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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장례 이야기제5강] #5제1강 \”장례 예배 준비하는 목사가 기억해야 할 다섯 가지 꿀 팁\”
제2강 \”임종예배부터 하관예배(부활대망예배)까지 전 과정\”
목사가 알면 좋은 세 가지 꿀팁
제3강 \”환우의 임종예배\”
제4강 \”성도 소천의 소식을 연락을 받고 해야 할 일\”
제5강 \”장례식장에서 해야 할 일\”
제6강 \”위로 예배 준비시 주의 할 일\”
제7강 \”안치실 입관시 해야 할 일\”
제8강 \”입관 예배 준비시 주의 할 일\”
제9강 \”발인 예배 준비시 꼭 기억할 일\”
제10강 \”화장장에서 주의 할 일과 화장예배 인도\”
제11강 \”장지에서 주의 할 일\”
제12강 \”납골당에서 주의 할 일\”
제13강 \”수목장시 주의 할 일\”
제14강 \”산골시 주의할 일\”
제15강 \”전통적 하관을 할 때 주의할 일\”
제16강 \”바다장을 할 때 주의할 일\”
제17장 \”장례식 설교 작성법
제18강 \”장례식 기도\”
제19강 \”차별화된 장례 예식 준비하기\”
제20강 \”제3일차 발인날 주의할 일\”
제21강 \”화장장 선택과 예약하기\”
제22강 \”상조회사 고르는 법\”
제23강 \”장례식장 고르는 법\”
제24강 \”납골당 고르는 법\”
제25강 \”장례식 때 바가지 안 쓰는 법\”
제26강 \”장례식 가장 경제적으로 품위있게 하는 법\”
제27강 장례식 예식지
제28강 장례식 실제 설교문
제29강 장례식 기도문
#입관예배, #기독교장례, #강태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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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예배 설교, 입관예배 설교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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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방 설교 – mission – 입관예배 설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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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교회를 위하여] 강태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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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7.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lfA0CzQsc4
임종예배 설교, 입관예배 설교
임종예배 설교
제목: 죽음조차 귀중합니다
성구: 시 116:5-16
사람이건 짐승이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고차원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인간부터, 말초신경만으로 살아가는 한낱 미물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하며 거부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죽음이 아닌 귀하고 복된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1. 하나님이 우리를 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두시고 때를 따라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후대하십니다. 이 세상 살 동안도 그러셨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크게 우리를 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도의 자격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누구입니까? 말 그대로 거룩한 무리입니다. 누가 거룩합니까? 아무리 노력하도 근본이 죄악된 우리 인간은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입은 사람들만이 거룩한 무리,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천국, 우리의 본향에 돌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3. 우리의 결박을 푸셨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온갖 결박에 묶여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고의 결박, 질병의 결박, 사고의 결박, 물질의 결박 등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결박에 묶여 살아갑니다. 성도들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 결박을 푸시고 영원한 자유를 허락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완전한 기쁨과 평화와 안식만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죽는 것, 즉 예수 안에 죽는다는 것은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육신의 이별은 슬픈 일임이 분명하지만, 이 죽음이 성도의 죽음이 되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음조차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천국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 입관예배 설교(일반적인 죽음일 경우)
제목: 사모의 정
찬송: 221, 222
성구: 창 50:22-26
1.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타향살이는 사람에게 그리움과 외로움을 안겨다 줍니다. 고향 사람이 그립고 고향의 정취가 그립고 흙내음이 그립습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수많은 실향민들이 아직까지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명절이 되거나 통일에 접근하는 움직임들이 있을 때마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공산치하의 숨 막히는 삶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운 고향 산천에 한 번이라도 가보고 싶은 마음으로 통일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향에 대한 사모의 정입니다.
2. 약속의 땅을 사모하는 요셉
요셉은 어린 시절 형들의 시기 때문에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하고 외국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가 팔려온 곳은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애굽에서는 직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파란만장한 타향살이 가운데, 애굽에서 출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사모의 정이 항상 그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어느 해 팔레스타인에 기근이 생기게 되었고, 그 기근으로 먹고 살기 힘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요셉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꿈을 통해 먹을 것을 비축해 두었습니다. 이제 야곱이 살 수 있는 것은 애굽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차례의 시도 끝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애굽에 내려가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요셉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행복한 시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땅이 아무리 행복이 있다고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는 행복한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드디어 요셉의 나이도 110세가 되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 선 요셉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자족들에게 잊어서는 안 될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요셉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때한 비전이 있었고, 그 땅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그 약속의 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갈 곳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후손들에게 확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타향 땅 애굽에 영원히 묻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약속의 땅으로 이장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죽었고, 그의 육신은 향재료를 발라 애굽에서 입관하였습니다.
