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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물화 사과와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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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

편집자주 이번 편은 19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폴 세잔을 다룹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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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z.heraldcorp.com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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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사과와 오렌지(Apples and Oranges) < 칼럼 ... - 매일경기

20세기 전반 회화의 거장 마티스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며 “나는 사과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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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igg.kr

Date Published: 6/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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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완벽 해부! 그림의 숨겨진 비밀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완벽 해부! 그림의 숨겨진 비밀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폴 세잔 사과

  • Author: 파리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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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2. 1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pvCifye_8S0

폴 세잔의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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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바대로 세계에는 3대 사과가 있다. 선악과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이에 대해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니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현대에 와서는 여기에 스티브 잡스가 창조해낸 브랜드 애플의 사과가 덧붙여져 세계 4대 사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얼핏 다른 건 이해가 가지만 왜 세잔이 포함되는지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진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현실 속 사람은 그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는다.

다시점으로 본다.

즉 , 앞과 뒤 측면 등의 다양한 시점으로 본다.

그것을 재현해서 그린 이가 바로 폴 세잔이었다.

그리고 이는 입체주의(큐비즘)의 탄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세잔이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 큐비즘의 대표 화가와 다를 바 없는 피카소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만 봐도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내가 세잔을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저/ 북스넛 출판

그러나 원근법에 익숙한 사람들이 언뜻 보기에 세잔의 그림은 어딘가 시점이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의 고정된 이미지처럼 그림 또한 3차원을 2차원 평면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현실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다시점으로 본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원근법의 기술처럼 소실점에 알맞게 그려진 그림이 맞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이 해석과 감상의 차이에서 가령 세잔이나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저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다 같은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세잔이 말했듯 이미 그 본질은 같다.

“자연은 원통, 구, 원뿔로 다루어야 한다.”

영원한 빛 움직이는 색채 인상주의,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저/ 마로니에 북스

즉, 세상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원통, 구, 원뿔을 어떤 시점으로 어떤 색을 써서 어떻게 빛과 어둠을 표현하고 나타냈는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하여 그 다시점, 입체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세잔이 그것을 이해하고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모리스 드니의 말처럼 그 3대 사과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선악과의 사과, 뉴턴의 사과, 애플의 사과처럼 세잔의 사과는 특별하다.

그런데 그 모두에게 왜 그 과일이 꼭 ‘사과’여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세잔의 사과만큼은 이런 이유였던 듯 보인다.

“세잔의 대부분의 정물화에는 사과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과는 그가 제일 좋아했던 과일이었고, 양적인 연구에 적합한 색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관련된 과일이었다. 세잔은 에밀 졸라를 처음 만났을 무렵 그에게 받았던 사과를 기억하고 있었고, 이때부터 사과는 우정의 상징이었다.”

영원한 빛 움직이는 색채 인상주의, 가브리엘레 크레팔디 저/ 마로니에 북스

생각해보면 우리가 영어 단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익숙한 것이 사과였고,

회화를 처음 배울 때 자주 접하게 되는 것도 사과였으니 사과만큼 특별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땅히 세계 3대 과일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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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근대 회화 선구자

편집자주 이번 편은 19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히는 폴 세잔을 다룹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내용이 깁니다. 이렇게 쓰고도 못 다한 이야기가 한가득입니다. 그 만큼 세잔의 궤적이 넓고 깊기 때문이겠지요. 글을 다 읽을 즈음,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이 부디 [후암동 미술관] 독자분들께 한 발 더 와닿길 바라 봅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사과는 무슨 빌어먹을 놈의 사과인지, 미칠 노릇이었다. 목이 또 저려온다. 손등은 또 간지럽다. 다리를 계속 꼬고 있자니 쥐가 난다. 움직이고 싶다. 목을 크게 한 번 돌리고, 손등을 시원하게 긁고, 다리를 쭉 펴고 싶다. 참을 수 없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몸을 돌리려던 그때… “어이, 숨도 크게 쉬지 말라니까? 자세가 또 흐트러졌잖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사과처럼 가만히 딱 있으란 말이오!” 아, 정말 울고 싶다.

누군가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실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순간을 말하겠다. 나보다 먼저 그의 모델로 서봤다는 한 말라깽이는 내게 아주 진한 블랙커피를 선물했다. “가기 전에 이거 꼭 마시고요. 그 사람 앞에서 절대로 졸지 마세요….” 얼빠진 자식의 얼빠진 소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모델로 선 첫날에 의도치 않게 살짝 졸았는데, 이 작자는 “나는 선생의 본질을 끄집어내려고 이렇게 애쓰는데, 선생은 어떻게 움직이고 잠까지 잘 수 있소!”라며 붓을 내던지고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 까칠한 마네도 이 정도는 아니라는데, 때로는 모델이 떠들고 움직일 수 있게 일부러 풀어놓는다는데…. 그런데 이 작자는 그런 게 없었다. 매번 “나는 화가, 당신은 사과. 움직이지 말 것. 오케이?”란 말만 하니 사과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무려 115차례나 모델이 돼 줬다. 애초 그의 짜증을 몇 번 들은 후부터는 중도 포기를 선언하고 싶었다. 그 곰 같이 큰 덩치로 “그럼 내가 여태 그린 건? 내가 여태 짠 구상은! 응?”이라며 멱살을 휘감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언젠가 그가 불러 또 작업실로 덜덜 떨며 가던 중 길거리 과일 가판대에 쌓인 사과 더미를 봤다. 나는 그 녀석들을 끌어안고 “너희들은 그놈한테 걸리지 말아야 한다”며 펑펑 울었다. 누가 봤다면 틀림없이 나를 병원에 끌고 갔을 테다.

