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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
누가복음. 제 1 장. 데오빌로 각하에게.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
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5/20/2021
View: 3268
[개역개정] 누가복음 1장 – 한국컴퓨터선교회
(눅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
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9/6/2021
View: 8758
누가복음 1 | KRV 성경 | YouVersion – Bible.com
누가복음 1 · 6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 7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8/20/2022
View: 1838
누가복음 1 KLB – 존경하는 데오빌로 각하에게 – Bible Gateway
그러나 천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요한’ 이라고 불러라.
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9/2/2022
View: 8022
매일말씀묵상. 2월 14일. 누가복음 1장(1:1~38).
누가복음 1장(1:1~38). 하나님의 은혜가 초래하는 위기. 1.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 사도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의사였습니다(골 4:14).
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2/4/2022
View: 5438
2015/03/09(월) \”누가복음 1:1-25\”/ 작성: 장재령
본문 누가복음 1장 1절~25절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 누가복음이 마태나 마가나 요한의 복음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가가 가진 …
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2/2/2022
View: 9243
누가복음 1장 – 이것이 믿음 – 동행 여정
누가복음 1장 – 이것이 믿음. 김병균 2014. 8. 6. 01:40. (눅 1:37-3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 …
Source: www.thegospelpastor.com
Date Published: 12/21/2021
View: 7567
누가복음 1장 : 네이버 블로그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4/28/2022
View: 5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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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에 보면, 사가랴,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사가랴의 반응은 마리아의 반응과 대조적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1/19/2022
View: 8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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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1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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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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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
데오빌로 각하에게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침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다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예수의 나심을 예고하다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마리아의 찬가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침례 요한의 출생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63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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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매일말씀묵상. 2월 14일. 누가복음 1장(1:1~38).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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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1:1~38). 하나님의 은혜가 초래하는 위기.
1.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 바울 사도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의사였습니다 ( 골 4:14).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친히 목격한 사람이 아니었고 , 성경을 기록한 유일한 이방인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학문적으로 잘 훈련된 이방인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잘 읽혀질 수 있는 복음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누가의 필치나 접근방법은, 그가 역사가적인 저술 능력을 갖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데오빌로라는 특정인물을 위해서 쓰였는데, 각하라는 호칭으로 보아 예수님과 복음에 호감을 가졌거나 복음을 초보 단계에서 배운 로마의 고위 관료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3~4). 누가복음이 기록되기 전, 이미 다른 복음서들, 적어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있었을 것입니다(1~2).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복음에 대해서 배우고 들은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해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4).
2.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전갈이 누가복음 1 장이 전하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5~25). 이 늙은 부부는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였고 두 사람 다 아론의 후손이었습니다 .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고 ,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6). 그러나 이들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했었고, 당시 사회에서 이것은 큰 수치였습니다(25). 이 노부부는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면서도 ‘저들이 진정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라면 왜 아이가 없어?’라는 사람들의 비아냥을 견뎌내야 했을 것입니다.
3. 당시 제사장은 일 년에 두 차례 일주일씩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감당하였는데 , 사가랴의 차례가 왔고 그 중에서도 제비를 뽑아 정하는 성소에서 분향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 분향을 마친 제사장은 성소에서 나올 때 아론의 축복으로 백성을 축복하게 되는데(민 6:24~26), 백성들은 성소 밖에서 자기들을 축복할 제사장을 기다리곤 하였습니다(10). 그런데 분향하던 사가랴는 거기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아들을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그 아들은 나실인과 같이 구별된 존재이며 ,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을 것이며 ,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게 될 사람입니다 (15~17). 사가랴는 자기들처럼 늙은 부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이 그런 영광스러운 택하심을 입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고 증거를 구하는 사가랴에게, 가브리엘은 아이가 날 때까지 사가랴가 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천사의 말대로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임신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합니다(24~25).
4. 두 번째 사건은 늙은 부부가 아니라 , 처녀가 임신을 할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 고지입니다 (26~38). 사가랴에게 소식을 전해주고 6 개월이 지난 후 , 갈릴리 나사렛에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이 찾아왔습니다 . 당시 약혼의 개념인 정혼은, 결혼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졌고, 단지 육체적 접촉만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혼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5.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준 첫 마디는 ‘ 은혜를 받은 자여 ‘ 라는 말이었고 (28,30), 그 은혜는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이었습니다 . 가브리엘은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할 것이며 ,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 다윗의 위를 이을 자이며 ,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릴 것이고 ,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31~33).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은 성령의 능력으로 임신할 것이고 나실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35). 한 증거로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이 늙은 몸으로 임신한 것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말합니다(36~37).
6. 이것은 마리아에게 좋은 소식일까요 ? 나쁜 소식일까요 ?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하실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 하지만 그녀는 정혼한 처녀입니다.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임신한 경우는 율법에 의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일입니다. 복된 소식이지만 ,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하지만 마리아는 믿음으로 그 소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 이 일로 말미암아 일어날 결과는 자기 몫이 아닙니다. 그녀는 가브리엘의 말대로 자기가 은혜를 받은 자임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38). 모든 정황을 생각할 때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까?
