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드가 발레 |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사실 무서운 소녀매매(!) 현장이었다? 285 개의 가장 정확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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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에드가르 드가)의 작품을 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항상 검은 정장 차림의 중년의 남성과 머리가 다 벗겨진 나이 든 노인이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도대체 누구일까요? 오페라 국립극장에서 열렸던 발레 공연. 여기에 그 진실이 있습니다. 프랑스 역사와 문화를 알고 그림을 보면 드가의 상냥하고 다정했던 발레리나 그림들이 전혀 새롭게 보입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인상파 화가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외광파라고 불리는 인상파와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어요. 클로드모네의 수련과 비교하면 더욱 잘 드러납니다. 무엇일까요?

도서 야마다 고로의 ‘변태 미술관’을 참고하였습니다.

[BGM 정보]Kevin MacLeod의 Canon in D Major에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 표시 4.0 라이선스가 적용됩니다.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4.0/
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free/index.html?isrc=USUAN1100301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발레 #인문학 #서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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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 나무위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드가는 주로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주로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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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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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를 그린 화가 ‘에드가 드가’ – 핸드메이커(handmaker)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다. 초상화를 비롯해 여러 형태의 작품을 남겼으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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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dmk.com

Date Published: 4/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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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의 발레리나, 그 추악한 진실

1,500여 점의 회화, 판화, 드로잉 작품들을 남겼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지금도 전 세계적인 사. 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 근대 화가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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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eric.org

Date Published: 3/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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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사실 무서운 소녀매매(!) 현장이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은 사실 무서운 소녀매매(!) 현장이었다?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드가 드가 발레

  • Author: 발칙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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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I_3T231g18

발레의 어두운 이면을 본 화가

발레만큼 우아한 것이 또 있을까? 눈부시게 하얀 치마와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들의 군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발레리나’를 주제로 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긴 한 화가가 있는데, 바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이다.

에드가 드가

구글에서 ‘dancer’라는 작품명으로 검색을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에드가 드가의 발레리나 작품들이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우리가 ‘발레리나’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우아한 동작을 하고 있는 무대 위의 발레리나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 아니다.

드가는 무대 뒤편에서 다리를 한껏 피고 포즈를 연습하거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발레리나의 모습들을, 마치 몰래 무대 뒤로 숨어들어 찍은 파파라치샷처럼 그려냈다.(실제로 드가가 살아생전에 받은 가장 많은 의심 중의 하나도 ‘관음증 환자’였으니, 알 만하다)

사실 드가는 상당히 잘 살았던 부르주아 출신 집안 출신으로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작품을 판매해서 삶을 꾸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하는 현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생각보다 많은 빚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생계유지가 아주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즈음부터 소위 ‘잘 팔리는’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렸던 시리즈가 바로 이 발레리나 시리즈이다.

실제로 발레리나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돈 걱정할 일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드가의 인생에서 이 발레리나 작품들은 전체 작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는 주요 주제가 되게 되면서 드가는 흔희 ‘ 무희의 화가 ‘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드가의 작품 속 발레리나들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대상으로만 그려지지 않았다. 드가는 실제로도 당대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날카로운 관찰력을 뽐냈는데, 요즘으로 따지자면 마치 르포 기사처럼 사건 현장을 담듯이 적나라한 현실의 순간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아름다운 발레리나를 그리면서도 예리한 눈으로 발레 뒤에 숨은 어두운 이면을 담아낸 작품이 있다. 바로 그의 발레리나 작품들 중 가장 대표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 별, 무대 위의 무희 ‘라는 그림이다.

제목 그대로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발레 공연이 한참 진행 중인 무대에서 한 발레리나가 공연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발레리나는 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흰 발레복을 입고 우아한 동작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림을 그냥 쓱 보고 지나친다면 아름다운 발레의 한 장면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이 그림에서 드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발레리나뿐만이 아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발레리나의 뒤편, 즉 무대 안 쪽으로 옮겨보면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다음 순서를 대기하는 발레리나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검은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남자 한 명.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그의 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보면, 분명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대 위에 있는 발레리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드가는 왜 굳이 이 남자를 무대 뒤편에 그려 넣었던 걸까. 드가는 사실 이 검은 정장의 남성을 통해서 발레에 숨은 어두운 이면까지도 함께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드가가 살았던 당시의 발레는 폭발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요즘 유행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아이돌 산업처럼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큰 산업이었다고 한다.