폴 세잔, 볼라르의 초상

“손이 약간 어색하지 않소?” 그 화가에게서 그림을 받아서 든 날, 이 말을 한 게 내가 행한 두 번째로 가장 큰 실수였다. “아니, 그림이 다 좋은데 말이오. 손만 좀 너무 각도를 달리해서 그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의 부릅뜬 눈을 본 나는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그림은 굳이 따지자면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분명 감각이 있었다. 그만의 야성이 뚜렷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림을 가장 잘 본다는 나마저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면이 일부 있었다. 가령 초점과 형태가 어색하고, 내 눈동자는 없고, 내 자세도 이상하고, 색감도, 배경도, 붓 터치도…. 아, 일부가 아니군.

이 화가의 독특한 세계관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내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그간 없던 형식의 초상화였다. 다른 이가 봤다면 내게 분명 “멍텅구리 같으니! 사기를 맞았구먼”이라고 할 터였다. 이 생각을 하니 눈앞 화가의 명치를 힘껏 때리며 “내가 백 번이나 넘게 모델을 서 줬는데!”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다행히 내 두 배는 돼 보이는 큰 덩치가 다시 보였다. 그렇게 분노조절장애는 급속도로 치료됐다. 그래서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딱 한 지점, 가장 빨리 손 볼 수 있을 듯한 그 한 지점만 말한 것이다.

“손이 어색해. 손이 어색하다…. 그래, 좋소. 내일 또 이 시간에 나오시오. 내가 선생을 좋아해서 받아들이는 거요. 다른 이라면 어림없었소.” 그래, 모델 한 번쯤은 더 서줄 수 있었다. “앞으로 또 백 번 정도 나오면 될 거요. 그림을 아예 새로 그려야 하니까.”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저 티끌만 한 곳만….” “볼라르 선생!” 그 화가가 소리쳤다. “사과를 실컷 다 그려놓고 오렌지 꼭지를 덧발라놓으면 그게 사과요? 이 그림은 이제부터 약간만 달라져도 선생의 초상화가 아니게 되는 거요. 선생의 본질이 훼손되니까! 그러니 당연히 처음부터 그려야지. 알만한 양반이 말이야.” 아, 또 그놈의 사과…. 정말 울고 싶다.

틈만 나면 사과 타령을 한 이 고집불통 화가의 이름은 폴 세잔입니다. 미술상 볼라르는 이런 세잔의 모델로 나섰다가 된통 당했습니다. 그는 1914년 일기장에 “세잔이 작업하는 것을 직접 못 본 사람은 그의 작업 진행이 얼마나 더디고 고통스러운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라며 분노로 펜을 꾹꾹 눌러 썼습니다. 하지만 볼라르의 인내는 훗날 가문의 영광으로 돌아옵니다. 미련하고 촌스러운 곰 같았던 이 화가가 ‘근대 회화의 선구자’로 세상을 바꿨으니까요.

세상서 가장 어려운 정물화, 왜?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 1895~1900

사과와 오렌지가 널브러져 있습니다.

흰 천과 접시, 화려한 술 단지, 알록달록한 식탁보가 함께 있습니다. 앞쪽 접시에 담긴 과일은 나름의 형태가 있지만, 뒤에 몰려있는 과일은 대충 색깔만 칠해놓은 듯합니다. 흰 천과 접시는 잘 보면 마냥 하얗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식탁보는 식탁에 딱 맞게 깔리지 않고 뭉쳐있습니다. 그림은 빼곡합니다. 숲과 바위로 빽빽이 채워진 풍경화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안정감이 있습니다.

세잔의 그림 ‘사과와 오렌지’는 어렵습니다.

그간의 정물화와는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언뜻 봐선 작품성을 느끼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이 서양 미술사의 기념비가 된 이유는요. 영원할 것 같던 진리, 원근법을 대놓고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세잔은 인간의 눈과 카메라 렌즈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최초의 화가였습니다.

인간은 카메라처럼 하나의 소실점(消失點·평행한 두 선이 멀리 가서 만나는 점)을 갖고 사물을 ‘사진 찍듯’ 하나의 상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보겠습니다. 사진은 ‘찰칵’하는 순간 그 초점, 그 각도를 영원히 안고 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한 사물을 다양한 형태로 바라봅니다.

눈앞에 사과가 있다고 상상해보면요. 이를 보는 두 눈동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움직입니다. 그럴 때마다 초점과 시야가 미세하게 바뀝니다. 눈을 조금만 크고 작게 떠도, 고개를 살짝만 까딱여도 변합니다. 아예 한쪽 눈을 번갈아 감은 채로 보면 놓인 위치까지 달라 보입니다.

