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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10일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창세기 22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때론 내가 방해물이 된다 해도
때론 내 유치한 믿음이 가로막고
때론 내 불신이 고개를 내저어도
오늘도 살아 말씀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 하신 말씀을 온전히 이루십니다
그래서 나는
내 믿음을 넘어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 수준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평안을 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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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22장 강해 –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 Daum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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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예히 아하르 하데바림 하엘레 웨하엘로힘 닛사 엩 아브라함 와요멜 엘라우 아브라함 와요멜 힌네니 개역개정,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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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창세기 22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후자의 경우로 그를 믿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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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창세기 22 장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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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5. 12. 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XH46xe5-SA
창세기 제22장 강해
창세기 제22장 강해 –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한 시험(test)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통과하여 미리 예비해 두신 수양으로 번제를 드리고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하였습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일’이란 ‘그 말들’이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으로 오기까지의 모든 여정과 가나안과 애굽과 그랄에서의 모든 일들 또한 이삭에 대한 약속 등입니다. 이제 이전의 모든 일들을 일단락 짓고 이제 새로운 사건을 전개하는 전환점을 알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험(test)하기 위함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Test가 아닌 Temptation(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성도를 정금과 같이 연단하시기 위함이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영관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벧전 1:7).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깨어있는 영혼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부르심은 그를 통하여 일을 성취하시고자 함입니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면서도 그 앞에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과 하갈과 사라의 갈등을 통하여 100세에 낳은 아이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시험의 강도를 더욱 높이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사를 주신다는 언약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아이를 모리아 땅에 있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 명령은 이삭을 실제로 짐승과 같이 제물로 잡아서 드리라는 뜻입니다. 이 명령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심정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정말 찢겨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추측컨대 아브라함은 긴 밤을 고통과 번민 속에서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요, 그 말씀을 순종할 때에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여행 준비를 하고 번제에 사용할 땔감까지도 준비하였습니다.
4: 제 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당시에 3일 길(약 70km)이었습니다. 막상 이삭을 번제로 드릴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지만 3일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을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날부터 모리아 산까지 오는 기간이 4일 간이 걸렸다는 것을 해석할 때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기 전 미리 4일 전부터 다른 양들과 구별하여 놓고 혹시 흠이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지게 되는 것은 유월절 희생양이 4일 동안 정결 상태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출 12:1-6).
5: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동행한 두 사환에게 말하기를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면서 남아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뜻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를 드린 후에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으로는 사리에 맞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였으므로, 돌아오는 것은 아브라함 혼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17-19에서는 아브라함의 행위에 대하여 ‘믿음’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은 알지 못하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릴지라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시 함께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은 3일 동안 걸어서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 왔습니다. 이는 이삭이 3일 동안 걸어도 괜찮고, 번제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 수 있는 건장한 모습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행하는 모습은, 아버지는 마음에 큰 고통을 안고 침묵으로 걸어가고, 이런 모습을 본 이삭도 역시 궁금하지만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산에 오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부자지간의 정다운 대화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번제할 어린 양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이삭이 번제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미 하나님께 경배하는 방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즉 경배에 따른 번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형적 경배와 함께 번제 즉 온전한 믿음의 자세가 갖추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번제에 대한 질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제물이 될 이삭 대신에 다른 제물을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삭이 궁금해 하는 제물에 대한 준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행해질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기는 자세입니다.
9,10: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하나님께서는 지시하신 곳은 모리아 산의 어느 한 지점으로 후일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일단 단을 쌓았습니다. 단은 주위에 흩어져 있는 돌을 모아서 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나무를 벌여 놓았습니다. 제물이 완전히 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내밀어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할 때에도 반항을 하지 않았으며, 칼로 잡으려고 할 때에도 울부짖음이 없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100이 되어 낳은 자식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물로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모습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십자가까지도 질 수 있는 주님의 모습에 대한 예표로 온전한 순종의 자세입니다.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여기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확인한 즉시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하게 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정말로 짐을 잡듯이 잡을 것이며, 이삭의 죽음은 곧 여호와의 언약의 파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급하게 서두르시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이, 가장 원하시는 믿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잡으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헌신을 참으로 기쁘시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으로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에 통과했다는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사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자신 즉 예수님께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존귀와 위엄 속에 택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까지 포함한 두려움의 존재로 인식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에 제물로 들릴 다른 대속물을 찾았습니다. 뒤에 수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잡아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 대속물은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이레(יהוה יראה)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물뿐만 아니라 후일에 이곳에 세워질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모형이 여기에서 준비되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을 것이며, 성전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5,16: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의 사자가 다시 아브라함을 부른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보답의 차원입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는 천지만물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맹세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맹세는 결코 변함이 없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이 순종으로 바치려고 한 이삭을 통하여 주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번성케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문은 성읍을 드나드는 출입구이므로, 문을 얻는 것은 원수의 성을 차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는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실 것이라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네 씨’는 이삭이나 그의 후손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포함하여,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으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임을 뜻합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말을 준행’ 즉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오를 때에 사환에게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이삭과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브엘세바로 다시 돌아가서 계속 거주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20: 이 일 후에 혹이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이삭의 번제 사건 이후에 어떤 사람, 아마도 아브라함의 고향 사람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여행 중에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아내 밀가가 자녀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일 후에’라는 말이 내용을 전환하는 말이므로, 번제 사건은 일단락 짓고 이삭과 관련된 다른 일이 전개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1-24: 그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동생은 부스와 아람의 아비 그무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움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나홀과 밀가로부터 태어난 자녀들의 명단입니다. 이 중에 ‘브두엘’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뜻은 ‘하나님게 속한 자’입니다. 매우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브두엘의 딸이 ‘리브가’로 이삭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22장 히브리어 주석강해]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창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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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2장 히브리어 주석 강해 중에서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삭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속사 관점으로 볼 때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바쳐진 주님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로 마음을 먹고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시고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세상의 재물보다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 시간 주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리아 산의 이삭 번제(창 22:1-14)
히브리어 원문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22절은 바예히 아하르 하데바림 하엘레 베하엘로힘 니사 에트 아브라함 바요메르 엘라이브 아브라함 바요메르 힌네니입니다.
창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2:1절
그 일 후에 – 여기서 ‘일'(다바르)이란 문자적으로 ‘말'(言語)을 의미한다(11:1). 따라서 지금까지 주어진 축복 혹은 언약의 통괄 지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롯 3:18)이란 뜻도 지니므로 ‘그 일 후에’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 전개에 대한 머리말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앞의 사건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문장 연결어로도 볼 수 있다. 이때는 이삭이 번제용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이다(6절).
시험하시려고 – 성경에 나타난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단에게서 기원한 시험으로(엡 2:2), 인간을 타락케 하는 유혹(temptation)이다(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證驗) 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후자의 경우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인 생각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그를 부르시되 – 일전에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였던 것과 동일한 방식의 계시이다.
아브라함아 하시니 – 명령을 계시하시기 위한 부르심인데 단 한 마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시 상황의 긴박성과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무슨 일이든지 이르는 대로 청종하겠다는 결의에 찬 응답이다(사 6:8). 이는 성도가 항상 준비해 두어야만 하는 대답인데 언제 어느 곳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신의 영적 현주소는 ‘하나님 앞'(coram Deo)이란 사실을 잊지 않을 때만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2절은 바요메르 카흐 나 에트 빈카 에트 예히드카 아쎄르 아하브타 에트 이츠하크 베레크 레카 엘 에레츠 하모리야 베하알레후 솸 레올라 알 아하드 헤하림 아쎄르 오마르 엘레이카입니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22: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 3중으로 강조된 점층법적 표현이다.즉 (1)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사람 (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 (3) 이스마엘이 떠난 후 자신에게 넘은 유일한 혈통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을 최고도로 불러일으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 하에서도 자신의 명령에 순종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의 의미가 담겨있다.
모리아 땅 – 당시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21:32-34)에서 사흘 길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이다. 한편 ‘모리아'(모리야)는 ‘마르에’와 ‘예호와’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이란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을 지정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곳뿐 아니라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장소(대하 3:1)로 이미 택정 해 놓으셨던 것이다.
번제로 드리라 – 인신 제물(人身祭物)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나 신앙으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제(難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 이는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던 하나님의 속성(9:4-6)과 상치되며 (2) 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한 약속의 씨 이삭을 다시 거두어 가려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17:5, 6)과는 일견 모순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3절은 바야쉐켐 아브라함 바보케르 바야하보쉬 에트 하모로 바이카흐 에트 쉐네 네아라이브 이토 베에트 이츠하크 베노 바예바카 아체 올라 바야콤 바옐레크 엘 하마콤 아쎄르 아마르 로 하엘로힘입니다.
창 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으로 가더니
==================================22:3절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서두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순종했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는 밤잠을 못 이루면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순종밖에 없고 하나님은 어떠한 식으로든 약속한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실 줄 믿었기에(롬 4:21) 그는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였을 것이다(막 14:36).
번제에 쓸 나무 – 번제(Burnt Sacrifice)는 짐승을 제물로 잡아 죽인 후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火祭)이다. 따라서 불을 피우는 데 사용될 나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팔레스틴의 구릉 지대엔 대부분 나무들이 없었기에 번제용 나무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한편 아브라함의 집에는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각종 짐승과 다른 종들도 있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불에 태워 바치라고 요구하셨으니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벧전 4:12)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 모리아 산까지의 삼일 길, 즉 약 80Km 여정(旅程)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 주는 헌신과 순종의 길이자 지성소를 향한 속죄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번제로 드려졌듯이(13절) 훗날 이곳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에서도 역시 인간을 대신한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이다(대하 5:6).
4절은 바욤 하쉘리쉬 바이사 아브라함 에트 에나이브 바야르 에트 하마콤 메라호크입니다.
창 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22:4절
제 삼일에 – 지시받은 날(1절)로부터는 나흘째이다. 상징적이긴 하나 이것은 유월절 나흘 전에 미리 양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출 12:3,6)과 일치한다.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지정한 곳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때 하나님은 햇빛에 영롱히 반사되는 구름 덩어리를 그곳 모리아 산에 머물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이 쉽게 제단 쌓을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5절은 바요메르 아브라함 엘 네아라이브 쉐부 라켐 포 임 하하모르 바아니 베하나아르 넬카 아드 코 베니쉐타하베 베나쓔바 알레이켐입니다.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22:5절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원어 성경에 의하면 이 문장의 주어는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이다. 이는 종들을 따돌리기 위한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에서 독자 이삭의 기적적 탄생을 체험한 아브라함(롬 4:18-22)은 비록 지금 이삭이 죽임 당하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날 줄을 믿었다(히 11:17-19)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라갔다가 함께 내려오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미 올라가기 전에 아브라함은 이삭이 살아날 것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다.
6절은 바이카흐 아브라함 에트 아체 하올라 바야셈 알 이츠하크 베노 바이카흐 베야도 에트 하에쉬 베에트 하마아켈레트 바옐르쿠 쉐네헴 야헤다브입니다.
창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22:6절
이삭에게 지우고 –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 지우신 대속(代贖) 사역(사 53:4-6;요 19:17)을 연상시켜 주는 장면으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고 가는 아브라함의 내적 고통은 그를 침묵케 하였을 것이고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표정은 이삭에게 긴장감과 당혹감, 참된 여행 목적에 대한 궁금증 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7절은 바요메르 이츠하크 엘 아브라함 아비브 바요메르 아비 바요메르 힌네니 베니 바요메르 힌네 하에쉬 베하에침 베아예 하세 레올라입니다.
창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22:7절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 어색한 긴장감과 침묵을 깨는 대화로 부자(父子) 간의 끈끈한 정이 넘치는 존경과 애정의 부름과 응답이다.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 이는 (1)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가 이미 모세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며 (2) 아브라함의 경건 생활과 제사 행위를 통해 이삭이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필요한 제물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이 질문은 이러한 사실적 의미 외에도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곧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안타깝게 부르짖는 공동의 물음이란 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는 어린양을 죽이고서도 그 ‘어린양’이 어디에 있는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사 1:11-14). 그러나 성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29).
8절은 바요메르 아브라함 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 레올라 베니 바옐르쿠 쉐네헴 야하드브입니다.
창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22:8절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 라아의 동사를 사용했다. 보다라는 뜻이다. 미완료 시제를 사용함으로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준비하실 것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이삭의 질문에 대한 거짓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전에 이삭을 대신할 다른 제물을 준비해 놓으시겠다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선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확신에 찬 대답일 뿐이다(히 11:17-19).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전의 몇몇 경솔했던 처신(12:10-20; 6:1, 2;20:1-18)을 교훈 삼아 아브라함이 보다 현명하고 성숙된 신앙인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 준다.
9절은 바야보우 엘 하마콤 아쎄르 아마르 로 하엘로힘 바이벤 솸 아브라함 에트 하미즈베아흐 바야아로크 에트 하에침 바야아코드 에트 이츠하크 베노 바야셈 오토 알 하미즈베아흐 미마알 라에침입니다.
창 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22:9절
이삭을 결박하여 –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혈기 왕성한 이삭은 하려고만 하였다면 노쇠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는데 아마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작정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순종(빌 2:8)과 속죄 사역(사 53:5)을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순종함으로 화목 제물이 되었다.