특히 가난한 10대 여자아이들이 발레리나에 많이 지원을 하게 되는데, 산업화 사회에서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어린 여성에게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부와 명성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길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 아이들이 발레리나에 지원을 했고, 이에 맞추어 이들의 수업료를 1대 1로 후원하는 부르주아 계층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어두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이면의 세계가 있는데, 바로 후원자와 후원을 받는 발레리나가 지속적인 성상납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꽤나 많았던 것이다.

많은 후원금을 받는 어린 10대 아이들에게는 후원자들의 존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후원자들에게는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의 공연 모습을 무대 바로 안쪽에서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즉, 작품에서 무대 뒤편에 서서 발레리나를 응시하는 남성은 바로 그녀의 후원자. 그는 과연 어떤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드가는 무대 뒤편의 이 후원자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대신에 무대 장치로 교묘히 가렸다. 아마도 특정한 사람을 그려내기보다는 이러한 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듯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또 모두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하는 터부는 어느 사회에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목하고 그림을 통해 표현했던 드가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을 가졌던 화가가 아닐까.

예술은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만드느냐의 문제이다.

– 에드가 드가

Art is not what you see, but what you make others see.

– Edgar Degas

에드가 드가

인상파 ‘에드가 드가’, 그가 ‘발레’를 그린 이유는?

▼저작권 : 창작물을 만든 사람이 자신의 저작물에 대해 가지는 법적 권리.

▼범위 : 예술, 건축설계면, 컴퓨터프로그램, 영상, 폰트, 논문 등 광범위.

모든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허락 없는 모방, 남용으로부터 보호하는 권리, 즉 저작권이 있다. 반면 저작권에도 만료기간이 있는데, 이는 작가의 사후 70년까지다. 이때부터 작가가 남긴 작품 공유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Copyleft”. 시리즈 기사 <만인의 그림>에서는 생전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이제는 만인의 그림으로 돌아온 저작권만료 예술가들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에드가 드가 [사진제공 : Wikipedia]

이름 :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출생 : 1834년 7월 19일 사망 : 1917년 9월 29일 국적 : 프랑스 사조 : 인상주의, 사실주의 주요작품 : ‘발레교습소’, ‘압생트 한 잔’, ‘파리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최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참 멋지고 도전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동시에 훌륭한 실력과 노력 이면에 숨은 처절한 경쟁도 느낄 수 있는데, 19세기 유럽에서는 오늘날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발레가 대유행 유행했다. 오늘 만인의그림에서는 ‘발레 그림’하면 먼저 떠오르는 ‘발레 교습소’의 주인공 ‘에드가 드가’의 그림들을 살펴보젰다.

에드가 드가는 파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미술작품이 있었다. 미술의 도시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루브르 박물관을 수시로 드나들며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이런 영향 때문에 일반 중학교를 졸업한 에드가는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가지만, 곧바로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에드가의 살롱전 출품작 ‘경마장의 마차’ [사진제공 : Wikipedia]

미술 공부를 위해 1년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거장들의 그림도 익혔다. 약 10년간 고전미술을 연구한 그는 1865년 파리 살롱전에서 첫 작품인 ‘오를레앙 시의 불행’을 출품했다. 이때까지만해도 사실주의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에두아르 마네를 만나고 그는 인상파가 된다.

에드가는 8번의 인상파 전시회 중 7번이나 참여했을 정도로 인상파에 지분이 많은 화가였다. 그러나 그는 주로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던 대부분의 인상파 작가들과는 결이 달랐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있던 그는 사람들의 일상을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그렸다. 마치 찰나의 순간을 담는 사진기처럼 말이다.

에드가의 ‘발레 수업’ [사진제공 : Wikipedia]

그는 자신이 정한 주제의 그림이 마음에 들 때까지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해 그렸다. 대표적인 주제는 ‘발레’다. 20년간 무려 1500점에 가까운 발레 관련 그림을 그렸을 정도다. 그에게 ‘무희의 화가’, ‘발레 화가’라는 별명이 붙는 이유는 수많은 발레 그림 작품 수와 발레리나의 일상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린 수많은 발레 그림 중 대표작을 꼽자면 1871년과 1874년 사이 완성된 ‘발레 수업(The Ballet Class)’와 1878년 ‘무대위의 무희(Dancer on Stage)’다.