오랜 기간 “그림이 사진 같다!”는 말은 칭찬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시간대, 그곳에서 그 초점, 그 각도로 본 그대로를 그리는 것, 당시 그림의 원칙은 이러한 현실의 한 조각에 대한 ‘순간 포착’이었습니다. 이는 1401년생 르네상스 화가 마사초가 원근법을 건져 올린 후 근 450여년간 그 어떤 천재도, 반항아도 손대지 못한 성역이었지요. 세잔은 그런 점에서 혁명가였습니다. 과학사로 치면 누구도 생각 못한 공식 몇 개를 찾아낸 게 아니라(이 또한 대단한 일이지만), 아예 과학이라는 학문의 정의를 통째로 뒤흔든 겁니다.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일부), 1895~1900

‘사과와 오렌지’를 다시 볼까요.

그림 속 사과와 오렌지 등이 어지럽게 그려진 듯한 이유는 한 화폭에 여러 개의 시점이 담겨 있어서입니다. 왼편의 사과 접시는 위에서 본 시점으로 그렸습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오렌지가 담긴 접시, 술 단지는 옆에서 본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테이블 모양도 어색합니다. 식탁보 밑 왼쪽 테이블 면이 반대편의 오른쪽 테이블 면과 높이가 안 맞습니다. 마치 두 개의 테이블이 있는 듯합니다.

사과와 오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과일은 전혀 그럴 자리가 아닌데도 당장 굴러떨어질 듯 아슬아슬합니다. 몇몇 과일은 생뚱맞은 위치인데 안정적으로 잘 놓여 있습니다. 일부는 그리다 만 것 같고, 몇 개는 막 시들고 있는지 푸르스름합니다. 과일의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더 나아가 어제, 오늘, 내일, 작년, 지금, 내년의 시점을 각각 그렸기 때문입니다.

색채는 해방됐다, 이제 ‘형태의 해방’이다!

세잔은 근대 회화의 길을 연 화가입니다. 미술사의 판을 바꿨습니다. 이 말은 후대 화가 중 세잔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네, 인상 : 해돋이

한때 인상주의에 발을 담근 세잔은 곧 회의를 느낍니다. 인상주의는 빛을 끌어들여 그림에서 색채를 해방했습니다. 잘 익은 사과를 더는 빨간색으로 그리지 않아도 됐습니다. “빛이 더 들어오니 더 밝게 보였어. 그래서 주황색으로 칠했어”라는 말이 통하는 세상을 만든 겁니다.

하지만 세잔은 색채의 해방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세잔이 볼 때 인상주의는 가야 할 길에서 중간에 멈춘 운동이었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자들이 색채에 사로잡혀 사물의 형태를 소홀히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잔이 볼 때는 사물의 형태도 색채만큼 변화무쌍했습니다. 빛이 사물의 색채를 바꿨다면 보는 방향과 각도는 사물의 형태를 바꿨습니다. 가령 사과라고 해서 무조건 동그랗게 보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과는 넓적하게 보이기도 했고, 평평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빛은 포개질수록 밝아집니다.

이에 따라 색채 해방의 종착지는 눈이 시리도록 밝은 흰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형태 해방의 종착지는 무엇일까요. 세잔은 이 지점을 고민합니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에 답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세잔은 사과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다양한 사물을 셀 수 없이 다양한 위치에서 바라봅니다.

그렇게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고정관념이 밀려오면 고개를 강하게 저었습니다. 가령 사과를 볼 때면 ‘씹으면 달콤한 즙이 나오는 빨간색의 동그란 열매’라는 인간 영역에서의 생각을 버리고, 그냥 사과 그 자체를 보려고 애썼습니다.

폴 세잔, 병과 사과 바구니가 있는 정물

세잔이 사과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그 시절, 세잔의 집요함을 견딜 수 있으면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사과였습니다. 세잔의 끈질김은 모델을 도망가게 했습니다. 살구, 복숭아 같은 말랑한 과일을 세잔이 볼 때는 아주 빨리 썩는 과일이었습니다. 접시와 가구는 종류가 너무 많았습니다. 오래 관찰할 수 있고, 웬만한 곳에는 다 가져다 놓을 수 있고, 막 대해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과는 완벽한 사물이었던 겁니다.

세잔은 그림 ‘사과와 오렌지’에도 5년 이상 매달렸습니다.

얼마나 진득하게 쳐다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때로는 붓을 내려놓고 온종일 사과만 쳐다봤습니다. 그 썩지 않는 사과가 시들고 썩을 때까지 응시했습니다. 사과 하나를 두는데도 여기가 아니면 안 되는 위치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세잔의 이런 그윽한 눈빛으로 접시, 술 단지, 식탁보, 테이블의 본질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폴 세잔,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

세잔은 끈질긴 연구 끝에 답을 내립니다.

1904년 세잔은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나는 자연에서 구, 원뿔, 원기둥을 본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모든 형태는 구, 원기둥, 원뿔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쉽게 풀어볼까요.

