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서원 현판 | [안동Mbc뉴스]유교현판이야기 31편 도산서원 2805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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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11:35:22 작성자 : 이호영

◀ANC▶
한국선비문화의 보고
유교현판이야기 기획시간입니다.
퇴계 선생을 모신 안동 도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존속된 곳으로
사적 17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현판은 제자들과 공부하기를
원했던 퇴계 선생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이 호 영
◀END▶
퇴계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건립된
도산서원은 선생께서 생전에 만든
도산서당 공간과 서원 공간 등 두 곳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도산서당은 선생의 나이 61세 때 완공해
10년 동안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한 곳으로,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제자들이 수학했습니다.
서당의 편액 완락재玩樂齋는
‘평생 학문을 완미하고 즐긴다’라는 뜻이고,
암서헌暗栖軒은
‘바위에 깃들어 학문의 작은 효험을 바란다’
라는 의미입니다.
농운정사의 시습재時習齋는 논어 학이편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인용했습니다.
(S/U)퇴계 선생은 이곳 도산서당에서
주자의 이상향을 꿈꾸며 만년에
제자들과 학문을 연마하기를 원했습니다.
선생 사후 문인과 유림의 공론으로 건립된
도산서원의 현판도 입도과정과 사서의 학문체계를 익히는 과정, 삼경을 연마하는 승당升堂의 과정을 의미합니다.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은 도는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뜻이며 전교당 앞
박약재와 홍의재는 학문의 내용과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INT▶권진호 박사/한국국학진흥원
104]
서재인 ‘홍의재(弘毅齋)’는 논어 태백(泰伯)편에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뜻이 넓고
의지가 굳세야 하니, 짊어진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니, 임중이 도원 曾子曰:’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 라고 한데서 인용하였는데,
동재 ‘박약’의 의미는 학문의 내용을 뜻하고 서재 ‘홍의’의 의미는 학문의 자세를 뜻한다고 해석이 됩니다.
서원 이름인 ‘도산陶山’은 순임금과 도연명의
학덕과 인품을 본받고자 했던 퇴계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들이 계승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S/U)공부하기를 원했던 선생의 바람에 따라
제자와 후학들은 이곳 도산서원에서 끊임없이
공부했고 지금도 선비수련원 등을 통해
선생의 경사상과 선비정신을 배우고 있습니다.
MBC뉴스 이호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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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안동 도산서원, 한석봉의 붓끝이 떨려 삐뚤어진 `도`자 …

1575년(선조 7년)에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서원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영남유학의 근거지 …

+ 여기에 표시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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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검색 및 정보

61, 도산서원전교당(陶山書院典敎堂). 60, 도산서원(현판). 59, 관란헌(현판). 58, 광명실(현판). 57, 농운정사(현판). 56, 도산서당(현판). 55, 상덕사(尙德祠)-현판.

+ 여기에 보기

Source: www.andong.go.kr

Date Published: 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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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MBC뉴스]유교현판이야기 31편 도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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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도산 서원 현판

  • Author: 안동M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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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6.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tXJ7ihUnxI

선조는 한석봉을 불렀다. 사액(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했다. ‘원’, ‘서’, ‘산’, 한석봉은 열심히 받아썼다. 마지막 글자는 ‘도’였다. 그는 자신이 쓰는 것이 ‘도산서원’, 바로 퇴계 이황을 기린 서원의 현판임을 알았다. 선조는 ‘천하의 명필이라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단어를 거꾸로 불렀다고 한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글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는 유래라 전해지는 일화다.