‘발레 수업’은 발레를 교육하는 교습소의 전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통해 당시 발레의 유행 정도를 알 수 있다. 정 가운데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남자 발레 교사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어린 발레리나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에드가는 휴식 시간 동안의 발레리나 표정, 움직임 전체적인 분위기 등 찰나의 순간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냈다.

그림에서 봤듯이 당시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서 러시아산 무용 ‘발레’의 유행이 대단했다. 발레는 아름다운 춤 동작과 우아한 포즈 등 여성성을 상징했다. 그러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포츠라는 발레는 점차 그 본질과 다르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젊은 여성들이 부유한 남성들과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의 수단 되어 버린 것이다.

발레리나의 공연장에는 검은 정장의 남성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그들은 10대 발레리나들의 후원을 자처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발레리나를 후원하면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후원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부분만 있지 않았다. 당시 후원자가 어느 발레리나를 후원하면 후원자에게 성상납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후원자가 결혼을 요구하기도 했다.

에드가의 ‘무대 위의 무희’ [사진제공 : Wikipedia]

산업화 시대에 가난한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난 어린 일부 발레리나들에게는 후원자가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발레 대유행의 원인을 무조건 신분 상승의 수단만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당시 그런 부정적인 목적이 저변에 깔려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에드가는 발레 유행에 대해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추려고 했다.

그가 발레를 그저 아름답게만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그림으로 ‘무대위의 무희’가 있다. 무대 위에 아름다운 동작으로 시선을 끄는 한 발레리나가 있다. 그리고 무대 뒤에는 다른 발레리나의 일부가 보이고, 왼편에는 발레리나를 바라보는 유일한 남성도 보인다. 이 남성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다.

뜬금없이 등장한 이 남성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가운데 발레리나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가운데 여성을 후원하고자 하는 남성일 것이다. 마치 파파라치처럼 찰나의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한 에드가는 당시 ‘발레’라는 주제가 어떤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그림의 전체적인 구성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에드가의 ‘압생트 한 잔’ [사진제공 : Wikipedia]

에드가는 발레를 너무나 자주 관찰한 나머지 ‘관음증 환자’로 오해 받기도 했다. 그에 대한 오해는 진실을 가릴 순 없지만, 미술적으로 그의 관찰력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879년 그린 ‘압생트 한 잔’의 경우 그가 일상의 모습을 얼마나 섬세하게 관찰했는지 알 수 있다.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성의 표정에는 인생무상이 느껴지며, 옆의 여성은 당시 유행했던 술 압생트 한잔을 앞에 놓은 채 마치 실연 당한 표정으로 멍을 때리고 있는 모습이 압권이다.

근대적인 삶의 모습을 일상에서 포착해 우리에게 선보인 예술가 ‘에드가 드가’. 비록 그의 사조를 평가할 때 인상주의, 사실주의가 모두 언급될 정도로 모호한 부분이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담고 있는 그림과 메시지가 정확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쟁은 치열한 노력에 의한 결실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순위, 선택에 의한 차별과 열등감 조성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또한 에드가의 발레 그림을 통해 화려하기만 했을 것 같은 ‘발레’의 이면을 우리는 보았다. 아마 우리 사회의 경쟁시스템에도 분명 어두운 면이 있을 것이다. 에드가가 그랬던 것처럼, 예술이라는 장르는 그런 어두운 면을 조명하고 더 나아가 경쟁에서 소외된 자들을 보듬어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보생명 광화문 읽거느] 에드가 드가의 발레 그림 속 비밀

선을 중시했던 드가, 발레의 매력에 빠지다

에드가 드가는 1834년 7월 19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유한 집안 출신의 화가들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법률가가 되라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대부분이 그렇듯 체질에 맞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드가는 초기에는 고전주의 미술에 빠져 이탈리아 거장들의 작품을 보며 공부했고, 특히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을 많이 연습해야 한다는 앵그르의 조언을 받아들여 데생 연습을 꾸준히 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신화나 역사, 혹은 자연을 소재로 한 인물화를 주로 그리다가 유난히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탓에 오케스트라를 그리는가 싶더니 이후에는 점차 발레리나를 주로 그리게 되었다. 19세기 발레는 문화예술의 주축을 담당했을 만큼 황금기였다. 그와 함께 발레를 보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꾸준히 등장하던 시기였으며, 드가 역시 발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선을 강조하는 신체 예술인 발레는 평소 데생이나 선을 중시했던 드가에겐 더없이 매혹적인 소재였다. 발레뿐 아니라 당시 부르주아 계층이 즐기던 서커스, 경마 등을 소재로 사람의 동작을 세심하게 관찰한 뒤 여러 번의 드로잉을 거쳐 다양한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발레 연습실을 드나들며 완성한 생생한 묘사

