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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천지창조 7일째 왜 쉬었을까, 성경의 놀라운 ‘포맷 개념 …
7일째 되는 날 하느님은 ‘쉬면서 숨을 돌렸다’고 기록돼 있다. 바깥으로 향하던 숨을 안으로 되돌렸다. ‘쉬면서 숨을 돌렸다’라는 성경 구절은 영어로 ‘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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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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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 천지 창조 와 제 7일 – 다음블로그
창세기-3 천지 창조 와 제 7일 하나님은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하셨습니다. 제 1일은 어둡고 광활한 우주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3/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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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경 또는 토라 등에 나와있는 말로 천지창조(天地創造)는 유일한 신께서 이세계를 창조를 뜻을 … 제7일에는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음을 축복하여 휴식하고 이 날을 성스럽게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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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는가 – 유대교 스터디 바이블
한 주간이 7일 단위로 지나간다는 사실은, 이미 모든 인류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지고 널리 퍼진 상황입니다. 성경에서 7일을 한 주간으로 언급하고 있는 …
Source: tovmod.blogspot.com
Date Published: 12/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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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각각의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 …
6일 혹은 7일.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6일만에 하늘과 땅과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속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
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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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문자 그대로 믿기지 않아 시험 드시나요? – 뉴스앤조이
창세기 1장 ‘천지창조’는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접근해 우주 나이가 6,000살이고 하나님이 하루 24시간 7일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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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하나님이 7일이나 걸려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1:1, 표준새번역) … 그런데 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인데도 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7일이나 걸렸습니다.
Source: koinespirit.tistory.com
Date Published: 1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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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이야기 (2) – 네이버 블로그
이리하여 제 7일이 창조의 절정을 이룬다. 즉,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으로, 창조를 기억하며 창조주를 기리는 날이 된다.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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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천지 창조 7 일
- Author: 영원한 복음Everlasting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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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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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천지창조 7일째 왜 쉬었을까, 성경의 놀라운 ‘포맷 개념’ [백성호의 예수뎐]
[백성호의 예수뎐]수천 년 역사를 관통하며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키려 애썼다. 사람만이 그 대상이 아니었다. 유대인이 생활하던 자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6년간 농사를 짓고 7년째에는 씨를 뿌리지 않았다. 율법에 따른 안식년이다.
그해에는 땅을 쉬게 했다. 그럼 1년간 농사도 짓지 않고 뭘 먹고 살았을까? 유대인들은 안식년을 앞둔 해에 2년 치 식량을 준비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 치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안식일에는 불을 피우며 요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안식년 1년 전에는 어김없이 풍년이 들었다고 돼 있다.
(30) 천지창조 후 7일째 신은 왜 쉬었을까
안식일을 상징하는 숫자는 ‘7’이다. 안식년도 ‘7’이다. 7년이 7번 지나면 49년이다. 유대인들은 그 이듬해인 50년째를 ‘희년’이라 불렀다. 그해는 매우 특별했다. 희년에도 농사를 짓지 않았다. 49년 안식년과 50년 희년이 이어지면 유대인들은 무려 2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러니 그만큼 식량을 비축해둬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을 쌓고 부족 단위로 살던 시대였다. 부족 간 전쟁에서 패하면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희년이 오면 유대인들은 노예들을 모두 해방했다. 해방된 노예들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빚도 무효가 됐다.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리고 다시 시작하게 하는 거대한 ‘사회적 포맷’이었다. 그건 예수가 설한 안식의 포맷 기능과도 맥이 통한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유대인 마을을 걷다가 골목 귀퉁이의 계단에 앉았다.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 구약의 첫 장을 폈다. 천지창조의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졌다. 빛이 창조되고, 밤이 생기고, 하늘이 생기고, 땅이 생겼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가 종류대로 돋아났다. 하늘에는 빛물체가 창조됐다. 해와 달이 생기고, 별들도 생겨났다. 온갖 생물이 생기고, 사람도 생겨났다. 이 모든 게 ‘창조의 드라마’다.
안식일의 뿌리는 창세기에 있다. 하느님(하나님)은 성경의 시간으로 6일간 천지를 창조하고 7일째에 쉬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왜 쉬었을까.
계단에 앉은 채로 눈을 감았다. 창세기에서 천지창조는 6일째에 끝났다. 7일째에 하느님은 쉬면서 안식만 취했을 뿐이다. 나는 7일째에 맞은 안식일에서 비로소 천지창조의 거대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보았다. 하늘과 땅이 생기고, 온갖 생물과 사람까지 생겨난 6일째까지는 그 마침표를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런 걸까.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하늘이 나오고 땅이 나왔다. 해와 달과 별도 나왔다. 이 우주의 온갖 생명이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났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한다. ‘없음(空)’이 ‘있음(色)’이 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다. 그런데 ‘공즉시색’만 이야기하면 ‘절반의 완성’에 불과하다. 나머지 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사람은 숨을 내뱉기만 해서는 살 수가 없다. 들이마시기도 해야 한다. 날숨과 들숨이 교차할 때 우리는 ‘살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안식일을 강조했을까. 예수는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라며 ‘아나파우소(신약성경이 처음 기록된 그리스어로 ‘안식’이란 뜻)’를 강조했을까. 구약성경에서는 왜 “이날(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라고 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숨을 내뱉은 뒤에 다시 들이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신의 속성’을 닮게 했다. 하늘과 땅을 만들던 하느님의 창조성이 우리 안에도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각자의 하루를 돌아보자. 나는 오늘 얼마나 많은 생각을 창조하고, 감정을 창조하고, 아이디어와 통찰을 창조했나.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느님의 창조성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의 속성’의 사용법을 잘 모른다. 늘 엉뚱하게 사용해서 오히려 짐을 만든다. 그런 짐들이 쌓이고 쌓여서 예수가 설한 ‘무거운 짐’이 된다.
예수는 그 짐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게 포맷이다. 아침에 화를 낸 것을 포맷하고, 점심때 떠오른 슬픔을 포맷하고, 저녁때 만난 죽일 놈(나의 원수)에 대한 감정을 포맷한다. 6일간 창조한 그 모든 감정과 생각과 집착을 7일째에 포맷하는 거다. 그게 안식일에 담긴 깊은 뜻이 아닐까. 그 모두를 포맷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의 속성’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거룩한 날로 정한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거룩함이 뭔가. ‘신의 속성’이 거룩함이다. 안식일은 포맷을 통해 신의 속성,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날이야말로 거룩한 날이다. 그러면 “자손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라”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자손 대대로 신의 속성을 기억하고, 신의 속성으로 돌아오라는 의미가 된다.
2000년 전에 예수를 ‘사형감’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도 이 대목을 놓치지 않았을까. 만약 그들이 안식일에 담긴 진정한 뜻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예수를 단죄하는 대신 자신에게 되묻지 않았을까. ‘나는 안식일을 지켰는가. 안식일을 통해 지난 일주일을 포맷했던가. 그러한 포맷을 통해 하느님 안으로, 신의 속성 속으로 거했던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까.