도산서원과 구인당 편액

석봉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편액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575년(선조 8년) 어전에서 쓴 ‘陶山書院(도산서원)’이다. 이 필적은 방정(方正)하면서도 근골(筋骨)이 강하다. 반면 같은 석봉의 글씨인 옥산서원의 ‘求人堂(구인당)’은 비후(肥厚)함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두 편액글씨 모두 짜임새 면에서는 경향이 같다. ‘대자천자문’의 점획도 모서리나 파임이 강한 근골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긴밀한 짜임새나 세로로 긴 글자형태가 한석봉 글씨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석봉서(石峰書) 기사중하(己巳仲夏) 남한중간(南漢重刊)’의 대자천자문 간기를 보면 천자문 책이 왕실이 아니라 남한산성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 훈련대장 임태영 필적의 ‘광화문’이 천자문 글씨 풍을 토대로 하고 있음은 조선시대 궁중편액의 주류가 이러한 서풍이었음을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석봉의 글씨는 조선후기 안진경·유공권의 필적집자 유행과 때를 같이하여 묘갈명 전면에 흔하게 등장한다. 이렇듯 석봉은 해서·행초서·대자서 등 당시 일상의 한자 글씨에 대한 모든 서체 표준을 조선식으로 세웠던 인물이라 할 것이다.

今日書一字 明日學十字

“왕희지의 ‘산음계첩’ 진본을 전수하고부터는 전에 익힌 것을 모두 버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오늘 한 글자를 쓰고, 내일 열 글자를 배워(今日書一字 明日學十字) 달마다 연습하고 해마다 터득하니 세월 가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비록 왕희지에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조맹부보다 못하지는 않았으니 어찌 다행스럽지 아니한가?”라고 한 석봉 자신의 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의 떡 써는 고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석봉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붓글씨를 익혔다고 한다. 그는 가난해서 서당을 다니기는커녕 먹과 종이도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손에 물을 찍어 항아리나 돌 위에 글씨 연습을 했다. 매일같이 글씨를 쓰자 솜씨가 차츰 나아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절에 보내 공부를 하게 했다. 한호의 스승인 승려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그의 글 솜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나는 칼로 떡을 썰 테니, 너는 붓으로 글씨를 써라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한 지 4년이 지났다. 한호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밤을 틈타 집으로 왔다. 그는 어머니께 공부를 많이 해 더는 배울 것이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캄캄한 방에 그와 마주 앉았다. “나는 칼로 떡을 썰 테니, 너는 붓으로 글씨를 쓰거라.”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크기나 두께가 모두 똑같아 보기가 좋았는데, 한호가 쓴 글씨는 크기가 제각각이고 모양이 비뚤비뚤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떡처럼 눈을 감고도 글씨를 고르게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석봉은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했다. 사자관(寫字官)이 되어 국가의 주요 문서 및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하는 동안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명나라에 서 연석이 벌어지면 특유의 정교한 필법으로 글씨를 썼다. 그 자리에서 동방 최고의 명필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여러 고위 관료들로부터 왕희지와 비교하는 평판을 듣기도 했다.

목마른 천리마가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치는 형세

1601년(선조 34년) 3월17일, 선조가 경연 자리에서 물었다. “한호의 글씨를 왕세정이 보았는가? 그의 평가가 어떻던가?” “목마른 천리마가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치는 형세라고 하였습니다” 윤근수가 아뢰었다. 중국 사람들이 천하제일 문장으로 치는 왕세정의 표현이라 석봉의 글씨를 대변하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또 주지번은 “석봉 글씨는 마땅히 왕희지·안진경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격찬을 했다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여송·마귀·등계달·양찬 등이 석봉에게 친필을 부탁하여 얻어갔다고 전해진다.

선조는 한석봉의 글씨를 매우 아꼈다. 그의 대자(大字)를 보고 “기(奇)하고 장(壯))하기 한량없는 글씨”라고 찬탄하면서 중사를 보내 그 집에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필법을 후세에 전하게 하고자 하니 권태로울 때는 구태여 쓰지 마라. 게을리도 말고 서둘지도 마라.”며 그를 한벽한 가평 군수에 제수했다. 또한 ‘醉裡乾坤 筆奪造化(취리건곤 필탈조화, 크게 취한 가운데로 우주가 내 품에 안기니 붓으로 그 조화를 담아냈구나)’라는 8자를 친필로 써 하사하기도 했다.

贈柳汝章書帖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보물 1078호로 지정된 ‘한석봉 증 유여장 서첩(韓石峯 贈 柳汝章 書帖)’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서첩은 선조 29년(1596)에 석봉이 친구 몇 사람과 베푼 연회석에서 즉흥으로 써 류기에게 준 것이다. 이 서첩에는 왕발의「등왕각서(등王閣序)」,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등 3편의 시가 있다. 석봉은 「등왕각서」라는 원래 제목 앞에 ‘추일연(秋日宴)’이라는 세 글자를 붙여 「추일연등왕각서」라 하여 보다 계절적인 감흥을 나타내고 있다.

