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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1권(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1장 :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
그 연결의 본질
기독교 영원한 고전 ‘기독교 강요’를 바쁘신 성도님들께서 간편하게 접할 수 있도록 할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였습니다.
부족한 영상이지만 유익한 공부가 되시길 바라며, 응원의 댓글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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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 기독교강요 전체 – gms일본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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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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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공간 – 기독교 강요 – 명성교회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마 24:13). 12.진정한 믿음과 거짓된 믿음. 요약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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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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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년)에 나타난 – 개혁주의 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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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화 기독교 강요(1-2권합본) – 다음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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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사상, 그리고 <<기독교 강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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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서론(Introduction) – 성서서원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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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 PDF – Scri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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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cribd.com
Date Published: 8/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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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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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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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다면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출판사의 기독교 강요(최종판-원광연 역)를 사서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기독교강요 요약(이형기 역)도 권장합니다.
기독교강요는 성경과 더불어 계속 읽기를 권합니다.(자료제출자 서정복)
기독교 강요 (전 4권)
인 쇄 : 2000년 4월 24일
발 행 : 2000년 5월 10일
저 자 : 죤·칼빈
역 자 : 김 충 호
발행인 : 송 준 식
발행처 : 한국출판사
주 소 :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98-9(2층)
등 록 : 1996년 6월 3일 제6-0439호
전 화 : (02)926-6986
팩 스 : (02)926-6987
<제목 차례>
추천의 말 1
역자서문 2
서론 3
약어표 35
독자에게 드리는 글 -1559년 37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39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58
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 58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슨 목적에 이르게 되는가? 61
제 3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 64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67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71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서 필요하다 86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90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96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다. 106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진실하신 하나님만을 정립하신다. 109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12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127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131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165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184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195
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207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 222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1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1
제 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11
제 3 장 저주받을 짓은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한다 38
제 4 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54
제 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60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 80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86
제 8 장 도덕적 율법에 대한 설명(십계명) 101
제 9 장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마침내 복음을 통해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145
제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149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165
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176
제 13 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184
제 14 장 중보자의 두 본질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190
제 15 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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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지식론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으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제 5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성경의 이해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제 8 장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증거들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면된다 제 9 장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모든 실들과 대조하고 있다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예수님의 신성이 핵심]는 것을 가르친다 창조 제 14 장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함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명백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 섭리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제 17 장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사용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더러움에서 순결을 유지하신다
제 1권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1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이 되어 있는가?
1.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드러내 준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유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자기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경험하지 않고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없다. 우리에게는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 조건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유익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종교 혹은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등 모든 것을 인식하지 전에는 결단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은 한 진정으로 그리고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허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것이 신앙이다.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내포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제 3 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1. 이 자연적 은사의 특징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인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사실 우상 숭배에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라 하겠다.
2. 종교[경건, 예배]는 임의의 발명품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자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란다[렘 26:36].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3. 실제적인 불신앙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이 새겨져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동경하게 된다.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으로는 무지, 부분적으로는 악의로 말미암아 질식 혹은 부패되었다
1. 미신
자신이 받은 종교의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키우고 있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그것을 무르익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시 1:3) 어떤 사람은 미신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다 (롬 1:22).
2.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생래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제시되었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긱에서 물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어지지 않는다.
3. 우리는 자신의 망상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든 자기 자신의 망상에 예배하며 찬양한다. 진리와 일치하지 않은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4. 위선
적어도 강요당하지 않은 한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자발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심판을 피할수 없기 때문에 혐오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일단 절망이 엄습해 오면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와 그 계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1.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명백하기 때문에 어떠한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다
복된 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 (요 17:3).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둔한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2. 하나님의 지혜는 온 인류에게 제시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을 깨닫게 마련이다. 인체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3. 인간은 신적 지혜의 최상의 증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먹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이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은 배은 망덕하게 하나님을 대항한다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일백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가?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
분명이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실로 우리가 받는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악(邪惡)을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안 계시는가?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상적인 신격[우주 정신]을 고안하고 있다.
6. 창조주는 자신의 주 되심을 창조에서 계시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 질 수가 없을 것이다.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자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은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8.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생활을 지배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조절하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머리로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하신 일을 보고 숙고해야 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면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건전한 것이 되며 결실을 맺는 지식이다. 또한 하나님은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을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10.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에 소망을 갖도록 각성시키며 용기를 복돋아 주어야 한다.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에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매우 확실히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11-12]11. 창조에는 하나님의 증거가 나타나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뚜렷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되었다
지혜가 뛰어나면 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잘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명료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다만 혼란의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예배하게 된다.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13-15]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행위를 거절하신다
순수한 종교를 부패케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 빠지게 된다)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 (요 4:22)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아니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정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둔감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지식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산을 치켜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에서뿐이다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더 첨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시기 위하여 무언의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닌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하나님이 거짓된 한 무리의 신군으로 신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
3. 성경을 떠나면 오류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신속하게 달린다 하더라도 그 진로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의 실로 인도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과 같은 것이라고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지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성경은 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다.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이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들 (요 4:22)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증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확립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악랄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슴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2. 교회의 기초는 성경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3. 어그스틴의 말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 없다.
어그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에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 강하다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음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다.
5. 성경은 자증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자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나왔다는 사실을 단정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인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까지는 그들을 일반대중이라는 말로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하나님의 비밀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할 수 없다(마 13:11).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성 그리고 고전성, 1-4]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다
성경은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의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인간이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2. 결정적인 것은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다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이가를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헐뜯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3. 성경의 고전성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희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4. 모세의 예증이 보여 주는 성경의 진실성
모세는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사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 않은 그였다.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아들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이적과 예언에 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에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한 교리에 대한 확증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6. 모세의 이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어떤 마술이 백성들이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모세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 창 49: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한 증거다.
8.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들을 성취하였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 왔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되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 또한 들의 해방에 대해서도 동시에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가까지는 100년 이상 경과 하였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9. 율법의 전승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적적으로 보존되었다. 손에서 손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10.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이적적으로 보존하셨다
우리는 주께서 오히려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자.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 그것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이다.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다.
11.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天的) 특성 및 그 권위
세 사람의 복음서 저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평범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천적인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강론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성경이 공포된 이후 장구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많은 성도들이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며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데 변호되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이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다.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 9 장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2. 성령은 성경에 의해 인정된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지적하기 위해서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모든 실들과 대조하고 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 숭배는 더욱 핑계할 수 없다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그리고 우상을 세우는 자는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예배에서의 형상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1. 하나님은 가시적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2. 하나님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3. 신적 임재의 직접적인 표징도 형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4. 형상과 화상은 다같이 성경과 반대된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본박함, 5-7]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6. 교회의 교리도 우상에 대하여 달리 판단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과 에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8. 형상의 기원: 유형적인 신격에 대한 인간의 욕구
9. 형상물의 사용은 마침내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다
10. 교회에서의 형상물 예배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12. 예술의 기능과 한게
13. 교리가 순수하고 건전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을 거절하였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무서운 주장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하나님만이 완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종교는 우리를 유일하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
2. 차이점 없는 구별
3. 형상 예배는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래로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예수님의 신성이 핵심]는 것을 가르친다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1.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3. 삼위일체와 위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 도움을 주는 말이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의미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7. 말씀의 신격
8. 말씀의 영원성
9. 구약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10. 영원하신 하나님의 천사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사도들의 증거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성령의 영원한 신격 14-15]14. 성령의 신성은 그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15. 성령의 신격에 대한 명백한 증거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16.하나님의 하나되심
17. 삼위
18.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차이점
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
20. 삼위일체 하나님
[반 삼위이레 이단에 대한 논박 21-29]21. 모든 이단의 근거: 모두에 대한 경고
22. 세르베투스의 반 삼위일체론
23.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성부만 지칭한 것이 아니다
25. 삼위는 공통적으로 신성을 소유한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예속된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28. 터둘리안을 인용하는 것 또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29. 교회의 인정을 받은 학자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
제 14 장
우주와 만물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함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명백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1.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참뜻을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2. 6일간의 사역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 준다
[천사 3-12]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사변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 내야 한다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6. 신자의 보호자이며 조력자인 천사
7. 수호 천사들
8. 천사의 계급과 수와 모양
9. 천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속하지 않는다
11.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사용하시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신다
12. 천사는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13. 성경은 우리를 무장시켜 원수와 맞서게 한다
14. 사악의 영역
15. 화해할 수 없는 싸움
16. 마귀는 타락한 피조물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하에 힜다
18. 승리의 확신
19. 마귀는 어떤 사상이 아니라 실재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20.창조의 위대함과 부요함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숙고할 때 절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신뢰가 우러난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1. 하나님은 인간을 순결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2. 육체와 영혼의상이점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4. 하나님의 형상의 참 성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영혼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 아담의 타락에 비추어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8]6. 영혼과 그 기능
7. 근본적 기능으로서의 오성[지성]과 의지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는 철학자들의 견해와는 상반된다 1-4]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2.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3.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만사를 지배하신다
4. 섭리의 성질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에 대한 교리 5-7]5. 하나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6.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발생 사건들도 조정한다
[운명 우연 우발성 8-9]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이 아니다
9.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감추어져 있다
제 17 장
섭리 교리에 대한 올바른 적용은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과거와 미래에 관계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설명 1-5]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2.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관찰해야 한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4.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숙고와 조화된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편에 대한 명상: 섭리를 인지할 때 오는 복: 6-11]6. 신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7. 하나님 섭리의 유효성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9. 중간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우리는 비참한 존재이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반대자들에 대한 답변 12-14]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고려하여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단호하게 실행하신다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사용하시며 저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모든 더러움에서 순결을 유지하신다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2.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일을 추진하시는가
3. 하나님의 의지는 단일하다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불경자의 행위를 사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인죄론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겨졌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원죄론 제 2 장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제 3 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 제 4 장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제 5 장 자유 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 성경론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한다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제 8 장 도덕적 율법 십계명의 설명 제 9 장 그리스도는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졌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제 10 장 신구약의 유사점 제 11 장 신구약의 차이점 중보의 사역 제 12 장 중보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제 13 장 그리스는 사람의 육신의 전정한 본질을 취하셨다 제 14 장 중보의 두 본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제 15 장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언자의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세 가지 직책을 보아야 한다 제 16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다하셨는가?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제 17 장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겼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원죄론
[우리 자신을 참으로 알면 자기 신뢰가 없어진다]1. 자기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떼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 될 것이다. 시초의 우성을 생각할 때에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현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사람의 본성은 망상적인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혀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언사를 가장 기뻐한다.
3. 자기 인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품을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리어는 일체의 자신을 빼앗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결핍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시초의 천품을 잃었고 인류 전체가 파멸하게 되었다, 4-7]4. 아담이 타락한 이야기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창 3장): 배신,불충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롬 5:19). 일단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을 멸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불충이 타락을 근본이었다. 그러나 그 이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 망덕과 함께 생겨났다.
5. 최초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이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 멀어진 것은 영혼의 죽음이 되었다.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 퍼지게 되었다. 하늘 형상이 아담에게 말소된 후에 이 벌을 받은 것은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에 만든 것이다. 이것을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죄라는 말은 이전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6. 원죄는 모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위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롬 5:9).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엡 2:3 요 3:6)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7. 죄의 유전
아담이 그 받은 천품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잃게 했다. 아담이 잃어버린 천품은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바은 것이며 그 천품은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걱정할 것인가?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인 은총에서 온다.
[원죄는 본성이 부패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성에서 온 것은 아니라,8-11]8. 원죄의 정체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최책] 다음에는 성경에(갈 5:19)육체의 일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죄의 열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둘째로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9.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킨다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 저급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이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심정의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우수성과 존귀성이 특히 빛이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치료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어야 할 형편이다.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 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
10. 죄는 [처음]우리의 본성이 아니고 [타락후] 착란 상태이다.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부패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시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시초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전 7:29]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성의 선천적 부패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온 것은 아니다.
제 2 장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할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
1. 논제의 위험성들: 입장을 확립한다.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점령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노예 상태로 낮아진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만일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람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연 없으며 극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빈곤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성에 대한 인정을 전연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자유 의지론을 비판한다. 2-9]2. 철학자들은 이해력의 힘을 믿는다.
3. 이와 같이 철학자들은 결국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4. 교부들의 생각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의지의 자유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6.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
7.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8. 어그스틴의 자유 의지론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모든 자기 긍정을 버려야 한다. 10-11]10. 자유 의지론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을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11.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만 영예를 돌린다
[사람의 천품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오성,12-17]12. 초자연적인 천품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품들은 부패했지만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은 남아 있다
13. 지상의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14. 학술과 기예에 관한 지성
15. 학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16.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17. 12-16까지의 요약
[그러나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18-21]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19. 요한복음 1:4-5로 사람들의 영적 맹목을 증명한다
20.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망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22.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를 가졌으므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그 증거에서 바른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
23. 임의로 선악을 판단할 때에는 그 판단은 분명한 것이 못된다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전연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관계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
25. 우리가 그릇된 길에 들지 않게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26-27]26. 선한 것과 가한 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무관한다
27. 성령이 없이 우리의 의지는 선을 사모할 수가 없다
제 3 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없다.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해 있으므로 전적으로 그 지성과 의지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1-5]1. 인간은 전적으로 육이다
2. 로마서 3장이 사람의 부패를 증언한다
3. 하나님의 은총은 정결하게 만들지 않고 다만 억제하는 때가 있다
4. 정직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성은 여전히 부패했다
5.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
[의지의 전환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 6-14]6.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속 사업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하난미께서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다
7. 신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먼저 의지를 움직인다
8.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9.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성경에 있는 기도들이 밝힌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11. 견인은 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결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봉사이나 보충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
13. 어그스틴도 사람의 의지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14. 어그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총에 의존시킨다
제 4 장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사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신다고 한다, 1-5]1. 사람은 악마의 세력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2. 같은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역사한다
3. 마음이 굳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대하시는 실례
5. 사탄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외형적인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뜻을 이긴다. 6-8]6.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
7.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하신다
8. 자유 의지라는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제 5 장
자유 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
[상식적인 근거 위에 선 자유 의지 옹호론에 대답한다, 1-5]1. 첫째 논법: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원적인 죄는 필할 수 있다
2. 둘째 논법: 상벌의 의미가 없어진다
3. 셋째 논법: 선악의 구별이 전폐될 것이다
4. 넷째 논법: 모든 충고가 무의할 것이다
5. 충고의 의미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책망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 옹호론에 대답한다, 6-11]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인가
7. 율법 자체가 은총을 얻는 길을 가리킨다
8. 우리는 은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가지 계명이 밝힌다
9.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10.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고 논적들은 생각한다
11. 의지자 자유롭지 못하다면 성경에 있는 책망들은 무의미하게 된다고 그들은 항의한다
[성경의 특수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논법에 대답한다, 12-19]12. 신명기 30:11 이하
13.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한다는 주장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고무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16. 창세기 4:7
17. 로마서 9:16과 고린도전서 3:9
18. 집회서 15:14-17
19. 누가복음 10:30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마땅히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해야 한다
[중보를 통해서 본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시다,1-2]1. 중보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2. 옛 언약까지도 중보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언약의 진정한 믿음을 위해서 그리스도는 필수적이다, 3-4]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억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이었다
[도덕적이며 의시적인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점에서 중요하다]1. 중보는 타락한 사람만을 돕는다
2.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었다
[우리는 도덕적 율법을 완수할 수 없다, 3-5]3. 율법은 우리를 변명할 수 없게 만들어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4. 그러나 율법의 약속은 무의미하지 않다
5. 우리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알리며 거울과 같이 우리의 죄 많음을 밝히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한다. 6-8]6. 율법은 엄격해서 우리의 모든 자기 기만을 빼앗는다
7. 율법의 정죄 기능은 그 가치를 떨어뜰리지 않는다
8. 율법의 정죄 기능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미치는 영향
9. 어그스틴의 말과 같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함으로써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율법은 행악자들과 불신자들을 억제한다. 10-11]10.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11. 율법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을 억제한다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훈계해서 선행을 촉구한다. 12-13]12. 신자들도 율법이 필요하다
13. 신자를 위해서 율법을 전폐하려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율법의 이른바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폐지에 관련된 일이다, 14-17]14.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어느 정도로 철폐되었는가?
15. 율법은 이제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16. 의식적 율법
17.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가 도말된다
제 8 장
도덕적 율법(십계명)의 설명
[기록된 도덕적 율법은 자연법을 표병한 것이다, 1-2]1. 십계명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2. 율법에는 용서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비하시며 절대로 성결하시며 인자하게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율법에서 배운다 3-5]3. 율법이 엄격한 데는 적극적인 목표가 있다
4. 약속과 위협
5. 율법의 충족성
[도덕적 율법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목적에 비추어 영적으로 이해하며 해석해야 한다, 6-10]6.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므로 우리에게 전적인 요구를 한다
7.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회복하셨다
8. 바른 뜻을 아는 방법
9. 명령과 금지
10. 율법은 강력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더욱 미워하도록 한다
[율법의 두 판돠 계명들의 바른 배당, 11-12]11. 두 판
12. 계명들을 두 판에 배정함
[개개의 계명에 대한 자세한 해설, 13-15]13. 머리말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14.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15.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16. 첫째 계명
17.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
18. 둘째 계명에 있는 위협의 말씀
19.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이르게 하거니와
20. 조상의 죄에 대한 벌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모순되지 않는가
21.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22. 이 계명의 해석
23.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고백임
24. 거짓된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목독이다
25. 불필요한 맹세
26. 산상수훈은 이런 맹세를 금지하지 않는가?
27. 그러므로 율법에 없는 맹세는 물론 용인된다
28. 전체적인 해석
29. 안식일 계명은 약속이다
30. 제칠일
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명적 규정을 초월하는가
33. 무슨 까닭에 일요일을 지키는다
34. 성일의 영적 준수
35. 이 계명의 범위가 넓다
36. 명령
37. 약속
38. 위협
39. 이 계명의 뜻
40. 이 계명의 근거
41. 전체적인 해석
42. 독신주의는 옳은가
43. 이 계명과 결혼과의 관계
44. 정숙과 정조
45. 전체적인 해석
46.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돌볼 의무를 우리에게 지운다
47. 전체적인 해석
48. 이웃의 명예
49. 이 계명의 뜻
50. 깊은 마음속의 의
[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교훈에 비추어 본다, 51-59]51. 율법의 요약
52. 성경이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53. 믿음과 사랑
54. 이웃에 대한 사랑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56. 복음적 권고인가
57. 원수를 사랑하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58. 대죄와 소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59. 죄는 모두 대죄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율법하의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오직 복음 안에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예상되었고 계시되었다,1-2]1. 신약 사회의 유리한 점
2.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오류들을 논박한다: 세례 요한의 중간적 위치, 3-5]3. 약속들이 우리에게 파기된 것이 아니다
4. 율법과 복음과의 반대점을 과장하지 말라
5. 세례 요한
제 10 장
신구약의 유사점
[ 구약의 언약은 신약이 언약과 실지는 같다. 1-6]1. 문제
2. 중요한 일치점들
3. 구약은 장래를 내다본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5. 언약의 표징들이 같다
6. 요한복음 6:49, 54을 근거로 한 항의를 반박한다
[영생의 소망에 관한 논증: 구약의 조상들은 약속의 실현을 내세에서 구했음을 밝힌다, 7-14]7. 조상들에게는 말씀이 있었다. 따라서 영생이 있었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기와 사귀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인애가 죽음보다 강하였다
10. 고대인들의 축복은 지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11. 아브라함의 믿음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13. 족상들은 영생을 구했다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이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16. 내세에 적용되는 다른 귀절들
17. 경건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재난을 초월하여 내세를 바라본다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시킴
19. 영생 불사의 증인인 욥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인용한 구절들
23. 요약과 결론: 신구약은 영생 문제에서 일치한다
제 11 장
신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현세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1. 지상의 복리를 역설했으니 그것은 하늘 일을 생각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2. 지상적 약속은 구약 교회의 유년기에 해당했고 지상적인 것에 소망을 국한한 것이 아니다
3. 신체적인 혜택과 신체적인 벌은 예표다
[ 둘째 차이점: 구약 시대에는 형상과 의식으로 진상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예표했다, 4-6)4. 이 차이의 의미
5. 교회의 유년기와 성장기
6. 믿음의 위인들도 옛 언약의 범위냉 국한되어 있었다
[셋째 차이점: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7. 이 차이의 성경적 근원과 의미
8. 고린도후서 3장에 의해서 차이점을 상론한다
[넷째 차이점: 구약의 노예 상태와 신약의 자유, 9-10]9. 바울의 가르침
10. 율법과 복음
[다섯째 차이점: 구약은 한 민족에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12]11. 그리스도 안에서는 장벽이 무너진다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13. 대체로 무슨 까닭에 차이가 있는 것인가
14. 모든 사람을 뜻대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자유
제 12 장
중보의 직책을 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셔야 했다
[중보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1.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깊고 먼 거리를 연결할 수 있었다
2. 중보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어셔야 한다
3.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에 복종할 수 있었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4-7]4.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5.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까?
6. 하나님의 형상데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7. 오시안더의 논점들을 일일이 반박한다
제 13 장
그리스도는 사람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취하셨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에서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1.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을 증명함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그리스도는 인간의 후손이며 참인간성을 가지셨다, 3-4]3. 처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선조: 불합리한 생각을 포록함
4. 참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시고 참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제 14 장
중보의 두 본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설명함 1-3]1. 이중성과 통일성
2. 신성과 인성의 상호 관계
3. 중보의 위격의 통일성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배척함, 4-8]4. 두 본성의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5.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7. 세르베투스의 천박한 반증
8.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반박함
제 15 장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알기 위하여서는 무어보다도 그의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3 가지 직책을 보아야 한다
[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 3 가지: 첫째 예언자로서의 직책 1-2]1.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책에 대한 성구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직책의 의미
[왕으로서의 직책과 그 영적 성격 3-5]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영원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교인에 관한 것이다.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를 끊임없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순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도 여전히 안전하다.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개인적: 교회가 영원 무궁하시다. 우리 왕이신 예수님이 영원하시기 그의 백성도 영원하시다.