그가 여러 각도에서 본 다양한 사물의 모든 형상이 결국은 구, 원기둥, 원뿔의 형상으로 ‘수렴(收斂)’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에 대해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본질만 남겨봅니다. 이를 가장 단순한 형태로 새롭게 구성하면 그게 예외 없이 구, 원기둥, 원뿔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세잔은 선과 색으로 대상을 모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선과 색으로 대상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일도 미술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친 겁니다.

이는 급진적 발상이었습니다.

인상주의도 이해받기 힘든 시절에 이런 생각을 이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제야 세잔의 이 말은 그림에서 형태를 해방한 선언문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山에 입이 있었다면…“그만 오라” 외칠 만큼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이 말년에 그린 생 빅투아르 산입니다.

“이게 풍경화야?”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림 자체가 범상치 않습니다. 산이 하나의 덩어리입니다. 하늘과 산이 모두 같은 범주의 파란색으로 칠해졌습니다. 산 아래 땅은 초록색과 금색의 조각들로 이뤄졌습니다. 집 몇 채와 나무 같은 걸 그린 듯하지만,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그렸는지는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히 원근법도 없고, 명암법도 없습니다.

이 그림을 찬찬히 보면 원뿔과 원기둥 모양의 형상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세잔은 사물의 외관 아닌 본질을 찾아 헤맸다고 했지요. 그런 그가 결국 “화가는 사물을 재현해야 한다”는 틀을 즈려밟고 “화가는 사물에 새로운 형태도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경지까지 올라선 겁니다. 즉 “네모로 보인다고 해 다 네모로 그릴 필요는 없다. 그건 겉모습일 뿐 본질이 아니니까”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까지 왜곡된 풍경화는 세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주 강력하고 흥미진진한 대상이 돼. 그러니 앞으로 몇 달 간은 같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관찰할 거야. 오른쪽으로 보면 전에 못 본 게 나와. 왼쪽으로 보면 또 전에 놓친 게 나오곤 해.” 폴 세잔, 1906년 9월 8일, 아들에게 쓴 편지

세잔은 이 그림을 어느 날 계시를 받고 휘리릭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세잔은 젊을 때부터 집요하게 이 산을 올랐습니다. 근처 동네를 산책했습니다. 어떤 날은 전망대에 올라 눈이 빠질 듯 쳐다봤습니다. 샛길부터 특정 나무의 위치까지 줄줄 외울 경지에 올랐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세잔에 대해 대놓고 “산에 미쳐버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폴 세잔, 생 빅투아르 산

세잔은 1882년부터 생 빅투아르 산을 주제로 그림을 30점 넘게 그렸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비교적 평이합니다. 색도 다채롭고 나름대로 원근법도 있습니다. 이는 세잔의 말년작이 충동 같은 게 아닌 철저한 연습과 계산에 따라 그려졌다는 걸 증명합니다. “옛날 공식에 맞춰 그릴 수 있지만, 그러면 더는 발전은 없다”는 생각이었을 겁니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가 이렇게 될지

세잔은 어떻게 혁명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곰 손’에 둔재였던 그는 어쩌다 19세기 최고의 화가로 남게 된 걸까요. 이 질문의 답은 세잔이 품은 신과 같은 우직함과 자기 확신에 있습니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쪽 끝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은행가였습니다. 그저 그런 은행가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곳곳에 지사를 둔 은행 설립자였습니다. 태어나보니 다이아몬드 수저였던 겁니다.

폴 세잔, 아버지의 초상

세잔은 어릴 적부터 법을 공부했습니다.

사업가인 아버지의 입장에선 믿을만한 법률인이 필요했던 겁니다. 세잔은 그런 아버지 속도 모르고 그림에 관심을 둡니다. 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프랑스에서 돈 있는 집안 자제가 미술에 심취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22살, 법대까지 간 세잔이 자퇴하고 프랑스 파리로 간 건 친구 에밀 졸라 때문이었지요.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로 활동하며 ‘목로주점’, ‘나는 고발한다’ 등을 남긴 그 졸라가 맞습니다. 세잔과 졸라는 동네 소꿉친구였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가난하고 병약했던 졸라는 또래에게 맞고 다녔습니다. 이를 본 세잔이 냄비 뚜껑만 한 손바닥을 휘두르며 녀석들을 혼내줬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영혼의 단짝이었습니다. 그런 에밀 졸라가 파리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세잔은 여기에 자극을 받은 겁니다.

폴 세잔, Madame Cezanne in the Greenhouse

이때부터 세잔은 평생 견디는 삶을 삽니다.

스스로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막상 파리에 와보니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아버지가 지원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한 만큼, 팔자 좋게 연습에만 몰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세잔은 예민해집니다. 졸라는 자기가 사귄 친구들을 소개해줍니다. 하지만 그 특유의 큰 체구와 특이한 말투, 툴툴대는 성격과 거친 행동 탓(이쯤 세잔은 누군가가 우연히 자신의 팔이나 등을 건드리면 발끈하고 화를 냈음)에 파리지앵(Parisien)과 깊게 사귀지도 못했습니다.

