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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의 의미 – 서강올빼미

바로 이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다. 바로 ‘언어’가 존재의 고향-집-그 존재를 초연히 내맡길 수 있는 곳을 마련해준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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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orum.owlofsogang.com

Date Published: 12/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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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kcefkorea

그럼에도 언어는 “말이 밖으로 언표된 것”이란 하이데거의 정의는 언어가 인간 개개인에게 고유한 존재 혹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의 집’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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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ltimes.kr

Date Published: 4/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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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다음블로그

하이데거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다. 언어를 어떤 장소로 규정한다면, 존재는 그 언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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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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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카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인천일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 일컬었고,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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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cheonilbo.com

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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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 - 통일뉴스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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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ongilnews.com

Date Published: 7/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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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시적세계인문사회레포트

하이데거 –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시적세계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언어가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았는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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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lreport.co.kr

Date Published: 1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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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한국교육신문

하이데거(Heegger)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즉, 언어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장소(Ort)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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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gyo.com

Date Published: 8/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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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언어 는 존재 의 집 이다

  • Author: 인문학 유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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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7.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l2Mx1jAhEs

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의 의미

#1

문체의 호오 문제, 그리고 2차서적내지 논문을 쓰는 입장 차에 달린 문제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하이데거적인 문체의 잔재 마저도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철학함이 문제적으로 여기는 제문제를 두고 학적인 논구를 통해 해결하는 것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할 때, 하이데거(한 명 더 꼽자면 레비나스)가 구사한 것과 같은 문체는 기술적인 모호함(ambiguity in description)과 이로 인한 오해의 여지를 늘 남기기 때문입니다.

학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 효율적이고 명확한 의사소통이 첫 번째 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주 기술적이고 어려운 현상학적 철학의 제문제를 두고 평범한 말로 핵심을 찌르는 이남인 교수님, Pf. Dermot Moran, Rudolf Bernet, Ullich Melle 등의 글이 그러한 이상의 모범적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구요. 아울러 Keyahn님께서 제기하신 번역의 문제는 동의합니다.

#2

2.1.

하이데거의 철학적 유산이 지향하는 바와 하이데거의 행적이 어느 정도까지 일치하는지 여부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분분합니다. 향후 비판적 검토를 수반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많은 자료들이 나오면 Keyahn님과 대척지에 있는 제 입장 사이에서 문헌학적 근거와 논증을 토대로 보다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할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저 역시 하이데거가 Sein und Zeit 을 위시하여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제기했다고 해서 그의 모든 철학적 유산들이 폐기되거나 방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하이데거가 1927-29년 사이 진행한 일련의 칸트 연구들은 대륙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다루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겠지요. (E.g., Heidegger Gesamtausgabe GA 3, GA 25). 철학사가로서의 하이데거의 업적 만큼은 설령 그가 나치로 확정되고 이외 모든 업적들이 부정되어야 할지라도 결코 부정하기 어려운 것들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의 진리론 그리고 이론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전후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주장을 놓고 볼 때, “하이데거적 정신”이 전체주의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2.2

근대초극론을 예시로 들면서 이를 전유한 학적 이론의 창출을 말씀하셨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말씀해주시지 않아 동의하기는 다소간 어렵습니다. 근대초극론의 결과물로 대동아공영론, 식민지 근대화론이 탄생했고, 게르만-독일민족주의는 나치즘과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태동시켰습니다. 이러한 이론들이 철학 사상계에서 검토되는 것은 대체로 이들 이론이 결론적 주장을 수립해나가는데 있어서 세우는 중간논리의 결점을 낱낱이 밝히고 이를 통해 전체 논증의 결함과 수립불가능성을 보임으로써 이를 계승하는 비슷한 류의 사상의 발호와 유행을 막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말씀하시는 재생산이 오늘날에도 이러한 류의 사상이 암암리에 발호하는 것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이견은 없습니다. 이외의 것이라면 무엇을 말씀하고 싶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풍악서당 남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와 세계

박 유 정(부산대)

[한글 요약]

이 글은 하이데거의 언어와 세계에 대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양식으로

서, 그 전체성에 있어서 보고자 한다. 참으로 말하는 것은 존재이며 세계이고 언어이다.