7.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 마리아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 때로는 내 삶에 최고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은혜를 받았다면, ”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이 메시아의 탄생은 마리아의 놀라운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하는 백성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 하나님께서는 원치 않는 자에게 올가미를 씌워 일하지 않으십니다 . 부족해도 참 믿음으로 자발적 순종을 하는 자들을 통해 주의 일은 이루어집니다 . 당신은 이러한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 부르심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그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삶에서 곤란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은혜로운 역사에 함께 동참했던 믿음의 사람들처럼, 저희도 주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시대를 거스르고, 때로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5/03/09(월) \”누가복음 1:1-25\”/ 작성: 장재령
본문 누가복음 1장 1절~25절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오늘부터 누가복음을 살펴봅니다. 글에는 글쓴이의 인격이 담겨있습니다. 문장과 구성 뿐만 아니라 사건과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글쓴이의 인격은 글에 투영되기 마련입니다. 누가복음이 마태나 마가나 요한의 복음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누가가 가진 인격의 고유성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흔히 여자와 아이들 곧 사회적으로 소외된자들의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이 실려있습니다. 당대의 상황 속에서 소외되고 약한자들을 눈여겨 보던 누가의 눈길이 그의 글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입니다. 또한 알려져있듯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직업적 의사가 아니라 환자 한 명의 인격과 아픔을 존중하는 의사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어떤 사실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섬세한 자세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한 사람과 한 사건도 단순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과 한 사건이 가진 고유성과 개별성을 미루어 살핌으로, 대상을 보편화하거나 단순화하지 않고자 끊임없이 애씁니다. 이것은 누가가 가진 인격의 독특성 입니다. 그의 복음서가 네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긴 분량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복음은 누가의 인격을 통해 증언된 그리스도의 생애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쓰며 가장 먼저 선택한 이야기 역시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나이 많은 한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신들이 늙었다고 표현하는 사가랴와 엘리사벳(1:18)이 천사를 만나고 세례요한을 잉태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늙은 제사장 부부가 잉태하는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마리아가 예수의 수태를 고지 받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의 잉태후에도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외로운 마리아의 삶을 향한 위로자며 지지자가 됩니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잉태되고 탄생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다른 어느 복음서에도 나오지 않은 세례요한의 출생 이야기를 예수의 출생이야기와 병렬로 배치하여 누가복음 첫 장을 구성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은 어느날 갑자기 광야에서 등장해 주의 길을 예비합니다. 하지만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1:3) 누가의 복음서에는 세례요한의 수태부터 탄생까지의 여정이 가진 고유한 의미를 장장 80절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고 소외된 자들과 근원부터 헤아리는 누가의 세심한 인격을 통해서 그리스도 탄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 복구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가 여럿 있습니다. 출신학교, 직장과 이력, 소유한 재산, 사회적 영향력 등 우리는 이런 요소들이 충족되었을 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표면적 요소라 한다면, 인간을 구성하는 내면적 요소는 바로 인격입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한 사람을 대하는 그의 말과 태도에 담겨있는 인격, 삶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자세에 담겨있는 인격이 인간을 구성하는 내면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표면적인 간구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다듬어지고 성장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인격의 측면입니다. 누가가 의사이거나 명성과 재산을 가져서 누가복음이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은 인격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의 내면적이고 고유한 인격을 하나님이 귀히여기시고 당신의 통로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노부부의 잉태사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제사장이어서 그들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재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의 오래되고 한결같았던 인격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격 안에서라면,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자랄 수 있음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잉태의 은총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가복음은 인간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심을 보게합니다. 우리 신앙의 지향점이 표면적 요소를 넘어 인격을 형성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누가의 고유한 인격을 통해서 누가복음이 쓰였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고유한 인격을 통해서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말과 행동에 담긴 인격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됨을 봅니다. 주님, 저희들이 보이는 것들을 욕망하느라, 보이지 않는 인격을 소홀이 여기는 우를 범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의 신앙이 욕망을 성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격이 자라는 기름진 토양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오니, 오늘도 하나님의 뜻이 담길 수 있는 인격자로 우리를 빚어주옵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본문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십시오.
2) 다른 복음서는 없는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본문에 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잉태를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내 인격은 어떤 모습입니까?
누가복음 1장
(눅 1:37-3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람에게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사가랴와 마리아입니다. 둘 다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둘 다에게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고 천사가 예언합니다. 둘 다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였습니다.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아직 처녀의 몸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와 마리아, 두 사람의 반응이 달랐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사가랴가 말합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8절)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19절)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0절)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가랴가 이것을 위해 기도했었다는 것입니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 처음 한 말이 이렇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3절)
사가랴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 막상 기쁜 소식을 전하니까 믿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상황이 더 말도 안됩니다. 마리아는 아직 처녀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결혼할 정혼자가 있었습니다. 이제 곧 결혼을 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것이라니요?…. 무슨 말을 해야할지…. 정말 말도 안되는…. 기가 막히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말입니다.
천사의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말합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4절)
사가랴의 반응과 같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달랐습니다. 사가랴는 마음에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20절에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소리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냐고…. 그냥 물은 것입니다. 못 믿은 것이 아니라 궁금한 것입니다. 그 정도는 당연하지요…
천사가 설명을 해 줍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말입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37, 38절)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도 안되는 일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도 안되고, 불가능하고, 정말 황당하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고 말씀하시니까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내가 판단하지 않고,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말씀의 가능 여부를 따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말이 되느냐 안되느냐 생각하고 있으면 벌써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들을 믿는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해가 가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라서 그냥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니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못 믿을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것은, 따지는 것은, 못 믿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못 믿는 것입니다.
마리아만큼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도 없을겁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그런 순수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엄청난 일에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통로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믿음’이라는데, 믿는 것이라는데, 그것이 전부라는데, 오직 믿음이라는데, 하나님이 보시는 것,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오직 믿음이라는데, 그것만 있으면 된다는데 말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자동으로 믿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안 주셨잖아요?’ 하면서 버팅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안 믿는 것이 하나님 책임입니까? 하나님이 믿음을 안 주셔서 못 믿는 것입니까?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책임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믿겠습니다’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믿지만 내가 믿은 것이 아닌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 하나님의 은혜 맞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수많은 감동을 주십니다. 많은 말씀을 듣게 하십니다. 주의 사자를 보내어, 천사를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안 믿는 것입니다.
내 책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내 책임입니다.
마리아의 상황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반응이 바로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모두 사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모두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더욱 믿음으로 삽시다.
믿음으로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시다.
오늘도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합니다. 화이팅!!
장석환 목사 블로그
누가복음 1장 누가복음 / 말씀사랑하기 https://blog.naver.com/enjoygod1/20193358897 <좋은 소식을 전한다> 본문/ 눅 1:11-25 2022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까? 성도님들의 가정에 좋은 일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해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큰 자가 되라 1. 오늘 본문은 천사가 사가랴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3) 웅장한 성소 안에서 압도당한 채 분향하던 사가랴는 갑자기 나타난 천사를 보았습니다. 보고 놀랐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더욱 놀라운 좋은 소식을 전하여 줍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 합니다. 1-2.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으면 ‘요한’이라 이름을 지으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세례요한이라 하는데 세례는 별명이고 이름은 요한입니다. 요한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셨다’입니다. 사가랴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더 큰 구원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2-1.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눅 1:14) 요한이 태어남으로 인하여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사가랴는 평생 기다려온 하루가 되어 성소의 분향단 일을 하고 있였습니다. 그것이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태어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2-2. 무엇 때문일까요? 요한은 구원의 시대를 알리는 전파자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소원인 구원자(메시야)가 오시는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소식은 아무리 좋아도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태어나며 전하는 소식은 영원한 소식입니다. 영원히 좋은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좋은 소식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3-1.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15) 요한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라고 말합니다. 새 시대를 알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이 생명을 전하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그는 술 취하여 있을 시간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취해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충만해 있을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성경의 충만함을 받아’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평생 나실인이 될 것입니다. 구별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위대한 천국을 전하는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 3-2. ‘큰 자가 되는 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조차 세속적인 큰 자를 추앙하는 분위기는 바뀌어야 합니다. ‘주 앞에 큰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자입니다. 왜 큰 자일까요?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하여 일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생애를 알 것입니다. 요한은 세속적인 의미로 결코 그렇게 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속의 것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눅 1:16) 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큰 자입니다.