구약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 안식일을 지켜나가야 한다.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다.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1장 17~18절)
7일째 되는 날 하느님은 ‘쉬면서 숨을 돌렸다’고 기록돼 있다. 바깥으로 향하던 숨을 안으로 되돌렸다. ‘쉬면서 숨을 돌렸다’라는 성경 구절은 영어로 ‘He ceased and was refreshed’다. 쉬고 다시 새로워진다. 거기에 안식의 뜻이 담겨 있다.
숨을 내쉬는 게 창조다. 하느님이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자연을 만든 게 ‘날숨’이다. 그렇게 숨을 내쉰 다음에는 다시 들이마셔야 한다. 왜 그럴까. 그래야 다시 내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2, 제3, 제4의 창조가 이어진다. 그게 신의 속성에 깃든 ‘무한 창조성’이다.
안식은 그저 쉬는 게 아니다. 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가 ‘제2의 천지창조’를 준비하는 일이다. 제2, 제3의 천지창조가 뭘까. 다름 아닌 우리가 맞게 될 내일, 모레, 글피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루’를 창조한다.
창세기-3 천지 창조 와 제 7일
창세기-3 천지 창조 와 제 7일
하나님은 세상을 6일 만에 창조하셨습니다.
제 1일은 어둡고 광활한 우주 속에서 빛을 창조하시어 빛과 어두움으로 나누셨고
제 2 일은 하늘(궁창)을 창조하시어 하늘 위의 물 (노아의 홍수 때 하늘의 물기둥이 터쳐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 지금의 오존 층)과 하늘 아래의물 (오늘 날 바다)로 나누셨다.
제 3일은 지상의 물을 한 군데로 몰아넣어 육지를 만들고 (이 때 지구가 중심축에서 기울기 23.5도가 만들어졌다) 식물들을 창조하셨다.
제 4일은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시고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운행시키셨다.
제 5일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
제 6일은 육지의 동물들을 종류별로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지키고 통치 할 사람을 하나님,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지으신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문화 명령 (Cultural Commandment) 이므로, 자연과 생물이 멸종 당하지 않고 잘 지키고 보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통치 권리와 함께 주신 것이다.
제 7일은 하나님도 안식하시고 인간에게 동일한 안식(휴식)을 갖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크리스챤 들이 제 7일을 안식하고 거룩한 성일로 지키며 하루 종일 유흥과 오락을 멀리하고 성전에 나와 예배 드리는 행위가 바로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7 이라는 숫자는 완전 수이므로 숫자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차차 설명해 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인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바로 창조 주 하나님이시고 경배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실 날자는 모르지만, 성경의 여러 가지 근거상, 제 사견으로는 심판 주 예수님의 재림이 제 7일 안식일에 오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우리 교우들 중에서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부탁 드립니 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경 또는 토라 등에 나와있는 말로 천지창조(天地創造)는 유일한 신께서 이세계를 창조를 뜻을 담고있는 설화이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져 있는 아담의 창조가 유명하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하나님 야회라고도 불리는 신이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라고 믿고 있다.
성경 [ 편집 ]
성경에 나와있는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 전채[1]에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하나님은 6일 간에 걸쳐 창조하였다고 한다. 제1일에는 빛이 있으라 하니 밤과 아침이 갈라지고, 제2일에는 천공(天空) 즉 하늘과 바다를 가르시고, 제3일에는 땅과 식물(植物), 제4일에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 제5일에는 물고기와 새, 제6일에는 기타 동물과 이를 지배하는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다. 제7일에는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음을 축복하여 휴식하고 이 날을 성스럽게 하였다.
토라 [ 편집 ]
천지창조는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첫 권인 창세기(구약 모세오경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절 전반(前半)에 기술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야훼는 천지창조 이전에도 존재하여 천지 만물을 6일 간에 걸쳐 창조하였다고 한다. 제1일에는 빛이 있으라 하여 빛을 만들고, 제2일에는 천공, 제3일에는 땅과 식물, 제4일에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 제5일에는 물고기와 새, 제6일에는 기타 동물과 이를 지배하는 인류를 야훼 신의 형상을 따서 만들었다. 제7일에는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기에 쉬셨다.
이 이야기는 본문비평적(本文批評的)으로는 제사법전(祭司法典)에 속하며 현재의 형태로 된 것은 대략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본다. 바빌로니아의 천지창조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 바빌로니아 신화의 경우에는 서로 싸우는 여러 신들이 등장하는 데 반하여 구약에 있어서는 일신교적 신관(一神敎的神觀)의 기초 위에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각각의 날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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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6일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매일 다른 무엇인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매일 행하신 일에 대해 특별히 주목해야만 할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부르셨으며 그대로 되었습니다.
세상의 창조는 6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문자적인 날 수와 비문자적인 날 수를 두고서 논쟁하기도 합니다. 본 글은 그 날 수에 대해 논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에, 우리는 7일 동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어난 일들에 주목하여 다룰 것입니다. 먼저 창조의 날 수인 6일과 7일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6일 혹은 7일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6일만에 하늘과 땅과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 속에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다양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후, 7일에는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7일도 창조의 날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제7일을 특별하게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세기 2장 1절-3절, 개역개정성경)
창조 사역의 제7일은 다른 6일과 동일하게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안식은 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먼저 인정하기
창조를 이어가시던 6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매일 무엇인가 다른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창조하셨는데, “매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창조하셨으며, 또한 말씀하신 대로 “되었다”라는 점입니다.
다른 여러 성경들에서도 문자 그대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장 3절, 개역개정성경)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편 33편 6절, 개역개정성경)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편 33편 9절, 개역개정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곧 창조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날
창조의 첫째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1장 5절에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확장해 나가시고 자신의 능력을 외부로 나타내시면서 우주 창조의 과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물을 포함하여 빛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과학자들은 우주가 여전히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을 창조하시면서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분리해 내셨습니다.
둘째날
둘째날에, 하나님께서는 “궁창” 또는 “하늘”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 6절-8절, 개역개정성경)
하늘은 땅과 천상(heavends)을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셋째날
하나님께서늘 셋째날에 구체적인 두 가지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육지와 바다를 구분하시는 일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땅의 풀과 나무들을 만드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는 아무렇게나 진행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을 위한 계획적인 창조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인 물들을 바다라고 부르시고, 땅에는 종류대로 각종 씨를 뿌리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생명체는 셋째날부터 창조되기 시작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좋았더라”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넷째날
하나님께서는 이미 빛을 창조하신 후인 넷째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내용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바로 빛이십니다.
빛을 내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 가지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빛을 내는 존재들이 낮과 밤, 날과 해, 그리고 계절을 다스리도록 정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2)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14절-18절, 개역개정성경)
하나님께서 시간과 계절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신 이러한 빛들은 지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변하지 않도록 설계하셨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세기 8장 22절, 개역개정성경)
또다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창조하신 것들이 좋으셨습니다.