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직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5. 그리스도의 왕위의 영적인 성격: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주권
[제사장직: 화해와 중보 6]6. 그리스도의 화해와 중보
예수님이 자기 자신이 제사장 역할을 했다
예수님이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사역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제 16 장[중보의 다른 각도: 전생애를 보면서,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다하셨는가? 여기는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도 논한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멀어진 우리: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얻었다, 1-4]1. 구속자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목표로 향해야 한다. 원래 정죄를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는 뜻이다. 왕 제사장 선지자는 중보의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의 핵심은 중보자이다. 16장에서 전생애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다. 예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전생애를 보내셨다. 예수의 이름을 풀면 모든 사역이 우리 모든 구원을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를 감사하게 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그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보다 앞선다
4. 속죄 사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래한다: 전자가 후자의 원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죽음의 결과, 5-7]5. 그리스도는 평생을 복종으로 일관하셨고 그 복종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하이라이트 생애 전체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결정적인 순간이다. 전체는 생애 한 번에 말하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예수님의 전생의 순종이 우리의 구원 아담의 순종과 비교학기 우리의 의는 전생애, 형벌 제함은 십자가, 그 자격은 참사람(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온전한 모델이 예수님 천사가 만약 하면 우리 모델이 될 수 없다. 앞으로 우리도 역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참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빌라도 앞에서: 죄인을 대신해서 심판받음
6. 십자가에 못박히사
하나님의 저주받는 죽음 죄인의 죽음의 성격이 진노의 성격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은 지옥에 들어가는 고통이다.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지옥 강하의 교리를 설명함 8-12]8. 지옥에 내려가사[신조 고백]
그러나 우리는 지옥 강하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고통이, 지옥의 쓴 잔을 받은 것과 같다. 겟세마네 엘리엘리라막사막다니 신앙의 유익 때문에 중요하다. 지옥의 경험을 이 땅에 맛보셨다. 주님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다. [육체의 고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난이다. 우리의 신앙의 유익이 위해서 들어간 신조 고백이 낫다.
9. 그리스도는 지하 세계에 가셨는가
10. 지옥강하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
11. 성경 구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
12. 오해와 오류에 대해서 이 교리를 옹호함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13.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죽음을 정복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위한 죽음이며 앞으로 우리 부활에 대한 보증
14. 하늘에 오르사
15.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
16.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믿음에 주는 혜택
드디어 왕으로서 통치, 지상에서 계셨을 때도 왕이시만 우편 보좌에 시작
적용: 우리에게는 낙원에 가는 길이 막혔는데 곧 우리의 길이 열어놓다.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기에 권위 능력을 믿으면서 주 앞에 복종할 수 있는 근거
[그리스도는 앞으로 심판하러 오심 17]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신경에 대한 결론: 그리스도의 충족성 18-19]18. 심판자가 구속자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가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예를 나눠 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실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우리의 신랑 동행자 구속주이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
19. 신경의 모든 조항에 홀로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되신다]
그리스도 안에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 만족해야 한다.
제 17 장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우리에게 얻어 주셨다고 하는 것은 정당한 주장이다
1.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배제하지 않고 그 은총에 앞설 뿐이다
2. 성경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결한다
3. 성경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공로
4. 그리스도가 대신하심
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이다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공로를 얻으신 것이 아니다
3권 성령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 1 장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제 2 장 믿음: 그 정의와 속성에 대한 설명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 제 4 장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제 6 장 그리스도인의생활: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역설하는가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부정의 일부 제 9 장 내세의 명상 제 10 장 현세 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주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제 15 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제 16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제 18 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제 19 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제 20 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제 21 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제 23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제 25 장 최후의 부활
제 3 권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
제 1 장[성령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전달해 주시는 성령의 전달,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신랑을 잘 만나면 신랑의 지위 소유는 아내에게 온다. 모든 복은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해 주신 것을 적용시켜 주신다. 예수님의 구원을 송두리째 주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1.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띠로서의 성령
우리는 [독생자에게 주신] 그 유익들을 어떻게 받는가?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하며 그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하며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이것을 얻는다.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는 성령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또 무슨 이유로 성령을 받으셨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셨다.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①성령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② [아들이 보내신]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영의 선물들을 맡아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목 마른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이라고 곧 살려주는 영으로서(고전 15:45) 하늘에서 파견된 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각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 ③성령을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른다
3.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칭호
① 양자의 영: 성령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기도할 말까지고 알려주시고 우리가 대담하게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하신다( 롬 8:15; 갈 4:6)
② 보증이며 인: 성령께서는 하늘로터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고후 1:22; 엡 1:14)
③ 생명: 성령께서는 의로 말미암는 생명이라고 한다(롬 8:10).
④ [샘]물: 성령께서는 은밀한 중에 물을 주어 위리의 의의 싹을 돋게 하신다. 그 물로 더러운 것을 씻어 버리게 하신다. 모든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시다.
⑤ 기름[부음]: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신다
⑥ 불: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욕을 태워버리시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신다(눅 3:16).
⑦ 주의 손: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행 11:21)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님에 의해서 머리되신 예수님께 [영적, 신비적] 연결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살 중의 살이 되며 뼈 중의 뼈가 된다(엡 5:30).
⑧ 진리의 영: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모두 생각나게 하시며 하늘 나라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열쇠이시다[요 14:17; 계 3:17)
4.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표현하는 말들은 대체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기기 때문이다(요 1:12-13).
제 2 장 [신앙론-성령님에 의해서]
믿음: 그 정의와 속성에 대한 설명
1.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율법을 일자 일획에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에서 우리를 구출할 수 있는 해방된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즉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즉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에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요 8:2; 14:6; 17:3, 시 36:9; 고후 4:6)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서 발견될 뿐이다.
[신앙은 지식을 내포한다. 스콜라의 맹신이라는 사고는 찬된 교리를 흐리게 한다, 2-5]2.믿음의 근거는 지식이지 경건한 무지가 아니다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위임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3.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틀렸다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 교회(로마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4.바른 믿음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인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음으로 이 때에[주의 부활을 꿈꾸듯 느낌, 글로바의 엠마오 귀향]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은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 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아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
5.예비 신앙으로서의 맹신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 믿음의 요약된 정의,6-7]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 불과했다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고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6.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항구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요 20:31).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간에 자신에게로 끌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 롬 1:5)고 정의한다.
7.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믿음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들은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그 자체만으로 믿음을 흔들 뿐이다(창 2:17).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그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믿음이란 말에 대한 여러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정의들 8-10]8.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경건한 성향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9.고린도전서 13:2 내실적 신앙과 형식적 신앙의 차이를 증명한다
10.형식적 신앙은 환상에 불과하다f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지만( 행 8:13) 그는 조금 후에 불신앙을 드러냈다(행 8:18). 마귀들도 믿고 떠는 일들을(약 2:9) 듣고 이해한다고 하나 우둔하여서 마귀들보다도 열등하다. 그 밖의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든간에 결국은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마귀들과 같다.
11.버림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버림받은 사람들도 때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감동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전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행 13:48). 그러므로 사도가 그들도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고 한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잠시 동안 믿는다고 하신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 빛을 굳게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은 영은 받지 못하더라고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혼돈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그것의 견고한 실체보다 그림자를 잡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들을 참으로 죽음에서 구출해 그의 보호 하에 두시지는 않고 다만 임시로 자비를 보이실 뿐이다[셋째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마 24:13).
12.진정한 믿음과 거짓된 믿음
요약하면, 첫사람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말살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다가 후에 빛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며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을 거짓되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잠시라도 빛춤을 받았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한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응답하지 아니하고 고용인같이 행동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 그들에게 대해서 이상하게도 분노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였으며 사라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산 뿌리를 박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마 15:13).
13.믿음이란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훈, 어떤 특수한 대상에 국한시킴-백부장의 믿음, 기적을 행하는 믿음
[7절에 있는 믿음의 정의에 내포된 것을 자세히 검토함: 지식의 요소, 14-15]14. 고상한 지식으로서의 믿음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대해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요한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한은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고 언급한다. 또 그들은 확실히 이 일을 안다.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다.
15. 믿음은 확실성을 내포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권하실 때마다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우리의 심정에서 사악한 의혹을 일체 근절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과의 관계, 16-28]16. 믿음의 확실성
17. 시험과 싸울 때의 믿음
18.신자의 내심에 있는 갈등
19.약한 믿음도 함 믿음이다
20.믿음의 약점과 강점
21.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방패이다
22.옳은 두려움
23.두려움과 떨림
24.믿음의 확실성이 확고 부동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25.믿음의 두 면에 대하여 베르나르드가 한 말
26.하나님을 경외함과 하나님을 공경함
27.자녀의 두려움과 종의 두려움
28.믿음이 확약하는 것은 지상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값 없이 주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29-32]29.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한다
30.믿음이 은혜에 대한 약속만을 토대로 삼는 이유
31.믿음에 대하여 말씀이 가지는 의의
32.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에게서 실편되었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신된다, 33-37]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34.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35.사람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36.마음의 문제로서의 믿음
37.의심은 믿음을 질식시키지 못한다
[여기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의 항의를 논박함 38-40]38. 믿음의 확신에 관한 스콜라 철학자의 오류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를 기뻐한다
40. 우리가 끝까지 견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확실치 못하다는 생각
[믿음과 소망 및 사랑과의 관계, 41-43]41. 히브리서 11:1에 있는 믿음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토대 위에 섰다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회개
[회개는 믿음의 결과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고찰함 1-4]1. 믿음의 결과로서의 회개
2.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3. 죽음과 살림
4. 율법 아래서의 회개와 복음 아래서의 회개
[회개를 정의함: 그 요소들인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림을 설명함 5-9]5. 정의
6.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7.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생긴다.
8. 죽임과 살림은 회개의 구성 부분이다
9.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
[신자들은 성활을 체험하지만 현세 세상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한다 1-15]10.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 칭의 11-18]]11.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12. 타고난 부패는 무슨 뜻인가
13. 신자들이 여전히 죄인인 데 대한 어그스틴의 증언
14.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반대함
15. 고린도후서 7:11에 있는 회개
[회개의 열매: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과 용서 평생 계속하는 회개 16-20]16. 외면적인 회개와 내명적인 회개
17. 회개의 외면적 실천이 주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18.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19. 회개와 용서는 서로 관련이 있다
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회개해도 소용 없고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22. 용서할 수 없는 죄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제 4 장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1. 회개에 관한 스콜라 교리
2. 회개에 관한 스콜라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4. 고백하라는 명령은 없다: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곡해한다
6. 성경적인 고백
[비밀 고백은 후대에 생겼다는 증거 7-8]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공적 및 사적 고백 9-13]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11.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12. 영혼의 치료와 사적 고백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명 14-15]14. 열쇠의 권한: 그 성격과 가치
15. 고백에 대한 가톨릭 교리의 요점
[가톨릭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비팒함]16.모든 죄를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7. 완전한 고통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18. 완전하 고백을 요구한 데서 오는 악 영향
19. 비밀 고백을 비평함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을 불확실하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23. 그릇된 주자을 폭로함
24. 요약
25. 가톨릭교의 교리를 개관하며 논박함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이 확신을 일소한다
[여러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판적으로 검토함 28-30]28. 소죄와 대죄
29. 죄가 용서되면 벌도 면제된다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하나님의 심판에는 처벌적인 것과 교정적인 것이 있다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35. 다윗이 받은 벌
36. 벌에 대한 배상으로서의 선행
37. 죄인이었던 여인
38. 로마 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행독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전하지 않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연옥설을 반박함: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해석함 6-10]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7. 복음에 연옥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10.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 6 장
그리스도인의생활: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역설하는가
1. 이 논설의 골자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동기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1-3]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2. 하나님께 헌심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우리와 이웃 관계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6. 이웃에 대한 사람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부정의 일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십자가를 져야 한다 1-2]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2.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필요하다 3-6]3.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4.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5. 십자가는 약이다
6.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박해와 기타 재난에서 십자가를 짐 7-8]7.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음
8.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9-11]9. 스토아 사상가와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나타낸다
10.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11.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제 9 장
내세의 명상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과도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1. 허무한 현세 생활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무상하고 불완전한 현세 생활을 바르게 평가하면 내세를 명상하게 된다 3-6]3. 지상 생활을 감사함
4.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5.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배격함
6. 내세에 대한 열망은 신자에게 위로를 마련해 준다
제 10 장
현세 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사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1. 두 가지 위험: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2. 대원칙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재리를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3. 선물을 주신 이를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 양식의 기초임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그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용어를 정의함 1-4]1. 칭의의 교리 그 위치와 의미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신앙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기독론]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신앙론]. 첫째로 무죄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 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칭의론].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성화론].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 칭의의 개념
3. 성경에 있는 용법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동한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된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9. 칭의은 중보가 하시는 일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12. 오시안더를 논박함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15. 은혜와 선생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데 대한 성경의 판단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18. 칭의는 해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19. 믿음만으로
20. 율법의 행위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게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거주 주시는 칭의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에 칭의를 논함 1-3]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3. 진정한 의의 증인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 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4-8]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 기만이 없어진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려라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 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고 게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도 나누인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살 수 없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를 받는다 7-8]7.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8. 사람과 행위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9. 또 진정한 신자들도 가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와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을 검토 반박함 12-21]12. 반대자들의 핑게
13. 잉여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중대성을 오해하였다
14.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더라고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또 완수할 수도 없다
15. 우리와 우리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 업적은 있을 수 없다
16. 행위를 믿거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
17. 행위는 결코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18. 그러나 선생을 보면 믿음이 강화될 수 있다
19. 행위는 소명의 결과이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신자들의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21. 간혹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제 15 장
행위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의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어그스틴과 베르나르도도 반대한다 1-4]1. 잘못된 물음과 참된 물음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3.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4. 반증에 대답함
[사람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 데 반대함 5-8]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기초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소멸한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제 16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억누르는가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가 행동의 동기가 된다: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고넬료의 예 1-5]1. 스콜라 논법을 서술하고 논박함
2. 우리는 행위로 율법의 약속을 실현시킬 수 없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
4.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칭의의 행위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을 검토함 6-15]6.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7.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를 말하지 않는가
8.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는 이중의 가치가 있다
9. 이신 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10. 죄가 용서된 후에는 행위가 용납된다
11.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12.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쓴다
13. 로마서 2:13
14.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15. 신자들은 완전한가
제 18 장
보상에서 행위의 의를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1-4]1. 행한대로 갚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2. 보상은 기업이다
3. 은혜로서의 보상
4.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
[이 견해에 대한 반대론들에 대답함 5-10]5.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7.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8. 사랑에 의한 칭의
9. 마태복음 19:17
10.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제 19 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분 중에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3. 갈라디아서에 있는 논증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4. 율법의 강요에서 해방되는 것이 신자들의 진정한 순종을 확립한다
5. 강요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6. 은혜로 인하여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무해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7.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
8. 하나님의 선물을 그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이유
9.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탐식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또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10.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불가하다
11.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12.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바르게 행사하며 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13.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양심과의 관계 14-16]14. 인간의 모든 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15. 두 개의 나라
16. 양심의 구속과 자유
제 20 장
기도: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기도의 본질과 가치 1-3]하나님은 모든 은택을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받는다.
1. 믿음과 기도
2. 기도의 필요성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내신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기원한다. 믿음의 실천으로 기도한다. 예수님을 믿는 자체가 기도[신뢰 의지]한다. 기도 안 하면 하나님 없이도 된다는 말이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만 받는다. 모든 필요의 원천이다. 우리 인간 전체가 의지. 간난 아이의 특징은 부모를 의지한다. 예수님을 안 믿는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실용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는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모든 것이 나온다.
3. 반대 의견: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기도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 듯하기 위해서다.[우리를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도 안 하면 욕망이 일어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감사하면 기도한다.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넷째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기도 응답하면 더 체험해지니까]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뻐하면서 즐거워 하기 위해서다]끝으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예민하게 깨닫는 사람은 섭리의 오묘함을 알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른 일이 없으시면서 게으른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잠자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 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에게로 가게 한다.
[올바른 기도의 법칙 4-16]새벽기도 안 하면 아침에 하라 특징 규칙을 정해서 하지 말라 그 방법이 아니라 그 마음 태도와 자세가 중요하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나오는 자세는 어머니와는 다르다. 친구가 부르는 것과 장군이 부르시는 시간이 다르다
[첫째 법칙: 경외 4-5]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는 경외감이다. 규칙이 아니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하나님을 인식하라.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십시오 이렇게 천박하게 하지 말라. 통성기도는 경외하는가? 내 편에 열심히 아니라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가? 어렵게 느껴지는가? 솔로몬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아갔는가? 신하가 왕에게 나아갈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아갔는가? 두려움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로서 나아가야 한다. 친밀감 신뢰감 기대의 법칙을 가지고 가야 한다
4.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자연성이 필요하다
5. 무례하며 불경한 기도를 배척함-성령님이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둘째 법칙: 진심으로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우리는 부족한 것밖에 없다. 왜 다 하나님이 주셔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거지같은 심정 곧 하나님이 안 주시면 할 수 없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을 알아야 한다.
6.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7.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셋째 법칙: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우리는 날마나 범죄한 자이다. 하나님 앞에 죄짓는 자다. 부족함과 악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죄악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죄악된 죄인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알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필요가 없으면 안 하거나 우리 필요만 구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아는 지식은 결국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와의 자세와 태도이다
8.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9.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0.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넷째 법칙: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하나님의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경외감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거룩과 친밀함이다. 기도의 법칙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나아가라
11.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기도와 믿음
12.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13.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14.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라 무서워 떨 것은 아니나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15.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16.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왜 그리스도가 다루는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분은 중보자 그리스도 반드시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근거는 그리스도 때문이다. 기도 응답도 그리스도 때문이기에 그만큼 중요하다.
1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나의 기도가 나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이다. 하나님과 기도 응답의 근거는 예수님에 달렸기 때문이다.
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19.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시다
다른 형제 중보는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간다. 결국 예수님 때문에 상달이 되는 것이다. 내 공로가 아니다. 열심히 생활할수록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할 때에 늘 연약함 죄악을 생각날 때마다 예수님 때문이다. 이 정도 사는 것도 예수님 때문이다. 이 중보 기도는 예수님 때문이다. 기도는 예수님과 뗄 수 없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3중 직분: 제사장 중보 문제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그리스도 외에는 가능하지 않다. 다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의 은혜의 공로를 의지해야 한다.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 휘장 안에 지성소 지성소 안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감 휘장은 히브리서 찢어진 육체 사이에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육체의 휘장을 뚫고 나가간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21.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22. 성자(聖者) 숭배
23.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성경 해석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24. 죽은 성자들은 지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25.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26.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27.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기도의 종류: 사기도와 공기도]28.사기도
29.공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30.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노래와 일상 언어를 사용하는 문제 31-33]31.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 중에 쓰이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의례적으로 할 때가 많다. 내면적으로 깊어져야 하는데 공기도에는 자칫하면 공적 언어가 되기 쉽다. 의례적인 것을 조심해야 한다]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진노하게 한다. 찬송 개인 찬송을 부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인식과 우리의 인식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찬송과 기도는 함께 가야 한다. 기도는 자기 영성의 바닥이 나는데 찬양은 그렇지 못한다. 외형적인 데에 관심이 많다
32.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리와 고백이 찬송 가사에 담겨져 있었다. 설교 핵심이 놓여져 있었다.
33. 기도는 일상 용어로 드리라
[주기도문: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34.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35. 구분과 중요한 내용
3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7. 우리 아버지: 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고무할 것이다
38. 우리 아버지: 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39.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41. 첫째 기원
42. 둘째 기원
43. 셋째 기원-첫째 부분의 결론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44. 넷째 기원
45. 다섯째 기원
46. 여섯째 기원
47. 결론
[결론적 고찰: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48. 주기도는 지켜야 할 표준
49.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게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50.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기도의 형식)
우리의 약함 때문에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있어야 한다. 기도 시간이 없으면 우리는 잘 안 된다. 규칙적인 기도 시간이 필요하다. 효험이 많은 것이 아니다. 고정적인 시간은 새벽기도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시간 이전에 정해내야 기도할 수 있다. 우리의 자세와 훈련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정한 시간을 떼어나야 한다. 구약 신약 성도들은 경건한 성도들은 하루 3번 했다. 하루 세 번 정도 기도를 했다. 다니엘도 기도하였다. 경건한 믿음의 선배들은 이어 받았다. 조나단 에드워드로 기도했다. 우리가 약하다 보니 늘 하루 생활 기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51. 기도는 참으면서 계속하라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기도할 때에야 말로 인내하는 것이다. 한 번의 욱하는 열정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기도 응답한다. 끈질기게 기도하라
52.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제 21 장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예정의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예정을 왜 만들었을까? 불공평 비난 받기 위한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는데, 예정을 왜 다르고 어떤 문맥에서 다루어야 하는가? 신론에 들어가야 하는데 구원론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정론을 구원론 속에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색적으로 추상적으로 할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 반응이 나타난다. 복음이 지나는 곳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 왜 그럴까? 그 성경적 대답이다. 복음 전파의 문맥 속에서 보아야 한다. 복음 전파의 결과 그리고 나는 마음 머리가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돌같은 두더지 같은 사람들이다.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 편에서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도록 택해서, 에베소서 등의 성경 구절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받고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거절하는가? 가장 신앙에 유익한다
1.예정론의 필요성과 그 유익: 호기심의 위험성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끼게 한다: 나의 구원은 만세전부터 사랑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가 만세 전부터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까지 간다. 예정론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느낀다. 창세전부터 시작하셨다. 영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이 예정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우리를 가장 겸손하게 만든다. 결국 이 모든 구원이 하나님에게 오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 손들고 나왔는데 집에 가다가 손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행동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졌기에 구원의 확신 앞으로 영원토록 확신하다. 제일 큰 유익을 준다
2.예정의 교리는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지 아니하는 부분은 호기심으로 캐내려고 하지 말라!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황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성경에 말하고 하지 않는 부분도 해명] 그래도 버려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도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와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 하겠다.
3. 둘째 위험성: 선택의 교리에 대해 침묵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경이 가르쳐 준 것만큼 알아야 한다. 이것도 양극단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의 영역이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성경에서 찾으면 된다.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사색으로 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부분에까지만 하면 된다. 칼빈의 예정론의 근거는 성경 구절이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셋째로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그스틴이 예정론의 중요한 것을 잘 준비해 놓았다. 바울이 말한 것을 어그스틴이 그리고 칼빈이 말하였다. 성경에 있는 교리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이스라엘의 선택
예정론의 핵심: 믿음의 근거는 우리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에게 있다. 이신칭의도 오직 복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우리 이성으로는 답변하기 힘들다.