4. 천사가 전하는 좋은 소식을 나는 들었습니까? 우리는 주 앞에서 큰 자입니까? 우리의 2022년 계획에 큰 자가 될 계획이 들어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평생 ‘아와 비아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라는 표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더 돌아가야 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 일에 최선을 다한다면 하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이 2022년에 ‘주 앞에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이루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래야 합니다. 천국의 진행 5-1. 사가랴에게 놀라운 일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사가랴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꿈 같았을 것입니다.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눅 1:18)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라고 말합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에 확실한 증거를 요청하였습니다. 5-2. 사가랴는 의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아마 믿기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좋은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안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지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6-1. 하나님 나라, 영원한 나라, 영광의 나라의 주인으로 오시는 분을 미리 전하는 일을 맡은 요한이 잉태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소식이 너무 놀라워 당사자인 사가랴도 믿기 힘든 소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가랴가 그 주인공이 되어 요한을 낳을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이 오시는 이야기가 이 뒤편에 나옵니다.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전히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였습니다. 매우 기쁜 소식의 주인공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잘 몰랐습니다. 세상은 늘 그렇습니다. 6-2. 이후 2000년이 지나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나라는 힘 있게 그 백성을 호명하며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 열차에 오를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소식으로 듣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 열차에 오르라’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많다고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모릅니다. 7-1. 사가랴의 의심에 하나님께서 작은 징조를 주셨습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눅 1:20) 사가랴가 말을 못하고 들을 수도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잠시 눈이 먼 것같이 행동하는 사가랴를 잠시 세상의 모든 것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일까요? 7-2.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라고 말합니다. ‘보라’는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가랴는 요한이 태어나는 때까지 세상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되는 날까지’는 앞 1절의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말하면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누가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사건을 보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약속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작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아담 이후 약속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을 더욱 보게 될 것입니다. 7-3.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눅 1:24)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잉태를 하고도 그 좋은 소식을 다섯 달 동안 숨겼습니다. 왜 숨겼을까요? 남편이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를 느낀 것일까요?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을 잠시 보류하기로 합니다. 그러면서 그 좋은 소식에 온전히 집중합니다. 8.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이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아기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요한이라는 이름의 뜻)를 알리시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더 놀라운 일입니다. 너무 좋은 소식 이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것을 세상을 향한 청각과 언어 장애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귀와 입을 열고 깊이 인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9. 하나님 나라는 힘있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여 세상에만 귀를 열고 언어가 세상의 언어로 가득하여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불신앙하고 오직 세상 나라에만 관심이 가득하기 때문에 모를 뿐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한다. 천사가 사가랴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게는 아기를 낳지 못하던 그가 아기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크게는 그 아기가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크게 사용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한 가장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쁜 일을 준비하시고 소식을 전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처음에 잘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천국 소식을 가장 필요하면서도 가장 잘 안 듣습니다. 천사가 계속 ‘좋은 소식’이라 말합니다. ‘기쁜 일’이라 말합니다.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이 소식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따분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전하시는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랍고 기쁜 천국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소식을 듣는 것이고 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알림> 누가복음 1:26–38 오늘 본문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1. 천사의 알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탄생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알리셨습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6)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동네의 마리아에게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수 밖에 없는 운명 가운데 살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8)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럴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에 의해 아기를 임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한 아기를 낳게 하실 것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1) 아기의 이름은 헬라어로는 ‘예수스’이고 히브리어와 아람어(당시 일반인들의 언어)로는 ‘예수아’입니다. 헬라어와 아람어로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아’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 또는 ‘여호와가 구원자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주시리니” (눅 1:32)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약속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계가 어떻게 다윗의 혈통이 될까요? 마리아는 부모 중 한 분이 레위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모 중 다른 한 분이 다윗의 혈통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유대인의 법에서 약혼은 오늘날 약혼과는 많이 다릅니다. 약혼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합방만 하지 않을뿐 약혼은 모든 법적인 면에 있어 결혼과 동일합니다. 약혼을 깨면 이혼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마리아의 응답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한 아기를 낳을 것인데 그가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다스실 왕입니다. 모든 내용이 너무 놀랍고 참으로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해도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첫번째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말도 안 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약혼은 하였지만 잠자리는 가진적이 없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에도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이 합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그리고 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시는 것은 가장 필수적인 일입니다. 자신의 죄가 없으셔야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질문에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눅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될 것입니다. 왜 성령으로 잉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성령으로 잉태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사람들을 창조하신 것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령으로 잉태되지 못한다는 것은 성령으로 세상이 창조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모든 생명은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동정녀를 통해 아기를 잉태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천사가 계속 말하였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이루셨습니다.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마리아에게 말씀하심으로 또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8)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더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어떤 방식으로 하실 것이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때 그는 바로 엎드렸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의 귀한 통로가 됩니다.
마리아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이 아기를 임신 할 것이라는 소식에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어느 날 닥친 그 놀라운 소식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엎드리게 되었고 그 만남으로 모든 무지와 의문을 믿음 속으로 던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 할 것입니다. 그에게는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음을 너무 실제적이지 못하게 생각합니다. 관심이 없어 불가지론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어찌 마리아보다 절박한 문제가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우리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마리아도 믿음이 없으면 구원함이 없고 우리도 믿음이 없으면 구원함이 없습니다. 마리아와 우리 사이에는 소명이 다를 뿐 구원받아야 할 절박함에 있어서는 완전히 동일합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을 걸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걸어서라도 믿음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에 의해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더 그것이 나의 실제적인 문제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최소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사건입니다. 먼저 그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것을 은혜로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지 모릅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마리아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바라기는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마리아가 들었던 것처럼 놀라운 소식이요 실제적인 소식으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놀랍고 놀라운 소식이어야 합니다. 깊이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나에게도 놀라운 소식이 되도록. 마리아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소식을 듣고 깨닫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새시대의 여명> 누가복음 1:39–56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입니다.