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무대 위의 무용수>는 시선의 위치가 조금 특이하다. 당시 귀족들이 주로 앉았던 위층 박스석에서 바라본 모습인 것이다. 무용수는 무대 위에서 우아하게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으며, 백색의 의상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환하게 빛나고 있다. ‘발레의 화가’가 그린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드가의 독특한 점은 무대 위에서의 모습뿐 아니라 무대에 오르기 전 리허설이나 무대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선호했다는 점이다. 1879년 작 <두 발레 무희의 휴식>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고된 일과를 잠시 멈추고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발레리나들의 모습을 그렸다. 너무 과도한 연습을 한 것인지 고된 훈련과 연습으로 몸은 지칠 대로 지쳐 통증을 느끼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그들의 자세만 보고 있어도 피곤함이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렇듯 드가는 발레 연습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혹독한 연습에 시달리는 발레리나의 고통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했고,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생히 묘사했던 것이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무용수들의 수단이 된 발레

그렇다면, 이러한 드가의 작품들에 대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일까? 사실 19세기에 발레리나는 우아한 직업이 아니었다. 현재와는 달리 당시 파리의 발레는 굉장히 타락해 있었다. 발레는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예술 자체로서의 목적이 되기 힘들었다. 극장 안팎에서 좋은 스폰서를 만나 부르주아로 상승하는 것이 무용수들의 목표였다. 당시 파리 오페라극장에는 무용수들이 공연 전 몸을 푸는 공간인 무용수 대기실이 매우 많이 설계됐다. 그 이유는 당시의 부르주아 남성들이 발레리나를 감상하며 비즈니스를 하는 사교클럽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은 은밀하게 매춘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실제 당시 파리 오페라극장에는 VIP 관객들만 접근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드가의 <분홍과 초록 튀튀를 입은 무희들>에서도 우측 나무기둥 옆에 중절모를 쓴 검은 실루엣의 남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성 구매자, 즉 스폰서였던 것이다.

드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검은 실루엣의 남자들

드가의 대표작 <무대 위의 무용수> 역시 이와 같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 공연을 하는 발레리나 왼쪽을 자세히 보면 또 한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신사가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역시 스폰서의 존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발레단 소속의 어린 소녀들은 주 6일의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면서 오페라극장 정기관람권을 소유한 부유한 남성들의 눈에 들어 신분 상승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매춘문화의 희생자들이었다. 드가는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목격한 장면들을 작품에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검은색 턱시도 차림의 얼굴 없는 남자가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드가의 발레 그림 속에는 화려함 뒤에 숨겨진 예술가의 비애를 전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화가의 그림 속에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쳤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감상한다면, 그저 아름답게만 보였던 드가의 작품도 완전히 새롭게 보일 것이다.

발레리나를 그린 화가 ‘에드가 드가’

무용의 화가 에드가 드가, 19세기 사회의 모습을 담다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에드가 드가(Edgar Degas)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다. 초상화를 비롯해 여러 형태의 작품을 남겼으나 대중에게 가장 각인된 드가의 특징은 ‘무희의 화가’라는 점이다. 그만큼 드가는 발레리나를 소재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우아함 속에 느껴지는 역동적인 포인트들을 다채롭게 그려냈다.

데생 화가로도 뛰어난 재능이 있던 에드가 드가. Dancer with a Fan, ca.1880, Edgar Degas/ THE MET

드가는 데생 화가로도 뛰어난 재능을 갖췄다고 알려진다. 그의 인상주의적 화풍을 생각해볼 때 채색의 효과가 거의 없는 데생 작업에도 능했다는 점이 더욱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무용이란 본래 아름다운 선을 표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성 있는 발레의 모습을 얼마나 풍부하게 표현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모습을 화폭에 담다, 에드가 드가의 작품 세계

에드가 드가는 여러모로 독특한 점이 많았던 예술가다. 그는 프랑스 파리의 귀족으로 태어났으며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지만 화가가 되기 위해서 국립미술학교인 에꼴 데 보자르에 재입학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처음에는 역사화가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한다. 무희의 화가라는 별명과는 통 어울리지 않는 첫 시작이지만 그가 초기에 역사화를 그렸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처음 법학도에서 미술학도로 진로를 바꾼 것은 프랑스의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영향이 있었다. 앵그르는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서 누드화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이상의 천재적인 화가적 재능을 가진 거장이다. 앵그르 역시 역사화 작업을 했으며 드가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Self-Portrait, ca. 1855–56, Edgar Degas/ THE MET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미술 여행은 그에게 작가적으로 많은 영감과 영향을 얻는 기회가 됐는데 당시 고모 집에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지내며 가족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기도 했다.