예정의 정의: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각 사람에게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이중예정]
예수믿는 사람들은 영생 안 믿는 사람들은 영멸[교부들은 한 쪽만을 이야기 했다. 칼빈은 분명하게 했다]
질문: 왜 나는 구원 못 받는가? 답: 토기장이에게 권한이 있다. 그 뒤에는 모른다. 왜 그런가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우리편의 결정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 왜 조선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가? 우리 행위에 있지 않다. 성경의 증거를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리브가 뱃속에 있던 야곱과 에서: 선택은 행위 때문이 아니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선택교리의 요약
부르심으로 선택: 믿도록 하시면 성령님이 한 종류의 사람에게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선택
말씀을 전하고 선택된 백성을 성령님이 부르신다. 예정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예수님을 믿으니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관계가 되기 때문에 예정 받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24:2]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인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2. 창세 전의 선택은 공로의 예지와 관계가 없다
3. 선택하신 것은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지 거룩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해위를 근거로 삼는 주장을 반박한다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선택과 유기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8.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특히 어거스틴) 생각
9. 사람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선택과 연결되는 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바로 이런 공로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닌가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11. 제외되는 것도 해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생기는 일이다
제 23 장
이 교리를 겨냥한 거짓되고 부당한 비난들에 대한 반박
[ 유기는 선택에 동반되며 하나님의 뜻으로 하시는 일이다 1-3]1. 선택은 있어도 유기는 없는가
[첫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 2-3]2. 하나님의 뜻이 의의 표준이다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정하시다
[하나님의 공의의는 우리의 힐문을 받지 않는다 4-7]4.하나님의 결정은 그의 공의에도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숨은 결정은 찾아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손하게 찬탄해야 한다
6.둘째 반대로 선택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도 예정하셨다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으로 하셨다 8-11]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다르지 않다
9. 둘째 반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10. 셋째 반대론: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이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12. 넷째 반대론: 선택교리는 고결하게 살려는 열의를 전적으로 말살한다
13. 다섯째 반대론: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골르 무의미하게 만든다
14. 어그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데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인되나 악인은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자초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2. 부르시는 방법은 부르심이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준다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의한 조명이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반드시 말씀전파와 성령의 조명이기에 전도해야 된다. 성경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신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전파를 통해서 부르셨기 때문에 오도록 하기 때문에 돌아온다. 돌아오는 방법은 말씀 전파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예정론을 전한 바울은 전도에 열심을 했다. 듣도록 전도했다. 오늘날도 선택된 사람이 돌아오는 방법은 가서 전해야 한다. 선택된 자를 부르시는 방법은 말씀 전파와 성령의 조명이다.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는 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예정이 안 되었다면 열정이 소용이 없다. 잘못된 방법으로 예정 받았음을 확인하게 되면 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확인의 방법은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 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고 성령의 조명으로 믿고 싶은 신앙이 생김=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것=택함의 증거].
믿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셨기 때문이다. 기히하다 어떻게 내가 이런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니 감사할 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를 봐서도 안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보라 택함의 증거다
5.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지식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이 가장 큰 증거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 기만도 없는 것이다.
신기한 체험들이 우리 선택의 기준이 아니다. 자기 속에 유일한 것이 내게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어도 신기한 체험은 체험할 수 있다. 믿음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증거가 선택받은 증거다. 이것이 구원의 영원한 확신이 된다. 선택은 영원한 견인과 연결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견인은 확실하다: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아무도 빼앗을 갈 자가 없다.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탈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다.
8. 일반적인 소명과 개별적인 소명 마 22:2하
9.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10. 선택된 사람들이 아직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 선택의 씨는 없다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12-17]12. 버림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구절: (가) 에스겔 33:11
16. (나) 디모데전서 2:3-4 기타 유사한 구절들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음 나는 안다. 사변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이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제 25 장 구원의 완성: 몸의 부활
종말론 구원에 끝에 있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약했다. 신학은 도전에 응전이기에 시대의 영적인 것을 대항함, 이 당시에 응전은 구원론 교회론에 관심사였다. 우리는 곧 임박, 재림에 할애가 많이 되는 게 오늘의 현상이다.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 교리를 주장함 1-4]1. 부활의 소망: 이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태산 같은 불행히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현실에는 불행이 있고 불신사회에서 조롱 유혹이 있는데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 내세 명상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이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종말로 일어날 일을 확실히 알고 지금 끌어서 사는 것이다. 사도바울 영광을 보지만 강 바다 산적 감옥 먹지 못함 등의 어려움 속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부활과 영광을 알기에 현재에 살아가는 것이다. 미래의 상황을 끌어서 사용하는 삶이다. 가장 유익하기에 몸의 부활을 생각해야 한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최후 상태의 기대감이 오늘 이기게 한다. 우리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몸의 부활은 확실하다. 유혹과 핍박도 이길 수 있다. 타락한 시대일수록 땅 육체 정욕에 힘쓴다.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올라가도록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다.
구약은 약속 신약은 성취 그러나 맛보기에 불가하다. 최후의 완성된 몸의 부활은 맛보기에 불가하다. 늘 깊은 지식이 중요하다. 최후의 상태는 완전한 연합 온전히 알게 되는 상태를 이야기 한다.
우리의 목표: 지식이 완전하게 되는 시점이 몸의 부활 곧 영광스러운 때이다. 마지막 상태를 열망하는 상태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라고 살아가야 한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힘을 준다
3. 바라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몸의 부활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불신자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현재 가지고 있는 몸의 부활이 중요하다. 사도신경에 끝에 몸의 부활을 믿는다.
4. 몸의 부활의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부활은 확실하다. 이미 부활하신 분이 그 근거 또한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썩고 없는데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는가? 첫 창조하신 분에게는 부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종 반대론자들의 반대론을 논박함 5-9]5. 이교들의 반대론을 장례로 반박함 천년왕국론자들의 오류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병적인 호기심: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나? 영혼은 불멸한다. 영혼이 떠나서 그리스도께 간다. 성경 구절이 많다. 내 영혼을 받아주시고 스데반도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영혼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가 없다[당시에는 영혼도 함께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은 불멸 몸은 다른 것으로 부활한다: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한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중간기에 영혼에 대한 호기심은 낭비밖에 없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은 말하지 말라 창조 천사 예정은 다 모른다. 스데반이 영혼으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후에는 모른다. 천사의 결혼 문제에 허비하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모르고 사변에 치우치기 쉽다. 아브라함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정도로 믿고 살아야 한다.
7. 현세에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름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있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교의 화장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매장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매장하라는 말이 아니라 매장은 부활을 믿었다는 증거이다. 사실은 재림하실 때에 화장을 부활하지 안 하나 결국 해체되기는 마찬가지다. 땅이 부족해서 교회에서 압장서서 이것을 한다.
죽기 이전의 상태가 신령한 부활을 한다. 주님의 부활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님 죽으실 때 예루살렘에 무덤에서 있는 자들이 살아났다. 앞으로 주님의 재림에는 이와같이 한다.
8. 몸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는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 15: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모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먹기도 하지고 동시에 나타시기도 하지만 지나친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영혼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 따르면 낙원에 이르게 된다. 한쪽에 달린 그 사형수의 영혼이 낙원에 이른다고 하셨다.
낙원에서 무엇을 하는지 몰라도 안식,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부활하기 전까지는 영혼은?
9. 불신자의 부활
[사람의 내세 생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10. 영원한 복
새하늘과 새 땅의 정보는 제한적이다. 그 내세는 구체적인 표현이 아니다. 감미로운 것들을 바라보게 하며 영벌에 대해서 경계심을 갖도록 기록이 되어 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새각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 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천국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가본 천국은 실제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을 말도 못하고 말해도 듣지 못한다. 보여주어도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천국 갔다왔다는 것은 우리를 혼돈스럽게 만든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우리의 경험을 초월한 것 사색을 면해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 동성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치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신다(시 90:7 하). 하나님의 만유의 주로서 만유 위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칼빈은 포괄적으로 했다.
제 4 권 하나님께선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선정과 직분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으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제 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 제도에서의 그것을 남용 제 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제 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제 14 장 성례 제 15 장 세례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슨 유익 제 18 장 가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삻하는 모독 행위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제 20 장 국가 통치
제 4 권
하나님께선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우리를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
새로운 개혁교회에서의 근거 가톨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가 만들어졌다. 3가족 루터파 칼빈파(개혁파) 성공회 주류는 개혁교회다. 교회주의 교회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어머니인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성경론의 안경론, 교회론은 어머니론,사람다운 사람으로! 타락한 우리 구원 칭의 화친 새생명은 우리 안에, 개인의 신앙 생활을 바르게 세워주기 위해서 교회를 주셨다. 양육이 교회가 하는 일이다. 교회에 소속이 되어야 한다. 외적인 은혜의 방편이 양육이다.
1. 교회의 필요성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전진시키려면 무지하고 태만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에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그러면 나는 먼저 교회를 논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 아이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봉살로 양육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성인이 되고 드리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신앙이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한다. 교회에 남아 있으면 성장하게 된다. 붙으만 있으면 대부분 자라게 된다.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교회가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수 있다.
2. 교회의 신경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4. 신자의 어머니로서의 가견적 교회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방편은 말씀인데 이 말씀을 전하는 직분자이다. 진리를 배우는 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말씀 사역자들을 중요하게 본다.
(엡 4: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동일한 규정 하에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 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셔서 친히 우리를 향하여 우레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광신자들을 말씀 사역자들을 무시한다. 재침례파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게 된다. 교회다움은 모든 성도들에게 달려 있지만 말씀 사역자들에게 달려 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맞으면 개척하나 진정한 교회인가 참 교회는 무엇으로 구별하는가?
5. 교회를 통한 교육 그 가치와 그 의무
6. 성직의 의미와 한도
[가견적 교회: 그 회원과 표지 7-9]7. 불가견적 교회와 가견적 교회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하나님 눈에만 보이는 교회=불가견 교회].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는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산재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현재 지상의 교회는 지역교회].
눈에 보이는 가견교회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들어올 수 있다. 가견 교회에 있으면서도 불가견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 있다. 가견 교회에 있으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아니다. 가견 교회는 항상 불가견 교회가 되어야 한다. 가견 교회가 어머니 교회다. 비록 불신자들이 들어와도 어머니 역할을 한다.
어머니 역할을 누가 하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직분자는 가견 교회의 어머니 역할이다.
8. 우리 판단의 한계
9. 교회의 표징 그 적용
[이런 표지가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 분열의 죄 10-16]10. 교회의 표지와 권위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
하나님의 말씀을 교리를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통일교는 교회가 아니다. 정명석은 교회가 아니다. 교리가 바르게 설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단은 교회가 아니다. 자기들은 성경이라고 하지만 교리가 바르게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함에 있다. 사람의 수가 많은 게 아니라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하게 잘 선포하느냐 잘못된 근본적 교리는 이단이 된다.
우선 교리: 삼위일체 양성론
차선 교리: 침례 분파라고 한다. 이단과 교파는 말씀의 신실성이 있다.
가톨릭은 교리가 잘못 성례도 엉터리로 한다.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가톨릭은 외형적 제도는 내려왔지만 동일한 말씀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거부했다. 우리가 초대 교회의 그 신앙을 입고 있다. 개혁교회의 분리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1. 표지의 절대적인 타당성
12. 표지에 유의하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잇다
13. 교회 내의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15. 악인들과의 교제
16. 완전을 자칭함은 그릇된 결과다
[교회가 완전히 거룩하지 못한 것은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한 기회를 준다 17-22]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18. 예언자들의 선례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선례
20. 죄의 용서와 교회
21. 교회원들에 대한 용서는 영속한다
[신자의 공동체 내에서 죄를 용서한 실례들 23-29]22. 열쇠의 권한
23. 모든 신자는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24. 옛 언약 하에서 죄많은 산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율법
25. 옛 언하 하에서 죄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예언서
26. 새 언약 하에서 죄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의 문제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 교회와의 비교
[바른 교히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1-6]1. 근본적인 구별
2. 로마 교회와 그 주장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4.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5. 분파와 이단이라는 비난에 대답한다
그런데 그들은[가톨릭]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 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이러므로 어그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그릇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분파] 간혹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
교리가 일치하지 않음: 이단 분파 교리는 같지만 교제가 끊어짐
이런 기준을 보니 가톨릭은 교회가 아니다.
6.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이 연합의 조건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관해서 로마 교회와 고대 이스라엘을 비교한다 7-11]7. 로마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8.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했으나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9. 가톨릭 교회는 부패했으며 배격되어야 한다
10. 왜 부패한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
극단적 재침례파와 같은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 교리와 같으면 분리해서는 안 된다. 재침례파는 자기가 확정해서 분리해 나가서는 안 된다. 재침례파 제도적 가톨릭 교회를 분별해 나가며 논파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죄인들에게 징계를 해야 한다. 지금 교회가 권징, 쫓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패하였다.
11. 교황 제도 하에 남아 잇는 교회의 흔적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부패한 교회가 참교회가 될 수는 없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이 기능은 고귀하고 꼭 필요하다 1-3]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목사 장로 집사를 주셨다. 가견교회의 질서 시스템 정치제도를 주셨다. 칼빈의 시스템은 최초였다. 동방정교회는 일인독재이다. 전 유럽에 번져서 개혁교회가 생겼다. 교회 정치 직분 문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사역자들에게 대한 권위다.
우리의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개혁된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5. 임시직과 항존직
6. 사도들과 목사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장로
9. 집사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13. 누가 가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14. 사람을 통해서
15. 평신도의 투표
16. 임명
제 4 장
고대의 교회 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 정치
[사역의 역사적 발전: 사역자의 세 분류: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 그 중에서 선택된 한 사람의 감독 대감독 1-4]1.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2. 감독의 지위
3. 감독과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4. 대감독과 총대감독
[집사와 부감독: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하부 성직자 5-9]5. 집사의 직분
6. 교회 재산의 운용
7.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8.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9. 직분들의 준비 단계
[사역자의 선택 및 임명의 변천사: 집권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찬성으로 감독을 선택한다 10-15]10.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 평신도들의 찬성
11. 감독 선거에 대한 찬성: 데로도레트 시대까지
12. 평신도와 성직자의 균형
13. 성직자들과 통치자들
14. 임직 절차
15. 대감독에 의한 성별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 제도가 고대 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평신도의 투표 없이 무자격자를 임명했다 1-3]1.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2. 주교 선거의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3. 태만한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성직록 수여에 관례된 폐해 4-7]4. 사제와 부제를 임명하는 데 관한 폐해
5. 임명식은 가짜
6. 성직록의 정체
7. 해괴한 악폐
[성직을 가진 수도사와 참사회 의원과 기타 인물들의 무성의와 나태 8-10]8. 사제가 된 수도사들
9. 성직록을 받는 사제들과 고용살이르 하는 사제들
10. 여러 가지 성직자들의 겉치례
[주교와 목사와 부제들의 부패와 탐욕 11-19]11.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
12. 이 폐단의 초기: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
13. 선전과 현실
14. 사제들의 도덕 수준
15. 부제
16. 교회 수입의 분배
17. 교회의 참 광채와 거짓 광채
18. 교회 재산의 부정한 사용과 정직한 사용
19.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1. 가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께만 있다 8-10]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구적인 수위권을 가질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초기의 로마 교구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 1-4]1.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2. 칼케돈과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3.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자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4. 그레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황제 및 대감독들과의 관계에서 로마의 권위는 제한 되엇다 5-10]5. 로마의 재판권의 시초
6.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
7. 상호 충고
8. 회의 소집권
9. 위조 문서를 이용했다
10.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 종교회의
[5, 6 세기 교황들의 태도: 로마 대 콘스탄티노플 11-16]11. 위조와 횡령
12.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의 교황의 권력
13.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
14.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15.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는 것을 레오가 분개했다
16.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찬탈자들이 포카스와 페핀과의 관계를 통해서 로마의 권한이 확립되었고 그 후에 확대되어 교회에 해를 끼쳤다 17-18]17.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18.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기대까지의 교회의 쇠퇴
[후대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와 베르나르두스이 원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19-22]19. 현대의 교황 제도와 그 권력 주장
20.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 문서들
21.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22.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
[후기 교황권을 규탄한다 23-30]23.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24. 배교
25. 적그리스도의 왕국
26.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27.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28. 요한 22세의 배교
29. 교황들의 도덕적 방종
30. 추기경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는 임으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회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1-9]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신실한 신앙을 가르쳐 들어오게 한 것은 열쇠: 땅에서 매면 하늘에 푼다[교회의 재판권]. 하늘의 권세를 교회에 주셨다. 출교를 주셨다. 권징과 신실한 권한을 주셨다. 이런 태두리 안에서의 교회 생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있다. 참 교회 안에서 좋은 교회는 하나님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하게 되느냐의 차이다. 한국의 10대 교회 머리 수 많은 교회라고 인식하고 있다. 교회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얼마나 풍성하게 흘러나오는가가 좋고 나쁨이다.
1. 교리에 관한 교회의 권위: 그 임무와 한계
2. 교리에 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3. 교리에 관한 예언자들의 권위
4. 교리에 과한 사도들의 권위
5.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
7.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8.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9.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말씀에 의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10-16]10. 가톨릭 교회의 주장
11.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 있다
12.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13.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14. 전승은 성경보다 낫다
15. 교회의 교리적 천명에는 모순이 있다
16. 반대자들이 드는 예는 빈약하다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교회 회의의 참된 권위 1-2]1. 두 가지 서론적인 말
2. 교회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목자들의 결점 때문에 회의들도 오류를 범한다 3-7]3. 목자가 없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 자존할 수 있다
4. 목자들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5. 목자들을 잘 식별해야 한다
6.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7. 요한복음 11:47에 있는 예
[성경을 떠났기 때문에 회의들은 타락했고 니케아와 칼케돈 회의도 결함이 있었다 8-11]8.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9.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10.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11.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눈 먼 인도자에게 순종하지 말라 후대 회의들의 결정에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과오가 많았다 12-14]12. 맹종은 불가하다
13.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14.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제 10 장
입법권: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 교회법과 교회 전통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1-4]1. 근본 문제
2. 가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도 만든다
3. 양심의 본성
4. 양심의 속박과 자유
[사람들과 교황들이 정한 법에 대한 양심의 입장: 하나님만이 입법자이시다 5-8]5. 사람들이 만든 법은 양심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6.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7.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8.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방법
[예배 의식을 제정한 교회법은 전제적이며 경박하며 성경에 배치된다 9-18]9.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10. 교황 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11. 가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12. 그들의 신비는 기만이다
13. 가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집성에 의해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14.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15.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한다
16.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17. 가톨릭의 교회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18. 가톨릭의 교회법은 사도들이나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사도적이라고 사칭하는 무익한 의식들이 축척되었다: 약한 양심들에 대한 의무 19-22]19.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20. 어그스틴의 말을 해석한다
21. 사도행전 15:20에 있는 명령
22.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
[예배에서 쓰는 유전과 인간의 조작을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께서 배척하신다 23-26]23.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이 된다
24. 하나님은 패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25. 가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을 논박한다
26.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교회 정치와 예배를 바르게 정리하는 길: 예절과 사랑과 자유로운 양심 27-32]27. 교회법의 필요성
28. 올바른 교회법의 문제
29.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 허식을 피하라
30.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31. 교회법과 관련된 속박과 자유의 문제
32.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 제도에서의 그것을 남용
[ 재판권과 권징: 열쇠의 권한과 국가 행정 1-5]1.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2. 매고 푸는 권세
3.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
4. 교회와 그리스도인 관리
5.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주교들의 부당한 권력에서 생긴 폐해들 6-10]6.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해하지 않았다
7. 재판권과 권징의 타락
8. 주교들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9. 주교들이 군주의 권세를 장악했다
10. 주교들이 어떻게 세속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교황들이 무모하고 부정직한 권력을 주장하며 세속적 권력을 찬탈했다. 11-16]11.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12. 콘스탄티누스의 헌서는 어리석은 사기다
13.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14.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
15. 가톨릭 성직자들의 치외 법권
16. 감독들도 세속 재판에 복종했다
제 12 장
교회의 권징: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진정한 권징에서 열쇠의 권한은 어떤 것인가 권징의 목적과 절차 1-7]1. 교회 권징의 필요성과 성경
2. 교회 권징의 단계
3. 숨은 죄와 나타난 죄
4. 경한 죄와 중한 죄
5. 권징의 목적
6.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7.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권징은 온전하게 실시하라: 엄격주의를 논박한다 8-13]8. 교회 권징의 엄격주의와 온건주의
9. 교회 권징에 따르는 우리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10. 출교는 교정 수단이다
11.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12. 혼란을 일으키는 엄격주의: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
13.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개인적 및 공적 금식의 가치와 목적: 준수해야 할 원칙들 14-18]14. 죄를 공적으로 사로 고백한다
15. 금식의 목적
16. 금식과 기도
17. 금식과 회개
18. 금식의 성격
[미신 공로 사상 위선적인 금식 사순절 행사 등은 위험한 것이다 19-21]19. 금식에 대한 오해
20.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21.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성직자 독신 제도는 유해한 새 제도다 22-28]22. 성직자들의 권징과 그 타락
23. 사제 독신제는 성겨에 배치된다
24. 결혼을 금하고 영적으로 해석했다
25. 여기에 반대하는 성경적 이론을 반박한다
26. 고대 교회와 독신주의
27. 독신주의의 후기 발전
28. 독신 제도 하의 폐해
제 13 장
맹세: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맹세의 본질: 맹세에 대한 일반적 오해 1-7]1. 타락과 여러 가지 위험
2.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3. 맹세하는 사람
4. 의도에 따라 맹세를 분류하다
5. 미래에 관한 맹세
6.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하여
7. 사악한 맹세
[수도사들의 맹세와 수도원 생활의 쇠퇴 8-10]8.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
9. 수도원 생활에 대한 어거스틴의 묘사
10. 수도원 생활의 초기와 후기를 비교한다
[수도원의 완전성을 말함은 잘못이다 11-14]11. 수도원 생활은 상태가 완전한가
12.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활 법칙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13. 마태복음 19:21의 의미
14. 수도원들의 분파주의
[고대의 주장과 수도원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신약성경에 있는 과부와 여집사는 수녀가 아니었다 15-19]15. 수도사들의 행실이 타락했다
16. 고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의문
17. 수도사들의 맹세 특히 독신 생활에 대한 맹세
18. 디모데전서 5:12에 있는 과부들의 경우
19. 수녀들은 매우 다르다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 20-21]20. 허용할 수 없는 맹세는 지켜야 하는가
21. 수도원 맹세를 파기하는 문제
제 14 장 : 칼빈이 생각한 표지가 말씀과 성례이기에 중요하다. 개혁주의자들 가운데 이것 때문에 갈라졌다. 핵심이다. 이것은 주님이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세례를 주라 성찬을 기념하라
성례
[성례란 말의 뜻: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1.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하나님의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서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은: 말씀과 성례 은혜를 담아주시는 그릇[방편]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례말고도 말씀이 은혜의 방편이다. 관련성이 있는데 둘 다 하나님께서 가시적인 교회에 주시는 성장할 수 있는 것인데 말씀이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성례의 목표도 그리스도다. 말씀 성례가 그리스도가 아는 것만큼 은혜를 체험한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두 수단이 말씀과 성례이다.