3.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죽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속에 간직되어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역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들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땅, 그 가나안에 대한 사모의 정은 죽음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 그리운 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면 여러분들의 가슴에 무엇이 가득 차 있겠습니까? 돌아가고 싶은 그 어떤 세계가 있습니까?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안식처,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의 정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무엇입니까? 만약 우리가 이 세상 것으로 많이 채워두고 애착을 가지는 것들을 만들어 두면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적어질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운 분이 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당신의 마음이 이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거나 영원한 본향에 대한 사모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입관예배에 참석한 우리의 입에서 “너희는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입관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지상에서 영원으로
찬송: 294
성구: 빌 3:20-21
1. 새로운 피조물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천국의 시민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시는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미 영원한 하늘의 고향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 소망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이 소망은 복스러운 소망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끄럽지 않은 소망입니다(딛 2:3). 만약 우리에게 이 영원한 산 소망이 없었다면 이 지산에서의 삶은 무의미하며 살맛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슬픔 가운데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믿음의 이유
이런 믿음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삶은 이런 육체적인 존재에 비해서는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매 7년마다 우리의 육체적인 몸은 완전한 쇄실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이 있는 동안 여러 번의 몸들을 경험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은 지속합니다. 사상들과 기억들과 소망들과 목적들은 모두 이런 육체적인 변화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유지되어 왔습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 여러 번의 몸들을 소모한 후에 인격이 천상적인 몸으로 계속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왜 어려운 것입니까? 사실, 생의 가장 참되고 가치 있는 것들은 몸 안에 갇혀 있을 수 없으며, 고학에 의해서 측정될 수도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고귀한 인격과 신실한 우정, 이와 같은 가치들이 우리의 몸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격의 가장 귀중한 소유인 것입니다.
하늘의 고향에 대한 믿음을 갖는 세 번째 이유는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 지상의 식민지로 보내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사셨으며, 사랑하셨으며, 죽으셨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는 생을 떠나는 자로서가 아니고 더 큰 생으로 들어가는 자로서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 그리고 죽음의 사실에 대해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고, 또한 그 하늘나라에서 지금도 살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아버지 집으로 간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때로는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어려움에 처하기도 하지만,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다하는 날이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3.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라
먼저 부르심을 받은 고 000(직분)님은 이런 소망 가운데 그의 몸은 비록 이 땅 위에서 병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셨지만, 이제 이 땅 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우셨습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도 남은 소망이 있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놀라운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큰 선물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입관예배 설교
제목: 수고의 집을 벗고
성구: 마 11:28
1.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짐을 지고 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큰 짐을 지고 어떤 사람은 작은 짐을 지지만 누구나 짐을 지는 수고로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던 사람도, 태생이 출중하고 천성이 훌륭해도 어쩔 수 없는 수고로움의 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각자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그 무게를 버거워하며 한걸음 한걸음 힘든 발걸음을 옳기는 존재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짐을 지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예수께서 이 무거운 짐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느냐가 그 사람의 품격과 지위를 나타냅니다. 이웃집이나 친척들의 초대를 받으면 편한 옷차림에 과일이나 한 바구니 준비해 가면 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초대를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옷차림부터 달라집니다. 가장 좋은 옷을 입고나, 맘에 드는 옷이 없다면 당장 백화점으로 달려가 멋진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 단장하고 초청받은 장소로 들어가세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대통력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만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초대한 자리에는 멋진 옷도 필요 없습니다.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의 초대는 그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믿음의 초대장을 준비하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초대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세상은 그 어느 곳도 쉴만한 것이 없습니다. 휴가가 되고 방학이 되어 산으로 들로 가보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고로운 일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으나 벗어놓고 쉴만한 곳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16:33을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환란이 있는 곳입니다. 세상이라는 곳은 어려움과 수고로움으로 우리에게 참 쉼을 주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신 곳에는 참 쉼과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에서 비로소 우리는 수고의 짐을 벗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 000성도께서는 주님의 초대를 받아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 더 이상은 수고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초대되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관에 누인 시신과 소의를 걸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영혼은 믿음의 초대장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거기서 인생의 수고로운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우리고 계실 것입니다.
이 입관식이 끝나면 더 이상 고 000성도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 기쁨의 잔치 자리에 앉아 있는 고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 입관예배의 시간은 육체의 이별이 아쉬운 슬픔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의 짐을 벗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시는 유족과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발인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성도의 고백
찬송: 231, 293
성구: 딤후 4:7-8
1. 아름다운 고백
이 땅을 떠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땅을 떠날 때 신분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을 많이 모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많이 누렸을 것입니다. 대단한 지식을 소유하고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떠날 때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제가 봉독한 디모데후서 4:7-8절의 고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악한 영과의 싸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입니다. 비록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리지는 못했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 그는 어떠한 상황에 있었습니까? 그는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죄수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평생을 분투하며 살아온 그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바라볼 때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는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내가 선하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담대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실패한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진실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2.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
그리고 그는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자의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발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고인을 더 이상 이 땅에서 볼 수 없다고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고인이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바치고 이 땅을 떠나가시는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을 하나님 앞에 바친 자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이 고인에게 주어질 것을 생각하면서 유족 여러분들은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고인은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고인이 이 자리에 계시다면 그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 너희들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기를 바란다. 달려갈 길을 다 달리기 바란다. 나에게는 이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이것은 나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너희를 위하여도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담대한 고백을 가능하도록 만듭니까?