10절은 바이쉘라흐 아브라함 에트 야도 바이카흐 에트 하마아켈레트 리쉐호트 에트 베노입니다.
창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22:10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바위는 현재는 회교사원이다>
칼을 잡고 –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순종의 마지막 행위이다. 따라서 이제 이삭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이삭을 죽이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은 입증되었으며 제사의 정신도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신 까닭(12절)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비록 이삭은 죽지 않았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페러독스(paradox)이다(마 10:39; 16:25; 12:15). 한편 여기서도 이삭의 순종은 간과되어선 안 되는데 아브라함의 칼 앞에서 잠잠했던 이삭의 모습은 병정들의 창칼 앞에서 잠잠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해 준다(마 26:47-56).
11절은 바이크라 엘라이브 말아크 아도나이 민 하솨마임 바요메르 아브라함 아브라함 바요메르 힌네니입니다.
창 22: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22:11절
여호와의 사자 – 일전에 하갈에게 현현하셨던 분(16:7)과 동일한 성육신(成肉身)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다급한 반복은 사태의 긴박성과 함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이삭은 결코 죽임 당해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은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통해서만 진정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17:5).
12절은 바요메르 알 티쉘라흐 야드카 엘 하나아르 베알 타아스 로 메움마 키 아타 야다에티 키 예레 엘로힘 아타 베로 하사케타 에트 빈카 에트 예히드카 미메니입니다.
창 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22: 12절
네 손을 대지 말라 –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셨다는 의미로 이제 그에 대한 시험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는 믿음만이 가득 차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시험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 하샤크라는 동사로서 억제하다라는 의미다. 칼 완료 시제를 사용하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신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다는 의미다.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음은 그가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이심을 뒷받침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 자신이 근본 하나님이면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이처럼 하나님을 객관화시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같이 구별된 위격(位格)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아노라(야다티) – 이는 체험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수용한 지식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삭 헌납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함을 확인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속마음을 아셨다는 의미다. 칼 능동태 완료 시제를 사용하였다.
13절은 바이사 아브라함 에트 에나이브 바야르 베힌네 아일 아하르 네에하즈 바세바크 베카르나이브 바옐레크 아브라함 바이카흐 에트 하아일 바야알레후 레올라 타하트 베노입니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22:13절
수양(아일)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는 문장(엘로힘 이르에 로)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와 우연히 일치하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물증(物證)이다.
수풀(사바크) – 팔레스틴에 흔히 있는 잡목들의 가지가 어지럽게 뒤엉킨 상태를 두고 한말이다(시 74:5). 숫양이 수풀에 걸렸는데 아하즈라는 동사를 사용했다. 닢알 수동태를 사용하여 이 숫양은 수풀에 걸릴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스스로 걸린 것이 아니라 걸린 것이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들을 대신하여 –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한 수양뿐 아니라 역사 이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죽어간 흠 없는 짐승들(출 12:5;29:1 레 1:3; 민 6:14)은 오로지 흠 없는 한 어린양의 영원한 제사, 즉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계시한다(히 9:11-14; 13:11, 12).
14절은 바이크라 아브라함 솀 하마콤 하후 아도나이 이르에 아쎄르 예아메르 하욤 베하르 아도나이 예라에입니다.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22:14절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으로 8절에 의거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마 6:25-32) 임을 찬양한 기념비적 이름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던 바로 그때 하나님이 마련해 둔 수양을 보게 되는 축복을 얻었듯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두신 구원 계획에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비로소 온전히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요 1: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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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강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
창세기 22장 강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
노승수 목사
드디어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대목에 도착했습니다. 11:27에서 시작된 데라 톨레도트, 아브라함 이야기의 끝입니다. 12장에 부르심과 약속을 받아 가나안 땅에 당도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누이라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씨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많은 재물을 이끌고 나옵니다. 이는 출애굽이 씨의 위기, 재물을 이끌고 나옴. 나온 후에 분쟁의 이야기로 이뤄진 것처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이런 전형으로 애굽 사건이 기록됩니다. 13장에서 가나안에 나오자마자 조카 롯과 분쟁을 재산으로 인해 분쟁을 겪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후사로 생각하면서 그에게 양보를 합니다. 롯은 애굽에서 생명의 위기와 그에 따른 트라우마가 컸던 거 같고 예민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있는 소돔 들을 택하고 악한 백성들이 거하는 소돔에 들어가 거주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소돔 땅에 9개 임금들이 전쟁을 벌이고 이 전쟁의 포로가 된 롯을 아브람이 318명의 집에서 기른 사람을 데리고 구출에 나섭니다. 13장의 양보가 언약에 대한 불성실이라 해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14장에서 롯을 구출하기 위한 아브람의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롯의 선택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십니다(13:14-15). 애굽 왕과의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누이라 말하면서 화평을 구하였으나 씨가 없는 중에 가장 근족이며 자신의 후계자인 롯이 사로잡히자 놀라운 용기를 발휘하여 그를 구출합니다. 그를 구출하여 나오다가 멜기세덱을 만나는데 멜기세덱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이 멜기세덱의 계시는 아브람과 다윗에게 같이 주어지며 특히 다윗에게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계시로 분명하게 설명됩니다(시 110 참조). 아브람은 씨에 관한 어떤 계시를 멜기세덱을 만나며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15장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려워말라고 하시며 나타난 것입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애초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현현 앞에 아브람의 질문은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는 약속을 듣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6-18에서 이 씨가 단수인 것을 들어서 그리스도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브람은 이 계시를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습니다(15:6). 16장에서는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출생하는데 16장의 목적은 혈통을 따라 나는 것이 아브람의 자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할례언약이 주어지면서 15장에 일방언약과 달리 쌍무적 성격의 언약이 맺어집니다. 그리고 이 할례언약은 바로 중생에 관한 표로 구약에서 계속 설명됩니다(신 10:16, 30:6, 렘 4:4, 9:26, 겔 44:7-9, 행 7:51, 롬 2:29 등). 중생자에게 율법의 제3용도를 따라 거룩한 의무가 주어지는 것에 대한 가장 단편적인 설명도 이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할례언약 후에 후사가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으로 나게 될 이삭을 통해서 주어지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17:21).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항상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주어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출애굽 모티프에서 홍해는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사건이나 바로에게는 홍해에서 수몰되는 심판의 사건이며 노아 홍수는 노아의 가족에게는 세례의 사건이나 그외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물이었던 것처럼 씨의 언약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이어서 18장에서 소돔땅에 대한 심판을 그립니다. 17장이 구원의 사건이라면 18장은 심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중보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예표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오래참으심과 인자하심과 세밀하게 살피심 중에 일어나는 일인지를 롯을 향한 중보를 통해서 드러내보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19장에서는 롯을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구출하십니다. 그러나 롯의 열매는 그리 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14장의 사건을 겪고도 그 성에 거했으며 13:13에서 설명하듯이 그 땅의 거임은 악인들이었습니다. 롯은 의로웠으나 그의 심령은 상하고 피폐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그에게 더하셨습니다(19:16). 그럼에도 그의 아내는 소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성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기보다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소알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도 그에게 들어주십니다. 소알에 이르러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결국 다시 산으로 갑니다. 산에서는 그의 두 딸은 근친상간을 통해서 후손을 얻습니다. 그게 모압과 암몬이며 이 민족은 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할 때, 길을 내어주지 않음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롯의 열매로 보면, 롯은 구원과 거리가 멉니다.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의로웠으나 믿음이 없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악인들과 동거하기를 선택하고 많은 경고에서 아브라함의 그늘에 피하기보다 악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가정이 파탄이 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도 자비로우며 선하시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20장에서 아비멜렉 사건을 통해서 씨의 위기를 다시 겪습니다. 첫 번째 위기(12장)는 부르심 중에 위기라면 두 번째 위기(20장)는 중생 후의 위기입니다(15:6_칭의, 17장_성화). 그리고 이삭이 출생합니다. 지난주에 살핀 대로 이삭은 성령을 따라 났고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것이 우의라 할 수 있습니다. 생리가 끊어진 여인에게서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 되는 약속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되는 약속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사건 후에 아비멜렉이 와서 화친을 청합니다. 그리고 브엘세바의 언약이 맺어집니다. 쉐브아는 지난주 말씀드린 대로 일곱을 세바는 우물을 의미하며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구분한 것은 이 우물이 7개였음을 암시합니다. 신약에서 우물과 거기 생수는 특히, 요한복음에서 성령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씨인 이삭을 얻고 나서 화친의 약속과 함께 우물을 되찾는 것은 단지 사건의 무작위적 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표를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점을 지난주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22장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가 이렇게 아브라함의 전생애를 길게 다시 요약해 말씀드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22:1). 그 시험의 내용은 모리아 산으로 가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리아 산은 후에 다윗이 계시를 받은 타작마당(심판)이며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산입니다(대하 3:1). 하나님은 아브람을 12장에서 부르셨고 17장에서 완전하라하셨습니다. 그리고 22장에 들어서 그를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그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22:12). 그리고 그 경외함은 독자라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의 교육이나 유학, 결혼을 위해서 여러분의 제물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그와 같은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서 하나되는 자리에 대한 시험입니다(엡 4:13). 여러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이런 요구를 하나님께 받았다면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자리에 섰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시험 밖에 주시지 않으시며 당할 즈음 힘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고전 10:13). 어떤 사람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상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간에 하나님을 경험하여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의 결과이죠. 이에 반대의 증례가 롯입니다.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살았으나 롯은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 지 못하고 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이런 예를 하나 들어보죠. 이제 막 호감을 갖기 시작한 썸을 타는 남녀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기 시작했죠. 그러나 사랑이라기엔 단지 호감에 불과하고 남이라기엔 궁금하고 알고 싶은 그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남자에겐 아버지가 큰 빛을 남기고 돌아가시고 병중에 투병 중인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돌봐야 할 동생도 넷이나 되었습니다. 빚과 병원비에 허덕이고 밤낮없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동생들을 돌보기도 해야 했죠. 그런데 이 남자는 자신의 그런 형편을 여자에게 감추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다 이야기 하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떤 여자도 이 남자를 충분히 사랑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남자와 함께하기로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떠나보낸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이 남자는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서로를 충분히 알기도 전에 자기 사정을 다 말해버린 것입니다. 물론 궁극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런 관계로 자라기까지는 많은 경험을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믿음의 여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을 경외함을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의 목회자 본회퍼가 그의 책에서 고대의 교회론을 소개하는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성에 공주가 있는데 그 성의 공주는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만 성문이 열려서 성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물과 명예와 수많은 것들을 들고 와서 자기의 무용담과 재력과 용기를 과시하며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했으나 그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젊은 왕자가 그 성에 다다라 여러 고백을 했으나 성문은 여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동안 왕자를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물렀습니다. 공주와 수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당신입니다” 그 때 성문이 열렸습니다. 이는 고대의 교회론을 보여주는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헌신을 묻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헌신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저 마음을 그렇게 내었을 뿐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을 잡는 시늉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독생자 성자 예수를 우리를 사랑함으로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다다라야 할 곳은 이 연합의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럼 이 교회가 자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회를 각자의 형편에서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썸을 타는 사람에게 니 인생을 바치라고 하면 교회가 뭉쳐지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교회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고 교회와 좋은 추억과 감정을 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란 것처럼 우리도 자라야 하는 것이죠. 그 자람에는 상처도 아픔도 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한 번도 하나님과 척을 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지 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그 결과 영적 파산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심에 미쳐 그를 향한 온전한 헌신과 경외를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러 그가 받은 권세는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 씨가 크게 번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문은 고대에 재판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 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통치권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씨는 곧 그리스도와 그 후손들이죠. 여러분은 지경은 대적의 성문을 취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하실 때, 밭에 감춘 보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마 13:44). 소작하던 농부는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왜 모든 소유를 팔았습니까? 밭에 보화의 가치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이 헌신은 아브라함은 이 보화를 보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들었던 남녀의 예로 돌아가 봅시다. 썸을 타던 남녀가 서로에게 헌신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의 주변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대 교회론도 이를 설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랑을 고백했으나 정작 공주를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여러분, 여러분이 처한 교회의 외적 현실과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초라하기 그지없고 성도는 줄어들고 재정적 부담은 늘어나고 그걸 보면서 사랑할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송파에서 사역할 때, 원로 목사님께서 아침 예배 때 해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송파 지역에 유학하고 오신 목사님이 교회를 이루어 잘 성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딴 교회 안수 집사가 교회에 등록해 와서 교회 재정 공개를 요구하더랍니다. 그래서 고민하면서 원로목사님을 찾아온 것이죠. 그때 목사님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요구에 교회를 사랑해서 저러나보다 싶어 교회 앞에 공개를 하셨답니다. 빚이 많았던 것이죠. 80여명이 넘게 출석하던 교인이 그 다음주에 40명으로 줄고 물론 그걸 요구하던 안수 집사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요. 몇 달이 지나 결국 교회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보다 외적 형편에 더 눈이 간 것입니다. 마치 롯처럼 말이죠. 소돔 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던 눈은 결국 망하는 눈입니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바라보셔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독생 성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랑에 믿음으로 선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게 내어 놓으라는 요구에도 순종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돈을 쓰는 곳에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 여러분의 가계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재산보다 내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가 대적의 문을 취할 것이며 그들이 번성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은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그립니다. 그는 전혀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들 이삭의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하는 질문(22:7)에 흔들릴 법도 한대,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자신을 위해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기도 하며 동시에 계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섭리하셔서 그와 같은 계시적 대답을 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아브라함의 믿음의 정수로 설명하면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고 말합니다(히 11:17-19). 아브라함은 자기 모든 것과 같은 말년에 얻은 아들도 하나님을 위해서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험을 믿음으로 통과하였습니다. 잘 되는 교회와 망하는 교회는 아브라함처럼 태도를 취하느냐 롯처럼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즉 신앙의 내용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환경을 바라보느냐에 의해 달라집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남자를 사랑하느냐 그가 가진 조건에 매몰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남녀는 우리가 고교 시절 배웠던 왕후의 상, 걸인의 찬이라는 수필처럼 가난한 형편에서도 상대를 바라보고 사랑하면 환경을 이기지만 사랑이 없으면 조건을 바라보게 되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3월 9일에 리디머 교회에서 은퇴한 팀 켈러 목사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악몽은 거절이다. 힘에 중독된 사람은 굴욕을 당할 때 견딜 수 없다. 안정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안정이 깨지는 고난에 견딜 수 없다. 뭐든지 자신이 통제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불확실한 상황이 그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 된다.” 한 사람의 중심에 있는 인생의 동력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모두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숭배의 근원이 아킬레스건입니다. 이것만 건드리면 픽픽 쓰러집니다. 하나님 외에 자신의 삶에 어떤 동력이나 동기도 남기지 않고 이것을 청산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동기와 동력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경은 돈을 사랑함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딤전 6:10). 자식입니까? 여러분이 자식에 목을 멘다면 몰록에게 자기 자식을 바치던 우상숭배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명예입니까? 쾌락입니까? 사람들의 인정입니까? 그 무엇이 되었든지 이제 청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사랑하는 강남성도교회 성도여러분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의 위치에 맞게 사랑하십시오. 아직 주님과 썸을 타는 중이십니까? 롯처럼 조건을 보지 마시고 주님께 더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혹 이제 밀월에 관계에 들어오셨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 사랑하며 좋은 소문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헌신하는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여러분의 전 생애를 진력을 다해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여러분의 형편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시고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큼이면 충분합니다. 그게 썸을 타는 중이든 밀월의 관계이든 여러분이 드릴 수 있는 삶의 전 영역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 오후에도 배웠듯이 어떤 가정도 아버지에게 좀 문제가 있다고 그 자녀들이 세상에 그걸 떠들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본능적으로 그게 사랑이 아니며 그게 나와 가족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그러는 무리들이 있죠.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욕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희망이 없습니다. 계속 영혼이 피폐해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그렇겠거늘 바른 말씀과 성례가 시행되고 있다면 여러분이 교회를 향해서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경외가 여러분의 경건이요. 영적 유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간곡한 부탁이요 권면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2016/08/12(금) “창세기 22:1-24” / 작성: 이성유
