 그 뺨을 맞은 죽었던 아이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여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는 커녕 도리어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해 드리지는 않습니까? 잠 15:20 에 보면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하였고, 잠 23:25 에도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2.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어린 소년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형들에게 점심을 갖다 주며 잘 있는가 보고 오라고 할 때, 살기등등한 형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겠으나,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머나먼 길을 찾아갔습니다. 세겜에 가서 형들이 이동했으면 핑계대고 그냥 돌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또 그 멀고 먼 길을 굳이 찾아갔습니다. 결국 거기서 요셉은 형들에게 죽을 뻔하게 되고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또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선조들과 같이 장사지내 달라’ 고 명령하셨는데, 그에 순종하여 1,000리(400km) 가 넘는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아버지를 장사지냈습니다. 그 옛날, 버스도 택시도 없는 시절에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마는 요셉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도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이런 효자이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더 큰 축복을 받고 대애굽의 총리대신까지 되었습니다.
엡 6:1 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옳으니라’ 는 말은 ‘당연하다’ (It is right…) 는 뜻입니다. 결국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자녀들의 마땅한 도리요 의무인 것입니다.
옛날 순 임금의 아버지 고수는 후처의 꾀임에 빠져서 아들을 몹시 괴롭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이복동생 상이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보고 순이 들어가서 건져주었는데도, 계모는 그것을 순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해서 피가 나도록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순은 지극한 효성을 다했습니다. 한 번은 계모가 물이 없는 우물에 비녀를 빠뜨리고 순을 보고 들어가 건져오라고 들여보내 놓고는, 남편 보고는 물이 없는 샘을 그대로 두면 빠지기 쉽고 위험하니 메워버리라고 해서 순이 들어간 우물에 돌과 흙을 퍼부었습니다. 다행히 우물 안에는 옆으로 굴이 있어서 순은 그곳으로 빠져 나와 살았다고 합니다. 한 번은 계모가 순에게 썩은 곡식을 옮기라고 다락에 올라가게 해 놓고는 불을 질렀습니다. 마침 옆에 삿갓 두 개가 있어서 순은 그것을 양 겨드랑이에 끼고 뛰어내려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못된 부모이지만 순은 끝내 효도를 잘 해서 그 소문이 요 임금에게까지 들어가 요 임금이 순을 데려다 키워서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효자 순은 역시 훌륭한 임금이 되어 천추에 빛나는 임금이 되었습니다. 마치 효자 요셉이 대애굽의 지혜로운 총리대신이 된 것과 같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거룩한 조직(Divine institution) 입니다. 가정이 부패하면 국가도 부패하고 교회도 부패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의 부패는 부모와 자식간에 올바른 관계가 되지 못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 를 가진 분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 아닐진대 자녀들은 부모에게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지만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했습니다. 눅 2:51 에 보면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물질로 봉양했습니다
창 47:12 에 “그 아비와 형제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고 한 말씀대로, 요셉은 굶어 돌아가시게 된 부모님을 모셔다가 잘 봉양했고,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낳으신 자식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과 그 자식들을 잘 살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자기가 쓰는 용돈의 5분의 1만 드려도 효자가 아니겠는가, 자기가 옷을 다섯 번 해 입을 때 한 벌만이라도 해 드리면 불효자는 아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자식들은 부모님께 서슴없이 돈을 달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당신이 낳고, 키우고,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건만 용돈 달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고 합니다. 알아서 옷 한 벌, 용돈 한 푼이라도 아쉽지 않게 해 드리도록 다시 다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밥을 먹여 키웠으면 부모가 늙고 불편하실 때 먹여드리는 것이 당연하고, 옷 입지 못할 때 옷 입혀 키웠으면 거동 못 하시는 부모님 옷 입혀 드리는 것도 당연하고, 부모님이 대소변 가려서 자식 키워주셨으니, 부모님도 그렇게 모시는 것이 당연하데 자식들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딤전 5:8 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고 했는데, 하물며 부모님을 돌보지 않고 봉양치 않는 사람이야 얼마나 죄가 크겠습니까?
옛날에는 고려장이라고 해서 늙은 부모님을 산 채로 산에 갔다 버렸다고,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고 하지만, 늙으신 부모님 기도원에나 양로원에 데려다 놓고 몇 년씩 돌보지 않고 찾아보지 않는 것은 고려장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돌아가신 후에 후회말고 잘 봉양합시다. ‘심는대로 거두는 법칙’ 은 부모님께 심는대로 후손들을 통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에도 70일장을 지냈고,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향 재료를 넣는데도 40일이 걸렸으니, 얼마나 많은 비용과 정성이 들었겠습니까? 참으로 상상도 못할 효성을 보였습니다.
4. 부모님께 영예를 돌렸습니다
요셉은 종살이, 감옥살이 별별 고생 다 하면서도 성공하고 축복받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부친을 잘 모셨으니 얼마나 부모님께 영예를 돌리고 기쁨을 드렸겠습니까?
으리으리한 황금 수레를 보내 아버님을 모시고 왔으며, 휘황찬란한 옷을 입은 요셉이지만 맨발로 뛰어나가 맞아 드리고 목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 때의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돌아가신 뒤에도 70일장을 지내고 1,000리가 넘는 가나안 땅으로 장례 행렬이 지날 때 얼마나 굉장했겠습니까? 부모님께 큰 영예가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말씀에서 ‘공경’ 이라는 말은 곧 ‘무겁다’ 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가볍게 대하지 않고 무겁게 대하라는 뜻입니다. 부모에게 욕을 돌리는 자식이 되지 말고 크나큰 영예를 돌리는 자식이 됩시다.
5. 형제 사랑으로 효도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던 형들이었지만, 부모님이 낳은 자식으로서 그 형들과 형들의 자식들까지 사랑으로 돌보고 키웠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장례식이 끝나자 전에 요셉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이제라도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르기를 너희는 요셉에게 이같이 이르라. 네 형제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였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라고 말하자,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울었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아버지 체면 때문에 자신들을 돌보아 주었으나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복수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떠는 것을 보고 울었던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다고 했습니다.
이제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못 사는 형제 자매를 돌봐 주시고, 형제간에 화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부모의 마음에는 모든 자식이 다 안쓰럽고 염려가 되므로 진정한 효자라면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형제를 사랑으로 보살핌으로써 효를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가장 기뻐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부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최대로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효자, 효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 삼하 18:9-15 , 삼하 24:24-33 )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 18:33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은 세상에서도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중요시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된 것으로서, 하늘 나라의 모형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비슷해서 그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다윗 왕이 그 아들 압살롬을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가장 사랑하고 잘 생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궁궐에서 쫓겨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피난을 해서 요단을 건너 마하나님에 이르렀을 때, 압살롬은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자기 부친 다윗 왕과 그 부하들을 진멸하려고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에 다윗 왕의 부하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과 잇대 장군 등 몇몇 장수들이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때에 다윗 왕은 부하 장군들에게 ‘꼭 승전하고 돌아오라’ 는 당부는 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그 아들 압살롬을 위해서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고 신신 부탁을 했습니다.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그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부디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접하라’ 고 한 것입니다.
마침내 에브라임 수풀에서 접전이 벌어져 싸우던 중 압살롬이 노새를 타고 숲 속을 달리다가 큰 상수리 나무 가지에 그의 머리털이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고 노새는 빠져나갔습니다. 이때, 한 군사가 요압 장군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더니 ‘네가 그걸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그리 했었다면 은 열 개와 띠 한 개를 주었으리라’ 했더니, 그 군사가 하는 말이 ‘은 천 개를 준다해도 왕의 아들을 죽일 수 없나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요압 장군이 군사를 데리고 가서 작은 창 세 개를 압살롬의 가슴에 꽂고 부하 열명이 달려들어 쳐 죽였습니다.
이때 다윗 왕은 두 문 사이에 앉아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승전의 소식보다도 그 아들 압살롬의 생사 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올 때마다 ‘압살롬이 어찌 되었느냐?’ 고 물으면서 혹시 그 아들이 죽었을까봐 걱정했습니다.