그것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종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그들은 압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에 처해서도 담대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3. 고인을 떠나보내고 슬퍼하지 않는 근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땅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다고 하는 슬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울고만 있을 수 없는 근거가 됩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에게 저절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유족 여러분, 지금은 이곳에 시신만이 남아 있는 고인이지만 고인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고인을 사랑하는 열심히 좋은 수의와 좋은 관을 준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양지 바른 곳에 묻어 드리려고 애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고인을 가장 사랑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잘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천국에서 고인을 다시 만날 확신 가운데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확고히 가지시면서 믿음의 길을 걸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발인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일 경우)
제목: 하나님의 심판과 영생
찬송: 289, 291
성구: 빌 1:20-21
1. 피할 수 없는 죽음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발인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죽음의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현실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죽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과연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당연하게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어 넘어진다 해도 우리는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죽어야 할 존재로 창조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문제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인해 에덴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6:23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생할 수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 되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없게 된 것입니다.
2. 죽음 뒤에 기다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영생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현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 제가 봉독했던 빌립보서 1:21은 죽음의 문제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 사도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종노릇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바울은 죽음 자체도 초월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까? 바울 사도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있음을 바울 사도는 담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됨을 바울 사도는 알고 있기에 담대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빌립보서 1:23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안락한 주택 안으로 들어갈 소망이 있는 광야의 백성이라면 이제 다 낡아서 허물어져가는 천막에 연연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천국을 향하는 영적인 진군
유족 여러분, 사랑하는 분의 죽음 앞에서 애통함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앞에 죽음의 모습으로 있는 고인은 바울 사도의 믿음의 고백을 이해하고 살았던 분임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의 죽음은 의미없는 죽음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영적인 진군인 것입니다. 고인의 무언의 외침의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
유족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아무리 대단한 무엇을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 발인예배
제목: 하늘 가는 밝은 길
성구: 엡 2:4-10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생을 살아가기도 힘에 겹지만, 고단한 삶을 살고 난 후에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몸들인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도 살고 또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다는 귀한 사실을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떻게 저 하늘로 가는 밝은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이곳을 떠나는 형제(자매)도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떠나셨는데 누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죄인된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신 길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마련해 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구원의 길, 하늘 가는 밝은 길은 4절에 있는 대로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위해 이 길을 준비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담이나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금기인 선악과를 따먹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그 피를받은 후손들, 곧 우리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생각이나 판단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었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은 뒤에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새 사람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이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주었는지를 말해 줍니다. 5-6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RP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은혜로써 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전혀 소망 없는 길을 가고 있던 우리들에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열어 주시려고 그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귀한 보좌를 떠나서 이 땅과 역사 속에 오셨고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죽음의 원인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셨으며 우리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영원히 밝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은혜)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길이 하늘 가는 밝은 길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이 길을 갔으니 우리 모두 이 사실을 믿고 큰 위로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길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려진 하늘 가는 밝은 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8절)라고 하며 믿음으로 얻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가고 싶은 저 하나님 나라는 믿음 없이는 못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아들 예수를 우리 모두의 구세주로 믿을 때에만 하늘 가는 밝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갈 수 있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우리 형제(자매)가 떠난 것입니다.
막막한 길, 외로이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주님 손 붙잡고 믿음으로 가신 것을 생각하며 위로받고 남기신 유업과 유훈, 맡기고 가신 일, 마음으로 부탁하고 가신 모든 일들 잘 이루기로 다짐하며 전송하시기 바랍니다.
** 하관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죽음으로 이룬 사랑
찬송: 290, 545
성구: 눅 23:50-52
1.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가장 이상한 하관예식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시신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찢긴 몸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정성껏 예수님의 시신을 닦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리마대 요셉은 그 몸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옴 몸을 세마포로 싸기 시작합니다. 또 향품을 넣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요셉은 세마포로 감싼 예수님의 시신을 아직 한사람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사 53:9).
외관으로만 본다면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는 장례의 예식입니다. 하지만 부자의 묘실에 넣어지는 그 시신은 누구의 시신입니까?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시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히브리서 1:1-3에서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고 말씀합니다. 그 본제의 형상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씀합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차디찬 굴에 세마포에 감겨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누구를 위함입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를 위함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은혜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2. 믿는 자의 영광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 000(직분)님의 하관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인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땅에 묻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사람의 시신이 땅에 묻히는 것은 참으로 소망이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으로 묘소를 꾸민다 하여도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땅에 묻히는 고 000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땅에 묻히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이 땅에 울려퍼지는 날 고인은 일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영혼은 이미 낙원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울지만 마시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지시고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하관예배 설교(불신자의 가정인 경우)
제목: 성도들이 가는 곳
찬송: 292, 545
성구: 계 21:10-23
1. 성도들이 가는 곳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는 고 000(직분)님의 하관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관이 잘 파놓은 묘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이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고인의 관이 묻힌 이곳을 흙으로 덮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묘지 앞에는 ‘성도 000’라는 이름이 적힌 묘비가 설 것입니다. 온화하고 사랑이 넘치는 000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슬픔이 몰려오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슬픔의 이야기만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늘 제가 봉독해 드린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고 유족 여러분 우리는 물건을 사기 위해 가끔 백화점에 갑니다. 대부분의 백화점에는 1층에 많은 잡화상품과 함께 보석을 파는 매장들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치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그 보석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은 가끔은 금은보석을 파는 가게에 가볼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 욕심을 키우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보석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 보석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8-20의 말씀을 봅시다.