1. 엘리사벳의 선포 천사의 수태고지를 들은 마리아는 즉시 엘리사벳에게로 갔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눅 1:39) 정확한 지명은 나와 있지 않지만 ‘유다의 한 동네’는 헤브론 이북지역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나사렛에서 최소한 3일 이상의 거리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사촌언니이거나 나이 차이로 볼 때 작은 어머니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먼 거리에 살면서도 서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보면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앞에서 천사를 통해 임신을 하지 못하던 나이 먹은 친척인 엘리사벳이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천사의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 자신의 마음을 나누기 위해 서둘러서 엘리사벳에게 간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와서 인사말을 전할 때 성령충만함을 느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눅 1:41–42) 엘리사벳의 뱃속에 있는 태아가 먼저 반응하였습니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고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아직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새시대의 여명은 그렇게 강하고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고 ‘큰 소리로’ 즉 감격하여 ‘여자 중에 네개 복이 있으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최상급 표현입니다. 마리아가 참으로 복되다는 말입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눅 1:43) ‘내 주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임신하고 있는 아기가 ‘메시야’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새시대는 그렇게 두 여인의 만남으로 조용하지만 강하게 열리고 있었습니다. 아침 태양이 떠오르기 전의 빛인 여명은 그리 밝지는 않습니다. ‘어두운 빛’입니다. 그러나 여명은 강한 아침 빛의 전조입니다. 시작입니다. 새시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새시대가 도래하기 전이라 여전히 힘듭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여명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명을 보고 새시대에 대한 희망을 품고 기다리며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시대는 여명을 보고 준비하는 사람에 의해 열립니다. 2. 마리아의 찬양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선포를 듣고 일말의 의심이 사라지고 찬양으로 바뀌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6–47)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한 것은 참으로 놀랍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기가 메시야라는 사실은 더욱더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천사가 또 한 명의 임신 소식을 전해준 친척 엘리사벳과는 마음이 통할 것 같아 한 걸음에 달려왔습니다. 엘리사벳의 불룩한 배와 말을 통해 그의 수많은 생각이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삼 일이상의 길을 여인의 몸으로 걸어오면서 그는 수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엘리사벳의 선포에서 눈 녹듯 다 해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소리높여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확인과 새시대의 여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께 그는 깊이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처지를 넘어 그가 본 여명이 어떤 빛을 가져오는지를 담은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8) 자신은 참으로 낮은자인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복있다’할 복을 주셨습니다.
마리아의 복은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였기 때문에 얻는 그만의 특별한 복이 아닙니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49–50) 마리아가 하나님의 큰 일의 도구가 되었기에 참으로 복됩니다. 또한 어느 시대의 사람들이든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면 그 또한 동일한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도구가 될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워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믿는 자’로 바꾸어도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복된 사람입니다. 세상의 돈을 무서워하고 명예를 무서워하여 그것에 끌려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믿음의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메시야가 오심으로 새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3–54)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해도 벗어나지 못한 참으로 지독한 아픔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로 태어납니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부자입니다. 그러한 사회 질서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하여야 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한 상황은 사실 결코 정상적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꾸실 것입니다.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새시대를 의미합니다. 새로운 질서입니다. 이전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가장 큰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종 이스라엘’인지 아닌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세상은 이제 믿음이 있는지와 없는자로 나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난은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벗어나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지만 믿음은 누구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부자가 더 안 좋은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세상에 만족하기 떄문에 구원자를 바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보고 있는 새시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가장 어두운 여명속에서 그것을 보고 찬양하고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주님이 오셨고 부활하셨으며 수많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데도 여전히 그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새시대를 갈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아직 아침이 밝아오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빛을 보고 여명속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둠에서 여명을 보고 여명에서 밝은 빛을 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믿음으로 그렇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주님의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빨리 밝은 빛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은 새하늘과 새땅의 여명이 있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새하늘과 새땅의 여명을 보고 그 나라를 준비해야 합니다. 전해야 합니다. 빛을 보십시오. 찬양하십시오.
<소망하는 사람> 누가복음 1:1-25 오늘부터 누가복음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사람으로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을 임신한 이야기입니다. 1.소망이 없는 상황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한 누가는 예수님을 증언한 유명한 사람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합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헤롯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헤롯은 유대인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를 등에 업고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 많이 먹은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집안의 부부였으나 자녀가 없는 상태였고 나이가 많아 자식을 낳을 수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상황은 소망이 없었지만 소망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6절) 그들의 영혼과 삶이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십니다. 물론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더 부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셨고 ‘의인’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의인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들이 소망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말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한 아이를 낳게 되고 그 아이는 하나님께서 ‘요한’이라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요하난’ 곧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스가랴 부부의 상황은 전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자 바뀌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아이를 가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는 이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가 됩니다. 상황에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일은 상황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할 일은 항상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지 못하는 모습을 가지고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 부르실 것입니다. 필요한 경우 상황은 언제라도 바뀝니다. 소망없는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소망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소망없는 상황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더 좋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소망없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없게 됩니다. 소망없는 상황이라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신앙인은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2.소망하는 기도 사가랴가 성전에 들어가 봉사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8-9절) 이 당시 제사장이 18,000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순서를 정하고 그 안에서 제비를 뽑아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한 제사장이 성전에서 봉사할 기회가 평생에 한 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전에서 봉사하는 그 시간을 얼마나 사모하였을까요? 성전에 들어간 사가랴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천사를 보내 말씀하셨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에 사가랴는 깜짝 놀랍니다. ‘믿지 않았다'(20절)고 말합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말씀합니다. 천사는 사가랴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사가랴는 기도하여 놓고도 정작 아들을 낳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은 것으로 나옵니다. 서로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의 가능성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가랴가 젊었을 때 아들을 낳기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을 이제 들어주신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가랴가 기도는 하였지만 정작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주 희박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그의 간구는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기도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에 안나의 기도(2:38)에서 볼 수 있듯이 경건한 사람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태어남은 그 메시야의 오심을 위한 첫단추였기 때문에 메시야의 도래를 위한 사가랴의 기도는 결국 그가 이제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기도는 하지 않았어도 실제로는 기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망하는 기도는 자신도 모르는 위대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위해서는 이제 기도하는 것을 멈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위대한 방식으로 그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위대한 방식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또한 사가랴의 아들이 그 길을 닦는 역할을 합니다. 사가랴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너의 간구를 들으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가랴의 기도에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가랴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그의 경건한 기도,그의 소망하는 기도가 일을 내고 있었습니다. 소망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우리는 사실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담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응답하십니다.