서첩 첫 장에는 작은 글씨로 주인 풍산 유씨라는 소장자의 글씨가 한쪽에 쓰여 있어 서첩이 유씨 가문에 의해 보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첩 끝에는 연회석에 참여한 다섯 친구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세 편의 글은 모두 인생의 즐거움과 무상함을 읊은 것들이다. 조선 중기의 시문풍류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石峯韓濩楷書帖

2010년에는 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석봉한호해서첩(石峯韓濩楷書帖)’이 보물 제 1078-3호로 지정되었다. 이 서첩은 석봉이 절친했던 간이당(簡易堂) 최립의 시문 21편을 단정한 해서로 필사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명신 서명응은 “우리나라의 인재는 선조대에 성하였으니, 이안눌은 시의 신이요, 최립은 문장의 신이요, 석봉은 글씨의 신이다”라고 칭송했는데, 그가 말한 문장의 신과 글씨의 신을 이 서첩을 통해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이 글씨첩은 승문원(承文院)에서 문서 정사를 담당하는 사자관으로 입신했던 한호의 독특한 서풍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깨끗이 보존되어 있고 필사한 양도 많으며, 하첩 말미에 18세기의 초서명필 만향재 엄한붕의 아들 엄계응(嚴啓膺, 1737-1816)이 쓴 1803년 9월의 발문이 있어 그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석봉천자문

한호의 글씨는 그때까지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풍조를 깨뜨리고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여 석봉류의 호쾌하고 강건한 서풍을 만들어냈다. 또한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따라 배웠기 때문에 그가 우리나라 서예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에 비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친필 진본은 많지 않다. 다만 ‘석봉서법’이라든가 ‘석봉천자문’과 같은 책이 모간본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사자관답게 ‘선무공신유사원교서’ ‘서경덕신도비’ 등 각종 공신교서, 비갈명, 법첩이 진적이나 간본형태로 남아있어 다행이라 할 것이다.

紫霞皐

한석봉의 붓끝이 떨려 삐뚤어진 ‘도’ 자(字)에 얽힌 이야기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이 후학 가르치던 조선조 영남 유학의 총본산 …

◆ 퇴계의 가르침을 전하는 도산서원

도산서원 주차장에 내려서 퇴계 선생이 직접 후학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으로 가다 보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빗돌이 있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맹자가 태어난 추나라와 같이 예절을 알고 학문을 숭상하는 고을이란 뜻이다.

골짝마다 서당이 있고 마을마다 선비가 넘쳐난다는 안동의 유교문화를 대변하는 듯하다. 안동은 고려말 우탁과 조선시대의 거유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이 끊어지지 않았던 지역이기에 유교문화의 수도라는 말이 그리 과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에서 유학의 최고스승으로 받드는 사람에겐 성씨 뒤에 존칭인 자(子)란 글자를 붙인다. 공자와 맹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퇴계 선생을 ‘이자(李子), 회헌 안향선생을 안자(安子), 우암 송시열선생을 송자(宋子)로 부르고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당대에 이미 선비들로부터 최고의 추앙을 받았고, 사후에 조정에서 영의정으로 추증하면서 즉시 시호를 내려 그 공을 기렸다.

그러나 선생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선생은 생후 6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었고, 두 아내를 불행하게 보냈으며, 아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냈는가 하면, 형이 사화로 인해 비명횡사하는 것을 목도했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단양군수, 대사성, 첨지중추부사, 공조판서, 대제학(66세)에 이르렀다.

퇴계 선생은 벼슬살이에 연연하지 않고 유학을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뜻을 두었다. 서원창설을 통해 그런 뜻을 직접 후학들에게 전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도산서당을 설립하여 주리론의 본원으로 만들고 경(敬)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비들을 모아 공부시켰다.

이런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은 삼정승과 학자 및 정치가와 문장가 등 운집한 제자들이 368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이 ‘도산급문제현록’이란 책에 남아있다. 그렇기에 도산서원을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무엇보다 선생은 은인자중하게 살았던 삶을 마감하면서 아들 준을 불러 두 가지를 유언으로 남겼다.