다섯째날
다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생명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창조된 것을 보시고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을 추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세기 1장 20절-22절, 개역개정성경)
하나님께서 하신 축복은 다섯째날부터 세상에 시작되었습니다.
여섯째날
창조의 제6일째되는 날, 모든 것이 확장되고 확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종류의 동물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을 좋게 보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인간 창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삼위일체의 속성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세기 1장 26절, 개역개정성경)
인간 창조에 대해 선언하신 이후, 인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창조되어졌으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며 다음과 같은 사명을 부여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창세기 1장 28절-29절, 개역개정성경)
안식의 날
하나님께서는 지금껏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시며 안식을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שבת)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창조활동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안식일을 통하여, 시편 8편 5절에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가치를 조용히 묵상해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편 8편 5절, 개역개정성경)
글의 저자 : Danielle Bernock
Danielle Bernock is an international, award-winning author, coach, and speaker who helps people embrace their value and heal their souls through the power of the love of God. She’s written Emerging With Wings, A Bird Named Payn, Love’s Manifesto, Because You Matter, and hosts the Victorious Souls Podcast. A long-time follower of Christ, Danielle lives with her husband in Michigan near her adult children and grandchildren. For more information or to connect with Danielle https://www.danielleberno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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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문자 그대로 믿기지 않아 시험 드시나요?
▲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하는 포럼이 열렸다. 포럼을 주최한 우종학 교수는 문자주의에서 벗어나고, 과학과 대화하며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우주 창조’를 주제로 과학자와 신학자가 만났다. 페이스북 그룹 ‘과학과 신학의 대화(과신대)’가 주최한 첫 번째 오프라인 포럼이 5월 30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렸다.창세기 1장 ‘천지창조’는 한국교회에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접근해 우주 나이가 6,000살이고 하나님이 하루 24시간 7일에 걸쳐 지구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지질학과 천문학의 발견으로 우주 나이가 140억 년, 지구 나이도 46억 년이라는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이는 과학계와 끊임없이 마찰하고 대립하고 있다.
이날 포럼은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와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느헤미야)의 기조 발제를 시작으로, 우리가 어떻게 창조 기사를 이해하고 어떻게 과학을 성경과 연관시켜 볼 것인지 고민하는 자리였다. 과학과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며, 더 많은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300여 석을 가득 채웠다.
우종학 교수는 자연 세계 현상을 해석하는 학문인 과학과, 특별 계시의 텍스트인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 간 관계에 대해 말했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놀라운 우주의 세계는 성경 텍스트를 뒤엎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발견과 신학적 해석을 토대로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구약에 나타난 우주와 세상 창조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발제한 김근주 교수는 “창조에 관한 대다수 본문이 시(詩)의 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스라엘 민족 찬양의 중심 주제였음을 보여 준다”고 했다. 고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질서 있게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글자 그대로 믿었을 테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고대 세계관에 입각해 성경을 볼 것이 아니라고 했다.
김 교수는 창조과학이 “문자 그대로 창조 기사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노예제 찬성과 여성 안수 금지, 독재 권력에 대한 순종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 김근주 교수는 문자적이든 유비적이든 성서 자체가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씀의 메시지가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이어진 패널 토의는 우종학 교수와 김근주 교수를 비롯해, 권영준 교수(연세대학교 물리학과), 이택환 목사(그소망교회)가 이어갔다. 이날 주제는 ‘우주 창조’였지만, 중간중간 기독교인이라면 궁금해할 만한 질문들이 나왔다.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된 패널 토의 사회는 이명희 CBS 아나운서가 맡았다.
–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다고 되어 있다. 하루의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가?
이택환 / 하나님이 태양을 넷째 날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전 3일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하루라는 게 태양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나. 물리적인 ‘하루’가 아닌 문학적인 개념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창세기 1장 곳곳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반복하고 있는 게 그 힌트다.
창세기 저자가 24시간, 6일로 이해하고 창조 기사를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천문학적・지구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신학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하루면 온 세상을 다 만들 수 있는데 굳이 왜 6일에 걸쳐 만드시고 7일째 쉬셨을까? 이것은 창조의 과정 가운데 안식일 신학이 들어 있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창세기 1장은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로 갔다”는 내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성경 말씀을 문자적, 유비적으로 의미를 구분하는 게 목회자마다 달라서 혼란스럽다.
이택환 / 예를 들어 창세기 2장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 아담의 코에 생기를 넣으셨다고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본다면 하나님이 인공호흡을 하셨다는 것인가? 허파가 있으셔서 들숨과 날숨을 내쉬었다는 의미일까?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인간을 치밀하게 창조하셨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 같다.
우종학 / 창세기 1장 전체를 유비적으로 볼 것인지 문자적으로 볼 것인지, 어려운 점이 있다. 문자적이라는 게 뭐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빛이 있으라”를 어떻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까.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는 말도 사실은 해석이 필요하다. 성경 텍스트가 전하려고 했던 본래 의미를 파악해야지, 이것을 검증하려 한다든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건 문자적이건 유비적이건 틀릴 가능성이 높다.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메시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성경 저자가 믿고 표현한 내용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일까?
김근주 / 결론적으로는 그럴 것 같다. 다 받아들이지 않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가 성경 말씀을 취사선택해 오고 있다면, 본문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아전인수 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게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도 문자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일까?
이택환 / 예언자 발람에게 나귀가 말하는 내용이 민수기 22장에 있다. 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니, 발람이 왜 안 가냐며 나귀를 죽이려 하자, 나귀가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못 가는 것”이라고 화가 나 얘기를 한다.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건 곧 부활을 못 믿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
역으로 질문을 해 보자. 교회가 부활을 전하는 종교인가 아니면 나귀가 말하는 것을 전하는 종교인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발람 사건을 믿어서 구원받는가, 아니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믿어서 구원받는가?
근본주의・문자주의의 문제는 성경에서 무엇이 진짜로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구분을 못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것은 다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그럼 나귀가 말하는 것과 예수 부활도 똑같다는 것인가? 발람 이야기를 우화나 비유로 이해하면 부활도 그렇게 여긴다고 생각하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구분하는 게 신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김근주 / 복음서에 보면 부활의 목격자, 증인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부활 사건은 본문 자체를 보면 목격자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요나 물고기 뱃속은 목격자 없는 게 문제가 되나? 요나서 전체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요나와 그에 비해 뜻밖의 사공들 니느웨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 요나서 연구할 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사실 여부로 신앙이 왔다갔다한다는 게 말이 될까? 예수 부활은 목격자가 관건이고, 증인도 수도 없이 나온다.
출애굽기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떻게 홍해가 갈라져 벽이 되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건 부활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부활 메시지 자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우종학 / 이런 내용을 의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과학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전지전능하시다. 나귀건 말이건 다 말하게끔 하실 능력이 있다고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데, 이 사건에서 실제로 나귀가 말한 것인가 아니면 우화적으로 쓴 것인가. 우화적인 것이라고 선택한다면 그런 선택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성, 기적을 베푸실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와 하셨냐 안 하셨냐는 다른 것이다.