마침 아히마하스란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 오는 것을 보고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 고 물었을 때, 왕의 그러한 심중을 헤아린 아히마하스가 엎드려 절하면서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 구스 사람이 달려 왔을 때도 ‘내 아들 압살롬이 잘 있느냐?’ 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구스 사람이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보고했더니,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너무 마음이 아파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아’ 라고 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얼마나 그칠줄 모르고 슬피 울었던지 요압 장군이 들어가서 ‘왕과 왕의 자녀와 왕의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신복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십니까?… 이제 봤더니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 하였나이다. 빨리 일어나서 왕의 신복들을 위로하시지 않으면 왕의 평생에 없었던 큰 화를 당하실 것입니다’ 라고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 왕은 성문에 올라 앉아 백성을 위로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부모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 흡사한 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 대한 다윗의 사랑을 통하여 반역하고 대적하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버리시키까지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역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입니까?
1. 찾으시는 사랑
다윗은 그 불효막심하고 못된 자식이지만, 제발 죽지 않고 돌아오기만 간절히 소원하여 싸움터에 나가는 장군들에게 신신 당부하기를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고 간곡히 말하고, 문에 앉아서 그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고 자기를 죽이기까지 하려는 그 패역무도한 자식이건만 죽지 않고 살아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찾고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잃은 자,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난 죄인들을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고 계시는 모습을 세가지 비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세상에 찾아오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다음은, 여인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 들고 온 방안을 쓸며 찾는 비유인데 이는 성령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며, 마지막, 탕자의 비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놀라운 사랑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패역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멀리 떠났으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찾고 계십니다.
2. 용서하는 사랑
다윗은 자기(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는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지만, 용서하는 사랑으로 그 아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두 문 사이에서 안절부절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어떤 부잣집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나가 얼마 안가서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살 수가 없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도무지 아버지가 자기 같은 못된 자식을 용서하고 받아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내기를 ‘만일 이 못된 자식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면 아무날 아무시에 기차를 타고 우리 동네 앞을 지날 터인데, 내가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 흰 손수건 하나를 걸어 주십시오. 그러면 다음 정거장에 내려서 들어 가겠습니다.’ 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돌아와서 기차에 몸을 싣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향해 갑니다. 점점 자기 집 동네가 가까울수록 이 아들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목을 길게 내밀고 자기 동네를 바라 보니, 대추나무 뿐만 아니라 앵두나무 할 것 없이 나무마다 가지마다 흰 손수건, 흰 보자기, 흰 홑이불, 이불 호청까지 전부 하얗게 눈과 같이 덮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부모는 혹시나 아들이 잘못 보고 지나칠까봐, 흰것이란 흰 것은 있는 대로 다 내다가 나무에다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이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가 317장의 가사를 되새겨 보십시오.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감당하고 못 받으시리오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또한 사 1:18 에서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셨고, 한 강도는 죽는 순간에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하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3. 목숨을 버리는 사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 패역무도한 아들이건만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좋을 뻔 했다’ 고 자기 목숨까지 주고라도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원하는 부모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식들이 홍역을 하거나, 몹시 아파서 괴로워 할 때는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 생명을 대신해서라도 살리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의 죄를 위해서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죽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다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 3:16 ) 고 말씀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님만 믿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시고 그 죄를 대신 갚아주사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기로 결심하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어버이 날을 하루 앞둔 오늘 다시금 한없는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동시에 더 크고 넓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최고입니다.
( 고전 13:1-13 )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전 13:3 )
훈훈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이나 화사하게 펴서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는 꽃들은 오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이처럼 화창한 날씨와 만발하게 핀 온갖 꽃들이 오월을 아름답게 하듯이 우리의 생애를 가장 빛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사랑은 최고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하였습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이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사랑을 이루고 실천하는 일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곧 사랑으로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7 ).
이에 오늘 우리는 우리가 최고의 것으로 여겨야 할 사랑이 과연 어떤 면에서 최고인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고 열심히 실천하는 일에 힘쓰고자 합니다.
1. 사랑은 최고의 능력입니다
참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빅톨 위고의 유명한 소설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죄를 범해 감옥에도 여러 번 갔다 왔으나 마음은 변화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날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어느 교회의 성직자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집의 은촛대를 보고는 그의 결심이 깨졌습니다. 그는 그 은촛대를 훔쳐 가지고 나왔습니다. 몰래 도망하려다 경찰한테 붙잡혀 그 성직자 앞에 끌려 왔을 때 성직자는 말하기를 ‘저쪽 것도 주었는데 어찌 하나만 가져 갔는고’ 라고 하여 장발장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사랑을 베푸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계속된 선지자의 외침과 징계에도 불구하고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완악한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어 피흘려 죽게 하신 사랑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용서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그 사랑을 보여 주셨을 때 마침내 인간들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라도 버리겠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제일 큰 능력입니다.
아이들도 완력만 가지고 기르려면 잘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슨 실수나 허물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해 줄 때에 마음이 감동될 줄로 믿습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싸우게 되는 것은 서로 사랑으로 대해 주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가 완력, 폭력을 버리고 사랑으로 대해 주기를 축원합니다.
사랑밖에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가 없고 가정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랑의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시고 성령을 내 마음속에 모셔야 되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2. 사랑은 최고의 덕입니다
갈 5:14 에 보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수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것을 줄이면 10계명이 되고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위로 하나님 사랑하고 아래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됩니다. 이것을 다시 하나로 줄이면 바로 사랑입니다. 고로 사랑은 성도들이 갖추고 이루어야 할 최고의 덕목인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살인을 할 수 없고 이웃을 해칠 수도 없고 거짓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드러몬 헨리(D. Henry) 라고 하는 사람은 “세계 최대의 것은 사랑이다” 라고 말했고 골 3:14 엔 “사랑은 온전케 매는 띠니라” 라고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은 말씀하기를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유익이 없고 모든 비밀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비록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아무 것도 아니라” 고 했습니다. 또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순교를 해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습니다. 최고의 덕은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덕인 사랑을 지닌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사랑은 최고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 나옵니다.성령은 같지만 그 은사는 서로 다른데 지혜의 은사, 지식, 믿음, 병고침, 능력,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등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 은사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길(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좋은 길을 보이겠다고 말씀하시며 12장을 끝맺고 13장에 와서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제일 큰 은사요 가장 좋은 길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즉 은사란 ‘거저 주어진 선물’ 이라는 뜻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복된 것들을 말합니다. 고로 은사란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간절히 사모하고 누려야 하는 축복들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것들 중의 최고가 바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나이가 굉장히 많이 들었을 때 설교를 하라고 하면 10번이고 20번이고 ‘성도들이여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누군가 ‘왜 선생님은 그렇게 똑같은 소리만 하십니까?’ 하고 물을 때에 ‘사랑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하면서 설교할 때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가장 귀하고 복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실로 여러분들 모두 이러한 가장 귀한 축복인 사랑의 은사를 소유하시길 축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내가 수양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사랑을 소유하고 행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인 것입니다.
로마서 5:5에 의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마음이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되는 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마치 달빛은 햇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와야만 우리 또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같이 여러분들 하나 하나의 가지가 예수님께 붙어서 사랑의 진액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옮겨와 진정한 사랑의 열매를 맺으시길 축원합니다.
원만한 부부관계가 되려면?