본문 창세기 22장 1-24절
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인생 최대의 시련에 관한 내용입니다. 1절 상반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험 내용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제사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간청하여 얻어낸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니…이 시험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시험이 들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에게 이런 시험을 치르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가장 중요한 소유였습니다. 그의 사랑이 응축되어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본문 2절 상반절에 등장하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하나님의 표현이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고 싶으셨습니다. 당신이 허락한 이삭을 아브라함이 자신의 소유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보다 당신이 허락한 이삭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가진 소유물이 모두 주님의 것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소유를 늘리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기복주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또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하나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바른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늘 ‘하나님’을 선택하게 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또한 하나님께 내어 드리며 하나님을 선택하게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길을 나섭니다. 신앙인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후 삼일 길을 걸려 도착한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칼을 대며 희생 제물로 잡으려 합니다. 그 때였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하나님께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경외심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신앙’ 이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자세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사랑하고 의뢰심을 갖는 것’을 뜻합니다.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위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본문 17절에서 18절입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가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를 복의 근원,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선조로 삼아 구속사역을 위한 통로로 삼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아울러 지난주일 설교말씀처럼 이 상황을 통해 그의 영혼을 연마시키심으로 믿음의 선조에 합당한 신앙인으로 성숙시켜 나가기 위함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시험은 시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영적 제련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신앙여정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험들은 우리를 넘어뜨리며 쓰러지게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단련 시키사 우리를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으로 세워 가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사역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시험을 잘 통과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세워져 가려면 어떤 요건들이 필요할까요? 첫째, ‘영적 민감성’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며 대답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이 영적으로 깨어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영적으로 민감한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내 주신 시험을 잘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 민감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며 내면을 말씀으로 채워놓았을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말씀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요건은 ‘인내’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험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수용하며 일러주신 곳으로 나아갑니다. 삼일 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삼일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 가장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피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자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참아 냅니다. 그 자리를 견뎌냅니다.
강한 사람이 버티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내는 그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입증해주는 표지가 되었고, 그를 믿음의 선조요 그리스도의 통로로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난 후 ‘우리’ 곧 아들 이삭과 함께 돌아온다고 이야기합니다. 비록 번제로 바쳐질 아들 이삭이었지만 함께 올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7절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냐?’는 아들 이삭의 물음에 아브라함은 8절을 통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 하실 것’ 이라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중단없는 확신이었습니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쳐야하는 시점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직접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리고 찌르려 했습니다. 아들 이삭이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짧지 않으신 손에 대한 믿음이 끝까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어느 선까지만 하나님을 믿었던 것 아니라 자신의 감정, 이성까지 내려놓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祖上)이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본받은 이삭을 통해 그의 가문이 믿음의 명가(名家)가 되는 은총을 입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십니다. 믿음을 검증해 보실 뿐 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나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한 영혼 연마의 과정입니다. 그런 시험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단단해 지기 마련이며 결국 하나님께서 믿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사실을 기억하시며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하나님의 시험에 순종하심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시며 하나님 역사의 통로로 쓰임 받는 은총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시험은 저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환임을 일깨워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이 아침 저희 영혼을 흔들어 깨어 주사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주장해 주십시오. 이 시간 힘을 주사 시험의 때에 인내하게 하시며 믿음을 주사 하나님을 끝까지 믿게 해 주십시오. 그를 통해 하나님 주시는 시험을 잘 통과할 뿐 만 아니라 영혼이 연마되고 믿음이 강화됨으로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은총을 입게 해 주십시오. 그런 저희의 모습이 후손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게 하시고, 그 믿음을 물려받은 저희의 후손들이 이 시대의 이삭으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 이레의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2절)?
2.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3절, 9절~10절)?
3.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경외심은 결국 그에게 어떤 상으로 귀결됩니까(17절~18절)?
4.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원하시는 번제물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이 아침 아브라함과 나의 모습을 비교하며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져봅시다. 믿는 이로서 내게 필요한 모습들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이성유)
[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아브라함에게 닥친 사람의 시험”(창2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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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 설교말씀 중에서 아브라함에게 닥친 사람의 시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람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환난이 오게 되는데 사람에게 받는 시험이 크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사람 때문에 큰 시험을 겪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닥친 사람의 시험”(창22:20-2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삭을 바치라는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 시험을 잘 통과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이삭을 살릴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숫양을 준비시키신 것을 보게 됩니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숫양을 준비시켜 놓으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아브라함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열어 놓으시고 시험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감당할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험의 종류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두 이겨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도 미리 계획하시고 믿음을 시험하시면서 이미 숫양을 준비하셔서 하나님께 바치도록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이삭을 드림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복을 허락받았습니다.
창 22:17-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는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데 너의 씨로 말미암아 되겠다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가장 귀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약속하시고 그 복을 허락하셔서 이루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에 아까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는 간절히 원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없어서 드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만큼은 하나님께 항상 열려 내가 있는 한도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드릴 때에 하나님도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심과 같이 우리에게도 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모리아의 산에 올라갈 때는 이삭과 둘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19절에 내려올 때는 혼자 내려옵니다.
창 22: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라는 문장에서 ‘돌아가서’는 (שוב슈브)입니다.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돌아서다, 회복하다, 새롭게 되다, 라는 뜻입니다. 올라갈 때는 복수를 사용함으로 이삭과 올라갔는데 내려왔을 때는 단수를 사용함으로 아브라함만 내려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회복되어 내려온 것입니다. 번제를 드림으로 시험을 이기고 새로운 영적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에서 믿음의 삶으로 돌아서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삶은 달라집니다.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라는 문장에서 ‘거주하였더라’는 (ישב야샤브)입니다. 자리잡다, 잔류하다, 살다, 거주하다, 라는 뜻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완전히 거주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브엘세바에서 살았는데 천막을 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바치고 난 후에는 완전히 건물을 짓고 살게 됩니다. 천막생활을 치워버렸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떠나야 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야샤브는 이곳에 완전히 정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브엘세바’는 브엘과 세바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브엘은 (באר베에르)이고 돌에 글자를 새기다, 라는 뜻이고 세바는 (שבע셰바)이며 맹세하다, 맹세로 묶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 다시는 불신의 삶을 살지 않기를 맹세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맹세로 묶어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는 인생이 될 것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께 집을 지었고 더 이상 방황하지 않는 신앙이 되겠다는 고백이며 다짐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식을 하나님께 세우기만 하면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 13세 여자 14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게 됩니다. 이것은 이제 네가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식을 치르고 나면 부모가 전혀 간섭하지 않고 죄를 지어도 부모가 책임을 지지 않고 본인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이삭은 모리아의 산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육신의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육 적인 탯줄을 끊고 하나님께 영적인 탯줄을 붙여서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을 모리아 산에서 만들게 됩니다. 우리도 이제 이삭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깊은 영성의 단계까지 들어가는 체험이 있어야 힘들 때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탯줄을 끊고 하나님께 탯줄을 붙여 어렵고 힘이 들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기도로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고 혼자 내려와서 브엘세바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오게 됩니다. 이 사람은 나홀의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창 22: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이 일 후에 라는 것은 이삭을 드리고 모리아의 산에서 내려온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는 (נגד나가드)입니다. 호팔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언하다, 설명하다, 선포하다, 비난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원전에는 감탄사 (הנה힌네)가 있는데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이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맞은편에 서서 선포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야 아브라함아 보아라!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으라고 소리치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떤 사람이 가지고 온 소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홀의 소식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온 지30년이 흐른 뒤에 이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떠나올 때에 아버지 데라의 나이는 145세였습니다. 그 후로 60년을 더 살다가 205세에 죽게 됩니다.
그 후로 나홀은 하란에 머물게 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온지 30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나홀은 하란에서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으로 변해 있습니다. 나홀은 (נחור나호르)입니다. 콧김을 뿜다, 콧김이 센, 힘 있는 자, 라는 뜻입니다. 나홀은 30년 동안 하란에서 입김이 센 유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말 한마디만 해도 지역이 떠들썩할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들들이 12 방백이나 되었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사람의 이름들이 그 지역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 지역을 맡고 있는 수장이라는 뜻입니다. 나홀의 아들들은 이미 12개의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힘 있는 자들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홀의 아내 밀가는 (מלכה밀카)입니다. 왕후, 여왕, 이라는 뜻입니다. 이미 밀가는 왕후의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들이 이미 12 방백의 수장인데 얼마나 극진 대우를 받으면서 사는 인생이 되었습니까?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살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나홀에 대해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동생은 이렇게 복을 받아서 잘살고 자식들도 잘되는데 당신은 어떤 복을 받았는지 말해보라! 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복을 주셨는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이렇게 30년 동안이나 한 번도 고향에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럼 하나님이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 한 번 말해봐! 라면서 비난하면서 힘을 다해 소리치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이삭도 모리아 산에 두고 왔지요. 천막을 거두고 지금 막 건물을 지으면서 살고 있지요, 자식도 잘 된 것도 없고 외적으로는 보여줄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지요, 사라는 브엘세바에서 천막 생활하다가 고생만 죽 살 나게 하고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했지요, 블레셋 왕에게도 빼앗길 뻔 했지요, 이런 생활만 하다 보니 보여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에게 받는 시험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향을 나오고 친척을 멀리하면서 인생을 살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 만나서 보면 안 믿는 친척들은 우리보다 더 잘 살고 자식도 더 잘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열심히 주님을 믿으면서 살았는데 아파트도 없고, 차도 별 볼 일 없고, 자식도 별 볼 일 없는 인생을 살다 보니 안 믿는 친척들이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도 인간들에게 시험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 어떤 사람이 나홀에게 지시를 받고 찾아와서 비난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꼴 보기 싫었으면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비난을 하고, 소리를 치고, 수치를 주니 아브라함의 마음에 이 사람은 보기도 싫고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나홀의 인생은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름조차 더 이상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인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잘됩니다. 하갈과 사라와 그두라를 통해서 자식을 주십니다. 이렇게 점점 자식을 통해서 번성케 되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 세월이 흘러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날이 갈수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칭해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벗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을 숨기지 않고 모두 말씀하실 정도로 친분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눅 16:23-24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미 음부에 있던 부자도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낙원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에 의해서 인간의 시험을 받게 되어 낙심은 되지만 이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약속하신 모든 복을 허락하시고 아브라함이 죽어서 까지도 자손을 통해서 이루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기다 보면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물질이 부족할 수 있고, 명예나, 지식이나, 자식들이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고 마지막 날에 왕 노릇 하는 존재로 세워주십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지금은 더 높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세까지 가서도 복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시간이 흘러 갈수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인간의 시험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씀으로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복을 바라보시고 이미 주신 복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사시는 주님의 일군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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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창세기 2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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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예히 아하르 하데바림 하엘레 웨하엘로힘 닛사 엩 아브라함 와요멜 엘라우 아브라함 와요멜 힌네니
개역개정,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새번역,1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그를 부르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니, 아브라함은 “예,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말성경,1 이런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 이런 일들이 있은 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영어NIV,1 Some time later God tested Abraham. He said to him, “Abraham!” “Here I am,” he replied.