폴 세잔, 목욕하는 사람

세잔은 파리에 있는 내내 지겹도록 기본기를 갈고 닦습니다.

타고난 곰 발이었던 탓도 있지만, 태생적으로 기교나 눈속임을 못 견디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야망을 품고 파리에 온 세잔은 변방에 처박힌 채 성공을 향해 내달리는 친구의 모습만 봐야 했습니다.

세잔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저주에 가까운 막말도 참아야 했습니다.

세잔은 1863년에는 낙선전(落選展), 1870년대에는 피사로 등과 함께 인상주의전에 참가합니다. 결과는 ‘폭망’이었습니다. 기성 화단의 핵심 표적 중 하나는 세잔이었습니다. 뚱한 이 남자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림도 기괴했습니다.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은 밝기라도 하는데, 세잔의 그림은 혼자 우울하고 어두웠습니다.

세잔은 인상주의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세잔은 색채 너머 형태의 표현 방식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이름을 알려야 하니 인상주의 전시에 나섰지만, 이들과 비슷한 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세상은 세잔의 선구적인 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합니다. 인상주의를 놓고도 “뭣도 모르는 젊은 녀석들이 나댄다”고 손가락질한 시대였습니다.

폴 세잔, 빅토르 쇼케의 초상

“이상하게 생긴 머리 색깔은 임산부에게 충격을 줄 수 있고, 태아에게는 황열병을 옮길 것이다.” 폴 세잔의 ‘빅토르 쇼케의 초상’을 본 비평가의 감상평

세잔은 본질을 탐구하는 자신의 방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치매에 빠진 상태에서 그리는 백치”라는 말을 듣는 동안 그와 함께 비주류로 찍혔던 화가들은 하나둘 재평가를 받습니다. 다들 주류로 올라서 유명해집니다. 세잔은 그럼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잔의 동료들은 그런 그가 한심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세잔만 늘 제자리였습니다. 세잔이 근 20년간 파리에 머물며 얻은 건 조롱 뿐이었습니다.

위대한 은둔, 전설의 시작

1886년, 세잔은 고향에 다시 둥지를 틉니다.

세잔은 한적한 곳에 틀어박혀 계속 그림을 그립니다. 파리에서 이룬 것 없이 돌아온 그는 편한 삶을 뒤로 하고 끝까지 붓을 쥡니다. 그 해 세잔은 졸라와의 우정도 끊습니다. 졸라가 세잔에게 새로 쓴 소설 ‘작품’을 보내줬는데요. 이 안에는 클로드라는 화가가 나옵니다.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망상의 세계에 빠졌다가 끝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인물입니다.

세잔은 자신을 보고 클로드를 창조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30년의 우정은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세잔은 이후 평생 졸라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세잔은 아버지도 잃었습니다.

폴 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당시 세잔은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잔이 하는 건 붓질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사과를 그렸습니다. 지겹게 생 빅투아르 산을 그렸습니다. 형태의 해방, 사물의 본질….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초점과 각도, 거리를 바꾼 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무능력한 아들, 희망 없는 친구, 조롱하는 화단, 남이 잘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자신….

세잔은 낙오자였습니다.

이쯤 되면 “진짜 안 되는구나”라며 다른 일을 찾을 법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밀려오다 못해 만조가 된 고난을 품은 채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 고난에 빠져 죽지 않고 헤엄치는 것을 택했습니다.

폴 세잔, Château Noir

1895년, 견디는 삶을 살던 세잔은 드디어 빛을 봅니다.

그 시절 파리에선 미술상 중 프랑스계 미국인인 볼라르가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볼라르는 우연히 “시골에 틀어박혀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볼라르는 직접 세잔의 작업실을 찾았습니다. 볼라르는 남다른 안목의 소유자였습니다. “오히려 좋은데?”라고 생각합니다. 이후 볼라르는 자신의 갤러리에서 세잔의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런 괴물이 어디에 있었어? 도대체 뭘 어떻게 그리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야?”

10여년 사이 시대는 또 바뀐 상태였습니다. 세잔은 그제야 명성을 얻었습니다. 젊은 화가들 틈에서 그의 이름이 퍼져나갑니다. 인상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 화풍에 열광합니다.

후배들은 세잔의 그림에서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인상주의 이후 더 이상의 진보는 없을 것이라고 낙담했던 이들은 세잔의 그림에서 “아니다. 우리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습니다.

세잔은 이들의 교주가 됩니다.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됩니다. 차가웠던 평론가들은 세잔이야말로 가장 앞선 화가라고 띄웠습니다. 이렇게 뒤늦게 재산도, 명예도 얻은 세잔이었으나 그는 그 사이 득도한 양 명성을 만끽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전이 성황리에 열릴 때도 세잔은 작업실에서 혼자 그림이나 그리고 있었습니다. 작품을 의뢰받을 때 말고는 거의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실패자의 은둔이었습니다. 명성을 얻은 후부터는 이 또한 선구자의 신비주의로 포장됐습니다.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모두 ‘세잔 키즈’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화가 한 명을 꼽자면 단연 피카소입니다.