( 엡 5:21-33 )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엡 5:33 )
옛날에 어떤 부인이 여러 해 동안 병환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간호하며 뒷바라지를 하다 못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밥이나 한 상 잘 지어주고 나서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양심에 괴로움을 느끼며 우물가에서 쌀을 씻고 있는데 도마뱀 한 마리가 떨어진 쌀 알을 물고 시궁창 다리 밑으로 들어 갔다가는 또 나와서 물고 들어가고, 또 나와서는 물고 들어가곤 해서 쌀 씻다 말고 다리 밑을 보았더니 도마뱀 숫놈이 꼬리가 나무에 눌린 채 언제부터인지 도망을 못 가고 있는데, 그 암놈의 도마뱀이 숫놈의 도마뱀에게 양식을 물어다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 부인은 크게 자책을 했습니다. ‘저런 미물도 자기 남편이 죽을까봐 부지런히 양식을 날라다 먹이는데 나는 저 미물만도 못하구나!’ 하고 도마뱀도 놓아주고, 도망갈 생각도 버리고 울면서 그 사실을 남편에게 말했더니 남편은 자기도 눈치를 다 채고 있었다고 하면서 ‘나는 기왕에 죽을 몸 이젠 되었으니 어서 당신 갈 길을 가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끝까지 남편을 잘 간호하고 돌보아서 결국 병도 낫고 벼슬까지 하게 해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미물과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뜨거운 사막의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하며 피땀 흘려 벌어서 보낸 돈을 춤을 추러 다니며 제비족에게 다 갖다 주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걸핏하면 연약한 아내를 개 패듯이 두들겨 패며 남자라고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고 또한 처 자식은 헐벗고 굶주리는데 술 퍼마시고 투전해서 돈을 다 없애버리는 한심한 인간도 있습니다. 개나 돼지나 닭같은 짐승은 암놈, 숫놈이 절대로 싸우는 법이 없는데 사람은 부부가 싸우고 다투는 집이 많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의 가정은 절대로 그래선 안되겠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가정은 누가 봐도 부러워하는 행복한 부부 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이에 우리는 오늘 원만한 부부 관계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 두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5:25에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고 했고 28절에는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피를 흘려 주시고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그와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함으로 남편의 참된 권위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는 않고 남편의 권위만 내세우는 쓸데없는 고집과,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벧전 3:7 에는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물론 남편만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피차 복종하라’ 고 했듯이 피차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부부간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흔히 결혼하면 서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다가 서로 기대가 어긋나서 사네 못사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상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고 또 주고도 못다 준 것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남편은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줄까?’ 아내는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줄까?’ 를 생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사랑해 주려고 할 때 피차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을 해서 어떻게 하면 절대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까 하고 생각하다가 남편이 제의를 했습니다. ‘내가 밖에서 기분이 나쁘면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들어올테니 위로해 주고 서비스를 잘 해주시오!’ 아내는 ‘내가 집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앞치마를 삐딱하게 돌려 찰테니 위로해 주고 어루만져 주세요’ 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서로 기분 나쁠 때 위로해 주고 서비스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일이 생겼습니다. 남편의 모자도 삐딱, 아내의 앞치마도 삐딱하게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서로 위로해 주기를 바라고 먼저 위로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의논하기를 서로 똑같이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먼저 위로해 주고 서비스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 중심으로 하여 무엇인가 먼저 주려고 할 때 사랑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듯이 부부간에도 서로 허물과 실수가 있어도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마치 허물과 단점을 들추어 내기 위해서 결혼한 것 같은 부부가 있습니다. 영국에서 어느 부부는 치약을 짜 쓰는데 한 사람은 중간에서부터 눌러 쓰고, 한 사람은 끝에서부터 짜 쓴다고 싸우다가 결국 이혼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찮은 것 가지고 이해하고 양보하지 못해서 이혼까지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혹 다투어도 서로 자존심 세우느라고 오래 끌지 마십시오.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고 했습니다. 혹, 다투었다가도 속히 화해하도록 하십시오. 부부간에 자존심을 세우면 뭘 하겠다는 말입니까? 먼저 상대방을 용서하고 화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부부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남편이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몇 년 씩 두고두고 들추어 내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들 못 낳고 딸만 낳았다고 걸핏하면 투정하고, 시집올 때 많이 해 오지 않았다고 두고두고 이야기 한다든지 하는 것은 다 비열한 짓입니다. 허물과 약점이 있는 것을 들추거나 꼬집지 말고 상호 감싸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고 했습니다.
셋째는, 구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감사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품고 있지 말고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표현해야 됩니다. 말로도, 행동으로도, 글로도, 선물로도 사랑을 표현할 때 항상 신선하고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쑥스럽게 생각하거나 점잖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부인은 남편이 너무 무뚝뚝해서 고민하다가 병이 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의 마음에 들게 해 보려고 최선을 다 했는데도 사랑한다거나 예쁘다거나 훌륭하다는 말을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고민하던 끝에 병이 나서 죽게 되었습니다.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남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당신은 참 좋은 아내였는데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하더랍니다. 그 고백을 처음 들은 아내는 얼굴이 환하게 피면서 ‘여보, 진작 그 말을 해 주시지 왜 이제야 하세요. 나는 당신의 마음에 안드는 아내인 줄 알고 고민하다가 이렇게 병이 났다오’ 하면서 운명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칭찬과 감사와 사랑을 표시해야 합니다. 전 가끔 책을 읽다가 머리에 안 들어올때는 편지 한 두장을 쓰고 나면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아는 어구를 다 동원해서 칭찬하며 ‘당신은 청초한 코스모스같고 눈은 맑은 호수 같다’ 고 속에도 없는 말을 휴지조각에 써서 ‘여보 읽어봐’ 하고 내밀면, 그것을 읽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좋다며 그것을 핸드백에 모아 두는 것을 보고 과장이 되어도 좋으니 아내에게, 남편에게 좋은 점을들어 칭찬하고 감사할 때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자식들은 일어나 사례하며 그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여러 여자보다 뛰어난다 하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2.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여자는 다소곳하게 남편에게 복종하는 미덕이 있어야지 남편을 지배하려 들거나 싸우려고 들면 결코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잠언 21:9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본문 5:22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고 했습니다. 특히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고전 11:3 에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 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아내는 남편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잠든 사이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몸에서 하와가 나온 것이지 하와의 몸에서 아담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있고 난 후 하와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의 머리뼈로 만드시지도 않고 아담의 발가락 뼈로 만드시지도 않고 몸의 한 가운데 갈비뼈로 만드셨다는 것은 아내가 남편보다 놓은 것도 아니요, 낮은 것도 아니라 남편과 평등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정의 질서상, 가족 구성원의 기능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복종해야지 죄 짓는 일이나 신앙 생활을 못하게 하는 데는 복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엡 5:21 에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했으므로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할 것은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대로 행하며 누가 봐도 부러워 하는 복되고 사랑스런 부부, 화평한 가정이 되도록 합시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
( 고전 13:4-7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고전 13:4 )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5월의 둘째날인 오늘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첩경인 가정 안에서의 사랑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가정은 세상의 어떤 가정들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제 가족, 제 식구만 아는 사람도 이기주의자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또한 자기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랑은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가정에서 사랑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며 사는 가정, 서로 상대편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가정은 분명히 사랑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좋은 옷도 잘 못 사주고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해 주는데 종일 아이들 데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참 고생 많지…’ 하고, 아내는 남편 입장을 생각하면서 ‘종일 윗사람 눈치 보면서 뼈빠지게 일해서 가족들 벌어 먹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실까…’ 하며 서로서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복된 가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시어머니라면 나 같은 며느리 두었을 때 섭섭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내가 저렇게 나이 젊은 며느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면 고부간에도 의가 나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정성들여 키운 자식인데… 내 아들 사랑을 몽땅 빼앗아 가는구나’ 하고 생각만 하니까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세대가 달라진 오늘날의 자녀들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자식들은 옛날 고생하며 지내오신 부모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야 될 줄 압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하며 항상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목사의 입장을, 목사는 교인들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교회도 역시 평안할 것입니다.
2. 먼저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국엘 갔는데, 모두들 만반진수를 차려 놓은 상에 앉아서 뻗정 손으로 1m나 되는 젓가락을 들고 서로 먹여 주면서 희색이 만연하여 행복하게 지내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지옥을 좀 보여 달라고 했더니 보여 주는데 똑같은 탁자에 똑같은 음식을 놓고 1m나 되는 똑같은 젓가락을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바싹 마른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배가 고파서 굶어 죽어가고 있더랍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먹여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만 퍼 먹으려고 애를 쓰는데 몸은 움직일 수가 없고 1m나 되는 긴 젓가락이니 입에 갖다 넣을 수는 없고 하니까 전부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더랍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을 누리는 비결을 잘 설명해 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봅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 아닙니까? 내가 사랑을 받고 싶으면 남을 내가 먼저 사랑해 주고, 내가 칭찬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칭찬해 주는 생활을 해야 사랑이 실현됩니다.