소망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기도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신앙인은 부단히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이 땅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하며 기도하는 한 부부의 작은 기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말씀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놀라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됩니다. 그 놀라운 것이 ‘사가랴의 기도’와 연결됩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요? 오늘날 우리도 소망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상황이 절망스럽다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는 것은 기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결코 상황에 굴종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소망하며 기도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의 믿음> 눅 1:39-56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친척인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1.믿기 어려운 일 처녀인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은 마리아는 매우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성령에 의한 임신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또 한 명의 여인(그녀의 인척이기도 한 엘리사벳)이 노년으로 임신을 하지 못하는데 성령으로 임신한 사실을 천사가 전하여 주었습니다. 이에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그 거리가 매우 먼 거리였으나 마리아는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임하여 말한 천사의 말에 대한 확인하는 차원으로 그 집을 방문하였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에 이끌리어 마리아에게 아주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어찌 된 일인가”(43절)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 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45절) 하나님께서는 처녀가 임신한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을 마리아가 잘 받아들이도록 엘리사벳의 입술을 통하여 마리아에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처녀 임신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놀라운 일에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처녀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나 노년에 임신한 엘리사벳은 둘 다 임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임신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인도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동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어 인도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믿음으로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방식으로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때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임신할 수 없었던 두 여인의 임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랍게 인도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이해라는 한계 안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마리아의 찬가 하나님께서 이 당시의 두 여인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엘리사벳은 사가랴와 더불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바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어떨까요?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6-48절) 마리아는 처녀인 자신을 통하여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낮은자의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구주’가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비천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황이 얼마나 비천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을 구주로 알고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을 찾는 갈급함을 가지고 있었던 같습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53절) 하나님을 향하여 주린자, 곧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이 땅의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자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주린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한 굶주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마리아의 시대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복된 것은 ‘내 주의 어머니’인 것보다 오히려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우상숭배하듯이 숭배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로 믿음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목사라고 믿음이 보장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은 믿음이 자리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낮은 자의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주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이 어느 외적인 조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낮은 자의 마음(낮아져야 그리스도가 주로 오실 수 있습니다)과 간절히 찾는 주린자의 마음(찾아야 그 분이 오십니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겸손히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낮은 자의 마음과 주린자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오.
<아기 요한> 누가복음 1:57-66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이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1.하나님의 긍휼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58절)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았다는 놀라운 사건에 이웃과 친족이 함께 기뻐하며 그 일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기적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시작된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것은 아기가 없던 집에 기적적으로 아기가 있게 되었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긍휼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계획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인데 그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서 아기 요한이 태어난 것이라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일은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무엇이든지 가치 있는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더욱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아기 요한이 태어 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가 원하는 어떤 구체적인 물질이나 소원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탐욕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여 구하는 것을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그 마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잘못구할 위험성 때문에 긍휼을 구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탐욕이 아닌가 염려될 때는 그부분까지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러면서 정직하게 지금 우리가 소원하는 일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는 이것을 하기도 하고 저것을 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열심히 행하면서도 긍휼을 구하십시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도록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합니다. 2.하나님의 은혜 엘리사벳은 아기를 낳았을 때 ‘요한’이라 이름짓기를 원하였습니다. 집안의 선조의 이름을 따라 짓는 경우가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당시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사가랴의 집안에서 매우 생뚱맞은 이름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기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비록 귀머거리요 벙어리였으나 글로 쓰게 하여 그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사가랴도 ‘요한’이라 이름 짓기를 원하였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지어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있던 사가랴에게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아기를 보내주시면서 ‘요한’이라 이름 짓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량 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아기를 주셨고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늦은 나이에 아기를 낳게 된 사가랴 부부을 보면서 놀랐는데, 또한 사가랴가 아기의 이름을 붙여 주면서 그와 동시에 듣게 되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놀랐습니다.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64-65절) 그들은 이러한 놀라운 일을 보면서 두려워할 정도로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더욱더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말 못하고 지내온 10개월 동안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리고 이제 말문이 열리고 나서 무엇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말문이 열렸을 때 한 말을 성경은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모든 일에 ‘요한’ 곧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였음을 직접 자신의 몸으로 느겼습니다. 그래서 되어진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찬양하고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의 찬양이 자신의 고백이 되고 온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가랴처럼 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아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순간 그는 지난 10개월 동안 벙어리로 있었던 모든 불편함을 해소하고도 남는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달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공간에 공기가 있기에 살듯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은혜는 있는 것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것을 깨달을 때만이 그 은혜가 자신의 것이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풍성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십시오. 불쌍한 존재이면서 불쌍하지 않은척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항상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런데 임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를 더 깊이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은혜의 깊이를 깨닫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구원의 이중주> 누가복음 1:67-80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자신의 아들이 태어난 것과 관련하여 성령충만하여 예언한 내용입니다. 1.구원의 뿔 오늘 본문은 거의 사가랴의 예언(68-7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가랴가 성령충만하여 전하는 예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계획에 대한 이중주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죽어가는 백성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부터 시작된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제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69-71절) ‘구원의 뿔’에서 ‘뿔’은 짐승의 뿔이 힘을 상징하는 것처럼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고 언약을 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그 언약을 깨트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언약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72절) 사람들이 먼저 언약을 깨트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깨트림으로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사역의 절정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제 곧 일어날 것입니다. 69절은 세례요한이 태어났을 때이기 때문에 아직 예수님은 태어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라고 과거시제를 사용합니다.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나 확고한 사실이나 사실 자체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은 과거나 현제나 미래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진실입니다.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그것은 은혜의 사역입니다. 특별히 이제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을 더욱더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 사실에 더욱더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타락 이후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겨 구원의 뿔되신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거나 현재나 미래 영원토록 모든 사람의 구원의 뿔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구원얻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준비하는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준비를 위하여 세례요한이 보내졌습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76절) 주의 길 곧 하나님 나라를 통해 구원을 주시는 그 사역을 위한 토대를 만드는 사역을 세례요한이 하게 되었는데요. 세례요한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구원에 필요한 토양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77-78절) 법을 어김으로 인하여 생긴 죄사함을 위해서는 법의 입법자인 분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보통의 법에서는 지은 죄보다 더 많은 것을 배상함으로 죄사함을 받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매우 커서 어떤 것으로도 더 배상하기는 커녕 그만큼도 배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그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임합니다. 뻔뻔한 사람은 자비를 받을 최소한의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그것의 심각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상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한 마음으로 자복하며 죄사함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오는 죄사함을 주십니다.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78-79절) 사람들은 어둠(흑암)과 죽음의 그늘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어둠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개하고 자복할 때 하늘에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돋는 해로 인하여 하늘을 향한 열린 길, 빛이 비추여 생명과 행복이 임하는 평강(에이레네)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어둠 안에서는 또 하나의 어둠일 뿐입니다. 오직 돋는 해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따스한 자비로 인하여만 우리는 평강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기에 회개함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를 준비해야 합니다. 죄를 감추고 있으면 그것이 안에서 왕노릇합니다. 죄를 토해냄으로 우리 안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서 오실 자리가 만들어져야 합니다(물론 이것도 그리스도를 의지해야만 가능합니다). 더욱더 만들어져야 합니다. 구원의 준비사역은 철저히 ‘죄사함을 구하며 회개’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통회하는 마음은 구원을 준비하는 아주 중요한 마음입니다.