그 작품이 바로 ‘벨렐리 가족’이다. 드가의 초기작으로 유명한 벨렐리 가족은 그의 고모 부부와 어린 두 명의 딸의 모습을 그린 가족 초상화다.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며 그림에 등장하는 가족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다. 고모의 남편은 반 측면으로 앉아 있어 가족과 단절되어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림 속 고모와 두 딸이 어두운색의 상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벨렐리 부인의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The Bellelli Family, Edgar Dega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림 벨렐리 가족을 보면 알 수 있듯 드가는 어떤 현상을 바라보고 이를 부자연스럽게 긍정의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았으며 가족 간의 긴장 관계 역시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화폭에 그렸다.

그의 작품이 처음 전시된 것은 1865년이다. 드가는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당시 당선된 그림이 ‘뉴올리언스의 수난’ (혹은 ‘오를레앙시의 불행’)이다. 무희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드가는 자신의 생애 중 생각보다 더 다양한 주제를 화폭 위에 담았다. 고전주의 화풍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1872년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뉴올리언스의 목화 공장’을 그리며 당시 미국의 근대적인 모습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A Cotton Office in New Orleans, Edgar Dega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다양한 모티브들이 드가의 여러 작품 속에 등장하지만 역시 그의 작업 중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는 ‘여성의 모습’이다. 여성의 신체, 여성의 평범한 생활, 발레리나 등이 그의 작업에 의해 그려졌다. 독특한 점은 드가가 여성이라는 소재를 그렇게나 몰두해서 그렸음에도 그의 본성은 여성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가는 인간혐오를 의미하는 미장 트로프(misanthrope)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그의 본성은 그의 주 소재가 됐던 발레리나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발레리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후 발레리나를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에게 있어서 발레리나는 아름다운 옷과 움직임 등을 구체화하는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The Dance Class, 1874, Edgar Degas / THE MET

Dancers Practicing at the Barre, 1877, Edgar Degas/ THE MET

드가의 이런 인간 혐오적 습성은 일정 부분, 그가 인간이라는 모티브를 아름답게 미화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특히 드가는 여성의 신체를 그릴 때 지나치게 예술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다. 구도 역시 전통적인 누드화의 모습을 따르고 있지 않았으며 외형을 아름답게 그리려는 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 여성의 모습을 그렸으며 그런 이유로 당시 대중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Woman Having Her Hair Combed, ca. 1886–88, Edgar Degas/ THE MET

Woman Combing Her Hair, ca. 1888–90, Edgar Degas/ THE MET

당시 발레리나의 세계 또한 우리가 그림을 통해서 접하는 것만큼 로맨틱하거나 아름답지 못했다. 당시에는 발레리나가 단순히 오페라에서 무용을 표현하는 댄서로만 활동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 소녀들이 발레를 배웠고 부유한 고객이 이를 스폰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발레리나가 공연에 오르면 그 전, 후로 따로 고객이 접근할 수 있었으며 부유한 남성의 스폰은 매춘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발레리나의 현실이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가의 그림 속에서도 이러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로 그림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남성을 스폰서로 묘사했다. 이들은 커튼의 뒤편에서, 무대의 한쪽에서 발레리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당시 부유한 고객층은 무대의 리허설 준비 중 한쪽 편에서 앉아 직접 발레리나의 무용을 감상했다고도 한다. 때로는 무대의 막이 내리고 그 뒤에서 발레리나를 만나는 남성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의 오른쪽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남성이 의자에 앉아 오페라 리허설을 관람하고 있다. The Rehearsal Onstage, ca. 1874, Edgar Degas/ THE MET

드가는 아름다운 무용수의 모습을 외형적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림 속에 사회의 모습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은 물론 그의 여성 묘사에 있어서는 분명 독특한 시선이 존재한다. 그의 여성 혐오적 특성 때문에 여성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당시 하류층 여성의 삶을 작품 속에 담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주목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여성의 모습을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았다는 점에서 시대화로의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역동적인 움직임을 묘사한 화가