제가 결혼 주례할 때마다 늘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늘 달라고만 하고 받으려고만 하는데 성숙한 사람은 주려고 합니다. 용서해 주고, 기쁘게 해 주고, 편안하게 해 주고, 이해해 주고, 이렇게 주려고 할 때 그런 가정은 행복합니다. 이기주의적인 남편, 이기주의적인 부인은 자기만 위해 달라고 하고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 부부는 얼마 못갑니다. 가령 부부가 사랑이라고 하는 사과를 나누어 먹을 때, 남편은 아내가 맛있게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되고 맛있게 먹도록 도와 주어야지, 아내는 한 입도 안 먹고 맛도 못 보았는데 혼자 다 먹어버리면 안됩니다. 이기주의자입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제 고집만 부리지 말고 남편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 드리고 기쁘게 해 드려야 좋은 아내입니다.
내 기분 맞춰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상대편의 기분을 이해해 주고 맞추어 주도록 노력할 때 분명히 행복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걸치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3.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려면 교만함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군목 수양회 때 가정이 파산되어 이혼 직전에 있던 한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화합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서로 팔장을 끼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 목사님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기고, 사모님도 얼굴이 희고 눈이 부리부리하게 잘 생긴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였는데, 왜 이혼 직전에 왔었는가 하면 서로 잘 생긴만큼 서로 고집을 부리고 교만해서 어느 편 하나 자존심을 굽히려 들지 않고 제 고집만 부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찮은 일로 이혼까지 할 뻔 했는데 다행히도 그 수양회를 통해 각자 자기 잘못이었다고 하면서 재결합되었던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부부간에, 식구끼리 무슨 자존심이 필요하며, 교만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갈 5:13 에 보면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고 했습니다.
서로 섬기는 데 대한 좋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화목한 가정이 있었는데, 하루는 가장되는 큰 아들이 옷을 사입고 와서 바지가 길다고 하면서 줄여달라고 했습니다. 열 두 시쯤 그의 아내가 조용히 일어나 바지를 줄여서 다려 놓았습니다. 3시쯤 어머니가 일어나서 ‘며느리가 고단한데 언제하랴’ 생각하고 일러준 대로 싹둑 잘라서 다려 놓았습니다. 시누이는 시누이대로 새벽에 일어나 그만큼 잘라서 걸어 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지를 입어보니까 거의 반바지가 되어서 온 식구가 재미있게 웃고 조금 더 잘라서 반바지로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록 바지는 반바지가 되었어도 가정은 더욱 사랑이 넘치고 화목해진 것입니다.
여러분, 서로서로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합시다. 세상에서 가장 삭막하고 외로운 장소는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가정은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4.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야야 합니다.
사랑의 눈은 긍정적인 눈입니다. 가급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해야 그 가정이 화평하고 행복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는다’ 고 했습니다. 가령,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볼 때, ‘저것이 들어와서 애지중지 키운 내 아들의 사랑을 빼앗아 갔지’ 하고 밉게 보기 시작하면 발꿈치까지 트집 잡는다는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고습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좋게 보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다 실망을 하고 믿어주지 않고 소망을 갖지 않아도 사랑을 가진 부모는 그 자녀에 대해 실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고 힘쓰기를 바랍니다. 남의 단점만 찾아보려 들지 말고 장점, 좋은 점을 찾아보고 칭찬하도록 힘씁시다.
주님은 자신을 배신하고, 저주하고 도망간 베드로에게도 부활 후 제일 먼저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고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마침내 수제자로서 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못자국을 보여달라고 하던 의심많은 도마도 주님께서는 들어 사용하사 순교하기까지 힘있게 복음을 증거한 귀한 사도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가족된 우리 성도들이 비록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끝내 긍휼과 자비로 대해주시고 주님의 귀한 일을 맡겨 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고로 우리 성도들은 가정에서도 긍정적인 눈을 가지고 바라 보도록 합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단점은 있는 법이고 아무리 몹쓸 사람같이 보여도 어느 구석엔가 장점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입장을 서로 바꾸어 생각하며, 사랑을 먼저 주는 생활을 하며,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하며, 긍정적인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가운데 사랑을 실현하는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정의 행복을 이루는 가장이 되려면…
( 엡 5:25-30 , 엡 6:4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여라(엡 5:25)
오늘의 본문은 한 아내의 남편이요 자녀의 부모로서의 한 가정의 가장들이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어떤 공동체나 그 안의 최고 책임자는 실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로서, 그가 얼마만큼 책임있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행. 불행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데는 여자의 책임만 큰 것이 아니라 가장된 남자들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고 행복하게 하는 가장이 되려면 어떤 가장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 악한 것에 물들지 않은 가장이어야 합니다
많은 가정들이 불행하게 되고 파산되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는 가장 되는 사람이 악한 것에 취하고 중독되는 것입니다.
전에 북한에 살 때, 우리 집에 세든 집 아저씨가 아편쟁이였던 것이 생각납니다. 겉모습은 그렇게 미남이고 상냥한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마약중독자였습니다. 마약이 떨어지면 부들부들 떨거나 눈을 뜨지 못하고 땀만 흘립니다. 처자식이 굶어도 물건 내다 팔아서라도 아편을 맞고, 도적질을 해서라도 아편을 맞아야 했습니다. 결국 비참하게 죽고 가정이 파산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술에 중독된 사람도 패가망신합니다. 가장이 술에 중독돼서 가정이 파괴되고 식구들이 비참하게 되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천재 음악가 바하(Johann Sebastian Bach) 나 슈베르트(Franz Schubert) 같은 사람도 술에 중독돼서 가정이 파산되고 일찍 죽었습니다. 씽클레어(Upton Sinclair)는 말하기를 ‘술은 천재들의 발아래 놓인 가장 큰 덫이다’ 라고 했습니다.
캐나다의 매킨타이어(McIntyre) 란 사람은 술 사먹기 위해 자기 금광을 25달러에 팔았는데, 몇 년 후에 2억 3천만 달러로 올랐다고 합니다. 술에 중독되어 헐값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16살에 마케도니아의 치리자가 되었고, 18살에 승전 장군이 되었고, 20살에 왕이 되어 33살에는 당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33살에 술 중독으로 미친 사람처럼 죽어버렸습니다. 당시 그는 보이는 세계는 다 정복했으나 자기를 정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몸의 건강을 위해 마셨고 다음에는 축배를 들기 위해 마시다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술은 자신도 망치고 가정도 파괴하고 나라도 망하게 합니다. 잠 23:29, 30 에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창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이것이 마침내 뱀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 5:18 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고 했습니다. 딤전 3:8 에는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해야 된다” 고 했습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으니 술은 입에 대지도 말아야 합니다.
무엇에 중독돼서 내 마음대로 그만 둘래야 그만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악한 마귀의 올무에 빠진 증거입니다.
담배에 중독돼서 끊을 수 없다는 것도 배후에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안 피우는 사람보다 암병이 훨씬 더 많이 걸립니다. 가장이 담배 피우는 집의 어린이는 감기도 몇 배나 더 걸리고, 태아에게도 큰 영향을 줍니다. 미국 담배나 한국 담배나 반드시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글귀가 꼭 적혀 있잖습니까?
그 외에 도박에 중독된 사람, 색에 중독된 사람도 다 사탄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을 망치고 가정을 불행과 파탄에 몰아 넣는 것입니다. 투전하다가 전답 팔아먹고 재산 날리고 거지가 된 사람이 이 세상에 그 얼마인지 모르고, 도박하다가 돈 잃고 자살한 사람도 얼마인지 모릅니다.
좌우간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가장이 악한 것에 중독되어 자제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그런 것은 보지도 말고 그런 자리에 앉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잠 5:18-21 , 마 5:28 ).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가장이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는 자녀들 보고 부모를 공경하라고만 하지 않고, 4절 엡 6:4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잘 키우라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자녀이지, 함부로 욕하고 때리라는 화풀이감이 아닙니다. 학대해도 되는 옛날 노예처럼 생각하거나 내 멋대로 취급해도 되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가장들이 분별없이 자녀를 구타하고 욕을 퍼붓고 악담 저주합니다. 내가 낳았다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내 자식이 아닙니다.