세레요한이 태어났을 때 10개월동안 벙어리로 있었던 의인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구원의 이중주를 예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서 구원사역을 준비하는 ‘회개’사역을 그리고 아직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6개월 후에 태어나실)을 바라보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사랑과 손길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의 이중주를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본문:눅 1:5-25 세상에서는 소망 없는 사람이 있고, 소망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소망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 길이 창창한 소망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소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하는 그 소망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엘리사벳을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 말라기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에는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멈추어진 것 같은 암흑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이방 나라인 로마의 속국이면서 로마가 세운 분봉왕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기도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그를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암흑과도 같은 시기에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섬기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이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나이가 많음(7절)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부끄러움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섬기고 있는데 자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커다란 아킬레스건이었을 것입니다.
사가랴에게 천사가 와서 아주 놀랄 만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잉태하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있었지만(13절) 그러나 그 일이 이제는 그들의 나이 때문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사가랴는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의 그 작은 불신앙은 세례요한의 이름을 짓기 전까지 벙어리로 살아야 하는 작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기도하던 당사자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이 땅의 죄악을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6개월 전 하나님은 그 길을 예비할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를 들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기에 , 사람들에게 무시받던 한 부부를 들어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의 신실함을 하나님께서 기뻐 사용하신 것입니다. 저는 400년동안 사가랴 부부만 신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도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실한 부부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신실한 부부들 중에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를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큰 자가 아니라 신실한 자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어두컴컴한 시대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전의 엘리사벳 부부처럼 신실하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사용하시고자 하실 때 신실하게 사용되어질 수 있는 그런 신실한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당신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야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13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시며 세례요한을 잉태할 사람을 찾으셨을 때 그 분의 그 거룩한 눈에 사가랴가 보였습니다. 사가랴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가랴의 기도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가랴 부부를 세례요한을 낳을 부부로 선택하셨습니다. 사가랴 부부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가랴 부부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렸습니다. 희망이 끊기고, 무의미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이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사가랴 부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을 잉태 하기 전 사가랴 부부는 불임부부로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이도 많아서 희망도 없어 보였습니다.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희망이 끊신 그 상태와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가랴 부부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희망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희망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희망없는 것 같은 사가랴 부부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오늘날 잘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왜 우리가 줄을 잘못섰는지 한탄 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죽었다 깨어도 저렇게 잘 살게 되지는 못하겠구나”라는 한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그들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보낼 곳을 찾았을 때 사가랴 부부가 가장 적합하였습니다. 사가랴 부부가 하나님의 희망이었습니다. 그것처럼 오늘날에도 어쩌면 너무 잘 나가서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찾고 있는 당신 안에 희망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을 신실하게 살고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때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때를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는 것은 오늘 신실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신실하지 않으면서 희망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가랴의 경우처럼 시대가 어둡고, 나의 개인적 상황이 어두워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보고 기도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주> 24절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왜 숨어 있었을까요? ‘숨음’보다는 ‘은둔’이 더 적합합니다. 아마 따로 떨어져서 경건하게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준비된 자> QT-본문:눅1:18-25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사가랴는 가브리엘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여서 아기가 출생하는 때까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가랴는 왜 믿지 못했을까요?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라 자식을 낳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했겠지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김치국물을 먼저 마시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결국 나이가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을 때가 되도록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슬펐겠지요.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자식을 낳게 된다고 이야기 하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믿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가 자식을 낳기 전까지의 상황을 추축해 보지요. 그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많은 제사장들은 자식을 낳고 좋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가랴의 집을 불쌍히 여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후의 입장에서 다시금 그 당시의 사가랴를 보시지요. 진짜 사가랴가 불쌍한가요? 아닙니다. 다른 제사장들의 그 많은 자녀들의 이름은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후에 낳을 사가랴의 아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놀라운 사역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단편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편적 사고에 상처를 받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가랴의 경우는 자식을 낳는 때를 자신이 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시기에 낳지 못하자 자식을 낳지 못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지요. 우리가 때를 함부로 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지요? 그렇다면 그 때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요. 상황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중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한 가지 조건일 뿐이지요. 그런데 사가랴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자신의 육적 조건을 전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적 사고요 유아적 사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아적 사고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준비된 자를 사용하심 사가랴와 그 아내 엘리사벳은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심적 고통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부끄러움도 컸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힘듬속에서도 부지런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사가랴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에 불신앙으로 응답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에 준비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요한의 부모로서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준비된 자.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 나라에 실업률이 최고로 달했을 때 우연히 신문에서 엉뚱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일꾼이 없다는 것입니다. 취직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일자리가 없는 것 같지만 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항상 일꾼이 없습니다. 마땅한 일꾼. 회사를 짊어지고 미래를 만들어갈 일꾼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바로 현장에 투입할 일꾼이 없어 한탄해 합니다. 지금 목회자들이 넘치고 있습니다. 목회자 실업률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임목회자가 없는 교회도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마땅한 목회자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준비된 자가 되십시요.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수 있도록 준비된 자가 되십시요. 오늘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일을 바라보고 묵묵히 준비하며 오늘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때가 차매 그리스도가 오시기 6개월 전에 준비된 자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오신 것처럼 주님의 때에 우리가 아름답게 사용되어지도록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준비된 자는 필연코 사용되어 집니다. 인재를 썩히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그 일에 준비된 자가 되십시요.
나는 주의 종입니다 본문:눅 1:26-38 ‘나는 주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종은 주인이 뭐라 말을 하든 그대로 따라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이 종됨을 너무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가능케 한 마리아의 소중한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을 들여다보며 오늘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니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31절)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처음 듣던 마리아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말씀대로 된다면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소리는 마리아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소리였습니다. 아주 큰 위험입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32-33절) 아주 놀라운 약속입니다. 메시야 약속이 성취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별볼일 없는 연약한 마리아가 낳을 아들이 큰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윗의 위를 이어 영원한 왕이 될 것이라는 메시야의 약속은 참으로 엄청난 약속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무엇입니까? 현실은 여전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처녀인 자신이 아기를 낳는다는 현실이 어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겠습니까? 혼자 사는 것도 아닙니다. 마리아 주변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현실은 위험합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마리아는 요셉과의 정혼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것입니다. 큰 어려움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큰 은혜와 동의어 일 때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이 큰 어려움을 잘 이겨냄으로 큰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큰 어려움이 생겼을 때 두려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여전히 내 안에 자아가 더 강하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큰 어려움이 생겼을 때 진정 우리가 들어야 하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내 안의 자아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님의 소리입니다. 큰 어려움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자아가 소리지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따라야 한다는 성령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38절)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그 막중한 임무가 천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리아에게 처녀인 그녀의 몸을 통해 예수님이 태어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찌 제대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인들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의외로 이것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마리아의 순종하는 믿음 때문입니다. 순전한 고백 때문입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고백입니까? “나는 주의 종인데 어찌 종이 뭐라고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순종하겠나이다.” 우리도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런 고백을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해 되든 이해가 가지 않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리아의 순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였습니다. 우리 구원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순종이 마리아에게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순종은 마리아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순종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주여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그것이 나에게는 큰 위험이라 하여도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고백하십시오. “나는 주의 종입니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이 고백이 우리의 일상속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또 실현되도록 기도하십시오. 이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바로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이라는 위대한 진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순종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루어지기 위한 시작이었으니 우리안에 이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이러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오늘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 문제에 “나는 주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을 담으십시오.