피카소도 자신의 위대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때문에 건방졌고, 남을 스스럼없이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피카소가 고개를 숙인 단 한 명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세잔입니다. 피카소는 세잔을 놓고 “나의 유일한 스승인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칭송했습니다.

20세기 이후 이름을 날린 화가 중 대부분은 ‘세잔 키즈’입니다.

폴 세잔, 대수욕도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세잔이 여러 방향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던 버릇은 피카소가 이어받았습니다. 피카소는 여기서 더 나아가 대상을 조각조각 낸 뒤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했습니다. 입체파가 탄생한 겁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은 세잔의 ‘대수욕도’를 본 뒤 그린 작품입니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이끈 브라크 역시 “세잔의 작품을 보자 모든 게 뒤집혔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고 했지요.

앙리 마티스, 사과

세잔의 과감한 색채 선정에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아예 색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두는 야수파를 창시했습니다. 마티스는 세잔을 ‘회화의 신 같은 존재’라고 칭했습니다. 세잔이 세상을 구, 원뿔, 원기둥으로 규정한 건 몬드리안과 칸딘스키의 추상회화에 영향을 줍니다. 추상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데생과 색채의 분리를 시도한 화가도 세잔이 최초였습니다.

그 잘난 피카소가 세잔의 작품에 얼마나 푹 빠졌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는데요.

어느 날은 피카소가 한 상인이 “이건 세잔의 그림이오”라며 비싼 값을 부르자 불같이 화를 냅니다. “내가 세잔을 모르는 줄 알아? 내가 그의 그림을 보기만 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난 그것들을 연구하느라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단 말이야!”라며 쫓아냅니다. 어떤 검증 도구도 없이 단번에 위작임을 알아차린 겁니다.

끝내 그림을 놓지 못한 채 죽었다

폴 세잔의 초상화

평생 버티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만, 그런 세잔의 마음속에서도 오랜 기간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나 봅니다.

원래도 사교성이 없던 세잔은 점점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피했습니다. 성격은 더 예민해졌습니다. 찾아오는 이는 마다하지 않았지만, 혈기 왕성했던 어릴 적처럼 먼저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근 40년간 유채화 900여점, 수채화 400여점을 남겼습니다. 세잔은 그림을 실컷 다 그리고도 일순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잘라서 불태웠습니다.

세잔은 성공한 후에도 자신을 ‘실패한 화가’,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진 시골 화가’로 여겼습니다. 무능력 탓에 자신이 본 그대로를 화폭에 옮겨담을 수 없다고 개탄했습니다.

세잔은 1906년 10월 23일 눈을 감았습니다.

세잔은 죽기 일주일 전쯤 평소처럼 밖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강한 비바람을 만났습니다. 세잔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기절한 채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았습니다. 세탁물 배달 마차에 실려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잔은 바로 다음 날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밖에서 그림을 그립니다. 건강은 더 악화합니다. 세잔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붓을 든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死因)은 폐렴이었습니다.

세잔이 1903년 볼라르에게 수줍게 건넸다는 말은 괜히 코끝을 시리게 합니다. 누군가는 걸어야 한 그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의 삶을 곱씹게 합니다.

〈참고 문헌〉

아트 인문학(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 카시오페아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미술, 미셸오, 시공사

〈후암동 미술관 읽는 순서(연재 중)〉

①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②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③‘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④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⑤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⑥“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⑦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⑧“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⑨‘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⑩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⑪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⑫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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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와 오렌지 / 폴 세잔] 작품 설명 / 특징과 표현 / 특별한 이유 /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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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은 누구?

후기 인상주의 화가 폴 세잔, 인상주의 운동에 동참했던 작가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폴 세잔은 사업을 이어받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 후 그림 공부를 하며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다가 피사로의 외광 묘사에 자극을 받은 후 밝은 색채감을 가지고 좀 더 단순화되며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사과와 오렌지

사과와 오렌지는

1899년 정물화 캔버스 유화이다.

폴 세잔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정물화이다.

1986년 부터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있다.

작품의 설명

▶ 캔버스에 유채 기법, 크기는 74 x 93cm, 정물화

정물화 : 여러 일상생활의 사물을 주제로 한 회화 외 총칭이다.

▶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을 주제로 사용했다.

두 그릇에는 사과와 오렌지가 담겨 있고 과일 다발이 흩어져 있다.

▶ 화려한 보자기들 아래에는 나무 테이블과 스탠드가 보인다. 작품의 오른쪽 부분이 왼쪽보다 밝은 채도로 느껴진다. 마치 빛이 측면에 비춘 것처럼

▶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세팅된 테이블에 무작위로 흩어진 과일을 의도적으로 그렸다.

▶ 적절한 생삭과 오브제를 사용하면서 작품의 독특한 균형을 이루었다.

▶ 과일뒤에 있는 배경 역할인 천은 빨강, 보라, 갈색을 결합하여 표현하였다.

흰색의 그릇과 토기들은 과일의 노란색과 주황색을 돋보이게 하였고 잘 익은 과일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 뭔가 혼잡해 보일 수 있는 칼라감을 사과와 오렌지를 통해 균형 잡힌 장면으로 만드려고 노력하였다.