영어NASB,1 Now it came about after these things, that God tested Abraham, and said to hi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영어MSG,1 After all this, God tested Abraham. God said, “Abraham!” “Yes?” answered Abraham. “I’m listening.”
영어NRSV,1 After these things God tested Abraham. He said to hi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헬라어구약Septuagint,1 και εγενετο μετα τα ρηματα ταυτα ο θεος επειραζεν τον αβρααμ και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αβρααμ αβρααμ ο δε ειπεν ιδου εγω
라틴어Vulgate,1 quae postquam gesta sunt temptavit Deus Abraham et dixit ad eum Abraham ille respondit adsum
히브리어구약BHS,1 וַיְהִי אַחַר הַדְּבָרִים הָאֵלֶּה וְהָאֱלֹהִים נִסָּה אֶת־אַבְרָהָם וַיֹּאמֶר אֵלָיו אַבְרָהָם וַיֹּאמֶר הִנֵּנִי׃
성 경: [창22:1]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
그 일 후에 – 여기서 ‘일'(*, 다바르)이란 문자적으로 ‘말'(言語)을 의미한다(11:1). 따라서 지금까지 주어진 축복 혹은 언약의 통괄 지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롯 3:18)이란 뜻도 지니므로 ‘그 일 후에’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 전개에 대한 머리말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앞의 사건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문장 연결어로도 볼 수 있다. 이때는 이삭이 번제용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이다(6절).
시험 하시려고 – 성경에 나타난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단에게서 기원한 시험으로(엡 2:2), 인간을 타락케 하는 유혹(temptation)이다(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후자의 경우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인 생각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그를 부르시되 – 일전에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였던 것과 동일한 방식의 계시이다.
아브라함아 하시니 – 명령을 계시하시기 위한 부르심인데 단 한 마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시 상황의 긴박성과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무슨 일이든지 이르는 대로 청종하겠다는 결의에 찬 응답이다(사 6:8). 이는 성도가 항상 준비해 두어야만 하는 대답인데 언제 어느 곳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신의 영적 현주소는 ‘하나님 앞'(coram Deo)이란 사실을 잊지 않을 때만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와요멜 카흐 나 엩 빈카 엩 예히데카 아쉘 아합타 엩 이츠핰 웨렠 레카 엘 에레츠 함모리야 웨하아레후 솸 레올라 알 아하드 헤하림 아쉘 오말 엘레카
개역개정,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새번역,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우리말성경,2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가톨릭성경,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영어NIV,2 Then God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region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I will tell you about.”
영어NASB,2 And He said, “Take now your son, your only son, whom you love, Isaac,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of which I will tell you.”
영어MSG,2 He said, “Take your dear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that I’ll point out to you.”
영어NRSV,2 He said, “Take your son, your only son Isaac, whom you love, and go to the land of Moriah, and offer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one of the mountains that I shall show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2 και ειπεν λαβε τον υιον σου τον αγαπητον ον ηγαπησας τον ισαακ και πορευθητι εις την γην την υψηλην και ανενεγκον αυτον εκει εις ολοκαρπωσιν εφ’ εν των ορεων ων αν σοι ειπω
라틴어Vulgate,2 ait ei tolle filium tuum unigenitum quem diligis Isaac et vade in terram Visionis atque offer eum ibi holocaustum super unum montium quem monstravero tibi
히브리어구약BHS,2 וַיֹּאמֶר קַח־נָא אֶת־בִּנְךָ אֶת־יְחִידְךָ אֲשֶׁר־אָהַבְתָּ אֶת־יִצְחָק וְלֶךְ־לְךָ אֶל־אֶרֶץ הַמֹּרִיָּה וְהַעֲלֵהוּ שָׁם לְעֹלָה עַל אַחַד הֶהָרִים אֲשֶׁר אֹמַר אֵלֶיךָ׃
성 경: [창22:2]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 3중으로 강조된 점층법적 표현이다. 즉 (1)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사람 (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 (3) 이스마엘이 떠난 후 자신에게 넘은 유일한 혈통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을 최고도로 불러 일으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자신의 명령에 순종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의 의미가 담겨있다.
모리아 땅 – 당시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21:32-34)에서 사흘 길 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이다. 한편 ‘모리아'(*, 모리야)는 ‘마르에'(*)와 ‘예호와'(*)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이란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을 지정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곳 뿐 아니라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장소(대하3:1)로 이미 택정해 놓으셨던 것이다.
번제로 드리라 – 인신 제물(人身祭物)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나 신앙으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제(難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 이는 피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던 하나님의 속성(9:4-6)과 상치되며 (2) 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한 약속의 씨 이삭을 다시 거두어 가려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17:5, 6)과는 일견 모순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와야쉬켐 아브라함 바보켈 와야하보쉬 엩 하모로 와이카흐 엩 쉐네 네아라우 잍토 웨에트 이츠핰 베노 와예바카 아체 올라 와야콤 와예렠 엘 함마콤 아쉘 아말 로 하엘로힘
개역개정,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새번역,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나귀의 등에 안장을 얹었다. 그는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도 길을 떠날 준비를 시켰다.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우리말성경,3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하인 두 사람과 그 아들 이삭을 준비시켰습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한 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습니다.
가톨릭성경,3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하인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서는,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곳으로 길을 떠났다.
영어NIV,3 Early the next morning Abraham got up and saddled his donkey. He took with him two of his servants and his son Isaac. When he had cut enough wood for the burnt offering, he set out for the place God had told him about.
영어NASB,3 So Abraham rose early in the morning and saddled his donkey, and took two of his young men with him and Isaac his son; and he split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arose and went to the place of which God had told him.
영어MSG,3 Abraham got up early in the morning and saddled his donkey. He took two of his young servants and his son Isaac. He had split wood for the burnt offering. He set out for the place God had directed him.
영어NRSV,3 So Abraham rose early in the morning, saddled his donkey, and took two of his young men with him, and his son Isaac; he cut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set out and went to the place in the distance that God had shown him.
헬라어구약Septuagint,3 αναστας δε αβρααμ το πρωι επεσαξεν την ονον αυτου παρελαβεν δε μεθ’ εαυτου δυο παιδας και ισαακ τον υιον αυτου και σχισας ξυλα εις ολοκαρπωσιν αναστας επορευθη και ηλθεν επι τον τοπον ον ειπεν αυτω ο θεος
라틴어Vulgate,3 igitur Abraham de nocte consurgens stravit asinum suum ducens secum duos iuvenes et Isaac filium suum cumque concidisset ligna in holocaustum abiit ad locum quem praeceperat ei Deus
히브리어구약BHS,3 וַיַּשְׁכֵּם אַבְרָהָם בַּבֹּקֶר וַיַּחֲבֹשׁ אֶת־חֲמֹרֹו וַיִּקַּח אֶת־שְׁנֵי נְעָרָיו אִתֹּו וְאֵת יִצְחָק בְּנֹו וַיְבַקַּע עֲצֵי עֹלָה וַיָּקָם וַיֵּלֶךְ אֶל־הַמָּקֹום אֲשֶׁר־אָמַר־לֹו הָאֱלֹהִים׃
성 경: [창22:3]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서두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순종했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는 밤잠을 못 이루면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순종밖에 없고 하나님은 어떠한 식으로든 약속한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실 줄 믿었기에(롬 4:21) 그는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였을 것이다(막 14:36).
번제에 쓸 나무 – 번제(Burnt Sacrifice)는 짐승을 제물로 잡아 죽인 후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火祭)이다. 따라서 불을 피우는 데 사용될 나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팔레스틴의 구릉 지대엔 대부분 나무들이 없었기에 번제용 나무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한편 아브라함의 집에는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각종 짐승과 다른 종들도 있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불에 태워 바치라고 요구하셨으니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벧전 4:12)이었음올 알 수 있다.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 모리아 산까지의 삼일 길, 즉 약 80Km 여정(旅程)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 주는 헌신과 순종의 길이자 지성소를 향한 속죄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번제로 드려졌듯이(13절) 훗날 이곳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에서도 역시 인간을 대신한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이다(대하 5:6).
바욤 핫쉐리쉬 와잇사 아브라함 엩 에나우 와야르 엩 함마콤 메라홐
개역개정,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새번역,4 사흘 만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들어서, 멀리 그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말성경,4 3일째 되던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4 사흘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멀리 있는 그곳을 볼 수 있었다.
영어NIV,4 On the third day Abraham looked up and saw the place in the distance.
영어NASB,4 On the third day Abraham raised his eyes and saw the place from a distance.
영어MSG,4 On the third day he looked up and saw the place in the distance.
영어NRSV,4 On the third day Abraham looked up and saw the place far away.
헬라어구약Septuagint,4 τη ημερα τη τριτη και αναβλεψας αβρααμ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ειδεν τον τοπον μακροθεν
라틴어Vulgate,4 die autem tertio elevatis oculis vidit locum procul
히브리어구약BHS,4 בַּיֹּום הַשְּׁלִישִׁי וַיִּשָּׂא אַבְרָהָם אֶת־עֵינָיו וַיַּרְא אֶת־הַמָּקֹום מֵרָחֹק׃
성 경: [창22:4]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제 삼일에 – 지시받은 날(1절)로부터는 나흘째이다. 상징적이긴 하나 이것은 유월절 나흘 전에 미리 양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출 12:3, 6)과 일치한다.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지정한 곳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때 하나님은 햇빛에 영롱히 반사되는 구름 덩어리를 그곳 모리아 산에 머물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이 쉽게 제단 쌓을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와요멜 아브라함 엘 네아라우 쉐부 라켐 포 임 하하몰 와아니 웨한나알 네레카 아드 코 웨니쉬타하웨 웨나슈바 알레켐
개역개정,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새번역,5 그는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아이와 저리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너희에게로 함께 돌아올 터이니, 그 동안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우리말성경,5 그가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를 데리고 여기 있으라.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 너희에게 함께 돌아오겠다.”
가톨릭성경,5 아브라함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나와 이 아이는 저리로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영어NIV,5 He said to his servants, “Stay here with the donkey while I and the boy go over there.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
영어NASB,5 And Abraham said to his young men, “Stay here with the donkey, and I and the lad will go yonder; and we will worship and return to you.”
영어MSG,5 Abraham told his two young servants, “Stay here with the donkey. The boy and I are going over there to worship; then we’ll come back to you.”
영어NRSV,5 Then Abraham said to his young men, “Stay here with the donkey; the boy and I will go over there; we will worship, and then we will come back to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5 και ειπεν αβρααμ τοις παισιν αυτου καθισατε αυτου μετα της ονου εγω δε και το παιδαριον διελευσομεθα εως ωδε και προσκυνησαντες αναστρεψωμεν προς υμας
라틴어Vulgate,5 dixitque ad pueros suos expectate hic cum asino ego et puer illuc usque properantes postquam adoraverimus revertemur ad vos
히브리어구약BHS,5 וַיֹּאמֶר אַבְרָהָם אֶל־נְעָרָיו שְׁבוּ־לָכֶם פֹּה עִם־הַחֲמֹור וַאֲנִי וְהַנַּעַר נֵלְכָה עַד־כֹּה וְנִשְׁתַּחֲוֶה וְנָשׁוּבָה אֲלֵיכֶם׃
성 경: [창22:5]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원어 성경에 의하면 이 문장의 주어는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이다. 이는 종들을 따돌리기 위한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에서 독자 이삭의 기적적 탄생을 체험한 아브라함(롬 4:18-22)은 비록 지금 이삭이 죽임당하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날 줄을 믿었다(히 11:17-19)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이카흐 아브라함 엩 아체 하오라 와야셈 알 이츠핰 베노 와이카흐 베야도 엩 하에쉬 웨엩 함마아케레트 와예레쿠 쉐네헴 아흐다우
개역개정,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새번역,6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을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챙긴 다음에,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우리말성경,6 아브라함이 번제에 쓸 나무를 자기 아들 이삭의 등에 지웠습니다.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둘이 함께 걸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6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영어NIV,6 Abraham took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placed it on his son Isaac, and he himself carried the fire and the knife. As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영어NASB,6 And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 offering and laid it on Isaac his son, and he took in his hand the fire and the knife. So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
영어MSG,6 Abraham took the wood for the burnt offering and gave it to Isaac his son to carry. He carried the flint and the knife. The two of them went off together.