차이점: 말씀은 독립적 성례는 말씀과 성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성례의 의미 지향하는 바를 시행해야 한다. 말씀 없이는 안 된다. 성례는 반드시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2. 성례라는 말
3. 말씀과 표징
그런데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말씀의]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하며 이를테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 부동하며 자체이외에서 더 훌륭한 학인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 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괴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려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세례가 연합하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 이것을 더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가시적인 외형적인 그림이 세례의식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보고를 파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사는 사람이다. 이 말씀을 더욱 교제하도록 하는데 더 확실하게 유지하게 한다. 이것인 성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약한 믿음이 성례를 통하여 강해진다. 더 생생하게 해준다. 연합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먹고 산다. 말씀도 은혜가 되지만 성례는 늘 새롭게 된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공무서는 쓰는데 빈 백지에 도장을 찍으면 소용이 없다. 내용이 있고 도장이 있으면 권위가 주어진다. 공문서 위에 도장을 찍는다. 성례는 인쳐주는 효과이다. 그래서 보이는 말씀이다. 설교는 들리는 말씀이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7-13]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말씀과 성례의 효력은 역시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말씀에 역사하시는 성령이듯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성례식에 참여한다고 은혜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은 성례 자체가 은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칼빈은 성령을 많이 높인다. 칼빈은 성령님의 신학자이시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무도 아니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듣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깨닫고 원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께서 열어주셔야 성례의 주신 은혜를 알아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을 알게 하소서 성례를 통해서 은혜를 받게 해 달라고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믿음의 발생은 성령님,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는 방편이 말씀과 성례이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13. 사크라멘툼이라는 말
[성령 자체는 은혜를 주슨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믿음은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성례도 그리스도 왜?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찬은 이미 연합되어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면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성례에 임하는 사람들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령님이 주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성례에 임하기 전에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스코틀랜드 성례식을 하나가 부흥이 온다. 성례식을 할 때에 눈으로 보는 역사가 있기 때문 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성경에 있는 사건들이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18. 광의의 성례
말씀+증표[무지개 할례]=은혜 지속적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한다. 결혼+반지=사랑
기드온에게 약한 양털이 광의의 성례이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26. 유사점과 차이점: 어거스틴의 구별
구약의 광의의 의미와 성례와 신약의 성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 것은[신약]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가 부합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심을 같으나 구약은 희미 신약은 밝게
성례는 은혜의 방편 믿음을 가지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빛이 충만해야 한다.
제 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표징이다 1-6]1. 세례의 의미
그리스도와의 연합: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구체적으로는 사죄 칭의 화친…
물 속은: 죄를 씻어 줌+그리스도와 연합
세례를 안 주어도 연합: 세례를 받음으로 찡하게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감동이 없다. 충분히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연합의 상징, 예수님과 결혼식이다. 세례받은 날을 기억해야 한다. 진중 세례, 진정 믿음이 없으면 100번을 받아도 연합이 되지 않는다. 말씀 성례 믿음이 따라야 한다. 세례받기 이전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쉬운 것이 아니라.
2. 세례의 효력은 말씀없이 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이다
세례는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지역 교회에 가입이 된다. 영적 회원이 된다. 우리가 우리 신앙을 고백한다. 내 신앙을 고백한다. 2차적인 것이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 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10. 세례와 원조와 새로운 의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로마서 7장
13. 세례는 고백의 표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14. 표징과 실상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16. 세례는 집례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20. 비상한 세례에 반대한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부합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3. 세례와 할례
4. 차이는 외적인 것에 있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7. 예수님과 어린이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셨다 21-22]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22. 세례는 어린이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23. 어른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7. 세례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28.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들에게 대한 말씀이 없다
29. 예수님은 성인 성례의 원형이시다
30. 세례와 성만찬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32.우리의 어린이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슨 유익
[주의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1-3]우리는 밥 먹고 살듯이 예수님은 우리 영적 양식이다. 모든 은혜를 받아 산다.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 한 번 연합이 되면 영원 성찬은 날마다 좋기 때문에 횟수는 정해지지 않으나 자주 해야 한다. 성찬의 지향;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 성찬식: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확인하고 누리며 떡이 하나의 떡으로 나누어진 것이기 때문에-우리 함께 함께 성도들도 하나라는 진리이다.
쯔빙글린 루터파 칼빈 파 가톨릭 떡은 떡 예수님은 하늘에 기념 떡은 떡대로 예수님이 오심 예수님의 몸은 하늘 보좌 우편 영적으로 임재 떡이 예수님의 몸이 된다
잘못된 가톨릭의 미사를 잘못
1. 표징과 본체
2. 성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3.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때에 성찬으로 말미암아 보장된 약속: 이것은 설명하기보다는 느끼는 신비이다 4-7]4. 성만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5. 믿음으로 먹는다는 뜻
6. 이 일에 대한 어그스틴과 크리소스톰의 생각
7.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8-10]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뜻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외형적 표징과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스콜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잘못 표현했다: 화체설도 하나의 예다 11-15]11. 성례의 의미와 본체와 효과
12.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13.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떡을 하나님으로 오인한다
14. 화체설
15. 화체설의 근거와 이론
[몸의 편재설을 편협한 문자적 해설이라고 반대하는 이유: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관한 견해를 설명한다 16-31]16. 반대론
17.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18.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19.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다
20. 말씀으로 제정하심
21. 확고한 말씀의 비유적 해석
22. 이다라는 말
23. 순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24. 우리의 해석은 이성에 지배되었다고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25. 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26.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27. 위에서 말한 올라간다는 뜻
28. 어그스틴의 증언
2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
30.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배척한다
31. 그리스도를 우리에게고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올리우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32-34]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34. 불신자의 성찬 참가에 대한 어그스틴의 생각
[물질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배척한다 35-37]35. 물질 숭배를 배척한다
36. 이런 숭배는 미신이며 우상이다
37. 성별된 떡으로 행하는 미신적인 의식들
[특히 중요한 점들: 상호간의 사랑 설교의 동반 병든 영혼의 약 합당하게 먹음 합당한 형식과 빈번한 집행 38-46]38. 성찬에는 서로 사랑하는 뜻이 내포되었다
3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
40.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한다는 뜻
41. 누가 합당한가
42. 믿음과 사랑은 필수 조건이지만 완전성은 그렇지 않다
43.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
44.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45. 참여할 의무에 대한 어그스틴과 크리소스톰의 견해
46. 일년 일회의 성찬 참여에 반대한다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47-50]47. 한 가지만 행하는 성찬을 논박한다
48. 사도들은 다만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49. 후대까지 평신도도 잔을 받았다
50.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잔을 줄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 18 장
가톨릭교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말살하는 모독 행위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1. 로마 교회의 교리
2. 미사는 그리스도의 대한 모독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4. 말라기 1:11에 의한 주장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라고 보았는가
11. 교부들이 하나님의 제정 정신에서 이탈했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13. 희생의 성격
14. 미사를 판매한다
15. 유사한 가장과 망사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18. 미사는 더렵혀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소위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절하실 수 있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하라 4-13]4. 고대 교회의 관습
5. 로마 가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다
10. 가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13. 진정한 견진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14. 고대 교회 내의 참회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14-15를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21. 가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장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25. 성별의식 특히 삭발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28. 사제와 장로
29. 사제의 임명식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32. 부제
33. 차부제
[에베소서 5: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35. 그들은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 경시에서 혼란이 생겼다
37. 가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심=구원이다. 성례는 보이도록!
제 20 장
개혁주의자의 정치관 국가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기관이다 소중하다.
국가 통치
[국가 통치와 영적 통치의 관계 1-2]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교회와 국가로 사용한다.
우리는 사람이 이중의 통치 하에 있다는 것을 확립했고[그리스도인의 자유] 영혼 즉 사람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 관계된 통치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둘째 통치 즉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에 대해서 논하겠다.
이것을 잘못된 국가관 재침례파에 대한 변론이다. 우리는 이중 통치를 받는 이중 국가자이다.
2. 두 가지 통치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국가 통치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 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비기독교 국가는 예배는 하지 못한다. 공산국가는 정칮적 안정을 취하게 한다.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3-7]3. 정부의 주요 임무
정부의 실지 운영에 대해서는 더 적당한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 여기서는 정부를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참으로 그 위치는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 밖의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회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 내가 위에서는 종교를 바로잡는 임무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법위 밖에 두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일을 정부 정부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3가지 조직: 주권 통치자+법+ 국민
법은 율법에서 나옴[안 믿는 자는 양심의 법, 자연 법을 주셔서 거기에 맞는 법=이방 법]
통치자 [4-8]
한 나라를 세운 통치자는 하나님이 세워셨기에 부인 배척해서는 안 된다.
4.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6.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선을 장려 악을 억제해야하는 집권자들
7.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정부의 형태들과 집권자들의 임무: 전쟁과 과세의 문제 8-13]8. 각종 정부 형태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소일거리일 것이다. 또 이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될 수 없고 신중한 고려가 필요하다. 토의의 성격은 크게 환경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계없이 정부 형태를 서로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제일 유용한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가장 쉽다. 철학자들이 논하는 정부의 세 형태에 대해서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귀족 정치가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하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9.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고려
도덕 시민 재판법으로 나누는데 도덕법은 이스라엘에게는10계명 이방인들은 율법의 두 돌판을 지향함 공동체 전체가 사랑과 공의로 지배하게 한다. 가장 공의와 정의와 사랑이 시행하도록 한다. 한 나라의 법은 도덕법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에 섭리한다. 미친 사람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국가의 위정자를 하나님의 세운다.
10.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11. 정부의 전쟁 수행권
국민들의 인권 생명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통치자가 하는 일이다.
12. 전쟁에서의 자체와 인도적 정신
13. 정부의 과세권에 대하여
[공법과 재판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 관련 14-21]14. 구약성경의 율법과 각국의 법
도덕법과 각 세계의 법은 연결되어 있다. 일반 나라는 자연법을 이것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다. 법률 생활을 할 수 있다.
15.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과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한다
16. 법의 단일성가 다양성
17.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18.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
고전의 문맥이 아니라, 법 질서 소송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자기들이 정한 집단의 법을 우선으로 해서는 안 된다.
19.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20.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21.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불의한 통치자도 공경하며 순종하라 22-29]22. 공경
23. 복종
국민들은 불복종 권한이 없다. 국가 공무원은 할 수 있다. 존 낙스 등이 확대한다. 국민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잘못된 통치자가 나왔을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
24.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
25.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26.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27. 예레미야 27장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28. 왕 개인을 존엄하다고 하는 성경의 증거
29.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우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30-32]30.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
31.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헙법상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
32. 인간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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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오직 한 권으로서–목회자의 손에 들릴 책인가?
문병호
1. 교훈적, 신앙고백적, 변증적 서책
그는 1509년 7월 10일에 났으며 1535년 8월 23일에 당시 철권(鐵拳)을 휘둘렀던 불란서 국왕 프란시스에게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즉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헌정하는 편지를 썼다. 프랑스 피카디 지방에 속한 작은 도시, 그러나 대성당이 위용을 자 랑하던 노용에서 예앙 꼬뱅(Iehan Cauvi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지 26년 이후의 일이었 다. 후에 그는 요아네스 칼비누스(Ioannes Calvinus)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졌으며 이로써 불란서 이름도 장 깔뱅(Jean Calvin)으로 바뀌었다. 이렇듯이 그의 이름의 연원(淵源)이 칼 비누스에 있으니, 우리가 그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 편지를 쓴 후 몇 계절이 지난 후 이듬해 3월에 출판된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부 제(副題)가 달려 있었다: “경건에 관한 전체 개요 대강(大綱)과 구원의 교리를 앎에 필요한 모든 것들, 경건에 힘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합당한 작품으로서 최근에 편집된.” 그것 은 경건과 교리를 담고 있는 책이며 경건에 힘쓰는 사람을 위한 책임이 처음부터 천명되었 다. 국왕에게 보낸 편지의 초입(初入)은 부제에 대한 부연 설명에 다름 아니었다. 이 작품을 쓴 유일한 목적은 종교에 대해서 여하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참 경건을 형성하 는데 필요한 어떤 근본적인 사항들을 전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이 일에 땅을 흘리 며 애쓴 것은 제가 목도(目睹)한 그리스도를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지닌 수많은 모국 프 랑스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그들 중에 단지 소수만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조금 젖어 있 을 뿐입니다. 이 책 자체가 말하는 바와 같이 저의 저술 의도는 간단한 그리고, 말하자면, 근본적인 가르침의 형식을 제시함에 있습니다.
1536년 『기독교 강요』초판은 신약 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가 되는 작은 분량이었 다. 절의 구분이 없이 모두 여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 1장은 율법 교리에 기본적으로 할 애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과 이신칭의 교리 등 주요한 신학적 논제들이 망라되었다. 제 2장은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루는데 집중되었다. 제 3장은 기도에 관한 바른 이해를 제시했다. 제 4장은 성례론을 개론, 세례, 유아 세례, 성찬의 순으로 다루었다. 제 5장은 잘 못된 카톨릭의 성례를 비판하는데 할애되었다. 여기에서 교황청의 잘못된 성경관과 구원관 그리고 교회론이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증례들에 의해서 여지없이 비판되었다. 마지막 제 6 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 돌려졌다. 여기에서 이미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 하는 자유라는 개념이 아디아포라 교리와 함께 고급스럽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 와의 관계가 입법권, 사법권, 재판권이라는 측면에서 비교적 정치(精緻)하게 전개되었다. 『기독교 강요』 초판은 익명으로 출판되었으나 이 책으로 말미암아 칼빈의 이름은 오히려 인구에 회자되었으며 이후 그가 개신교 내에서 뿐만 아니라 카톨릭과의 교리 논쟁에 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미 약관의 칼빈은 충분히 변증적이 었다. 그는 1553년 11월 첫날에 읽힌 콥 총장 연설문을 기초하면서 “사랑이 이끄는 믿음”
즉 “행위로 말미암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 즉 “사랑과 함께하는 믿음 (fides cum caritate)”을 변호한 바 있다. 카톨릭의 칠성례(七聖禮)를 비판한 제 5장의 분량 이 핵심적인 교리를 다룬 제 1장과 제 2장을 합한 분량과 거의 같다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 는 이 책이 또한 매우 변증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강요』초판은 또한 신앙고백적이었다. 이는 이 책이 신앙교육서 (catechismus)와 같은 형식을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1장의 많은 부분이 십계명에, 2장의 대부분이 사도신경에, 그리고 3장의 대부분이 주기도문에 할애되었다는 사 실을 통해서 우리는 이 책이 교육을 위한 근본교리의 요체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왕 프란시스에게 말했듯이 칼빈은 이 책에서 경건과 교리에 대한 “간단한 그리고 근본적인 가르침의 형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가르침의 속(裏)이 신앙고백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변호하기 위해서 변증적이어야 했다. 왕에게 보낸 서문에서 말하듯이 1536년에 칼빈은 이미 “거의 완벽한 변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ad iustae paene apologiae modum)” 나아갔다.
2. 교훈적, 신앙고백적, 변증적 목회 『기독교 강요』초판은 칼빈을 목회자의 길로 내몰았다. 그는 목회자로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한 프로테스탄트 도망자였다. 진리를 향한 서릿발 같은 엄밀 함은 있었으나, 그러해야 할 당위는 있었으나 현장의 경험은 전무했다. 성례에 관한 유래 없는 명문의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그 때까지 성례를 거행해 본 적이 없었 다.2) 이제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서, 성례를 거행하는 자로서, 권징을 시행하는 자로서, 즉 목회자로서 칼빈은 자신의 책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책은 17장으로 획기적으로 증보, 재편되어 1539년에 출판되었다. 새 책에는 여 전히 신앙교육서적인(catechetical) 요소가 남아 있었지만 구속사적 관점에서 교리가 조직화 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각각 처음 두 장을 차지함으로써 교리의 교훈적 요소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앎” 자체가 계시를 내리받음과 예배를 올려드림 과 함께 파악되어야 함이 논구됨으로써 지식의 경건성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회개의 장 이 신설되었다. 당시 카톨릭 신학자들은 회개가 고해성사와 보속을 포함해야 하는 것으로서 이해하여 잘못된 공로사상을 신학적으로 변호하고자 했다. 칼빈은 오직 은혜를 통한 믿음으 로 말미암은 회개를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신 칭의 교리와 선행에 대한 교리가 첨가되었다. 이 역시 변증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또한 신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한 장을 신설함으로써 신약과 구약은 실체(substantia)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oeconomia, admistratio, dispensatio)에 있어서는 다르다는 원리를 수립하 였다. 이로써 구약이 성경의 예비가 아니라 성경 자체임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변증적 성격 과 더불어서 신앙고백적인 요소가 강화되었으니, 특별히 처음으로 『기독교 강요』가운데서 “황금의 작은 책”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라는 이름의 장이 신설되었다. 여기에 서 칼빈은 기독교인의 철학(philosophia Christiana)은 그리스도의 철학(philosophia Christi)임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체를 “미래를 묵상하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 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1539년의 제 2판은 1540년에 초판이 출판된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거의 같은 시
기에 저술되었다. 로마서 주석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자연법과 일반계시론, 우리의 인격 뿐 만 아니라 행위조차도 의롭다 받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교리, 칭의와 성화 의 역동성, 의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구약과 신약의 교회의 연속성 (continuitas)과 하나임(unitas), 아디아포라 교리 등이 새로운 판에서도 깊이 새겨져 나타난 다. 이 시기는 대체로 칼빈의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망명기와 일치한다. 칼빈은 이곳에서 부 써(Martin Bucer)를 통하여서 목회와 교회 행정에 대한 안목을 얻고 이후 그가 평생 살아 가는 전형적인 목회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즉 그는 교회를 행정적으로 다스리고, 설교하고 심방하며, 주석을 쓰고, 신학논쟁을 통하여서 적극적으로 참 교리를 변증하는 일을 부지런 히 감당했다. 특히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있어서의 교회의 국가에 대한 바람직한 관계에 대 해서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제네바에 귀환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1541년 9월 제네바에 다시 돌아와서 칼빈이 시급하게 한 일들을 살펴보는 것은 이 후의 새로운 판의 『기독교 강요』의 성격을 가늠하는데 중요하다. 칼빈은 먼저 교회규칙서 를 제정해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교회의 네 가지 직분을 선포하고, 오늘날 당회의 기 원이 되는 장로들과 목회자들로 구성된 감독회(Consistoire)에 권징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문답 형태를 취한 제 2차 신앙 교육서를 작성하였다. 그리하여서 단지 서술형으로만 기록된 제 1차 신앙 교육서의 단점을 보완해서 교육 효과를 높였다. 또한 공 예배 양식을 정한 예배 규칙서를 제정하였다. 비로소 개혁주의 예배 모범의 전형이 최초로 수립되었다. 특히 우리는 이때부터 칼빈의 설교사역이 규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 시 세 교구의 교회들(쌩 삐에르, 라 막달렌, 쌩 제르베)에서 주일 새벽과 아침 9시에 설교가 있었으며 교구에 따라서는 오후 세시에 설교가 있었다. 칼빈은 주일날 두 번 설교 했으며 월, 수, 금요일에도 설교했다. 1542년부터는 더욱 자주 설교했으며 1549년 이후에는 주일 날 두 번 하는 설교 외에 격주로 매일 설교했다. 제 3판 『기독교 강요』는 1543년에 출판되었다. 칼빈은 맹세에 관한 장을 신설하 고 교회와 시민정부에 대한 논쟁들을 광범위하게 추가했다. 천사들에 관한 교리를 새롭게 다루었으며 진정한 예배를 수립하기 위해서 형상들에 대한 새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그리 고 시민정부와 자연법에 대한 논의를 확대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판의 기독교 강요를 가 장 교부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칼빈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 특히 어거스 틴의 작품들로부터 상당한 수의 인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부분이 네 개의 장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주 목해야 한다. 이전에 함께 다루었던 신앙에 대한 부분이 한 장으로서 독립해서 나갔다. 그 리고 나머지는 세 부분으로 사실상 사도신경 고백 자체에 대한 해석으로 남았다. 첫 번째 부분은 믿음, 하나님, 그리고 창조에 할애되었다. 두 번째 부분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다루었 다. 세 번째 부분은 교회, 죄용서, 그리고 부활에 대한 고백을 해석했다. 두 번째 부분을 기 독론과 성령론으로 나눈다면 네 부분이 되는데 이는 네 권으로 이루어진 1559년 『기독교 강요』마지막 판의 각각의 주제에 해당한다. 칼빈은 사도신경을 부분별로 나누어서 이해함 으로써 로마서에서 특징적으로 제시된 교리들을 제 편성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새로운 관 점이 목회 경험과 전망으로부터 배태(胚胎)되었다. 신앙고백적 요소와 교훈적 요소가 함께 조직화, 체계화 될 길이 열려졌다. 그리하여 변증의 효과가 극대화 될 것이었다. 제 4판 1550년 『기독교 강요』는 1543년 판의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다만 성경 구절들과 교부의 작품들에 대한 인용이 크게 확대되었다. 제 4판은 칼빈의 신학과 목회가 심오하게 깊어지 는 시기에 저작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장 아래에 절을 세분했다. 이 구조는 마지막 판 기독 교 강요에 있어서의 이해(서책)-목회-삶으로의 심화를 우리에게 예기하게 한다.