<믿음의 두 여인> 본문/ 눅 1:39-56 오늘 본문에는 믿음으로 이긴 두 여인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이김으로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커집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이기기를 소원하며 이 두 여인의 믿음의 여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엘리사벳의 고백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이르렀을 때 엘리사벳의 복중의 아기가 뛰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엘리사벳은 더욱더 성령충만해졌습니다. 조금은 더욱더 특별한 성령충만함이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놀라운 고백을 서슴없이 하게 됩니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43절) 한참 나이가 어린 인척 동생이요 아가씨인 마리아를 보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성령충만하여(41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은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하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충만하여 그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우리도 성령충만해야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인간적인 한계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추진하던 일이 안 되었을 때 방황합니다. 인생이 끝난 것같이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별일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울고 또 울며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상황의 한계, 지식의 한계, 감정의 한계가 많은 인간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는 피눈물을 흘릴 일이지만 성령충만하여 조금더 크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일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여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충만이 아니고는 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충만하면 그런 인간적인 한계를 이기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하여 그가 이해할 수 없었던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을 성령충만함으로 이겨야 합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성령충만함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이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마리아의 고백 엘리사벳의 고백에 마리아는 찬양으로 응답합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루는도다”(50절)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52-53절)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자, 두려워하는 자, 주린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고백을 통해 그녀의 삶을 유추해 보십시오. 그녀의 삶이 결코 그렇게 평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한 여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삶을 거의 알지 못하지만 오늘날의 한 사람이 한 인생을 살면서 겪는 많은 아픔이 있듯이 그녀도 그런 일을 겪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의 여정속에서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결하게 신앙여정의 길을 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 여정이 쉬운 사람이 있을까요? 겉으로 보아서는 모든 사람이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과 이야기 해 보십시오. 그 누구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뿌리깊은 죄를 벗어버리고 하늘길을 간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달리기를 할 때 “헉헉” 숨이 차듯이 숨이 차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도님들이 바쁜 생활속에서도 예배에 참석하고 구역예배까지 참석하는 것이 때로는 안쓰럽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힘들어도 순결하게 자신의 신앙여정을 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것을 위해 있기 때문입니다. 안락은 천국에서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안락하려고 하다가는 사탄에게 잡혀 먹힙니다.
마리아의 힘겹지만 순결하게 가고자 하는 그 신앙여정이 그녀의 믿음을 단단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라는 영예까지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신앙여정을 잘 가고 있습니까? 비천하다고 생각하여 멈추어 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한발자국이라도 앞으로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길을 간 두 여인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두 여인의 간 그 믿음의 길은 동일하게 우리 앞에도 놓여있습니다. 우리도 성령충만하여야만 이길 수 있는 문제가 있고, 또한 헉헉거리면서 세상 사람들 속에서 비천함을 느끼면서도 믿음을 기키며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을 갈 때 우리는 천국에서 웃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차이는 별 것 아닙니다 본문: 눅 1:39-56 세상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세상에 60억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윗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가슴아파 하고, 아래 있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교만해하기도 합니다. 그처럼 차이가 많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합니까? 차별이 있습니다 세상의 차이가 차별을 낳았습니다. 오늘날은 인종차별은 없어도 인간차별이 있습니다. 그 차별은 인종차별보다 더 뿌리깊은 차별인 것 같습니다. 권세 있는 사람과 권세 없는 사람. 돈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 차이는 사람들을 완전 계급화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계급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이 차별을 더욱더 느끼게하기까지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많은 지역이 추운 겨울에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때는 가난한 사람은 더욱더 가난을 느끼고, 부자는 부자의 여유를 느낍니다. 크리스마스 때 주는 선물은 더욱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백화점에 걸린 물건들을 보면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니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 마리아가 살던 시대에 그녀도 차별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힘없고 보잘 것 없던 그녀에게 세상은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여성이었던 그녀에게 세상은 많은 차별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하였습니다. 이 차별은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합니다. 이 차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까? 이것 때문에 인생은 절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리아가 들었던 그 차별 철폐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차별의 소리를 누를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세상에 차별이 없음을 선언합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이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6-48절) 마리아가 웃고 있습니다. 그 동안은 세상의 차별 때문에 속상한 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리아가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녀는 이제 조금씩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 마리아는 비밀을 더욱더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통해 마리아는 중요한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마리아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녀가 차별받던 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하였기 때문이거나 돈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복된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보잘 것 없는 한 여인의 배를 통해 오심으로 세상에서 무시 받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은 한 여인이 실제로는 얼마나 존귀한지를 가장 직접적이고 사실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느끼고 있던 그 비천함은 실제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비천한 자의 배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케 하심으로 모든 세상의 비천하게 느끼는 자들이 실재로는 존귀한 사람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직접 인기 없고, 돈 없고, 명예없는 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 세상의 차별을 무색케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은 선물이 아니라 이 땅의 차별을 철폐하는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가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왕가가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잉태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차별은 무색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차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큰 장벽처럼 느껴지지만 크리스마스 안에서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표시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세상의 차이와 차별에 대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오.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사실과 의미를 안다면 어느 누구도 더 많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차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이 당신을 차별한다 해도 그것에 기죽지 마십시오. 누가 뭐라해도 크리스마스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세상의 차이에 가슴아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크리스마스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인해 가슴아파합시다.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본문/ 눅 1:57-66 위대한 일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요? 세례요한의 부모였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우리는 위대한 일이 일어난 배경을 볼 수 있습니다.
1.벙어리 사가랴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말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10개월째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사람들의 눈총 또한 얼마나 매서웠을까요?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나서 말을 못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입방아는 좀 찧었겠습니까? 사가랴는 왜 그토록 큰 시련을 당하여야 했을까요? 물론 그가 벙어라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리라 하더라”(1:20) 그러나 이것이 그토록 큰 죄입니까? 만약 이것이 진짜 그렇게 큰 죄라면 세상은 온통 벙어리로 가득할 것입니다.