▲ 패널로 나선 네 사람은 기독교가 과학과 충돌하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아 보이는 부분에 대해 토의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성년창조론의 문제는?
우종학 / 매력적이긴 하다. 하나님이 6,000년 역사의 지구를 만드셨는데 46억 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지구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을 지난주 창조하시면서 서른 살로 창조하셨다는 얘기다. 그래서 성년창조론이라고 부른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다면 아담이 1~29살까지의 기억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우주를 볼 때는 지구 생성 이후 46억 년의 역사를 거쳐 온 과정이 앨범처럼 다 있다. 그런 내용을 봤을 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건인데 있었던 것처럼 꾸며서 보이는 것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기꾼으로 만드는 거다. 그러한 점에서 성년창조론은 신학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권영준 / 성년창조론은 기본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우주가 아니라 박제된 우주로 가둬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동물을 죽여서 박제하면 모양만 남아 있지 기능은 없다. 예를 들어 우주를 6,000년 전에 만들었다고 한다면 138억 년은 박제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담뿍 담긴 밥과 국, 반찬 먹는 거랑 3분 카레에 즉석 밥 먹는 것 중 어느 쪽 식사에서 사랑이 더 느껴지느냐고 묻는다. 하나님이 박제된 우주를 만들어 놓고 여기 살아라 할 때의 사랑과, 138억년간의 과정을 통해 자연 세계를 만들고 때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셨을 때의 사랑 중 어디에 정성이 더 담겼겠는가? 나는 후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 과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과학을 성경보다 더 위에 두는 것 아니냐. 성경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많다.
권영준 / 물이 끓는 걸 보고 왜 끓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누구는 끓는 점에 도달해서, 누구는 배가 고파서 라면을 먹으려고 불을 켜서라고 대답한다. 모두 답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적 답을 찾아야 할 때 자연과학을 아무리 뒤져도 신학적 답이 안 나온다. 그런 경우 과학이 신학의 권위를 누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이들은 창조과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잘 모르면서 좋은 내용이니 무조건 부르고 본다는 식은 곤란하다면서, 먼저 지도자들이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알 수 있도록 총회나 선교단체에서 프로그램을 열어 교육하는 게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는 말자고 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 진화의 특징, 기본 요소로 말할 수 있는 적자생존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성품과 너무 다르지 않나? 하나님이 진화를 주관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우종학 / 진화라는 게 우발적이고 우연적이다. 자연법칙하고는 굉장히 다르게 하나님의 창조성을 드러낼 수 있다. 자연법칙은 굉장히 기계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진화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자연법칙과 반대의 가치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내적 풍요하심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신학적 측면에서, 진화를 하나님이 가진 놀라운 능력의 또 다른 채널로 보면 훨씬 더 풍성하다. 진화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오셔서 왕이 된 게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자기를 비우시고 고난과 고통의 길을 걷지 않나. 그렇게 준비해 오신 창조의 작업 속에는 진화의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진화를 보면 이해할 수 없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닮아가는 과정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로 본다면 더 풍성한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김근주 / 진화 자체가 ‘생명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과학자들의 발견이다. 우리 인간도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최초의 모습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사람이지 않다. 진화가 아닌 시간에 따른 변화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원숭이를 보면서 ‘쟤가 진화해서 사람이 됐다고?’ 이렇게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좋겠다.
– 계속적 창조는 창조의 미완성을 의미하는가? 종의 창조는 종의 진화를 의미하는가? 성경은 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했다고 하는데.
우종학 / 전통적으로는 무로부터 유의 창조가 일어났고, 하나님은 이후부터는 보존하신다는 개념이 우세했다. 그런데 근대과학이 등장하고 우주 나이를 알게 되면서, 그 긴 과정 동안 하나님께서 계속 창조하고 있다는 개념이 중요해졌다.
현재 우주에서 전혀 없던 게 새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미 있는 에너지가 물질이 된다든지 하는 변화 과정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말 그대로 없던 물질과 에너지가 생겨야 하기 때문에 ‘무로부터의 창조’다. 그 이후, 계속적 창조라고 하는 것은 뭔가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가시고 우주 전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경륜하시는 것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창조과학, 올바른 신학 아니지만 감정적인 대응 자제해야”
패널들은 창조과학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한국교회가 창조과학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탈(脫)창조과학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대화를 이어갔다.
– 한국교회에 창조과학이 득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창조과학에 대한 평가는?
이택환 / 3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초기 창조과학자들은 근본주의자였고 문자주의자였지만 신앙과 스펙이 화려했다. 박사, 의사, 교수고 신앙생활도 반듯하게 잘했다. 그러니 교회에서 볼 때는 저 사람은 신앙적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했다는 모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한때 교회와 선교단체 수련회에서 특강하면 나중에 창조과학 시간이 제일 좋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제대로 된 과학도 아니고 올바른 신학도 아니다. 유령 과학이자 유령 신학이다. 교회와 선교단체가 배회하는 유령 과학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권영준 / 우리나라 사람들은 쉬운 답을 빨리 외우려는 면이 있다. 수업을 해 보면, 치밀하게 준비해 짜임새 있게 강의하면 “강의 잘 못한다. 어렵다”고 하는데, 열심히 농담하다가 마지막에 1.2.3 요점 정리해 주면 “명강의다”고 한다.
깊이 고민하기 보다 문자적으로 믿으면 되니까 득세하는 것 아닌가 싶다. 창조과학이 좋은 점은 창조 역사를 문자적으로 변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다. 그 창조과학으로 뭐 한 게 없다. 창세기 변증 외에 인류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는지 잘 모르겠다.
김근주 / 원체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쉬운 대답을 제시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경절대주의나 문자주의가 우리 교회 전체에 퍼진다. 창조과학뿐 아니라 여성 안수나 권력을 대하는 태도에서 우리 교회가 줄기차게 선택해 온 것 역시 ‘문자 그대로’다. 그대로 믿으면 고민할 필요 없는 것이다.
우종학 / 구약에 보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다. 하나님을 언어로 다 설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명확하게 알고 싶어 한다. 창조과학은 그런 면에서 화끈하고 매력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문자 안으로 하나님 끌어내려서 인간의 생각 범위 안에 하나님을 가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참 하나님의 모습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전능하지만 정의하기 어려운 하나님, 잘 풀리지 않는 하나님, 과학으로 정의되지 않는 하나님을 그대로 믿으면 된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참석자들은 창조과학에서 벗어나려면 교단 총회와 선교단체 등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목회자들도 창조과학에 대해 잘 모르면서 ‘좋은 것’이라는 소리만 듣고 강사를 불러다 강의를 시켜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다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창조과학자들에 대한 감정적인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종학 교수가 주도해 만든 과신대는 ‘창조과학’의 문자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이성에 기반해 성경을 합리적으로 보고, 둘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는 그룹이다. 온라인상에서 활발한 논의를 이어가던 차에 마침 새물결플러스에서 번역한 <창조론자들>의 출간을 기념해 첫 번째 오프라인 포럼을 열었고, 20일 만에 300명이 참가를 신청했다.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집중해 강의를 들었지만, 아직도 기존 가치관과 과학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한 참석자는 “구원받았는지, 구원은 무엇인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대답해 달라”는 질문을 네 명에게 던지기도 했다.