3. 교훈적, 신앙고백적, 변증적 삶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는 무려 80장에 달하는 큰 책이 되었다. 장을 묶는 “권” 을 넷으로 했다. 그리하여서 권-장-절의 점강적(漸降的) 구조를 취하게 했다. 이제 책은 성 경 전체와 맞먹는 분량이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새로운 “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기본적으로 따랐다. 칼빈은 새로운 책이 “가장 합당한 순서와 방법”에 따라서 저술되었다고 믿었다. 제 1권의 전반부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개괄적 고찰을 한 후 일반계시(자연법)와 특별계시(성경)를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삼 위일체론과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논구한다. 대체로 제 1권은 조직신학에 있어서 서론과 신론에 해당한다. 제 2권에서는 먼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다루고 이로부터 중보자 그리스 도의 필연성을 논한다. 여기에서 칼빈은 바로 이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지 않 고 먼저 율법과 신약과 구약의 일치와 차이에 대해서 몇몇 장들을 할애한다. 이로써 칼빈은 전체 성경의 실체가 그리스도임을 가르침의 순서상(ordo docendi) 이미 부각시키고 있다. 제 2권은 인간론과 기독론을 주로 다루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전통적인 주제인 로고스와 노모스 즉 그리스도와 율법의 교리가 중심 교리로서 자리잡고 있다. 제 3권에서 칼빈은 먼저 성령에 관한 논의에 한 장을 할애하고 이어서 믿음-회개기독교인의 삶-이신칭의의 원리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순서 자체를 구원서정 (ordo salutis)으로 보는 것은 금해야 한다. 사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비록 따로 장을 두지 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의 교리를 전체 구원론의 기초로 삼고 있으며 그 위 에 이신칭의의 원리를 세우고 있다. 처음 세 가지의 주제들(믿음, 회개, 기독교인의 삶)을 다룬 장들은 개인 구원의 서정을 다루었다기 보다는 이들 주제들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밝 히고 이를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하고자 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전체 구원 서정은 이신칭 의의 교리를 다룬 장 안에서 함축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전의 판들을 통해서도 칼빈은 동 일한 경향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이해해야 우리는 칼빈이 왜 이신칭의의 장을 바로 이어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다룬 장을 “칭의의 부록”이라고 부르는지 이유를 깨달을 수 있 다. 제 3권의 나머지 부분은 예정론과 기도론 그리고 최후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종말 론에 할애된다. 예정론이 은혜의 한 방편인 기도와 함께 다루어졌다는 사실은 칼빈이 이를 단지 선택자와 유기자를 나누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교리로서만 경직되게 이해하지 않고 구원 받은 백성의 삶 가운데서의 확신이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종말론적 언급이 구원론의 마지막에, 교회론 이전에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 판 기독교 강요 가 사도신경의 순서를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말론 은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의미 있는 교리로서 이해된다. 이렇듯이 제 3권은 구원론과 종말론에 할애되었다. 제 4권은 교회론과 시민국가론을 다루었다. 교회와 국가 모두 입법, 행정, 사법의 관점에서 논구되었다. 특히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함께 논의하면서 참교회는 양자 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을 통하여서 그 일치를 추구해야 함을 전체 문맥 가운데서 도도하게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수직적인 진리와 수평적인 사랑이 모이는 바로 그 점–십자가의 가 로대와 세로대가 만나는 점으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례의 언약성과 공동체성이
함께 강조된다. 마지막으로 한 장을 할애하여 다룬 시민국가에 대한 교리도 이러한 가시성 과 비가시성, 수직성과 수평성이 함께 깔려서 전개된다. 마지막 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중보직과 중보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삶의 부유함을 부각시킨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칭의의 의의 전가로서, 성화 는 그리스도의 성화의 의의 전가로서 다루어진다. 칭의는 단회적이며 성화는 반복적이다. 칭의와 성화가 구별은 되나 분리가 되지 않음은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단회적 교제 (communio)와 반복적 교통(communicatio)이 분리되지 못함과 다를 바 없다. 칼빈은 지금 도 보좌 우편에서 여전히 중보하시는 중보자의 사역에 중점을 두고 성도의 구원의 역동성을 추구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로서 성도 개개인은 각자에게 맡겨진 삼중직을 감당하고 살고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함이 파악된다. 그리하여서 새의 날개와 같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좇음으로서 값 싼 은혜에 허덕이지 않고 위로부터 내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성도만이 누리는 삶을 미리 맛보고 살게 된다. 우리가 주로 읽는 마지막 판 “강요”는 고질적이며 치명적인 질병 가운데서 저술되 었다. 성경 전권에 대한 주석을 대체로 마치고 성경에 붙들린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한 제네 바 대학교에 대한 구상도 끝낸 시점이었다. 비록 반쪽이지만 제네바 시민권도 얻게 되었다. 여전히 교리 논쟁은 더욱 깊어만 가고 설교와 강의로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그 가운데 하나 님께서는 각 “사람”의 영혼을 보게 했다. 그는 이즈음해서 출판한 책에서 자신이 살아 온 나그네의 삶을 쫒기는 다윗의 삶에 유비하면서 시편에는 일종의 영혼에 대한 해부(解剖)가 가해져 있다고 말했다. “영혼의 해부.” 칼빈은 1559년 판에서 “한” 사람이 어떤 존재이며 어떠해야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에 진력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서 한 사람이 되셨으며, 지금 하나님으로서 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앎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추구되었다. 오직 교훈은 주의 중보로 인한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 성령이 역사함으로써 말씀을 받음이 곧 존 재의 변화를 의미했다. 말씀에는 십자가에서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한 계속 적인 의의 전가가 그의 영을 통하여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내”가 고백에 이르게 된다. 삶이 고백이므로 경건이 논해진다. 경건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서 계시를 받고 받은 대로 올려드리는 예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삶 이 받음이며, 모든 삶이 드림이며, 모든 삶이 고백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변증적이다. 칼빈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원치 않았다. “De me non libenter loquor(나 는 자 자신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꺼워하지 않는다)!”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함으로 써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증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칼빈의 “나”는 불가분리하게 그의 교리에 부착(付着)해 있다. 루터의 경우, 주관적 요소는 종종 어떤 진술에 나타난 객관성 요소를 “변모(transfigures)”시킨다. 정반대로, 칼빈의 경 우, 객관적 요소는 주관적 요소를 압도한다. 그러나 주관적 요소를 압도함으로써, 객관적 요 소는 주관적 요소의 실체(reality)를 보존한다.3)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고, 그의 작품을 읽자. 그를 이용하지 말고, 그에 게서 듣자.4)
4. 말해져야 할 우리의 객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분주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고자 하면 되고, 우리 자신이 말하게끔 하면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 우리가 객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조종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판단할 기준조차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는 자기부인을 말할 수밖에 없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서 자기부인을 전개했다. 그러므로 이 책으로부터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배우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이 책을 통하여서 자기 자신이고자 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 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칼빈은 “강요”를 통해서 문체의 간결성(brevitas)과 유용성(facilitas)을 추구했다. “간결성”은 정의함으로써 실천적 지식에 이르고자 함이다. “유용성”은 하나님의 헤아림에 맡기고자 함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한 권의 저자가 아 니다. 비록 이 책이 칼빈을 대변하지만, 우리가 칼빈의 전체 객관을 말할 때, 그것은 그의 작품 전체를 망라한다. 그것은 58권의 전집(opera)의 글들과 수천편의 분실된 설교문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 고, 정리된 몇 줄로 그를 판단하지만 말고, 꾸준히 그의 작품을 읽을 일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말하는 이상,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 강요』을 읽어야 하는 제일의 당위성은 우리가 그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신학 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으로 알기 때문이다. “강요”는 주석과 설교와 함께 읽혀야 한다. “강요”의 순서에 따라 서 설교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요”를 읽고 말씀을 택해서 매일 가정예배를 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강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당(穩當) 하게 말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현재 『기독교 강요』초판을 라틴어로부터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다. 이 작 업 중 간혹은 감격하여 가슴을 치기도 하고, 멈추고 기도하기도 한다. 평생 읽을 명문으로 가장 최근에 줄쳐 놓았던 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칼빈의 전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믿는다; 소망은 그 분께서 시의적절한 사건으로 자신 의 진리를 보이시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그 분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 소망은 그 자신께서 우리를 향하여 항상 그렇게 행하시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졌 음을 믿는다; 소망은 언젠가 그것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믿음은 소망이 기대고 있는 기초 이다. 소망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보존한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신앙의 연약함은 마치 지쳐 서 쓰러지듯 하지 않도록 꿋꿋이 소망하고 인내함으로써 보존되고 양육되는 것이 합당하다. 사랑에 대한 증거는 조금도 더 불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리스도를 아버지에 의
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신 분으로서 파악함에 있어서[참고. 요 6:29] 참으로 그는 사함, 의, 평화,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일 뿐만 아니라 성화와 생수의 샘이시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와 열매[갈 5:22]이자 그의 성화의 일로서 사랑 을 발견한다[참고. 엡 5:26]. 보라 소망과 사랑이 믿음으로부터 한 쌍으로 나란히 태어나고, 나타나는 것을?그들이 그곳에 나눌 수 없는 끈으로 매여서 결합되어 있음을!
Soli Deo Gloria in Aeternum(하나님께 영원히 영광을)!
——————————————————————————1) 우리가 어거스틴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라거나 터툴리안을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us)라고 부르지 않듯이 학문 세계의 일관성을 위해서 최소한, 당분간 칼빈을 굳 이 칼비누스(Calvinus)라고 부르는 것은 과하다고 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깔뱅이라고 부르 는 것은 그의 모국어가 불어였으며 또한 불란스인으로서 불어권에서 그렇게 불렸으므로 합 당하다고도 할 것이다. 다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깔뱅을 칼비누스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오 히려 그 반대였으므로 칼비누스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고 할 것이다. 2) 칼빈의 제 1차 제네바 체류는 1536년 8월부터 1538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3) Alexandre Ganoczy, The Young Calvin, tr. David Foxgrover and Wade Provo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7), 242. 4) “A clever theologian can accommodate Calvin to nearly any agenda; a faithful thrologian–and a good historian–will seek to listen to Calvin, not to use him.” Richard A. Muller,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und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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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개
칼빈의 『 기독교 강요 』 를 만화로 읽는다!
『 기독교 강요 』는 종교개혁기에 교회 정치가로서, 종교적 논쟁가로서,교육자로서,저술가로서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칼빈의 작품이다. 칼빈은 우선 기독교의 교리를 단순하면서도 조직적으로 해석하여 쉽게 이해시키고자,또한 종교개혁 당시 핍박받던 개혁자들을 옹호하고자 이책을 집필하기 시작 했다. 칼빈이 26세부터 23년간 끊임없이 개정을 거듭한 이 방대한
저서는
제1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제2권은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제3권은 성령에 대하여
제4권은 교회에 대하여
로 이루어져 있다. 출간 즉시 당시 기독교 세계를 뒤흔들었던 이 걸작이 유럽의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 책이 없었더라면 루터가 죽은 후 신교가 어떠한 신앙에 빠져겠는가 하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귀착점을 잃고 흩어졌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신 책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심오하고 광대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그린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누구나 알기 쉽고 흥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재미나는 글과 위트 넘치는 그림으로 만나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주제를 만화로 조우해 보자.
기독교강요 최종판 세트
출판사서평
*이 책의 특징
1. 『기독교 강요 – 1559년 최종판』은 상, 중, 하 3권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세계기독교고전’ 시리즈의 44~46번 도서입니다. ( 『기독교 강요 – 1536년 초판』 (세계기독교고전14) 버전이 별도로 있습니다. )
2. 2003년 출간된 1판과 본문 내용은 동일하며, 2판에서는 표지 디자인을 개선하여 ‘세계기독교고전’ 시리즈와 통일성을 맞췄습니다.
3. 제본 방식을 [1판=양장 >> 2판=무선]으로 변경하였고, 이에 따라 상, 중, 하 각권2,000원씩 정가 인하되었습니다.
4. e북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으며 e북 정가는 각권16,000원, 3권 세트정가39,000원 (종이책 대비 38%할인) 입니다.
5. 원광연 목사님의 정확하고 깔끔한 번역.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 담긴 크리스천의 필독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천재 신학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 – 1559년 최종판』 은 기독교 역사의 방향에 심대한 영향을 준 책으로, 진정한 개혁주의 기독교의 신학대전이다. 칼빈주의 전체는 『기독교 강요』 속에 들어 있다. 이 책은 칼빈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저술로서, 일생동안 개정 혹은 수정하여 1536년 초판본에 비해 분량이 다섯 배 정도로 늘어났다.
『기독교 강요』는 저술활동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하여 그는 종교개혁자로서의 생애에 있어서 자신의 사상 앞에 제시된 모든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설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사상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 볼 수 있었다.
그의 다른 신학적 저서들에 어떠한 가치가 부여되든 간에, 확실히 『기독교 강요』는 칼빈이 자신의 사상을 가장 충실히 해설한 요약서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강요 – 1559년 최종판』은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칼빈주의 사상의 종합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책만으로도 충분하다.
기독교강요 서론(Introduction)
기독교강요 서론(Introduction)
성서서원
새롭게 영역(英譯)된 이 기독교강요는 수 세대에 걸쳐 인류의 신앙과 행동 양태를 형성하면서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학구적인 기독교인들의 도서 목록에 4세기 동안이나 줄곧 자리를 차지한 신학 서적이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보다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책의 제목은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에 대한 모호한 개념들이 널리 화자되고 있다. 본서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방대한 문헌들이 때로는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이 책은 기독교를 거칠고 준엄하며 편협하게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성경 진리의 독보적 해석이며 복음주의적 신앙의 보루로 격찬을 받고 옹호를 받았다. 평가를 가장 받지 못할 때에도, 실제 교회들의 삶과 각 개인들의 습관에 대한 이 책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정부 치하에서 예배를 금지당한 기독교인들에게 본서는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역사의 전화기에서 사회의 기초들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츠러드는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이 고전에 새로운 경의를 표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탐구하였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칼빈의 방법이나 용어들과는 상당히 다른 방법과 용어로 훈련받는 현대에도, 이 명작은 계속해서 그에 대한 심층 연구를 요구하며, 기독교 교리와 사회적 직무 분야에 대해서 사고하도록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I
기독교강요(Th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는 성경적인 기독교의 부활이라는 기치를 내건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한 젊은이의 생생한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다. 칼빈이 거친 단계들이나 이른바 그의 “돌발적인 회심” 날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칼빈의 확신은 투쟁과 고뇌의 산물이다. 대성당이 있는 교구 도시인 노용에서 소년 시절을 보낸 후 그는 일찍이 파리 대학에 진학하였고 후에는 오를레앙(Orlians)과 부르그(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에서 떠나 고전 문학에로 관심을 돌렸다. 이렇게 활동하던 기간(1523-1533) 중에 그는 성경학, 복음적 열정, 박해 및 순교 등의 형태로 당시 프랑스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당대의 종교적 위기를 점차 깨닫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대학의 학장이 되었을 때, 칼빈은 콥이 1533년 11월 1일에 연설한 학장 연설과 어떤 면에서는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 연설은 명확한 개신교적 발언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가렛 드 앙골름(Marguerite d’ Angouleme)이 이끄는 당시 성경적 휴머니즘을 반영한다. 이 여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성경을 불어로 번역하고, 영향력을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고령이었던 노학자 르페브러(Jacques lefevre of Etaples)였다. 루터와의 친분도 어느 정도 있었음이 이 연설문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 원리들을 신봉하였던 사람이 작성하였다는 내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문의 대담성은 당국자들을 경악케 하는 것이었고, 칼빈은 그것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신하였고, 그 다음해 거의 일년 내내 숨어서 지냈다. 네라끄에 있는 르페브러를 방문한 후 봄에 그는 노용(Noyon)으로 가서 새로운 결정에 따라 행동하였다. 그 곳에서 1534년 3월 4일, 그는 어린 시절에 교육받아 왔던 성직도 포기하였고 이에 따라 미개혁 교회 및 성직자와의 관계도 단절하였다. 비개신교 성경 운동의 은퇴 지도자인 르페브러와의 대화가 그로 하여금 개신교 대열에 확실히 서게 만든 “회심”의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이후로 그는 복음주의적 신앙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을 결코 멈추려 하지 않았다. 그 해 말에 그는 격렬한 두 개의 서문을 썼는데, 이것은 그가 조카 올리버땅(Pierre Robert Olivetan)이 삐에몽의 발도파(Waldenses of Piedmont)를 위하여 마련한 프랑스어 성경의 신약과 구약의 서두에 실을 예정이었다. 이 책이 1535년 6월에 출간되었을 때에, 칼빈은 바젤에 체류하였고 그의 『Instie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원고는 상당히 진전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저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직 프랑스에 머물러 있었던 1543년일 수도 있다. 뒤 틸레트(Du Tillet)가(家)가 앙골름의 끌래(Claix)에서 그에게 “조용한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최소로 줄여 말한다 해도 그가 그곳에서 대할 수 있었던 방대한 장서들이 훗날 위의 책에 반영된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이 새로운 운동을 하는 저명한 지도자들에게는 점점 더 위험하게 되어 갔다. 이 때문에, 그리고 그가 어느 곳을 가든지 그는 질문자들로 에워싸였기 때문에, 칼빈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를 해외에서 찾기로 작정하였다. 1535년 1월 초엽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바젤로 향하였다. 당시 많은 개신교인들이 점차 심해져가는 박해를 피해 도주하고 있었다. 국왕이었던 프란시스 1세는 1534년 10월 18일의 플래카드 사건에 대해 격분하였다. 이 날 밤에 미사에 대한 통렬한 공격 내용이 담긴 벽보들이 공공건물에 나붙었고 심지어는 왕의 침실에까지 뿌려졌던 것이다. 수많은 혐오자들이 투옥되었고 화재가 연일 발생하였다.
칼빈은 주로 1588년에 발간된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의 생애에 있어서 어려웠던 시기에 대해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다. 그는 연구를 위하여 “조용한 은신처”를 찾으려고 고향을 떠난 후에 그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화재 사건들과 이에 대한 왜곡 설명을 어떻게 듣게 되었는가를 간결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칼빈이 “바젤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는” 동안에, 박해로 야기된 격렬한 반(反)프랑스 움직임을 완화시키려고 프랑스 궁중에서 나온 허위 성명서들이 독일권에서 널리 퍼지고 있었다. 칼빈의 말대로 이 성명서들은 고난 받는 자들을 “재세례파 교도들과 선동적인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선언서는 파리의 감독이며 왕을 대신하여 독일 정부와 신학자들과 교섭하였던 협상자의 형제 기욤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2월초에 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칼빈은 그러한 선언서들이 장차 있을 유혈 사태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확신하고, 침묵을 지킨다면 자기는 비겁장이요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는 신실하고 ‘거룩한 순교자들’로 그가 간주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부당하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그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그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구들이었고, 그 가운데 특히 파리의 상인이며 삐에몽 출신의 왈도파 교도였던 에띠엔느 드 라 포즈(Etienne de la Forge)는 1535년 2월 15일에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말대로는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죽음을 당한 내 형제들이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외국 민족들을 감동시킴으로써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본서가 형성되었다. 그의 저술에 관한 그 이전의 의도들이 어떠하든 간에 그는 이제 그것의 출판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1535년 1월부터 8월까지 본서 저술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중대 사건들을 계속해서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출판 활동을 금지하려는 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1월말에는 박해가 극에 달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왕의 종교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노(老) 추기경 뒤쁘라(Duprat)의 죽음으로 박해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루터파 교회와의 협상이 프랑스 궁정에 의해 2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결렬되었다가 당시에 재개되었다. 교회 개혁에 대한 협의차 파리를 방문해 달라는 긴급 초청장이 멜랑히톤(Melanchton)과 부처(Bucer)에게 전달되었고, 이 계획은 칼빈이 『Institutio』 원고를 완성한 지 며칠 후인 8월 28일까지는 계속 진행되었다. 왕은 이 모든 것에 있어서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상황이 우호적으로 변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기간 중에 칼빈은 유럽에서의 개신교 주장이 뮌스터(Munster)에 거점을 둔 열정적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인해 평판이 나빠지지 않을까 하고 염려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재세례파 지지자들은 오랫동안 포위를 당하였다가 1535년 6월말에 무참하게 궤멸 당하였다. 칼빈은 그의 책이 1535년 프랑크푸르트 가을 전시회까지는 출간되기를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논문 앞에 오는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The Prefatory to Francis I)에 그의 이름과 함께 날짜를 써넣은 1535년 8월 23일에 이르러서야 그의 원고는 탈고되었다. 바젤의 인쇄업자인 플랫터(Thomas Platter)와 라지우스(Balthasar Lasius)는 편집을 함에 있어서 오포린(Jean Oporin)의 협력을 받아 지체없이 작업을 진행하여 1536년 3월에 이 논문을 발행하였다. 이 초판의 라틴어 제목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다.
기독교강요, 구원론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빠짐없이 다룬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며, 최신판이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이 책은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왕에게 헌정되고 있다. 저자, 노용의 요한 칼빈, 바젤. MD XXXVI.
II
제목은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모두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Institutio 자체는 “훈련, 교훈”(instruction) 또는 “교육”(education)이라는 의미로 낯이 익은 것이다. 이 저서는 기독교 교리 개요로서 그리고 저자의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박해자 왕에게 바치는 고백으로써 계획되었다. 왕에게 드리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탄원서인 헌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점에서 본서 자체는 그것이 기록되었을 때의 역사적 위기를 실감나게 전해 준다. 종교적 심성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가 장엄하게 표현되고 명료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칼빈 시대의 문제들 및 개혁 교회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깊이 연관된다. 칼빈이 프란시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를 왕의 죽음 이전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Institutio 후기 판들에 그대로 실은 것은 그의 특징적 방법이다. 당시 상황을 깊이 인식하고 쓴 것이기는 하지만, 강요는 박해당하는 성경적 신앙 소유자들을 항구적으로 유력하게 변호하는 것이다.