어떤 아버지는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듯이 몽둥이나 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자식들이 불만을 가지고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도리어 반항하고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이 잘못하였을 때는 사랑의 징계를 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것도 자녀들이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이 하여 감정이 악화되지 않도록 사랑으로 타이르고 훈계하고 체벌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잠언 19:18 에서는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고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고 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깊은 사랑과 이해심을 가지고 자녀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무디 선생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의 존경을 다 잃더라도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러나 자식에게서 존경심을 잃으면 나는 불행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한테 무섭기만 해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그 마음에 존경하는 경외심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성공적인 변호사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가 작은 선물 상자를 주셨는데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답니다. ‘아들아, 금년에 365시간의 선물을 네게 주겠다. 매일 저녁 식사 후 한 시간씩을 네게 준다. 그것은 네 것이다. 네가 원하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도 네가 원하는 오락을 할 수도 있고 그 시간은 네 것이란다.’ 이것을 소개한 후 변호사가 이어 말하길 ‘물론 나의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셨을 뿐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그 선물을 주시곤 했습니다. 나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시간의 결과로 오늘의 내가 된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가장되시는 분들이여, 당신은 과연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3.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의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때 쿠퍼(Dr. Thomas Cooper) 라는 사람은 30,000 단어 짜리 사전을 만들기 위해 8년 동안 수집해 놓은 자료 노트를 그의 아내의 실수로 몽땅 불태워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쿠퍼 박사는 밖에서 들어와 아내의 경솔한 짓을 알고도 화내지 않고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디나, 디나, 세상에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하고는, 다시 8년을 수고하여 자료 수집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었기에 아내의 허물을 묵묵히 덮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의 사랑이 없는 가정은 사막같이 삭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맥킨지(E. C. MeKenzie)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곳은 사랑이 없는 인간의 마음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태리의 금언 가운데 ‘내가 죄를 범할 때 남편도 결코 죄가 없지 않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의 잘못은 그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남편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아내 하와를 지으실 때에 아담의 갈비뼈를 취했다는 것은, 아내는 첫째, 남편보다 높지도 않고(머리뼈), 낮지도 않고(발가락 뼈), 부부는 평등하다는 뜻이며 둘째,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가슴) 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셋째, 아내는 남편의 보호의 대상(갈비) 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넷째,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한 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은 너무 까다롭고 율법적이면 안 됩니다. 아내를 진정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고, 덮어줄 줄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어떤 부부는 이혼하려고 법정에 왔는데, 원인은 치약 짜는 것 때문에 따지고 말다툼한 것이었습니다.
영국의 한 주부가 오랫동안 이름 모를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는데 죽음에 임박하자 무뚝뚝한 남편이 처음으로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해? 당신은 참 착하고 좋은 아내였는데’ 라고 말하자, 아내는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여보, 정말이예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이 하도 말을 안해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줄 알고 고민하다 병이 되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늦었어요’ 하고 얼마후 숨졌다고 합니다.
특히 남편들은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칭찬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아내가 깜짝 놀랄 정도로 칭찬해 주도록 하라’ 고 했습니다. 말로 해도 좋고 때로는 편지를 써서 표현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의 권위만 내세우지 말고 잘못했을 때는 ‘여보, 미안해, 내 잘못했소’ 하고 사과도 해야 합니다. 핵우산이란 말이 있지만, 가장의 ‘사랑 우산’ 밑에 있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엡 5:24 의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하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처럼, 아내는 남편의 한 몸이요, 지체입니다.
4. 영적으로 바로 선 가장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가장이 바로 서고 굳건한 믿음을 가질 때 그 가정은 진정 복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의 많은 가정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노아로 인해 홍수 심판에서 구원받은 그의 가족과 아브라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축복을 누린 그의 가정, 그리고 가족 뿐 아니라 종들과 주위 이웃까지 구원의 축복을 받게 한 백부장 고넬료 등 많은 가정들이 그 가장의 신앙을 통해 행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만 영적으로 바로 섰다고 하여 온전한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노아의 8 식구가 다 구원받지 못하고 몇 사람은 홍수 심판에 처해졌다면 얼마나 큰 슬픔이었겠습니까? 가장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서도 아내와 자식을 아직 구원 못 시켰거나 부모를 구원하지 못한 채, 함께 산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고로 영적으로 바로 선 가장이라면 다른 가족들도 신앙 안에서 바로 서도록 이끌고 보살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 된 가정이야말로 행복이 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신앙을 가진 가장을 중심으로 온 가정이 함께 머리 숙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기도할 수 있는 가정이라면 어떤 난관과 고난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셋방살이를 하고 초가집 속에 살아도 온 식구가 함께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가정은 참으로 복된 가정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참으로 영적으로 바로 서서, 악한 것에 물들지 않고,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아내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좋은 가장을 중심으로 한 화목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 가정의 달,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5월, 가정의 달’ 설교는 주제가 정형화 되어 얼핏 보면 쉬워 보이지만, 가정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설교는 훨씬 어렵다.
가정의 달 설교는 삼사대가 한가족을 이루는 전통적인 가족으로부터 갓난 아기를 두고 있는 신혼부부 가정, 자녀를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노부부 가족, 그리고 다문화 가정, 이혼 가정, 홀부모 가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정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가정의 달 설교는 많은 가정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와 결핍, 곧 고부간의 갈등과 부부간의 갈등, 그리고 자녀의 탈선, 또한 불임과 이혼 등 각기 다른 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가정의 달 설교는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까?
가정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말하라
유명인과 연예인의 이혼, 가정 폭력, 그리고 아동학대가 만연해 가는 가정에 대한 부정적인 소식들 속에서 가정의 신성함과 소중함은 상대적으로 현대인에게 망각되어져가는 듯하다.
그러나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어주신 최초의 공동체요, 신성한 공동체로서 가정의 중요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변함없는 가치에 관해 말해야 한다. 가정의 달 설교를 이 진리에 기반하여 시작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하나님의 선물인 가정의 소중함이야말로 다양한 형태와 문제를 가진 가정들이 포기하지 않고 지향해야 하는 원형적 가치와 소망을 제공해준다.
둘째,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은 계시의 말씀과 그것의 적용적 원리에 관해 다루는 연속적인 설교에 귀기울여야 할 근거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매번 설교의 서두에서 이 진리는 반복되어 선포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가정의 아름다움,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가정의 소중함을 말하라.(창 1:31)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
가정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한 기관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설교자들이 가정의 달 설교 준비로 가장 고민되는 점에 관해 ‘다양한 가족형태를 포괄하는 가정설교 준비’(39%)라고 답했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러한 가정 형태에 관해 이혼가정(43%), 동성애 가정(21%), 한부모 가정(10%), 불임 가정(8%), 싱글 가정(4%), 재혼 가정(4%), 비혼 가정(3%), 다문화 가정(3%), 기러기 가정(2%)이라 고백했다.
목회자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과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가정들이 설교로 인해 받게 될지도 모를 상처와 관련된다. 특히 이혼이나 동성애와 연관된 가정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주제를 설교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방법은 그러한 주제를 설교에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본질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며 자칫 교회 공동체 전체의 성경적 기준이 느슨해지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또 다른 극단은 그러한 상황을 강하게 정죄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진리를 말했을 지라도 우려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바람직한 설교적 접근은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 양극단을 피하고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 가운데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종인 설교자는 예민한 주제에 관해 세상의 주류적인 견해와 다르다 해도 그리스도의 말씀에 신실해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양들을 돌보는 목회자로, 우리 주님이 그러하셨듯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아울러 이러한 주제를 다룰 때 유념할 부분은 악트마이어(E. Achtemeier)가 적절하게 말하듯, 하나님의 당위적 명령만이 아니라 가정의 파탄과 왜곡, 그리고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구렁텅이에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수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함께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민한 문제는 진리와 사랑으로 접근하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원리로 존 스토트(J. Stott)가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동성애에 관한 전통적인 관점에 본격적인 문제를 제기했던 데릭 베일리(D. Bailey)의 주장에 관해 스토트는 성경의 통전적 해석을 통해 동성애가 비성경적인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스토트는 교회내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동성애 관계의 중단을 요청할 때 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올바른 태도를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제시한다.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인정하는 것과 둘째, 소망으로,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자유와 주님의 날에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는 것과 셋째, 사랑으로, (동성애의 기저에는 깊은 고독과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음으로) 적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지역교회가 사랑으로 돌보고 조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스토트가 제시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는 동성애의 문제 뿐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거나 결핍을 가진 다양한 가정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참된 사랑은 타협하지 않으며 모든 이들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말한다. 동시에 그것은 순수한 형제애로 도울 바를 찾는다.