우종학 교수는 포럼을 연례 행사로 발전시키려 구상하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6월부터는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더 활발하게 연구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 교수는 “과신대를 통해 과학과 신학을 다 인정하면서 서로 대화하는 흐름을 만들어 가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흐름이 약하고, 주로 창조과학식으로 과학을 부정하는데 머물러 있다. 과학자들 중에도 크리스천이 많은 만큼, 이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성경과 자연을 읽어 가고 기독교를 변증하며 무신론의 다양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창세기, 하나님이 7일이나 걸려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
오늘부터 짬짬히 창세기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 성경 중 창세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 창세기 안에는 평소 많이 궁금한 인생의 질문들이 대부분 들어있고, 또 그에 대한 성경의 해답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그냥 옛날 이야기로 읽는 것보다 인생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좀 더 풍성한 영적인 삶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왜 7일이나 걸려 세상을 창조하셨을까?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 인류에게 대놓고 도발적인 선언을 합니다. 바로 온 세상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글번역 성경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1:1, 표준새번역)
우리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막연한 추측을 합니다. 그 중에 빅뱅 이론도 있고,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대부분 그 내용의 핵심은 “우연히” 생겨났다는 것이고,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하고, 이 세상은 그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여러 종교에서는 이를 두고 “진리”를 깨닫는다고 말하죠.
그런데 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인데도 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7일이나 걸렸습니다. 그저 하루만에 아니 순식간에 뚝딱 해버릴 수도 있을 터인데, 왜 이렇게 시간이 걸렸을까?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7일만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신다.
그저 무작정 하나님 마음 내키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실 때 아주 치밀하게 그리고 끈기있게 그렇게 행동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말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빛(존재 에너지?)를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뭍과 바다를 만들고,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고, 식물을 만들고, 짐승들을 만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 순서를 보면 하나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주 먼 것에서부터 점점 인간 가까이로 그 창조의 순서가 다가오는 것이죠.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섭리 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고, 그 섭리를 따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만약 이 섭리를 어기거나 인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바꾼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대부분 재앙으로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질서의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살아야 할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목적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은 세상이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만든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이루어져 있고, 또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움직여지는 것을 성경은 선이라고 합니다. 좋다고 하죠.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인간의 목적이나 욕심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4대강 사업이 아주 걱정입니다. 돈벌이가 된다는 생각에 생태계를 인간이 원하는대로 마구잡이로 바꾸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 마구잡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실 분들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왜냐면 4대강 개발을 위해 제대로 연구하고 잘 준비해서 일을 진행하고 있지 않거든요. 미국의 예를 봐도 강을 생태적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도 100여년의 관찰을 통해 하기로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린 얼마나 생태계를 지켜보았을까요? 그래서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7은 완성의 숫자이며, 완성의 마지막은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모두 만드시고 난 뒤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 칠일째 쉬는 날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또 일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당신이 쉬신 것을 통해 우리에게 쉬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고, 온 세상도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땅도 갈다가 때가 되면 묵혀야 하고, 인간도 쉬어야 합니다. 그저 쉬지 않고 일만 열심히 하는 것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휴식을 통해 새롭게 힘을 얻고, 제 모습을 다시 갖추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전도서에는 모든 것에는 때가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7일이나 걸려 세상을 만드셨을까요? 여러분도 한 번 고민해보시고,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을 아래 댓글로 달아주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보시기에 아주 좋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by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천지창조 이야기 (2)
3. 창조 과정과 창조 사역 (1:3-31)
1) 천지 창조 이야기 구조
실제적인 창조과정을 담고 있는 이 단락은 아래와 같이 삼일을 대칭으로 제시되고 있다.
① 빛
② 물과 궁창
③ 땅과 채소
④ 광명
⑤ 어족과 조류
⑥ 짐승과 인간
⑦ 하나님의 안식
이 구조를 수직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 삼일은 주로 ‘나누다’와 ‘모으다’의 동사군을 이루어 땅의 공간적인 구조를 이루며, 나머지 삼일은 주로 ‘채우다’, ‘번성하다’, ‘생육하다’는 동사군을 이루어 빈 공간을 채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1:2에 있는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채움’을 이루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하늘과 땅은 결코 ‘공허한 곳’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주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창조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bohu)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사 45:18).
위의 구조를 수평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째 날은 넷째 날과,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대칭을 이룬다.
이리하여 ‘빛’은 ‘광명’과 이어지며, ‘물과 궁창’(둘째 날)은 ‘어족과 조류’(다섯째 날)와 ‘땅과 채소’(셋째 날)는 ‘짐승과 인간’(여섯째 날)을 위해 만들어진다.
창조의 육일 중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각 삼일의 절정으로 나타나며, 이 날 하나님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다른 날들과는 달리, 셋째 날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여 가라사대”가 두 번 나타나며, 여섯째 날에는 세 번 나타난다.
이리하여 3일과 6일은 형식에 있어서 서로 어울리며, 내용에 있어서도 3일에는 하나님께서 땅과 식물을 만드시고, 6일에는 땅 위에 사는 동물들과 인간을 만드시어 서로 어울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게 하시며, 6일에는 동물과 인간으로 먹게 하신다. 이리하여 고정된 생명의 지원 구조와 그 안에 움직이는 생물 사이에 평행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제 7일은 표준 구조에서 벗어나 있으며, 안식일 제도의 기원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창조가 끝나는 날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시작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안식과 기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엿새에 걸쳐 창조를 이루시며, 제 7일에 완성하신다. 이리하여 제 7일이 창조의 절정을 이룬다. 즉,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으로, 창조를 기억하며 창조주를 기리는 날이 된다.
2) 창조의 형식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엿새라는 ‘날’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나, 이 여섯 날을 내부적으로 묶어주는 형식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1) 창조 명령 서론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창세기 저자의 선언으로서, 모두 10회 나타난다(1:3, 6, 9, 11, 14, 20, 24, 26, 28“그들에게 이르시되”, 29).
이 열 마디의 말씀에 대해, 서인석은 “본문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7일간의 긴 시간 안에 10회의 말씀을 차례대로 발설하게 하고 있다. … 창조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후미지고도 평화로운 말씀들의 분절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위력이 있는가를 독자들은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위엄찬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이 순결한 말씀이 폭력과 무질서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2)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은 “으라”는 형식으로 8회 나타난다. 서인석은 이 명령을 군사령관의 호령으로 보나, 오히려 건축자의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물론 히브리인들의 창조 개념 속에는 전투 개념이 있으나, 건축 개념도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있으라”는 명령은 “(물들이) 모여라”(9절), “나타나라”(9절), “(움이) 돋아나라”(11절), “우글거려라”(20절), “날아라”(20절), “나오게 하라”(24절), “다스려라”(26절), “우리가 만들자”(26절)는 명령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능력이 있으며, 모든 혼돈을 질서로 바꾸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3) 창조의 완성 형식
창조의 완성 형식으로 “있었다”(1회)와 “그렇게 되었다”(6회; 7, 9, 11, 15, 24, 30절)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창조 말씀은 불가항력적이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제작 행동
하나님의 제작 행동이 묘사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셨다”(7, 16, 17, 25), “나누셨다”(4, 7절), “창조하셨다”(21, 27절), “돋아나게 하셨다”(12절).