1536년판 논문의 본문은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장은 기독교 교육 역사에서 잘 알려진 주제들에 관한 것이며, 루터의 교리 문답책(Luther’s Catechisms)에 수록된 주제들, 즉 율법, 신조, 주님의 기도(Lord’s Prayer) 그리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
) 등을 다룬다. 제5장은 중세 교회에서 매우 중시되던 5가지 성례전(견진 성사, 고해 성사, 병자 성사, 신품 성사, 혼인 성사) 인정에 대한 논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6장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한 도전적인 논의이며, 정치적 · 사회적 교훈 요소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 책은(간단한 색인을 포함해서) 크기가 6⅛×4인치의 8절판이며 페이지 수는 520페이지이고 길이는 신약성경의 에베소서 끝까지에 해당한다. 저자는 그것을 또다시 확장하여 1559년에는 최종 형태에 도달하였는데, 이때의 분량은 대략 구약성경과 공간 복음서를 합친 것과 동일하였다. 본서 출간 6개월 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출판한지 1년이 못되어 그 판은 품절되었고 개정판을 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 이 일에 착수하였지만, 칼빈이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바젤에 체류해 있는 동안이었던 1538년에 이르러서였다. 인쇄업자가 바뀐 것을 포함하여 얼마의 시간이 지연된 후에, 개정판은 웬델린 리헬(Wendelin Rihel)에 의해 1539년 8월에 슈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발간되었다. 책 제목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개정판을 가능한 한 초판과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글 번역서에서는) 책 제목 앞에 나오는 “마침내 진정으로 제목에 합당한”이란 이상한 문구는 초판의 상세한 제목의 가정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확실히 신판의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다. 칼빈은 그 책에서 구체화시킨 변화들을 스스로 축하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6장이 아니라 7장으로 되어 있지만 분량은 비슷하다. 이 저서의 학문적인 중요성은 어거스틴(Augustine), 오리겐(Origen) 및 기타 교부들 그리고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키케로(Cicero), 세네카(Seneca) 및 최근의 몇몇 학문적인 저술 등의 인용문들을 다수 포함시킴으로써 상당히 증대되었다. 성경 인용도 또한 상당히 증가되었다. 추가된 장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및 기독교인의 생활 등과 같이 칼빈의 사고의 구조에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는 주제들을 다루는 장들이 몇 개 있다. 1539년 8월 1일자로 독자에게 보내는 간략한 편지에서 저자는 초판에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인 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며, 개정판을 내는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신학 지망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시키는데 사용될 하나의 교과서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이 책의 형태도 책상용으로 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 계수에 오차가 있음을 인정할지라도 그 책은 총 346페이지이며, 크기는 13×8인치이고, 학생이 메모할 수 있는 넓은 여백이 있다. 프랑스에도 보급된 개정판의 일부에는 칼빈의 이름을 “Alcuinus”로 읽도록 철자 순서가 바뀌어져 있다.
초판 출간 직후에 그것의 프랑스어 역이 칼빈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란시스 다니엘(Francis Daniel)에게 보내는 1536년 10월 13일자 편지에서 칼빈은 제네바 정착과 그 이후의 와병에 대해 전하면서 그는 그의 “소책자”(libellus)의 프랑스어 판 준비에 계속 몰두하였다고 말한다. 그 “소책자”가 『강요』(Institutio)였다는 가정은 개연성은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 단계에서 칼빈이 그 논문을 가리켜 libellus라고 하였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539년판 서문에서 1536년판에 대해 사용한 말은 opus(저작)이기 때문이다. 로잔 논쟁(Disputation of Lausanne) 직후에 다니엘에게 편지를 쓸 무렵에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믿음의 교육과 고백) 준비에 바빴던 것이 확실하다. 이것의 프랑스어 판이 대체로 라틴어 원판을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라틴어 판은 실제로 1538년판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강요』의 핵심 논쟁들을 약술한 것으로서 간략하고 단호한 문체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소책자”이지만, 그것의 라틴어 저작과 프랑스어 번역판 출판에는 칼빈이 교회 재조직이라는 새로운 일을 하면서 수주일 동안에 걸쳐 낼 수 있었던 시간들이 모두 소모되었다. 그해 가을에 칼빈은 당면했던 긴급한 일 때문에 『강요』 분량의 저작을 번역할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1536년 또는 1537년 프랑스어 판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프랑스어 판은 유명한 1541년 판이며, 이는 칼빈이 1539년 라틴어 판을 직접 번역한 것이다.
III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장 지라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고, 822페이지, 7½×4½인치 판형에, 약간 거치른 인쇄의 소형 콤팩트판 책이다. 이 책은 휴대가 간편하며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평신도 독자 예배 의식의 집행을 허락받은 평신도들을 위해 계획되었다. 프랑스에서 발행 허가의 희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발행 부수가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프랑스어권 스위스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그 책의 서두의 개요에는 학술적 용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목적은 “구원의 교리에 관한 교육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래도 장(章)의 순서에 한 가지 변화가 있을 뿐, 1539년 판에 프랑스 옷을 입힌 것뿐이다. 칼빈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프랑스 산문의 발전을 연구한 학도들에게서도 그것의 문체는 극찬을 받았다. 또한 그것은 지속적이고 중대한 사상의 표현 매개체로서 프랑스어가 최초로 사용된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어의 특색을 그렇게 창조적으로 표현한 책이 소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라틴어로 생각하던 저자의 번역이라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 보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했고, 다른 수단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1542년 7월과 1544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그 책들을 파리 노틀담 사원 앞에 쌓아 놓고 불태운 사건이다.
초판의 모든 변증적 요소들은 저작이 방대해지면서도 그대로 존속된 것은 물론이지만, 새로운 서문들과 추가된 자료들은 신학도들과 혹은 평신도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대한 교육이 점차 저자가 의도하는 목표로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1543년의 라틴어 제3판(슈트라스부르그에서 리헬에 의해 두 번째 인쇄된 판)에는 네 장이 새로 추가 삽입되었고, 그러므로 장(章) 수는 총 21장이 되었다. 이 판은 1545년에 재발행되었고, 그 해에 증보판이 제네바의 지라드 인쇄소(Girad’s Press)에서 간행되었다. 또한 지라드에 의해 출간된 1550년의 라틴어 판은 1543년 라틴어 판과 단지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1550년 판에서 소개된 주목할 만한 개선점은 번호를 붙여서 절을 구분한 점이다. 21장에서 총 1217개의 구분된 절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색인이 추가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다루었던 주제들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저자가 인용한 성경구절들과 저작들에 대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출판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 1550년에 파리에서 제네바로 왔으며, 거기서 그는 프랑스에서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성경 발행과 종교서적 발간이라는 그의 일생의 사업을 제네바의 목회자들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재개하였다. 이 사람이 곧 로베르 에스띠엔느 혹은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or Robertus Stephanus)이다. 그는 새로운 학문과 종교개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학자의 출판업자 가문인 대(大) 에스띠엔느 가문의 유명 인물이었다. 1553년 2월에 그는 칼빈이 그때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훌륭한 『강요』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13½×8¾인치의 2절판 크기였고, 아름다운 활자체로 나무랄 데 없이 거의 완벽하게 인쇄되었다. 이것은 왕에게 드리는 헌사와 색인을 제외하고 441쪽이었다. 그러나 내용면에는 1550년 판에서 더 진전된 것이 없다. 아담과 장 리버리(Adam and Jean Rivery) 형제가 이 책의 본문은 변화 없이 색인만 증보하여 8절 크기의 소책자로 1554년에 제네바에서 재발행하였다.
현대의 독자들 중에는 초판에 더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번역서의 대본(臺本)으로 사용된 1559년의 증보판보다는 1539년 판이나 그것의 1541년 프랑스어 판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초기 단계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그 책이 덜 지루하고 덜 논쟁 대상이 되며 충분히 이해하기 쉽고 읽기에 더 편하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반박한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말할 나위 없이 초기 판들을 재발행하는 일은 적절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판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를 무시하고,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이상에 맞도록 그의 저서를 개작(改作)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노력의 결실을 말살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59년의 라틴어 판은 칼빈의 가장 명백한 권위 있는 인정서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항상 주장되어야 한다. 이 책 서두의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그는 그의 저서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그 이전의 개정판들에 대해 언급하고, “내가 기울인 노력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 저서가 현재와 같은 순서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는 4일열(四日热, a quartan fever)이라는 병으로 열을 앓으면서 개정작업을 하는 동안에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이 일을 수행하도록” 만든 열정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 가운데 표현된 성취감이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여태까지는 존중되었고, 그 결과 이것이 라틴어 판에 대한 결정판이 되었고 1863년까지는 그것만이 전적으로 재발행되었으며 번역판과 요약판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 결정판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칼빈 신학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점차적으로 증대되었고, 칼빈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신학 저술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연구의 초점이 우선적으로 『강요』에 향하게 된 것은 당연하며, 현대 연구에 있어서 그 저서로부터 인용하는 경우에는 1559년 판을 인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것이다. 그 책의 절(莭)을 표시해주고 인용을 용이하게 해주는 번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처럼) 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거의 공용어의 일부로 간주되고 있다. 이 라틴어 판은 그 이전의 판본들보다도 분량 면에서 80% 정도가 더 많다. 이 책이 모든 나라에서 아주 오랫동안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학문적 교류를 위해 그 이전 판들로 돌아갈 실제적 가능성은 이제 전혀 없다.
이 책은 제네바에서 인쇄되었고 로베르 에스띠엔느 출판사에서 1559년 8월 16일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인용된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 칼빈이 서명한 날짜는 8월 1일이다. 유명한 출판업자요 생산적인 학자였던 에스띠엔느는 3주일 후에 죽었고, 따라서 최종 형태의 『강요』는 그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그 책의 표제는 다음과 같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i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insti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now first arranged in four books and divided by definite headings in a very convenient way: also enlarged by so much added matter that it can almost be regareded as a new work.
다음에는 저자의 이름이, 그 아래에는 발행인의 이름이 유명한 올리브 가지 마크와 함께 나오고 맨밑에는 GENEVAE / M. D. LIX가 있다.
IV
칼빈은 라틴어 판 강요의 개정판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제네바의 장 끄레스뺑(Jean Crespin) 출판사에서 증보된 프랑스어 번역판이 1560년에 발행되었다. 칼빈은 이 번역판을 자신이 직접 준비하거나 가까이에서 관리 감독하였다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강요』의 라틴어 판과 프랑스어 판은 똑같이 그 수요가 모두 광범위하였고 심지어 칼빈이 죽기(1564) 전에도 여러 번에 걸쳐 재판되었다. 1561년에는 라틴어 판이 두 가지로 새롭게 인쇄되었는데, 하나는 슈트라스부르그의 칼빈 전담 출판업자인 리헬이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2절판 15×12인치 책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제네바의 앙트완느 레불 또는 안토니우스 레불리우스(Autoine Reboul or Antonius Rebulius)가 만들어낸 8절판 크기로 980쪽 분량의 책이다. 레불은 그가 권말에 장, 절을 책 인용과 함께 예시하면서 알파벳순으로 주제 색인을 삽입시킨 것은 독자들 다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59쪽 분량(쪽 번호 없이)의 다소 방대한 이 색인은 후에도 라틴어 판 및 프랑스어 판과 함께 인쇄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아래에 언급된 말로라(marlorat)라는 두 색인과 함께 인쇄되기도 했다. 레불이 펴낸 것은 읽기 쉬운 작은 활자로 만들어졌고 난외에 참조 성구가 적절하게 되어 있다. 후대의 라틴어 판들 가운데 두 개가 편집상의 문제로 특별히 중요하다. 이것은 라이덴(Lieden)의 유명한 출판업자인 엘제비르(Elzevir) 가문이 1654년에 출판한 유명한 2절판 『강요』와 1667년에 암스테르담의 쉽퍼(J. J. Schipper)가 발행한 「Opera Calvini」의 제9권을 구성하고 있는 강요이다.
1560년 프랑스어 판은 1561년에 제네바에서 두 차례 재판되었다. 1562년에는 이 판이 4회 발행되었는데 제네바와 까엔(Caen)에서 각각 1회씩 인쇄되었고, 장소와 발행인 표시가 없는 두 가지 판본이 발행되었다. 1563년에는 리용(Lyons)에서, 1564년에는 제네바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1562년에 제네바의 출판업자 쟈크 부르죠아가 발행한 8절판은 아귀스뗑 말로라가 만든 두 개의 색인을 하나로 합한 최초의 『강요』였다. 말로라는 학자적인 성직자이며 소수의 책을 낸 신학저작자로서 같은 해에 루엥(Rouen)에서 박해자들의 손에 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 색인 중 첫 번째 것은 강요에서 다룬 주요 문제들의 색인이며, 다른 하나는 강요에서 인용되거나 언급된 성구 색인이다. 말로라는 흥미 있는 서문을 썼는데, 거기서 그는 이전 판본들의 참조 성구가 몹시 부정확함을 발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칼빈이 오로지 확인 문구만을 사용하는 곳에서도 성경 구절을 완전히 제시한다. 그 유용한 색인을 단 라틴어 판은 그 후의 라틴어 판 『강요』와 함께 간행되었다. 예를 들면, 제네바의 프란시스 뻬렝(Francis Perrin)이 1568년에 펴낸 강요와 이후의 수많은 판본들, 즉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판들이 그것들을 사용하였다.
프랑스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1536년 판은 1540년에 부르고스(Burgos)의 프란치스코 엔지나스(Francisco Enzinas)에 의해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 같다. 엔지나스는 멜란히톤(Melanchton)의 친구이며, 크랜머(Cranmer)의 보호를 받고, 칼빈의 통신원이었고 유명한 신약 학자요 번역가다.ª¹⁴⁾ 만일 최초의 스페인어 판이 칼빈 자신이 번역한 프랑스어 판보다 실제로 앞선 것이라면, 최초의 이탈리어 판은 더 늦은 프랑스어 판에 의거하였다. 이탈리아 청년 시인이며 종교적 이유로 제네바에 피신한 파스깔리(Giulio Cesare Pascali)가 그곳에서 그의 이탈리어 번역판을 만들어 낸 것은 1557년이었다. 파스깔리는 프랑스어 판을 대본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은 1551년에 개정되고 1553년과 1554년에 재판된 것이었다. 그것은 제네바의 이탈리아인 피난자 교회의 가장 유명한 일원이며 비꼬(Vico)의 후작(侯爵)인 갈레아조 까라치올리에게 헌정되었는데, 칼빈이 일년 전에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이 사람에게 헌정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간행된 수많은 번역판들은 완성된 『강요』를 대본으로 삼았다. 일찍이 1560년 12월 5일에 네덜란드어 판이 엠덴(Emden)과 도르트(Dort)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는데, 번역자는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I. D.”라고 밝히고 있다. 이 머리글자는 요한네스 뒤르키누스(1592년 죽음)를 나타내는데, 그는 상당히 저명한 목사요 저술가였으며, 그 당시에는 엠덴에 체류하였다. 1572년에는 최초의 독일어 판이 하이델베르그에서 발간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신학부 교수들이 준비한 것이며, 해석적 개요가 첨부되어 있다. 이 번역판이 158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그리고 1597년에는 하나우(Hanau)에서 재판되었다. 같은 해에 스페인어 번역판이 출판되었는데, 이것은 스페인계 피난자인 치프리아노 드 발레라(Cipriano de Valera)의 작품이었다. 그는 제네바 체류 이후에 영국에서 수년간을 보냈으며 캠브리지에서 석사(master) 학위를 받았다. 1599년에 죽은 지리크 슈트렉의 체코어 판은 일부분만 발행되어 남아 있는데, 그것은 1617년에 제1권과 제2권이 발행된 것이다. 헝가리어 번역판은 헝가리 개혁교회의 저명한 목사요 학자이며 시인인 알버트 몰나르(Albert Molnar, 1634년에 죽음)에 의해 1624년에 하나우에서 발행되었다. 아랍어 판이 취리히의 동양학자 존 헨리 핫팅거(1667년에 죽음)에 의해 출판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입증된 적은 없다.
톨룩(A. Tholuck, 라틴어, 1834, 1846, 1872), 바움가르트너(1560년 프랑스어 판, 1888), 시주(A. Sizoo,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한 네덜란드어 번역판, 1931, 1949) 등에 의해 만들어진 『강요』 판본들은 다만 참고서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번역한 베버(O. Weber)의 독일어 판(단행본, 1955)과 1560년 불어 판을 개작(改作)한 까디에르(J. Cadier)의 현대어 판(4권, 1955-1958)에는 분석적 표제와 분류된 색인이 제공되어 있다. 마사키 나카야마(Masaki Nakayama)가 라틴어 판을 번역한 일본어 판이 1943년에 동경에서 출판되었고 1949년에 다시 인쇄되었다.
V
본서의 독자들은 최초의 영어 판 강요(Institutes)보다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1559년 판 이전의 라틴어 판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보급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생활을 취급한 장(章)들, 즉 강요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제3권 6장-10장만이 영어로 번역되었을 뿐이다. 후에 완역판이 검은 활자의 2절판 크기인 멋진 책으로 나왔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The Institution of Christian Religion, wryttin in Latine by maister Jhon Calvin, and translated into Enhlysh according to the authors last edition. Seen and allowed according to the order appointed in the Quenes Maiesties instructions.
청동 뱀이 휘어감은 나무 십자가를 악수한 손이 떠받치고 있는 모양을 한 인쇄업자의 상징, “주후 1561년에 레놀드 울프와 리차드 해리슨(Richarde Harison)이 런던에서 간기(刊記)함”이라는 판권장(版權張)이 나온다.
그 책 마지막 페이지에서 발행장소는 “Paules Churcheyard”이며, 발행일은 “1561년 5월 6일”이라고 더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번역판은 라틴어 판이 제네바의 스테파누스(Stephanus)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떠난 지 21개월이 채 못되어 런던에서 출간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발행인들은 표제 페이지 후면에 책이 늦게 출간된 이유에 대한 사과 내용의 문구를 눈에 잘 띄지 않게 삽입하였다. 번역 작업을 존 도우즈(John Dawes)에게 맡겼는데, 그는 “12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 원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가피한 사정으로” 인하여 발행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완전히 다시 번역하도록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본문 마지막에는 머리글자 “T. N.”이 인쇄되었고, 그 다음 여섯 페이지에는 각 장 표제 목록과 간단힌 색인이 있다. 1562년의 제2판에서 역자는 짧은 서문을 삽입하고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를 덧붙였다. 개정판인 제3판에서만은 책 표제 페이지에 “Thomas Norton”이란 이름을 머리글자만 쓰지 않고 철자를 전부 쓰고 있다.
토마스 노턴(Thomas Norton, 1532-1584)은 그의 강요 번역본이 출판되었을 때 약 29세였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노턴과 그의 친구 법학도인 토마스 새크빌(Thomas Sackville)의 합작품인 The Tragedy of Gorboduc이 1561년 1월 5일 밤에 최초로 상연되었고, 2주일 후에는 명령에 따라 여왕 앞에서 공연되었다. 영광스럽고 매우 감동적인 이 무운시 극은 현대 영국 비극의 발전의 기원이며 노턴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노턴이 라틴어와 영어로 지은 초기의 시들과,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시편들을 시로 개작(改作)한 작품들도 종교 서적의 여러 번역서들과 교회 문제를 논쟁적으로 취급한 몇 개 산문들과 함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친숙하였다. 서머셋 경(Duke of Somerset)이 칼빈과 편지를 교환하던 때에 경에게 있어서 노턴은 매우 조숙한 비서였다. 서머셋 경이 죽은 후, 칼빈이 그 자녀들에게 안부 편지를 썼을 때, 답신을 대신한 사람이 노턴이었다. 1555년에 그는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딸과 결혼하였고 후에는 대주교가 남긴 중요한 원고들을 공표하였다. 확실한 칼빈주의자인 그는 또한 청교도들의 교회개혁조치 지지자였고, 한때는 감독들을 비판해서 투옥되기도 했다. 노턴은 1558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그 후 의회 논쟁과 위원회 활동으로 자주 명성을 떨쳤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재판, 특히 1569년의 대반란에 연루된 자들의 재판에 참여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거칠고 비난받을 만한 열정을 나타내 보였다. 학자적이고 유능하며 다재다능하였지만, 노턴은 문학에 있어서나 직무에 있어서나 주요 역할을 맡은 적은 결코 없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칼빈이 강요의 훌륭한 영어 번역자를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의 것이었다.
1574년에 노턴 번역 제3판에서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는가를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본래의 서문을 개정하고 증보하였다. 노턴은 유명한 두 출판업자로부터 여왕을 위해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에드워드 휘트처치(Edward Whitchurch)인데, 그는 리차드 그라프톤(Richard Grafton)과 함께 1539년에 그레이트 바이블(Great Bible)을 발행하였고 1549년에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출판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레지날드 또는 레이놀드 울프인데, 그는 슈트라스부르그 태생으로 영문 서적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번역일을 마무리한 곳은 바로 그레이프라이서스(Greyfriars)에 있는 휘트처치의 집이었다. 노턴은 휘트처치의 부인이 크랜머(Cranmer)의 미망인 곧 노턴 자신의 아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휘트처치가 1561년 후반에 죽은 후 쓴 편지에서 노턴은 자신을 가리켜 “노련한 열정의 복음 전도자”, 즉 “내 생애에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친구”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비평적 조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특히 데이빗 화이트헤드의 이름을 말하고 있으며, 화이트헤드는 그의 번역문의 모든 문장을 라틴어 본문과 하나하나 대조했다고 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1555년 프랑크푸르트 투쟁에서 에드워드의 “기도서”(Prayer Book)를 지지한 당과 연관되어 망명한 자로서 전(前) 메리 여왕 당원이었다. (독학으로 획득하였지만) 공인된 학식을 소유한 저명한 목사였으며, 그는 아마그(Armagh) 교구의 감독직을 사양하였고, 캔터베리(Canterbury) 감독직도 거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5년에 헨리 베버리지(Henry Beveridge)는 “노턴이 그의 일을 대체로 아주 충실하게 해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어의 문체를 크게 손상시키면서까지 라틴어 형식을 ‘너무 세심하게’ 유지하려 한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노턴 스스로가 칼빈의 저서가 “중세 스콜라학자들의 논쟁들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칼빈이 의미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영어의 표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칼빈의 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설명한다. 때로는 이 방법이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베버리지처럼 노턴이 “라틴어법식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오도(誤導)하는 것이다. 노턴의 번역이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의 전형적이고 명료한 산문과 거리가 멀기는커녕, 어떤 권위 있는 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당시에 “대부분 성직자들과 번역자들의 작품”이었고 그 다음 세대의 저작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허세와 과장이 전혀 없었다. 제3판에서 노턴은 출판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오류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서 만족하였다. 그는 이 오류들이 “자신의 글씨가 난필이라는 점, 자신의 사본의 교정한 것들, 그리고 출판업자들만이 알고 있는 몇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2차 개정 때에 대략 300곳의 오류를 바로 잡았고, 그러므로 제3판에는 그러한 잘못들이 실제로 없다고 믿는다. 이 번역판에는 레불(A. Reboul)이 작성한 라틴어 색인의 번역판(“Table of Matters Entreated of”)이 당시 처음으로 첨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로라(Marlorat)가 작성한 두 개의 색인이 그의 서문 다음에 수록되었다. 이 1574년 개정판 발행 이후, 노턴의 책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1578, 1582, 1587, 1599, 1611, 그리고 1634년에 재발행되었다. 이 판본들, 특히 앞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판본은 어형 변화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따라서 1634년 판에서는 “Jhon Calvin”이 John Calvin”으로, “truthe”가 “truth”로, “glorie”가 “glory”로, “geuen”이 “given”으로 바뀌었고, 초판에서 사용된 약어(略語)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 작품을 현대어로 개정하려는 시도는 1762년의 글래스고우(Glasgow) 판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판본은 그 당시 유행하던 철자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식 표현이나 고어체 표현들을 아낌없이 고쳤다.