사후에 예조에서 예장으로 예우하려고 하면 반드시 상소를 올려 굳게 사양하고, 빗돌은 세우지 말고 작은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라고 당부했다.

특히 소장학자였던 기대승과 편지로 주고받은 ‘사단칠정’ 논쟁은 유학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현대판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450년 전 조선시대 때 퇴계 선생은 몸소 실천함으로써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 퇴계가 매화를 좋아했던 까닭

퇴계 선생의 도학자적인 모습 외에 인간적인 면모는 매화를 애호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이 남긴 매화시는 75제 107수로 이 가운데, 65제 91수를 직접 선별하여 손수 휘호하여 따로 묵은 것이 ‘매화시첩’이다. 선생이 평생 지은 시가 3천여 수인데 매화를 단일주제로 한 시가 107수나 되니 매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매화시첩’은 퇴계 선생의 친필목판 인쇄본인데, 친필을 판각하여 인출한 책으로 현재 그 판목이 도산서원에 전한다. 매화시첩에는 42세부터 70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에는 매화를 다정한 벗으로, 사모하는 연인으로, 이상세계의 신선으로 여기거나 때로는 외로운 마음을 매화에 의탁하기도 했다. 그것은 매화를 완상물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만난 관기 두향과 매화에 대한 일화는 인구에 널리 회자된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48세 때였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두향은 시와 서와 가야금에 능했고 유난히 매화를 좋아했던 앳된 여인이었다.

매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 두 사람의 만남은 경상도 풍기 군수로 선생이 근무지를 옮기면서 9개월 만에 끝났다. 이별할 때 두향이 건넨 매화 화분을 선생은 평소 늘 곁에 두면서 완상했다.

매화를 보면서 두향을 대하듯 아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초췌해지자 두향의 분신인 매화에게 그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다른 장소로 매화분을 옮겨 놓으라고 말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매화에 물을 주라”고 당부했다고 하니 그녀를 생각한 절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두향은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듣고 21년 만에 안동을 찾았으나 이미 만날 수 없어서 단양으로 돌아가 남한강에 투신했다고 전한다.

이른 봄날 선생이 아꼈던 그 매화가 대(代)를 이어 도산서당 옆에서 속살을 드러낼 때 이런 전설을 생각하면서 감상하노라면 애절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한호가 당황해서 멈칫한 도산서원의 현판글자

도산서원은 크게 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서원으로 나뉜다. 도산서당은 450년 전 퇴계 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선생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온 뒤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직접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5년(선조 7년)에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서원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영남유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사액서원의 현판에 관해 전하는 일화가 있다. 1575년 선조(1567~1608)가 당대 최고 명필이자 아끼던 서예가였던 석봉 한호(1543~1605)를 불렀다. 도산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조는 한호에게 자신이 부르는 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호하지 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호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 글자씩 부르기 시작했다. ‘원’,‘서’,‘산’자(字)를 이어서 부르자 한호는 마음을 모아 받아썼다. 마지막으로 ‘도’라고 부르자 비로소 한호는 무슨 내용인지 알게 된다.

그때 자신이 받아쓰는 휘호물이 ‘도산서원’의 현판임을 깨달은 것이다.

선조가 이렇게 거꾸로 부른 것은 천하의 명필인 한호도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을 임금 앞에서 휘호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옹졸해지고 붓끝이 떨려 현판글씨가 잘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흔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를 바꾸어서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뜻이 붓 앞에 있어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의재필전’을 선조가 알았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씨를 휘호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글자인 ‘도’자(字)를 보면, 좌부방과 도자의 어울림이 어색하고, 쌀 포의 갈고리도 위로 올라간 느낌이 든다.