세상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다면 믿음에도 분명 그러한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더욱더 믿음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사가랴도 말한 번 잘못하고 벙어리 10개월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벙어리 10개월을 보낼 때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10개월을 더 깊이 훈련하는 시기가 되게 해야 합니다. 벙어리로 10개월을 살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요? 완전히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사가랴는 세례요한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위대한 일을 위해 더 가혹하게 준비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사가랴는 10개월을 묵묵히 준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아들을 낳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요한”이라 이름 짓도록 합니다.
벙어리 10개월의 세월을 보내본적이 있습니까? 그때 잘 처리하였습니까? 아니면 마치 마지막 하루를 이기지 못하고 발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발설하여 물거품이 되게 만든 이야기들처럼 그렇게 참지 못하고 불평하였습니까? 깊은 인고의 과정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잘 보내야 합니다.
2.위대한 일 사가랴가 겪는 이런 아픔과 고통은 세례요한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낳는 배경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사자인 사가랴도 몰랐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은 더욱더 몰랐겠지요. 몰라서 사람들은 벙어리 사가랴를 보면서 벌 받았다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사가랴 자신도 엄청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을 어찌 다른 사람이 상상 할 수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위대한 일 뒤에는 그렇게 깊고 깊은 아픔이 있습니다. 세상의 조금 큰 일을 위해서도 많은 준비와 훈련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영적인 큰 일이 저절로 되겠습니까? 아주 큰 아픔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픔이 크면 그만큼 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아픔이 큽니까? 진짜 죽겠습니까? 그렇다면 더 큰 일이 일어날 징조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겪고 있든 그곳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의 결말은 분명히 좋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기만 하면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결말은 분명히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픔이 크면클수록 더 위대한 일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묵묵히 훈련에 임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에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아픔이 많은 자라야 할 것입니다. 아픔만큼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커진다는 것은 아픔을 이기는 능력이 커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위대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고난 회피증이라는 우리의 중병으로 인해 도무지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견디지를 못하니 하나님도 고난을 주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맵집 좀 키웁시다. 그래서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왜 즐거워 하는가?> QT-본문:눅1:57-66 나는 오늘 왜 즐거워 하는가? 자식이 없이 대가 끊긴 줄 았았던 집에 아들이 태어 났습니다. 이로 인해 큰 기쁨이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기쁨이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축하하는 기쁨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이제는 새로운 기쁨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왜 기뻐하고 있습니까? 그들도 전에는 아들을 원했습니다. 아들을 낳는다면 참으로 기뻐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들을 낳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이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되어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기쁨을 알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들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어떤일이 이루어지면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일 자체보다도 그 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면 더욱더 기쁨이 큽니다. 이 기쁨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웃을 때 웃고, 세상이 울을 때 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 감정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들이 세상과 똑같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히 우리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똑같이 울고 웃는 다면 우리가 그들의 세계관과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산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이 웃을 때 울수도 있고, 세상이 울 때 웃을 수도 있어야 우리가 그들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과 같이 웃을 때도 그 이유가 다른 것이지요. 그 기쁨의 깊이가 다른 것이지요. 우리가 웃어야 할 때를 알고 울어야 할 때를 알기를 바랍니다. 어떤 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인도하심을 보며 기뻐하는 그 충만한 기쁨을 알기를 바랍니다. 이름 짓기 사가랴와 엘레사벳이 아들을 낳았을 떄 사람들은 그 아들의 이름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할까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은 요한이라해야 한다고 하였지요. 그러자 그 집안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생아의 이름을 지을 때 최소한 그 집안 친척중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야 하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인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은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는 그 아버지 사가랴에게 당신은 어떻게 이름짓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가랴도 요한이라 이름 짓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지요? 천사가 와서 그렇게 가르쳐 주었거든요.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의 이름도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먼저 지어주었지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시몬이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기도 합니다. 전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이지요. 사람이 바뀌면 될 것인데 왜 그렇게 이름까지도 바꾸고 이름을 지어주고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름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하나의 기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름은 기호가 아닙니다.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학교라는 것이 병원과 틀린 것은 학교라는 이름에 학교의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정체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름을 지을 때 신중해야 합니다. 자식을 낳았을 때 어떻게 이름을 지어야 하는 지요?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최악입니다. 왜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짓는지요? 집안의 어른, 할아버지가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부모가 짓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 부모에게 하나님이 주신 자녀이기에 그 자식의 앞날에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가 지어야지요. 이 자식을 앞으로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그 자녀의 정체성에 가장 맞는 이름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신중하게 지어야지요. 그 아이는 평생 이제 그 이름을 들으며 자랄 것이기에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바뀝니다. 이름을 짓는 것이 소중한 것은 그만큼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미신적으로 이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듣느냐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좋은 말을 하십시요. 좋은 소리를 들으십시요.
<성령충만> QT-본문:눅1:67-80 사가랴의 성령충만 사가랴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의 성령충만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됨을 더욱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있었던 일로 그의 예언은 (일반 사람이 볼 때)조작 가능성이 더 적기 때문에 더더욱더 그리스도의 메시야 됨을 풍성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가랴가 성령충만하여 그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은 더더욱 더 성령충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한 순간에 많은 것들이 변하고 한가지 선택으로 인생이 크게 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성령충만하여 선택하여야 합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충만하게 거하여 성령이 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과 성숙(성화)은 조금 다릅니다. 성숙함은 지속적인 것이고 시간이 필요한 것이며 단계적인데 반하여 성령충만함은 일시적이고 갑작스러우며 초시간적인 것으로서 언제든지 성령충만할 수 있습니다.
성숙에는 항상 자신의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성숙한 사람(예수님의 주인되심이 많이 확장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그 한계 안에서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자신에 의해 한계지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 순간 강권적으로 붙잡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어떤 특별한 사역을 위해 성령충만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충만함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떄 성령충만함을 구하십시요. 또한 성령충만이 이어지면서 우리의 신앙이 한결 더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성령충만함은 우리가 항상 부족하며 이 세상이 악하기에 더욱더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여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더욱더 행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가랴가 성령충만하여 놀라운 사실을 예언하는 것 처럼 우리도 성령충만하여 오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여 이루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요한의 특별코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소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금욕주의적 생활을 하도록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금욕주의적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지요? 그 분은 왕과 신랑으로서 오신 분입니다. 그 분은 그 자신이 그 길이셨으며, 잔치를 베푸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그것이 나의 길이 아니라면 좋은 길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그의 인기를 발판으로 그 당시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대제사장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좋은 길인가요?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길이 아니기에 좋은 길이 아니라 불행이지요.
우리는 철부지일 때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계관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의 길을 모르겠는지요? 그렇다면 오늘에 충실하십시요. 오늘에 충실하다 보면 나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아름다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며 행복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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