VI
그 이후부터는 노턴 역본이 재판되지 않았다. 기독교강요 전(全)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번역본은 존 알렌(John Allen, 1771-1839)의 것이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translated from the Latin and collated with the author’s last edition in french, London: J. Walker, 1813.
알렌(Allen)은 핵크니(Hackney)에 있는 비국교회파 아카데미(Dissenting Academy)의 학장으로 역임한 평신도였다. 그의 다른 저작들 중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초기 저작으로서 “The Fathers, the Reformers, and the Public Formularies of England in Harmony with Calvin···(1811)”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고, 현대 유대교에 관한 논문(1816)이 있다. 알렌 번역본의 대부분은 라틴어 판을 대본으로 한 것이고, 프랑스어 판을 참고해 개정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두 가지 판을 모두 참고하였다. 비록 그가 노턴의 번역판을 “매우 낡고 거칠고 모호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의 번역 원칙은 노턴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는 “직역과 의역의 중간 입장을 견지하였고, 라틴어와 영어의 각 관용어들이 허용하는 한 원본의 문체를 따르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탁월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실한 번역이며, 칼빈의 격렬한 문장들과 생생한 은유들이 잘 보존된 번역이고, 원문의 의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만한 오류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알렌의 번역판이 특히 미국에서 출간을 거듭하여 1936년까지 30회 재판되었다. 칼빈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1909년 판에는 on the Literary History of Calvin’s Institutes”라는 워필드의 귀중한 소논문이 첨가되었고, 1936년 판(칼빈의 초판 이래 400년이 된 시기)에는 토마스 피어스(T. C. Pears, Jr.)가 “An account of the American Editions”이라는 제목의 글을 첨가하였다. 알렌의 번역판은 미국 편집자들에 의해 약간씩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1841년에 조셉 패터슨 엥글스가 개정한 것이다.
알렌 번역판의 독주 기간은 길지 않았다. 1845년에 다음 제목의 번역판이 나타나게 되었다.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A New Translation by Henry Beveridge.
헨리 베버리지의 번역본은 칼빈 번역회(Calvin Translation Society) 후원으로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출판되었다. 베버리지(Beveridge, 1799-1863)는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후에 법률 교육을 받았으며, 저술을 그의 본업으로 삼았다. 그가 칼빈회 후원으로 번역한 것들 중에는 1844년에 3권 1세트로 발행된 칼빈의 “종교개혁에 관한 자취”라는 책이 있다. 후에 그는 다른 연구에 전념하여 “인도 역사의 이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강요 판은 3권으로 나왔고, 서론 부분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발간된 후대의 인쇄물들에서 누락된 항목들이 실려 있는데, 그 항목들을 누락시킨 것은 손실이 분명하다. 그중 하나는 칼빈회의 서기인 로버트 핏케언이 준비한 “Catalogue Raisonne of the Earlier Editions”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판본들 대부분을 도움이 되도록 서술한 것으로서, 상당 부분은 핏케언이 주의 깊게 검토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누락된 것도 있고 다른 곳에는 약간의 결함도 있어서 그가 만든 목록이 안전한 안내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목록에는 강요 요약판 3권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완역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초기 네덜란드어 판과 독일어 판에 대한 그의 정보도 결코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베버리지가 쓴 서론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동료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초기 판들의 표제 페이지를 정선하고 복사하여 수록해 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1536, 1539(Alcuin 변형판), 1545, 1559, 1561년 라틴어 판과 1545년 프랑스어 판, 1557년 이탈리어 판, 그리고 1597년 스페인어 판에서 발췌 수록한 것들이다. 마지막 두 가지 경우에는 원래 인쇄된 서문이 다시 복제되었다.
베버리지가 노턴의 번역판을 낮게 평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아주 특이하지만, 그는 알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버리지 자신의 번역은 질이 고르지 못하다. 몇몇 부분에서는 그가 사용한 초기의 빅토리아 시대풍의 어휘가 알렌의 초기 작품의 어휘보다도 현재의 용법으로부터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자신이 노턴에 대해 “라틴어식 영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비판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구절도 있다. 오히려 그는 먼저 번역한 번역자들보다도 정확하지 못한 면도 있고, 약간씩 빠뜨린 부분들도 많고 분명히 잘못 번역된 부분도 약간 있다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훌륭히 번역했으며, 더 공들여 번역한 구절에서 베버리지는 칼빈의 수사학적 능력을 뚜렷이 의식하고 독자들에게 세련된 문장 표현으로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VII
강요의 분량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수많은 요약판들이 일찍부터 출간되었다. 이 요약판들도 처음에는 당연히 본래의 강요처럼 라틴어로 발행되었고 그 후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출판되었다. 가장 초기의 요약판 중 하나는 영국의 칼빈주의 교리 순회 설교자로 인기 있는 에드먼드 버니(Edmund Bunney, 1540-1619)가 편찬한 것으로, 그 제목은 『Institution Christianae Religionis···Compendium』(London, 1576)이다. 그것은 에드워드 메이(Edward May)가 『The Institutions of Christian Religion···compendiously abridged by Edmund Bunnie, bachelor of divinity···』(London, 1580)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발췌집이 아니라 주로 버니의 말로 축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윌리암 델론(William Delaune, Laneus/Launeus/Lawne)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Epitome』(London, 1583)으로 대체되었다. 델론(1610년에 죽음)은 위그노파 망명자였고, 그의 책을 출판한 사람은 친구이며 종교가인 토마스 보트롤리어(Thomas Vautrollier, 1587에 죽음)였다. 그는 1576년에 영국 유일의 라틴어판 강요를 발행하였다. 『The Epitome』은 저자의 언어를 가능한 한 많이 간직하고 있는 요약판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 요약판은 강요의 자료를 8절판 371쪽에 수록하고 있으며, 1559년 판의 배열을 가장 근접하고 균형 있게 따르고 있다. 칼빈이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를 알리고, 반박하는 곳에서, 그의 본문은 이론(異論)과 답변을 대화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페이지가 매겨 있지 않은 21쪽에는 강요의 논증 과정에 관한 “총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것은 괄호로 묶은 절과 소절의 정교한 구조로 나타난다. Epistola Nuncupatoria 또는 조폐국 국장인 리차드 마틴(Richard Martin)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델론은 그의 책을 가리켜 “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에서 가져온 꽃다발”이라고 말한다. 난외의 여백에는 세심하게 준비된 분석적인 주(註)를 달고 있다. 이 책에는 25페이지의 색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페더스톤(Christopher Fetherstone, Edinburgh, 1585)의 완역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사람이 훌륭하게 번역한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도 같은 해에 나왔다. ‘강요’ 요약판의 발행은 궁핍한 학생이나 또는 읽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뜻하지 않는 행운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1650년에는 델론의 네덜란드어 판이 있었고 1837년에는 영어 번역판이 재판되었다.
널리 반포된 또는 다른 라틴어 요약판은 뛰어난 개혁 신학자이며 낫소(Nassau)의 헤르본 아카데미(Academy of Herborn)의 성경학자인 존 피스카토르(John Piscator/Fischer, 1546-1625)가 요약한 것이다. 피스카토르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의 동료이자 계승자였고, 올레비아누스가 정리한 “요약판”(1586)을 수업에 활용하였다. 또한 그의 「Aphorismi doctrine Christianae maximam partem ex Institutione Calvini excerpti sive loci communes theologici, (Herborn, 1589)」는 학생들의 토론을 위해 편집된 것이며, 곧이어 그러한 요구에 의해 1615년까지 무려 8판이 나왔다. 그것의 제3판을 헨리 홀랜드(Henry Holland)가 「Aphorismes of Christian Religion in a verie compendious abridgment of M. J. Calvin’s Institutions」라는 제목으로 영역하였고, 리차드 필드(Richard Field)가 1596년에 런던에서 발행하였다. 피스카토르의 부제(副題)를 따라 본문은 28개의 장으로 분류되었다. 이것은 주요 절 각각에는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경구(aphorisms, 警句)”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8개에서 34개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경구의 길이는 한 문장에서부터 몇 페이지에 이르기도 한다. 피스카토르는 논제(these)라는 말이 논쟁적인 불확실성을 시사하는데, 제시된 진술들은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논제(these)라는 용어보다는 aphorismi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강요 요약판이 그 후 곧 출간되었는데, 그것은 라이덴 월룬 대학(The Walloon College at Leiden)의 평의원인 다니엘 콜로니우스(Daniel Colonius)가 펴낸 「Analysis paraphrastica Institutionum theologicarum Johannis Calvini」(Leiden, 1628)이다. 콜로니우스는 엘제비르(Elzevir) 인쇄소 소장의 지위였고, 편집자가 죽은 지 1년 후에 아주 작은 활자로 아주 산뜻하게 인쇄된 12절판 크기의 책이 엘제비르에 의해 발간되었다(Leiden, 1636). 콜로니우스는 그의 책을 41개의 “토론 주제(dispntations)”로 분류하였지만, 원래 강요의 구분을 따르고 주로 칼빈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Analysis paraphrastica」에 대해 워필드(Warfield) 박사는 학생들의 입문서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델론의 책과는 달리 거기에는 난외 표제들과 색인이 없다. 950페이지에는 대략 강요의 삼분의 일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간단한 요약 판보다는 조금 많은 분량이다.
VIII
칼빈의 위대한 기독교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고전적 진술로 당연히 간주된다. 그 저술은 그것이 다루는 주제의 범위가 기독교 신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되기까지 그의 손으로 증보되었다. 그 저술의 포괄성이라는 면에서 그것이 당대의 여타 신학 논문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의 우월성은 구성 순서와 균형 그리고 그 상세히 설명한 견해의 실질적인 일관성에 있어서 더욱 탁월하다. 완성된 저작에는 수없이 확대되고 내용들이 재배열된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질서 정연함은 설득력을 희생시켜 가면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도전적인 책으로서 독자에게 인격적인 요구를 한다. 이것은 강요가 저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내용을 설득력 있고 끈질기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회심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굴복시켜 가르침을 잘 듣도록 순복하게 하셨다”라고 썼고, 심오하고 지속적인 내적 변화의 결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살고 저술 활동을 했다. 강요 맨 앞부분에서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알려지는가라는 주제를 인상 깊게 다룬다. 그의 저서 전체에는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 주권적 권능,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현재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그에게 있어 사변적인 사유와 결과도 아니며 사변적으로 사유케 하는 동기도 아니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변하는 지적 탐닉을 거절한다. 설혹 그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억제했다. 그는 비인격적인 탐구자의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는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 ㅡ 그가 보기에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 다를 수 없는 주제임 ㅡ 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및 우리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문제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연약하기 짝없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배와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의 뜻을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서 배우겠다고 동의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알려주신다.
칼빈의 정신세계가 단단하게 결합된 교리적 논리 구조의 여러 부분을 만들어내고 조립하는 일종의 효율적인 공장인 것처럼 생각하는 선입견을 갖고 칼빈의 대표작인 강요를 손에 잡는다면, 그는 이런 억측이 도전받고 분쇄되는 것을 즉각 깨달을 것이다.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저자의 지성만이 아니라 영적 및 감정적 존재까지도 그의 저작에 실려 있음을 깨닫는다. 칼빈이 후에 필립 시드니 경의 “네 마음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써라”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이용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마음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고대 격언의 좋은 한 예이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질서 있게 사고하는 천부적 재능을 소유하고 그의 믿음을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을 따른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을 가리켜 “Summa theologiae”(신학 대전)이라 하지 않고 “Summa pietatis”(경건 대전)이라 했다. 그의 왕성한 정신력의 비밀은 바로 그의 경건에 있으며, 그 경건의 산물이 그의 신학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신학은 그의 경건을 상세히 서술한 것이다. 그의 과제는 (그가 본래 명명한 본서 제목의 말로 표현한다면) “경건의 총체와 구원 교리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는 본서를 준비하면서 그의 유일한 목적이 “순수한 경건론을 견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라틴어 최종판 서문에서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경건은 교리와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모든 경험은 사색에 대한 도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사유 능력을 초월해 있는 경험을 알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를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고 가는데, 거기는 사고의 능력이 미치지 않으며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나아가라고 명령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최고의 신비인 성만찬의 신비를 그의 부족함, 즉 “나의 어린애 같은 작은 자(尺)”로 측량치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자들에게 성만찬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자신들의 한계로 인해 제한하지 말고 그가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해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인식된 최전선 내에서 그는 아주 명료하게 확신을 갖고 저술에 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마음에는 “경건”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그 말은 이제 비효과적이며 종교적인 감상적 태도나 위선적인 겉치레를 연상케 하는 의심쩍은 것이 되었다. 칼빈이나 그의 동시대인에게 경건이란 말은 고대의 이방 저술가나 기독교 저술가에게 있어서처럼 불쾌한 함축이 전혀 없는 진실한 단어였다. 경건은 가족이나 국가 또는 하나님에 대해 신실하게 헌신하는 것, 즉 칭찬할 정도의 충절을 지키는 것이다. 칼빈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를,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선결 요건이라고 했다. 이 원칙을 처음으로 언급할 때,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했다. 경건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으로 돌리고, 자신들을 양육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 바로 그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경건(pietas)이란 말은 칼빈의 저작들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며 『강요』에서는 마치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기 위해 울리는 경종처럼 되풀이해서 나오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에밀 도머그는 말한다. 미첼 헌터는 말하기를, “경건은 그의 인격의 본질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전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가 그에게 의미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뼈대로서의 신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건전한 신학의 필요불가결한 선조건인 이 종교적 태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으로 돌리므로”, 칼빈의 책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며, 하나님에 관한 관념 혹은 균형잡힌 견해들을 갖고 장난하지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세세한 면에서 저자에게 동의하느냐에 관계없이 독자는 그가 그 자신의 종교적 투쟁의 동지임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들과 관계를 갖는 하나님에 관해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모호하게나마 의식하게 되는 종교적 통찰들과 영적 자극들을 그는 특별히 명확하게 설명하는 지적인 보고자였다.
칼빈의 명료한 표현들은 처음에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사상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독자들의 마음에 무거운 부담을 주며 그의 저작에 정통한 사람들 중 일부는 그의 사상에 해명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의 신학에 대한 설명들은 종종 서로 충돌하며, 『강요』에 나타나는 그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몇몇 측면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고, 그것은 현대 개신교 신학 논쟁의 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고전 논문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공통된 운명이다. 『강요』는 후대 사상가들의 사유의 창고이며, 강요가 그들에게 이제 막 생각해 낸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때, 『강요』로 하여금 그 자체의 새로운 인상을 만들어내도록 하기 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공식 표현들의 전거로 간주하려는 유혹이 강하다. 칼빈이 그의 은혜론과 관련하여 자연을 다룬 것은 특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의심할 나위없이, 칼빈은 신에 대한 의식이 인간의 최악의 상황조차도 그것을 지워버릴 수 없을 만큼 인간의 마음에 도저히 씻을 수 없게 새겨져 있음을 한편으로는 적극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의식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놀라운 생각과 솜씨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암시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시며 그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이 남긴 죄의 유산 때문에 심히 손상을 입었으므로 그들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는 바를 보지 못하며,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그릇되고 무가치한 것뿐인 생각들을 가지고 우주라는 이 밝은 극장을 눈먼 채로 더듬고 다닌다.
IX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곤경에 처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그분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셨다. 일반적으로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할 때, 그는 그것을 정경과 구별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의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단지 성경에 씌여진 말씀에만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지혜로서 모든 신탁과 모든 예언들이 거기로부터 나온다.” 이 문맥에서 그가 말하는 ‘영원한 지혜’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는 말하기를 고대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만물을 지으신(요 1:1) 말씀 곧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을 알게 하는 매체인 기록된 말씀의 저자(Author)이시다. 이렇게 이해하면 칼빈에게 성경은 확실하고 무오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며 그가 항상 의지하는 바이며 자원이 되는 것이다. 그가 각 논점들을 성경의 구절들과 신속하게 관련시키는 것은 놀라울 정도이며, 아마도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그가 성경 본문에 정통해 있다고 해서 무절제하게 과도한 인용구만으로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지나치게 인용을 많이 하였다고 보이는 곳에서는, 대체로 반대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성경 본문을 그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사용된 성경 구절에 실제로 내포된 교리보다 더 많은 양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그 구절을 무리하게 사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의 성경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논증에 맞지 않는 성경 본문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처럼) 자의적인 영해(靈解)를 함으로서 그 사용을 정당화하려고 꾀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와 같이 “성경을 갖고 장난질하는 것”을 폭로하는 데 항상 빈틈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단순하고 축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그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는 교조적 해석을 확증하기 위하여 알레고리를 이용하는 것을 경멸하였고, 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을 입증할 때만 성경을 인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칼빈은 의심한 적이 없으며, 그는 그의 독자들도 이와 같은 확신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훗날의 논쟁에서 “축자적 무오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알려준 신탁과 환상들에서 기원하며, 족장들은 그 속에 담긴 진리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것들을 구전으로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후세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시를 기록하게 하실 때까지만 계속되었다.
인간 저자들은 기계적으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록한 진리를 그들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가 거룩한 저작의 권위 문제를 강조할 때조차도, 그가 항상 그 저자를 마음속에 두고 있는 것 같으며, 그가 설명하려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이다. 따라서 사도이자 저자들인 자들을 가리켜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기록자들”(불어판에서는 “선서를 마친 공중인들”)이라고 한 그의 말이 종종 인용되는데, 이때에도 그 문맥은 성경의 단어들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단어들이 나타내는 영감된 교훈을 가리킨다. 그는 실제로 영감의 방식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다룬 바가 없다. 그가 영감을 단어 자체와 관련시키는 듯한 구절이 그의 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주된 관심은 단어를 넘어서는 그 메시지에로 독자들을 인도하는데 있다. 영감의 방식에 대한 입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강요』 뿐만 아니라 그의 주석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칼빈보다는 오히려 일부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그도 성경이 완전 무오함을 아무 조건없이 주장하고 싶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떤 구절들에 있어서는 글자 그대로의 차원에서 무오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솔직히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시편 51:4을 인용할 때 부정확하게 옮겼다는 점을 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도들이 [구약]성경의 말을 인용할 때, 내용이 일치되게 인용한다면 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종종 상당히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단어를 양심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quare non tantum illis fuit verborum religio].” 여기에 사용된 verbor. um religio라는 표현은 해석중인 구절의 몇 개 단어 각각에 대해 억지로 꼼꼼한 체하는 주장을 토대로 논쟁을 벌이는 논적들을 경멸스럽게 묘사하는 말로 「강요」에서는 나타난다. 칼빈의 예리한 문체 감각은 성경 기자들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적용된다.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요한”은 “변변치 않은 천한 문체”를 사용하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메시지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사야의 “우아한 문체”와 아모스의 “거친 문체”가 모두 성령의 “위엄” 묘사에 사용되고 있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교회가 그렇게 선언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토대가 되는 성경 자체에 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은 합리적 증명이 가능하지만, 이렇게 한다 해도 건전한 신앙 형성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자명하고 확실하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성적 사고보다도 훨씬 탁월하다. 경건에 필요한바 성경이 신(神)의 진리라고 하는 확실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바로 그때에만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바로 그 입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이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성령은 또한 성경의 해석자이며 독자들의 마음에 성경의 가르침을 인치신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읽을 때 그것은 성도의 무오한 진리의 책인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 조직 원리로 삼으며,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주요 임무이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어야한다”고 말한다. 「강요」의 초점은 기록된 말씀이 알려주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항구적인 관련성을 배제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 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복종의 강요 등을 발견하는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성경에서 교회의 조직과 훈련의 마땅한 지침이 되고 교회의 공중 예배를 마땅히 주관할 원칙들을 찾아내 확인한다. 이것은 사도들 이후의 이런 사항들의 혁신은 모두 성경의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널리 퍼져 있던 미신을 공격할 무기를 성경은 칼빈에게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그는 또한 그가 보기에 성급하고 무책임하며 왜곡된 성구 해석을 제시하는 그의 동시대인들을 혹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그가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는 마태복음 26:26을 다룰 때, 그는 그 자신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성경 전체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것처럼 이 구절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얻는 것 못지않게 순종하며 연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에 언뜻 생각난 것을 비뚤어진 열심으로 아무 분별없이 성급하게 움켜잡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부지런히 숙고한 다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 의미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것에 어긋나는 모든 세상 지혜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진실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 말씀에 단 한 마디의 말일지라도 저항의 말을 감히 제기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그 의미에 대해 감히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X
칼빈 자신이 고백하는 대로 그가 어거스틴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강요 전체에서 항상 명백하게 나타난다. 인간의 능력에 관한 반(半)펠라기우스적 견해를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때에도, 칼빈 이전의 새 사람들은 인간 자신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능력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새롭게 확증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849년에 이단으로 정죄당한 오르바이스의 고트샬크 이후, 철저한 어거스틴주의의 대표자로 유명한 첫 번째 사람은 신학자요 성직자였던 토마스 브래드워딘으로서, 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라고 불리웠으며, 1349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직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죽었다. 그는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이란 긴 논문에서, 자신은 일찍이 어리석고 공허하게도 그의 주변에서 널리 유행하던 펠라기우스의 사상들을 받아들였으나, “은총의 빛이 비추이듯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과 성경을 늘 인용하면서, “은총은 과거의 공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예정은 공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리미니의 그레고리도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는 1358년에 어거스틴 수도회 총회장을 지내다 죽은 인물이다. 이러한 교리 측면에서 보면, 위클리프는 어거스틴의 제자였고, 죤 후즈는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위클리프적이었지만 거의 위클리프 못지않은 어거스틴계 인물이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종교개혁은 내적으로 생각해 볼 때,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한다.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성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검토하기를 마지않는 어거스틴에게서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두 종교개혁자는 솔직히 인정한다. 칼빈은 후기 어거스틴주의의 정점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인간과 구원을 다루면서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대거 인용하였기 때문에 이 항목들에 있어서 그의 교의는 아프리카인이었던 그의 대선배의 교의와 전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그의 견해가 어거스틴의 견해와 때때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무비판적인 제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유기(遺棄)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특별한 결정이라고 하는 “이중 예정”을 명백히 주장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을 넘어선다. 확실히 이러한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해한 확신을 성경 독해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확증하고, 그 확신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음으로써 칼빈 신학의 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다른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근원적으로 봉쇄해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란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질 것이라든가 아니면 선할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영원히 정죄 받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정통적이며 거의 논의의 여지없는 신앙이다. 칼빈이 일부 사람에 대한 이런 정죄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작용과 결부시킨 것에 있어서는 그보다 앞선 몇몇 어거스틴주의자들과 같지만 주장의 강도와 엄밀성은 그가 훨씬 크다. 저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각각 어찌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따라 결정되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화를 당하는 것이 그 운명으로 결정된다. 여기에서 그는 신학의 두 가지 평범한 문구를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칼빈 자신에게조차도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많은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거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정죄 받은 자에 관한 이 작정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부정하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유기 교리를 대단히 엄밀하게 진술하고 새삼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실 때 선택받지 못한 자를 “지나쳐 가게” 하는 것에 국한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의지 작용은 “간과”가 아니라 “유기”이다. 바울이 “그런즉 하나님께서···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말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지나쳐 버리는 자를 유기하신다”고 비슷하게 간결한 주장을 한다.