제가 왜 이 말씀을 읽는지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가끔은 성도들이 보석상에 가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 이제 여러분이 사랑하는 고 000님이 가신 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수 있는 자
보석으로 꾸며진 집이 있습니다. 정금으로 된 성입니다. 모든 성곽은 벽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000님이 가신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모든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이 가게 될 나라입니다. 고인을 더 이상 뵙지 못한다고 하는 안타까움의 눈물이 있는 이 자리는 눈물만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물론 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례의 고통스론 부르짖음 같아서는 안 됩니다. 소망의 눈물, 기쁨이 담겨 있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그 나라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그 어린양이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성에 들어가 이 영광스러운 기쁨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21:27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랴” 누구입니까? 누가 새하늘과 새땅에 거할 수 있는 자들입니까?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는 여러분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인하여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복음을 받아들이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고인이 믿고 구원 받은 백성으로 이 땅을 떠나셨음을 인하여 감사하시가 바랍니다. 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들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천국으로 가신 고인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하관예배 설교
제목: 안식의 삶
성구: 창 2:1-3
안식에 대하여 하나님은 일찍이 창조 사건에서부터 말씀하셨습니다. 6일 동안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지으시던 일을 다함으로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1. 안식의 의미
이 세상의 수고와 무거운 삶을 마감하고 고인은 지금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셨습니다. 고인을 안장하는 이 자리에서 안식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하나님은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안식, 하나님이 먼저 본을 보이신 안식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창조기사에서 안식을 중요하게 다루고 계십니다.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자들이 7일째 되는 날에는 안식하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신성국가의 핵심인 십계명의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날이요,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써 지킴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게 됩니다. 창조의 안식을 주신 하나님이 애굽이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거룩히 지키는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2. 안식의 복
만일 안식일이 없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노동과 수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일의 노예가 되거나 일의 중독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안식이 없는 수고의 삶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복입니다.
또 안식일이 없다면 인간은 창조의 세계에 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생명이 없는 죽음의 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오서 생명을 부여 받은 존재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이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에게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 창조의 안식은 안식일의 기원이 되었고 안식일은 7년째의 안식년으로 발달됩니다. 또 안식년이 일곱 번 합해진 49년 다음 해는 50년째의 희년으로서 모든 종들이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땅과 소유물이 원주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안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3. 안식의 세계
인간은 이 땅의 수고로운 삶을 다 마치면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영원한 안식은 저주가 아닙니다. 고통이 아닙니다.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요, 가야할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이 고인을 떠나 보내는 자리이지만 너무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고인은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제는 수고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어두운 밤도 없고 저주도 없는 곳입니다. 죽음도 다시는 없는 곳입니다. 오직 성도의 죽음은 칭찬과 영광과 상급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안식이 있고 천국이 있고 부활과 영광의 상급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곁을 떠난 고인은 지금 주님의 품에 안겨 칭찬과 존귀 가운데 참 안식과 참 평안을 누리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땅에서는 참 안식이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참 안식은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약속한 안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의 삶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믿음의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화장예배 설교(믿음의 가정인 경우)
제목: 마지막 날 부활에는
찬송: 228, 545
성구: 요11:24-27
1. 부활을 보여주신 예수님
오늘 화장예배 앞에 머리 숙인 우리는 다시 한 번 인생의 결과에 대해 예측해 보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한 가정의 슬픔과 영원한 세계를 향한 소망의 빛줄기가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과 특별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모 없이 3남매가 힘겹게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사로는 병이 들었습니다.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슬픔 가운데 두 자매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셨고, 그동안 나사로는 죽음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가정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늦은 시간에 마리아의 가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썩어 들어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얼마나 야속한 눈물입니까? 조금만 빨리 오셔도 충분히 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왜 이렇게도 짜증스러울까요?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썩어진 육신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묻혀 있는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놀랍게도 나사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입니다. 이미 부패된 몸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를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실체’를 확증시켜 주기를 원했고, 자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했습니다.
2.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얼마 있지 않으면 우리의 아픔과 슬픔과는 상관없이 고인의 시신은 몇 줌의 잿더미로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소망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의 죽음 몸을 다시 무덤에서 나오게 하신 주님이 잿더미가 된 고인의 시신을 죽음의 늪에서 나오게 하시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 저항할 수 없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예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물론 불완전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현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주님에 대한 신앙은 저버린 채 마지막 날의 부활에만 국한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다시 한 번 마지막 날의 부활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고인을 부활체로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도서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출판사, 2005
박현모 외 4인, 추모 설교집, 청우, 2005
박종순 외 6인, 장례예식설교, 한국문서선교회, 2005
입관예배 설교자료
(입관하고 뚜껑을 덮지 않은 채 입관식을 거행할 수 있고, 입관하고 뚜껑을 덮고 입관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관 뚜껑을 덮지 않고 입관식을 할 때에도 관 뚜껑을 가까운 데 두어 쉽게 가져다 덮을 수 있게 해야합니다. 사회자는 관두에 서고 유족은 아래쪽에, 그리고 조객은 적당한 자리에 자리잡게 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1)개 식 사…주례목사
“이제부터 입관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유족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를 받으시며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으로 유족들이 위로 받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이 예배에 참예하시기를 바랍니다.”