작품의 특징과 표현

– 표현

다양한 각도로 그려 다양한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작품 전체의 균형을 이루는 동시 다발적으로 표현하였다.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과일 같다.

하지만 집요하게 관찰해보면 구도 아래에 서로 정확히 조화를 이루도록 계산되어 있다.

다양한 시선으로 보이는 사물들을 그렸는데, 이 다양한 시선의 관찰을 하나로 모으는 데 성공한 부분이다.

과일이 담긴 부분은 위에서 과일을 바라본 모습이고

접시의 앞쪽은 측면에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것은 모든 측면에서 완전한 형태로 사물을 그리기 위해서 다른 시점을 표현하였다.

– 특징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과는 세잔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사과와 오렌지라는 작품은 측면에서 바라본 시점 / 위에서 아래를 바라본 시점 등 다양한 복수의 시점으로 그려져 원근법과 단일 시점 규칙을 강조하는 기존 전통 회화를 타파한 새로운 시도였다. 앞으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도 기존의 정적인 정물화와는 다른 세잔만의 특징이 느껴진다.

세잔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을 원뿔과 원 그리고 원기둥으로 그릴 수 있다

– 폴 세잔

원 원뿔 원뿔 원기둥

아래 표를 보면 가운데 있는 사과의 그릇은 위로 솟아 오르는 느낌을 주지만

아래 테이블보는 밑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두개 사물이 상승과 하강의 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혁신의 폴 세잔

20세기 가장 혁신적이었던 폴 세잔의 작품들은 현대 미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현대에도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아래는 피카소가 했던 말이다.

파블로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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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과를 그린 화가, 폴 세잔

KOMSCO CULTURE_그림보고 화가 읽기 ⑦

평생 사과를 그린 화가, 폴 세잔

인류 역사를 바꾼 유명한 ‘사과’들이 있다. 이브의 사과부터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 그리고 잡스의 애플까지. 다른 건 몰라도 세잔의 사과는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화가가 그린 사과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말이다. 폴 세잔(Paul Cezanne)은 일찌감치 사과에 대한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라며 무려 40년동안 사과를 그렸고, 결국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세잔은 왜 하필 사과를 선택한 걸까? 평범해 보이는 그의 사과 그림은 도대체 왜 위대한 걸까?

세잔은 1839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화가를 꿈꾼 모험심 강한 소년이었지만 고압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사생아라는 정체성 때문에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진학했으나, 곧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인정받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그는 20대 중반부터 살롱전에 계속 출품했지만 늘 보기 좋게 떨어졌다. 18년의 도전 끝에 43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살롱전dmf 통과했고, 56세때야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이듬해인 1896년엔 인상파 동료들과 결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주류 미술계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후원자도 없었지만 세잔은 끝까지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르는 후배 화가들이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실패한 화가’이자 ‘예리하지 못한 눈을 가진 시골 화가’라는 자괴감 속에 살았다.

사과는 완벽한 모델

세잔은 자신의 부족함을 관찰 노력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가 사과를 그림의 주제로 선택한 건 쉽게 썩지 않아 오래 관찰할 수 있고, 구하기도 쉽고,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도 말 한마디 않는 조용하고 완벽한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초상화를 그릴 때도 모델을 백 번도 넘게 불러 사과처럼 앉아있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를 그릴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모델을 서던 볼라르가 실수로 잠이 들자, 세잔은 화가 나서 호통쳤다. “인마! 자세가 엉망이 됐잖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사과가 움직여?” 결국 볼라르의 초상화는 미완성으로 끝났다. 한번은 다른 모델이 몸을 돌려 크게 웃자 화를 벌컥 내며 붓을 내팽개치고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동료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는 생기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델들에게 웃고, 말하고 움직일 것을 권했다. 모델의 기분이나 개성이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반면 세잔은 모델에게 표정도 움직임도 없이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하니 모델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까탈스러운 화가의 요구를 완벽하게 들어줄 모델은 사과밖에 없었다. 세잔이 40년 동안이나 사과를 그리고 또 그린 이유다.

사과와 오렌지, 1899년경 Paul Cezanne, Apples and Oranges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

세잔이 60세에 그린 ‘사과와 오렌지’는 그의 말년 대표작이자 사과 정물화 중 가장 유명하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한 화면 안에 다양한 시점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물을 한 각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위, 앞, 옆에서 각각 본 시점을 한 화면 안에 그려 넣었다. 높이 솟은 중앙의 과일 그릇과 쏟아질 것 같은 불안한 왼쪽의 과일 접시, 오른쪽 물병 주변의 과일들 모두 시점이 다르다. 각각 다른 각도에서 바라봤지만 정물들은 나름의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 복잡한 문양의 소파와 천, 그 위에 놓인 심하게 구겨진 흰색 천, 하얀 접시와 꽃무늬 물병도 사과와의 조화를 위해 화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사과들은 먹을 순 없지만 단단하고 매력적이다. “나는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진짜 사과를 그리고 싶다”는 고백처럼 세잔은 사과가 가진 모든 빛깔, 형태, 변화를 한 화면 안에 진실되고 조화롭게 담고자 했다. 그것이 사과의 본질이자 진짜 모습이라 믿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자연에서 원통, 구, 그리고 원뿔을 본다”고 주장했다.