이 글씨를 쓸 때 한호는 33세였고 완전히 성숙한 자신의 글씨를 구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미리 구상하지도 못한 상태로 이 정도의 역작을 즉석에서 휘호한 것을 보면 역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필임에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지금 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사본이고 국학진흥원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도산서원에 들르면 퇴계 선생이 후학들을 지도했던 도산서당과 그 옆에서 향을 풍기는 매화, 그리고 한호의 필적을 살펴보면서 선인들의 정신세계와 유묵에 잠시나마 마음으로 다가가 보면 요즘 유행하는 여유로운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정태수

한국서예사연구소장·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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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安東 陶山書院 典敎堂)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서원이란 훌륭한 사람들에게 제사지내고 유학을 공부하던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웠다. 그 중 전교당은 유생들의 자기수양과 자제들의 교육을 하는 강당으로서, 전교당의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전교당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Jeongyodang Lecture Hall was built at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to commemorate the scholarly achievements and virtues of Yi Hwang (pen-name: Toegye, 1501~1570). Seowon (Confucian academy) were private educational institutes of the Joseon Dynasty where worship ceremonies were held for admirable sages and the doctrines of Confucianism were taught. Seojae Hall (to the west) and Dongjae Hall (to the east), which were built to accommodate students, are located on the left and right-hand sides of the forecourt, respectively. Built in 1574 (the 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of the Joseon Dynasty the lecture hall measures 4 kan (a unit of measurement referring to the distance between two columns) at the front and 2 kan at the sides, and has a hip-and-gable roof resembling the character 人 when viewed from the side. The hall consists of a floor-heated room and a vestibule with a wooden floor. It was repaired in 1969. The lecture hall also contains the tablet titled Dosanseowon, which was presented to the academy by King Seonjo. It is said that the letters on the tablet were written by Han Seok-bong, one of the greatest calligraphers of the time, right in front of the king.

书院是指祭祀圣贤并用于学习儒学的朝鲜时代私立教育机关。陶山书院是为了纪念退溪李滉(1501-1570)的学识和功德而建。其中的典教堂是儒生们自行修养和教育弟子的讲堂,典教堂前院左右两边是儒生们的宿舍东斋和西斋。这座建筑风格简朴,据说宣祖赐予的“陶山书院”悬匾由书法家韩石峰亲笔在国王面前题写。

書院とは、立派な人々を祀り、儒学を勉強するための朝鮮時代の私立教育機関をいう。陶山書院は、退渓李滉(1501~1570)先生の学問と徳行を称えるために初めて建てられた。その中で典教堂は、儒生等の自己修養と弟子等の教育をする講堂であり、典教堂の前庭左右には、儒生等の寮である東斎と西斎が位置している。大変簡素に造られた建物で、宣祖が書院に下した「陶山書院」という扁額は、名筆の韓石峯が王の前で書いた字だといわれている。

陶山書院(도산서원)

현판의 글씨는 석봉 한 호가 썼다. 모르는 눈으로 보기에도 기상이 느껴졌다.

임금 선조의 명에 따라 ‘원’, ‘서’, ‘산’, ‘도’의 순으로 글자를 쓰다, 자신이 도산서원을 현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붓을 떠는 바람에, 마지막 ‘도’자는 다소 흔들리고 말았다는 일화는 전연 무색했다.

생후 처음으로 가본 도산서원. 생각보다 규모가 소박해 놀랍고 정다웠는데, 현판의 그 글만큼은 과연 달랐다.

‘그 시절, 여기에 머물던 선비들은 이 네 글자를 하늘에 띄우고 학문에 정진하였겠구나. 이토록 깊고 아름다운 곳에서.’

부럽기도 하고, 곧 소나기가 내릴 듯 맘이 쌀쌀하였다.

‘나의 하늘에는 어떤 글을 두어야 하나. 나의 발은 깊고 아름다운 곳을 향하고 있나.. 혹 얕고 미숙하기만 한 곳으로 터벅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에 빠져 고개를 젖히고 현판만 들여다보는데. 톡, 토톡, 토도독.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에그머니, 우산을 차에 두고 왔는데..!’ 빗발이 더 거세질세라, 손바닥으로는 황급히 하늘을 가렸지만 발은 좀처럼 따를 줄을 몰랐다.

소박하고 정겨운, 깊고 아름다운 기상을 조금이라도 더 채우고 싶어 머뭇거렸던 풍경들, 아래 나누었다.

도산서원(석봉 한 호의 글)

도산서원

안으로 한 걸음

서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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