2)찬 송…………………….543장………………………다같이.
3)기 도…………주례자가 직접할 수도 있고 장로를 시킬 수도 있습니다.
4)성경봉독………………….살전4:13-18절……………….주례목사.
5)설 교…………………..솜방있는 죽음……………….주례목사.
인생에게있어서 죽으면 그만이야? 아닙니다. 인생에게는 사후 소망의 길이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은 두가지가 있으니 믿는 자의 부활과 불신자의 부활입니다. 믿는 자의 부활은 영생의 부활이니 소망이 있으나 불신자의 부활은 영원한 멸망의 부활이니 절망인 것입니다. 요5:29절에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믿는자의 부활은 하늘에 영화를 누리니 소망이 있습니다.
(1)공중에서 예수님의 영접을 받습니다.
(2)잘했다 칭찬을 받습니다.
(3)상과 면류관을 받아 씁니다.
(4)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5)항상 예수님과 같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이시간 우리 앞에 고인이 된 ㅇㅇㅇ성도님은 그 육체는 우리 앞에 있으나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잘 간직하셨다가 부활의 날에는 우리와 다 같이 만날 것이니 부끄럼없이 만나도록 신앙생활 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6)기 도…………………………………………………설 교 자.
7)찬 송…………………….539장,,,,,,,,,,,,,,,,,,,,,,,….다 같 이.
8)입 관…
관 뚜껑을 덮지 않고 입관식을 거행할 경우에는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 대하는 의식으로 고인이 즐겨 부르던 찬송이나 찬송가 524장을 부르는 동안 상주를 필두로 유족들이 한 줄로 관두 쪽으로 와서 고인의 얼굴을 봅니다. 조객들 중에서도 원하는 사람은 고인의 얼굴을 봅니다. 관 뚜껑을 덮고 입관식을 할 경우에는 이 의식을 생략합니다. 고인의 얼굴을 대하는 의식이 끝나면 관 뚜껑을 덮습니다.
9)축 도…………………………………………………주례목사.
*입관예배가 끝나면 병풍을 관 앞에 옮겨놓고 자리를 정돈합니다.
(1)어린이 입관예배시 설교입니다.
제목: 아버지의 것을 아버지께로
계시록22:1-5절, (찬송 299. 300장)
어린 생명과의 이별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다음의 말씀으로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1)어린 보물을 주인에게 돌려드린 다는 믿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경전”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가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 줄로 압니다. 남편의 출타 중에 그의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는 “만일 어떤 부자가 내게 값진 보석을 맡겼다가 돌려 달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두말 할 것없이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두 아들의 시체를 보여주며 조용히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보석을 찾아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녀를 잃은 것을 슬퍼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보물을 잠시 관리하다가 이제 돌려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2)인간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시간, 생명, 자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우리의 기초적인 고백이며, 오늘 이 어린이의 몸을 입관하면서 우리는 이 고백을 새롭게 하는 것 뿐입니다.
3)영생 복락의 곳으로 불러가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 어닌 영혼을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는 나라로 불러가셨습니다. 거기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생시키는 일을 합니다.
짧은 본문 중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말이 두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생명수 강이 흐르는 나라에 더욱 어울리는 것은 이같이 어린 영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어린 영혼을 불러가셨습니다.
이제 관에 못박는 소리가 “주여, 주님께서 주신 이 어닌 영혼을 주님의 섭리에 따라 생명수 강이 흐르는 주님의 나라로 돌려드립니다.”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장년입관 예배시 설교입니다.
제목 : 짧은 이별, 딤후4:7-8절, (찬송 290.544장)
우리 성도의 죽음은 짧은 이별에 불과한 것입니다.
1)곧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관과 하관을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이 완전한 이별인 줄 알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짧은 이별이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자리일 뿐입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라는 찬송가 3절에는 “그리던 성도들 한자리 만나리 돌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이와 같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 고백이 되어 있습니다.
2)주님께 충성할 것을 약속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는 영원한 이별의 자리가 아니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잠시동안 헤어져 있을 이 형제의 모습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주님께 더욱 충성된 생활을 할 것을 이 형제 앞에서 약속 하시기 바랍니다.
3)부끄럼 없이 주 앞에서 만나게 되기를 소망합시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얼마 후애 주님 앞에서 다시 만날 때 부끄럼 없이 아니 면류관의 상급을 받으면서 만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노년입관 예배 설교입니다.
제목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5:1-5절, (찬송289.544장)
오늘 입관하시는 분은 장막 생활을 벗어 버리고 영원한 집으로 가셨습니다.
1)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우리 주님이 예비하신 집입니다. 요14:2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후5:1-)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요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2)믿음으로 가는 집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집입니다.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집입니다.
3)성도들이 소망 중에 바라보는 집입니다. 고후5: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집은 누구나 바라는 집입니다.