여기에서의 세계는 언어를 통한 비은폐성의 세계이며 존재의 양식이다. 그리고 재창조된

전체성의 이해이며 의미부여 작용이고 의미의 총체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먼저 {존

재와 시간}에서 드러난 언어의 문제를 논한다(Ⅱ장). 즉, “현존재의 존재틀 내부에서 언어

라고 하는 현상이 차지하는 존재론적인 ‘장소'(Ort)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언어에 접근

하였다. 이에 따라 {존재와 시간}에서 언어를 두 가지 방면, 즉 언어의 개시성과 언어의

은폐성으로 나누고, 전자에 대해 현존재의 개시성으로서의 말을 후자에 대해 현존재의 퇴

락으로서 빈말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존재론을 해석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하였다(Ⅳ장). 따라서

이 언어에 대한 종래의 탐구에 대해서 하이데거의 언어관을 그의 세계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개진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게오르게의 시 <말(das Wort)>을 다룬 글, [말]과 [언

어의 본질]을 가지고 언어와 세계에 대해 논해 보았다.

요컨대, 언어는 근원적으로 시이며, 이해의 양식이며, 존재의 세계화이며, 따라서 존재

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다. 언어를 어떤 장소로 규정한다면, 존재는 그 언어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wohnen)’라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언어를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이라고 불렀죠.

이 말은 하이데거의 ‘숲길(Holzwege, 신상희 역. 나남 출판사, 2008년)’에 나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다. 언어는 존재가 머무는 곳이며 세계와 사물을 인식하는 통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을 넘어, 인간의 사유를 지배하고 복속시킨다. 인간이 언어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부리는 것이다.

‘일감 몰아주기’와 ‘납품단가 후려치기’만큼 현상을 왜곡하는 거친 말도 없다. 언어의 마술 앞에 재벌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악의 화신’으로 구조화된다. 거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개인은 ‘인지부조화’에 빠지며, 실패라는 ‘결과’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지’를 바꾸게 된다. 내가 일감을 따내지 못한 것은 누군가에게 일감을 몰아줬기 때문이고, 납품단가가 낮은 것은 부품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부당하게 가격을 후려쳤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여기에 ‘경제민주화’라는 요술방망이가 절묘하게 중첩됐다. 진위를 따질 겨를도 없이 “크고 강한 것은 부당하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정책 사고를 지배했다.

거친 용어는 오도된 정책을 낳는다. ‘경제민주화 1호 법안’으로 최근 국회를 통과한 납품단가 부당인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키로 한 ‘하도급법 개정안’이 그 전형이다. 후려치기, 비틀기 등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논리적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징벌적 배상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가해행위가 ‘의도적’이고 그런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며 그런 가해행위를 적발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하도급거래에서의 납품단가 인하는 의도적 가해행위도 아니고 숨기거나 은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납품 가격을 둘러싼 이익 충돌은 일방이 전적으로 피해를 보는 가해행위와는 다르다. 사적 자치 영역인 협상에 ‘정당과 부당’의 잣대를 대는 것 자체가 무리다.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일감 몰아주기’를 중립적으로 표현하면 계열사 간 ‘내부거래’이다. 기업이 생산을 ‘사업부제’로 할 것인가 ‘계열사 조직’으로 할 것인가는 기업이 판단할 몫이다. 따라서 내부거래를 백안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현재 공정거래법은 특정 계열사에 유·불리한 거래를 ‘불공정행위’로 간주해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특정 요건을 충족하는 거래만을 ‘예외적’으로 인정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합리의 원칙’에서 벗어나 ‘과잉규제’로 치닫는 것은 ‘일감 몰아주기’라는 언어의 분노를 온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장지배적 기업’과 ‘시장점유율’도 잘못된 표현이다. 시장점유율은 소비자의 선택을 나타낸 것이기에 ‘소비자선택률’이 맞는 개념이다. 시장지배적 지위도 과장된 것이다. 시장지배는 가공의 개념이다. 정치권력처럼 임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승자가 독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조정되는 장(場)일 뿐 그 자체가 ‘행위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시장을 의인화한 “시장의 탐욕과 시장실패 그리고 시장권력”은 성립될 수 없는 ‘언어의 허구’다. 시장생태계는 가치사슬을 통해 다양한 경제주체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르다.