영어NRSV,6 Abraham took the wood of the burnt offering and laid it on his son Isaac, and he himself carried the fire and the knife. So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
헬라어구약Septuagint,6 ελαβεν δε αβρααμ τα ξυλα της ολοκαρπωσεως και επεθηκεν ισαακ τω υιω αυτου ελαβεν δε και το πυρ μετα χειρα και την μαχαιραν και επορευθησαν οι δυο αμα
라틴어Vulgate,6 tulit quoque ligna holocausti et inposuit super Isaac filium suum ipse vero portabat in manibus ignem et gladium cumque duo pergerent simul
히브리어구약BHS,6 וַיִּקַּח אַבְרָהָם אֶת־עֲצֵי הָעֹלָה וַיָּשֶׂם עַל־יִצְחָק בְּנֹו וַיִּקַּח בְּיָדֹו אֶת־הָאֵשׁ וְאֶת־הַמַּאֲכֶלֶת וַיֵּלְכוּ שְׁנֵיהֶם יַחְדָּו׃
성 경: [창22:6]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이삭에게 지우고 –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 지우신 대속(代贖)사역(사 53:4-6;요 19:17)을 연상시켜 주는 장면으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닌다.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고 가는 아브라함의 내적고통은 그를 침묵케 하였을 것이고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표정은 이삭에게 긴장감과 당혹감, 참된 여행 목적에 대한 궁금증 등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와요멜 이츠핰 엘 아브라함 아비우 와요멜 아비 와요멜 힌넨니 베니 와요멜 힌네 하에쉬 웨하에침 웨아예 핫세 레올라
개역개정,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새번역,7 이삭이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자, 아브라함이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삭이 물었다.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말성경,7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아들아?” 이삭이 말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가톨릭성경,7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영어NIV,7 Isaac spoke up and said to his father Abraham, “Father?” “Yes, my son?” Abraham replied. “The fire and wood are here,” Isaac said, “but where is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영어NASB,7 And Isaac spoke to Abraham his father and said, “My father!” And he said, “Here I am, my son.” And he said, “Behold, the fire and the wood, but where is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영어MSG,7 Isaac said to Abraham his father, “Father?” “Yes, my son.” “We have flint and wood, but where’s the sheep for the burnt offering?”
영어NRSV,7 Isaac said to his father Abraham, “Father!” And he said, “Here I am, my son.” He said, “The fire and the wood are here, but where is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헬라어구약Septuagint,7 ειπεν δε ισαακ προς αβρααμ τον πατερα αυτου ειπας πατερ ο δε ειπεν τι εστιν τεκνον λεγων ιδου το πυρ και τα ξυλα που εστιν το προβατον το εις ολοκαρπωσιν
라틴어Vulgate,7 dixit Isaac patri suo pater mi at ille respondit quid vis fili ecce inquit ignis et ligna ubi est victima holocausti
히브리어구약BHS,7 וַיֹּאמֶר יִצְחָק אֶל־אַבְרָהָם אָבִיו וַיֹּאמֶר אָבִי וַיֹּאמֶר הִנֶּנִּי בְנִי וַיֹּאמֶר הִנֵּה הָאֵשׁ וְהָעֵצִים וְאַיֵּה הַשֶּׂה לְעֹלָה׃
성 경: [창22:7]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내 아버지여…내 아들아 – 어색한 긴장감과 침묵을 깨는 대화로 부자(父子)간의 끈끈한 정이 넘치는 존경과 애정의 부름과 응답이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이는 (1)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가 이미 모세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며 (2) 아브라함의 경건 생활과 제사 행위를 통해 이삭이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필요한 제물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이 질문은 이러한 사실적 의미 외에도 영적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곧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안타깝게 부르짖는 공동의 물음이란 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는 어린양을 죽이고서도 그 ‘어린양’이 어디에 있는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사 1:11-14). 그러나 성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29).
와요멜 아브라함 엘로힘 이르에 로 핫세 레올라 베니 와예레쿠 쉐네헴 야흐다우
개역개정,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새번역,8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우리말성경,8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계속 길을 갔습니다.
가톨릭성경,8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둘은 계속 함께 걸어갔다.
영어NIV,8 Abraham answered, “God himself will provide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And the two of them went on together.
영어NASB,8 And Abraham said, “God will provide for Himself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my son.” So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
영어MSG,8 Abraham said, “Son, God will see to it that there’s a sheep for the burnt offering.” And they kept on walking together.
영어NRSV,8 Abraham said, “God himself will provide the lamb for a burnt offering, my son.” So the two of them walked on together.
헬라어구약Septuagint,8 ειπεν δε αβρααμ ο θεος οψεται εαυτω προβατον εις ολοκαρπωσιν τεκνον πορευθεντες δε αμφοτεροι αμα
라틴어Vulgate,8 dixit Abraham Deus providebit sibi victimam holocausti fili mi pergebant ergo pariter
히브리어구약BHS,8 וַיֹּאמֶר אַבְרָהָם אֱלֹהִים יִרְאֶה־לֹּו הַשֶּׂה לְעֹלָה בְּנִי וַיֵּלְכוּ שְׁנֵיהֶם יַחְדָּו׃
성 경: [창22:8]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하나님이…친히 준비하시리라 – 이삭의 질문에 대한 거짓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전에 이삭을 대신할 다른 제물을 준비해 놓으시겠다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선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확신에 찬 대답일 뿐이다(히11:17-19).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전의 몇몇 경솔했던 처신(12:10- 20;6:1, 2;20:1-18)을 교훈삼아 아브라함이 보다 현명하고 성숙된 신앙인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 준다.
와야보우 엘 함마콤 아쉘 아말 로 하엘로힘 와이벤 솸 아브라함 엩 함미즈베아흐 와야아롴 엩 하에침 와야아코드 엩 이츠핰 베노 와야셈 오토 알 베미즈메아흐 밈마알 라에침
개역개정,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새번역,9 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곳에 이르러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 놓았다. 그런 다음에 제 자식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말성경,9 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들을 잘 쌓아 올렸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아들 이삭을 묶어 제단 위에, 쌓아 놓은 나무 위에 눕혔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영어NIV,9 When they reached the place God had told him about, Abraham built an altar there and arranged the wood on it. He bound his son Isaac and laid him on the altar, on top of the wood.
영어NASB,9 Then they came to the place of which God had told him; and Abraham built the altar there, and arranged the wood, and bound his son Isaac, and laid him on the altar on top of the wood.
영어MSG,9 They arrived at the place to which God had directed him. Abraham built an altar. He laid out the wood. Then he tied up Isaac and laid him on the wood.
영어NRSV,9 When they came to the place that God had shown him, Abraham built an altar there and laid the wood in order. He bound his son Isaac, and laid him on the altar, on top of the wood.
헬라어구약Septuagint,9 ηλθον επι τον τοπον ον ειπεν αυτω ο θεος και ωκοδομησεν εκει αβρααμ θυσιαστηριον και επεθηκεν τα ξυλα και συμποδισας ισαακ τον υιον αυτου επεθηκεν αυτον επι το θυσιαστηριον επανω των ξυλων
라틴어Vulgate,9 veneruntque ad locum quem ostenderat ei Deus in quo aedificavit altare et desuper ligna conposuit cumque conligasset Isaac filium suum posuit eum in altari super struem lignorum
히브리어구약BHS,9 וַיָּבֹאוּ אֶל־הַמָּקֹום אֲשֶׁר אָמַר־לֹו הָאֱלֹהִים וַיִּבֶן שָׁם אַבְרָהָם אֶת־הַמִּזְבֵּחַ וַיַּעֲרֹךְ אֶת־הָעֵצִים וַיַּעֲקֹד אֶת־יִצְחָק בְּנֹו וַיָּשֶׂם אֹתֹו עַל־הַמִּזְבֵּחַ מִמַּעַל לָעֵצִים׃
성 경: [창22:9]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이삭을 결박하여 –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혈기 왕성한 이삭은 하려고만 하였다면 노쇠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는데 아마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작정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순종(빌 2:8)과 속죄 사역(사 53:5)을 예표한다.
와이쉐라흐 아브라함 엩 야도 와이카흐 엩 함마아케레트 리쉐호트 엩 베노
개역개정,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새번역,10 그는 손에 칼을 들고서, 아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우리말성경,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들고 아들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영어NIV,10 Then he reached out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slay his son.
영어NASB,10 And Abraham stretched out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slay his son.
영어MSG,10 Abraham reached out and took the knife to kill his son.
영어NRSV,10 Then Abraham reached out his hand and took the knife to kill his son.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και εξετεινεν αβρααμ την χειρα αυτου λαβειν την μαχαιραν σφαξαι τον υι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extenditque manum et arripuit gladium ut immolaret filium
히브리어구약BHS,10 וַיִּשְׁלַח אַבְרָהָם אֶת־יָדֹו וַיִּקַּח אֶת־הַמַּאֲכֶלֶת לִשְׁחֹט אֶת־בְּנֹו׃
성 경: [창22:10]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아브라함의 순종]
칼을 잡고 –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순종의 마지막 행위이다. 따라서 이제 이삭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이삭을 죽이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은 입증되었으며 제사의 정신도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신 까닭(12절)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비록 이삭은 죽지 않았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페러독스(paradox)이다(마 10:39;16:25;dy 12:15). 한편 여기서도 이삭의 순종은 간과되어선 안 되는데 아브라함의 칼 앞에서 잠잠했던 이삭의 모습은 병정들의 창칼 앞에서 잠잠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해 준다(마 26:47-56).
와이크라 엘라우 말랔 아도나이 민 핫솨마임 와요멜 아브라함 아브라함 와요멜 힌넨니
개역개정,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새번역,11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영어NIV,11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out to him from heaven, “Abraham! Abraham!” “Here I am,” he replied.
영어NASB,11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him from heaven, and said, ” Abraha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
영어MSG,11 Just then an angel of GOD called to him out of Heaven, “Abraham! Abraham!” “Yes, I’m listening.”
영어NRSV,11 But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him from heaven, and said, “Abraham, Abraham!” And he said, “Here I am.”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και εκαλεσεν αυτον αγγελος κυριου εκ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ειπεν αυτω αβρααμ αβρααμ ο δε ειπεν ιδου εγω
라틴어Vulgate,11 et ecce angelus Domini de caelo clamavit dicens Abraham Abraham qui respondit adsum
히브리어구약BHS,11 וַיִּקְרָא אֵלָיו מַלְאַךְ יְהוָה מִן־הַשָּׁמַיִם וַיֹּאמֶר אַבְרָהָם אַבְרָהָם וַיֹּאמֶר הִנֵּנִי׃
성 경: [창22:11]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사자 – 일전에 하갈에게 현현하셨던 분(16:7)과 동일한 성육신(成肉身) 이 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다급한 반복은 사태의 긴박성과 함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이삭은 결코 죽임당해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은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통해서만 진정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17:5).
와요멜 알 티쉐라흐 야드카 엘 한나알 웨알 타아스 로 메움마 키 앝타 야다티 키 예레 엘로힘 앝타 웨로 하샄타 엩 빈카 엩 예히데카 밈멘니
개역개정,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새번역,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우리말성경,12 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곧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았으니 이제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내가 알았노라.”
가톨릭성경,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영어NIV,12 “Do not lay a hand on the boy,” he said. “Do not do anything to him.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because you have not withheld from me your son, your only son.”
영어NASB,12 And he said, “Do not stretch out your hand against the lad, and do nothing to him; 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since you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from Me.”
영어MSG,12 “Don’t lay a hand on that boy! Don’t touch him! Now I know how fearlessly you fear God; you didn’t hesitate to place your son, your dear son, on the altar for me.”
영어NRSV,12 He said, “Do not lay your hand on the boy or do anything to him; for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since you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from me.”
헬라어구약Septuagint,12 και ειπεν μη επιβαλης την χειρα σου επι το παιδαριον μηδε ποιησης αυτω μηδεν νυν γαρ εγνων οτι φοβη τον θεον συ και ουκ εφεισω του υιου σου του αγαπητου δι’ εμε
라틴어Vulgate,12 dixitque ei non extendas manum tuam super puerum neque facias illi quicquam nunc cognovi quod timeas Dominum et non peperceris filio tuo unigenito propter me
히브리어구약BHS,12 וַיֹּאמֶר אַל־תִּשְׁלַח יָדְךָ אֶל־הַנַּעַר וְאַל־תַּעַשׂ לֹו מְאוּמָּה כִּי עַתָּה יָדַעְתִּי כִּי־יְרֵא אֱלֹהִים אַתָּה וְלֹא חָשַׂכְתָּ אֶת־בִּנְךָ אֶת־יְחִידְךָ מִמֶּנִּי׃
성 경: [창22:12]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여호와 이레]
네 손을 대지 말라 –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셨다는 의미로 이제 그에 대한 시험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믿음만이 가득 차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시험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음은 그가 제 2위 성자(聖子) 하나님이심을 뒷받침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 자신이 근본 하나님이면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이처럼 하나님을 객관화시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같이 구별된 위격(位格)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아노라(*, 야다티) – 이는 체험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수용한 지식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삭 헌납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함을 확인하셨다.