육신의 집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마음으로 항상 영원한 집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고인이 전능자를 우러러 보고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공경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한 것은 장막집은 무너질 날이 있는 줄 알고 한편으로 영원한 집을 사모했기 때문일 줄로 생각됩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매 이 세상을 떠나가시는 고인의 앞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그곳으로 향해 가셨습니다. 우리도 고인을 따라 순례자의 길을 믿음으로 잘 걸어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성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장례 예배] 입관예배 순서 및 기도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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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장례 예배 중에서 입관예배 순서 및 기도와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입관예배 / 영원한 하나님 나라
1. 예식사 / 지금부터 고 ㅇㅇㅇ 집사님의 입관식을 거행하겠습니다.
2. 묵도 / (요14:1-6)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양의 문이나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영생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3. 찬송
4. 기도 / 영원하신 생명의 아버지 하나님, 인생이 되어 세상에 오는 것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되어짐을 믿고 기도를 드립니다. 인생은 한 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입니다. 오늘 이 시간 고인의 입관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지금 이 시간 주님의 사랑하는 딸 고 ㅇㅇㅇ 집사님의 임종을 맞이 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답고 선하게 이루시는 하나님, 귀한 딸을 지금 불러 가심이 오히려 ㅇㅇㅇ 집사님에게나 모든 가족에게나 선과 유익이 됨을 믿고 영광을 돌리옵나이다. 오늘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주시고 믿지 않는 유족들이 믿음을 새롭게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5. 성경 / 고후 5:1-9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니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 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6. 설교 / 사람의 몸은 흙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때가 되매 죽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준비하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아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를 소망하면서 이 땅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날이 한번 불어 흔적도 없어지는 바람 같고 공중에 쏘아서 금방 보이지 않게 되는 살과도 같습니다. 해가 오르면 말라서 사라지는 아침 이슬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가야 합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같이 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악 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 이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입관하시는 ㅇㅇㅇ 집사님은 이제 괴로운 육신 장막의 생활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집으로 가셨습니다. 고인은 세상에서 육신의 무거운 짐, 슬픔과 괴롬을 쉬고 당신의 육체를 이제 조용히 눕히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나 네 영혼은 내가 준 것이니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제 귀한 집사님의 영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아버지 집에서 세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평안한 안식을 누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고 한 없는 위로로서 위로하여 주십니다.
이제 바라건대 사랑하는 유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모든 이웃들에게도 지금 바로 이 위로가 함께하사 과도한 슬픔이나 절망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신 대신에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천국 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이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고 ㅇㅇㅇ 집사님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평생을 주님을 모시고 믿음을 따라 사셨으니 이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영원한 천국에 가신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집을 짓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로 집을 짓고 어떤 이는 돈으로 집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힘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은 육체가 죽는 그 순간에 함께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라!(딤전 6:7) ”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쌓아 놓고 이제 잘 살아보려 하면 가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를 얻어 놓고 그다음 날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지은 집은 영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많습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한 것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꿈꾸며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고 ㅇㅇㅇ 집사님은 육신의 장막은 무너졌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눈물과 슬픔이 없고 고통과 죽음이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다시 만날 소망이 있습니다. 특별히 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7. 기도 / 은혜와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제 우리 곁을 떠난 사랑하는 고 ㅇㅇㅇ 집사님의 시신을 입관하며, 사랑하는 님이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된 것을 생각하며 슬픔 중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고인과 마지막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고인을 더 보고 싶어도 육신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유족들이 모였으니 하나님 고인의 마지막을 보고 평생에 기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 가는 길이 섭섭하지만 인생은 한 번 왔다가 누구든지 한 번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형제들은 마지막 날에 천국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덜 섭섭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믿지 않는 가족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믿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육정을 가진 저희들은 떠나보낸 분을 생각하며 참으로 서운함과 슬픔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특별히 피와 살을 나눈 사랑하는 유족들은 다하지 못한 효도와 가신 분의 가슴을 아프게 한일들을 생각하며 더욱 애절함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 이제 유족들을 위로하사 가신 분의 뜻을 받들어 믿음으로 굳세게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주시어 영혼의 위로가 있게 하옵소서! 이 가정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8. 찬송
9. 축도 / 손들어 비옵기는 이 가정을 사랑하사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영원한 천국 집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하심과 슬픔을 당한 유족들에게 다시 만날 소망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위로하심이 사랑하는 ㅇㅇㅇ 집사님의 가정과 함께 슬픔을 나누는 모든 가정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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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를 준비하는 복음 전파의 자리 입관예배설교 / 로마서 6장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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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경에는 입관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입관예배를 드리지 않고 빠른 시간에 매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면서, 우리만의 유교문화와 전통에서 진행하던 발인절차와 연결되어 오늘날 우리는 발인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발인예배와 그 속에서 선포되는 발인예배설교를 통하여 믿지 않던 유가족들이 은혜와 감동을 받고 교회에 나오는 경우들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즉, 장례의 자리에서도 발인예배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인예배설교는, 믿는 가족들에게는 하늘의 위로를 담은 내용과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는 복음의 내용을 담은 설교로 준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발인예배설교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경 : 로마서 6장 23절
설교 : 죽음과 영원한 생명