정제되지 않은 거친 용어 그리고 시장의 본질과 그 운영원리에 반하는 용어의 무분별한 사용은 부지불식간에 시장경제의 기반을 허문다. 이런 ‘어둠의 용어’는 국가의 시장개입을 불러들일 뿐이다. 경제민주화도 실은 국가의 시장개입을 위한 명분에 다름 아니다. 시장의 실패와 탐욕을 치유하고 ‘적자생존’이 아닌 ‘선자(善者)생존’을 실현하겠단다. 강자의 것을 덜어내 약자에게 옮겨주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정’을 표방하지만 실제는 인기영합이다. 이상적(理想的) 질서를 실현하기에 인간의 이성은 늘 제한돼 있고, ‘비시장적’ 정치적 타협이 도덕일 수는 없다.

분노와 어둠의 용어로 더 이상 국가 개입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가장한 경제민주화는 ‘국가개입주의에 지대추구행위’가 더해진 최악의 조합이 될 개연성이 높다. 시장을 신뢰해야 하는 역설적인 이유는 시장이 차라리 냉혹하기 때문이다.

2013년 5월6일〈한국경제〉 ‘다산칼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

조동근 명지대 교수

※언론닷컴(http://unron.com/)에 방문하시면 더 많은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의 칼럼과 원문정보 및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문명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안해낸 전략이며 기술적 장치인 동시에 관념적 구조물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문명의 개발과 발달의 역사와 일치하며, 인간의 삶의 양식이 침팬지의 삶의 양식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던 원시적 구석기시대부터, 거시적으로 우주를 정복하고 미시적으로 생명과 미시적 존재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것을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오늘날의 첨단기술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문명을 줄곧 발전시켜왔다.

문명은 언어의 산물이다. 언어에 의해 관념과 ‘의미’의 세계 즉 문화가 존재하게 되고, 그러한 세계에서 여러 가지 존재와 사건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나타나 인식되어 서술의 대상이 되고, 그러한 공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놓여있는 객관적 상황을 통제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그러한 것들을 기초로 어떤 행위를 이성적으로 선택하면서 삶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인간이 지각하고, 소유하는 그 자신의 의식을 포함한 모든 것은 유일하게 인간이 자신의 종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인위적 수단으로서의 언어 즉 기호체계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끝난다.

언어에 의해 물리적 자연은 문화로, 물리적 현상은 ‘의미’로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경우 언어 밖에서는 그의 몸이나 마음, 그의 외적이나 내적 체계는 다 같이 아무 의미, 가치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언어에 의해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 지각, 인식,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의 모습을 반성적으로 관찰하고, 사유를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성적으로 깊이 구성하고, 행동을 논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 이전의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 이전의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곧 사유와 문명의 바탕이며, 그 구조물 자체이다. 문명이 인간 고유한 세계를 지칭한자면 언어는 문명의 원천이며 본질이다. 언어 이전의 인간, 언어 이전의 문명은 다 같이 서로 모순된 개념이다. 언어에 의해 비로소 존재가 인식되고 자연과 인간관계가 맺어지고 인간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가 존재를 인간의 의식에서 드러내어, 인식하고, 서술하여 설명하는 방법에는 과학적 언어에 의한 객관적 방법이 있고, 시적 언어에 의한 주관적 방법이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과학적 서술과 이론으로서의 글쓰기와 시적 서술과 문학적 작품으로서의 글쓰기로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박이문 선생의 <문명과 언어> 가운데서

[힐링카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미리 분더슐레정신분석심리상담센터 대표협성대 초빙교수

현대문명의 발달로 이전과는 다른 편리함을 누리며 산다. 그러나 편리하게 이용하는 이 문명들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탐구하는 일을 즐기는 일, 즉 비판적 사고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더욱이 사유하는 것을 기피하고 가시적인 현상들을 중요시 여기며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말이다. 무수히 많은 정보와 지식들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것을 표면적으로만 바라볼 뿐,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해 내지 못하고 그것들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대량의 정보성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오히려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용당하는 삶을 살아 갈 수도 있다.