설교가 살아 움직이게 하라
가정의 달, 설교의 내용은 대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정과 가족 간에 사랑하며 섬기는 화목한 가정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가정의 달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회중들이 실천적인 삶의 설교로 화답할 수 있는 때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노스포인트커뮤니티 교회(North Point Community Church)의 앤디 스탠리(A. Stanley)의 제안은 유용하다. 스탠리는 설교에서 거창하고 위대한 실천적 적용보다는 단 한 주라도 교인들이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을 제시할 것을 권면한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간에 감사와 사랑의 편지를 나눌 것을 권면할 수 있다. 한 주간 동안 가족 중 한 사람이 집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 모든 가족이 나와 환호하며 맞는 것을 제안할 수 있다. 가족 간에 사랑과 감사를 고백하며 아침저녁으로 안아줄 수 있다.
아울러 부부간의 세족식, 특히 남편이 아내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주는 세족식은 믿음의 가정에 권면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짧은 기도와 함께 남편이 아내의 발을 정성스럽게 씻어주라.
그리고 그 장면을 자녀들로 하여금 스마트폰으로 녹화하게 하라. 그 시간은 분명 가족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시간이요, 특히 자녀들에게 기독교 가정과 세상 가정의 차이를 일깨우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에 대한 소망을 품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5월이야말로 설교가 살아 움직여야 할 때다.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더욱 독려하라
가정은 교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변함없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경험해야 하는 공간이다. 랍비, 예키엘 엑스타인(Y. Eckstein)이 말했듯, “쉐마의 기도와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가정에 임하고 샬롬이 임한다”
이런 맥락에서 가정예배의 중요성은 가정의 달, 설교를 통해 더욱 독려할만하다. 특히 가정예배는 언택트로 교회가 충분한 기능을 할 수 없고 목회자의 돌봄이 취약한 코로나의 상황에서 더욱 요청된다.
그것은 코로나로 인한 예배와 관계의 결핍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 유대와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예배가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가정 예배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 간의 자연스런 나눔과 축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모임의 의미를 세르티양주(A. Sertillan ges)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은 그 지혜를 나눌 것이며, 조용히 대화하며 영혼을 단결시키고, 저무는 하루는 위안을 얻을 것이다. 조화로운 분위기가 가정을 감쌀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 저녁은 가치있는 축일 전야가 될 것이다.” ‘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고 한 시인은 말했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포근한 날개 아래 한상에 둘러 먹고 마실 때 우리는 이 땅에 미리 임하신 낙원을 경험한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세계 모든 사람이 애창하고 있는 노래 중의 하나가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마음 속에 가정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불러 일으킵니다. 가정은 편히 쉴 수 있고 즐거움을 나누는 곳이며 서로 사랑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조직 중에 가정보다 아름다운 조직은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가정 위에 국가를 군림시켜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가장 악한 집단입니다. 자본주의는 물질로 가정의 행복을 사려고 몸부림 치고 있으나 이 또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상한 것은 ‘즐거운 나의 집’을 지은 존 하워드 펜이라는 사람은 한번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노랫말을 지은 곳은 프랑스 파리 였는데 엽전 한푼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을 때 이 노랫말을 지은 것입니다. 그는 한 평생 결혼도 하지 못했고 집도 없었고 아내의 사랑과 자식에 대한 소망도 가져보지 못한 채 일평생을 지구 이구석 저구석을 방황했습니다. 그후 그는 튀지니에서 사는 집도 없이 길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얼마 후 그의 시체가 그의 고향인 워싱톤에 있는 오크 언덕에 이장 되었을 때 무덤이 그가 이 세상에서 가진 유일한 집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일평생 가정이 어떠한 곳인지 모를 법한 그가 어찌하여 그토록 가정을 예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한 평생을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그가 왜 가정을 노래하고 있는가? 대개 가진자는 가진 것에 대한 행복을 바로 알기 어려운 법입니다. 가정을 가진 지상의 수많은 사람이 가정의 행복을 가슴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가정을 갖지 못한 사람이 가정에 대한 그리움을 뼈저리게 그리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잊어 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갖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에 사로 잡히기 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조국에서 살 때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가 국가를 잃어 버리고 포로 생활을 하면서는 날마다 조국 산천을 그리워 하며 울었던 것이다.우리는 내게 있는 것으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생활의 중심점이요 역사의 기원점이며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승점이다. 인류 역사는 에덴의 한 가정에서출발 되어 졌습니다. 가정은 우리의 영과 육이 자라야 할 터전이요, 십자가의 화목 정신을 실현 해야 할 경건의 교육 장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앙 계승은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인간 삶을 지키는 삶의 최후 보루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위대한 교육자였던 페스탈로찌는 기독교의 위대성은 국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프로스트는 말 하기를 세상에서 당신을 진정으로 용서해 주는 곳은 가정뿐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 하면서 우리 모두는 가정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한번 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비록 세상에서 가정이 없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고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 자매가 되기에 성도에게 가정이란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가정의 든든한 기초 (행 10: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 위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원래 ‘성결교회 주일’이지만, 저는 특별히 ‘가정 주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정의 달 5월을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등으로 잘게 나누다 보면, ‘가정’을 전체로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어버이의 문제는 바로 가정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가정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남자가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가정에서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이 심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정신없이 일해야 하는 남자들은 가정에서 자녀들과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요즈음 남자들은 가정에서 단지 잠자고 밥만 먹은 하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아내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점점 더 외톨이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남자들은 가정에서 설자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누려오던 가장의 권위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비록 부작용이 많긴 했지만, 그래도 그 동안 남자가 아버지의 권위를 가지고서 가정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는데, 이제는 이 ‘버팀목’이 완전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빠, 바빠, 나빠”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가정 주부가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포기하고 문밖으로 나돌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남편과 자식들만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며 희생하며 살아온 주부들은 하숙생이 된 남편과 이기적인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토록 남편들과 자식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주부들은 심한 소외감과 허탈감을 보상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돌게 됩니다. 물론 취미생활과 같은 건전한 일을 위해 바깥으로 나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잘못하면 부동산 투기, 유흥업소 출입, 과소비 등과 같은 퇴폐풍조에 물들기 쉽습니다. 바깥을 나돌지 못하는 주부들은 가정을 온통 휘어잡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기 쉽습니다. 직장에서 피곤한 남편을 달달 볶거나 자녀의 장래를 위한답시고 자녀를 공부벌레 혹은 공부노예로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아빠, 바빠, 나빠”라는 말처럼 “엄마, 치마, 마마”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엄마가 치마 바람을 거세게 날리니까, 남편과 자녀가 온통 ‘마마 보이’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셋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요즘 아이들이 자기들 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아이들은 어른과 남은 안중에도 없는 버릇없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요즘의 부모들이 자식의 기를 죽인다고 꾸지람을 잘 하지 않고,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식을 상전으로 떠받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성적에만 신경을 쓰느라고, 도덕교육과 인성교육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모든 가치관을 오직 성적에만 두고 있다보니, 주일에 친구를 사귀거나 취미생활을 하거나 교회에 가는 것조차 꺼립니다. 이처럼 자녀를 경쟁에서 꼭 이겨야 하는 살벌한 존재로 기르기 때문에 남을 배려하고 남과 협동하는 정신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설령 그들이 커서 사회에서 좀 출세하였다고 하더라도, 커서는 병약한 부모와 형제들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저는 “아이, 아첨, 아차”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아이에게 아첨하다가 나중에는 ‘아차’하고 후회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넷째로, 오늘날의 가정이 위기에 빠진 것은 오직 자식들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늙으신 부모님들이 마음을 붙이고 여생을 편안히 살 곳이 점점 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키운 자식들은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며느리는 시집 식구보다 친정 식구를 더 가까이하고, 아들은 며느리 눈치를 보느라 부모에게 잘 효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노인들은 병약함과 고독감 속에서 쓸쓸히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잘 산다는 게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하게 되었습니다. 잘 산다는 것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진다는 뜻이 아니라면, 잘 사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이 돼지보다 더 나은 게 무엇입니까? 요즘 정치인들이 ‘상생’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만, 부모와 자식과 손자가 한 지붕에서 오손도손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도 저는 “노인, 폐인, 악인”이라는 말을 만들어 봅니다. 노인을 폐인으로 취급하는 인간은 악인입니다.