오늘 우리는 OOO 성도님을 기억하며 입관예배가운데 있습니다. OOO 성도님은 우리 모두가 겪게 되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우리보다 먼저 겪으시고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것은 호흡이 멈추고 결국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는 관심 없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즐기고 마시고 놀자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죽음 이후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며 동시에 죽음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죽음이 단순히 호흡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나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서도 죽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푸른 나무와 같이 활발해 보이지만, 우리의 내면은 여전히 인생을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왜 이런 걱정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에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바로 영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죽음을 성경은 말합니다. 푸른 나무의 가지를 꺾으면 당장은 그대로 초록색으로 남아 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말라버립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세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여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는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이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길어봐야 80년인 것이지요. 육신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에게 반드시 찾아 옵니다.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란, 원래 가지에서 꺾였던 작은 나뭇잎이 바싹 말라버린 후 불에 던져져 불타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육신의 호흡이 끊어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데리고 가십니다. 자기 마음대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멸망의 장소, 지옥으로 보내십니다. 바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죽음이 죄로 인해 찾아오게 됩니다. 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길이 여러 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아니시면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입관예배설교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전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유족 여러분, 그리고 고인의 일가친척과 친구 여러분.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삶은 끝났지만 영원한 삶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되는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 영원한 삶을 누리든지 혹은 영원한 형벌 가운데 거하든지 결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 OOO 성도님께서 이 땅에서 입으셨던 육신을 그가 처음 태어난 흙으로 돌려 보내기 위한 입관의 자리에서 바른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부르실 분 앞에 서게 될 그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입관예배설교를 통하여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님을 전하고, 그 이후의 삶을 결정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열쇠가 되심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임관예배설교를 통해 선포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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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입관예배 순서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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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입관예배 순서와 설교
안녕하십니까? 모두들 알고 계시는 절차이지만 한 번 총정리해보겠습니다.
갑자기 喪을 당하면 모두가 얼마나 황망스럽고 넋이 나갈 정도로 슬픔에 사로잡힐까~~ 생각해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아직 친정부모님과 시모가 생존해 계시고 늘 편찮으시니 언제라도 당할 일이라 생각하면서 가끔은 상상도 해봅니다.
기독교식 장례식을 치르면 상주는 기타 여러가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일반 장례식에서도 상조에서 다 알아서 진행해주지만 교회에서 예식으로 치르는 장례예식은 남다른 평안함과 위로가 넘치기 마련입니다. 천국 환송예배라고도 불리우는 기독교 장례식은 은혜로움 마저 더하답니다.
https://newday21c.tistory.com/268 기독교 장례식 순서 -임종부터 하관까지
이제 입관부터 적겠습니다.
고인의 시체를 먼저 관에 안치하고 뚜껑을 덮고 못을 치되 상주가 원하면 예배 후에 못을 친다.
관 앞에 상주와 가족들과 교인들이 관을 향하여 앉고 주례자는 관머리 쪽이나 발치 쪽 편한 곳에 앉거나 서서 입관식을 주례한다.
1. 예식사 –
지금부터 고 (000)님의 입관 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고인의 시신에 옷을 입혀 관 뚜껑에 못을 박습니다.
이제 그분의 얼굴은 사진으로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이 얼마나 엄숙한 시간인줄 모릅니다.
2. 묵도 –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니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나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고후5:1-3) 아멘.
3. 기원 –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이옵니다.
또한 우리들은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지도 못한 죄인들이옵니다.
고인이 세상에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도 다하지 못하였사옵고
형제로서의 사랑도 그에게 다 베풀지 못하였음을 슬퍼하오며 하나님 앞에 참회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저희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제 고 000님의 시신을 입관하여 장례를 준비하고자 하오니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재 하셔서 모든 슬퍼하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고
믿음과 소망을 더욱 굳세게 하여 주옵소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 형제가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후사로 세워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로 하여금 고인의 귀한 진실 된 삶을 본받게 하시옵소서.
이 시간 성령께서 저희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사 하나님의 크신 경륜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찬송 / 608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
5. 기도 / 맡은이
6. 설교: (입관예배) 정** 집사 (20**. 12. 30 오전 9시)
히 9 :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이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는 영원한 여행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이생으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죽음의 단호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90:3)
라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히브리서 9:27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 만이 있을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고인은 하나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이 땅에서 다시는 뵙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가신 내세는 어떤 곳이며 그곳에서 어떤 삶을 누리게 되는지 또 우리는 이 땅에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합당한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돌이킬 수 없는 인생(욥 16:22)
1) 짧고 유한한 인생이기에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나의 날을 손넓이 만큼 되게”(시39:5)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또 야고보 사도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4:14)로 비유했으며,
베드로 사도는 “풀의 꽃”처럼 금방 시드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날은 베 틀의 북보다 빠르니”(욥7:6) 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은 짧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만큼 삶을 다시 돌이킬 기회가 이생의 내용 자체에서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문이 있음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욥16:22)고
욥이 고백했듯이 우리의 삶엔 종국이 있으며, 이 죽음이라는 문에 들어서면 인생으로 올 수 있는 기회는 영영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숙명이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이기에 항거할 수도 없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그 명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12:7) 고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회적이며 유한한 인생을 우리는 엄숙하게 대해야 합니다.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이기에 더욱 거룩하고 값진 것입니다.