자연을 기하학적 형태로 재해석한 세잔의 눈은 사실 이전까지 그 어떤 예술가도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한 화면 안에 재구성하는 그의 시도 역시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과 전통을 깨는 것이었다. 카메라처럼 한 시점에서 바라본 대상을 원근법대로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당연하던 시대에 이렇게 복수 시점으로 단순화해서 그린 그림은 당시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이해는 커녕 조롱의 대상이 됐다.

대수욕도,1898~1905년 The Large Bathers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

세잔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흥미를 끄는 주제들을 반복적으로 그리곤 했는데, 말년에는 ‘목욕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연작을 제작했다. 사과 정물화처럼 과감하게 단순화한 인물과 풍경을 한 화면 안에 조화롭게 배치한 그림이었다. 그중 가장 큰 그림이자 죽기 전까지 7년을 매달렸던 ‘대수욕도’(1898~1905)는 입체파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그림을 본 파블로 피카소는 2년 후 최초의 입체파 그림인 ‘아비뇽의 아가씨’를 탄생시켰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이끌었던 조르주 브라크 역시 “세잔의 작품을 발견하자 모든 것이 뒤집혔다.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며 세잔의 예술을 칭송했다.

피카소와 마티스는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입을 모아 말한다.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후대 화가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화가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예술가가 아닐까. 스스로는 실패한 화가로 평생 자괴감을 안고 살았지만, 미술사는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른다. 사과라는 일상의 무미건조한 주제를 위대한 미술의 세계로 끌어올린 세잔. 그만의 예리한 눈과 오랜 관찰의 성실함은 현대미술을 향한 새로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문의 열쇠가 바로 사과였던 것이다. 세잔의 사과는 그래서 위대하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런던 소더비 예술대학원에서 현대미술학을 전공한 후 맨체스터 대학원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학과 기업체, 미술관에서 강의하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현재 KBS 라디오 <문화공감>에 출연 중이며, 동아일보 칼럼 <이은화의 미술시간>을 연재 중이다. 『가고 싶은 유럽의 현대미술관』 『자연미술관을 걷다』 등 13권을 저서를 출간했다.

사보 『화폐와 행복』 1+2월호(2021년) 52-52p 게재

※사보 『화폐와 행복』에 게재된 글들은 각 필자 개인의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조폐공사의 공식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폴 세잔-사과와 오렌지(Apples and Oranges)

ㅣ서영숙의 미술세상ㅣ

서영숙 안산환경미술협회 회장

요즘 사람들에게 사과하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질문을 하면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아이폰의 애플 사과라고 그러나 프랑스 상징주의 거장 드니(Maurice Denis, 1870~1943)의 말에 의하면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란다.

이브의 사과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며, 뉴턴의 사과로부터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세잔의 사과로부터 현대미술이 꽃을 피웠다. 세 사과가 각각 자연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인간 감성으로의 전환을 이끈 것이다.

20세기 전반 회화의 거장 마티스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나며 “나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그를 ‘사과의 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잔은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형태의 본질은 단순히 구형, 원통형, 원뿔형 세 가지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형태는 보는 사람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동일한 사과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서 볼 때, 옆에서 볼 때 모양이 각기 달라 보인다.

‘사과와 오렌지’(1895~1900)는 사과와 오렌지가 놓여 있는 정물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정물화와 다르다. 무엇보다 각 소재의 위치와 모양이 자연스럽지 않다. 왼쪽의 사과 접시는 오렌지가 담긴 접시와 다르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것 같다. 사과가 금방이라고 굴러떨어질 듯하다.

원근법의 원리를 지키는 전통적인 조형 원칙에 따르면, 모든 작품은 하나의 시점으로 그려야 하는데, 세잔은 다중 시점을 사용했다. 왜 그랬을까? 각 소재가 지닌 형태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른쪽 위의 접시는 원근법적 시점을 포기해 고의로 형태를 왜곡시켰다. 가장 그릇다운 그릇을 표현하기 위해,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그린 것이다. 세잔은 이렇게 시점을 옮겨가며 본 것들을 한 화면에 편집했다. 그 결과 원근법에는 어긋나지만, 전체적으로 안정감과 더불어 화면이 꽉 찬 느낌을 준다.

세잔은 명암법에 이은 원근법의 파괴로 서양미술의 토대가 되는 기준을 깨버렸다. 비난과 냉대가 쏟아졌지만 젊은 화가들은 환호했다. 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세잔 이후, 미술은 외부 세계를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림 내부의 조형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나는 중학교 1학년부터 유화를 시작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의 매일 열심히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꼭 친구가 있어야 하는 놀이가 아니고 혼자 열심히 하다 보면 하나하나 작품이 쌓여 간다. 그 시절 유독 많이 따라 그렸던 세잔의 그림들 지금도 찬찬히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만의 세잔 그리고 사과

언제든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당신의 그림은 무엇인가?

키워드에 대한 정보 폴 세잔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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