현대문명 속에 대량으로 유포되어 있는 정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소통의 주된 도구인 언어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 일컬었고,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원활하면 그 사고와 행동이 원활해지고, 언어가 막히면 사고도 행동도 막히게 된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창조하고, 사고의 결과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처럼 사고의 내용이 언어로 표현되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발전하게 된다.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고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개방과 소통이라는 미명 아래 지속적인 공론의 장소들을 만들어 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진정한 대화의 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언어파괴 현상이 심각하다. 스마트폰, PC통신,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들을 통한 언어파괴 현상은 세대 간의 의사소통을 단절시키고, 사람들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언어는 인류를 다른 동물과 구별해 주는 특징 중 하나로서 생각하고 말을 하며 이성적 사고를 하게 한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을 표현하여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소리나 문자 따위의 수단이다. 또한 언어는 개인적인 성격과 인격을 표출한다. 언어의 특성으로는 언어 단어가 필연적이지 않고 임의적이라는 자의성, 상황에 맞춰 변화하는 창조성, 의미와 형태가 결합되어 체계를 갖는 체계성, 인간의 사회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성과 그 외에도 유연성, 가변성, 추상성 등을 가지며 의사전달의 매개체가 되어 사회협동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는 소리라는 기본요소를 가지며 규칙에 따라 뜻과 소리가 결합한다. 이 조합에 문법적인 통사구조를 가지게 되면서 의미를 내포한다. 언어는 세계와 연결되어 우리가 아는 세계를 보여준다. 언어를 참되게 안다는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고, 그 언어는 때로 힘과 권력이 되기도 한다. 언어는 여러 상황과 규칙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갖지만 다수가 사용하기에 규칙과 나름의 질서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어휘의 폐기, 언어의 축약, 조작과 축소, 왜곡은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파괴할 수도 있다. 인간은 바르고 참되게 생각하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인류는 경험을 언어로 표현한 지식의 축적에 의해 문화를 발전시켜 왔고, 그러한 언어를 소중하게 가꾸고 전승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 그리고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침묵은 금이다’, ‘구화지문'(口禍之門),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등 우리의 옛 조상들은 말에 관한 여러 속담과 글들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경고의 메시지로 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세상이 더러워지기도 하지만 무책임한 말과 언어의 남발, 아첨과 중상모략, 공갈협박, 남을 흉보고 헐뜯는 말들로도 점차 오염되고 병들고 있다. 매스컴과 같은 대중매체 등을 통해 퍼지는 언어의 왜곡과 조작이 병리학적인 인간화를 조장한다.

말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노출시킨다. 먼저 말하는 기술보다 말하려는 사람의 인격과 대인관계를 중요시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 바가 언젠가 말이 되어 나오기 때문에 진실함과 사랑으로 타인을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대화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성숙한 사람의 훈련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말과 행실의 일치에서 시작된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겐 그 어느 때보다 더 인정과 포용의 말, 희망과 용기의 말, 지혜의 말, 친절과 동정의 말, 감사의 말, 격려와 칭찬의 말, 사랑의 말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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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고석근 / 시인

필자의 말 안녕하세요?

저는 아득히 먼 석기시대의 원시부족사회를 꿈꿉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천지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세상을 꿈꿉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그런 세상을 살아왔기에

지금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천지자연을 황폐화시키는 세상은 오래 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지금의 고해(苦海)를 견딜 수 힘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견디는 힘으로 ‘詩視한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원래 시인인 ‘원시인’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희망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하이데거)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지난 주말에 광화문에 갔다.

여기저기 다니다가 광화문 광장에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의미하는 304개의 구명조끼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구명조끼 아래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우리들은 지나가며 속으로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로 와서 ‘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겐 그들은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겐 ‘세월호의 아픔’이 없다.