와잇사 아브라함 엩 에나우 와야르 웨힌네 아윌 아하르 네에하즈 바스밬 베카르나우 와예렠 아브라함 와이카흐 엩 하아일 와야아레후 레올라 타하트 베노
개역개정,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새번역,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우리말성경,13 아브라함이 눈을 들고 보니 숫양 한 마리가 덤불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양을 잡아 자기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가톨릭성경,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영어NIV,13 Abraham looked up and there in a thicket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He went over and took the ram and sacrificed it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영어NASB,13 Then Abraham raised his eyes and looked, and behold, behind him a ram caught in the thicket by his horns; and Abraham went and took the ram, and offered him up for a burnt offering in the place of his son.
영어MSG,13 Abraham looked up.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in the thicket. Abraham took the ram and sacrificed it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영어NRSV,13 And Abraham looked up and saw a ram, caught in a thicket by its horns. Abraham went and took the ram and offered it up as a burnt offering instead of his son.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και αναβλεψας αβρααμ τοις οφθαλμοις αυτου ειδεν και ιδου κριος εις κατεχομενος εν φυτω σαβεκ των κερατων και επορευθη αβρααμ και ελαβεν τον κριον και ανηνεγκεν αυτον εις ολοκαρπωσιν αντι ισαακ του υιου αυτου
라틴어Vulgate,13 levavit Abraham oculos viditque post tergum arietem inter vepres herentem cornibus quem adsumens obtulit holocaustum pro filio
히브리어구약BHS,13 וַיִּשָּׂא אַבְרָהָם אֶת־עֵינָיו וַיַּרְא וְהִנֵּה־אַיִל אַחַר נֶאֱחַז בַּסְּבַךְ בְּקַרְנָיו וַיֵּלֶךְ אַבְרָהָם וַיִּקַּח אֶת־הָאַיִל וַיַּעֲלֵהוּ לְעֹלָה תַּחַת בְּנֹו׃
성 경: [창22:13]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여호와 이레]
수양(*, 아일)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는 문장(*, 엘로힘 이르에 로)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와 우연히 일치하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물중(物證)이다.
수풀(*, 사바크) – 팔레스틴에 흔히 있는 잡목들의 가지가 어지럽게 뒤엉킨 상태를 두고 한 말이다(시 74:5).
아들을 대신하여 –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한 수양 뿐 아니라 역사 이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죽어간 흠없는 짐승들(출 12:5;29:1레 1:3;민 6:14)은 오로지 흠없는 한 어린양의 영원한 제사, 즉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계시한다(히 9:11-14;13:11, 12).
와이크라 아브라함 쉠 함마콤 하후 아도나이 이르에 아쉘 예아메르 하욤 베할 아도나이 예라에
개역개정,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새번역,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 ㉠히, ‘아도나이 이레(주님께서 준비하심)’ ㉡또는 ‘주님께서 산에서 친히 보이신다’
우리말성경,14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가톨릭성경,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영어NIV,14 So Abraham called that place The LORD Will Provide. And to this day it is said, “On the mountain of the LORD it will be provided.”
영어NASB,14 And Abraham called the name of that place The LORD Will Provide, as it is said to this day, “In the mount of the LORD it will be provided.”
영어MSG,14 Abraham named that place GOD-Yireh (GOD-Sees-to-It). That’s where we get the saying, “On the mountain of GOD, he sees to it.”
영어NRSV,14 So Abraham called that place “The LORD will provide”; as it is said to this day, “On the mount of the LORD it shall be provided.”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και εκαλεσεν αβρααμ το ονομα του τοπου εκεινου κυριος ειδεν ινα ειπωσιν σημερον εν τω ορει κυριος ωφθη
라틴어Vulgate,14 appellavitque nomen loci illius Dominus videt unde usque hodie dicitur in monte Dominus videbit
히브리어구약BHS,14 וַיִּקְרָא אַבְרָהָם שֵׁם־הַמָּקֹום הַהוּא יְהוָה יִרְאֶה אֲשֶׁר יֵאָמֵר הַיֹּום בְּהַר יְהוָה יֵרָאֶה׃
성 경: [창22:14]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으로 8절에 의거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마 6:25-32)임을 찬양한 기념비적 이름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 되리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던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마련해 둔 수양을 보게 되는 축복을 얻었듯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두신 구원 계획에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비로소 온전히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요 1:10-12).
와이크라 말랔 아도나이 엘 아브라함 쉐니트 민 핫솨마임
개역개정,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새번역,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우리말성경,15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가톨릭성경,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영어NIV,15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Abraham from heaven a second time
영어NASB,15 Then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Abraham a second time from heaven,
영어MSG,15 The angel of GOD spoke from Heaven a second time to Abraham:
영어NRSV,15 The angel of the LORD called to Abraham a second time from heaven,
헬라어구약Septuagint,15 και εκαλεσεν αγγελος κυριου τον αβρααμ δευτερον εκ του ουρανου
라틴어Vulgate,15 vocavit autem angelus Domini Abraham secundo de caelo dicens
히브리어구약BHS,15 וַיִּקְרָא מַלְאַךְ יְהוָה אֶל־אַבְרָהָם שֵׁנִית מִן־הַשָּׁמָיִם׃
와요멜 비 니쉬바티 네움 아도나이 키 야안 아쉘 아시타 엩 하다발 하제 웨로 하샄타 엩 빈카 엩 예히데카
개역개정,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새번역,16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말성경,16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 네 아들, 곧 네 외아들을 아끼지 않았으니
가톨릭성경,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영어NIV,16 and said, “I swear by myself, declares the LORD, that because you have done this and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영어NASB,16 and said, “By Myself I have sworn, declares the LORD, because you have done this thing, and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영어MSG,16 “I swear–GOD’s sure word!–because you have gone through with this, and have not refused to give me your son, your dear, dear son,
영어NRSV,16 and said, “By myself I have sworn, says the LORD: Because you have done this, and have not withheld your son, your only son,
헬라어구약Septuagint,16 λεγων κατ’ εμαυτου ωμοσα λεγει κυριος ου εινεκεν εποιησας το ρημα τουτο και ουκ εφεισω του υιου σου του αγαπητου δι’ εμε
라틴어Vulgate,16 per memet ipsum iuravi dicit Dominus quia fecisti rem hanc et non pepercisti filio tuo unigenito
히브리어구약BHS,16 וַיֹּאמֶר בִּי נִשְׁבַּעְתִּי נְאֻם־יְהוָה כִּי יַעַן אֲשֶׁר עָשִׂיתָ אֶת־הַדָּבָר הַזֶּה וְלֹא חָשַׂכְתָּ אֶת־בִּנְךָ אֶת־יְחִידֶךָ׃
성 경: [창22:16]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거듭된 하나님의 축복]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 맹세라는 것은 본래 자기보다 높은 자가 아니면 절대자의 이름을 걸고서 하는 것이 관례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맹세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개 인간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곤 한다(삼상 19:7;왕상 1:30;느 13:25;사 19:18).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그분만이 절대자이시며 지고자(至高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영원한 삶과 존재를 담보로 맹세한 그 약속은 결코 변개(變改)될 수 없으며(삼상 15:29) 또한 가장 엄숙히 시행될 것이다(히 6:13-17).
키 바렠 아바렠카 웨할바 아르베 엩 자르아카 케코크베 핫솨마임 웨카홀 아쉘 알 세파트 하얌 웨이라쉬 자르아카 엩 솨알 오예바우
개역개정,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새번역,17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말성경,17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고 반드시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네 자손이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가톨릭성경,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영어NIV,17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영어NASB,17 indeed I will greatly bless you, and I will greatly multiply your seed as the stars of the heavens, and as the sand which is on the seashore; and your seed shall possess the gate of their enemies.
영어MSG,17 I’ll bless you–oh, how I’ll bless you! And I’ll make sure that your children flourish–like stars in the sky! like sand on the beaches! And your descendants will defeat their enemies.
영어NRSV,17 I will indeed bless you, and I will make your offspring as numerous as the stars of heaven and as the sand that is on the seashore. And your offspring shall possess the gate of their enemies,
헬라어구약Septuagint,17 η μην ευλογων ευλογησω σε και πληθυνων πληθυνω το σπερμα σου ως τους αστερας του ουρανου και ως την αμμον την παρα το χειλος της θαλασσης και κληρονομησει το σπερμα σου τας πολεις των υπεναντιων
라틴어Vulgate,17 benedicam tibi et multiplicabo semen tuum sicut stellas caeli et velut harenam quae est in litore maris possidebit semen tuum portas inimicorum suorum
히브리어구약BHS,17 כִּי־בָרֵךְ אֲבָרֶךְךָ וְהַרְבָּה אַרְבֶּה אֶת־זַרְעֲךָ כְּכֹוכְבֵי הַשָּׁמַיִם וְכַחֹול אֲשֶׁר עַל־שְׂפַת הַיָּם וְיִרַשׁ זַרְעֲךָ אֵת שַׁעַר אֹיְבָיו׃
성 경: [창22:17]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거듭된 하나님의 축복]
하늘의 별과…같게 하리니 – 지난날에 주셨던 언약(13:16;15:5)의 유효성을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재차 보증한 부분이다.
네 씨가…문을 얻으리라 – 문 곧 성문은 성내의 주민들과 성읍의 안녕(安寧)을 지켜 주는 방어물이니 이러한 문을 얻고 열어 젖힌다는 것은 성읍을 점령하였다는 말과 상통한다. 따라서 본절의 일차적 의미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원수를 물리치고 약속된 성읍 가나안을 점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에는 보다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는데 곧 장차 메시야를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 즉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이라는 뜻이다(갈 3:7-9, 14).
웨히트바라쿠 베자르아카 콜 고예 하아레츠 에케브 아쉘 솨마타 베콜리
개역개정,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새번역,18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말성경,18 네가 내 말에 순종했으므로 네 자손을 통해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18 and through your offspring all nations on earth will be blessed, because you have obeyed me.”
영어NASB,18 “And in your seed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because you have obeyed My voice.”
영어MSG,18 All nations on Earth will find themselves blessed through your descendants because you obeyed me.”
영어NRSV,18 and by your offspring shall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gain blessing for themselves, because you have obeyed my voice.”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και ενευλογηθησονται εν τω σπερματι σου παντα τα εθνη της γης ανθ’ ων υπηκουσας της εμης φωνης
라틴어Vulgate,18 et benedicentur in semine tuo omnes gentes terrae quia oboedisti voci meae
히브리어구약BHS,18 וְהִתְבָּרֲכוּ בְזַרְעֲךָ כֹּל גֹּויֵי הָאָרֶץ עֵקֶב אֲשֶׁר שָׁמַעְתָּ בְּקֹלִי׃
성 경: [창22:18]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거듭된 하나님의 축복]
네 씨로 말미암아 – 복의 근원자가 될 특정한 씨, 곧 발꿈치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3:15;갈 3:16).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이로써 그들이 구원의 축복을 얻게되는 것을 뜻한다.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 육신의 번민과 애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인정은 누구든지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간 자이면 다 받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에로 초대해 주실 것이다(마 25:21).
와야솹 아브라함 엘 네아라우 와야쿠무 와예레쿠 야흐다우 엘 베엘 솨바 와예쉡 아브라함 빕엘 솨바
개역개정,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새번역,19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들은 브엘세바 쪽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다.
우리말성경,19 아브라함이 자기 하인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나 다함께 브엘세바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았습니다.
가톨릭성경,19 아브라함은 하인들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함께 브에르 세바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서 살았다.
영어NIV,19 Then Abraham returned to his servants, and they set off together for Beersheba. And Abraham stayed in Beersheba.
영어NASB,19 So Abraham returned to his young men, and they arose and went together to Beersheba; and Abraham lived at Beersheba.
영어MSG,19 Then Abraham went back to his young servants. They got things together and returned to Beersheba. Abraham settled down in Beersheba.
영어NRSV,19 So Abraham returned to his young men, and they arose and went together to Beer-sheba; and Abraham lived at Beer-sheba.
헬라어구약Septuagint,19 απεστραφη δε αβρααμ προς τους παιδας αυτου και ανασταντες επορευθησαν αμα επι το φρεαρ του ορκου και κατωκησεν αβρααμ επι τω φρεατι του ορκου
라틴어Vulgate,19 reversus est Abraham ad pueros suos abieruntque Bersabee simul et habitavit ibi
히브리어구약BHS,19 וַיָּשָׁב אַבְרָהָם אֶל־נְעָרָיו וַיָּקֻמוּ וַיֵּלְכוּ יַחְדָּו אֶל־בְּאֵר שָׁבַע וַיֵּשֶׁב אַבְרָהָם בִּבְאֵר שָׁבַע׃ ף
와예히 아하레 하데바림 하엘레 와육가드 레아브라함 레모르 힌네 야레다 밀카 감 히 바님 레나홀 아히카
개역개정,20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새번역,20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에, 아브라함은 밀가가 자식들을 낳았다는 말을 들었다. 밀가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 사이에서 아들들이 태어났는데,
우리말성경,20 이 일이 있은 후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밀가가 그대의 동생 나홀에게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가톨릭성경,20 이런 일들이 있은 뒤, 밀카도 아브라함의 아우 나호르에게 아들들을 낳아 주었다는 소식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졌다.