가정이 어찌하여 이와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까? 가정 속에 깊이 파고든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와 쾌락주의 등이 우리 가정을 병들게 하고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완전히 천박해졌고, 인간성이 철저히 타락했습니다. 비뚤어진 가치관과 타락한 인간성은 바로 가정의 위기의 원인이요, 또한 가정의 위기를 낳은 주범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든든한 가정을 만들려면, 비뚤어진 가치관을 바로 잡고 타락한 인간성을 바로 잡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진정한 기초로 되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특히 고넬료 가정을 소개함으로써, 든든한 가정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첫째로, 고넬료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가치관이 비뚤어지고 인간성이 타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떠나 탕자처럼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넬료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온 식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인생과 가정과 사회와 우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으뜸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가정만이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는 미워지기도 하고 싫증도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어언 듯 서로의 관계가 파괴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항상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 위에 든든히 서 있다면, 부모 관계와 부부 관계, 식구 관계가 결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온전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경건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고넬료 가정은 온 집으로 더불어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구제는 이웃들과의 관계입니다. 이웃들과 서로 나누는 것은 경건한 삶의 표현입니다. 성도의 가정은 결코 자기 가정 밖에 모르는 그런 이기적인 가정이 되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이웃들과 아픔과 슬픔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이유도 가족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자신의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부자들도 결코 홀로 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부자들은 결국 강도와 도적, 사회 불안의 희생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 때문이라도 부자들은 재물을 기꺼이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든든한 가정은 오직 든든한 사회의 기초 위에서만 설 수 있습니다.
셋째로 고넬료 가정은 온 집이 더불어 하나님에게 항상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만 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실천은 얄팍한 자기 자랑, 생색내기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이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나와 너와의 사귐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몸을 내놓으셨고 생명을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웃을 위해 물질을 내놓으며 구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정의 위기 시대에 여러분의 가정도 고넬료 가정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구제하며 늘 기도함으로써 언제나 든든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와 아울러 흔들리고 무너지는 주위의 가정을 올바로 세워주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가정은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경건한 고넬료 가정을 본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온 가족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물로써 어려운 이웃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늘 상달되는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이신건목사 목사 설교 중에서
2013년 5월 11일 새벽설교: 가정의 달 (화목) 잠언
가정의 달 (화목)
잠언 17:1-22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왜 5월이 가정이 달이냐면 5월에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가정의 달이 없었는데 근래에 들어와서 왜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건강하지 못한 가정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건강하지 못한 가정은 결국엔, 교회의 축소를 의미합니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하려면 가정들이 먼저 바로서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은 아주 간략하지만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에 ‘화목’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가정은 뭐니 뭐니 해도 화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린 고기를 집안에 많이 쌓아두고 다투는 것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하기만 하면 그것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본문 22절을 보세요 “심령의 근심을 뼈를 마르게 한다” 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고기를 많이 쌓아 놓고 먹어 보아도, 심령이 근심하게 되면 뼈가 마른다고 말씀합니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의 반대말을 이기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요즘의 사회가 왜 그렇게 가정이 무너지는지 생각해 보니까,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도 자기만 생각하고, 아내들도 자기만 생각하다 보니까, 남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희생하는 것 같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정이 화목하게 되려면, 주님처럼 자신을 희생해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또 가정이 화목하려면 대화가 단절되면 안됩니다. 대화가 단절되면 그 사람의 고민도 모르고, 사정도 모르고, 마음도 모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끊어지면 건강한 성도라고 할 수 없듯이, 대화가 없는 가정도 건강한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집에 같이 살면서 가장 큰 불행은 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에던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대화의 단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들의 가정이 화평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가정이 화목해야, 교회가 화목하게 되고, 교회가 화목해야 우리의 영혼이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 주일의 설교] 행복한 가정(시 128:1~6)
좋은 관계가 행복을 만듭니다
하나님·부부·자녀와 막힘 없을 때 건강한 가정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 김희수 목사
한 젊은이가 유대인 랍비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가정이란 무엇입니까?” 랍비가 대답합니다. “가정은 ‘메누카’입니다.” ‘메누카’란 히브리어로 안식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가정이란 한마디로 안식할 수 있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젊은이가 질문합니다. “선생님, 영혼의 안식은 천국에 가야만 있는 것이 아닌가요?” 랍비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안식은 천국에 가야만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안식은 바로 가정에 있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가정이 그렇게 중요하고 가정이 우리의 삶에 참된 안식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가정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그 조건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은 큰 은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안식과 평안,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달력을 보게 되면 가족과 연관된 날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린이 날, 어버이 날, 가정의 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입니다. 교회에서도 5월은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주일, 새가족초청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가정을 중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제도이며 모든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건강할 수 없고 행복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행복한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절)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해지는 비결은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씀합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생사화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영적으로 건강하고 가정에도 건강함을 말씀합니다. 잠언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말합니다.
경외는 공손히 섬기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겁에 질려있는 공포가 아니라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은 행복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일하는 가정입니다.
“네가 손으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2절)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복입니다. 일하는 것으로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며 보람과 행복을 주십니다. 온 가족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의 몫을 기꺼이 감당하고 수고할 때에 그 가정은 기쁨이 있고 삶의 가치와 의미가 풍성해지는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일확천금을 노리고 한탕주의를 통해 인생역전을 노리는 곳에서 행복은 없으며 그러한 가정은 결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미국과 한국에서 거액의 복권에 당첨 된 사람들과 가정을 조사해보니 대부분 이혼하고 가정이 깨어지고 자녀들이 탈선하고 알코올중독,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당하여 복권에 당첨되기 전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가정은 불행한 가정이 되었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일하는 가정은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부부간에 좋은 관계가 있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3절)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로 표현한 것은 ‘다산’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의 결실, 즉 그 가정의 번영과 화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부부는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부부 관계에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심같이 헌신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아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서 순종하는 것 같이 남편에게 순종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엡 5:21~33절)
오늘날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은 부부의 관계가 사랑과 이해, 순종과 희생적인 관계이지 못하고 이기적인 관계로 가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감사한 마음이 있고 잘해주고 싶고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서부터 일어난다고 하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부터 행복이 시작되지만 미움과 원망과 보기 싫은 마음이 들게 되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가 좋은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3절) 부모와 자녀가 각자의 몫을 감당하고 상호 도리를 지킬 때 이루어지는 축복의 열매로서 어린 감람나무로 묘사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감람나무는 신선함과 활력, 건강하고 유쾌한 삶의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어린감람나무가 원감람나무로부터 생명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통해 부모와의 유대관계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주의 교훈과 훈계로 말씀으로 양육 받아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행복한 가정의 아름다운 모습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날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니 한상에서 같이 음식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못하지만 할 수 만 있다면 같이 식탁의 교제가 많이 있는 가정이 보다 더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가정을 복주시고 번영과 평강이 있게 됨을 말씀합니다.(5~6절)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은 문제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문제가 있어도 그 문제를 잘 극복하고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가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일하는 현장에서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막힘이 없고 소통이 잘되는 행복한 인생, 그리고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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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설교, 창2:20]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조질서로서의 가정
창 세 기 2:20-25, 골로새서 3:18-25
설교 : 유경재 목사
가정의 달인 5월 마지막 주일에 다시 한 번 성경 특히 창세기에 나타난 가정을 살펴보므로 우리의 가정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창조의 완성인 가정
창세기 2장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창조가 점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셨는데, 아직 사람을 만드시지 않아서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채소도 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흙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는데, 그 동산에는 온갖 아름다운 나무와 강이 흘렀다고 하였습니다. 훨씬 아름다운 세계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 혼자 있는 것이 안 좋아 보여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가 이런 짐승들로 구색을 갖추게 되어 훨씬 보기에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안쓰러워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인 여자를 지으셔서 그와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 부부가 좋아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만족해 하시면서 그의 창조사역을 일단락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바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로 아담의 짝이 되게 하시므로 완성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자가 창조되고 그 여자와 남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므로 창조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가정이 창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 목적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이 설정하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창조에서 가정이 빠졌다면 그것은 미완성 창조였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창조되었지만 저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창조의 그림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남녀가 각각 독립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혼자 살면 여러 가지 편리한 점들이 많이 있겠지만, 가정이 없는 사회가 이루어질 때 그 사회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회는 사랑이 메말라버린 이기적인 사회로 겨울처럼 찬바람만 불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있으므로 해서 이 삭막할 뻔한 세상이 부드럽게 아름답게 따뜻하게 변화되었습니다.