칼빈은 이런 결론을 해명하고 수호하는 동안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전율했으며, 거기에 내포된 도덕적 난점도 잘 알았다. 그래서 죄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란 주장을 펴기 위해 그 결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인하여 조금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 많으시며 공평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얕은 이해력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땅에서 표현되지만 말이다. 칼빈이 예정에 그토록 오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그 자신이 예정의 신비 앞에서 크게 놀랐다는 사실로 부분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 주제를 언급할 때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선택되었을까 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성숙한 신앙을 지닌 성도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겸손한 자세로” “이 높고 불가해한 신비”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선택의 열매들은 어떤 점으로 보나 이 세상에서 누리는 외적인 이익이나 번영 등과 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경견이 세력을 떨치고 번성하며, 경건한 자들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택받은 자의 축복은 그들이 고난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확고한 보호를 확신하는 것과 내세를 내다보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
XI
칼빈은 소위 중생이라고 하는 영혼의 변화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육신의 금욕과 영의 소생을 포함하는 진실한 회개가 수반된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우리의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된다. 말하자면 새로운 영적 사업 즉, 이생에서는 결코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완전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일에 참가한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실망해도 좋다는 권고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장래 삶의 실재에 대한 의식의 증대와 결부된다. 바로 그 삶을 우리는 열망하며 고대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순례와 시험의 장소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칼빈은 이 세상에서의 의무나 이 세상의 부탁을 언짢아하며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균형 잡히고 파급적이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지침을 다섯 장에 걸쳐서 제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암묵적인 조건하에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다. 여기에는 자기 부정과 남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포함된다. 그들이 아무리 고집 센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라고 권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들에게서 발견해야 한다. 종말론에 관한 현재 논의에 비추어 장래의 삶에 대한 고찰을 다루는 것은 아주 인상적이며, 현생에서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향유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
칼빈에게 성화는 우리가 인생행로를 지나는 동안 우리의 소명 추구와 경건에 진보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믿음과 회개와 칭의 등을 다룸에 있어 종교개혁 시대에 충분히 논의된 이 교리들을 그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룬다. 믿음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 이상의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은혜를 온전히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로나 율법과는 거리가 멀다. 칼빈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믿음을 경건과 사랑에서 분리시켜 다루는 것을 비난한다. 그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믿음이 스스로 의를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며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 은혜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XII
제4권에는 이전 판의 여러 부분에서 발췌된 내용과 교묘하게 통합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이 있어서, 제4권은 그 자체가 잘 정리된 하나의 논문을 구성하고 있다. 칼빈은 이 책 제목을 “The External Means or Aids by Which God Invites Us Into the Society of Christ and Holds us Therein”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회는 거룩한 공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칼빈의 정신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이 대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그의 능력과 재능을 모두 투입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동일한 실체를 가리킨다는 루터의 견해를 지지한다. 선택받는 자들로 이루어진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러나 그 불가시적인 교회는 구성원들을 서로 알고 있는 지상의 가시적인 조직 교회와 구별되기는 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묘사한 키프리안(Cyprian)의 비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교회는 그러한 자격으로 그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낳고 양육하며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로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가시적 교회에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믿음을 고백하고 삶으로 실천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관대하게 판단하여 교회의 구성원들로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참되게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청종하는 것, 성례전의 바른 집행, 그리고 그것들보다는 하위에 있지만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공동체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을 시행하는 것 등, 그러한 표지들로서 교회가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한 교회로부터 떠나는 것의 위험이 아주 깊이 있게 다루어진다. 우리들은 누구나 결함 있고, 눈을 흐리게 하는 무지라는 병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의 용서가 항상 필요하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사회라는 사실이 본서에서는 특히 강조된다. 가시적 교회는 그것의 성취 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발전과 목표 면에서 거룩하다. 말씀과 성례전의 사역은 왜곡되고 훈련이 실패한 바로 그때에만, 그리스도인들이 그 조직을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칼빈은 교황권을 고집하는 교회 내에도 참된 교회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 있기도 하지만 거기에서 그와 같이 떠나도 좋은 이유들을 발견하였다. 사역과 사역의 직분 그리고 그 기능에 관한 고귀한 교의가 신약성경의 증거를 토대로 하여 충분히 설명되고, 성직(聖職)의 발전과 타락을 교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한다. 풍부한 교회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칼빈은 중세의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권위가 로마에 있다고 주장하며 교황권을 점점 더 강도 있게 요구하고 그것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활기차게 논박하였다. 지나치게 많은 욕설들을 관련 장(章)들에서 제거한다면, 그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적인 자료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련 세력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가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이 역사적 변화들을 고찰하였다.
그의 성직론은 장로들과 구별되는 감독직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관리와 훈련 기능을 담당한 고대의 성직 제도를 상당히 중시한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칼빈이 보기에 로마 교회 성직 제도의 최대 결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은 보니파체 3세가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권을 주장하고 나선 이후 즉 대(大)그레고리 이후, 특히 교황 자카리와 프랑크의 통치가 삐뺑 사이에 협정이 체결된 이후 시대에 교만하기 짝없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였다. 칼빈은 이들의 동맹을, 권력을 장악하고 분할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한다. 그는 9세기의 Pseudo-Isidorian Decretals를 효과적으로 폭로한 최초의 문서인 「마르데 부르크 세기들」(Magdeburg centuries, 1559-1574)이 나오기 이전에 이 장들을 저술하였지만, 그 사기 문서들을 냉소에 붙인다. 그는 콘스탄틴의 증여에 관한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의 폭로 기사를 읽었고, 그에 따라 그 8세기 문서 또한 위조라고 간주한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 주장의 결과로 부패가 점차 만연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교황 지배하에서의 상황이 마침내 교회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권위를 말씀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부패한 교회와 그 위원회가 차지하였다. 그는 위조문서들로 무장한 교황청이 그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하면서 발생한 사법권의 숱한 남용 사례들을 격렬하게 공박하였다.
칼빈은 또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훈련과 성례전을 건설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혁교회 초기의 훈련 관행과 유사점이 거의 없는 교회 훈련을 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전제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가 매우 높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른다. 훈련이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그것은 지체들을 결집시키는 끈, 또는 자제를 위한 고삐, 혹은 아버지의 징계의 회초라기와 같은 것이다. 누구도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훈련 과정을 면제시켜 줄 수 없다. 이 과정들은 그토록 종교적 중요성을 갖고 시행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법정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있을 수 없다. 훈련을 통하여 얻으려 하는 목표들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교회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 선(善)을 부패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위반자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다. 그렇다면 훈련은 엄격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드러워야 한다. 칼빈은 바울, 키프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크리소스톰이 위반자들을 다루면서 형제애를 가지고 신중하게 처신하였던 예들을 깊이 상고한다. 우리들은 완고함 때문에 출교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포기하거나 그러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그들을 멸망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XIII
이 주제들을 다루면서 칼빈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한 그의 인식을 매우 확신 있게 표명할 수 있었다. 그는 무려 다섯 장을 할애하여 성례전, 즉 주의 만찬을 다루고 “성례전이라고 잘못 불리는” 다섯 의식을, 즉 견진, 고해, 병자성사, 서품, 혼인 등에 나머지 장들을 할애하였다.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라고 규정한 어거스틴의 성례전 정의를 인정하지만, 그보다도 칼빈은 “성례전이란 외적 표징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는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명확히 표출하였다. 이 관계에 의하면,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印)이며,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교환되는 서약이며, 우리의 제자 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징표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과 성령께서 공급하는 불가시적 은총(恩寵)이 없으면 공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례를 다룸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아 세례를 옹호하는 점이다. 유아 세례와 관련하여 구약성경의 합법적인 입회 성례전으로서의 할례의 역할이 특별히 강조된다. 이 외에도 칼빈은 가장 타당성 있는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불러 팔에 안으시고 “천국은 이런 자의 것”(마 19:13-14)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신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곧 “죄”이다. 이것은 특히 재세례파들처럼 세례 받지 않은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보면 반박할 여지가 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임종 직전에 있는 자들에게 평신도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상황에서는 세례의 예식을 갖추지 말고 신속하게 세례를 집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칼빈이 성례전 곡해로 간주하는 그것은 세례 받을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은 그로 인해 정죄 받은 것이라는 그릇된 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아기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들을 당신의 자녀들로 받아들이셨음을 선언하셨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례가 구원의 경륜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구원 의식이 아니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유아기에 죽은 유아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자를 그 때문에 정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지적한다. 전통적 견해인 세례 중생론을 폐기시켠서 칼빈은 어린아이가 자신을 교회가 용납하고 교회에 입회할 것의 의미를 점차 배우고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을 때 은밀한 영향력이 그 아이의 마음 안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세례를 받고 미래의 회개와 믿음을 성취한다.”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루터파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부활 성체 편재설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전용 빵과 포도주를 통해 현재화된다는 것은 거부한다. 다른 구절들에게 유추하여 “이는 내 몸”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일종의 환유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로 들리워 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 몸은 현재까지도 하늘에 계시고 빵과 포도주에 갇힐 수는 없다. 오히려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는 영적으로 하늘로 들리워 올라가 그 몸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의는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이다. 칼빈의 성례전론을 단순히 “영적 현존론”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그의 교의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적합지 않다. 그의 입장을 현대인들이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예정론을 다룰 때처럼 여기에서도 자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에 직면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험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Communion)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교회의 공통체적 삶에서 이 성례전이 중요함을 평가하는데 칼빈을 능가하는 사람이 아직 없다. 그는 성례전이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경건한 참예자의 종교적 경험을 열렬하게 묘사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생겨나는 “사랑의 띠”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무라는 의미와 아울러 강조한다. 로마 교회의 미사(Mass)론에 대해서는 특히 미사가 죄에 대한 보상 행위라고 하는 주장과 관련하여 공격하였다. 그는 미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부정하고 성찬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소위 성례전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다섯 의식을 지지하는데 이용된 논증들에 대해서도 욕설을 퍼부으며 공격하고, 그 의식들이 성경의 권위를 소유하고 있고 초대 교회에서 집행되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XIV
마지막 장인 “국가”(Civil Government)는 제4권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들 중 하나이다. 처음에 나오는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처럼, 이 장은 칼빈의 사상이 정치적 행위가 일어나는 세상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헌사에서 이 청년 학자는 그 오만한 군주에게 선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제시한 자들의 악한 조언을 거부하라고 감히 권고한다.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어야 마땅하다고 한다. 어거스틴이 그의 유명한 “제후들의 거울”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시녀로 만든” 제왕들은 행복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칼빈은 그 말을 반영하는 한 구절에서 왕의 “진전한 왕권”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사(公使)’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마지막 장(III. xix)이 머리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 장 끝에 정부라는 주제가 도입되는데, 그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등 신학(high theology)의 입장에서 보면, 「강요」가 이것 외에 다른 항목으로 끝맺기를 기대하였을 수도 있다. 1539년부터 1554년까지의 판본들에서는, 이 장이 처음에는 끝에서 세 번째 그 다음에는 두 번째에 위치하였었다. 그러나 1559년 판에서 그것은 1536년 판에서의 위치, 즉 강요의 결론부로 다시 돌아왔다. 칼빈이 정치 사회라는 주제에 이처럼 중요한 자리를 할당하기로 결심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이 장 안에서 그리고 정치에 관한 그의 다른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나 다른 스콜라 학자들처럼 그가 정치를 다룸으로써 그 주제는 신학의 한 영역이 되었다. 그 장에서는 성경 말씀이 풍부하게 인용되고 있는데, 다른 곳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성경은 그의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이 주제가 그토록 중요했던 까닭은 통치자들의 정치가 동요하면 종교개혁에 투신한 사람들의 운명과 교회 개혁이 어떻게 영향 받는가를 그가 항상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초판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처음 것보다 약간 확대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반대자들이 종교개혁이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 운동이라고 규정하던 뮌스터(Munster) 사건이 고조에 달한 때에 쓰여졌다. 칼빈은 정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종교개혁을 위한 그의 변증의 일부이며 그 논문 절반에 걸쳐 그가 주장한 교의들을 실제로 옹호하는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제나 느끼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그의 서신들은 그가 복음적 경건의 앞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로 꽉 차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관련 문제의 주요 논점은 정치 사회가 그리스도 교회를 섬기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니젤(Wilhelm Niesel)처럼 “그는 국가 자체만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영적으로 약혼하였다고 하며 정치적 관심사들과 의무들을 오만하게 무시하는 “열광주의자”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정치적 국가는 근절시켜야 한다는 사상은 그가 보기에 불쾌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국가의 기능은 빵과 물과 태양 및 공기 등의 기능과 다를 바 없다. 국가의 영예스러운 자리는 실로 훨씬 더 탁월하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목적에 기여하며, 이것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국가는 인간사에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기독교의 공적 형태를 보호함으로써 최대의 기여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호의와 지원에 의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칼빈은 다스리는 사람들의 의무만이 아니라 정부 형태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는 주석에서 구약 성경의 몇몇 경건한 왕들을 찬양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당시의 왕들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보면 대체로 비우호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왕권 자체를 거부하는 함축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당시의 여러 정부 형태들을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곳에서는 정부와 협력할 것을 촉구하고 그것들이 억압적인 곳에서는 인내할 것을 요청하였다. 폭력 혁명을 그처럼 반대하려고 했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는 정부 형태에 대한 논의를 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족정치 또는 귀족정치와 민주주의 혼합형 체제”를 단연 지지한다고 조용하게 선언한다. 이 유명한 진술을 그가 최초로 한 것은 1543년 판에서였고, 1559년 판에서는 그 진술 다음에 그 특성에 대한 설명을 삽입하였다. 왕들은 선하고 유능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인간에게는 결합이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권고하며 혹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제재할 수 있도록 다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최상이다. 다수의 통치와 상호간의 형제적 교정의 원칙도 교회와 국가 조직의 각 단위들에 적용된다. 그 원칙들은 칼빈이 다스린 제네바의 성직자 모음과 행정관 모임에서 통상적인 실천을 통해 예증되었다.
본서를 끝맺는 감동적인 문구들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것을 제외하면 1536년 판과 다른 것이 없다. 거기에는 정치학 논문에서는 하나의 상식처럼 된 간결하고 놀라운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칼빈은 현대 국가들의 “세 계급들”(귀족, 성직자, 평민)은 왕의 억압에 맞서서 백성들의 자유를 지키는 합헌적 수호자로서, 고대의 민선 장관, 호민과 그리고 수석 치안판사의 기능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애써 온유한 어조로 제안한다. 이것은 반란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행정 장관들에게 법에 따른 직능들을 수행하라고 호소하는 제안이다. 위에 언급된 고대의 행정장관들이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피상적일 수도 있다. 칼빈의 저서 마지막 절들은 힘이 넘쳐흐른다. 그 절들에 대해 숙고한다면, 그의 가르침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정치적 행위 또는 이익에 의존해야 한다는 제안은 모두 삭제하였다. 우리들은 왕들의 분노로 인해 위협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대단히 귀중한 희생을 치르고 구속하신 우리들은 신앙을 양보하거나 인간의 타락한 욕망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한다.
XV
칼빈의 다른 저서들과 마친가지로 그의 「강요」가 널리 보급되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그의 문체가 뛰어난 것과 무관할 수 없다. 문체에 대한 논할 대, 주로 고려되는 것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일 때가 종종 있지만, 동시대와 그후 많은 학자들은 그가 라틴어 작가로 성공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슈트라스부르크에 거주하는 칼빈의 친구 존 슈트름(John Sturm)은 1543년 라틴어판 강요의 제목 페이지에 추천사를 쓰면서 그 저서와 저자의 특징을 적절히 묘사하였다. “죤 칼빈은 아주 예리한 판단력, 최고의 가르치는 은사 그리고 탁월한 기억력을 천부적으로 갖춘 사람이었다. 저술가로서 그는 다양하고 풍부하고 순수하다.” 뛰어난 학자인 죠셉 스칼리지(Joseph Scaliger)는 “그의 문체가 신학자에게 적절한 글 이상으로 매우 순수하고 우미하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다(1609년 죽음). 그처럼 펜을 적절하게 구사한 사람은 확실히 거의 없다.
그가 라틴어에 정통하게 된 것은 그가 받은 교육의 덕택이었다. 그가 분별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그에게 라틴어를 최초로 가르쳐 준 파리 대학의 마두햄 꼬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칼빈에게 라틴어 학습의 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그가 훗날 성취한 모든 것들이 가능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14세 때 라틴어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었고 라틴어가 의사 전달과 설득의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는 고전들을 연구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라틴어 어휘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브렌(Q. Breen)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의 침전물”에 대해 말하고, 웬델(F. Wendel)은 ‘칼빈이 1532년에 인문주의자가 된 이래 언제나 다소간은 인문주의였다’고 진술한다. 이 작가들은 문체 이외의 것들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어 고전들이 문체 면에서 그에게 끼친 영향은 결코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브렌은 말하기를 “그가 저술한 모든 것에는 확실히 우아함이 깃들어 있고 고전의 명료함이 빛나고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그가 보통 때와는 달리 웅변적이거나 풍자적일 때는 그가 키케로를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칼빈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들의 “문체로 결코 모방하지 않았다.” 키케로와 퀸틸리안은 칼빈이 고전의 모범들에게 자유롭게 일탈한 때문에 고통을 받았을지 모른다. 베르망은 그가 특히 추상적 용어와 그의 어휘를 신장시켜 준 대중 언어의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고전 이후 그리스도교 라틴어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베르망은 또한 그의 어순을 강조할 때 임의로 변경되고, 동사는 문장 끝보다는 중앙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강요」에서 그는 긴 도미문(掉尾文 : 주절이 문미에 오는 글)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만, 키케로와 다른 점은 그의 글에는 키케로의 인위적이고 운율적인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병행 구문과 삼중 구문, 동의어 반복 그리고 보다 복잡한 장치들을 사용하여 운율적 효과를 얻는다. 청각 효과에 대한 관심은 인접절에서 두운, 유운(類韻), 반복, 재담, 각운 등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칼빈은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하게 식별해 낸다. 그는 특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경 구절들을 즐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거칠고 꾸밈이 없는 언어가 사용되는 부분들에도 신성이 마찬가지로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부분적으로 과도한 수사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수사학과는 무관한 “진리의 힘”을 진실로 소유하고 있다. 문자화된 강론으로서의 성경을 그가 존중한 것은 칼빈의 문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고전 전통의 영향을 상쇄시키는 영향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교부 시대 저술가들의 영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그의 논문들보다는 그의 대중 설교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성경 저자들이 명료성, 단순성, 간결성을 보여준다고 그들을 격찬하는 경우가 매우 잦으며, 이 세 가지 특성들은 그가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들이다. 사실 그는 문체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의 사상을 명확하게 그리고 말의 낭비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간결함은 그가 종종 찬양하던 특성이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 원칙으로 인해 그가 부연하고자 하는 유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장황한 저술가들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특히 긴박한 종교 문제들이 현안이 되고 있는 곳에서 그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존경하는 친구와 동료들이었던 부처와 파렐까지도 비판하였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파렐의 “복잡하고 정교한” 문체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반대하고, 그의 문체와 자신의 문체와 차이점을 지적하고 어거스틴까지도 같은 이유로 질책하였다. 칼빈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어거스틴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그의 장황함에 나는 불쾌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겠네. 더욱이 나의 간결함이 더욱 간결하게 되기를 바라네”라고 하였다.
그가 문장을 간결하게 쓰는 법을 체득하였다고 하는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길게 논문을 쓴 저자에 대해 그의 문장이 간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강요」에는 우리가 보기에 지루할 정도로 문장이 길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구절들이 많다. 여기에서 오늘날에는 별로 강조되지 않는 당시의 어떤 신학적 관심거리들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문체의 한 특성으로서의 간결함을 판단하는 진정한 기준은 「강요」와 같이 방대하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기로 계획한 길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가 간결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의 표현들이 “과중하지 않다”는 것과 “그는 지루하게 하는 구절은 있을지라도 장황함은 없다”는 에밀 파게(Emile Faguet)의 말이 아주 적절하게 들린다. 그의 문장과 단락들은 사상으로 꽉 차 있고 구성 문제들을 조금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로 압축된 표현들이라는 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칼빈의 글은 그의 깊은 확신 때문에 어느 구절들에서는 웅변적 성격을 갖는 긴박성을 갖게 되었다. 그가 설득력이 있는 까닭은 형식 논리 때문이라기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브렌이 지적한 대로 그의 논증은 형식면에서 볼 때 언제나 삼단논법, 즉 생략삼단논법을 선호하는 것은 아마도 그의 간결성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명제는 독자가 채워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논리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독자는 보다 빠르게 설득을 당한다.
간결성의 원칙을 통상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있다면 논의 중인 입장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종종 감정을 나타내는 형용사와 부사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때때로 칼빈은 비난과 욕설에 통달한 대표적 인문학자로 보이는 경우가 있다. 욕설 당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멸적인 폭언을 종종 구사하였고, 때로는 적대자의 정당한 견해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에게는 이러한 일이 칼빈의 저서를 부분적으로 손상시키는 개탄할 만한 작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경우에 독설은 논증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이 논증의 힘을 강화시킬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서 비롯된 시도이다.
칼빈의 설득력은 그의 적의와 부정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강한 긍정적 확신들과 그의 풍부한 저력에 기인한다. 이 저서는 그가 후세대들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다. 오늘의 세대를 사로잡고 있는 새로운 관심사들조차도 그 메시지의 관련성과 진가를 조금도 감퇴시키지 않는다. 칼빈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온갖 주제들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소홀히 한다····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며 인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준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에게 이 한 가지 목적이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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