여성 세탁부나 여성 재봉사 등 에드가 드가가 다양한 하류층 여성의 모습을 담았던 것은 분명하나, 그의 소재는 그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초상화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신사들이 말을 타고 경주하는 모습을 그림 속에 그리기도 했다. 주로 당시 프랑스인들의 문화적인 오락거리에 많은 관심사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Woman Ironing, 1873, Edgar Degas/ THE MET

The Singer in Green, ca. 1884, Edgar Degas/ THE MET

무용의 화가, 말이라는 모티브의 활용 등을 떠올려보면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적인 화면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동적인 움직임을 화폭 안에 표현한다는 점이 에드가 드가의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를 순간포착에 큰 재능을 가진 화가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움직이는 여러 장의 프레임 안에서 한순간을 포착하여 그림에 표현한다는 점이 매우 색다르다.

Before the Race, 1882-84, Edgar Degas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Race Horses, ca. 1885–88, Edgar Degas/ THE MET

그는 외형적으로 운동성을 가진 모티브의 한 모습을 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힘을 가진 화가였다. 에드가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그는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볼 수도 있다.

강한 색채나 부드러운 표현도 돋보이나 그의 작품은 한편으로 인상주의 화풍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렸다면 드가는 외부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며, 당시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들과 달리 움직이는 것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오히려 사실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현실적인 면을 그림 속에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he Dancing Class, ca. 1870, Edgar Degas/ THE MET

Dancers, Pink and Green, ca. 1890, Edgar Degas/ THE MET

드가는 색다른 시선을 통해 전형적이지 않은 화면을 그림 속에 표현했으며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섬세한 선을 포착해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어찌 보면 그가 무용의 화가로 널리 알려진 것은 그의 이러한 특성이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에드가 드가의 작업은 단순히 한 장면을 화폭 안에 담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36세에 접어들며 급격하게 시력을 상실했다. 화가에게 있어서 시력 상실이란 치명적인 문제였으나 그는 그럴수록 더욱 예술에 파고들었으며 한평생 결혼하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 전반을 예술 안에 녹이기 위해 노력했다.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그림 작업에 몰두했으며 말년에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조각에 집중했다.

Horse Trotting, the Feet Not Touching the Ground, modeled after 1878, cast 1920, Edgar Degas/ THE MET

그는 조각가로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여러 가지 조각 작품을 남겼으나 가장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였다. 청동으로 조각했으며 높이만 해도 1m가 되는 크기로 발레복을 입은 한 소녀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겼다.

당시 이 조각 작품에 대한 여론은 다양했으나 대체적으로는 실망스러운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발레리나를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수의 사람이 이를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도 했다. 대부분 예술은 현실을 미화하고 여성의 모습은 아름답게 묘사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획기적인 시도와도 같은 작품이다.

The Little Fourteen-Year-Old Dancer, 1922 (cast), 2018 (tutu), Edgar Degas/ THE MET

드가가 조각한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외형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그 표현에서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다. 높은 사실주의적 조각 표현을 넘어서 그는 작품에 실제 직물로 짠 발레복 튤을 입힌다. 조각에 직물을 혼합하여 작업하였으며 사실주의에 기반한 독창적인 시도는 이 작품을 관객의 뇌리에 깊게 박히도록 한다.

새로운 시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후에 드가는 자신의 작업에 사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는 기술은 실제 사진 작업과도 어느 정도 닮아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그가 실제로 사진술이 보급되는 과정에도 새로운 매체를 받아들이고 이를 예술에 접목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점이다.

당시 대부분 화가가 사진술의 보급으로 화가의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드가는 오히려 이를 자신의 예술적 활동에 접목했다. 흔히 화가의 화폭에는 정형화된 구도의 그림이 담겼다면 사진술의 보급을 통해 보다 다양성 있는 구도가 시도됐다. 드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화가였다.

사실 드가의 예술은 온통 트라우마로 점철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에 가까운 혐오적 증상이 작품에 그대로 발현되어 표현됐으며 그 동기는 좋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예술 세계를 확립하는 것에는 큰 영향이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후에 그의 사실적인 표현과 예술에 관한 진지하고 독창적인 시도는 많은 이들의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과거와 근대의 예술을 잇는 하나의 발자취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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