이 행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나님은 “창공에 두 큰 광명을 만드셨다”에서 해와 달이 신적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한다.
(5) 평가 혹은 승인 형식
평가 혹은 승인 형식은 “좋았다”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고 선하다. 창조 이야기는 이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실 이 구절은 1장에서 일곱번 나타난다(4, 10, 12, 18, 21, 25, 31 [“매우 좋았다”]).
이것은 창조에 대한 승인 형식 (approval formula)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능을 갖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증거해 준다. “성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6) 명명 (命名) 형식
명명 형식은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말씀으로 나타난다(5회; 5[2회], 8, 10절 [2회]).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또한 하나님은 “축복하신다”(22, 28절).
(7) 날에 대한 언급 (6회)
날에 대한 언급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날이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6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10번이나 말씀하시고, 8번 명령하시지만 일곱 날로 분류된다. 이 반복적인 구조가 천지 창조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어 문체를 단조롭게 하지만, 창조의 초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천지 창조는 다른 사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손길을 따라 조화있게 또한 목적을 따라 만들어졌다.
천지는 단순한 인과법칙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로고스가 모든 창조 배후에 있으며,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일하신다. 창조에서와 같이 출애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
3) 창조의 날들
(1) 첫째 날: 빛과 어둠의 구별 (1:3-5)
성경에 나오는 첫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이다. 이 말씀과 함께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첫 창조 작품인 ‘빛’은 창조의 첫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첫 창조는 하루 종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 말씀을 통한 창조는 6일 노동의 패턴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 다음에, “빛이 있었다”는 실행이 뒤따른다. 이 명령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누가 이 명령을 실행하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며, 그 명령을 따라 창조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창조한 것은 빛이다. 그러나 16절이 되기까지 태양을 만든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3절의 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류는 이런 ‘빛’과 ‘광명’을 다른 실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여기의 빛을 우주 속에 있는 빛으로서, ‘모든 기본적인 힘 중 가장 미묘한 것’ 혹은 ‘신비로 가득찬 물질’(A. Dillmann), ‘가장 숭고한 요소’, ‘실재하는 것’, ‘미묘한 물질’(H. Gunkel)로 본다.
“이 빛은 제 4일에 창조된 광명체와는 구별된 것으로서, 신의 영광에 비유될 수 있다”는 김이곤의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빛을 하나의 실체로 본다면, 측량할 수 없는 우주 속에 있는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태양계 자체도 은하계 (Milky Way)라는 갤럭시에 위치해 있고, 이것은 렌즈 모양의 우주 섬을 이루고 있으며, 약 10만 광년의 거리로 추정된다. 이런 갤럭시가 우주에는 수백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빛을 보면, 너무나 모호해진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기의 ‘빛’을 태양 빛으로 본다(Sailhammer, Youngblood). 즉 1:2에 처한 땅의 상황, 즉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에 드디어 태양의 빛이 비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근거는 (1) 천지 창조 기사는 철저하게 땅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2) 일반적으로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하늘과 땅’ (1:1)에 다 포함된다. (3) 만약 우리가 1절을 창조행위로 본다면, 이미 천체는 다 만들어졌다고 보는 점들이다.
그렇다면 3절은 태양을 만든 것을 묘사하기보다 태양이 아침의 어둠을 깨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동트는 것이 위와 같이 묘사되었다(창44:3; 출10:23; 느8:3).
아마 창세기 저자가 ‘빛’과 ‘광명’을 구분했을 때, 그는 의도적으로 ‘빛’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지만, 저자는 ‘빛’의 상징성 때문에, ‘광명’과 구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6일 창조의 틀 속에서 보면, 빛의 창조가 시작에 놓여 있으며, ‘빛의 창조’를 통해 다음 창조가 가능해진다. 빛은 땅의 시간 구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구별될 때, 시간의 구별이 생긴다. 빛은 시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지 공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셔서, 시간과 질서의 기본 싸이클을 만드셨다.
이 빛의 상징성 때문에,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빛이 태초의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첫 축복의 여명을 알리신 것처럼, 새 구원의 시대를 빛이 어둠을 부수는 것으로 묘사한다(사 8:22-9:2; 마 4:13-17; 요 1:5, 8-9).
사도 바울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빛이 어둠을 깨고 비치는 것으로 묘사한다(고후 4:6; 요일 1:5; 계 21:23 참조).
(2) 둘째 날: 창공과 바다의 구별 (1:6-8)
개역 성경에서 ‘궁창’으로 번역한 단어는 라틴어(firmamentum,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에서 나온 것으로, 마치 하늘에 단단한 물체가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8절에서는 ‘하늘’ (sky, ‘창공’; 표준번역)로 번역된다. 또한 14절에서 “궁창에는 광명이 있으며, 이곳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그려지므로(20절), ‘창공’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7장에서는 ‘창공의 문들’이 열려 비가 쏟아진다(7:11-12; 시104:3).
잠언 8:28에서는 창세기 1장의 궁창이 명백하게 ‘구름’을 가리킨다(‘구름 하늘’ [개역], ‘구름 떠도는 궁창’ [표준역]).
창세기 1:6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공을 있게 하지만, 7절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말씀으로,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이루어 진 것 같다. 창조 기사에서 말씀과 행동은 자주 이렇게 나타나, 마치 중복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11, 12절; 14, 16절; 24, 25절).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다”라는 표현은 저자의 관점을 보여주며 (창2:4; 시104:27-30 참조), 이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강조해 준다.
(3) 셋째 날: 뭍과 물의 구별 (1:9-13)
셋째 날에 하나님은 마른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마른 땅에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게 하신다. 물과 뭍을 둘 다 ‘좋다’고 말함으로써, 이것들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지어졌음을 말해 준다.
물을 나누는 행동은 홍수 기사(창 6-9)와 홍해를 나누는 기사(출 14-15장)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기 위해, 물을 제거해야 했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물을 길들인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홍수 기사에서는 큰 물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
(4)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로 채우심 (1:14-19)
우리가 넷째 날에 대해서 늘 난처한 질문을 받게 된다. “정말 본문은 넷째 날에 해, 달, 별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 전에 3일은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셋째 날에 만들어진 초목과 채소는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넷째 날의 중심 관심이 해, 달, 별들의 창조에 있기 보다, 그 삼중적 기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① 먼저 창세기 1:1의 ‘천지’는 우주로서 해, 달, 별들을 포함한다.