하루하루 매사를 허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본분을 선용하여 썩지 않을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갈 6:7, 8 ; 엡5:15)
2.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림 (딤후 4:7-8)
우리 성도들은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위로와 소망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생은 돌이킬 수 없으나 영원한 장막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에서 먼저 가신 고인과 다시 만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고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 때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만남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옥문 어귀에서 두려움과 슬픔중에 이루어질 것이요,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는 기쁨과 환호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또한 먼저 가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올 것이라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부활의 날에, 주님 재림의 때에 고인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소망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살게 됨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계21:3) 하는 생활이 천국 생활이며, 이때 모든 성도들도 천군 천사와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다시 이별을 초래하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계21:4) 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고인이 먼저 천국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전하고 계심도 믿어야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인과 더불어 의와 영생의 면류관을 함께 받을 그날을 기다리며 그 영광스러운 날을 예비하는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3.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살전 4:13-18)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인의 죽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고인은 주님과 더불어 낙원에서 영생의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계14:13) 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잠14:32)이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와 사명으로부터
“평안히 놓아 주시는”(눅2:29) 것이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해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 중에 한 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이생을 떠난 고인은 다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생을 떠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으로 삼고 있는 저 천국에서 영원한 쉼을 얻는 축복을 얻고자 함임을 알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안식하고 있을 그 날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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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TV :: 입관예배설교 ( 영원한 고향집으로 )
입관예배설교 ( 영원한 고향집으로 )
말씀 : 고후5:1~4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셨던 귀한 육신을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 보내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육신을 관에 고이 모시기 위하여 모였다. 지금 사랑하는 임을 보내드리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이분을 만날 수도 없고,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없고, 섬길 수도 없다. 그래서 인간의 정으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쓰리고 안타깝다.
또한 물론 사랑하는 유족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살아오셨을 줄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했어도 우리가 온전할 수 없기에 언제나 후회는 남은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더 사랑하고 더 아끼고 더 효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더 마음이 쓰리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유족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육정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이러한 아픔과 안타까움과 쓰린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해도 그러나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는 끝내 낙심하거나 절망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의 헤어짐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잠시 떨어져 있다가 곧 다시 만난다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라. 우리 장막집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였다. 장막집은 우리 육신을 말한다. 왜 장막집인가? 영혼이 잠시 거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장막이 무언가? 임시 처소이다. 즉 우리 육신은 영혼의 임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장막집은 곧 무너진다. 그리고 나면 영혼은 영원한 나라로 가는데 거기가 바로 영원한 처소인 것이다.
그래서 요14장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가 예비되어 있다고 하셨고, 또 계21장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성도님은 지금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지금 그 영원한 본향집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축복을 누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 ○○○성도님을 영원한 본향집으로 먼저 보내드리고 물론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마음 한 켠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함이 있겠지만 그러나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집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랑하는 임은 무거운 짐을 다 벗어던지고 천국에서 안식하고 계심을 기억하며, 그리고 우리도 머잖아 그 분의 뒤를 따라가 영원한 천국에 만날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소망을 갖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다 하지 못한 사랑과 효도도 잊어버리고 오직 믿음 안에서 더욱 사랑하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인도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다가 언젠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날에 할렐루야 찬양하면서 감사와 감격과 기쁨 속에 사랑하는 임을 만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란다
[장례예배 설교말씀] 입관식 설교문-더욱 좋은 세계로 간다(요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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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장례예배 설교말씀 중에서 입관식 설교문 중에서 더욱 좋은 세계로 간다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천국이 끝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처럼 부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서 많은 부와 영화를 누리면서 살다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이 세상에 전념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삶은 달랐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거지처럼 살았지만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 삶을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인생입니다. 부자나 거지나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더 좋은 세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세를 준비하지 않은 인생은 죽음이 두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내세를 준비한 인생은 더 좋은 하나님 나라로 가기 때문에 기쁠 것입니다. 입관예배를 통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입관예배 설교문
더욱 좋은 세계로 간다(입관식)
요 14:1-2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세상에서 제일로 귀한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믿음 생활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의 길과 상벌이 다르기 때문이다. 믿는 성도는 이 세상을 떠날 대는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간다.
신자들은 죽음이 하나님의 초청이요. 환난 많은 세상의 도피요 본고향으로의 환원이며 영혼의 안식처이다. 모든 수고가 끝나는 것이다.
불 신자들은 내세를 모르니 공포감이 생기고 또한 죄의 해결을 보지 못하고 가는 길이니 두렵다. 처벌을 생각하니 슬프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알 것은?
1. 이 세상에서 죽었다고 불행하게 생각하지 말라 육체는 풀과 같고 꽃과 같은 것이다. 믿음 준비 못한 것이 두렵지 준비한 사람은 불행함이 아니다.
2. 죽음은 더욱 좋은 세계에 들어 감을 알자.
불의, 슬픔, 고통, 절망, 수고가 가득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거룩하고 복되고 자유롭고 하나님을 만나는 세계로 들어 감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믿음의 성도는 언제 죽든지 그 일생이 하나님의 완성품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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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장례이야기]#5 \”거룩하고 아름다운 입관 예배\”(2021/07/10) | 입관 예배 설교,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