영어NIV,20 Some time later Abraham was told, “Milcah is also a mother; she has borne sons to your brother Nahor:
영어NASB,20 Now it came about after these things, that it was told Abraham, saying, “Behold, Milcah also has borne children to your brother Nahor:
영어MSG,20 After all this, Abraham got the news: “Your brother Nahor is a father! Milcah has given him children:
영어NRSV,20 Now after these things it was told Abraham, “Milcah also has borne children, to your brother Nahor:
헬라어구약Septuagint,20 εγενετο δε μετα τα ρηματα ταυτα και ανηγγελη τω αβρααμ λεγοντες ιδου τετοκεν μελχα και αυτη υιους ναχωρ τω αδελφω σου
라틴어Vulgate,20 his itaque gestis nuntiatum est Abraham quod Melcha quoque genuisset filios Nahor fratri suo
히브리어구약BHS,20 וַיְהִי אַחֲרֵי הַדְּבָרִים הָאֵלֶּה וַיֻּגַּד לְאַבְרָהָם לֵאמֹר הִנֵּה יָלְדָה מִלְכָּה גַם־הִוא בָּנִים לְנָחֹור אָחִיךָ׃
성 경: [창22:20,21,22,23,24]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나홀의 계보]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후(11:27-32) 처음으로 접하는 동생 나홀의 근황(近況)이다. 일견 갑작스러운 듯한 본 기사는 24장의 서론격으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가 다름 아닌 나홀 집안의 사람임을 보여 주는데 의의가 있다.
엩 우츠 베코로 웨엩 부즈 아히우 웨엩 케무엘 아비 아람
개역개정,21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새번역,21 맏아들은 우스이고, 그 아래로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우리말성경,21 맏아들 우스와 그 동생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인 그므엘과
가톨릭성경,21 곧 맏아들 우츠, 그의 아우 부즈, 아람의 아버지인 크무엘,
영어NIV,21 Uz the firstborn, Buz his brother, Kemuel (the father of Aram),
영어NASB,21 Uz his first-born and Buz his brother and Kemuel the father of Aram
영어MSG,21 Uz, his firstborn, his brother Buz, Kemuel (he was the father of Aram),
영어NRSV,21 Uz the firstborn, Buz his brother, Kemuel the father of Aram,
헬라어구약Septuagint,21 τον ωξ πρωτοτοκον και τον βαυξ αδελφον αυτου και τον καμουηλ πατερα συρων
라틴어Vulgate,21 Hus primogenitum et Buz fratrem eius Camuhel patrem Syrorum
히브리어구약BHS,21 אֶת־עוּץ בְּכֹרֹו וְאֶת־בּוּז אָחִיו וְאֶת־קְמוּאֵל אֲבִי אֲרָם׃
성 경: [창22:21]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나홀의 계보]
우스 – 본절에 언급된 셈의 손자 우스(10:23)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람의 아비 그므엘 – 아람족의 시조(始祖)는 아니고 다만 그 가계(家系)의 한 조상일 뿐이다.
웨엩 케세드 웨엩 하조 웨엩 필다쉬 웨테 이드라프 웨엩 베투엘
개역개정,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새번역,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과 같은 동생들이 태어났다.
우리말성경,22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 그들입니다.”
가톨릭성경,22 그리고 케셋, 하조, 필다스, 이들랍, 브투엘이다.
영어NIV,22 Kesed, Hazo, Pildash, Jidlaph and Bethuel.”
영어NASB,22 and Chesed and Hazo and Pildash and Jidlaph and Bethuel. ”
영어MSG,22 Kesed, Hazo, Pildash, Jidlaph, and Bethuel.”
영어NRSV,22 Chesed, Hazo, Pildash, Jidlaph, and Bethuel.”
헬라어구약Septuagint,22 και τον χασαδ και τον αζαυ και τον φαλδας και τον ιεδλαφ και τον βαθουηλ
라틴어Vulgate,22 et Chased et Azau Pheldas quoque et Iedlaph
히브리어구약BHS,22 וְאֶת־כֶּשֶׂד וְאֶת־חֲזֹו וְאֶת־פִּלְדָּשׁ וְאֶת־יִדְלָף וְאֵת בְּתוּאֵל׃
성 경: [창22:22]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나홀의 계보]
게셋 – 갈대인의 조상이거나 그 후손인 것 같다. 욥의 재산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갈대인이다(욥 1:17).
브두엘 – 매우 경건했던 자로 훗날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의 아비이다(24:15, 24, 27).
우베투엘 야라드 엩 립카 쉐모나 엘레 야레다 밀카 레나홀 아히 아브라함
개역개정,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새번역,23 브두엘은 리브가의 아버지이다. 이 여덟 형제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과 그 아내 밀가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말성경,23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습니다. 밀가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에게 여덟 아들을 낳았습니다.
가톨릭성경,23 이 브투엘이 레베카를 낳았다. 이 여덟을 밀카가 아브라함의 아우 나호르에게 낳아 주었다.
영어NIV,23 Bethuel became the father of Rebekah. Milcah bore these eight sons to Abraham’s brother Nahor.
영어NASB,23 And Bethuel became the father of Rebekah: these eight Milcah bore to Nahor, Abraham’s brother.
영어MSG,23 (Bethuel was the father of Rebekah.) Milcah gave these eight sons to Nahor, Abraham’s brother.
영어NRSV,23 Bethuel became the father of Rebekah. These eight Milcah bore to Nahor, Abraham’s brother.
헬라어구약Septuagint,23 και βαθουηλ εγεννησεν την ρεβεκκαν οκτω ουτοι υιοι ους ετεκεν μελχα τω ναχωρ τω αδελφω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23 ac Bathuel de quo nata est Rebecca octo istos genuit Melcha Nahor fratri Abraham
히브리어구약BHS,23 וּבְתוּאֵל יָלַד אֶת־רִבְקָה שְׁמֹנָה אֵלֶּה יָלְדָה מִלְכָּה לְנָחֹור אֲחִי אַבְרָהָם׃
성 경: [창22:23]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나홀의 계보]
리브가 – 이삭의 사촌 형제의 딸로서 후에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24:67).
우피라그쇼 우쉐마흐 레우마 와텔레드 감 히 엩 테바흐 웨엩 가함 웨엩 타하쉬 웨엩 마아카
개역개정,24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새번역,24 나홀의 첩 르우마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 등 네 형제를 낳았다.
우리말성경,24 그의 첩의 이름은 르우마였습니다. 그녀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습니다.
가톨릭성경,24 나호르에게는 르우마라는 이름을 가진 소실이 있었는데, 그도 테바, 가함, 타하스, 마아카를 낳았다.
영어NIV,24 His concubine, whose name was Reumah, also had sons: Tebah, Gaham, Tahash and Maacah.
영어NASB,24 And his concubine, whose name was Reumah, also bore Tebah and Gaham and Tahash and Maacah.
영어MSG,24 His concubine, Reumah, gave him four more children: Tebah, Gaham, Tahash, and Maacah.
영어NRSV,24 Moreover, his concubine, whose name was Reumah, bore Tebah, Gaham, Tahash, and Maacah.
헬라어구약Septuagint,24 και η παλλακη αυτου η ονομα ρεημα ετεκεν και αυτη τον ταβεκ και τον γααμ και τον τοχος και τον μωχα
라틴어Vulgate,24 concubina vero illius nomine Roma peperit Tabee et Gaom et Thaas et Maacha
히브리어구약BHS,24 וּפִילַגְשֹׁו וּשְׁמָהּ רְאוּמָה וַתֵּלֶד גַּם־הִוא אֶת־טֶבַח וְאֶת־גַּחַם וְאֶת־תַּחַשׁ וְאֶת־מַעֲכָה׃ ס
성 경: [창22:24]
주제1: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시험]
주제2: [나홀의 계보]
마아가 – 마아갈 족속(신 3:14;수 12:5)의 시조(始祖)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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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창세기 22장
22:1
그 일 후에 – 여기서 ‘일'( , 다바르)이란 문자적으로 ‘말'(言語)을 의미한다(11:1). 따라서 지금까지 주어진 축복 혹은 언약의 통괄 지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건'(롯 3:18)이란 뜻도 지니므로 ‘그 일 후에’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과는 다른 새로운 국면 전개에 대한 머리말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 앞의 사건과 어느 정도의 시간적 격차가 있음을 나타내 주는 문장 연결어로도 볼 수 있다. 이때는 이삭이 번제용 나무를 지고 산을 오를 만큼 충분히 자랐을 때이다(6절).
시험 하시려고 – 성경에 나타난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단에게서 기원한 시험으로(엡 2:2), 인간을 타락케 하는 유혹(temptation)이다 (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으로 성도의 신앙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은 후자의 경우로 그를 믿음의 조상 으로 연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인 생각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하는 순종의 시험이었다.
그를 부르시되 – 일전에 말씀으로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였던 것과 동일한 방식의 계시이다.
아브라함아 하시니 – 명령을 계시하시기 위한 부르심인데 단 한 마디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당시 상황의 긴박성과 긴장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무슨 일이든지 이르는 대로 청종하겠다는 결의에 찬 응답이다(사 6:8). 이는 성도가 항상 준비해 두어야만 하는 대답인데 언제 어느 곳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신의 영적 현주소는 ‘하나넘 앞'(coram Deo)이란 사실을 잊지 않을 때만이 자연스레 나올 수 있다.
22:2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 3중으로 강조된 점층법적 표현이다.즉 (1)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사람(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3) 이스마엘이 떠난후 자신에게 넘은 유일한 혈통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을 최고도로 불러일으켜 절박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자신의 명령에 순종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의 의미가 담겨있다.
모리아 땅 – 당시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브엘세바(21:32-34)에서 사흘 길 거리에 위치한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이다. 한편 ‘모리아'( , 모리야)는 ‘마르에'( )와 ‘예호와'( )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보이신 곳’이란 뜻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곳을 지정하시고 선택하셨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곳 뿐아니라 훗날 솔로몬 성전이 건립될 장소(대하3:1)로 이미 택정해 놓으셨던 것이다.
번제로 드리라 – 인신 제물(人身祭物)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나 신앙으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제(難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1) 이는 피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던 하나님의 속성(9:4-6)과 상치되며(2) 거듭된 약속과 맹세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한 약속의 씨 이삭을 다시 거두어 가려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17:5,6)과는 일견 모순되는 듯하기 때문이다.
22:3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 명령에 순종하기 위한 서두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기쁜 마음으로 명령에 순종했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는 밤잠을 못 이루면서 심한 고통과 갈등을 겪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길은 순종밖에 없고 하나님은 어떠한 식으로든 약속한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실 줄 믿었기에(롬 4:21) 그는 모든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였을 것이다(막 14:36).
번제에 쓸 나무 – 번제(Burnt Sacrifice)는 짐승을 제물로 잡아 죽인후 각을 떠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火祭)이다. 따라서 불을 피우는 데 사용될 나무가 필요하다. 그런데 팔레스틴의 구릉 지대엔 대부분 나무들이 없었기에 번제용 나무를 미리 준비해야 했다. 한편 아브라함의 집에는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각종 짐승과 다른 종들도 있었는데 굳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불에 태워 바치라고 요구하셨으니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서 말하는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벧전 4:12)이었음올 알 수 있다.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 모리아 산까지의 삼일길, 즉 약 80Km 여정(旅程)은 하나님과 인간사이를 이어 주는 헌신과 순종의 길이자 지성소를 향한 속죄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번제로 드려졌듯이(13절) 훗날 이곳에 세워진 솔로몬 성전에서도 역시 인간을 대신한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기 때문이다(대하 5:6).
22:4
제 삼일에 – 지시받은 날(1절)로부터는 나흘째이다. 상징적이긴 하나 이것은 유월절 나흘 전에 미리 양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출 12:3,6)과 일치한다.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지정한 곳으로 아브라함을 인도하셨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때 하나님은 햇빛에 영롱히 반사되는 구름 덩어리를 그곳 모리아 산에 머물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이 쉽게 제단 쌓을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22:5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원어 성경에 의하면 이 문장의 주어는 ‘우리’라는 복수 1인칭이다. 이는 종들을 따돌리기 위한 아브라함의 거짓말로 이해 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몸에서 독자 이삭의 기적적 탄생을 체험한 아브라함(롬 4:18-22)은 비록 지금 이삭이 죽임당하나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날 줄을 믿었다(히 11:17-19)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22:6
이삭에게 지우고 –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 지우신 대속(代贖)사역(사 53:4-6;요 19:17)을 연상시켜 주는 장면으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닌다.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 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이끌고 가는 아브라함의 내적고통은 그를 침묵케 하였을 것이고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표정은 이삭에게 긴장감과 당혹감, 참된 여행 목적에 대한 궁금증 등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22:7
내 아버지여…내 아들아 – 어색한 긴장감과 침묵을 깨는 대화로 부자(父子)간의 끈끈한 정이 넘치는 존경과 애정의 부름과 응답이다.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 이는(1)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가 이미 모세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며(2) 아브라함의 경건 생활과 제사 행위를 통해 이삭이 제사를 드리는 절차와 방법, 필요한 제물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 한편 이 질문은 이러한 사실적 의미 외에도 영적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곧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모든 인류가 안타깝게 부르짖는 공동의 물음이란 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없는 어린양을 죽이고서도 그 ‘어린양’이 어디에 있는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사 1:11-14). 그러나 성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29).