② 6절에서 ‘궁창이 있으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이전에 없었던 궁창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14절을 보면, 구문 구조가 다르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금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즉, 빛은 이미 궁창에 존재했는데, 이제 날과 밤을 나누며, 사시와 날과 해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명령을 통해, 봄이 오면 새싹이, 여름이 오면 이슬이, 늦가을이 오면 서리가 내린다.
③ 15절과 16절의 구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15절에서 저자는 “그대로 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저자의 보고를 마무리하며, 16절에 있는 그의 평을 시작해 준다.
즉, 16절은 해, 달, 별을 넷째 날에 만들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이미 말한 것의 뜻을 설명해 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광명을 만들어 공중에 두셨다.”
창세기 1장에 선포되고 있는 6일 간의 천지 창조는 철저하게 ‘땅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으므로,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이 땅에서의 생활에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여기에서 저자는 해와 달과 별들을 ‘광명’으로 부른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틸리케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매우 부드럽게 어조를 낮추어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개의 램프를 궁창에 달아 놓으셨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보면, 당대의 사람들은 “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점성술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항성의 움직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생사화복과 직결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의 기자는 “별은 우리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그들은 우리의 ‘등불’일 뿐”임을 역설한다.
저자는 하나님만이 하늘의 광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가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햇빛이 땅에 비취게하여, 초목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
(5) 다섯째 날: 바다와 창공을 채우심 (1:20-23)
생물 창조는 다섯 째 날과 여섯 째 날, 두 날에 걸쳐 이루어진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바다와 공중의 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1:24-28)에 땅 짐승을 만드시며, 남녀를 만드신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활동을 묘사할 때에는 ‘창조하다’(바라)를 의도적으로 쓴다(1:1의 우주와, 1:21의 큰 물고기와, 1:26의 인간).
다섯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 기사에서 처음으로 ‘축복’ 개념이 나타난다(1:22; 2:3; 5:2).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인간도 축복을 받으나, 통치력까지 받는다. 여기에서 ‘축복’은 생명을 주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2절).
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은 동물들(1:22), 인간(1:28), 안식일(2:3), 아담(5:2), 노아(9:1), 족장들(12:3; 17:16, 20)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의 선물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과 연관된 모든 것에 임한다. 축복의 기본 개념은 생명이 번성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번성으로 가족과 나라에 축복이 임한다(신28:1-14). 현대인은 성공을 찾지만, 구약은 축복을 찾는다.
(6) 여섯째 날: 동물과 인간으로 채우심 (1:24-31)
여기에는 크게 두 종류의 창조가 나온다. 즉 땅에 거하는 ‘생물’과 ‘인간’이다. 땅의 생물은 다시 셋으로 나누어져, ‘집짐승’(육축), ‘땅에 기는 짐승’과 ‘들짐승’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다. 그들의 형태와 구조와 성격을 주님께서 다 만드시고, 그 다양성으로 천지를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인장과 제비꽃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아련한 영상이 배여 있다. 즉, 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필’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며 (24절), 그리고 평가가 뒤따른다 (“그렇게 되니라”, 25절). 25절은 24절에 아주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있다. 11절에서는 “땅이 채소를 내도록 한다”. 그러나 25절(하나님이 들짐승을 만드셨다)은 하나님이 생물을 만드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식물과 동물을 만드는데, 명령은 같지만, 이 두 형태의 생명은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식물은 땅에서 나오며, 생물을 하나님 자신이 만드셨다.
창조 기사에서 인간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룬다. 모든 드라마나 오페라에 있어서 절정에 도달하면, 숨을 죽이며 듣는다. 결혼식에서도 서약을 할 때, 숨을 죽인다.
하나님은 이제 그동안 창조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만드려고 하신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만들어 보려고 하신다. 이 인간이란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도 해보셨을까?
이들이 정말 나의 창조의 절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흉물이 될 것인지? 이들이 진정 나를 닮은 자가 될 것인지, 혹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할 것인지, 이들 가운데 마리아 데레사 같은 성인이 나올 것인지, 혹은 히틀러 같은 인간이 나올 것인지 하나님은 생각해 보셨을까?
앞에서 주님은 인간의 거처인 땅 (9-13절)을 준비하였고, 그 생명의 순환을 결정하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14-19절). 이제 인간 창조로 넘어가면서, 인간 존재의 의의를 말하고 있다. 인간 창조는 앞에 있는 다른 창조와 다르게 독특하다. 저자는 미묘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
① 먼저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전형적인 형식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3인칭 명령 “있으라” (let there be)가 아니라, 보다 인격적인 1인칭 명령인 “우리가 만들자”로 시작한다.
② 앞에서는 “그 종류대로” 생물을 만들지만,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모양 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를 닮았다. 오경 저자는 인간을 소개할 때, 동물과 다르다는 점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배제해 준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육체는 경멸하고 영혼을 높이도록 애쓰라”고 말하지 않는다.
③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다. 다른 생물에서 성구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부각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원래 사람은 남녀가 서로 잘 어울려 살도록 지어졌다.
④ 인간 창조의 목적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직 인간 만이 하나님의 창조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생물을 다 다스린다. 공중과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이다. 주님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드신다. 이것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착취나 위협이나 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돌보고 가꾸는 데 있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을 모든 피조물의 먹이 사슬 중에서 최고로 높은 층에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도 아니며, 삼라만상의 귀족으로 세우셨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가장 고등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메시야 왕처럼 돌보고 다스리도록 지음받았다.
⑤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모티프가 중요하다. 창세기와 오경에서 “복”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생물들은 이미 다섯째 날에 복을 받았다 (1:22).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생물에게까지 다 확대된다.
그러나 인간이 받은 복은 특히 후손의 복이며, 후손을 통해 문화적 사명을 이루도록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과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문화란 결국 생명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⑥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 형식 (4, 10, 12, 18, 21, 25절)이 여기에서 세가지로 수식되어 최종 작품의 완전성을 강조해 준다.
먼저 “모든 것”이다. “좋았다”는 온 창조에 적용되고 있다. 개체 뿐 아니라 전부가 좋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앞에서처럼 “이는” 대신에, 여기에서는 “참으로”가 나온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셨을 때, 흥분했음을 말해준다.
셋째로, “심히 좋았다”는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⑦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의 형식은 독특하다. 앞에서는 “한 날” (day, Xth) 형식으로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정관사가 나와, “제 여섯째 날” (day, the sixth)로 부른다. 이 형식은 인간을 만든 날과, 안식일을 묘사할 때만 나타난다. 안식일은 “제 이레” (day, the seventh)로 불린다 (2:3).
4. 창조의 완성: 결론적인 요약적 진술 (2:1-3)
제 7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앞의 육일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세절은 아주 아름답게 배열되어, 창조기사를 끝맺어 준다.
2:1에서는 “하늘과 땅”을, 2: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다”를 언급함으로써, 1:1과 교차 대귀적으로 연결된다.
1) 창조의 완성 (2:1)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에서 “만물”은 보통 하늘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하늘의 만상”을 뜻한다.