‘하나의 몸짓들’은 단지 성가신 그 무엇일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며 소위 ‘지도급 인사들’에게 분노한다.

그들은 왜 그리도 염치가 없을까?

그들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많이 불러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눈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몸짓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속으로 되뇔 것이다.

‘몸짓(개돼지)들이 왜 저리지?’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그들이 ‘우리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주말마다 꽃을 피운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꽃’이 될 때까지.

요즘 ‘여혐(女嫌)’, ‘남혐(南嫌)’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은 언어의 문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이데거(Heidegger)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즉, 언어는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장소(Ort)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 존재는 그 언어 안에서 거주(Wohnen)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언어 사용은 그 존재의 사유방식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한자 문화를 받아들인 우리의 여자에 대한 사유방식은 어떨까? 딸(女)과 아들(子), 여자(女)와 남자(男)의 의미를 살펴보자.

여자는 집에서 빨래나 하는 존재다?

한자에는 아들(子)을 의미하는 단어는 있지만 ‘딸’을 의미하는 단어는 없다. 계집 녀(女)를 ‘딸’이라는 뜻으로 혼용해서 쓰고 있을 뿐이다. 이는 ‘딸’의 위치가 ‘아들’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아들(子), 남자(男)처럼 개념화되어 쓰이지 못한 것이다. 이처럼 한자 문화에서 여자(女)는 아들(子)이나 남자(男)보다 열등한 지위를 나타내는 글자이다. 오늘날 남녀평등사회에 맞지 않는 단어임이 분명하다.

여자(女)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보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림 형태의 한문인 소전(小篆) 속의 ‘女’의 이미지는 ‘’이다. 여자가 두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다. 활동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정적인 모습이며,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을 담고 있다.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자어 중 여자(女)와 결합한 단어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간사할 간(奸), 시기할 질(嫉), 질투할 투(妬), 싫어할 혐(嫌), 요망할 요(妖), 망령될 망(妄), 기생 기(妓),?아첨할 미(媚), 계집종 비(婢), 간음할 간(姦), 종 노(奴) 등이 그러하다. 물론 좋을 호(好), 오묘할 묘(妙), 편안할 타(妥) 등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 단어도 있지만 그보다는 부정적 의미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다.

반면 아들(子)과 남자(男)는 ‘아들’의 의미, 공자(孔子)·맹자(孟子) 등의 ‘존경하는 선생님’이라는 의미,? 사람의 띠를 상징하는 12간지(干支)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쥐’로써의 의미가 있다. 즉, 아들(子)은 ‘으뜸이고 존경받는 존재’임이 드러나 있다. 효(孝)에도 아들(子)이 포함되어 있고, 가르칠 교(敎 : 孝 + )에도 아들(子)이 들어가 있다. 남자(男) 역시 밭(田)과 힘(力)의 결합으로 밭에서 힘쓰는 역동적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결혼? 아니죠. 혼인? 맞습니다”

결혼이라는 단어는 남존여비 사상의 결정체이다. 결혼(結婚)은 아내를 얻어(婚) 묶는다(結)는 의미로 남자가 여성을 취하는 남성중심의 단어이다. 혼(婚)과 동의어이며, 일본식 표기이다. 여자와 남자가 동등해질 수 있는 방법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처럼 ‘남자가 장가가고(男婚女稼), 여자가 시집가는 것(男婚女姻)’이어야 한다. 남자는 혼(婚)하고, 여자는 인(姻)하는 것이다. 서로 ‘가는 것’이다.

결혼이 신부와 신부 가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단어라면, 혼인은 양쪽 집안(兩家)의 (사돈) 맺음이다. 맺음은 어느 한쪽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인은 남녀 간의 합의(合意)이다. 즉, 뜻(意)이 맞아야(合) 한다는 것이다. 음양의 관계에서 남과 여는 동등한 관계이다. 즉,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은 양기(陽)와 음기(陰)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陽)만 있고 땅(陰)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가치가 없다. 오히려 음(陰)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는 기초(Platform)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女)가 부수로 사용된 처음 시(始)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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