피조계에 속한 가정
따라서 우리가 알 것은 가정은 창조 질서를 따라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피조의 세계가 창조의 질서를 따라 운영되듯이 가정도 이 질서를 따라 세워질 때 건강하게 되고 아름다운 가정으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은 바로 그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름을 의미합니다. 가정이 창조의 한 부분임을 인식하면서 다른 가정, 다른 피조물과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가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뜻합니다. 가정이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는 가장 아름다운 포인트임을 기억할 때 이 가정을 잘 가꾸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가정이 깨어질 때 하나님의 창조의 그림은 오점(汚點)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 창조의 그림을 더럽히는 인간의 여러 가지 죄악이 많지만, 가정의 파괴는 가장 큰 오점으로 이 그림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하신 것을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창조 질서의 일부로서의 가정의 구성 요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합으로 가정이 이루어졌지만, 단순하게 두 사람만이 그 가정의 구성요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저들을 만드시고 또 결합하게 하셨다는 사실과 땅과 하늘, 그리고 거기에 창조된 모든 피조물이 바로 그 가정의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오는 가정은 우주적입니다. 가정은 들판에 피어나는 꽃처럼 돋아나지만, 그 가정 홀로 있을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 모든 피조물과 호흡을 같이 할 때 비로소 그 가정이 존재하며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거기에 사랑이 있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하게 됩니다. 부부가 사랑하고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탄생하면 그 자녀를 사랑하며, 그리고 그 가정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가 만들어 놓으신 피조 세계를 사랑할 때 그 가정은 든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창조 질서로서 이해하면서 그 질서를 따라 자연스럽게 나갈 때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녹색운동을 하시는 김종철 교수의 어떤 강연에 나오는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로 진 리들로프라고 하는 여성이 있는데, 이 사람이 베네수엘라 아마존 밀림에서 에쿠아나라는 원주민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몇 년 동안 현지조사를 하였답니다. 이 학자의 주관심사는 어린아이의 양육방식이었습니다. 그 부족사회는 아주 가난하였지만 사람들 표정이 모두 밝고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넉넉하고 행복하게 사는 까닭이 무엇일까를 찾아보는 중 아기가 태어나고 양육되는 방식이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이 마을에서 아기의 탄생은 마을 전체의 공통된 관심사가 되고 마을 전체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임신부는 동네 사람들의 축하 속에서 자기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을 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기는 물론 모유를 먹고 자랍니다. 태어나면서 아기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는데, 그 보살핌은 주로 신체적 접촉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아홉 달까지 어른들이 밤낮 없이 아기를 만져주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서 키운다고 합니다. 그렇게 양육된 아이들은 굉장히 원만하고 평화로운 심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내면이 평화로우니까 남들에게 자연에 대해서 저절로 공경하는 태도가 길러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디언들과 달리 현대인들의 출산은 공포로 일관됩니다. 아기는 병원에서 출산되면서 바로 엄마 품에 안기는 대신에 신생아실로 옮겨져서 우유를 먹게 됩니다. 편안한 엄마 뱃속에 있다가 바깥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와 떨어질 때 그 아이의 불안과 공포는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다 밥벌이에 바쁜 엄마가 그 아이를 떼어놓은 채 직장으로 달려가서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다 보니 그 아이가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길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의 심성이 원만하기 어렵고 늘 불안과 불만과 짜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 거기로부터 폭력성이 배태되게 됩니다. 이렇게 자라난 사람들이 결국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이 되어 자연을 정복하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려 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불안하고 근본적으로 평화를 만들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청소년들이 가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잘못된 길로 나가게 되는 현상들은 결코 우연이거나 몇몇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며,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대 사회 구조가 우리의 심성을 파괴하고 우리의 가정으로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가정
우리 가정에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가정에 모시고 그를 예배함과 동시에 그가 가르쳐 주신대로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으로 가정을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네브래스카 대학교의 인간 계발 및 가정연구부에서 많은 조사와 실험의 결과로 발표된 좋은 가정들의 공통점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습니다.
첫째로 성공적이고 행복한 가정일수록 가족들 간에 감사하는 마음이나 말이 아주 풍부하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많이 갖는 가정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함께 수고하고 함께 즐겁게 놀고, 함께 음식을 먹는 가족들은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추억과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남겨준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가족끼리 서로 대화를 많이 갖는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신앙을 갖는 가정들이 아주 결정적으로 행복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가정에 어려움이 올 때에 그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처리하는 가정들입니다.
이런 공통점들을 요약하면 신앙과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좋은 가정을 이루려면 그 가정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이루도록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신앙의 가정에서 아들이 분가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사업에 성공하여 좋은 집을 짓고 부모님을 초청하였습니다. 그 부모님은 화려하게 꾸민 자식의 집을 다 둘러보고 나서 그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집이 참 아름답고 화려하구나.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이 분명치 않구나”
그 집에는 기도하는 방도 없었고, 성경이 보이지 않았으며, 예수님 그림이나 성화가 하나도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두터웠던 그 부모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섭섭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심방을 다니면서 그 가정에 예수님 사진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볼 때에 마음이 흐뭇합니다. 예수님이 그 가정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많은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 가정의 주님으로 모시지 않았기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시편 16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모신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곁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는 까닭은 주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셨으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께서 내 곁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16:8-11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정에 모실 때, 기쁨이 가득 하고 즐거움이 영원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들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자손이 다 복을 받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 가운데 조나단 에드워즈란 분이 계십니다. 그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종교와 도덕적인 면에서 크게 타락한 사회를 신앙부흥을 통하여 바로 잡은 분입니다(1703~58). 그가 죽은 후 150년이 지났을 때 후손은 무려 1394명이었는데, 교장 13명, 교수 65명, 의사 60명, 목사 100명, 군인 75명, 관리 80명, 저술가 60명, 언론인 18명, 부통령, 상원의원, 지사, 시장, 대사, 사장 등이었다고 합니다. 훌륭한 신앙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좋은 가정의 두 번째 요소인 사랑을 우리 가정들이 회복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 오셨을 때 감탄하면서 아담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가족들 상호간에 서로가 서로의 뼈를 구성하고 있다는 연대감(連帶感) 혹은 소속감이 있을 때 거기로부터 사랑이 우러나게 됩니다. 오늘의 가정들이 이런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각자의 방에서 컴퓨터나 TV 앞에 앉아 있으므로 가정은 사랑으로 견고하게 결속되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도 계속 만나고 확인하지 않으면 결국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많은 지식을 넣어주려고 온갖 과외를 다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중요한 사랑을 가르쳐 주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스위스의 교육학자 페스탈로치가 말하기를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정들은 사랑을 가르치는 최상의 학교로서가 아니라 들어와 잠자고 밥 먹는 하숙집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함이 곧 창조 질서를 회복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을 잃은 가정들, 함께 모여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대화할 시간을 잃어버린 가정들, 그래서 그 가정은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둥지로서 기억되기보다는 잔소리와 짜증 부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으로 기억되어 가능하면 들어가려 하지 않는 곳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런 가정의 파괴는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임을 기억하고 빨리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기울여 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가정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은 창조의 꽃이며, 아름다움입니다. 이 가정은 우주를 향해 열려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의 날개 아래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질서를 따라 돌아가는 우주의 한 복판에 이 가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가정을 신앙과 사랑으로 가꾸기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은 저절로 행복하게 지켜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그의 돌보심을 받으며, 사랑을 가꾸어 갈 때 비로소 거기에 행복의 파랑새가 날아들고, 기쁨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가꾸어집니다.
이제 여러분의 가정을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창조의 질서를 따라 믿음과 사랑으로 든든하게 세워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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