시편 찬양에서는 땅도 포함되어,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물”이란 표현이 나온다. 별 (신4:19; 사40:26)과 아주 드물게 천사들 (왕상22:19)이 하늘의 만물로 언급된다.
아마 여기에서는 천사가 제외되었을 것이다. “땅의 만물”은 그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절은 1장의 요약적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아직도 마치지 않은 일을 끝내었다는 뜻은 아니다”.
2) 제 이레와 하나님의 안식 (2:2-3)
저자는 제 7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있다. 이 날에 대한 설명 문체도 독특하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다른 날처럼 말씀하시거나 일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을 축복하시는 것이 독특하다. 성경에서 축복은 주로 생물에게 제한된다. 즉 인간, 동물 등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을 축복하실 때, 그것은 생육과 번성과 성공을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적 활동을 마치신 날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거룩하게 하시다”도 이례적이다. 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 날 속에 “거룩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선포적인 의미를 가지며 (declarative), 이 날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왜 “거룩하다”고 선포하는가? 왜냐하면, 이 날은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과 연관된 장소와 사람과 물건들이 거룩한 것으로 선포된다.
안식일 외에, 축제일이 거룩하다고 불린다 ( 느8:9, 11에서만). 구약에서 거룩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안식일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마치다” (kalah)는 “완성하다”는 의미이다.
“안식하였다” (shabat)의 일차적인 뜻은 “중단하다” (cease)이다. “휴식하다”는 동사는 따로 있다 (nuah). 여기에서는 “휴식” 보다는 “중단”이 더 강조된다 (출31:17 참조).
엿새 동안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셨고, 제 7일에는 중단하셨다. 이 노동의 중단은 안식 개념에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쉬지 못한다. 창세기 저자는 노동의 중단을 통한 하나님의 안식을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표현은 세 번 나와서 안식을 강조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제 7일에는 쉬어야 한다 (출 20:8-11). 지주나 사장 만이 쉬는 것이 아니다.
이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출 20:10; 신5:14).
제 7일의 하나님 “안식”은 신학적 표상으로 미래에 중요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안식” 주제는 앞에 있을 것에 대해 미리 예시해 준다 (2:15; 5:29; 8:4; 19:16; 출 20:11; 신 5:14; 12:10; 25:19).
후대 성경 저자들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과 경건한 자를 위해 기다리는 미래의 “안식”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말해 준다 (시 95:11; 히 3:11).
5. 천지 창조에 대한 신학적 명상
1) 천지 창조는 스스로 계시며 천지를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은 고대의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지 개벽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그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겐 태양도 달도 별도 나무도 곰도 뱀도 다 신이었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종교가 신성화 시킨 모든 것을 비신화화 시키며,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구약의 신관은 물활론이나, 정령 숭배나 다신론이나 일신교 등을 통해 진화해 간 것이 아니다. 구약 신앙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과 창조로 계시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암울한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던 어느 제사장의 신학적 사색이 아니다.
“누가 창조를 지켜보았는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창조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있으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도 없고, 천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마치 목격자의 증인이 말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위협적이다. 이것은 “내세를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죽은 자를 보내면 믿을 것이다”라고 부자가 말하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창조의 말씀과 내세에 대한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계시이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믿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천지 창조의 구조를 유심히 볼 때,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 (롬 1:20)이다.
또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탄성을 지른다 (시 19:1).
창세기 1장은 단지 유일하신 하나님 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지으시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신다.
천지 창조는 “말씀”과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창세기 1장 속에 삼위일체의 씨앗이 나타나고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2) 천지 창조는 창조 질서를 증거한다.
가끔 우리는 “왜 교회당 꼭대기에 피뢰침을 달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신성 모독은 아닐지라도, 약간 방정스러워 보인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주께서 교회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피뢰침을 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하실까 두려워 피뢰침을 다는가?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관계 문제가 단지 피뢰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우리가 병이 들 때, 자연 질서를 따라 약을 먹고 쉴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가? 많은 신자들 중에 병이 들면, 기도와 안수를 받고 금식으로 낫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좋을수록 의사를 기피하고 약도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손톱으로 병든 환부를 파내는 소위 “성령 수술”을 한다고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멋있는 순환 논법을 사용한다.
“나는 고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할 때에는 나의 능력이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고침받지 못한 것은 당신의 불신앙 때문이다.”
좀 더 과격한 사람들은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린다. 감기까지도 귀신의 역사로 보므로, 귀신을 내어쫓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질병을 영계의 역사로 본다. 이 세상에는 성령과 악령 뿐이며,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악령의 것으로 본다. 이들은 창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카톨릭 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이상적이고 신비로운 품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적인 생활이 해롭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적인 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장애가 된다. 가장 선하고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은 빈곤, 순종, 청빈과 성결의 네가지 덕행이다.
따라서 보다 경건한 삶과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수도원적인 삶을 추구하며, 인간의 자연성을 구성하는 식욕과 성욕과 혈연을 부인해야 한다.
카톨릭 신학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초자연의 우월성 때문에 자연에 대한 억압이 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이야 말로 본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삶이야 말로, 자연적인 생활을 넘어 높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것을 위해 자연적인 삶을 가능한 많이 부인해야 한다. 수도승은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신자이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기본 질서가 원래 창조 질서였음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여러 교회에서는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하게된다.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받은 수험생과 그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적과 상관 없이 운수 대통하여 내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고, 모르는 것도 잘 찍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비성경적인 기도회가 될 것이다. 사업에도 우리는 가끔 “별미 축복”을 운운하며, 야곱이 이삭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려 축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목회자를 대접하여 복받으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신앙을 주술로 바꾸는 것이다.
신명기 22:8에는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세우라”고 명한다. 난간의 유무에 따라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에 대한 책임 문제가 가려진다.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실수로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건축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말한다. 예수 믿고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런 구절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창조 질서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다.
주님은 창조 질서의 아버지이다. 창조 질서도 하나님의 질서이다. 우리는 이 질서를 더욱 사랑하고, 이 질서 속에서 참된 지혜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 (잠 3:19-26; 8:22-31; 14:31; 20:12; 욥 38장 이하).
3) 천지 창조는 구원 질서를 증거한다.
첫 창조가 완전한 창조였다면,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과 창조 사이에 있는 내재적인 통일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구속주와 창조주”이시다 (사 44:24). 우리의 구원은 창조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가 아니며, 창조의 질서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1) 창조는 구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깊음을 가르고, 어둠에 빛을 비추어 질서를 세운 창조는 구원의 파라다임이 된다 (시 74:12-17). 하나님께서 물을 정복하신 사건은 역사에서 그의 구원을 보증해 준다 (사 42:5; 43:1; 49:5; 시 22:9; 139:13-16).
(2) 창조는 출애굽 구원의 모델이 된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고 육지를 내사 자기 백성들로 통과하게 하시며,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다 (사 51:9-11).
(3) 교회의 구원은 새로운 창조이다(고후 4:6; 5:17).
창조주 그리스도께서 (요 1:1; 골 1) 옛 것보다 더 나은 새 창조를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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