22:8
하나님이…친히 준비하시리라 – 이삭의 질문에 대한 거짓말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전에 이삭을 대신할 다른 제물을 준비해 놓으시겠다고 자신에게 말씀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것은 앞으로 되어질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선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확신에 찬 대답 일 뿐이다(히11:17-19). 이러한 그의 태도는 이전의 몇몇 경솔했던 처신(12:10-20;6:1,2;20:1-18)을 교훈삼아 아브라함이 보다 현명하고 성숙된 신앙인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 준다.
22:9
이삭을 결박하여 – 이로써 이삭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려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혈기 왕성한 이삭은 하려고만 하였다면 노쇠한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였는데 아마 아브라함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작정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스스로를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주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순종(빌 2:8)과 속죄 사역(사 53:5)을 예표한다.
22:10
칼을 잡고 –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순종의 마지막 행위이다. 따라서 이제 이삭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이삭을 죽이지 않더라도 아브라함의 신앙은 입증되었으며 제사의 정신도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살리신 까닭(12절)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비록 이삭은 죽지 않았으나 죽었고, 죽었으나 다시 살아났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페러독스(paradox)이다(마 10:39;16:25;dy 12:15). 한편 여기서도 이삭의 순종은 간과되어선 안 되는데 아브라함의 칼 앞에서 잠잠했던 이삭의 모습은 병정들의 창칼 앞에서 잠잠했던 그긔스도의 모습을 예표해 준다(마 26:47-56).
22:11
여호와의 사자 – 일전에 하갈에게 현현하셨던 분(16:7)과 동일한 성육신(成肉身)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 다급한 반복은 사태의 긴박성과 함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분명히 보여 주기 위함이다. 즉 이삭은 결코 죽임당해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은 약속의 상속자인 이삭을 통해서만 진정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준다(17:5).
22:12
네 손을 대지 말라 – ‘아무 일도 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인정하셨다는 의미로 이제 그에 대한 시험이 끝났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믿음만이 가득 차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시험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음은 그가 제 2위 성자(聖子)하나님이심을 뒷받침해 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 자신이 근본 하나님이면서도 여호와의 사자가 이처럼 하나님을 객관화시켜 이야기 하고있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같이 구별된 위격(位格)이 있음을 시사해 준다.
아노라( , 야다티) – 이는 체험을 통해 전인격적으로 수용한 지식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삭 헌납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온전함을 확인하셨다.
22:13
수양( , 아일)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는 문장( , 엘로힘 이르에 로)의 첫 글자를 모아 만든 단어( )와 우연히 일치하는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물중(物證)이다.
수풀( ,사바크) – 팔레스틴에 흔히 있는 잡목들의 가지가 어지럽게 뒤엉킨 상태를 두고 한말이다(시 74:5).
아들을 대신하여 –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한 수양 뿐 아니라 역사 이래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수없이 죽어간 흠없는 짐승들(출 12:5;29:1레 1:3;민 6:14)은 오로지 흠없는 한 어린양의 영원한 제사, 즉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계시한다(히 9:11-14;13:11,12).
22:14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돌보신다’는 뜻으로 8절에 의거하여 명명한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에 따라 공급해 주시는 분(마 6:25-32)임을 찬양한 기념비적 이름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의 산에서 보게되리라’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던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마련해 둔 수양을 보게 되는 축복을 얻었듯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두신 구원 계획에 우리가 믿고 순종할 때 비로소 온전히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해 준다(요 1:10-12).
22:16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 맹세라는 것은 본래 자기보다 높은 자가 아니면 절대자의 이름을 걸고서 하는 것이 관례이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맹세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개 인간들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곤 한다(삼상 19:7;왕상 1:30;느 13:25;사 19:18). 그런데 하나님께 있어서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그분만이 절대자이시며 지고자(至?者)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자신을 가리켜 맹세할 수 밖에 없는데 자신의 영원한 삶과 존재를 담보로 맹세한 그 약속은 결코 변개(變改)될 수 없으며(삼상 15:29) 또한 가장 엄숙히 시행될 것이다(히 6:13-17).
22:17
하늘의 별과…같게 하리니 – 지난날에 주셨던 언약(13:16;15:5)의 유효성을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재차 보증한 부분이다.
네 씨가…문을 얻으리라 – 문 곧 성문은 성내의 주민들과 성읍의 안녕(安寧)을 지켜 주는 방어물이니 이러한 문을 얻고 열어 젖힌다는 것은 성읍을 점령하였다는 말과 상통한다. 따라서 본절의 일차적 의미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원수를 물리치고 약속된 성읍 가나안을 점령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에는 보다 깊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는데 곧 장차 메시야를 통하여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 즉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할 것이라는 뜻이다(갈 3:7-9,14).
22:18
네 씨로 말미암아 – 복의 근원자가 될 특정한 씨, 곧 발꿈치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3:15;갈 3:16).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고 이로써 그들이 구원의 축복을 얻게되는 것을 뜻한다.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 육신의 번민과 애정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장면이다. 이러한 인정은 누구든지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간 자이면 다 받을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에로 초대해 주실 것이다(마 25:21).
22:20-24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후(11:27-32) 처음으로 접하는 동생 나홀의 근황(近況)이다. 일견 갑작스러운 듯한 본 기사는 24장의 서론격으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가 다름아닌 나홀 집안의 사람임을 보여 주는데 의의가 있다.
22:21
우스 – 본절에 언급된 셈의 손자 우스(10:23)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람의 아비 그므엘 – 아람족의 시조(始祖)는 아니고 다만 그 가계(家系)의 한 조상일 뿐이다.
22:22
게셋 – 갈대인의 조상이거나 그 후손인 것 같다. 욥의 재산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갈대인이다(욥 1:17).
브두엘 – 매우 경건했던 자로 훗날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의 아비이다(24:15,24,27).
22:23
리브가 – 이삭의 사촌 형제의 딸로서 후에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24:67).
22:24
마아가 – 마아갈 족속(신 3:14;수 12:5)의 시조(始祖)로 추정된다.
대망하던 약속의 후손,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넘치는 기쁨을 허락하셨던(21장) 하나님께서 이제 그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제물로 되돌려 줄 것을 명하셨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을 믿음과 이성의 저울대 앞에 세우신 하나님의 거룩한 테스트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예표하는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었다. 결국 믿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을 계기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서서히 지상 가나안에서 하늘 가나안으로 물러나게 되고(23-25장) 구속 역사의 새 주역으로 이삭과 리브가가 등장하게 된다.
한편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친히 약속하시고 선물하셨던 이삭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조용한 갈등과 신속한 행동으로 응답한 아브라함의 초이성적인 순종에 대한 기록이다(1-19절). 아브라함은 절규하는 부성애를 믿음의 힘으로 억제하고 떨리는 손길로 이삭을 제단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을뿐 아니라(12절) 더욱 성숙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히 11:17-19)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깊고 친숙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14절).
둘째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흘의 후손들이 열거되었다(20-24절). 이는 나흘의 가문에 속한 리브가와 라반의 구 딸에게서 언약의 후손인 야곱과 이스라엘 12지파가 나올것을 미리 암시한 것으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어 가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본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이중주(二重奏)가 자아내는 축복과 신뢰와 참 사랑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1. 이삭의 희생을 요구하신 하나님(22:1-19)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믿음의 후손을 번성케 하며 인류 구속의 대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그의 독자 이삭의 희생을 요구 하셨다(1,2절). 이는 얼핏 보기에 ‘많은 민족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17:5)과는 전혀 모순된 것으로서, 평범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되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롬 4:17)로 믿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하였다(3-8절).
신앙의 논리(論理)에는 역설적(paradox)인 데가 많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매우 혹독한 시련을 주시는가 하면(히 12:8),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를 들어 당신의 영광스런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신다(고전 1:27,28). 이것은 분명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다르며 인간이 추구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름을 시사해 준다. 그는 이 신앙의 역설을 확인하기까지 내적인 번민과 몸부림치는 아픔을 감래 해야만 했으나 긴 방황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토록 오래 믿어왔던 하나님을 이제 처음 믿는 사람처럼 순수하고 온전하게 신앙할 수 있었다. 이 신앙을 가지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사를 흠향하시고 기뻐하셨다(9-18절). 즉 하나님은 이삭이 아닌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의 마음을 헌신의 제물로 받으섰던 것이다.
오늘 우리 앞에서 아브라함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역설적인 신앙의 제요소들이 놓여있다. 우리는 그 난제들을 바라볼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신앙의 역설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바로 알때 비로서 해걸될 수 있다. 칼빈(Calvin)의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때 우리 자신을 바로 알며 또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의 해걸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호 6:1-3).
* 모리아와 갈보리. 브엘세바에서 사흘길 떨어진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 시대 이후로부터 다윗과 솔로몬 등으로 이어지며 계속되어온 이스라엘 민족의 주요 예배처소였다(삼하 24:18-25; 대하 3:1). 그런데 이곳에서 일어난 ‘여호와 이레’ 사건은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본문의 모리아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길보리 십자가 희생을 예표하는 사건으로서 구속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일이었다.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대속 제물을 통한 희생 제사였다. 즉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두신 양을 제물로 삼는 것처럼(13절), 우리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 희생 제물이 되셨다(사 53:7; 벧전 1:19). 제물은 흠없
는 수컷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제사 정신과 일치한다(레 1:3). 아낌없고 자발적인 제사였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기꺼이 제물 삼았던 것처럼,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당신의 독생자 예수를 아낌없이 십자가 제물되게 하셨다(요일 4:10).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셨던 제물로 인해 구출된 이삭의 새 생명은 하나님께 희생양이 되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의 부활과 그 부활로 인해 은총을 받은 성도의 새 생명을 예표한다.
* 시험에 대한 이해. 성경에서 말하는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흔히 유혹(temptation)이라 일컫는 것으로, 에덴 동산이래로 인간을 현혹하여 그릇된 길로 이끌고자 하는 사단의 악의적(惡意的)인 시험이다(3:1-6; 마 4:3; 살전 3:5). 사단은 호흡하는 생명체는 무엇이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혹 대상으로 삼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려 한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을 유혹하여 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도덕적으로는 죄악의 올무에 가두어 끝내 그 전인격을 파멸시키려는 목적을 세워두고 있다. 사단의 유혹 전략은 너무도 지능적이고 다양하기 때문에 연약한 본성을 지닌 인간 혼자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가 없다(고후 11:4; 요일 2:16; 약 1:14,15).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유혹으로 부터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매일 매순간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를 되뇌기며 성령님의 선하신 인도를 받도록 해야한다(시
23:3,4).
한편 또 하나의 시험은 당신의 백성을 더욱 성숙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신앙 훈련, 곧 연단(test)이다(출 16:22-25; 20:20; 신 8:16; 욥 23:10).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당했던 시험이 바로 이 같은 성격으로서, 그를 당신의 동역자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적인 테스트였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영육을 보존하시고 발전시키시는 분으로서 그들에게 피할길을 설정해 두시고 연단을 허락하신다(고전 10:13). 그러기에 이 연단을 온전히 감당한 자에게는 영광과 풍성한 삶을, 이 연단을 감당하지 못한 자에게는 자신의 부족을 느끼게 하고 더욱 분발하게 하는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를 맞을 때마다, 그것을 자신을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며 감사함으로 그 상황을 이겨나가야 할 것이다.
2. 나홀로 계보(22:20-24)
성경에 언급된 족보이야기는 단지 과거 인물들의 지루한 이름 나열이 아니라, 구속 역사의 주역이 과연 누구인가를 밝혀 주고 그 주역의 뿌리 깊은 역사성(사실성)을 제공하는 복합적 기능을 가진 축소판 역사 기록이다<창 5:1-5 강해, 성경의 족보들>. 이런 관점에서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후 잊혀져간 그의 형제 나흘의 갑작스런 가문 소개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다. 즉 나흘의 가문은 아브라함 가문과의 근친 결혼으로 아브라함 사후(死後), 하나님과의 언약을 계속 이어나갈 이삭과 야곱등의 언약적 혈통과 연관을 지닌다. 그런면에서 나흘의 가문가운데 리브가와 라반을 낳았던 브두엘은 이 계보의 중추적 인물이 될 수 밖에 없다(24:15,29). 왜냐하면 리브가는 후에 이삭의 아내가 되고, 라반은 야곱의 아내가 된 두 딸(레아와 라헬)을 낳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특히 거룩한 씨앗을 예비, 보전해 두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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